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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작가사상 원문보기 글쓴이: 황봉학
문경새재 전국시낭송대회 지정시
가을 바람 / 강상률
문경 새재 넘는 사람아!
가을 들녘에 꿈을 감추고
경건히 기도하는 밀레의 만종을 보라
고난과 역경의 비바람 이겨낸 계절을
말없이 꿋꿋이 견딘 오늘
땀을 식히는 새재 바람 앞에서
저 벼 이삭처럼 조용히 머리 숙여 보라
빈 가슴에 와 닿는
대지의 숨결 머문 부끄러움들
서로 잘난 채 뻐기며
눈을 부라리던 일이나
굳어진 얼굴로
부질없이 마음 상하던 일
모두 가을바람에 날려 보내고
이제는 서로 용서하고 사랑할 일이다.
문경새재 넘는 사람아!
산바람 넘쳐나는 기운을 보라
런링의 깃발 휘날리는 저 벌판
황금 물결 넘실거리는 번영과 희망이
영순 들에도 새재골 주흘산 자락에도
빈궁한 우리들 가슴속에도
풍성한 결실이 고운 햇살을 타고
가을바람 속에 차곡차곡 쌓여 가리라
그 여자 / 강혜규
못나고 거친 흙이라 찰진 반죽도 못돼
그저 생긴 대로 불길에 몸을 던진다
주름살 자잘한 얼굴 억장이 무너진다
염천 하늘 아래 수건 하나 질끈 매고
소처럼 느린 소처럼 묵묵히 밭을 맨다
고단한 하루하루가 옹이로 맺힌 손마디
어머니의 어머니도 찻사발 받쳐 들고
울음을 비우듯이 시름을 비웠는지
찻사발 해묵은 주름이 웃을 듯이 말 듯
문경새재 / 고성환
아버지 도포자락 휘날리던 문경새재
시대의 변방에서 중심으로 가시던 날
한사코 버티고 서서 산맥들은 열병했지
아버지 양복 깃이 말쑥하던 종착역
시대의 중심에서 변방으로 오시던 날
두 팔을 말없이 열어 눈물로 싸안았지
아버지 넘나들던 굽이굽이 양장羊場길
어머니 치맛자락 간절히 찢겨진 길
억새풀 희어진 머리가 아리랑을 부르는 길
극락사계 / 공광규
조령길 봄비 내려 연두색 칠을 하고
봄 나무 가지마다 꽃망울 터뜨렸네
초목이 가득한 고개 꽃이 피어 극락원
봉암사 굽어보는 희양산 밝은 얼굴
푸르른 산허리에 흰 구름 쏟았구나
계곡에 수행승 하나 발을 담근 극락천
주흘산 산 능선에 내려온 반쪽 하늘
밤별이 돌아가고 달빛도 사라지면
새들이 햇살 물어다 비단 짜는 극락산
점촌역 상록수에 백로 떼 장엄하고
백목련 눈부셔라 문경역 폐철로 가
바람이 휘파람 불며 오고가는 극락역
그대 맨발로 오라 – 문경새재 1 / 권갑하
오랜 안부를 묻듯 목련은 피어나고
누군가 저만치 기다리고 있을 것 같은
산보다 마음이 앞서 문을 먼저 여는 길
물박달 잎새에 이는 향긋한 푸른 전설
길은 멀어도 우리 사랑 끝이 없으니
세상 일 다 벗어놓고 그대 맨발로 오라
먼 그대에게로 흘러가는 계곡물 따라
새소린 청아한 곡조로 하늘 다시 펼치고
비질한 황톳빛 가슴 달빛 쏟아지리니
流轉하는 아버지 / 권운지
긴긴 협곡을 거쳐야 그곳에 닿는다. 폐광의 고요 속에 아버지의 수많은
전생을 만난다. 아버지는 옛집 앞 환한 벚꽃 나무 아래서 나를 향해 웃고
계신다. 검푸른 석탄을 가득 실은 가시랑차가 갱도(坑道)를 나와 아버지와
내 앞을 지나가고 있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 그해 여름 땅이 울리고 강물
이 붉도록 아버지는 앓았다. 신열을 참으며 긴긴 행렬을 따라가며 돌아보
고 돌아보던 아버지를 놓쳤으리라. 한번도 만난 적 없는 아버지를 찾아간
다. 아버지도 수없이 이 길을 찾아왔을 터지만 다리 위에서 어깨를 스쳐
도 번번이 알아보지 못했다. 아버지를 증언하던 사람들도 모두 떠났으므로
이제 가시랑차와 아버지를 저 아득한 지층 속에 묻노니 끝나지 않는 생의
어느 봄날 검푸른 탄이 된 아버지 가시랑차 타고 오시면 못 다한 이야기
밤새 나누리라.
觀音窯 / 권형하
청학 몇 날으는 문경 관음요에는
푸른 눈물 불로 지펴 우려낸 하늘 속을
등 환한 여울 발길로
낮달이 떠 옵니다.
철 따라 손짓 따라 매화 피고 국화 피어
한 움큼 꺾어 들면 번져나는 구름송이
먼 산 빛 가슴 맑은 새
하늘 길로 납니다.
솔빛 길러내신 붉은 가슴 언덕과
저 바람 말투들을 시로 쓴 나무들과
마음에 별 담기는 방
나눠들고 앉습니다.
어머니의 사발 / 김동관
어머니 한쪽 가슴 땅 끝에 묻던 날
선잠 깬 흙가래 알몸을 드러내고
사라진 젖내음 찾아 똬리를 틀고 있다
기억의 끈 마디마디 빚어 올린 초벌인생
기울은 물레 위를 멈칫멈칫 걷다가
젖은 손 어루만지며 둥근 마음 새긴다
출산 앞둔 산모처럼 긴장한 불가마
뼛속까지 스민 열기 훈훈하게 달아올라
살갗이 터지는 고통 외로움을 벗긴다
하늘이 열리고 흰 연기 날개 펴면
갓 태어난 빛깔들이 꿈틀대는 잔불 속
어머니 빈 가슴 채울 사발 하나 숨을 쉰다
문경사발 / 김동인
한 때 어느 파발마가 목젖을 삼켰을까
망댕이에 구워 낸 흙냄새를 따라 가면
관문 밖 물소리에도 굳은살이 박혀 있다
달빛 아래 잠 못 들던 울컥했을 사발도
한달음에 삼켰을 뜨거웠던 찻잔도
문질러 닦으면 닦을수록 낮아지는 문경새재
접혀 있던 수백 년 길 다시 펼쳐 걸어 보다
급류에 떠 밀려간 사금파리 잇대보면
흙으로 돌아가는 길 징검돌로 놓여 있다
고향 시인 / 김병중
기쁜 소식을 듣는다는 그 고을에 가면
무명 시인 한사람 조용히 살고 있단다
토끼꽃 팔찌 낀 딸아이 손을 이끌고
때때로 개울가에서 조약돌 줍고 있더라
삽 한 자루 들고 논으로 나서면
물거울 속에 낯익은 얼굴 하나
가는 실바람에도 잔주름지지만
따뜻한 논물 속에 구름이 같이 눕더라
시인의 이름은 잘 몰라도
새 이름 꽃 이름 나무 이름을 줄줄 외는
푸른 피 도는 사람들이 사는 마을엔
성은 불러도 이름을 부르지 않더라
풍월주인 별호를 가진 시인이
푸나무 단 위에 노을을 한 짐 지고
천천히 시오리 저 벼릿길을 지나더니
삽짝 없는 초가집 이마에 큰 달 하나 걸더라
새재 맨발걷기 / 김석태
시어의 푸른 숲이 솔바람에 출렁대는
새잿길을 걸을 땐
답답한 신발을 벗어던지고
맨발로 걸어보세요.
