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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우리 역사학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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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침탈의 실상 스크랩 친일반민족주의자들이 독립후손을 욕보이는 나라!
天風道人 추천 0 조회 79 14.08.22 01:54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전통있는 가문은 찾아보기 힘들다.
그러나, 다행히 민주당의 이종걸 의원의 집안 내력을 살펴보면
일찌기 군사독재, 친일반민족 집단들에게서는 발견할 수 없는 뚜렷한 민족적 발자취를 재발견할 수 있다.
국가를 향한 끝없는 사랑으로 모든 것을 희생했던 가문, 민주당과 민주당 지지자들은 자부심을 가져도 좋다. 부족하면 메꾸고 다시 채우면서 반민족자들을 내치는 민족적 정체성 있는 정당으로
거듭나야 한다.
'썩은 냄새 풀풀 풍기는 천하의 가증스런 者들...,
천하의 반민족자들과 어찌 같은 하늘을 이고 살 수 있을까?'
이 땅에 서러운 눈물처럼 서리내린 친일과 부패, 부조리, 반민족 부역자들이 국가를 훔치고, 설쳐대는 숨쉬기 힘든 나라!
대한민국!!!
대한민국의 魂을 팔아먹던 者들이 헌법전문의 임정의 가치까지 부정하는 사태는 심각하다 못해
가장 위험스러운 민족적 풍전등화의 위험지경이다.
국회본회의장 대통령 시정연설에서 또다시 대한민국 건국60년이라는 망발을 토해내는 나라!
이제는 깨어있는 국민과함꼐 친일, 반통일, 사대주의,반민족적인 세력들과
일전을 치뤄야
할 판이다.
작금의 경제 위기를 세계 탓, 전정권 탓, 국민 탓으로 책임전가 하는 반국가적, 반역사적, 반헌법적인 국가 파괴행위로 국가적, 역사적, 민주적 정체성이 전무후무한 정권...
 
정치적, 경제적으로 도덕성, 윤리성이 없는 집단이 어떻게 국민의 신뢰를 받겠는가?
돈이면 다 된다는 천박한 자본주의 논리로 금융권의 방만한 경영을 국민에게 빚 보증 서게 하는
안하무인의 반시장적 정체성...
 
이것은 정말 심각한 대한민국의 위기상황이다.
이러한 反민족주의자들의 國魂 침탈은 후손들에게 더 큰 고통과 차별을 겪게 될 것이다.
 
반민족주의자들이 영구집권을 꿈꾸고, 반민족적 역사를 정당화 시키는 현실을 국민의 힘으로
처단, 척결을 해야 한다.
 
한민족의 뿌리를 굳건하게 지키려는 정당성과 국가의 존엄성을 밝은 빛으로 채우려는 국민이
우리들이 되는 날...,
깨어있는, 깨어나는 국민에게는 미래의 희망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오늘 날과 같이 졸부들과 파렴치범들이 국정을 농락 하는 이때에
이육사 선생의 시에서처럼... 조국을 잃은 슬픔보다는 조국의 독립된 미래를 노래한 예지력으로
유라시아를 호령할 초인을 기다리며 기개있는 언어로 호통을 쳤으리라!
 
그 어떤 돈보다, 그 어떤 독재보다, 그 어떤 1%의 국민보다도, 그 어떤 해괴한 논리로
국가를 건설사에 봉헌하는 것 보다 더 소중하고 더 존귀한 대한민국의 정통성 있는 역사는 면면이 이어오고 있다는 사실이다.
민족적인 뼈대도 없는 자들이,국가를 농단하고 거짓말과 국민사냥으로 국운을 갉아 먹을때,
어느 6형제의 이야기는 가슴아픈 우리의 슬픈 역사가 되었다.
그러나, 역사의 핏줄은 허술하게 내림하지 않았으니...
그 기상은 소리없이 전장을 누비는 불멸의 투명하고 청렴한 국혼의 대물림이렸다.
 
과거를 잊어 버리는 者!
결코, 미래를 향해서 나아갈 수 없다.
역사를 부정하는 者!
대한민국과 국민을 침략하는 반민족적인 반역의 무리가 아닐 수 없다.
 
 
 
이회영 선생
밑에서 우측으로 세번째분이 성재 이시영 선생.









