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우일모(九牛一毛)
아홉 마리의 소 가운데서 뽑은 한 개의 (쇠)털이라는 뜻으로, 많은 것 중에 가장 적은 것의 비유.
(고사)
한(漢)나라 7대 황제인 무제(武帝) 때(B.C 99),
5,000의 보병을 이끌고 흉노(匈奴)를 정벌하러 나갔던 이릉(李陵) 장군은
열 배가 넘는 적의 기병을 맞아 초전 10여 일간은 잘 싸웠으나
결국 중과부적(衆寡不敵)으로 패하고 말았다.
청렴 결백하고 용맹 강직한 무장 이릉이 불과 5천 명의 군졸을 지휘하여
흉노의 수십만 대군과 용전감투하다가 부대는 전멸하고 자신은 인사불성에 빠진 채 포로가 되었다.
이릉에게서 승전보가 올 때마다 무제와 한실(漢室)의 백관은
갈채와 만세를 부르며 좋아 날뛰었을 뿐 악전고투를 거듭하고 있는 이릉에게는 응원군을 보내지도 않고 있다가
급기야 패전했다는 소식이 전해오자 동정은 못하나마 입을 모아 비난과 욕설을 퍼부어댔던 것이다.
그런데 이듬해 놀라운 사실이 밝혀졌다.
난전(亂戰) 중에 전사한 줄 알았던 이릉이 흉노에게 투항하여 후대를 받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를 안 무제는 크게 노하여 이릉의 일족(一族)을 참형에 처하라고 엄명했다.
그러나 중신을 비롯한 이릉의 동료들은 침묵 속에 무제의 안색만 살필 뿐 누구 하나 이릉을 위해 변호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이를 분개한 사마천(司馬遷)이 그를 변호하고 나섰다.
사마천은 지난날 흉노에게 경외(敬畏)의 대상이었던 이광(李廣) 장군의 손자인 이릉을
평소부터 '목숨을 내던져서라도 국난(國難)에 임할 용장(勇將)'이라고 굳게 믿어 왔기 때문이다.
그는 사가(史家)로서의 냉철한 눈으로 사태의 진상을 통찰하고 대담하게 무제에게 아뢰었다.
"황공하오나 이릉은 소수의 보병으로 오랑캐의 수만 기병과 싸워 그 괴수를 경악케 하였으나
원군은 오지 않고 아군 속에 배반자까지 나오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패전한 것으로 생각되옵니다.
하오나 끝까지 병졸들과 신고(辛苦)를 같이한 이릉은 인간으로서 극한의 역량을 발휘한 명장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옵니다.
그가 흉노에게 투항한 것도 필시 훗날 황은(皇恩)에 보답할 기회를 얻기 위한 고육책(苦肉策)으로 사료되오니,
차제에 폐하께서 이릉의 무공을 천하에 공표하시오소서."
무제는 진노하여 사마천을 투옥(投獄)한 후 궁형(宮刑)에 처했다.
세인(世人)은 이 일을 가리켜 '이릉의 화[李陵之禍]'라 일컫고 있다.
궁형이란 남성의 생식기를 잘라 없애는 것으로 가장 수치스런 형벌이었다.
사마천은 이를 친구인 '임안(任安)에게 알리는 글[報任安書]'에서
'최하급의 치욕'이라고 적고, 이어 착잡한 심정을 이렇게 쓰고 있다.
"내가 법에 따라 사형을 받는다고 해도
그것은 한낱 '아홉 마리의 소 중에서 터럭 하나 없어지는 것'과 같을 뿐이니
나와 같은 존재는 땅강아지나 개미 같은 미물과 무엇이 다르겠나?
그리고 세상 사람들 또한 내가 죽는다고 해도 절개를 위해 죽는다고 생각하기는커녕
나쁜 말하다가 큰 죄를 지어서 어리석게 죽었다고 여길 것이네."
사마천이 수모를 당하면서까지 살아가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당시 사마천은 태사령(太史令)으로 봉직했던 아버지 사마담(司馬談)이 임종시에
'통사(通史)를 기록하라'고 한 유언에 따라《사기(史記)》를 집필 중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사기》를 완성하기 전에는 죽을래야 죽을 수도 없는 몸이었다.
그로부터 2년 후에 중국 최초의 사서(史書)로서 불후(不朽)의 명저(名著)로 꼽히는
《사기》130여권이 완성(B.C. 97)되어 오늘에 전해지고 있다.
역사가들의 입을 빌리면 이릉 장군은 부하를 사랑한 훌륭한 장군이었고,
사마천도 치욕을 무릅쓰고 자기의 소임을 다하여 후세에 이름을 길이 남긴 사람이 되었다.
첫댓글 참 훌륭한 분들의 이야기죠. 이릉이나 사마천이나 좋은 곳에서 잘 지내고 있을거라는 생각을 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