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 모두는 이 땅에서, 자신이 목적한 바를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은퇴를 했다고 해서, 삶의 모든 것에서 은퇴한 것이 아닙니다. 일선에서 은퇴를 한 사람들은, 또 다른 목표를 세워서 그것을 향해 달려갑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달란트를 가지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겁니다. 그러기에, 문학가는 문학작품을 통해서 또, 예술가는 예술작품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우리가 이 땅에서 이루어야 하는 삶의 목표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만 이루어서는, 우리가 이 땅에서 존재하는 그 이유를 밝힐 수 없습니다. 이 땅의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빚어진 하나님의 피조물이며, 우리는 또한 세상의 청지기이기에,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야 합니다. 이러한 삶의 목적을, 사도 바울은 본문에서, “푯대”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푯대는 삶의 방향이고, 지향이며, 우리가 가야할 목표입니다. 교회사에서 사도 바울은, 초기에는 나사렛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증거하는 기독교인들을 궤멸시키기 위해 선두로 나섰던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의 길을 바꾸셨습니다. 만약, 이러한 하나님의 간섭이 없었더라면, 그는 교회사에서 네로황제처럼, 가장 악명높은 박해자로 기록되었을 겁니다. 그랬기에, 사도 바울은, 고전 15: 10에서,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 고백하였던 겁니다. 그는, 자신의 본질을 잘 알았고,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어떠한 은혜를 주셨는지도 잘 알았습니다. 우리도 바울과 같이, 우리의 본질을 알아야 하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은혜를 베푸셨는지도 알아야 합니다. 이렇게, 자신을 잘 아는 사도 바울은, 우리의 삶을 운동장에서 경주하는 경주자에게 비교합니다. 경주자는 그의 푯대가 정확하고 분명해야 합니다. 그리고, 경주의 룰을 잘 알아야 합니다. 성도된 우리의 궁극적인 푯대는 예수 그리스도이며,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겁니다. 본문 14절의 내용은, 많은 사람들이 좌우명으로 여기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여기를 보시면,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고 합니다. 이를 현대인 역으로 보시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나를 부르신 부름의 상을 얻으려고 목표를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라고 합니다. 이제, 11월에는, 카타르 월드컵이 있습니다. 여기에서 승리하기 위해, 우리나라를 비롯한 각 국의 축구선수들은 끝없이 연습을 하며, 체력을 강화시키고 있습니다. 그들의 목표는 월드컵에서의 우승입니다. 이처럼, 성도된 우리는 본문의 사도 바울과 같이, 한 해 두 해가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서는 그 날까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하나님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성경을 읽고, 이해하되, 나 중심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으로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왜 이렇게 행하셨을까? 하나님이 왜 이렇게 말씀하셨을까? 예수님이 왜 이렇게 행하셨는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성도된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본문 12절에서 사도 바울이 말하는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는 말씀처럼,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되어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준비하신 상을 받고자 중단하지 말고, 계속적으로 달려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10 - 12절을 보시면,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라고 합니다. 푯대를 향해 달려가는 성도는 현실에 안주하지 않습니다.
