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주장에 대한 통렬한 회의와 자기부정의 방법, 소위 철학적, 과학적 방법을 현재 조계종의 주장하는 간화선에 대한 집착-간화선만이 정통이고, 간화선을 세계화해야한다는 집단적 망상, 화두를 들고 앉아 화두가 타파될 때까지(혹은 오매일여가 될 때까지) 끊임없는 좌선정진밖에 허용하지 않는 거의 이데올로기적 집착하는 난맥상에 적용하여 어떻게 이 난관을 뚫고 새로운 길을 낼 수 있을까요?
ChatGPT의 말을 원담이 다시 수정하여 정리하다.
이 질문은 단순한 수행론 비판이 아니라, 불교 전통 내부에 고착된 제도적, 사상적 폐쇄성과 그것을 넘는 ‘사유와 수행의 새로운 길’을 모색하는 매우 깊은 철학적 탐구입니다.
여기서는 ①문제의 구조 진단 → ②그에 대한 철학적/불교적 비판 → ③새로운 가능성의 모색이라는 구조로 정리해봅니다.
1.문제 진단: 간화선의 “정통성”에 대한 집착이라는 이데올로기
현재 조계종 내에서 보이는 간화선 중심주의는 단순한 전통 고수 차원이 아니라, ‘유일한 정통’이라는 주장을 통해 불교 내의 다른 사유, 다른 길, 다른 해석을 배제하고 있다. 그 핵심 문제는 다음과 같다.
사유의 폐쇄성: 화두선 이외의 모든 수행은 ‘불완전’하거나 ‘타락’한 것으로 간주된다.
자기비판의 부재: 간화선 수행의 이론적 근거, 역사적 형성과정에 대한 성찰 없이, ‘부처님과 선사들이 다 해왔으니 옳다’는 권위주의가 팽배하다.
이데올로기적 수행 모델: 간화선은 오직 “화두를 들고 앉아 견성할 때까지” 좌선만을 정통 수행으로 간주함. 이로 인해 사유, 문답, 성찰, 일상 속 실천은 부차화 되었다.
세계화라는 허상: “간화선을 세계화한다”는 말은, 수행의 진정성과 무관하게 대사회적 광고전술에 불과하다는 의심을 살 소지가 다분하다. 이것은 전통에서 물려받은 생명력이 아니라 기득권의 보존과 포장에 가깝다.
이것은 더 이상 ‘간화선’이라는 수행법의 문제가 아니라, 어떤 사유도 허용하지 않는 폐쇄된 담론의 틀, 즉 교권화 된 이념 시스템의 문제이다.
2. 철학적/불교적 비판: 간화선은 살아 있는 사유였는가?
간화선의 원래 정신은 무엇이었는가?
화두는 사유의 단절이 아니라, 사유의 전환이었다.
"이것이 무엇인가?"라는 화두는 몰입된 ‘정답 찾기’가 아니라 자기 중심화 된 인식 방식 자체를 무너뜨리는 급진적 사유의 장치였다.
간화선은 원래 정형화된 방법이 아니라, 각자의 인연과 근기에 따라 다양한 방식으로 열리는 열린 길이었다.
고정된 수행 형식에 대한 집착을 타파하라는 것이 선사의 본래 가르침이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여라.”
→ 그런데 오늘날 간화선은 고정된 절차, 통제된 형식, 제도적 인증 시스템에 갇혀, 자기부정이 불가능한 이념화 된 체계로 변질되었다.
불교의 핵심은 자기부정(空)이다.
초기경전에서부터 대승경전, 선종, 중관 모두가 가르치는 핵심은 무엇인가?
모든 법(현상, 가르침, 수행, 길)조차도 집착하지 말라는 것이다.
용수보살은 심지어 ‘공조차도 집착하지 말라’고 했고, 선종에서도 “법이 법이 아님을 알 때 법을 본다”고 했다.
그러므로 ‘간화선만이 정통’이라는 주장은 부처님의 가르침 자체에 반하는 고집(我見)이자 무명(無明)이다.
3. 새로운 길: 자기부정을 통한 수행의 재구성
부정성의 정신을 다시 회복하자. “화두를 들되, 화두에 머물지 말라.”
화두는 타파의 도구이지, 교리나 성물로 숭배할 대상이 아니다.
화두를 붙잡는 것이 아니라, 화두라는 도구tool로 생각의 흐름을 단박에 끊어 자신을 투과break through해 나가는 것, 그것이 선의 생명이다.
이를 위해서는 기존 간화선 수행체계를 ‘정해진 길’이 아니라 ‘열린 탐구inquiry의 과정’으로 재구성해야 한다.
‘좌선만이 길이 아니다’ – 행선, 문답, 철학적 사유(思擇修)를 회복하자.
앉음(坐)은 중요하지만, 일상생활 전체가 수행이다.
“일상생활이 곧 선이다(日用卽是).”
문답과 대화, 글쓰기, 철학적 사유는 좌선만큼이나 자기반성적 수행의 장이 될 수 있다. 이것이 오늘날 간화선이 놓치고 있는 사유의 부재를 회복하는 길이다.
“화두 수행의 과학화”가 아니라, 과학적 정신을 화두로 삼으라.
간화선을 세계화한다는 것은 세상에 팔기 위한 포장이 아니라, 사유하는 모든 사람이 화두를 던질 수 있게 하는 열린 대화의 장으로 모셔와야 한다.
과학은 자기주장을 의심하며 비판할 수 있는 구조이다. 불교의 무자성도 모든 고정된 자아/진리/경계를 해체하는 구조이다.
그러므로 간화선은 과학처럼 끊임없이 자기 갱신되는 살아있는 실천이어야 하며, 자기 스스로 질문이 되어야 한다. 무엇을 위한 간화선인가? 看話, 화두를 보는 놈, 화두를 드는 놈은 누구란 말인가?
4. 결론: 중중무진의 길 — 자기부정을 통하여 새로운 선의 길로 나아가자
간화선이 살아남기 위해선, 간화선을 해체할 수 있어야 한다.
불교가 다시 해탈의 길이 되기 위해선, 불교조차 부정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이것은 단순한 전통 비판이 아니라, 부처님과 용수, 혜능, 조주, 선사의 가르침에 충실한 자기갱신의 윤리이다.
이제 간화선의 형식이 아니라 간화선의 정신, 정통성의 주장보다 수행의 개방성, 좌선의 집착이 아니라 살아 있는 자각의 길을 다시 발견해야 한다.
“법에 집착하면 법도 버려야 한다. 선이 살아 있으려면, 선을 죽일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조계종 선풍에 새바람이 일어나기 위해서 성철(돈오돈수를 주장하여 교학을 등한시 한 채 오직 화두 들고 오매일여 하라고 가르쳐 좌선병에 걸리게 만들었다)을 죽이고, 전강(용화사 송담스님은 스승인 전강의 권위에 의지하여 평생 '이뭣고' 타령하는 가풍)을 죽이고, 향곡(진제스님은 스승 향곡스님과 나눈 선문답을 내세우면서 평생 큰스님 노릇하는 가풍)을 죽여야 한다.
첫댓글 화두는
벼슬이 아니라 멍에와 같다
[예레미야 27장 설교] "멍에를 지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라
마 하 반 야 바 라 밀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