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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궁 건축과 성전의 두 기둥 / 열왕기상 7:1-51
기록이외에 남겨진 역사의 이야기로, 예술품 벽화나 건축술 등이 있습니다. 성경의 이야기들은 워낙 오랜 시대의 내용들이어서, 그 시대의 물건들을 우리가 직접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은, 대표적인 건축물이며 성구들에 대하여, 비교적 소상한 기록들을 남겨주고 있어서, 우리는 상상으로 그 물건들과 건축물들의 형태를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진리를 가르쳐 주시기 위해 비유를 동원했듯이, 하나님은 건축물이나 물건 등에다 의미를 항상 담으셨습니다. 성막이나 성전의 물건에는 깊이 묵상해보면, 참으로 신비롭고 깊은 의미들을 찾아낼 수가 있습니다. 광야 생활 속에서 하나님을 섬긴 장소였던 성막은 그 이동의 편리성 때문에, 가벼운 천막이나 나무가 많이 사용되었고, 장식은 주로 금도금이 많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솔로몬시대에 세워진 성전은, 그 규모도 크거니와, 거기에는 금속이 많이 사용되었는데, 가장 많이 쓰인 재료가 놋입니다.
본문 앞부분은 솔로몬이 자신이 기거하는, 왕궁을 건축한 것에 대한 내용입니다. 1절에서 “솔로몬이 자기의 왕궁을 십삼 년 동안 건축하여, 그 전부를 준공하니라”고 말하는 것처럼, 솔로몬은 자신의 궁을 13년이라는 기간 동안 건축을 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것을 두고, 여러 생각을 이끌어 내기도 합니다. 먼저 솔로몬이 성전을 짓고, 다음에 자신을 위한 왕궁을 지었다고 하면서, 교회 건물을 마련한 후에, 자기 집을 마련한 것이 옳다는 식으로 적용하기도 합니다, 성전은 7년 동안 건축했는데, 왕궁은 13년 동안 건축한 것을 두고, 성전보다 자신의 집을 더 크게 짓는, 솔로몬의 잘못으로 말하기도 합니다. 물론 이러한 말들은, 성경의 의도와는 전혀 상관없이, 사람을 이용하여 자기 배를 불리려는 속셈에서 나오는, 악한 말에 불과할 뿐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솔로몬이 왕궁을 건축한 기사가 기록되어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6장에서는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한 일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본문 13절부터도, 성전에서 사용하는 여러 기구들을 제작하는 내용입니다. 곧 성전건축을 준비하는 5장까지 포함하면, 5장-7장까지는 성전건축과 연관된 내용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이에, 갑자기 솔로몬의 왕궁 건축에 대한 이야기가 삽입되어 있는 것입니다. 단지 솔로몬이 왕궁을 건축했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한 것이라면, 성전 건축에 대한 이야기가 다 끝난 후에, 왕궁 건축 이야기를 하는 것이 순서적으로 맞을 것입니다.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하는 도중에, 왕궁이 건축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순서적으로 따진다면, 8장에 등장하는 성전 낙성식에 대한 이야기 다음에, 왕궁 건축에 대한 내용이 기록되어야 순서적으로 옳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역대하에서도 솔로몬이 성전과 궁을 건축한 것에 대해 언급을 하는데, 열왕기와는 다르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역대하에서는 2:1절에서 “솔로몬이 여호와의 이름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하고, 자기 왕위를 위하여 궁궐 건축하기를 결심하니라”고 말한 후에, 성전 건축과 연관된 말을 하다가, 8:1절에서 “솔로몬이 여호와의 전과 자기의 궁궐을, 이십년 동안에 건축하기를 마치고”라는 말을 함으로써, 성전과 궁의 건축과 연관된 말을 마칩니다. 그러니까 역대하에서는 성전을 건축하는 이야기 중간에, 왕궁 건축에 대한 이야기를 언급하지 않으며, 왕궁 건축에 대한 것 역시 열왕기서처럼 자세하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성전과 함께 묶어서 간단하게 언급하는 것으로 그칠 뿐입니다.