우리들이 끝내는 되돌아가야 할
부토의 그 부드러운 촉감이
잠자고 있는 영혼을
일깨울 테니까요.
조령관 너머 흙살을 가둔
시멘트 길을 걸을 때도
조여 맨 신발 끈을 풀어버리고
맨발로 걸어보세요.
우리들이 끝내는 되돌아가야 할
어둠 속 그 아우성들이
잠자고 있는 사랑을
불태울 테니까요.
잃어버린 자아를,
방황하는 영혼을,
울부짖는 이웃을 찾으며
굽이굽이 세월 같은 새잿길을
다함께 맨발로 걸어보세요.
잡기(雜記) / 김영재
사발이 되려거든 막사발쯤 되어라
청자도 백자도 아닌 이도다완井戶茶碗 막사발
일본국 국보로 앉아 고려 숨결 증언하는
백성의 밥그릇이었다가
막걸리 사발이었다가
삐뚤삐뚤 생김새
거칠고도 투박하다
용처가 저잣거리라 잡기雜器라고 했던가
무사함이 귀인貴人이요, 단지 조작하지 마라*
임제록臨濟錄을 바친 그윽한 속뜻 있어
본색이 천한 것 아니라 백성의 밥그릇이었거늘
* 임제록의 한 구절을 일본인 무네요시가 이도다완에 바쳤다 함.
찻사발 앞에서 / 김종렬
툇마루를 닦다 보면 하늘 한 쪽 비치듯
우려낸 찻물 속에 출렁이는 만첩청산
천만 근 묵은 근심이 징소리로 풀린다.
소박함이 하늘 닿아 우주를 품었는가
다호시*한 자락 외며 마주하는 찻사발
누군들 네 심성 앞에 무릎 꿇지 않으리.
문경 땅 처마 위로 사발달 뜨는 저녁
가마내기*앞에서는 천지도 숨 멎는다
다시 핀 천년의 불꽃, 아! 조선의 살빛.
*다호시 : 찻물이 우러나기를 기다리며 읊는 시
*가마내기 : 사기, 옹기, 도자기 등을 구워서 가마에서 꺼내는 일
문경사과 / 노두원
빗장 열어 속살보이는
문경이라 관문에 들면
햇살 받아 맛살 불린 사과를 맛볼게다
순한 햇빛 시린 달빛 밤낮으로 몸을 키운 호사로움
문경에는 속향 깊은 맛깔스런 사과가 있다
휘어진 가지 잡고
꽃잎 따는 여인들이
문경 아리랑 배음으로 애잔히 깔았으니
씨방에는 열애의 격정
살랑이는 봄바람에
결 고운 문경사과 가지가지마다에 눈을 뜬다
검은 구름 천둥소리에 여름이 다 지나도록
수줍어 잎 속에 숨어 크는 풋 사과
이슬로 꿈을 덮고 밤마다 하얀 바람 쐬며
속살 같은 문경사과 탱글탱글 자란다.
깊어진 가을 햇살 얇은 산기슭에
누런 잎사귀 밀치며
수줍게 내미는 빨간 얼굴이여
문경에는 해를 닮은 사과가 있다
임금(林檎)이 능금 되고
능금이 사과 되듯
고사리가 문희 되고
문경이 된 역사의 텃밭에는
꿀맛 짙은 문경사과 영원으로 자란다
새재 8 – 봉암사*/ 리강룡
가을날 저물녘이면 봉암사를 찾아가자
굳게 닫은 산문을 열고 주지스님을 만나거든
나뭇잎 붉게 물드는 그 의미를 물어보자
정갈한 마당 가 돌탑 앞에 마주서자
세상사 번뇌들을 개석蓋石 끝에 걸어두면
비로소 다가서는 소리
젊은 산의 숨소리
구산선문九山禪門 그 언저리를
나는 알지 못하지만
법계 피안의 뜰에 그대*이미 와 있거늘
구태여 면벽좌선面壁坐禪으로 아홉 해를 가던가.
*봉암사 : 희양산 기슭에 있는 선승의 도량, 일반인에게는 음력 4월 8일 하루만 개방
*그대 : 이 절에서 참선 수도했던 故 성철 스님
술도가가 있는 골목 / 문성해
산사춘 복분자 오가피주 백세주 매실주는 물론이거니와
막걸리 한 병을 마시다가도 그 병을 들어 만든 곳을 확인하는 일
그때마다 나는 경상북도 문경의
어느 오래된 술도가 골목을 더듬더듬 헤매지도 않고 흘러들어가게 된다
산사나무 열매나 복분자 오가피 냄새와
시큼덜큼한 막걸리 냄새가 흘러나오는 그 골목을 찾아들면
누런 냄새 위에 쓰러져 누운 술꾼이 있고
술지게미를 얻어먹고 비틀거리는 개가 있고
뻐끔 열린 솟을대문 안에는 조금쯤 요망한 자세로 누워 깔깔거리는 여자들이 있다
어느새 나는 노란 한되들이 술 주전자를 들고
한모금 두모금 마시며 가는 간 큰 애가 되어
미나리꽝이나 앞산이나 저수지가 타박타박
내 눈 속을 아프지도 않게 걸어 들어오는 것을 보며
하늘과 땅과 마을과 들판 중에서도 내가 참 크다 하고
돌아앉은 뒷산도 그때만큼은 내 편이란 생각을 하며
이런 술도가가 있는 우리 마을을 내가 참 사랑한다는 생각을 하는 것이다
옆집 새댁이 내는 스란치마 소리처럼
조금쯤 은밀하고
조금쯤 세상에서 붕 떠나 있는
그 술도가 골목을 어린 나는 어미의 품처럼 파고들었으니
지금도 술을 받아놓고 술병을 들고 소재지를 확인하는 나는
술 한 잔 마시지 않고도
어느새 그 많은 술도가를 다 편람한 듯 마음이 화끈해지고
그 골목에서 술꾼들의 오줌을 다 받아먹고 사는 맨드라미 모양
너도 나도 이해할 수 있는 수굿한 고개가 되곤 한다
문경새재 넘자 / 문인수
여기 문경엔 오래 걸어 오르는 길이 있다.
