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최부자 집
경주 교동 69번지에 자리하고 있는 최부자 집은 최부자가 살기 전에는 신라 무열왕의 둘째 딸 요석공주가 살던 궁터이다.
집 오른쪽 : 신라 무무왕 2년부터 자리잡은 계림 향교와 반월성이
뒤편 : 신라인들이 신성한 숲으로 여기던 계림이
왼편 뒷편 : 내물왕 무덤 외 다섯개의 커다란 봉분이 작은 동산처럼 누워있고
좀더 왼편 : 김유신 장군이 살던 재매정이, 다섯개 왕릉 뒤로 첨성대가 있어 온통 신화와 역사의 자취로 들러쌓인 집으로
집터 자체가 박물관 분위기이다.
최 부잣집이 이곳에 집을 짓고 자리 잡은 시기는 현재 장손 최염씨의 7대조인 최인경(1743~1804)이 이전에 살던 경주시 내남면 '게무덤' (형산강 상류로 양쪽에서 물이 들어와 합수하는 지점)이라 불리던 곳에서 최부자집의 파시조이자 13대조인 최진립(1568~1636) 이 살기 시작하다 아들 손자대로 내려 가면서 재산이 많이 불어나 넓은 집을 물색하다 요석궁터로 옮기게 된것이다.
* 이 터는 요석공주와 원효대사 사이에서 신라의 대학자 이자 이두문자를 창시한 설총이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원효의
나이 39세~44세 사이의 일이다.
최부자집이 명문가로 후세의 이름을 전하게 되는 것은 9대의 진사. 12대의 동안 만석지기의 재산을 지녔던 집으로 노블레스 오블리제와 톨레랑스가 400전 이전부터 행해졌다는데 있다.
최부자 집의 덕망은 일제 강점기 식산은행 총재(두취)로 부임한 일본인 아리가에게 가지 전해졌다.
최부자 집 내훈
*. 과거를 보돼 진사 이상의 벼슬은 하지마라.
* 재산은 만석 이상 불리지 마라.
*. 과객을 후히 대접해라. (1년에 천석의 쌀을 과객에게 = 과객이 하릇밤 자고 가면 과메기 한손+노자돈과 하루 양식을
*. 흉년에는 남의 논을 사지마라. * 한손= 두마리를 제공하였다
* 최씨 가문의 며느리는 시집와 3년동안은 무명옷을 입어야 한다( 창고열쇠; 안방마님. 재산관리의 상당한 권한 부여)
* 사방 100리안에 굶어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동쪽 : 경주 동해안 일대. 서쪽:영천. 남쪽 : 울산. 북쪽: 포항 일대 까지
수신
스스로 초연하게 지내고
남에게 온화하게 대하며
일이 없을 때는 맑게 지내며
뜻을 얻었을 때는 담담하게 행동하며
실의에 빠졌을 때에는 태연하게 행동하라.
풍수상 최부자 집의 집터는 배산임수가 아닌 동출서류로 집 앞을 흐르는 새내(年川=東天)는 1300년전 원효대사가 원효공주를 만나기 위해 이곳 다리에서 떨어져 옷을 적신후 요석궁으로 들어 갔다는 깊은 냇물이 흐르는 임수(물이 흘러 들어오는곳). 통일신라 때는 월정교와 일정교라는 낭만적인 돌다리가 놓이지만, 원효 당시에는 요석궁 앞, 그러니까 후대에 월정교 남쪽에 누릅나무로 만든 다리가 있었다.
집뒤로는 산이 아닌 밭에 수십구루의 괴목들이 심어져 있다. 집뒤의 허전함을 비보하기 위해 나무를 심어논 것이다.
현재의 괴목은 200년전의 나무로 괴목은 성장 시간이 오래 걸리므로 장기적인 투자와 관리가 필요한데 시간이 흐를수록 키가 크고 굵게 자라므로 방풍효과가 크다.
이 집은 오른편에 있는 향교보다 두 계단 정도 낮게 터를 깍아내려 주춧돌을 놓았다. 원래보다 3m정도 깍아내렸는데 첫째 이유는 향교의 권위를 높이기 위함이고 둘째는 뒤를 떠 받쳐주는 맥이 약함을 보하기 위해서 였다.
반월성에서 부터 돌기한 용맥이 구불덩구불덩 계림을 지나 최부자 집근처에서 머무는 곳이다. 5대는 '게무덤"에서 7대는 '요석궁' 터에서 12대를 이어왔다.
좌향= 임자=남향집으로 남산을 안대로 삼은집 으로 도당산과 남산이 겹쳐 보이는 안대를 구성하고 도당산의 ㄷ 자 형태의 야산과 터진쪽이 집앞과 일치하는데 도당산 같은 형태를 곡식을 쌓아놓는 창고사보다 말발굽형 창고사로 그 중 최고.