그런데 왜 열왕기서에서는 성전 건축 이야기 중간에, 왕궁 건축에 대한 이야기를 자세하게 나열하고 있을까요? 이것을 이해하려면, 열왕기서와 역대기의 차이에 대해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곧 열왕기와 역대기가 각기 어떤 관점에서 기록되었는가를, 살피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간략하게 말씀드린다면 열왕기서는 인간으로서는 어떤 왕도, 다윗 언약을 성취할 수 없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순종함으로써, 이스라엘이 보존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열왕기서는 선지자적인 관점에서, 기록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인간으로서는 안된다는 것을 선포하는 것이 선지자적인 관점이기 때문에, 죄를 드러내고 책망하고, 심판을 경고하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열왕기서에는 솔로몬이 이방여인과 결혼하고, 다른 신을 섬긴 것에 대해 언급하고 있지만, 역대기에서는 솔로몬의 그러한 행적에 대해서는, 가려주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역대기서는 인간으로서는 안되고, 오직 하나님이 택하여 세우신 영원한 왕, 곧 메시야로 말미암아 언약이 성취되어짐을 말합니다. 그래서 다윗의 여러 죄들에 대해서는, 가려지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열왕기서와 역대기서의 서로 다른 관점을 생각해 본다면, 역대기에서는 간략하게 언급만 하고 지나가는, 솔로몬의 왕궁 건축에 대해, 그 기간과 구조까지 자세하게 언급하고 있으며, 그것도 성전 건축에 대한 내용 사이에 삽입되어 있는 이유를 짐작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9-11절 “이 집들은 안팎을 모두 귀하고 다듬은 돌로 지었으니, 크기대로 톱으로 켠 것이라. 그 초석에서 처마까지와, 외면에서 큰 뜰에 이르기까지 다 그러하니, 그 초석은 귀하고 큰 돌, 곧 십 규빗 되는 돌과 여덟 규빗 되는 돌이라. 그 위에는 크기대로 다듬은 귀한 돌도 있고 백향목도 있으며” 이 구절을 보면 귀하다는 말을 세 번이나 반복하면서, 솔로몬의 왕궁이 귀한 재료로 화려하게 건축되었음을 강조함을 볼 수 있습니다. 2-6절 “그가 레바논 나무로 왕궁을 지었으니, 길이가 일백 규빗이요, 너비가 오십 규빗이요, 높이가 삼십 규빗이라. 백향목 기둥이 네 줄이요, 기둥 위에 백향목 들보가 있으며, 기둥 위에 있는 들보 사십오 개를 백향목으로 덮었는데, 들보는 한 줄에 열다섯이요, 또 창틀이 세 줄로 있는데, 창과 창이 세 층으로 서로 마주 대하였고, 모든 문과 문설주를 다 큰 나무로 네모지게 만들었는데, 창과 창이 세 층으로 서로 마주 대하였으며, 또 기둥을 세워 주랑을 지었으니, 길이가 오십 규빗이요, 너비가 삼십 규빗이며, 또 기둥 앞에 한 주랑이 있고, 또 그 앞에 기둥과 섬돌이 있으며” 이렇게 말하는 것을 보면, 그 규모면에서도 아주 대단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왜 이토록 왕궁의 규모와 그 화려함에 대해 자세하게 언급을 하는 것일까요? 단지 솔로몬이 자기 왕궁을, 얼마나 크고 하려하게 지었는가를 말하기 위해서일까요? 그래서 성전보다 더 크고 좋은 왕궁을 건축한, 솔로몬의 불충에 대해 책망하기 위한 것일까요? 그렇게 되면 하나님은 겨우 건물을 가지고, 솔로몬과 경쟁하는 것 밖에 되지 않습니다. 내 집보다 네 집이 더 크고 좋다는 것으로, 심기가 상하신 하나님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이미 하나님은, 사람의 손으로 지은 집에 거하지 아니하심을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곧 하나님은 건물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으신 것입니다. 인간 편에서 아무리 ‘이것은 하나님이 거하실 성전입니다’라고 한다고 해도, 하나님이 거하실 집은 따로 있기에, 인간이 지은 건물은 거들떠 보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그런 하나님께서 왕궁을 성전보다 더 크고 좋게 지었다고 해서, 그것으로 트집을 잡으시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배당이 내가 사는 집보다 크냐 적냐는 것은, 신앙과 아무런 연관이 없는 것입니다. 예배당 건물을 마련하고, 내 집을 마련해야 한다는 것도 억지일 뿐, 신앙과 아무런 연관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배당이라는 건물에는, 전혀 관심이 없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거하시는 집은 그리스도시고, 그리스도의 몸인 성도, 곧 여러분들이기 때문에, 자신의 몸은 자신의 것으로 여기지 않고, 하나님의 것으로 여기며 살아가는 것이 신앙인 것입니다.