마음이 날아올라
그 아름다운 산중, 큰 고개를 보게 된다.
무엇이 가로막히느냐, 이 고갯길을 걷자.
주흘관 조곡관 조령관 지나
정자 터, 주막 터에선 또 쉬었다 가자.
성황당 돌무더기에 돌멩이 주워 얹으며
그래, 한 가지 소원을 빌 때 저 새,
새 한 마리 산 넘는 것 볼 수 있다.
오늘은 그렇게
사람들의 옛길, 문경새재 넘자, 넘어가자.
문경새재를 넘다 / 맹문재
눈발 치는 이 저녁
문경새재를 넘어
묵밥 한 그릇 말아먹고 싶다
나의 처음이자 마지막 불알친구인 동석이가
낡은 방문을 열고
점촌店村이란 세상을 찾아 넘었던 길
연둣빛 발걸음이었지만
등 뒤의 어머니와 지게와 보리밥과 그리고 내가 그리워
싸리나무처럼 흔들리지 않았을까
억양 높은 경상도의 사투리를 만나
슬금슬금 뒷걸음질 치려다가
다시금 나아가지 않았을까
그 착하고 못나고 꺼벙한 애송이가 꿈꾼
오붓한 겸상
눈발 치는 이 저녁
그의 등잔불 아래에서
묵밥 한 그릇 나누고 싶다
대성암大成庵 / 민병찬
여승방 빈 뜨락에
사루비아 붉게 타고
선방禪房은 비었는지
고무신이 두어 켤레
샘물이 혼자서 종일
절 그림잘 헹구더군.
절 앞에 어능나무
암 수 두 그루 서 있다가
잘 익은 열매 하나를
길손에게 툭 던지며
운달산雲達山 가을 소식을
알고 왔냐 묻더군.
주흘관을 지나며 / 박권숙
문경에 와서 문득 길이 새였음을 안다
긴 침묵의 부리로 석양을 쪼고 있는
거대한 저 바위들도 원래 새였음을 안다
죽지뼈 한 대씩을 부러뜨려 길 밝히고
부신 뒷모습으로 재를 넘는 가을산
봉암사 극락전 한 채 봇짐처럼 떠메고
내게는 또 몇 개의 영과 재가 남았을까
그리움의 시위를 당겨 날개를 꿈꾼 이들
저렇게 새재를 넘어 먼 길 갔을 것이다
모전천 산벚나무 / 박영석
해가 뜨면 귀를 여는 산벚나무
아래로 모전천이 흐르고
그 나무 물 쪽으로 구부려 소리 듣는다
사월 중순 물때가 차면
이파리 꽃봉오리 만선의 봄배가 든다
싣고 온 싱싱한 것들 부려놓으면
꼭 비린내 훅 풍기는 어시장 같다
소래포구 구룡포구 또는 수산시장쯤 되리
비린 것은 비린 것끼리 사람들은 사람들끼리
왁자하니 크고 작은 사설 미끄러진다
어깨위로 등으로 하염없는 꽃 비늘
아가미도 가시도 없는 꽃의 편린들
비늘 화륵 모전천으로 뛰어든다
동심원이 마음에 파랑을 일으킨다
하늘이 몽땅 빠져 흐르는 모전천 푸른
물속에 그림자 거꾸로 박고 산벚나무
어디서 저 하얀 구름 한 자락 펼쳤을까?
구름 둥둥 밟으며
괜히 어부가 되고 싶은 사람들
괜히 물고기가 되고 싶은 산벚나무
집 나선 사람들이 잠시 서성이는 곳
햇살은 가끔 비늘을 뒤집다 주저앉는다
전나무 / 박찬선
문경 새재 관문에 선
나이 많은 전나무를 보고 온 날 밤
꿈에 나는 말 못하는 벙어리가 되었네.
아무리 입을 열어 얘길 할래도
떨어지지 않는 안타까움으로
잠을 설쳤네.
옛 말씀은 살아 나
몇 쪽 잔잎으로 피고
아, 이른 봄에 매미 한 마리
가지 끝에서 울고 있네
문경새재, 오리무중을 헤치다 / 배한봉
제3관문 가까이 이르자 문경새재는
안개의 나라라는 생각,
너럭바위 사이로, 소나무 사이로 새어나오는 안개,
계곡 물소리를 덮치며 흘러나오는 안개,
들은 바, 새재라는 이름에는 여러 유래 있지만
새도 날아서 넘기 힘든 고개라는 말이
가장 시적이지 않느냐 묻던 김형은
안개 때문에 새들이 더 날기 힘들었을 거라고,
새재할매집에서 곱으로 먹은 점심밥
벌써 소화 다 됐다며, 너스레웃음을 친다.
오솔길에 불과했을 옛 문경새재
도적이 다가와 옆구리 찔러도 길동무와 얼굴 구분 못 했을
그 오리무중 헤쳐 과거장에 도착한 선비는
어떤 답 남겼을까. 안개 세상에서의 길 찾는 법
소백준령 같은 필법으로 써내었을까.
일행들이 바삐 걸음을 옮기는 동안 김형과 나는
그런 이야기 나누며 아름드리 소나무에 등을 기댄다.
안개가 만든 이쪽과 저쪽 세계의 경계
어떤 걸음으로, 어떤 마음으로 넘을 것인가.
찢어지게 가난한 어린 상주의
닭 찾아준 달성판관 같은 이를 떠올리며
짙은 안개 속에서 다시 가야할 길 가늠하는 우리에게
안개 없어도 안개 낀 새재보다 길 찾기 어려운 이 시대,
길 잘 찾아 가라 일러주는 것인가. 이제야
뿌옇게 삼킨 하늘과 비경
햇살과 함께 슬금슬금 풀어내는 문경새재
흙의 길 / 변현상
씨앗 품어 싹 올리던 엄마의 태반이던
흙이, 흙이 아닌 꽃으로 피기까지
뜨거운 불길 속에서
얼마나 녹았던가
황금빛 어느 집안의 진열장에 나앉을지
향 깊은 노시인의 다완으로 동행할지
어디서 무엇이 되던
모두의 흙이었음을....
손에서 손으로 이어진
문경고을 도요陶窯 앞에서
또 다시 생각한다 펄펄 끓었던 그 순간을
식어서 환한 향기여!
눈부신 보물이여!
