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박달촌
그렇게 조선하 상류 쪽으로 약 2리 정도 올라가니 박달나무 숲이 나타난다.
온대지방에서는 박달나무가 가장 단단한 나무로 알려져 있다.
옛날에는 각종 병기 兵器, 포졸들의 육모방망이, 수레바퀴 살, 절구공이, 홍두깨 등 단단한 야문 재질이 필요한 연장은 대부분 박달나무로 만들었다.
또 ‘개화 改火’라 하여 계절마다 나라에서 불을 만들어 지방관서로 내려보낼 때, 겨울에는 박달나무 판에다 구멍을 뚫고, 회화나무 막대기로 비벼서 불을 일궜다.
목재의 질이 단단하여 이렇게 쓰임새가 많다보니, 박달나무는 자라기가 무섭게 잘려 나가기 바쁘다.
박달나무는 흔히 우리 민족의 시작을 알린 나무라고 한다.
병충해에 강하고 재질이 야물고 단단하여 그런가 보다.
사실 많은 사람이 선호 選好하고 사랑한다.
단군왕검의 탄생에 보면 환웅은 무리 3,000을 거느리고, 태백산 신단수 아래에 내려와서 세상을 다스린다.
단군과 신단수의 단은 《삼국유사》에서는 제단 단 ‘壇’, (제왕운기)에서는 박달나무 단 ‘檀’으로 기록하여 글자가 다르다.
삼국유사에서는 제사 의례 祭事 儀禮를 소중히 여겨, 제단 단 ‘壇’을 사용한 것으로보여진다.
조선 후기의 학자들이 단군을 재조명할 때 거의 《제왕운기》의 단 檀으로 받아들여 우리 민족은 박달나무 아래의 자손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단군신화의 단이 실제로 박달나무라고 단정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삼국유사》에는 ‘단나무 壇樹’라 하여 오늘날의 당산나무나 당나무의 어원이 되었다.
비록 훗날 《제왕운기》에는 박달나무 檀라고 하여 혼란이 있지만, 단군조선의 단은 특정 나무가 아닐 가능성이 크고, 설령 특정 나무라고 하더라도 박달나무보다는 당산나무로 많이 쓰인 느티나무일 가능성도 배제 排除 할 수 없다.
단군조선의 단 檀은 단순히 박달나무로만 국한 시킬 것이 아니라, 크고 단단하고 좋은 나무를 대표하는 포괄적인 뜻으로 보아야 할 것 같다.
박달나무는 갈잎나무로 한 아름이 넘는 큰 나무로 자랄 수 있다.
한반도에서는 서해안의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는, 어디에서나 깊은 산 중턱 이하의 습기가 적당하고 기름진 땅에서 잘 자란다.
주변 조건이 좋아 크게 자라면, 키 30미터, 줄기 둘레가 두 아름 정도에 이른다. 추위에는 강하나 소금 바람에는 약하여 바닷가에서는 잘 만날 수 없다.
박달나무 숲을 지나니 조그마한 마을이 나타난다.
주위에 박달나무가 많아 박달촌이라 한다.
박달촌 마을의 크기는 20여 호가 됨직하다.
약, 이리 二里 위쪽 상류에 또 10여 가옥 家屋이 작은 마을을 형성하고 있다.
크게 통틀어 박달촌이라 일컫는데,
보통 상 박달촌, 하 박달촌으로 호칭되고 있다.
마을 왼편에는 조하로 유입되는 두 길 정도 넓이의 개울이 살짝 굽이치며, 동네 아낙네들이 이용하는 빨래터를 만들고는 조용히 조선하로 흘려 들고 있다.
개울 바로 옆 둔치 위에 갈대를 엮어 지붕을 얹은 집이 십칠 선생의 거주지다.
마당이 훤히 보이는 어깨높이의 돌담 안에 ‘ㄱ’자 형태의 집으로 남향을 바라보는
전형적인 동이족의 주거 형태다.
남향의 대문의 문짝은 싸리나무로 엮은 사립짝이 있으나, 늘 열려있는 것처럼 보였고, 사람 키 높이의 큰 선 돌이 출입구 양쪽에 세워줘 있었다.
양쪽의 입석 立石 두 개가 돌 담장과 어울려 제법 운치가 있어 보인다.
대문 옆에는 담장을 따라 튼실한 큰 대추나무 세 그루가 서 있다.
대문 앞에는 먼저와 기다리고 있던, 향기가 싸리 빗자루로 마당을 쓸고 있었다가 중부 일행을 맞는다.
이중부와 한준은 석늑을 따라 대추나무에 나귀를 묶어두고, 향기의 안내로 마당에 들어섰다.
대문 안쪽에는 키가 두길 정도 되어 보이는 커다란 살구나무가 한그루가 터줏대감
마냥 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살구나무 아래에는 사람들이 앉기 편하게 넓직한 살평상이 두 개가 자리하고 있었다.
상당히 넓은 마당에 들어서니 상큼한 살구꽃 향기가 그윽하다.
왜 소녀의 이름이 ‘향기’인지 이해가 가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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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연재하시느라 수고 많으시네요.
읽으신 분들 추천해 주시는건 어떨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