그러면 본문의 왕궁 건축에 대한 내용이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은 무엇일까요? 먼저 솔로몬이 이렇게 크고 화려한, 왕궁을 건축한 이유부터 생각해야 합니다. 8절 “솔로몬이 거처할 왕궁은, 그 주랑 뒤 다른 뜰에 있으니, 그 양식이 동일하며, 솔로몬이 또 그 장가 든 바로의 딸을 위하여 집을 지었는데, 이 주랑과 같더라.” 이것을 보면 솔로몬의 왕궁 건축은, 여인과 연관이 있음을 눈치 챌 수 있습니다. 왕상 11:1절을 보면 “솔로몬 왕이 바로의 딸 외에, 이방의 많은 여인을 사랑하였으니, 곧 모압과 암몬과 에돔과 시돈과 헷 여인이라”는 말을 하고, 3절에서는 “왕은 후궁이 칠백 명이요, 첩이 삼백 명라. 그의 여인들이 왕의 마음을 돌아서게 하였더라”고 말합니다. 이것을 보면 솔로몬에게는 사랑하는 많은 여인들이 있었고, 이미 솔로몬의 마음은 여인들에게 붙들려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솔로몬은 여인들을 위해, 크고 화려한 왕궁을 건축한 것임을 짐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솔로몬의 이러한 실상을 염두에 둔다면, 6:12절에서 성전을 건축하고 있는 솔로몬에게 “네가 지금 이 성전을 건축하니, 네가 만일 내 법도를 따르며, 내 율례를 행하며, 내 모든 계명을 지켜 그대로 행하면, 내가 네 아버지 다윗에게 한 말을, 네게 확실히 이룰 것이요”라는 말씀을 하시는 의도도,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미 그 마음이 하나님이 아닌, 다른데 빼앗긴 상태에서 성전을 짓는다고 해서, 그것으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보존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손으로 지은 성전을 바라볼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세우실 성전을 바라봐야 함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랑하는 여인들을 위해, 왕궁을 건축하는 솔로몬과 다를 바가 전혀 없습니다. 우리도 솔로몬과 똑같이 살아가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행동하는 것을 바라보십시오. 여러분이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가를 바라보십시오. 그 중심에는 여러분이 사랑하는 것을 위해, 살아가는 자신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 우리가 우리의 손으로 무엇을 한들, 그것이 하나님께 기쁨이 되겠습니까? 그러므로 성도가 바라볼 것은, 자신의 손으로 행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행하신 그 일을 바라봐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이제 성전 건축에 대한 내용 사이에, 여인에게 마음을 뺏긴 솔로몬이, 여인들을 위해 왕궁을 건축하는 내용을 삽입한 이유를 알겠습니까? 한마디로 ‘너는 이런 인간 밖에 안되는데, 그런 네가 날 위해 집을 건축한다고 해서, 달라질 것이 무엇이냐?’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전 건축과 상관없이, ‘내 법도를 따르며, 내 율례를 행하며, 내 모든 계명을 지켜 그대로 행하면’이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이미 법도와 율례에서 벗어나 있는 솔로몬에게, 이런 말씀을 하신다는 것은, 결국 솔로몬으로서는 안된다는 것을 선언하시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다른데 빼앗기지 않았다고 장담할 수 있습니까? 말씀드린 대로 우리의 현실과, 솔로몬이 결코 다르지가 않습니다. 그런 우리가 종교적 행위를 갖춘다고 해서, 그것을 신앙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러한 인간의 현실에서 견해가 다르기 때문에, 결국 서로 다른 목소리를 내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열왕기서는 인간의 현실과 한계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인간의 한계는, 어떤 식으로 해결이 되는 것입니까? 해결 방책은 바로 여호와께 있습니다. 그것은 자비를 주시는 여호와께 자비를 구하라는 것입니다. 긍휼을 베푸시는 여호와께 긍휼을 구하라는 것입니다. 여호와께 자비를 구하고 긍휼을 구한다는 것은, 인간의 현실과 한계에 대해 직시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인간의 손으로 안되는가를 알았기에, 자신의 손으로 행한 그 어떤 일도 바라보지 않고, 오직 여호와의 긍휼과 자비를 구할 뿐입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자를 자기 백성으로 여기시고, 긍휼을 베푸시고 자비를 베푸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 한계를 절감하고, 긍휼을 구하고 자비를 구하는 것까지, 여호와로 말미암은 것임을 생각한다면,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있을 것은, 오직 감사밖에 없음을 다시금 절감하게 되는 것입니다. 