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깅을 하다보면 나도 모르게 뛰지 않고 걷고 있는 나를 인식할 때가 있다.
어두운 생각에 사로잡혀 자기도 모르게 힘이 쭉 빠져 있기 때문이다.
긍정적이지 않은 생각이 몸에 미치는 영향은 이토록 구체적이고 직접적이다.
나는 그럴 때 마다 습관처럼 어김없이 매번 부정적으로 사고가 흘러버리는 사안에 대해 메모를 해보았다.
내가 불행으로 기억하고 있는 사건과 연관된 좋지 않은 인연, 사람, 사건.
모욕을 받았다거나 창피스러웠던 일, 가슴 아픈 일, 쓰디쓴 배신감으로 기억되는 인간관계.
진퇴양난에 빠져 몸부림 쳤던 일.
알고 보면 그런 경험들이 지금의 나를 만든 일등공신임에 분명하다.
그렇지만 다시 그런 일이 닥친다면 피하고 싶고 멀리 도망치고 싶은 느낌은 어쩔 수 없다.
사람을 많이 대하다 보면, 부정적인 언어로만 대화를 하는 사람을 간혹 만나게 된다.
그럴 때 예외없이 마음이 어두워지면서 본능적으로 피하는 태도가 된다.
내 마음까지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마치 학생시절에 어떤 안건을 놓고 회의에서 오랜 시간 토론하면서 ‘하지 말자! 할 필요 없다! 해봐야 되지도 않는다!’ 등 대체로 부정적인 견해를 냄으로서 의욕적인 사람들을 김빠지게 하고 그걸로 똑똑함을 자랑하려 했던 나나 내 친구처럼.
사실 속내를 알고 보면 문제의식은 날카로운데, 일을 성사시키는 능력과 경험이 부족해서 생기는 미숙함이 그 실체인데.
나는 나이 사십이 넘어서야 내 자신이 매사에 부정적이어서 사람들이 죄다 나를 피한다는 것을 깨달았았다.
그리고 그 때 내 주변에 사람이 하나도 없어 혼자 처절했었다.
외로움이 그런 것이었다.
이 세상에 남의 부족한 점을 못 알아채는 그런 바보는 한 사람도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바보끼리도 서로를 손가락질하며 비웃는다.
중요한 것은 한 개인에게서 창조적이고 건설적인 가능성을 알아보는 눈이다.
될성부른 것을 찾아내는 능력이 진짜 날카롭고 뛰어난 능력이다.
매사에 긍정적인 사람은 누군가가 부정적이고 비관적인 전망을 내놓으면, 도전의식과 모험정신이 불타오르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에너지 충전을 위해 일부러 그런 사람을 가까이 두고 그의 불만에 찬 비관적 견해를 들어야 하는 경우도 있다.
사태파악을 더 입체적으로 할 수 있고, 동시에 자신의 감추어진 에너지를 끄집어내기 위해서다.
작금의 어두운 현실인식과 상황진단은 동전의 반대편에 해당하는 밝고 긍정적인 면에 눈감는 것이기 때문에 오히려 감추어진 그 부분이 더 반짝거리면서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주는 효과가 있다.
그래서 어둡고 부정적인 시각도 존재가치가 있는 모양이다.
한편 놀랍기도 하다.
어떤 사람의 경우 어쩌면 그렇게도 안 된다 불가능하다는 견해만 외쳐대는 건지.
반면교사로서의 역할이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다.
사물을 부정적으로 어둡게만 보고 살아서는 신나게 즐겁게 살 수 없다는 걸 역설적으로 증명해 주는 것이니까.
물론 남이 안 되는 걸 보고 내심 통쾌해 하면서 그걸로 행복을 삼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이미 회복이 어려울 정도로 망가진 사람이다.
그런 사람은 진정한 기쁨을 모르고 평생을 사는 사람이다.
어쨌든 만물을 창조하신 하느님은 문제를 헤쳐 나갈 방도도 따로 마련해 놓으신 게 분명하다.
그래서 성령님께 도움을 청한다.
인간의 머리로는 헤아릴 수 없는 당신의 지혜를 주시라고.
그러면 하느님은 지혜를 주신다.
우선 볼 수 있는 눈과 들을 귀를 주신다.
그리고 그 지혜는 놀라울 정도로 긍정적이고 창조적이고 건설적이다.
또 밝은 것이 그 특징이다.
신앙의 깊이와 성숙함은 그렇게 하느님을 통해 주어지는 성령의 지혜를 통해 드러난다고 믿는다.
결국은 깨어 있어 가능한 하느님과의 교제와 소통의 문제요, 하느님과의 관계와 훈련에 의해 익숙해져야 하는 문제이니까.
첫댓글 신은 우리에게 견딜 수 있는 만큼의 시련을 주신다고 했나요? 조용한 기쁨과 평화가 우리에게 임하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