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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광주대교구 꾸르실리스따 원문보기 글쓴이: 이선정스테파노
2025년 7월 14일 월요일
[(녹) 연중 제15주간 월요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오늘 전례
[백] 성 가밀로 데 렐리스 사제
말씀의 초대
이집트에서 이스라엘 자손이 번성하는 것을 두려워한 파라오는, 히브리인들에게서 태어나는 아들은 모두 강에 던져 버리라고 명령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고 하신다. 예수님을 따르려는 사람은 집안 식구보다 그분을 더 사랑해야 하기 때문이다(복음).
제1독서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을 지혜롭게 다루어야 할 것이다. 그러지 않으면 그들이 더욱 번성할 것이다.>
▥ 탈출기의 말씀입니다. 1,8-14.22
그 무렵 8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임금이 이집트에 군림하게 되었다.
9 그가 자기 백성에게 말하였다.
“보아라, 이스라엘 백성이 우리보다 더 많고 강해졌다.
10 그러니 우리는 그들을 지혜롭게 다루어야 할 것이다.
그러지 않으면 그들이 더욱 번성할 것이고,
전쟁이라도 일어나면, 그들은 우리 원수들 편에 붙어
우리에게 맞서 싸우다 이 땅에서 떠나가 버릴 것이다.”
11 그래서 이집트인들은 강제 노동으로
그들을 억압하려고 그들 위에 부역 감독들을 세웠다.
그렇게 하여 이스라엘 백성은 파라오의 양식을 저장하는 성읍,
곧 피톰과 라메세스를 짓게 되었다.
12 그러나 그들은 억압을 받을수록 더욱 번성하고 더욱 널리 퍼져 나갔다.
이집트인들은 이스라엘 자손들을 두려워하게 되었다.
13 그리하여 이집트인들은 이스라엘 자손들을 더욱 혹독하게 부렸다.
14 진흙을 이겨 벽돌을 만드는 고된 일과 온갖 들일 등,
모든 일을 혹독하게 시켜 그들의 삶을 쓰디쓰게 만들었다.
22 마침내 파라오가 온 백성에게 명령하였다.
“히브리인들에게서 태어나는 아들은 모두 강에 던져 버리고,
딸은 모두 살려 두어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나는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0,34─11,1
그때에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말씀하셨다.
34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35 나는 아들이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갈라서게 하려고 왔다.
36 집안 식구가 바로 원수가 된다.
37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38 또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39 제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40 너희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이고,
나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41 예언자를 예언자라서 받아들이는 이는 예언자가 받는 상을 받을 것이고,
의인을 의인이라서 받아들이는 이는 의인이 받는 상을 받을 것이다.
42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그가 제자라서 시원한 물 한 잔이라도 마시게 하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
11,1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에게 다 지시하시고 나서,
유다인들의 여러 고을에서 가르치시고 복음을 선포하시려고
그곳에서 떠나가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처럼 우리의 예상을 빗나가는 말씀을 접하면 당황스러울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공생활 내내 자주 평화에 대하여 말씀하셨는데, 오늘 복음에서는 오히려 그분께서 평화가 아닌 칼을 주러 왔으며 심지어 그 칼이 가족까지도 갈라놓는 도구가 되리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평화는 하느님의 선물이고 충만한 삶을 의미하며 진실을 감추고 겉으로만 분쟁이 없는 상태의 세상적 평화와는 다릅니다. 참된 평화는 악과 공존할 수 없습니다. 예언자들이나 성인들, 그리고 누구보다도 예수님께서는 사회악을 거침없이 드러내십니다.