진남교 벚꽃 / 송찬호
경북 문경시 진남교반에는
문을 연 지 백 년이 넘는다는
아주 오래된 벚꽃 은행이 있는데요
해마다 사월이면 나도 그 벚꽃 은행을 찾는데요
갈 때마다 꽃 사태 사람 사태
천지간 온통 희부옇게
벚꽃 예금 인출 사태가 벌어지는데요
그렇게 꽃을 퍼내다 그 늙다리 나무
은행 파산하는 거 아닌지 몰라!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올해는 벚꽃철 맨 끄트머리에 찾아갔는데요
늦은 오후, 풀풀 날리는 꽃그늘 아래
한 평짜리 평상 휴게실에
비스듬히 기대어 있는 빗자루 경비가 들려주는 말,
오늘은 내 앞으로 딱 두 사람
고모산 흰 사슴과
서울 사는 비단 구두 장수가 다녀갔다는데요
문경새재에서 / 송택경
백두대간 험준한 조령산 마루
여덟 폭 병풍이 철따라 내걸리고,
오랜 세월의 터를 지키며
말없이 우뚝 선 관문 위에는
천하를 호령하던 신립장군 목소리가
지나가는 발길을 멈추게 한다.
가파른 새재길 푸른 그늘 위에
긴 그림자가 소리 없이 다가오면
산새는 우거진 억새숲에서 속삭이며
잊혀져가는 전설을 정답게 이야기하고,
바람은 또 박달나무숲에서 사각거리며
골골이 얽힌 역사를 꼼꼼히 읽는다.
옛 과거길 굽이돌아 주흘산 혜국사
그윽한 풍경소리 가슴에 파문을 던지고,
깊은 계곡마다 물안개가 조용히 내리면
소쩍새가 들려주는 자장가 소리에
새재는 오늘도 아름다운 내일을 꿈꾸며
설레는 마음 안고 포근히 단잠을 청한다.
막사발 / 서정택
누에 등 굽은 가마 스쳐 나는 불새 한 마리
선홍빛 주둥이로 길어 올린 새재 달빛을
흰 불꽃 넝쿨 번지는 망댕이에 쏟아 붓는다
야윈 어깨 긴 목하고 고단한 님 오셨을 제
휘영청 막사발에 찻잎 띄워 두었으니
외발로 수레 돌리던
바퀴 멈추고 잠시 쉬시게
초적草笛을 불고 있는 바람소리 물소리
세사에 반항한 벌로 죄죄 데인 모진 심사를
오늘은 생각 다 벗고
잠겨 봄즉 하잖는가!
문경막사발 연가 / 신동익
호랑이 우렁찬 산마을, 송진내 진동하는
장작과 자태자태가 민요민요에서 결혼했네
천년을 거들떠 보지도 않은 채 잊은 아이 막사발
청자에 밀리고 백자에 누질이고
요강이 밥이 되고, 화분이 밥이 되던
이 땅에 뿌리내리지 못한 기구한 그 막사발.
귀족적 여성적 온화함 그 다 분수 밖
깨끗하고 담백하고 검소함 그도 사치
날마다 씀에 편하고 수더분한 막사발.
쌍둥이로 태어나 권좌에 앉을만한
남성적 분청사기 족보에 올라도 너는
꾸미지 않아도 수수한 서민적 막사발.
심봉사 눈을 뜨듯, 소박미의 재발견
문화도 상품이다, 신안 앞바다 유물처럼
밥그릇 술잔 찻잔에 그대 바코드, 막사발.
가은加恩 가는 길 / 신선미
가슴자락 그리움에 바람처럼 우는 날
하루를 접어두고 가방을 챙겨본다
아버지 거칠고 마른 손 기다리는 외딴 집
한 굽이 돌아들면 솔 공지* 물소리가
그동안 품어왔던 내 집 소식 전하겠지
누렁이 순한 눈빛으로 끔벅끔벅 말하겠지
잡풀이 수북해진 언덕 위 제각祭閣에는
돌아와 오도카니 선 빈 가슴 안아주며
휘돌아 대처大處로 가던 바람도 누웠으리.
* 문경 가은 고향집 앞 내(川)가 흐르는 소나무 공토를 그곳에선 솔 공지라 부른다.
성주城主 / 신후식
성돌 다섯 포개놓은
외로운 성 성주로서
오는 날 엮다 보면
눈망울들 별이 되고
튼튼한
옹성甕城 그리며
자람점을 셈한다.
일흔넷 성돌 주워
외성外城과 내성內城 쌓고
다른 읍성邑城 손잡으며
주민 함께 웃고 즐겨
뛰는 말
휘몰아 가며
키워 보는 진취성.
허물어진 조령산성鳥嶺山城
근 삼백 쪽을 나눠
이끼도 털어보고
서린 한도 풀어 담아
묻힌 날
되짚어 보니
불확실성 미랠러라.
새재 죽령 남쪽 사람
큰 산 벌려 세워가니
태고적 이어온 삶
영강潁江, 낙강洛江 그와 같아
치켜든
높은 파고波高를
예서부터 삭인다.
문경 옛길 / 안도현
가파른 벼랑 위에 길이, 겨우 있다
나는 이 옛길을 걸으며 짚어보았던 것이다
당신의 없는 발소리 위에 내 발소리를 들여놓아 보며 얼마나 오래 발소리가 쌓여야 발자국이 되고 얼마나 많은 발자국이 쌓여야 조붓한 길이 되는지
그해 겨울 당신이 북쪽으로 떠나고
해마다 눈발이 벼랑 끝에 서서 울었던 것은,
이 길이 벼랑의 감지 못한 눈꺼풀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해보았던 것이다
이화령 / 안상학
물처럼 살고 싶어서
그대에게 흘러갔습니다
그 많은 밤길 다 지나서
그 많은 구름 다 돌아서
쑥부쟁이 키 작은 그대
그 맑은 그곳으로 흘러 들어갔습니다 사랑은
산정에서 구름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산을 내려가는 물의 마음이라는 것을 깨달은
뒤늦은 소식 하나 안고
내 이제서야 물처럼 살고 싶어서
그대에게 흘러흘러 갔습니다
새재의 달빛 / 엄재국
새재에 오면, 달의 뒷면을 걸을 수 있다
달 속을 흐르는 계곡물소리에
서로의 눈빛으로 젖었다가
물속으로 갓 건져낸 달을
단풍잎으로 닦아 가슴에 품을 수 있다
주흘관 옛길 걷는 바람에게
수백 년 전,
그 너머 이야기를 들으며 겪으며
조곡관이 펼치는 하늘, 푸른 담장 위에서
왜병을 온 몸으로 막아서던
조선 병사의 마지막 눈길을 만날 수 있다
그 옛날
아버지의 아버지, 어머니의 어머니의
등짝과 가슴이 파여지고 헤쳐지던
여기 새재는,
달빛이 알 스는 마을
모여든 발자국에 땅위의 것들이 익고
풀썩이는 흙먼지 붉은 눈빛이
조령관 가슴 속에 붐비는 노래이려니
낮은 몸 발끝으로 순한 길을 펼치는
우리는 다 같이 길 위의 사람들
누구라도
대문 활짝 열어 놓은 달 속의 첫 동네
문경 새재에 오면,
잘 익은 사과를 뚝뚝 따듯
한 광주리 달빛을 담아 갈 수 있다
문경 새재 / 오세영
물어물어 찾아왔다.
