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평촌 신도시
앞서 안양이 급속도로 발전한 것은 1977년에 서울로 향하는 안양대교가 끊기는 물난리를 겪고 난 이후라고 했다. 그 무렵 안양시내가 빤히 내려다보이는 전화국이 위치한 언덕 빼기로부터 동편으로 비산동을 향하여 고가도로가 설치되었는데 관양동과 인덕원을 거쳐 과천으로 향하는 길이 생기면서 안양은 발전뿐 아니라 확장의 계기도 마련한다. 소싯적 비산동 다리가 넘치면 당시 스푸루지라 부르던 비산동 사는 아이들은 학교를 등교할 수가 없던 시절이 있었는데 그런 격세지감이 없다.
하지만 안양의 동편 그러니까 지금 동안구라 부르는 지역이 발전한 것은 그때부터 또 한참을 지난 후다. 비가 많이 오면 물이 넘치는 동네, 겨울철 연 줄 끊는 장난을 치다가 훨훨 연이 날아갈 때면 우리는 연이 벌터로 가버렸다거나 아니면 범계에 전파연구소까지 날아갔을 것이라고 말을 하곤 했는데 바로 그 동네가 지금의 평촌 신도시다. 소싯적 그 동네는 우리 집에서 가자면 철둑을 지나 쌍개울을 건너야 했다. 안양은 알다시피 동편에는 양기 어린 관악산 줄기의 삼성산과 모랍산이 있고 서쪽에는 음기서린 수리산이 있다. 그런데 그 산에서 내려오는 물들은 수리산의 경우 산본리라는 곳을 거쳐 쌍개울로 향했고 삼성산은 안양유원지 물로 쓰임을 다하고 쌍개울 물과 합쳐져 안양천으로 흘렀다.
쌍개울에서 과천쪽으로는 관평동이라는 곳은 모래밭이 있었고 연이어 절대농지로 푸른 들녘을 자랑했었는데 지금 평촌 신도시로써 그 시절이 상상이나 되겠는가. 과천에서 오자면 인덕원이 나온다. 그쯤부터 안양이라 할 것인데 인덕원은 조선시대 내시(內侍)들이 살던 곳이다. 이들은 비록 거세(去勢) 된 몸이지만 환관이라 하여 궁중을 출입하여 임금과 가까이 있는 신분으로 높은 관직을 역임하였다. 그래서 남에게 덕화를 베푸는 사람이 사는 곳이란 의미로 인덕(仁德)이라 칭했다가, 공용(公用) 여행자의 숙식을 제공하기 위하여 원(院)을 설치하면서부터 인덕원(仁德院)이라 부른데서 연유한다.
지금의 관양1동인 가운데말(中村)은 인덕원에서 집단을 이루며 살던 내시들이 죽으면 묻던 장소였으며 지금의 달안 마을은(達安洞) 1944년 박흥식(朴興植1903년생)씨가 안양에 있는 조선직물 주식회사 (구 금성방직 현 대농단지라 칭하는 위치)를 인수한 후, 조선비행기주식회사의 비행기 활주로 공사를 시작할 만큼(1945년 광복으로 중단) 지역이 넓어, 비가 오면 가릴 것이 없어 삿갓을 쓰고 달아나야 비를 피할 수 있다 하여, 삿갓들 (笠坪) 또는 다라니(達安洞)이라 불렀는데, 일명 섬마을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달안이는 허허벌판이라 겨울이면 추워 사람이 살지 못하는 불모지라 하여, 농경지 외에 민가가 없었다가 1940년대 초에 의지할 곳 없는 외지 사람들이 터를 잡고 살기 시작하면서 취락이 이루어진 곳이다.
그리고 우리가 수푸르지 (林谷洞, 林川)라 부르던 비산사거리 동북쪽에 위치한 그곳은 지금의 비산1동으로 이 마을은 깊은 골짜기에 나무와 숲으로 둘러싸인 고을이라 하여 ‘수푸루지(林谷洞)’이라 칭하였고 또 마을 앞으로 큰 하천(안양천, 임곡천)이 흐른다 하여 ‘수풀내(林川)’라 부르기도 하였다. 수푸루지는 1978년 대림대학(비산동 526번지의 7호)이 건립되고, 이어 비산동 신시가지가 형성되면서 인구가 급격히 증가하였다. 예전에는 수푸루지 내에서도 동쪽지역을‘건너말’, 서쪽지역을 ‘아랫말’, 북쪽지역을 ‘웃말’이라 칭했다.
그밖에도 과천을 넘어 과거를 보러 가는 때 장차 귀인이 될 사람들이 묵어갔다하여 생긴 이름 귀인동, 인덕원 남쪽에 위치한 마을로, 산이 없는 허허 벌판에 자리 잡고 있어 우리는 벌터라 불렀던 벌말 (坪村), 가운데말 동쪽에 위치하여 산림이 울창했을 뿐만 아니라, 인근의 다른 마을보다 부자가 많이 산다하여 불렀던 부림말 (富林洞)도 있고 비록 마을은 작지만 주변에는 샌말, 뺌말, 오촌말 등등 논과 마을 산림 그리고 하천이 넓게 포진하였던 곳이 지금의 평촌 신도시다.