이런 예수님의 모습에 그분을 단죄하는 무리가 생기는가 하면 그분께서 참예언자이시기에 기뻐하는 무리도 생깁니다. 그분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둘로 갈라집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칼은 폭력의 상징이 아니라 분리의 상징으로서 무엇이 참되고 구원인지, 무엇이 거짓이고 파멸인지를 구별해 줍니다. 예수님과 그분의 말씀은 사람의 마음에 스며들어 생명을 주는 생각과 인간을 해치는 생각을 분별하게 합니다. 모호한 태도를 지니지 않게 하고 언제나 결단을 내리게 합니다. 듣는 이가 하느님을 선택하고 하느님을 거스르는 모든 것에서 멀어지게 합니다. ‘사람들에게서 사랑받고 싶은 마음’이라는 숨은 동기 때문에, 결단을 요구하는 하느님 말씀을 겉으로만 듣고 마음으로는 받아들이지 않는 거짓 평화 속에서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나는 공동체 안에서 거짓 평화를 누리고 있는지, 아니면 참평화를 위하여 분열과 반대도 기꺼이 떠맡는 그분의 제자로 살고 있는지 깨달을 수 있도록 은총을 청합시다.(김태훈 리푸죠 신부)
자비와 정의는 늘 함께 가야 합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이 시대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만 강조하다보니, 우리 인간 측의 악행과 죄악에 대한 그분 심판에 대한 가르침이 줄어들고 있다는 말을 듣고 개인적으로 섬뜩했습니다. 아마도 제가 죄가 많아 그런지 모르겠습니다. 죄가 많다 보니 심판보다는 자비와 사랑을 더 갈구하고 강조하는 편인 듯 합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에 대한 믿음도 중요하지만, 우리의 미성숙과 그릇된 선택으로 인해 벌어진 과오와 악행에 대한 진정성 있는 성찰과 참회도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합니다. 자비와 정의는 늘 함께 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구약 시대 이스라엘 백성은 여러 차례에 걸쳐 공동체 전체가 악으로 기울고 타락한 경험이 있었습니다. 그에 대한 예언자들의 날 선 비판은 너무 강렬해 귀를 막고 싶을 정도였습니다.
미카 예언자는 애통해 하면서 이스라엘 백성을 타락을 이렇게 묘사하며 징벌과 심판의 때가 다가왔음을 선포했습니다.
“경건한 이는 이 땅에서 사라지고 사람들 가운데 올곧은 이는 하나도 없구나. 모두 남의 피를 흘리려고 숨어 기다리고 저마다 제 형제를 그물로 잡는다. 그들의 손은 악을 저지르는데 이력이 나 있고 관리와 판관은 뇌물을 달라하며 권력자는 제가 원하는 것만 지시한다. 이처럼 그들은 모든 것을 그르친다. 그들의 파수꾼들의 날, 재앙의 날이 다가왔다.”(미카 7,2-4)
오늘 복음 말씀을 통해 예수님께서도 심판과 결단, 구원에 대해 가르치십니다. 말씀 한 마디 한 마디가 지극히 종말론적입니다. 예수님의 출현은 미카 예언자가 선포한 내용이 종결되는 순간입니다. 그분의 오심으로 인해 하느님의 심판은 결단의 순간을 맞이했습니다.
예수님의 존재로 인해 하느님 나라는 이미 시작된 것입니다. 그 하느님 나라는 마치 칼처럼 갈라 놓는 형국으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이는 죄와 악을 구분하고, 한 인간 앞에 놓여있는 결단의 칼을 배척하는 사람과 믿는 사람으로 갈라놓은 심판의 칼입니다.
심판과 구원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은 히브리서 말씀처럼 쌍날칼보다 더 날카롭습니다. 말씀은 골수까지 꿰뚫고 들어가, 내면에 있는 그릇된 욕망과 참된 하느님께 대한 경외심을 갈라놓고 있습니다.
또한 말씀은 가정 안으로도 파고들어가 부모와 자식, 며느리와 시어머니를 서로 갈라놓을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경계는 하느님을 선택할 것인가, 아니면 하느님을 부차적인 대상에 둘 것인가 결단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결단으로 인해 가까운 사람과 이별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말씀의 근본 취지가 가족 구성원들을 적대적인 대상으로 인식하고, 그들에게 무자비한 태도를 취해도 된다는 의미는 전혀 아닙니다.
오늘 말씀의 보다 중요한 메시지는 세상 만물에 앞서 하느님께 우선권을 두라는 말씀입니다. 언제 도래할지 모르는 그분의 오심을 기다리며 그분과 그분 말씀을 최우선 순위를 매기라는 가르침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지난 6월 13일, 이스라엘은 이란의 수도 테헤란과 핵 관련 주요 시설에 폭격을 가했습니다. 국경을 맞대고 있지도 않은 이스라엘과 이란 사이의 2,000킬로미터 넘는 거리를 뛰어넘은 공격이었습니다. 표면적인 이유는 “이란이 핵무기를 개발하려 한다는 의심” 때문이었습니다. 이란은 당연히 주권 국가로서 이스라엘에 반격했습니다. 그 결과 호르무즈 해협 봉쇄 경고와 유가 급등으로 글로벌 인플레이션 압력이 증대되고, 주식·환율 등 금융 시장 전반에 불안 요소로 작용 중입니다. 미국과 이란의 핵 협상이 중단되었으며, IAEA를 통한 검사도 불투명해졌습니다. 유럽 각국은 제재 재가동에 어려움을 겪는 상황입니다. 이스라엘은 이란의 핵 시설과 미사일 역량을 타격했지만, 이란이 지하 시설을 확장하며 핵 개발을 재가속할 가능성도 있어, 향후 긴장과 군비 경쟁이 예상됩니다. 한 나라의 생존이 걸린 사안이라고 해도,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선택은 과연 하느님 보시기에 합당한 것일까요? 이스라엘의 공격이 과연 정의로운가?