바울이 기독교로 개종하기 전에는, 오직 율법에 사로 잡혀서, 율법만을 찾는 자였고, 율법만을 좇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다메섹으로 가던 중, 부활하여 살아계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후로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더욱 알기 원했기에, 기독교로 개종하였습니다. 그러기에,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후의 사도 바울은 완전히 다른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이후, 자신이 얼마나 편협되었으며, 자신이 푯대로 삼고 목표로 삼았던 삶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잘못 되었는지를 알았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고, 3일만에 부활하신 것은, 하나님 앞에서 죄인된 우리가 죄인으로 죽고,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새로운 사람으로 다시 살아난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기에, 사도 바울은, 다메섹으로 가던 중,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새로운 사람으로 부활했던 겁니다. 그랬기에, 그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만을 증거하였으며, 그 복음을 전파함에 있어서, 자신의 생명조차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는 복음전파를 위해,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을 기꺼이 받아들였습니다. 이것이, 쉬운 일입니까? 우리가 사도 바울이라면, 억울하게 매를 맞고, 채찍을 당하고, 옥에 갇히고, 죽음의 위협을 당하는 것을 쉽다고 하겠습니까? 그는 돌에 맞았고, 추위와 굶주림을 당했습니다. 또, 믿었던 사람들로부터 배신도 당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오직,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모든 것을 당하면서도 복음 전파를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신을 하나님의 은혜를 알았고, 하나님께서 자신을 위해 준비하신 면류관이 있음을 알고, 그것을 받기 위해 중단없는 전진을 했던 겁니다. 그리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려 했던 겁니다. 그랬기에, 본문 12절에서, 바울은 이미 얻었거나 이루었다며 자만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신앙의 격전지를 수없이 많이 통과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완전치 못함을 고백했습니다.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남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완전하게 알았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이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그 어느 순간에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 목적에 도달할 수 있는 순간은 없다면서, 겸손의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랬기에, 이러한, 바울의 생애는,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하나님의 은혜로 가득 채워져 있었습니다. 이전의 바울은, 자신의 의로 가득한 욕망과 스스로의 교만을 위해서 살아갔지만, 살아계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경험한 이후로는, 이전의 것을 해로 여기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삶의 푯대로 삼고, 하나님께서 그를 위해 준비하신 것을 향해 달려가는, 하나님께 붙잡힌 삶을 살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제, 오직, 하나님 앞에서만 살았습니다. 그가 고난 속에 갇혔을 때도,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뜻을 물었습니다. 자신에게 있는 떨칠 수 없는 나약함에 대해서도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그의 생각은 온통, “하나님께서 무엇을 원하실까? 하나님께서 무엇을 기뻐하실까?”였습니다. 이제, 성도된 우리도 사도 바울과 같이, 현실에 안주하지 말고, 하나님께만 붙잡힌 바 되어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알며,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능력을 힘입어, 하나님께 붙잡힌바 된 성도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13 - 14절을 보시면,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고 합니다. 푯대를 향해 달려가는 성도는 과거에 머물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성도인 우리에게 원하시는 삶이 무엇일까요? 레 19: 2을 보시면, “너는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라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고 합니다. 두말할 것 없이, “거룩한 삶”입니다. 그럼, 거룩한 삶은 어떤 것입니까? 세상은 악하기에 세상에 거해서는 안 되며, 불신자들은 하나님을 외면하는 자들이기에, 그들과 어울려서도 안 된다면서, 그들과 분리되어 살아가는 것일까요? 구약에서는, 이방사람들과 함께 지내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갈 때, 그 곳의 원주민들과 어울리지 말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신약에 와서는, 이방에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즉,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거룩한 삶이란, 세상과 등지거나 구별된 삶이 아니라, 세상에서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을 증거하는 삶입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 제자들이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고, 그 안에서만 거주하자, 하나님은 유대인들의 탄압을 이용하여, 사도들을 곳곳으로 흩으셨습니다. 곳곳으로 흩어진 그 곳에서 사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성도된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준비하신 그것을 향해 달려간다는 것은, 과거나 현실에만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를 향해 달려간다는 겁니다. 