 
















전쟁이 나면 제일 먼저 앞장 선 로마의 귀족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전쟁터에서 사망한 영국 이튼



스쿨의 상류층 자제들, 이들 귀족층의 권위는 다름아닌 그들이 품었던 사회적 책임감에서 비롯된

것이다.

 

' 지도층의 솔선수범'이라 불리는 '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프랑스어)'의 전통은

역대 서구사회의 지도층을 관통하는 핵심적 윤리다.

 

그렇다면 한국 전통 명문가에 흐르는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전통은 없는가?

경주이씨 백사공파(白沙公派) 우당(友黨) 이회영 선생의 가문에서 우리는 그 전통을 발견한다.








 






























우당 집안이야말로 한국적 노블레서 오블리주의 사례로 꼽을 수 있는 집안이었음이 근래에 밝혀지고 있다. 우당의 집안은 세간에서'삼한갑족'이라고 일컬어졌다.


조선의 경반(京班 : 서울에 거주하는 양반)과 향반(鄕班 : 시골에 거주하는 양반)을 통틀어 최고 명문가라는 평가를 받았던 집안이다.


명문 중에서도 명문이었던 것이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가장 간단하게 그 이유를 말한다면 백사 이항복이래 10명의 재상을 배출하였기 때문이다. 9명의 영의정과 1명의 좌의정이 바로 그들이다.


해방 이후 이승만 정권 때 우당의 동생인 성재 이시영이 부통령을 지냈으니 성재까지 영의정급에 포함시키면 도합 11명의 재상급 인물이 한 집안에서 배출되었음을 알 수 있다. '재상의 집안'이 지니는 사명감은'재상의 집안에 걸맞은 처신을 해야 한다'로 이어졌을 것 같다. 노블레스 집안이 행해야 할 처신의 전형을 이 집안의 증시조에 해당하는 백사 이항복에게서 발견할 수 있다.



임진왜란시 평안도로 임금의 피난 방향을 정함으로써 임금이 왜군의 포로가 되지 않도록 하고 의주에서는 임금에게 '영호남 3도에 특사를 보내 임금이 요동(만주)으로 가지 않고 끝까지 남아 싸운다' 는 칙명을 내리도록 설득해 국민들을 단결시킨 백사 이항복의 슬기로운 판단은 '재상의 집안에 걸맞은 처신을 해야 한다' 는 사명감으로 후손들에게 그대로 이어졌다.



1910년 일제의 강점에 의하여 한일합방이 이뤄졌을 때 우당 6형제는 더 이상 왜놈의 치하에서 노예가 되어 생명을 이어가는 것은 치욕적이라 판단, 중국망명을 결심했다.
평소에 노비들에게도 반말을 하지 않고 '하소' 를 한 이씨 형제들은 이미 집안의 노비문서를 불태우고 노비들을 해방시켰지만 몇 명의 노비들은 우당과 행동을 같이 하였다.


60명의 대가족을 이끌고 눈 내리는 12월의 날씨에 수 천리 만주벌판을 향해 순전히 자의에 의해 전 재산을 나라에 바치고 만리타향 만주로 떠나는 조선 최고의 귀족집안, 우당.

 

우당 일가족이 두만강을 배로 건널 때도 일화를 남겼다고 한다. 두만강을 건네 준 뱃사공에게 아주 후하게 뱃삯을 지불하였던 것. 뱃삯이 10원이었는데 그 두 배인 20원을 지불하였다. 그리고는 고마워 어쩔줄 몰라 하는 뱃사공에게 우당을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 내게 고마워하지 말고 한 가지 일을 해 주시오. "
" 무엇이든 해드리겠습니다. 말씀만 하십시오. "
" 일본 경찰이나 헌병에게 쫓기는 투사가 돈이 없어 헤엄쳐 강을 건너려 하거든 나를 생각하고 그 사람들을 배로 건너게 해주시오. "
" 어른의 뜻을 따르겠습니다. 제힘이 닿는 한 독립군들을 배로 실어 나르겠습니다. "



만주에 신흥무관학교를 세워 독립운동사에서 가장 빛나는 청산리 전투의 정예요원을 기른 우당 집안.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상소를 올리고 격렬하게 항의한 우당 이회영과 항의 표시로 관직을 그만두며 사회적 기득권을 포기한 성재 이시영.