이는 단지 국제 정치적 이슈가 아니라, 우리 신앙인의 성찰과도 깊이 맞닿아 있습니다. 성경에는 이와 유사한 구조가 반복됩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는 이집트에 살고 있던 히브리인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야곱과 요셉의 후손인 이스라엘 백성은 이집트에서 오랜 시간 머물며 번성했습니다. 그러나 이집트의 파라오는 히브리인의 숫자가 늘어나는 것을 보며 불안을 느꼈습니다. “만약 전쟁이 나면, 저들이 적의 편에 설지도 몰라.” 이 단순한 불안, 의심이 잔혹한 억압으로 이어졌습니다. 강제 노역, 신생아 살해, 이민자에 대한 두려움에서 비롯된 국가 폭력입니다. 파라오의 두려움은 신중함이 아니라, 불의였습니다. 오늘날 이스라엘이 이란을 향해 던진 폭탄 역시, 어쩌면 이와 닮았는지도 모릅니다. 분명히 이란의 핵 개발은 전 세계가 우려해야 할 문제입니다. 그러나 상대를 ‘잠재적 위협’으로 간주하며 선제 타격을 가하는 선택이 언제나 정의롭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이 낳는 결과는 죄 없는 민간인의 죽음과 보복의 악순환, 그리고 불신의 심화뿐입니다.
이스라엘은 과거 바빌론의 침공으로 인해 나라를 잃고 유배의 삶을 살았습니다. 당시 백성들은 그 고통의 이유를 돌아보며 깨달았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않고, 우상을 섬긴 결과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성전을 짓기보다, 하느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공동체를 새로 세웠습니다. 신앙의 본질이 힘이나 권력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과 정의, 자비와 순종에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런 이스라엘을 약속의 땅으로 다시 돌려보낸 이는 다름 아닌 페르시아의 왕 고레스였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오늘날 이스라엘과 충돌하고 있는 이란이 바로 고대 페르시아의 후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고레스를 하느님의 메시아라고까지 불렀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하느님의 계획 안에서 억압받는 백성을 자유롭게 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역사의 반전은 우리에게 “반면교사(反面敎師)”가 됩니다. 때로는 실패와 고통 속에서도 우리는 하느님의 뜻을 더 명확히 보게 됩니다. 불의한 선택의 결과를 통해 정의가 무엇인지 더 깊이 깨닫게 됩니다.
지금 이스라엘은, 과거 억압받던 자신들의 역사를 잊은 것처럼 보입니다. 억압받던 자가 억압하는 자가 되고, 구원을 받던 자가 심판을 하는 자로 바뀌는 모습은, 신앙의 본질을 다시 돌아보게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나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우리의 생명은 주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는 복수나 불안이 아니라, 사랑과 정의, 진리에 대한 확신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또한 작은 이 하나에게 물 한 잔을 주는 행위조차 하늘의 상으로 이어진다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기억합니다. 파괴와 전쟁이 아니라, 이해와 용서가 하느님 나라를 이끄는 길입니다. 국제 정세와 정치가 혼란한 이때, 우리는 성서의 거울을 통해 현재를 반추하고, 정의로운 길을 선택하는 지혜를 청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 시대의 파라오가 누구인지, 그리고 나는 어떤 길을 따르고 있는지를 성찰하며, 주님께서 원하시는 평화의 길을 따라가면 좋겠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그가 제자라서 시원한 물 한 잔이라도 마시게 하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잃지 않을 것이다.”
