문을 꼭꼭 걸어 잠그고 이틀을 보내고 있습니다. 예약문의 전화가 와도
걱정, 안 와도 신경이 쓰이는 이유를 아시나요? 포천 누나가 15년 정도
든 보험을 해약하고 26,000원짜리 실비보험을 들어준다고 해서 설계사
전화를 받았는데 일처리가 영 맘에 들지 않아서 전화를 안 받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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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M9시면 한밤중인데 보험 약관 답 달라는 전화입니다. 내가 미쳐 죽어.
잠이 확 깼어요. 투덜투덜 러닝머신에 올라 20분을 구시렁거리다가
내려왔고 사워대신 밖으로 나갔어요. 와 따, 장대비가 제대로 옵니다.
꼬락서니가 오늘도 영업을 글러먹었으니 영화나 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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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봉관을 찾은 것은 1년 만입니다. 집 앞에 영화관이 있었는데 코로나
정국을 애처롭게 넘기고 개봉작을 모두 상영하더이다. ‘헤어질 결심’을
티케팅 해 팝콘&아이스커피를 사들고 10층 엘리베이터를 올라탔어요.
볼 영화가 수두룩했어요. 마녀-범죄도시2-탑 건-헤어질 결심 중에서
‘헤어질 결심(Decision To Leave)’을 선택한 것은 순전히 타이틀 때문
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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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에서 박 찬욱이 감독상을 받았고 송 강호가 다른 영화(브로커)로
남우주연상을 받았다지요. 기생충이후 미나리-브로커-헤어질 결심까지
펄펄 나는 한국영화는 신 르네상스시대를 맞고 있습니다. 우리가 아는
것처럼 칸 영화제는 베를린 영화제, 베니스 영화제와 함께 세계 3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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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제 중 하나로 그 명성이 아주 높지요. 감독상을 수상한 작품
‘헤어질 결심’은 제목부터가 의미심장합니다. 사람들 사이에서 특히,
남녀 관계의 만남은 대부분 ‘관심’에서 시작되어 ‘열정’으로 불을 피우다가
‘사랑’ 아니면 ‘이별’의 공식이지요. 그래서 애증의 코스가 다반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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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헤어질 결심(Decision To Leave)’은 남녀의 통속적 만남이 아닌,
그 모멘트는 산에서 벌어진 한 남자의 변사 사건입니다. 수사를 맡게
된 형사 ‘해준’(박해일)과 사망한 남자의 아내 ‘서래’(탕웨이) 사이에서
펼쳐 지는 팽팽한 긴장과 의심의 한편으로 서로에게 빤한 호기심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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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외의 섬세함 속에서 켜켜이 쌓이는 남녀의 감정을 지켜보노라면
관객은 의아해합니다. ‘헤어짐’이 수평적, 반복적이라면 ‘떠남’은
수직적 일회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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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살인 사건이 좀 뜸하네. 요새 날씨가 좋아서 그런가, 심심해”
살인과 폭력이 있어야 기쁜 남자 박해일은 살인사건을 즐기는 형사입니다.
어느날 산악 유투버 기 도수가 절벽에서 떨어져 죽은 사건이 발생합니다.
수사 중 사망자의 아내 서래(탕웨이)를 만나게 되고 남편의 죽음에 담담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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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가 의심스럽게 보입니다. 사망자는 누가 봐도 딸처럼 보이는 젊고
예쁜 아내를 두었고, 아내는 남편의 죽음이 슬프지 않아서 이상하다는
것 같습니다. 슬픔이 스며드는 차이는 사람마다 다를 수 있습니다.
형사가 용의자에게 호의적인 것은 사적인 감정이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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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저라도 탕웨이를 일로 만났다면 형사처럼 호의를 베풀었을 것입니다.
탕웨이는 ‘색계‘를 통해 데뷔를 했고 그 색 계를 저는 5번 이상 보았어요.