또한 신민회를 결성하고 간도 용정에 서전의숙을 설립해 현지 교포들에게 민족 교육을 제공하며 모든 재산을 처분하여 일제치하 실향민의 터전과 독립운동의 전지기지를 마련한 우당집안은 나라가 위기에 빠졌을 때 솔선수범으로 대의를 위해 자신을 희생할 줄 아는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몸소 실천한 집안이다.


우당은 마음만 있었으면 모든 부귀영화를 마음껏 누릴 수 있었지만 중국에서 지독한 가난에 시달려야만 하였다.


그러한 고생스러운 삶이 역사평론가 이덕일이 쓴 '아나키스트 이회영과 젊은 그들' (2001)에 소상하게 나온다.


'남개(중국의 톈진)의 우당 이회영 집을 찾아갔더니 여전히 생활이 어려워 식구들의 참상은 말이 아니었다. 끼니도 못 잇고 굶음 채 누워 있었다. 학교에 다니던 규숙의 옷까지 팔아 겨우 입에 풀칠할 정도였기 때문에 누구 하나 나다니지도 못하는 형편이었다'(정화암 자서전)

 

성재 이시영은 부통령으로 있으면서 신흥무관학교와 같은 인재양성 기관을 염두에 두었다. 신흥무관학교의 후신인 신흥대학을 세운 것도 이러한 배경에서다. 신흥대학은 현 경희대의 전신이다.


월남 이상재 선생은 생전에 이렇게 말하고는 하였다.


" 해방되면 우당 집안의 재산은 국가에서 되돌려주어야 한다! "

 

서울 종로구 선교동 농아학교 앞에는 우당기념관이 자리잡고 있다. 우당 집안사람들의 여러 사진들이 전시되어 있어서 볼 만하다. 우당의 지론 가운데 하나가 " 독립을 위해서는 백성을 깨우쳐야 한다. "는 것이고, 이 지론에 따라 우당장학회를 운영하고 있다.


우리나라 1,600여 장학재단 가운데 독립유공자 후손을 돕는 유일한 장학재단이라고 알려져 있다.

 
 

 

 

 

 

유구한 역사와 정통성으로 빛나는 신성한 대한민국의 역사에 테러를 하려는 자들!

역사의 진실은 결코 이 천박하고 반민족적인 역사 거꾸로 쓰기를 용납하지 않을 것입니다.

 

독재자와 살인마를 영웅으로 미화, 각색하려는 썩어빠진 역사의 폐륜아들...

정녕, 너희들이 이 신성한 대한민국 땅에서 활개를 친단 말이더냐?

 

족보도 없는 자들이 왜 이토록 탐욕으로 침탈한단 말인가?

나는 말한다.

너희들은 국가를 배신하고, 민족을 파는 역적의 무리로구나!

 

 

 "대한민국건국60년기념사업위원회의 설치 및 운영에 관한 규정위헌확인"관련 헌법소원을 주도하셨었는데요. 헌법재판소에서 오늘도 심리중에 있는 것으로 뜨고있네요. 지난 8월 26일날 전원재판부로 회부된 내용이 헌법전문의 내용과 같이 건국60주년에 문제가 있는 것으로 결정되었으면 좋겠네요. 독립유공자후손의 한사람으로서 독립유공자를 무시하는 건국60주년은 절대반대합니다. 1948년8월15일은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날이지 건국된 날은 아니니깐요.

- 독립유공자 자유공간님의 댓글에서...

 

 

덧붙이는 글!
독립투사의 '삼대 각오'



일제하 독립투사들은 '삼대 각오'를 하였던 바, "굶어서 죽을 각오, 얼어서 죽을 각오, 적의 총에 맞아서 죽을 각오"였다고 한다.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의 11대 후손으로 6명의 영의정과 1명의 좌의정을 지낸 명문 중의 명문 후예 우당 이회영도 예외가 아니었다.