짐승도 길을 잃고 새들도 쉬어서
넘는다는 문경
새재,
인생살이 고단타 해도 어찌
길 없는 세상이 있겠느냐
은산철벽銀山鐵壁엔 무지개가 걸리고
절해고도絶海孤島엔 북극성이 뜨는 법.
이 계곡 들어서면 또 다른 계곡
이 봉우리 넘어서면 또 다른 봉우리,
나무에게 물어
메꽃에게 물어
삶의 한 고비를 예서 넘는다.
더듬더듬 오른다.
험하고도 가파른 길,
이 고개 올라서면 기쁜 소식 접할까.
짐승도 날 새도 길을 잃고 헤매는
아,
문경 새재.
문경새재, 높푸른 꿈의 고개 / 유안진
하늘과 땅 사이의 드높은 사이고개
새들도 쉬어 넘은 문경 땅 새재는
백면서생白面書生이 넘어가고
초립동草笠童이 넘어가고
그이들의 피땀 절은 십년공부가 넘어가서
알성급제謁聖及第가 넘어왔고
장원급제壯元及第가 넘어왔지만
더 많이 넘어온 한숨 눈물 구비 구비
새소리만이 아니다
바람소리만은 더 아니다
넘어야 하는 꿈의 고개가 하도나 높고 험해
꿈도 높푸르러 고갯길이 되었으리니
바라고 소망하는 그 이름이 되었으리니
문경聞慶, 귀하고 아름다워 경사스런 이름대로
발뒷꿈치 발걸음마다 기쁜 소식이 뒤따라와
흰 구름 속 고갯마루 문경새재에는
내 모국어의 목소리가 울려 퍼져 낭랑 랑.
주흘산 산행 / 윤보영
뒤척이는 휴일을 일찍 깨워
문경새재 주흘산 가는 길.
새소리, 물소리, 바람소리
소리들이 먼저 길을 열고
발자국 소리에 깨어나는 초록나무들.
흙과 돌이 번갈아 등을 내밀고
밟고 올라온 만큼
주흘산 1075m 주봉은
아래로 굽어보며 미소를 보낸다.
길 따라 늘어선 나무들은
긴 가지를 뻗어 피곤을 덜어 주고
길목마다 피어
향기로 마음을 감싸는 야생화.
새벽부터 시작된 설렘은
주봉 아래 펼쳐진 장관 앞에 감동으로 녹고
이마에 맺힌 땀방울은
하늘빛 기분으로 스며들어
내려 갈 생각조차 잊게 한다.
물박달나무의 노래 / 이가림
새재 골짜기
물박달나무는
딱 한 곡조
우리네 어메의 어메의 어메
그 어메가 부르던 아리랑밖에
부를 줄 모른다
그것도 아르르르 아르르르 아라리요
나직이 흐르며 이어지는
끝자락만
되풀이 되풀이
흥얼거린다
원래
도끼날도 튕겨져 나가게 하는
꽝꽝한 성미인데,
제 몸뚱이가 방망이로 만들어져
하많은 세월 달빛에 젖어
다듬이질이나 하며 살아온 신세가
너무도 기막힌 탓일까
새재 골짜기
물박달나무는
딱 한 곡조
우리네 할메의 할메의 할메
그 할메가 부르던 아리랑밖에
부를 줄 모른다
그것도 아르르르 아르르르 아라리요
천만 번 다듬이질에도
끊어지지 않는 가락
되풀이 되풀이
흥얼거린다
이화령쯤에서 / 이기철
황혼의 집들은 조금씩 신의 모습을 닮아 있다
산 아래 산이 눕고 길 아래 길이 누워
살아 있는 것들은 나무도 짐승도 조금씩
신의 모습을 닮아 있다
문경새재는 밤에도 키가 크고
서로 부대끼면서도 아파하지 않는 상수리들만
푸름을 놓쳐버린 잎들을 벌려
남쪽 마을을 향해 펄럭인다.
이우출 시조비 제막식에
뇌졸중으로 오지 못한 신동집의 시 한 구절은
우리의 시월을 쓸쓸하게 했다
그날 모인 사람들은 아무도 수안보 길을 묻지 않고
병든 시인의 안부를 물었다
누가 나에게 신의 모습을 그리라 한다면
나는 산짐승들의 유순한 눈에 비친
저녁놀을 그리겠다.
저녁의 빛깔이 하늘을 데우는 온기로 떠돌 때
숲은 햇빛을 제 몸 속으로 흡수하고
새들을 몸 밖으로 뱉어낸다
사람보다 나무들이 먼저 겨울을 예감하기 때문이다.
이름 모르는 마을의 집들이 짐승처럼 엎드려 있는
이화령쯤에서 아무도 제 슬픔의 빛깔을 채색하지 못할 때
주황색의 깃발을 들어 나는
지상의 추위 타는 것들을 데워주고 싶다.
새재 / 이경림
칠흑의 새재를 넘어 보고야 알았다
한 재가 얼마나 많은 골짜기를 품고 있는지
골짜기들은 또 얼마나 깊은 어둠을 품고 있는지
새들도 넘지 못한다는 재를 칭칭 감으며 낡은 승용차가 위태롭게 내려갈 때
골골의 어둠이 노랗게 언 달을 밀어 올리고
한 치 앞의 벼랑이 시간을 자꾸 헛바퀴 돌릴 때
우리는 생사의 경계 위에 선 아버지를 보았다
온 산에 슬픔이 달빛처럼 번지고 있었다
누구였는지 문득, 넋 없는 사람처럼
재 아래 어른거리는 어린 날을 끄집어냈다
바람나 재 넘어간 옥자 얘기, 구랑리에서 떼죽음 당한 어느 一家의 얘기,
육이오 때, 목숨 걸고 재를 넘겨준 家僕의 얘기며
난리통에 관문 속 어느 골짜기에 묻히신 증조부 얘기를 두서없이 중얼댔지만
두려움보다 재는 높고 슬픔보다 길이 더 휘어
끝내 우리는 말을 잃었다
그러나 누군들 몰랐으리
그 모두 한 재가 토해낸 한숨이라는 걸
그 숨으로 깊어진 골짜기라는 걸
그것이 밀어올린 봉우리라는 걸
加恩이라는 / 이경림
문은 하나다
가은으로 가는 문은 직행버스를 타고
네 시간은 달려야 있다 아니
가은으로 가는 문은 둘이다
가은으로 가는 문은 마장동 시외버스터미널에서
사천원짜리 표를 사서 네시간을 달리면 있다 아니
가은으로 가는 문은 기억의 직행버스를 타고 슬쩍
눈 감으면 있다 거기 검은 마을을 안온하게 지키는 맑은 유리문이 있다
그 속에 기억의 탄광으로 치닫는 외길이 있다
그 속에 비 내리고 우비도 없이 삼삼오오 학교 가는
아이들이 있다 탄더미의 날짜 속으로 난 길들이 있다
그 속에는 거짓말같이 청솔 울타리 나직나직한
도레실 가는 길도 있다
어른들은 자꾸 탄더미 속으로 들어간다
도시락을 덜컹거리며 막장으로 간다
돌개바람, 휘말려 올라가는 탄더미의 날짝 속으로 간다
뱀딸기와 엉겅퀴와 산죽이 엉겨붙어 사는
이름만 뽀얀 마을, 가은으로 가는 문은
셋이다, 넷이다, 다섯이다
그 속에
페광된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坑口들
벌린 입 속에서 너무 캄캄한
꼭 제 몸만한 잊혀진 것들에 기대 사는 마을
가은이!