그녀가1979년생이니까 우리나이로 44세입니다. ‘색계‘ 때가 29살이었고
'만추(33세)' 를 찍은 후 정 윤희 급 백치美나 섹시함이 더 농익었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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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추(2011) 감독 김 태용이 2014년에 업어가서(33세) 슬하에 '썸머'라는
딸을 두고 있다고 합니다. 기 도수(죽은 자)의 손톱에서 탕웨이의 DNA가
나왔으나 알리바이가 확실해서 살인의 증거가 못 됩니다. 하지만 어머니의
살인 용의자인 그녀를 수사선장에 놓고 잠복근무를 합니다. 말이 잠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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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무지 매일 밤 망원경으로 엿보는 사생활 침해이지요. 서래는 한국어가
서툴지만 사고가 자유롭고 문장은 정확하고 깔끔했어요. 박 형사는 한국
어가 서툰 그녀를 위해 부검, 방수 따위의 단어를 쉽게 설명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깐엔 풀어서 말하려고 했는데 쉽지 않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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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남편의 폭력에 시달리면서도 추방될까봐 폭력남편을 신고도
하지 못한 채 살아왔고 낮에는 간병인으로 일하고 매일 담배 한 개 피와
아이스크림으로 저녁을 때우는 가련한 인생입니다. 어느 날 기도수의
유서가 발견 됩니다. 이것은 타살이 아닌 자살을 의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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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남자대 여자로 자유연애가 가능합니다. “슬픔이 파도처럼 밀려오는
사람도 있지만 잉크가 물에 떨어지듯 서서히 퍼지는 사람도 있어“
엔딩에서 보여준 미장센은 휴가를 이미 다녀온 듯 환상적이었습니다.
개인적으로 大북 씬(scene)에서 지금 막 그린 수채화처럼 단청이 흘러
내리는 듯 느껴져 하마터면 왕 붓으로 닦을 뻔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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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를 몰고 표시해둔 장소로 갔고 양철통으로 모래를 파 무덤을 만들고
그곳에 들어간 탕웨이, 밀물이 무덤을 침식하면서 완도 아우디가 오버랩
되었고 푸른 파도와 노을을 품은 바다, 거기에 죽음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가는 여인의 모습은 치명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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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형사는 위치추적을 이용해 그녀를 찾았지만 그녀는 없습니다.
“당신이 사랑한다고 말했을 때 당신의 사랑이 끝났고, 당신의 사랑이
끝났다고 말했을 때 내 사랑이 시작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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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은 갔습니다.” 라고 절규하는 시인에게 ‘임’은 헤어짐이 아니라 야속
하게도 떠남입니다. 50대들에게 전반의 삶을 지휘하던 직장은 애증의
‘임’이었습니다. 인생의 후반전을 준비하는 하프타임에 가장 먼저 할 것은
바로 ‘헤어질 결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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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와의 헤어짐, ‘대우’와의 헤어짐, 세상의 ‘평판’들과 헤어질 결심을
해야 합니다. 직장을 은퇴하면 가장 큰 체감은 ‘영향력’입니다. 그것은
마치 “우리네 인생 반 고비에 올바른 길을 잃고서, 나는 어두운 숲속에
있었다.”라고 독백하는 단테 알리기에리의 심정과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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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인생 50대의 시기는 반등과 모험의 시기이기도 합니다.
브루킹스 연구소 작가인 조너선 라우시는 그의 저서 ‘인생은 왜 50부터
반등하는가’에서 인생의 행복과 만족도가 중년 이후 U 자 형태로 반등
하는 데 주목했어요. 그는 긍정심리학자들이 내세우는 행복 공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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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S+C+V(H:지속적인 행복 수준, S:이미 설정된 행복 범위, C:삶의
방향, V:자의로 다스릴 수 있는 요소)에다 결정적으로 빠진 항목 T, 시간을
추가하여 H=S+C+V+T로 제시합니다. 여태껏 우리는 시간이라는 괴물에
늘 쫓겨 다녔어요. 출근 시간, 마감 시간, 등교 시간, 회의 시간 등등은 삶을
규정하는 우월적 존재, 그래서 늘 Dead-line이자 D-Day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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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의미에서 인생은 총량 법칙에 따라 움직이는 공평한 게임입니다.
손목에 번뜩이는 ‘시계’는 갖고 있지 않지만, 마음의 여유와 느림의 미학이
가져다주는 ‘시간’이라는 보물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항구를 떠나가는
배가 다시 포구로 돌아오듯 인생의 길목에서 나는 가슴 아픈 ‘Leave’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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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사 대신 ‘Return’을 쓰고 싶어요. 이 땅에 여린 생명으로 왔지만 누구나
늙은 주검이 되어 돌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헤어질 결심과 아울러 이제는
‘돌아갈 준비를(Preparation to Return)’ 해야 합니다. 체크인하고서 재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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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게 휴가를 보내다 체크아웃 할 즈음에는 머물렀던 곳을 정리하는
것처럼 더 낫게, 더 낮게, 더 낱개로 돌아가야 합니다. ‘검이불루 화이불치’
검소하되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되 사치스럽지 않은 초월적인 삶,
나는 오늘도 지우개가 되어 ‘헤어질 결심'을 합니다. 후~
2022.6.30.THU.악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