죄 용서는 하나님의 긍휼에 의한 것입니다. 우리의 손으로 행한 무엇으로도, 죄 용서를 이룰 수는 없습니다. 긍휼을 받았으니 그에 대한 보답으로, 뭔가를 해야 하지 않느냐는 것은, 진정한 긍휼을 맛보지 못한 것입니다. 긍휼로서 죄 용서를 받았다고 하지만, 죄가 없어진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마음은 여전히 다른데 빼앗겨 있습니다. 그러므로 날마다 긍휼이 아니면 살 수 없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이것을 안다면 긍휼에 대한 보답을 하겠다는, 교만한 생각은 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의 현실을 제대로 파악하고, 인간의 현실과 한계가 무엇으로 해결되었는가를 바라보기를 바랍니다. 만약 하나님의 긍휼이 보인다면, 자연히 감사하게 되어질 것입니다. 이것이 성도입니다.
그렇다면 본문에 등장하는 두 기둥도, 하나님의 이러한 의도를 담고 세워져 있음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21절 “이 두 기둥을 성전의 주랑 앞에 세우되, 오른쪽 기둥을 세우고 그 이름을 야긴이라 하고, 왼쪽의 기둥을 세우고 그 이름을 보아스라 하였으며” 솔로몬의 성전에 두 기둥이 있으며, 그 기둥의 이름은 오른쪽의 것이 야긴, 왼쪽의 것이 보아스라고 하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내용입니다. 이 두 기둥의 이름은 각기 뜻이 담겨 있는데, 야긴은 ‘저가 세우리라’는 것이고, 보아스는 ‘그에게 능력이 있다’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이 두 기둥의 존재와 그 이름의 뜻을, 교회에 초점을 두고 이해함으로써, 결국 교인들에게 교회의 성장을 위해 큰 힘이 되는 존재를, 하나님이 세우신 기둥이라는 식으로, 강조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 것도 많음을 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우셨는데, 하나님이 세우신 교회의 부흥을 위해, 성전에 세워진 두 기둥처럼, 능력이 있는 자를 교회의 기둥으로 세우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할 때도 ‘우리 교회에 야긴과 보아스처럼, 기둥과 같은 일군을 세워주십시오’라고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솔로몬이 두 기둥을 세우고, 야긴과 보아스라는 이름을 붙이면서, 과연 성전의 부흥과 발전을 염두에 두고 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문의 두 기둥에 대한 내용을, 교회의 성장에 도움이 되는 기둥과 같은 일군으로 연결하여 해석하는 것이야 말로, 성경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뜻과 마음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는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솔로몬은 자기 멋대로 성전을 건축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허락과 지시 아래, 성전을 건축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성전의 구조와 크기 모두가, 하나님의 지시에 따른 것입니다. 성전이 비록 이방인인 두로 왕 히람에 의해 건축되어지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성전을 히람이 건축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건축하셨다고 말하는 것도, 히람 왕도 결국 하나님의 다스림 아래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전을 통해서, 하나님이 보여주고자 하시는 것을 볼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성전의 두 기둥은, 건축물을 지탱하기 위한 용도가 아닙니다. 21절을 보면 두 기둥은 성전의 주랑 앞에 세웠다고 말합니다. 곧 성전의 입구에 세워짐으로써, 성전을 들어가기 위해서는, 이 두 기둥을 통과하도록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두 기둥은, 성전이라는 건축물과 연관된 것이 아니라, 성전에 들어오는 자들과 연관되어 건축된 것이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특이한 것은 기둥은 어쨌든 건축물인데, 건축물에 이름을 지어 붙였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기둥에 이름을 지어 붙임으로써, 이름에 하나님의 속성을 담아 성전에 들어오는 자들에게,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나타내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두 기둥의 이름을 통해서, 우리는 무엇을 알 수 있습니다. 