정호다완 井戶茶碗 / 이민숙
연분홍 볼터치하고
기다리는 처녀예요
하고픈 말 다 못하는
조선의 새댁이죠
불길에 화르르 감기는
하혈下血을 꿈꾸어요
엄동을 뚫고 나올
어둠 속의 죽순 같은,
비상하려 웅크린
둥지 속의 새끼 같은,
늦은 봄, 바람에 터진
석류알 불빛 같은,
양털 같은 이야기들
한 땀 한 땀 수를 놓아
징소리 퍼진 세상
터질 듯이 볼에 넣고
시간을 길게 저어서
매화꽃을 피워요
새재를 넘으며 / 이상범
관문을 내려서면 발길은 허공을 밟아
급제한 선비들의 주막얘기 들을 수 있다
일찍이 판서를 지내고 문집도 낸 박달대감.
작은 대청 크기만한 암반 위에 걸터앉아
산적들 모의도 듣고 술도 몇 잔 기울인다
늙어선 사냥도 하다 세상 떠난 털보영감.
이제는 고려적 궁궐 자리 잡아 경이로운
듣고 싶은 말발굽소리 아득히 귀에 젖고
계곡을 때리는 산울림 물길 열며 하산한다.
문경 / 이성남
대륙을 포효하는 국토 복판
소백산맥 나래 펴고
조령. 희양. 주흘산 정기 품더니
무문토기 고려청자 청동불상
석회암 무연탄
삶의 흔적 같은 빛깔이네
이제금
빛 한 줄기 다시 뻗혀
함박웃음 만방에 알리니
양산, 농암. 소야천 휘돌아든
계곡 물살로 문경시가
낙동강 장천 큰 뿌리로 우렁차네
가은(加恩) / 이성남
태곳적부터
태산준령 흐르고
후백제 견훤이 꿈을 지핀 곳
하늘은 늘 청아한 빛깔
흰 구름 깃발로 달았지
숯덩이같이 까맣던
광산촌 우리들 아버지
하얀 웃음 보낼 제
깊은 산 양지녘 도라지꽃마냥
함초롬히 자라던 가은
장엄한 희양산
봉암사 옥석대 선경에
뭉쳐든 정기로
옥녀봉 자락 휘감고
하늘 높이 용솟음치네.
무슨 사연들 쏟아부어 새재를 만들었네 – 내가 걷는 백두대간 135 / 이성부
곱게 분바른 얼굴 같은 길이다
험한 벼랑 내려오느라 땀 흘린 만큼
이번에는 편안함이 나를 반기는구나
주흘과 부봉*이 힘줄을 세워 굽어보고
주름 가파른 치마바위도 눈이 부시다
저 많은 절박한 생들은 어디로 갔는지
저 한숨들 잠재워 산은 제 가슴을 쓸어내렸는지
새 세상을 찾아 힘들여 넘었다는 길이
오늘은 너무 잘 닦여서
겨울도 햇볕 아래 노닥거리며 간다
활빈당 무리들이 숲에 숨어 눈을 밝히고
허균의 어린 아들 이 고개를 넘어 도망길을 재촉했다
임진년 관군들도 백성들도 의병들도
돌배와 연이*도 이강년*도
이 고개 넘나들며 흙에 피를 보태었다
역사는 비록 지금 관광명소로 남았지만
좌우 숲에서는 느슨하면서도 팽팽한 긴장이
내 온몸을 감전처럼 흐른다
* 주흘과 부봉 : 경북 문경시 북쪽에 있는 주흘산과 부봉.
* 돌배와 연이 : 신경림 시인의 장시 「새재」에 나오는 주인공들
* 이강년(1858~1908) : 구한말의 의병대장
천적/ 이원규
생과부 울 엄니 나를 낳자마자
탯줄로 짠 그물로 네 평 점방을 차렸다
막걸리 국수 오징어 양초 포도 감기약
하내리 구랑리의 만물백화점
아직 젊은 마흔 살 암거미의 집이었다
처마 끝 외줄을 타고 날아간
유사비행의 좌파 아버지 거미에게는
집이 곧 덫이요 무덤이요 감옥이지만
서방도 없이 새끼를 낳은 화냥년
똥물을 뒤집어쓰면서도 차마
씨를 발설할 수 없는 무당거미의 집이었다
밤마다 소복을 입고 정화수
맑은 물방울을 거미줄에 매달며
남몰래 첫사랑의 천적 지아비를 기다리던
무당거미 울 엄니 하지만
엄니의 천적은 아버지뿐만이 아니었다
몰래 점방을 들락거리며
그게 입인 줄도 모르고
풍장의 오징어 눈깔을 빼먹고
미라처럼 시드는 포도 알을 빼먹으며
거뭇거뭇 더듬이가 자라는
나 또한 그게 독인 줄도 모르고
날카로운 벌침을 쏘아
서서히 마취가 된 무당거미 울 엄니
그게 죄인 줄도 모르고
남은 생의 육즙을 쪽쪽 빨아댔으니
나나니 나나니벌이었다
아버지의 나이 지나도록 야금야금
암거미의 몸을 파먹는 나 또한
그래여↘ 안 그래여↗/ 이인원
해마다 가을걷이 후면
갓 캐낸 따스한 고향소식과 함께
감또개 잔뜩 넣은 찰떡함지를 지고 오던 문경아재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새재 너머 저 먼 나라로 떠난지 오래지만
환갑 지나 들인 양자養子 재성이는
어엿한 기관사가 되어 오늘도
서너 량 쯤 이어붙인 귀이개만한 완행열차를 몰고
그래여, 안 그래여로 끝나던
아재의 넉넉한 사투리 사이를 오가고 있을 것이다
그래여↘
은성, 봉명, 광업소는 모두 폐광 되었어도
문경이라는 이름은
긴긴 갱도 따라 아직도 무진장 채굴 되어서는
내 귓속
그 비좁고 낡은 레일 위를
기적소리 울리며 매일 진입하고 있다
우리는 문경을 한 발짝도 못 벗어났다
재성아, 안 그래여↗
교귀정에서 / 임병기
가을바람 솔솔 불어 이파리 살랑이고
먼 하늘 반짝이는 별님과 밤 새우며
그님의 뜨거운 연서 그대 온 몸 살랐네.