<당신 때문에>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마태 10,39ㄴ)
믿음이
믿으시니
믿음
때문에
믿나이다
불신을
뚫고
끝내
뿌리내리는
믿음을 믿으며
희망이
희망하시니
희망
때문에
희망하나이다
절망을
헤쳐
끝내
피어나는
희망을 희망하며
사랑이
사랑하시니
사랑
때문에
사랑하나이다
미움을
녹여
끝내
타오르는
사랑을 사랑하며
오늘의 성인
성 가밀로 데 렐리스(Camillus de Lellis)
신분 : 신부, 설립자
활동연도 : 1550-1614년
같은이름 : 가밀루스, 까밀로, 까밀루스, 카밀로, 카밀루스
이탈리아 복치아니코에서 출생한 성 카밀루스(또는 가밀로)는 군인으로서 터키인들을 대항한 베네치아(Venezia)를 위하여 전투에 참가하였고, 도박에 빠졌으며, 1574년경에는 무일푼의 신세가 되어 나폴리(Napoli) 거리를 방황하였다. 그는 몸이 건장하고 성미가 급한 사람이라 하는 일마다 뜻대로 되는 일이 없었다.
그러다가 1575년 우연히 설교를 듣고 심경의 변화가 일어나서, 두 번씩이나 프란치스코회에 입회하려고 노력했으나 일생동안 그를 괴롭힌 다리병 때문에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래서 그는 자신을 이기는 방법의 하나로 다른 환자들을 돌보는 일에 정력을 쏟았으며, 로마(Roma)의 산 자코모 병원에 자원으로 봉사하다가 곧 그 병원의 회계를 맡았다.
이러한 경험은 병원의 놀라운 상황과 제 문제점들에 눈을 뜨게 만들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고해신부이던 성 필리푸스 네리우스(Philippus Nerius, 5월 26일)의 권고를 받아들여 1584년에 사제로 서품되었고, 이미 사제와 평수사들로 회를 구성하였던 병자들의 봉사자회(The Camellians)를 세웠다.
그들은 로마의 주요 병원에서 사목하다가 1585년에는 자신들의 병원을 세웠으며, 특히 로마 항의 배들을 통하여 전염되는 흑사병자들에게 관심을 기울여 치료하였다. 그는 항상 창문을 열어 놓고, 적당한 음식물을 먹게 하고, 전염병일 경우는 격리하는 방법을 그는 활용하였고, 그의 사제들은 항상 숨을 거두는 환자들 곁에 있었으며, 임종자들의 장례 등에도 큰 관심을 보이게 하여 세인들의 칭송이 높았다.
그러나 그 자신의 건강은 점차 악화되어 도저히 임무를 수행할 수 없게 되자 1607년에 자신의 장상직을 사임하였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늘 환자들을 방문하면서 자신이 죽는 날까지 그렇게 하다가 제노바(Genova)에서 운명하였다.
그는 1742년 교황 베네딕투스 14세(Benedictus XIV)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고, 이어 1746년 같은 교황으로부터 시성되었다. 또한 교황 레오 13세(Leo XIII)에 의하여 천주의 성 요한(Joannes, 3월 8일)과 함께 모든 병자들의 수호성인으로 선언되었고, 교황 비오 11세(Pius XI)로부터는 모든 간호사와 간호 단체의 수호성인으로 선포되었다.
성 니고데모 (Nicodemus)
활동년도 : 1748-1809년
신분 : 수사
지역 : 아토스산(Mount Athos)
같은 이름 : 니고데무스, 니꼬데모, 니꼬데무스, 니코데모, 니코데무스
성 니코데무스(또는 니고데모)는 1775년에 아토스 산의 디오니시우에서 수도자가 되었는데, 당대의 최고 저술가로 알려진 분이다. 그는 주로 교회법전, 성인전, 전례, 수덕신비 신학 등에 관한 저서를 남겼다. 그가 그리스어로 쓴 “라우렌티우스 스쿠폴리의 영적 전쟁”은 이냐시오 로욜라의 “영신 수련”의 모델이 되었다. 그러나 그의 가장 유명한 저서는 코린토스(Corinthos)의 성 마카리우스(Macarius)와 공동 편저한 “필로칼리아”인데, 이 책은 1782년에 베네치아(Venezia)에서 출간되었다. 또 그리스 교부들과 수도자들의 저서들을 집대성한 전집도 유명하다.