원래 99칸의 대지 2.000평, 1만평의 후원, 노비 100명 이 거주하던 집인데, 1961년 현 장손 최염씨가 결혼할 당시 방앗간, 외양간이 헐려 마흔 일곱칸 줄어있고, 1970년 사랑채 화재로 주춧돌만, 현재는 안채와 문간채 창고만 남아 있다.
과객
과객들의 성분은 다양하였다. 몰락한 잔반이 있었는가 하면, 이고을 저 고을 사랑채를 전전하며 무위도식 하는 고급 룸펜이, 학덕이 높은 선비나 시를 잘 짓는 풍류객도 있었고, 무술에 뛰어닌 협객도 있었다. 그런가 하면 풍수와 역학에 밝은 술객들도 있어 주인집 아들의 사주와 관상을 보아주기도 하고 <정감록>을 가지고 세상의 변화를 예측하기도 하였을 것이다.
조선시대 안방에서 가장 인기있는 책이 <토정비결>이었다면, 바깥 사랑채에서 가장 인기있는 책은 <정감록>이었다.
최부잣집의 1년 소작 수입은 쌀 3천석 정도였는데 1천석은 가용으로 쓰고, 1천석은 과객 대접용으로 사용 하였고 1천석은 주변 지역의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는데 썼다고 한다.
과객 접대는 나름대로 규칙이 있었다. 과객 중에 상객이라 여기는 사람은 매끼 식사 때마다 과메기(마른 청어) 한마리 씩 제공하고 중객에게는 반마리, 하객에게는 사분의 1마리를 제공하였다.
최 부잣집에 과객이 많이 머물렀을을 때는 그 숫자가 100명을 넘었다 한다. 100명 까지는 큰 사랑채와 작은 사랑채에서 수용할 수 있었지만 그 이상은 주변에 살고있는 노비들의 초가집으로 과객을 분산 수용 했다고 한다. 부득이 주변 노비의 집으로 과객을 분산해야 할 때에는 식사를 해결할 수 있는 과메기 한마리와 쌀을 들려 보냈다.
과객이 최 부잣집에서 쌀과 과메기를 가지고 가면 그 노비 집에서는 무조건 밥을 해주고 잠자리를 제공하도록 룰이 정해져 있었다. 과객을 접대하는 댓가로 주변에 사는 노비들은 소작료를 면제 받았다. 50~60리 멀리 떨어져 사는 노비들은 소작료를 제대로 내야 했지만 인근의 노비들은 과객 대접한다는 공로로 혜택을 받았던 것이다. 최 부잣집 주변 노비들은 과객 접대가 주요한 임무중 하나였던 셈이다.
어떤 과객에게는 옷까지 새로 지어 입혀서 보낼 정도였다고 한다. 과객 대접에 후하다는 소문은 조선 팔도로 퍼졌다. 강원도 전라도는 물론 이북 지역에 까지 그 명성이 퍼졌다 한다. 이는 결국 최부잣집의 덕망으로 연결 되었다.
중국에 3천 식객을 거느렸다고 하는 맹상군이 있었다면 조선에서는 1년에 천석의 쌀을 과객에게 대접하는 최 부자가 있었던 것이다.
.* 구한말 영덕 출신의 유명한 의병장인 신돌석 장군이 잠시 피신하여 집주인 최준(1884~1970)의 보호를 받다.
요석궁(현재 한정식 집 이름) = 증조부 집 신돌석 장군은 이집 대들보를 혼자 힘으로 올려 설치 했다는 일화가 있다.
* 면암 최익현(1833~1906)이 의병을 일으킬 때 수백명의 수행원을 데리고 이집을 방문하여 몇일 묵었다고 한다
면암: 충청도 기호학파(노론), 최부자 집(남인): 국난을 당하자 당색 관계없이 도움을 청하다.
* 일제 時 스웨덴의 구스타프 국왕도 왕세자 자격으로 서봉청 금관을 발굴하기 위해 경주를 방문하였는데 최부자 집 사랑채에 머물다..
* 국내의 저명 인사로 손병희.최남선.정인보.안희제.여운형.김성수. 장덕수.송진우.조병옥이 다녀갔고
* 의친왕 이강공도 사랑채에 엿새 동안 묵으면서 최준에게 문파(文坡)라는 호를 적어주고 갔다.
육당 최남선과 위당 정인보 두사람은 이집에 1년이상 머무르면서 <동경지>를 편찬하기도 했다.