가을날 시집 못간 여인 입술 붉은 연지
가을 산천 골골마다 듬뿍듬뿍 찍었나
톡톡톡 터질 것 같은 절정의 산 앞자락.
옛선비 한양 갈적 아름다운 계곡 가다
문경새재 교귀정서 시 한수를 읊었겠네
숫처녀 수줍은 가슴 양 볼처럼 붉은 단풍.
새재 石城 / 장용복
상초리 가을 울녘 하초리 겨울바람
그리운 고향 등진 과거길 수향 만리
영 넘어 여울향 소리, 새재의 시린 石城
미소 띤 찻사발에 울궈진 다향 내음
오동꽃 주막 마당 밟고 선 도포자락
관문루 처마 끝 누대 뒤돌아 가던 그길
오동꽃 5월에 피워 강물 위에 띄운 달빛
막사발 아미 닮은 그대의 그믐달로
영남의 능선을 따라 길을 가는 나그네여,
여궁폭포 – 산하 31 / 정석주
문경땅 새재골을 바른 팔로 안아 들면
하늘을 이은 비말飛沫 전설마냥 쏟아내고
여인의 고운 숨결로 청류 한 폭 펼친다.
올려다, 올려다보면 거긴 구름 둘러 있고
자욱하게 내려앉은 수해樹海 속의 나신裸身 하나
이 골 안 향 젖은 바람, 그 숨결의 풀림이라.
내 차마 신선이래도 이 골 안엔 못 살리라
달빛이 쏟아지면 금동불로 환생하는
그 여신女神 고운 몸매를 어이 훔쳐 볼 것인가.
새재 영가 / 정완영
<주흘관 뻐꾸기>
한 평생 더벅머리 숯을 굽던 총각 놈이
죽어서 이 산중에 뻐꾹새가 되었던가
뻑뻑국 해종일 산자락 싸리꽃만 흩고 있다.
<조곡관 들찔레>
세월을 울리기야 천년 두고 같은 골물
주막집 설운 각시 빨래하며 나왔다가
뉘 몰래 하얀 발 담근 채 들찔레가 됐더란다.
<조령관 뜬구름>
어차피 한 냥 빚도 빈 소매엔 무거운 것
괘나리 봇짐 벗어 솔가지에 걸어두고
정처도 없는 구름이 혼자 재를 넘고 있다.
소식, 한 소식 / 정일근
문경 김룡사 해우소에 쪼그리고 앉아
앞가리는 문짝 없는 해우소에 앉아
끙끙거리며 뱃속의 소식 기다리는데
얇은 판자로 아슬아슬 뒤를 가린
엉덩이 뒤편에 늙은 보살 한 분 들어
앉자마자 요란한 소리 큰일 보시는데
흠흠 헛기침하며 사람 있소 알렸지만
큰일 보는 틈틈이 더 큰 줄방귀까지
즐겁게 신나게 일을 보시는데
그 보살 큰일 당당하게 마치시고
입측 오구진언 다 외고 나가시는데
사람의 구린내가 연꽃의 향기 같아
뱃속의 근심이나 그 근심 푸는 일이
그게 무슨 가릴 부끄러움이라고
또 다른 근심에 전전긍긍하는 나에게
뻔쩍 번쩍 양 뺨을 치고 가는 소식
막힌 뒤와 오장육부까지 뻥뻥 뚫리는
한소식 찾아오시는데
왕릉장터 / 정형석
십여 년 전만해도 은성탄광 문 닫기 전
사 구일 장날이면 어깨 치며 지났는데
시방은 눈 설레만 치는 허기진 쾡한 장터
나주에서 온 섭이네, 밀양 댁 당진 아저씨
뿌리 뽑힌 숨결들이 꾸역꾸역 밀려와서
하늘을 두 번 이고 산 막장 인생 그들은
낯익은 고향이랍시고 송곳 꽂을 땅뙈기 없어
고만 고만한 새끼들 짠하게 앞이 밟혀
먹뱅이 기적소리에 얹혀 홀씨되어 날려 왔다
푸념만 할 수 없어 동전 짝 하늘보고
음양 비낀 지하막장 개미굴 탄부들은
폐 속에 돌덩이만 담은 무늬 좋은 산업역군
안도 밖도 까만 밤을 싸이렌 소리 흩어놓고
옥녀봉 눈썹위로 우유빛 햇귀 부려놓을 즈음
성냥곽 판자집 사택, 제비집처럼 부산했다
왁자지껄 도탄교길 보름치 봉급날은
상주 집 석쇠판 위 돼지기름 요란하고
헛기침 객기에 실려 색시 화장 짙어갔지
비루먹은 강아지도 낙엽은 시답잖아
진녹색 독이 오른 배춧잎만 물고 다니고
시장 통 술집 다방은 휘청대며 기대섰다
주판알 이해타산, 솜뭉치 육신들로
신사 갱 하품하고 가은선마저 주저앉자
움츠린 폐탄 더미 위 떨고 선 망초꽃들
떠날 사람 떠나가고 갈수 없어 남은 사람
흙바람 부는 왕릉장터 머쓱하게 어정대다
깡 소주 탁배기 한잔에 가을 해를 삼킨다
바람, 안개, 벚꽃 등 / 조향순
왜 울었는지 몰라.
삼십여 년 전 첫 해 겨울
토요일 오후,
바람만 무성한 빈 운동장에서
왜 그렇게 흐느꼈는지 몰라.
그러면서 슬금슬금
새재를 넘나드는 훤칠한 바람에
홀렸네.
진남교의 애잔한 안개에
발목 잡혔네.
십 년이 가고 또 가고
사람이 가고 또 가고
어느 날,
고목으로 어우러진 모전천변 벚꽃길을
간 세월 생각하며 걸을 것 같애.
간 사람들 생각하며 걸을 것 같애
걸으면서 또 한 번 흐느낄 것 같애.
또 그 다음 어느 날,
꽃잎이 눈처럼 떨어지는 날이나
눈들이 꽃잎처럼 흩어지는 날에
나도 꽃잎처럼 떨어질지도 몰라.
나도 눈처럼 녹아버릴지도 몰라.
