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 문수산 기존암장에서였다. 오후 5시가 채 안 됐는데 겨울 해가 뉘엿뉘엿 저물고 있었다. 해가 들지 않으면 바위는 금세 차가워지고 등반은 어려워진다. 마지막으로 한판 더 하겠냐는 영도 선배 말에 마무리 운동 삼아 난이도 10a 루트를 골랐다. <기존c>, 이미 등반을 충분히 해서 힘이 많이 빠져 있었지만 그 정도는 완등하겠지 하는 가벼운 마음으로 붙었다. 그런데 웬걸, 크럭스 구간으로 보이던 오버행 턱에서 한참 애를 먹었다. 오버행 턱을 딛고 어떻게든 일어서야 다음 동작이 가능할 것 같은데 아무리 더듬어도 손가락 끝에 걸리는 게 아무것도 없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일어서면 밸런스가 무너지고 그대로 추락이다. 발자리도 마땅치 않아서 어떤 동작을 만들어야 오버행 턱을 딛고 일어설 수 있을지 도무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수차례 헛수고만 반복하다 결국 오버행 턱을 넘지 못하고 그대로 하강했다. 뭐야? 이게 10a라고?
그 사이 해는 산머리를 완전히 넘어가서 따뜻했던 바위가 차갑게 돌변했다. 영도 선배가 감각이 둔해진 손을 입김으로 호호 불기도 하고 자기 겨드랑이와 목 뒷덜미를 이용해 부지런히 데우며 등반을 이어갔다. 문제의 오버행 턱에서는 영도 선배도 적잖이 당황했다. 정말 아무것도 없다며 한참 헤맸다. 여러 시도 끝에 직상은 도저히 안 된다며 옆으로 우회해서 그 구간을 돌파했는데 이후에도 홀드가 너무 작다며 10a는 아닌 것 같다고 했다. 루트 하단 팻말에 표기된 볼트 개수도 달랐다. 팻말에는 볼트가 11개라고 표기돼 있었지만 실제로는 13개였고 등반 길이도 30m 가까이 됐다. 아무튼 내일 다시 해보자며 첫날 등반은 그렇게 마무리했다.
이튿날 기존암장 주변에 짧고 쉬운 루트로 가볍게 몸을 풀고 <기존c>부터 다시 붙었다. 고작 10a인데 설마 오늘은 되겠지 하며 다시 붙었다. 같은 자리에서 같은 헛수고만 반복하다 또 그대로 하강했다. 컨디션을 회복한 영도 선배는 다시 해봐도 난이도 표기가 잘못된 것 같다며 탑로핑 등반을 권했다. 고작 10a를 탑로핑 등반으로 오르자니 자존심이 구겨졌지만 영도 선배가 그렇게 말한 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것 같았다. 탑로핑 등반으로도 문제의 오버행 턱에서는 직상이 불가능해서 나도 영도 선배처럼 우회해야만 했다. 어랍쇼? 그것만 넘으면 수월할 줄 알았는데 그 다음부터가 더 어렵고 까다로웠다. 볼트 간격도 상단으로 갈수록 멀었다. 홀드도 너무 작고 밸런스도 쉽게 무너져서 리딩으로 올랐다면 몇 번이나 추락했을 것이다. 탑로핑 등반으로도 완등까지 온 힘을 탈탈 털어 써야만 했다. 체감상 그보다 난이도가 한 단계 높은 간현암장의 <깍쟁이>(10b)는 비할 바도 아니었다. 아니, 그보다 몇 단계는 높은 간현암장의 <형수>(11a)보다 어렵고 까다롭게 느껴졌다. 이게 정말 10a라고?
다른 암장도 아니고 바로 주변에 있던 두 단계 높은 <꼭지>(10c)나 <주말의 정사>(10c)보다 어려운 10a라니, 구겨진 자존심은 차치하고 진실을 알고 싶었다. 부리나케 관련 정보를 찾아봤다. 등반선도 자연스럽고 훌륭한 루트 같은데 관련 정보도 몇 개 없고 등반 영상도 떨렁 한 개뿐이었다. 게다가 그 떨렁 한 개뿐인 <기존c> 등반 영상은 엉뚱한 루트였다. 대신 같은 게시자가 올린 <울대길>(10c/d) 등반 영상이 바로 영도 선배와 내가 등반했던 <기존c>였다. 아무래도 몇 년 전 보수 작업하면서 팻말을 바꿔 단 것 같았다.
그래, 10a가 이럴 리 없어. 진실을 알고 싶던 집요함 덕분에 구겨진 자존심은 어느 정도 회복했지만 그렇다고 구겨진 등반력이 나아지진 않았다. <기존c>의 정체가 뭐고 난이도가 얼마든 영도 선배는 한번에 완등했고 나는 중간에 나가떨어졌다. 그게 사실 이번 등반여행에서의 유일한 진실이다.
*주변에서 프로젝트 등반 중이던 앳된 로컬 친구와 몇 마디 나누게 됐다. 우리가 서울에서 왔다고 하니까 왜 하필 가장 추운 날 왔냐며 안타까워했다. 영도 선배와 나는 그저 어리둥절했다. 햇볕을 넉넉히 머금은 울산 문수산 바위는 해가 드는 동안은 한겨울에도 손이 조금도 시렵지 않을 만큼 따뜻했다. 한겨울에는 울산이나 울산 근처 사는 사람들이 세상 가장 부럽다.
**첨부한 사진은 영도 선배의 <기존c> 등반 장면. 초반에는 멋진 크랙을 타고 오르다 오버행 턱을 넘으면 까다로운 페이스 등반이 이어진다. 손가락 끝에 가까스로 걸리는 좁쌀만 한 홀드도 감사히 여길 것. 미끄러질 것 같은 작은 홀드를 딛고 일어서는 게 무엇보다 관건. 언젠가 다시 붙으면 리딩으로 꼭 완등하고 싶다.
첫댓글 추운데 수고했어~ 다음에는 <기존 C > 완등하길 ~
한겨울에도 울산 문수산은 등반하기 딱 좋은 날씨였습니다. 다음에는 같이 가요 선배님.
용득형 담에 같이 복수하러가요 ㅎㅎ
그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