성 프로코피오 (Procopius)
활동년도 : 980-1053년
신분 : 수도원장
지역 : 사자바(Sazaba)
같은 이름 : 프로꼬삐오, 프로꼬삐우스, 프로코피우스
체코 서부 보헤미아(Bohemia)의 그리스도교 가정에서 태어난 성 프로코피우스(또는 프로코피오)는 프라하(Prague)에서 공부하여 1003년에 동방교회의 사제품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은수생활을 더 원하여 프라하의 사자바 계곡에 있는 성 바실리우스(Basilius) 수도원에서 지냈는데, 그의 덕이 너무나 출중하여 이미 살아있는 성인으로 공경을 받았다. 그는 한 백작의 후원으로 사자바에 성 베네딕투스(Benedictus)와 성 바실리우스의 수도규칙을 따르는 동방전례의 수도원을 설립하여 초대원장으로서 여생을 바쳤다. 그는 1053년 3월 25일 수도원에서 선종하였다. 그는 체코슬로바키아(Czechoslovakia, 1993년 체코와 슬로바키아 두 개의 나라로 갈라졌음)의 수호성인이며, 1204년에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Innocentius III)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그의 축일은 이전에는 7월 4일에 기념하였다.
성녀 토스카나 (Toscana)
활동년도 : +1243년경
신분 : 과부, 수녀
지역 : 베로나(Verona)
같은 이름 : 또스까나
이탈리아의 베로나 근방 제비오(Zevio)에서 태어난 성녀 토스카나는 베로나 출신의 알베르트 카노쿨리(Albert Canoculi)와 결혼하여 남편과 함께 가난한 이들을 돕는데 힘을 쏟았다. 남편과 사별한 후에 성녀 토스카나는 자신이 소유한 모든 재산을 처분한 후 예루살렘의 성 요한 수녀회에 들어가 수녀가 되었다. 그곳에서 그녀는 기도와 환자를 돌보는 일에 헌신하며 여생을 보냈다.
복자 흐로즈나타 (Hroznata)
활동년도 : 1160-1217년
신분 : 순교자
지역 : 보헤미아(Bohemia)
같은 이름 : 흐로즈나따
흐로즈나타는 보헤미아의 오토카르 1세 궁중의 귀족으로서 행복한 결혼생활을 즐기며 살았다. 그러나 그의 아들이 병들어 죽고, 그 얼마 후 그의 어머니마저 사망하자 그는 이 모든 것의 의미를 깊이 생각하여 궁중을 떠나 십자군이 되기로 서약하고 성지로 가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주님의 뜻이라기보다는 자신의 욕망이라고 단정하여 십자군 되기를 포기하고, 교황 코일레스티누스(Coelestinus III)의 도움을 청하였다. 마침내 그는 서부 바이에른(Bayern)의 테플(Tepl)에 적당한 땅을 구하여 대수도원을 세웠다. 그 후 그는 정체모를 사람들로부터 납치되어 알트-킨스부르크의 어느 지하 감방에 갇혔다가 운명하였다. 이 때문에 그는 순교자로서 공경을 받는다. 그에 대한 공경은 1897년에 승인되었다.
복자 보니파시오 (Boniface)
활동년도 : +1270년
신분 : 주교
지역 : 사보이아(Savoia)
같은 이름 : 보니파시우스, 보니파키오, 보니파키우스, 보니파티오, 보니파티우스, 보니페이스
사보이아 공국의 백작 토마스의 아들인 보니파티우스(Bonifatius, 또는 보니파시오)는 젊어서 대 샤르트르회에 들어갔다가 카르투지오 회원이 되었으며, 1234년부터 1241년까지 벨리(Belley) 교구의 관리자로서 봉사하였다. 1241년 그는 잉글랜드(England)의 헨리 3세의 황후가 된 조카의 영향력에 힘입어 캔터베리(Canterbury)의 대주교로 선출되었으나, 1244년까지 자신의 주교좌에 부임하지 않을 정도로 강직하였다. 그는 교구를 개혁하고 과중하게 부과되는 상납금 등을 개혁하려고 시도하여 수많은 반대자들을 만들었다. 그는 국왕이 출타 중일 때에는 헨리 왕의 섭정을 맡았으며, 프랑스에 대한 외교사절직도 수행하곤 하였다. 그는 에드워드 1세와 더불어 십자군을 둘러보러 가는 도중에 사망하였다. 그에 대한 공경은 1838년에 승인되었고, 축일도 이전에는 3월 13일에 기념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