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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현왕후전』 『한중록』과 더불어 3대 궁중문학의 한 작품으로 꼽히는 『계축일기(癸丑日記)』는 흥미로운 사실을 말해준다. 『계축일기』는 계축년(1613년ㆍ광해군5년) 광해군이 계모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폐위하여 서궁(西宮)에 가두고, 이복동생인 영창대군을 강화도로 내치는 과정을 인목대비 쪽의 입장에서 쓴 책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인목대비가 유폐 직전 광해군과 협상하는 장면이 눈길을 끈다.
“내 머리를 베어서 표를 보이니 대군(영창대군)을 데려다가 아무렇게나 처치하고 아버님과 동생을 놓아주옵소서.”
아들 영창대군을 내놓을 테니 친정집 아버지와 동생을 살려달라는 것이다. 어떻게 어머니로서 이런 제안을 할 수 있을까? 어차피 아들을 지킬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래도 ‘대군을 데려다가 아무렇게나 처치’하라는 대목은 낯설다.
인목대비가 살던 17세기는 남귀여가혼(男歸女家婚ㆍ남자가 여자 집으로 가는 혼인)이 점차 줄어들고, 남자 집 거주가 일반화되어 가는 시점이었다. 그러나 여전히 여자들의 의식 속에는 친정에 대한 소속감, 딸로서의 정체성이 강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특히 왕실로 시집온 여자들은 친정에 대한 의존도가 시간이 지나도 줄어들지 않았다.
우리나라는 중국에 비해 왕실과 외척(外戚)의 관계가 아주 긴밀하다. 두 집안은 다음 세대의 왕을 공유하면서 그 영향력을 두고 종종 갈등관계에 빠진다. 예컨대 태종은 처남 민무구ㆍ민무질 형제를 죽였고 또 세종의 장인 심온(沈溫)을 제거했다. 조선 왕에게는 왕비나 세자빈 집안이 항상 경계대상이었다. 반면 외척들은 그 와중에 가문의 입지를 지켜내야만 했다.
왕실 여성들은 이런 정치적 역학관계 안에 존재했다. 그들은 왕비 또는 세자빈의 위치에 있지만, 때로 자기 친정집안의 대표자로서 능동적인 정치행위를 해야 했다. 왕실의 일원이기에 앞서 친정집의 딸일 수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사도세자는 뒤주에 갇히는 날 부인 혜경궁 홍씨에게 이렇게 말한다. “자네는 무섭고 흉한 사람이로세. 자네는 세손(정조)을 데리고 오래 살려 하는구려. 내가 오늘 나가 죽을 테니 그를 꺼려서 세손의 물건을 쓰지 못하게 하려는 심술을 알겠네.”
사도세자는 혜경궁 홍씨가 이미 자신을 버리고 세손과 친정을 택했다는 사실을 감지했다. 혜경궁 홍씨가 자신의 친정 집안을 변호하기 위해 『한중록』을 썼다는 비판을 면키 어려운 대목이다.
인목대비는 친정세력의 대표자로서 끝까지 친정을 지키려 했다. 또 거기에서 자신의 훗날을 기약했다. 당시 인목대비의 친정은 이른바 서인(西人) 세력이었다. 광해군 쪽의 대북파에 비하면 세력이 미미했다. 그러나 정치란 어떤 세계인가. 현재 미약해도 그것이 하나의 당(黨)을 이루고 있다면 언젠가 다시 세력을 잡을 수 있는 가능성은 열려 있다.
인목대비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어린 아들이 아니라 서인이라는 정치세력, 즉 친정 집안을 선택했다. 이러한 정치적 선택은 후일 유효했다. 서인들이 광해군을 몰아내고 인조를 세우는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일어났으니 말이다.
『계축일기』는 인조반정 덕분에 인목대비가 10년간 갇혀 있던 서궁의 문이 열리는 것으로 끝난다. 문이 열리기 얼마 전부터 서궁에는 맛있는 복숭아나무가 자라는 등 상서로운 기운이 돌았다고 한다. 광해군에 대한 인목대비의 도덕적 승리를 상징하는 것이다.
그러나 인목대비는 도덕성으로만 평가될 만큼 나약한 존재가 아니었다. 친정의 대표자 역할에 충실했고, 결과적으로 서인세력이 다시 등장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인목대비는 광해군의 불쌍한 계모이기보다는 그의 정적(政敵)이었다. 권력은 여성에게도 피해가지 않는다. 대선의 계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