영남, 문경, 조선요 / 천숙녀
자존自存의 이름 얹어 뼈대 하나 세우셨네
억새 떼 몸 부비며 지켜온 시간의 구릉
달 뜨는 호흡까지도 누르고 또 눌렀었다
울리는 종소리에 새 문을 활짝 열고
우주를 품어 안고 정심세계 걷고 있다
닭 울음 여명을 쫓아 튕겨 오른 저 빛 부심
질곡의 자국마다 푸른 혈血 돌게 했다
속살 깊이 파고 드는 천년의 운기 심어
불 무덤 가르며 일어선 푸른 부활 명장이여
문경새재 / 채천수
물소리 듣고 섰고
산너울 보고 섰는
길이고
물 바위고
나무고
산입니다
걷다가 사진 찍다가 저를 닮아 가세요.
환한 마사토 길 성벽 위에 올려놓은
주흘관 용마루가 추녀선을 다 빼문 가을
하늘에 부끄럽지 않은 당신을 써보세요.
봉마다 한번 올라 당신을 가다듬다
돌아가 오미자차를 마시다 생각나면
그때는 당신도 누구의
길이 되어 오십시오.
책바위 무늬에 대한 관찰 / 한분순
흐드러진 마음들을
다독여
품어 안으면
휘날리는 바람, 바람
온몸으로 스며들어
눈 밝은
바위의 큰 뜻
모든 속내 보듬는다.
기대어 있는 저 산
외침의 속삭임들
겹겹이 에워싸는
저마다의
메아리
바위에
들려준 얘기
내려앉아 무늬 된다.
* 책바위 : 문경새재에 있는 돌무더기로 이곳에 소원을 빌면
이뤄진다는 전설이 전하는 바위.
문경이 고향이라 했다 / 황금찬
문경새재 박달나무
홍두깨 방망이로 다 날아간다.
집에서 문경새재가 가깝습니까.
방문을 열면
첫 손님으로 찾아 드는 그가
문경새재였지요.
1942년 그 무렵
동경 어느 직장에서 만났던 친구
그의 이름은 권진태
하도 옛날이어서
내가 잘못 알고 있는지도 모르니
그렇거든 용서 하시라.
나이는 내가 한두 살 위였지.
그 친구는 천재였지
중앙대 법과재학생
그 후 그는 학도병으로
끌려 갔고
나는 성진으로 돌아왔었지.
6.25 피난 때
대구에서 그 친구를 만났다.
우리는 울며 웃으면서 차를 마셨지
그리곤 지금까지 못 만났네.
친구여
지금 어디에 있는가
말하라
대답하라
문경새재보다도
더 그리운 친구
권진태
내가 부르고 있으니
대답해주시오
그리운 친구
내 이름은 황금찬이야.
풍장 25 / 황동규
희양산 봉암사에 다가갔다.
늦가을 저녁
발목이 깊은 낙엽에 빠지고
시냇물 소리도 낙엽에 빠지고
바람 소리까지 낙엽에 빠지는
늦가을 저녁.
걸음 멈추면
소리내던 모든 것의 소리 소멸,
움직이던 모든 것의 기척 소멸,
문득 얼굴 들면
하얗게 타는 희양산 봉우리,
소리 없이 환한,
주위엔 저 옥보라색.
빛들이 몸 가벼운 쪽으로 쏠리다 맑아져
分光 그만두고 스펙트럼 벗어나 우주 속에 사라졌다가
지구의 하늘이 그리워 돌아온
저 색!
때맞춰 하얗게 타는 산봉우리.
마법의 숲 / 황범순
주흘산 내려오다가
문경새재 2관문 오솔길에 걸음 멈추고
햇살 투명이 거미줄을 그리고
아른아른 맑은 물소리 걸러내는
바위에 앉으니
모든 걸 버릴 수 있다
모든 걸 가질 수 있다
꿈도 사랑도 행복도
바람도 구름도 하늘도
겸손도 오매불망도 염치도
당치 않음도 버림도
도 도 다
미움도 아픔도 절망도
독선도 오만도 불손도
설마도 집착도 공연히도
허무도 오히려도 속절없음도
까닭 없음도 가짐도
도 도 다
숲 속에 발 담그고 하늘을 보면
어느덧 마법에 걸려있다
산새노래 살가운 숲으로 가자
도 도 다 가질 사람
도 도 다 버릴 사람
하늘만 이고 섰는 숲으로 가자
마음이 맑게시리 숲으로 가자
여궁폭포 / 황봉학
무모하다 싶은 저 폭포는
가장 엽기적인 사랑을 하고 싶었는지도 몰라
광기어린 집착으로 소유하고 싶은
여인 하나 있었는지도 몰라
수 천 년을 뼈가 부서지도록
구애의 손짓을 보내고
바위의 두꺼운 벽을 열도록
노래 불렀는지도 몰라
마침내 천년의 바위 속에
숨어 있던 정숙한 여인 하나
자신의 옷을 하나 둘 벗어 던지고
저토록 요염한 몸뚱이를
폭포에게 내어 주었는지도 몰라.
* 여궁폭포 : 문경새재 주흘산 혜국사 아래에 위치한 높이 20m의 폭포.
나는 / 황봉학
쥐 한 마리 없는 천주사의 쥐똥나무였다가
국수 한 그릇 없는 김용사의 국수나무였다가
노루 사라진 지 오래된 대미산의 노루귀였다가
고추 하나 달리지 않는 대승사의 고추나무였다가
거짓말만 모여 사는 범죄 많은 마을의 참나무였다가
오리도 못 가면서 자리만 지키는 조령산의 오리나무였다가
생강 냄새만 풍기다가 요리 근처에도 못 가본 생강나무였다가
화살 한 번 날려 본 적 없는 주흘산의 화살나무였다가
박쥐 사는 동굴이라고는 없는 백화산의 박쥐나무였다가
오이 냄새만 풍기고 오이 하나 없는 영강의 오이풀이였다가
불경 한 줄 못 외우는 파계승사의 중대가리나무였다가
陶工도공 / 황재연
망댕이 불가마에 赤松적송만 사루는 이
구릿빛 삶이더라
조선의 미소더라
힘차게 밀고 당기는 풀무질도 신명나고
순백의 혼을 살라 하늘 가득 띄우는 이
눈부신 빛이더라
다독인 외롬이더라
혼신의 힘을 다하니 쏟는 땀이 구슬 되는
화산재 털어 내며 눈물을 흘리는 이
결 고운 흙 한뜸이
無紋무문의 달로 뜨면
마침내 흙이 白瓷백자로 환생하는 것이리
문경 찻사발 / 황정희
은하 속 환한 혼불
문경새재 차 오르고
천년을 감고 돌아 또 한 세상 여는 물레
황토빛
거친 몸뚱이
깊은 염원 두른다
잉걸불 삼킨 점토
뼈와 살이 타는 가마
유체이탈 정점 위로 열반의 빛 선명하다
죽었다 다시 태어난
찻사발의 저 윤회
눈을 뜬 우아함도
그 반은 울음이다
깊어진 고른 숨결 절절한 맥을 짚어
살아난 정교한 자태
핏빛마저 감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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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작가사상 원문보기 글쓴이: 황봉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