* 천도교 교주인 손병희는 집주인 최준이 존경하는 사이라 자주와서 묵었다. 손병희와 최준은 보성학원 이사로 , 동아일
보 발기인으로 같이 참여, 독립운동을 하다 나중에 변절한 최린도 보성교 교장으로 재직할 때 천도교인 100명과 보성
학생 100명을 인솔하고 수운 선생 묘소를 참배하러 왔었는데 최수운과 최부자 집이 같은 집안 간이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아무런 부담없이 대 인원을 데리고 와 묵고 갔던 것 같다.
* 김성수도 1년에 꼭 한번은 둘를 정도로 자주 이 집에 왔으며, 인촌 집안과 최부자 집은 서로 교류가 빈번했다고 한다.
인촌은 호남의 제일가는 부자로 당시 10만석 하던 집, 최부자 집은 영님 제일 가는 부자로 만석지기를 하던집으로 서로 잘 통하였다. 이러한 인연으로 최준은 동아일보 발기인으로 참여 하였던 것이고 인촌의 영향은 받아 교육 사업에 전재산을 기부 하였던 것이다. 인촌은 고려대를, 최준은 대구대와 계림 학숙 = 영남대의 전신이다.
* 문파 최준은 현재 장손인 최염씨의 조부이자 마지막 최부자로 나라가 망한 일제시대를 넘긴 인물이다.
최준은 항일대동청년당을 조직한 독립투사 백산 안희제(1885~1943)와 백산 상회를 설립하여 상해 임시정부 김구 선생에게 독립 자금을 제공했다. 상해의 독립자금(군자금)을 보내다 백산상회는 파산되어 만석꾼 이 빚쟁이로 전락하게 된다.
식산은행 두취(총재) 아리가는 최준의 빚 보증을 해주었는데 탕감설의 세가지 이유가 있다.
사이토의 오른팔인 아리가는 조선의 몀문가인 최부자집에 개인적인 호감이 있어( 이집의 가주인 법주와 김치를 먹음)
아리가의 세째아들 현 한일문화교류협회 일본측 회장이다.
동의대 최해진 교수의 의하면
일부러 빛을 지게 한 다음 이를 미끼로 협조하도록 회유하도록 했다는 설과, 부채를 탕감해 주는 대신 최부자의 古家를 환수하여 신라 박물관으로 만들려 했다는 설, 최린이 당대는 불가하고 사후 제공 하겠다는 설이 있는데 해방이 되어 그 나마 남은 재산을 지키게 되었다고 한다.
1946년 2월 경교장에서 김구(70세) 와 문파 최준 (62세)이 만났다
김구 : " 최선생, 그동안 수고가 많았습니다. 가산을 탕진하면서 까지 임시정부에 자금을 보내주신 최선생 공로를 3천만
동포가 우러러 보게 될것입니다. "라고 치하 한 후 '자금 조달 기록장'을 보여주며 위로했다.
최준 : 안희제를 통해 상해로 보낸 거금의 독립자금이 한 푼의 착오없이 전달된 사실을 알고 해방 2년전에 고인이 된 백산
의 무덤이 있는 의령을 향해 " 백산, 미인하네. 준을 용서하게. 라고 큰 절을 올리며 눈물을 글썽 였다고 한다.
문파는 백산에게 자금을 보내면서 활동비로 어는 정도 사용 했을 것이라 짐작했는데 백산이 최소한의 경비조차 사용하지 않고 전액을 전달한 데 대한 고마움과 미안함이 섞인 눈물이었다.
역사학자들의 모임인 '백산학회'는 백산 안희제의 정신을 기념하기 위해 만든 학회이다.
현재 주인인 최염은 최식(1907~1974) 의 장남이다. 만석재산은 조부님대에 끝났다. 만석꾼의 재산은 대학 설립으로 그 대미를 장식했다. 모두 영남대에 기부했다. 조부께서 대학을 운영하다 5.16후에 운영이 어려워져 이병철에게 대가를 일절 받지 않고 넘겼다. 그러다가 한비(사카린) 사건으로 박대통령에게 넘어가 현재의 영남대학이 생긴 것이다.
고려대학의 설립자는 이용익 대감으로 손병희가 운영하다 인촌에게 맡긴것이 오늘의 이른 것이다.
경주 최부자집 마당 한구석에 위치한 '뒤주'는 정면 다섯칸, 측면 두칸으로 우리나라 개인 뒤주로는 가장 큰것으로 쌀
700~800석이 들어간다.
조용헌의 오백년 내력의 명문가 이야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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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지금 그 요석궁에 색시끼워파는 술장사 합니다. 고급 요정이라고 할까.... 뭐 씁쓸.. 합니다
안타 깝네요^^*^
경주와 하회마을 개인적으로 넘 좋아하는데~~~
@은하 요석궁 뒷집은 주요 민속자료로 잘 보존관리하고 있습니다. '최씨고택'
@콩깍지 증발, 대단한 경주의 자랑이죠 최부자 집은...
깍지님의 부지런함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