또, 우리의 소망을 현실에 두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미래에 두는 겁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부활의 사건은, 2000여년 전의 사건이 아닙니다. 과거에 단회적으로 일어난 사건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이 다메섹으로 가던 중,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를 만남으로 그가 완전히 변한 것이, 사도 바울의 부활이듯, 성도된 우리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성도가 됨으로, 하나님 밖에 있던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을 위해서,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것 또한, 우리의 부활입니다. “부활”은 꼭, 죽었다가 다시 산 것만이 아닙니다. 그러기에, 성도인 우리는 이 땅에서 살아가지만, 별세의 삶을 살아가는 별세의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를 붙잡고 계십니다. 눅 9: 62절을 보시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하시니라”고 합니다. 이스라엘의 쟁기는 우리나라 쟁기와 비슷하지만, 한 가지 다른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손잡이입니다. 일반적으로는, 가로로 되어있지만, 이스라엘 쟁기는 세로로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균형잡기가 쉽겠습니까? 그러기에, 뒤를 돌아보면서 쟁기질을 하면 넘어지거나 똑바르게 땅을 갈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것을 비유해서 말씀하신 겁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오직 앞에 있는 목표만을 바라보며 쟁기질을 하듯,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나가야 합니다. 뒤돌아보아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 집중하고, 하나님의 나라에 집중해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지나온 자신의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겼습니다. 독일의 문호 괴테는, “가장 유능한 사람은 계속해서 배우는 사람이다”라고 했습니다. 배운다는 것은 앞으로 계속해서 나가는 것을 말합니다. 이와 같이, 성도된 우리도 하나님을 향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향해서 멈추지 말고, 또, 뒤돌아보지 말고, 하나님을 향해 달려야 합니다. 우리의 푯대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중단없는 전진을 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15 - 16절을 보시면, “그러므로 누구든지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니 만일 어떤 일에 너희가 달리 생각하면 하나님이 이것도 너희에게 나타내시리라 오직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할 것이라”고 합니다. 성도인 우리는 푯대를 향해 달리는 것을 멈추어서는 안 됩니다.
본문을 바른 성경역으로 보시면, “누구든지 온전한 자들은 이렇게 생각하자. 너희가 무언가 다르게 생각한다면, 이것 또한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나타내실 것이다. 오직 우리가 어디에 이르렀든지 같은 길을 좇아가도록 하자”라고 합니다. 본문에서, “누구든지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이란, 완전히 이루어졌다고 여기는 자들을 말합니다. 이는, 바울이 푯대를 향해서 달려간 것처럼, 성도인 우리도 그런 열심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신앙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라는 겁니다. 바울은 본문에서, 앞의 12 - 14절에서 언급한 대로, 자신은 오직 완전한 존재가 아니라 완전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존재라고 합니다. 빌립보 교인들 중에는, 자신의 신앙을 완전무결한 것으로 여기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그랬기에, 본문 12절에서,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고 함으로써 그들의 어리석음을 간접적으로 책망하였습니다. 여러분, 온전한 성도는, 언제나 자신이 부족하고 연약한 존재임을 알고 성찰합니다. 그러기에, 본문에서 “온전히 이룬 자”란, 완전무결한 신앙을 지닌 자가 아니라, 신앙이 성숙한 자를 말합니다. 신앙이 성숙한 성도일수록, 예수 그리스도를 더 알게 되고, 예수 그리스도를 더 아는 성도일수록, 하나님 앞에 있는 자신의 부족함을 더욱 깨닫게 됩니다. 그러기에, 늘 겸손한 자세로, 성숙한 성도로서의 삶을 살게 됩니다. 성 어거스틴도 우리와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그는 하나님 앞에 거하면서, 자신의 부족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랬기에, 늘 겸손한 자세로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드러내는 삶을 살았습니다. 여러분, 삶의 이러한 모습이, 본문에서 증거하는 하나님께 붙잡힌 삶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본문의 “만일 어떤 일에 너희가 달리 생각하면 하나님이 이것도 너희에게 나타내시리라 오직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할 것이라”는 말씀처럼, 우리가 하나님께 붙잡힌바 되어 살아간다는 것을 알고, 그 삶을 계속해서 유지해야 합니다. 성도된 우리는 어떤 목적으로든, 하나님께 붙잡힌 삶을 산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우리의 목표와 푯대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것을 이룰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승리한 성도라고 기뻐하시며, 우리를 위해 준비하신 면류관을 주실 겁니다. 딤후 4: 8을 보시면,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세상에서는 넘어지고 엎드려지고, 또 실패하고 고난과 역경을 당할 수 있지만, 그러한 가운데서도 사도 바울과 같이, 끝까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준비하신 상을 바라보고 달려가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께서 우리의 눈물을 닦아주시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씌워주시는 면류관을 받는 귀한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