무진년(1928년) 여름, 하루는 가군(우당 이회영)에게서 온 편지를 보니, 급한 사정으로 규숙, 현숙(우당의 2녀 3녀)을 천진의 부녀구제원으로 보내어 성명을 홍숙경과 홍숙현으로 고쳤으니, 편지할 때엔 '구제원 홍숙경'이라고 만하면 받아본다 하시고, 당신은 규창(3남)이를 데리고 무전여행으로 상해를 가니, 혹 다소간 되거든 현아에게로 부치라고 하시고는 지금 떠나면서 부친다고 하셨으니, 세상에 이런 망창(앞이 아득함)한 일이 또 어디 있으리오.
-  이은숙(우당 부인) <가슴에 품은 뜻 하늘에 사무쳐>





쌀이 없어 밥을 못 짓고 밤이 되었다. 때마침 보름달이 중천에 떴는데, 아버님께서는 시장하실 텐데 어디서 그런 기력이 나셨는지 처량하게 퉁소를 부셨다. 하도 처량하여 눈물이 저절로 난다며 퉁소를 부시니 사방은 고요하고 달빛은 찬란한데 밥을 못 먹어서 배는 고프고 이런 처참한 광경과 슬픈 일이 어디 있겠는가.
 - 이규창(우당 아들) <운명의 여진>




이규창은 북경 시절의 궁핍상을 '1주일에 세 번 밥을 지어 먹으면 재수가 대통한 것'이라며 북경의 제일 하층민들이 먹는 짜도미(雜豆米)로 쑨 죽 한 사발로 끼니를 때우는 때가 많았다고 회고하였다. 심산 김창숙의 자서전에도 이회영의 생활형편이 드러나 있다.



우당 이회영은 성재 이시영의 형이다. 가족을 데리고 북경에 사신 지 여러 해가 되었다. 생활 형편이 몹시 어려운 모양이지만 조금도 기색을 나타내지 않아 나는 매우 존경하였다. 하루는 내가 우당 집에 찾아가 공원에 나가 바람이나 쏘이자고 청하였더니 거절하였다.



그의 얼굴을 살펴보니 자못 초췌한 빛이 역력했다. 내가 마음속으로 의아하게 생각하여 그의 아들 규학에게 물었더니 이렇게 대답했다.




"이틀 동안 밥을 짓지 못 하였고 의복도 모두 전당포에 잡혔습니다. 아버지께서 문밖에 나서지 않으려는 것은 입고 나갈 옷이 없기 때문입니다."




나는 깜짝 놀라 주머니를 털어 땔감과 식량을 사오고 전당포에 잡힌 옷도 도로 찾아오게 하였다. 그 일로 우의가 더욱 친밀해졌다.











































'명동우당길' 명명식 뒤 기념촬영(왼쪽부터 우당 4남 이규동, 손자 이종걸 국회의원, 정동일 중구청장, 홍일식 우당기념사업회장, 손자 이종찬 전 의원)



ⓒ 박도

명동을 걷는 시민들은 한번쯤 우당길의 의미를 되새겨봄직 하다.


한 독립투사의 마지막 말
 
1932년 상해에 머물고 있던 아나키스트 이회영은 일제의 감시로 활동 공간이 매우 좁아졌다. 그 타개책으로 상해를 떠나 만주를 가려다가 11월 17일 대련 일제 수상경찰서에 피검 12일간의 혹독한 고문 끝에 순국하였다. 그가 이 세상에 남긴 말은 다음과 같다고 한다.



세상에 인간으로 태어나서 누구나 자기가 바라는 목적이 있네. 그 목적을 달성한다면 그보다 더한 행복이 없을 것이네. 그리고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그 자리에서 죽는다 하더라도 이 또한 행복이 아니겠는가.




망국민으로 조국을 떠날 때는 우당 6형제였건만 광복 후 다섯째 성재 이시형만 살아돌아오셨다.



 
 
국가의 존멸은 이 시대를 사는 국민이 얼마나 우리의 역사를 똑바로 알고 있느냐가 아닐 수 없다.
한가문의 6형제 중 단한사람만 살아 돌아 온 이 슬픈 역사는 반복할 수 없음이니,
하늘이 울고, 땅이 울고, 국가가 울고, 백성들이 우는 일은 다시는 없었으면 하는 것이
민족의 진정한 정체성이 아닐까?
 
 
첨언!
 

돈이 삶의 모든 것이라는 천민자본주의적 자세는 삼가야 할 터...

 

2008,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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