야긴은 ‘저가 세우리라’는 것이고, 보아스는 ‘그에게 능력이 있다’라는 뜻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과연 ‘저가 세우리라’는 이름으로, 무엇을 보여주고자 하시는 것일까요? ‘저가 세우리라’는 것은, 하나님이 세우신다는 것을 뜻합니다. 솔로몬의 손으로 세워진 성전 앞에, ‘하나님이 세우신다’는 기둥을 세워둔 것은, 결국 사람의 손으로 세워진 것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님을 알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그에게 능력이 있다’라는 뜻의 기둥을, 같이 세워둔 것입니다. 사람의 능력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만 세워지고 유지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볼 때 두 기둥이 보여주는 것은, 이스라엘은 하나님에 의해서만 세워질 것이고, 하나님의 능력으로만 유지된다는 의미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사무엘하 7:5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네가 나를 위하여 내가 살 집을 건축하겠느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11절에서는 ‘여호와가 너를 위하여 집을 짓고’라는 말씀을 하시고, 16절에서는 ‘네 집과 네 나라가 내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왕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다윗에게 하신 하나님의 언약임을 생각해 보면, 솔로몬 성전에 세워진 두 기둥의 이름에는, 하나님이 하신 다윗언약이, 하나님에 의해서 성취되어질 것임을 의미하는 내용이 담겨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결국 하나님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성전에 들어오면서 자신들의 손으로 세운 성전을 바라보지 말고, 자신들의 능력도 생각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 바라볼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왕상 6:7절을 보면 “이 성전은 건축할 때에 돌을 뜨는 곳에서, 다듬고 가져다가 건축하였으므로, 건축하는 동안에 성전 속에서는, 방망이나 도끼나 모든 철 연장 소리가 들리지 아니하였으며”라는 말을 합니다. 당시 성전을 건축할 때 사용되는 돌을, 성전에 가져와서 다듬은 것이 아니라, 채석장에서 다듬어 가져옴으로써, 성전에서는 돌과 돌을 끼워 맞추기만 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성전 건축에 도끼나 철 연장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는 것을, 예배당을 건축할 때는 교인이 서로 충돌하고 다투는 일 없이, 은혜롭게 마쳐야 하는 것으로 해석하기도 하지만, 사실 이것은 인간의 행위와 공로와 노력을, 인정하지 않으신다는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앞서 말한 대로 왕궁건축도, 바로 그런 의미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비록 솔로몬이 하나님을 위해 성전을 건축한다고 하지만, 이미 마음을 이방여인에게 뺏긴 상태에서, 성전을 건축한다는 것은, 결국 형식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속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자기 손으로 행하는 형식을 바라보면서, 자신이 마치 하나님을 위하고 섬기는 것으로, 착각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형식에 잘 속아 넘어갑니다. 형식에 잘 속아 넘어간다는 것은, 자신의 손으로 행하는 형식에, 어떤 의미를 두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가령 큰 소리로 찬송하는 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신다거나, 헌금할 때 낡은 헌 지폐보다는, 은행에 가서 새 지폐로 바꾸어 헌금하는 것을, 하나님을 사랑하는 정성으로 여긴다거나, 기도할 때 큰 소리로 두 손을 들고 하는 것을, 하나님이 더 빨리 응답하신다고 생각하는 이 모든 것이, 자신의 손으로 행하는 형식에 속는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그럴듯한 형식을 동원한다고 해도, 우리의 속은 이미 내가 사랑하는 다른 것에, 빼앗긴 상태일 뿐입니다. 그래서 형식이 아무리 좋아 보인다고 해도, 형식을 앞세워 거룩의 자리에 나아갈 수는 없는 것입니다. 성도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무슨 뜻이겠습니까? 오직 예수님의 피 흘림만 바라보고 의지할 뿐, 우리의 손으로 만들어 낸 것은, 그 어떤 것도 바라보지 않겠다는 것이 아닙니까? 우리의 그 어떤 형식도, 우리의 손으로 행한 그 무엇도, 예수님의 피 흘림 앞에서는 거부의 대상일 뿐입니다.