사람들은 안양은 어떻게 생겨 먹은 것인지 잘 몰라도 평촌 신도시 하면 잘 안다. 수도권의 신도시 1기생이기 때문이다. 서울 도심에서 약 남쪽 20㎞ 지점에 위치한 평촌 신도시는 주택 공급을 통한 부동산 가격의 안정과 투기 풍조 해소, 수도권의 기능 분담을 목적으로 건설된 수도권의 1기 신도시(분당, 산본, 일산, 중동, 평촌) 가운데 하나다. 이 신도시는 안양시의 신 중심업무지역, 도시 내 신시가지 조성을 목적으로 앞서 말한 동네 즉 평촌동, 비산동, 호계동, 관양동 일원에 건설됐다. 1989년 8월에 한국토지공사가 신도시 건설을 시작했으며, 1995년 12월에 준공됐으며 그 동네는 1992년 동안구로 승격됐다.
참 아이러니한 게 부동산이다. 친구네는 당시 벌터에 절대농지를 소유하고 있었는데 싼 값에 강제 수용을 당하고 그 대가로 평촌 신도시에 아파트 한 채를 얻었다. 그런데 수용이 안 된 땅 주변 사람들은 졸지에 건물을 올려 부자가 되었다. 도로 하나 차이로 삶이 갈라지는 아이러니, 이는 우리나라만이 가능한 것이 아닌가. 우리 집도 그 무렵 교회에 집을 팔고 호계동으로 진출했다. 호계동은 쌍개울로 쳐 개울 건너기전의 곳으로 평촌 신도시를 마주보는 곳이라고 보면 맞다.
당시 우리는 그 동네(현 호계1동)를 금성마을 (金星村)이라 불렀는데 일제강점기만 해도 고구마.콩.감자 등이나 심던 박토로, 한때는 일본인 들이 소나무, 잣나무 등을 가꾸던 묘포가 있었을 만큼 불모지였는데, 1970년대에 이르러 럭키금성 그룹에서 무주택 사원을 위한 새 주택을 집단으로 신축, 입주하면서부터 취락이 이루어졌고 바로 군포쪽으로는 금성통신과 금성전선이 자리했던 곳이기도 하다. 알다시피 금성이라 하면 럭키와 LG그룹의 전신이 아닌가. 현재로서는 그 땅 값만 해도 엄청날 것인데 그들은 그러니까 공장을 해서 돈 벌고 훗날은 땅에 아파트를 지어 벌고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바로 이런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우리 집도 당시 한창 유행하던 아파트 추첨에 당첨이 돼 당시는 럭키 아파트, 현재는 LG 아파트라 칭하는 곳으로 1993년도 이사를 했다. 그러니까 만안구에 위치한 옛 고구마 밭 터전의 집에서 13년 지나 동안구 호계동으로 이사를 한 것이다. 만안구는 옛 안양 사람들이 여전히 사는 반면 동안구는 평촌 신도시로부터 외지에서 몰려 온 사람들이 사는 곳이다. 내 친구 이종걸(민주당 5선의원)이 그가 살던 곳 만안구에서 버티는 이유는 아무래도 본토 배기와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안양에서 지금 제일 번화한 곳은 범계역 주변이다. 범계역이라는 역명은 호계동(虎溪洞)의 "호(호랑이, 虎)"를 순 한국어로 옮긴 것인데, "계(골짜기, 溪)"자가 한자지만 역명에 한자가 없다. 공사 당시에는 호계역(虎溪驛)으로 불렸으나, 울산광역시에 있는 동해남부선 호계역과 구분하기 위하여 현재의 명칭으로 정해진 것으로 중국어식 명칭은 凡溪인지라 그렇게 개칭이 된 것이다.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 분명 호계동이 한 자락 했을 것인데 호랑이놀이터인 쌍개울을 덮고 벌터를 거두더니 기상천외한 괴물도시를 단 몇 년 만에 뚝딱 지어냈다. 그런 신도시는 어느 새 20년이 지나 재건축 말이 요즘 심심치 않게 나온다. 평촌 신도시 그때 열광처럼 사람들 마음을 또 오르락내리락 울겨먹을 시즌이 곧 도래할 듯싶으니 범보다 무서운 게 곶감이란 말도 아주 먼 옛 이야기이고 땅 따먹기가 더 무서운 존재가 아닐까 싶다.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고 라는 말은 이쯤 ‘일개 범 따위가 하늘같은 부동산 모르고 체신 머리 없이 까불고 있어.’ 로 암만해도 바뀌어야 할 것 같다.
첫댓글 모랍산이 아니라 모락산이 아닌지요? 몇가지 찾아보았는데요..................혹시 모랍산이면 부연설명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