두 기둥은 성전을 바라보는 이스라엘로 하여금, 그들이 진심으로 바라보고 의지할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화려한 건물인 성전을 보지 말고,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능력만을 의지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전의 두 기둥의 존재 의미입니다. 야긴과 보아스는 하나님이 하신다는, 언약의 증표로 세워진 것입니다. 곧 야긴과 보아스를 세움으로써, 사람의 손으로 지은 성전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성전에 들어오면서 자신들의 손으로 세우고, 자신들의 눈에 보이는 것이 참된 성전이 아니라, 하나님이 세우시는 성전만이, 참되다는 것을 생각해야 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야긴과 보아스는 하나님이 세우신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고, 결국 하나님의 손으로 세우신 참된 성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성경은 우리의 시선을, 오직 예수님께만 두고자 합니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 오직 ‘예수님뿐입니다’라는 고백을 하는 자로 나오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성전을 지으라고 하신 것은,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나타내기 위함이었고, 성전에 두 기둥을 세우게 하시고, 야긴과 보아스라고 하게 하신 것도, 이스라엘 안에 여호와가 누구신가를 나타내기 위함입니다. 여호와가 누구신가를 안다면, 그는 여호와 외에 다른 것을 바라보지 않습니다. 사람이 손으로 행한 그 어떤 것도, 자신을 성도 되게 할 수 없음을 분명히 인식하게 됩니다.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하나님이 세우심으로써, 하나님의 성전으로 존재하게 됨을 믿는 자로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자신이 손으로 행한 모든 것에, 가치를 두지 않는 것입니다. 참으로 귀하고 가치 있는 것은, 예수님이 행하신 십자가의 피 흘림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솔로몬의 성전에 야긴과 보아스라는 두 기둥이 굳게 서서, ‘이스라엘은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하나님에 의해 세워진다’는 것을 드러내고 있는 것처럼, 오늘날 우리에게는 예수님이, 야긴과 보아스라는 두 기둥처럼 굳게 서서, 우리는 하나님에 의해 세워지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유지되고 있음을 드러내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만을 바라보는 성도는, 그 어떤 행위에도 형식에도 매이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죄는 자신의 손으로 행한 것에 의미를 두고, 가치 있는 것으로 높이기를 포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손으로 행한 것을 바라본다는 것이, 곧 예수 그리스도를 보지 않음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성도라면 자신의 행함에서, 그리스도를 보게 될 것입니다. 악 밖에 나올 것이 없는 나 같은 자에게서, 믿음의 모습이 맺어진다면, 그것은 예수님의 능력이고, 성령이 함께 하시고 다스리신 흔적임을 알기에, 결국 예수님을 찬양하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변했다는 것으로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나같이 완악한 자를 바꾸시고 고치시는, 예수님의 크신 능력을 찬송하고 높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야긴과 보아스가 세워져 있지 않을 때, 우리는 내 손으로 행한 것을 볼 뿐입니다. 거기에 의미를 두고 가치를 두면서, 자신의 손으로 행한 것을 앞세워, 하나님을 찾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두 기둥이 세워진 의미에서, 그리스도만을 바라보고 믿는다는 것이, 뭘 의미하는가를 깊이 생각할 수 있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 기 도 >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 앞에서는 잘난 사람, 못난 사람이 없음을 알고, 제발 잘난 체 하지 않게 하옵소서. 그리고 자기가 교회에 주인인양 행세 하지 않게 하옵소서. 하나님의 집에서 맡은 직분의 줄을 놓지 않게 하옵소서. 세상의 관점으로만 자신을 보고, 그런 잣대로 사람을 판단하지 않게 하옵소서. 하나님은 어떤 사람도 사용하실 수 있음을 알고, 하나님이 맡겨주신 작은 일부터 충성을 다하게 하옵소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필요한 은사와 능력을 가지고 반드시 크게 쓰임 받게 하옵소서. 솔로몬이 왕궁을 건축한 것은, 사랑하는 이방 여인들을 위해서였음을 알게 하시고, 이방여인에게 마음을 빼앗김으로써, 여인들의 신까지 섬기고 있는 상태에서, 솔로몬이 성전을 짓는다고 해서, 그것을 과연 진심으로 여호와를 향한 마음에서 나온 것이라고 할 수가 있는가를 바로 알게 하옵소서. 솔로몬의 성전에 야긴과 보아스라는 두 기둥이 굳게 서서, ‘이스라엘은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하나님에 의해 세워진다’는 것을 드러내고 있는 것처럼, 오늘날 우리에게는, 예수님이 야긴과 보아스라는 두 기둥처럼 굳게 서서, 우리는 하나님에 의해 세워지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유지되고 있다는 것을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