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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 사람이 아프다
―정여운 시집 『녹슨 글라디올러스』 읽기
오민석(문학평론가·단국대 교수)
I.
보이지 않는 자성을 읽어내는 나침반처럼 문학은 세상의 상처를 민감하게 잡아낸다. 문학의 바늘은 세상의 어두운 곳, 망가진 곳, 아픈 곳, 부끄러운 곳을 지날 때 바르르 떨린다. 문학은 여기가 아픔의 진원이라고, 저기가 결핍의 장소라고 가리키는 신호-언어이다. 문학은 겉으로 완벽한 것처럼 뻐기는 세상의 속살을 드러냄으로써 가짜 담론에 저항한다. 문학은 아픈 곳이 지혜의 우물임을 안다. “지혜로운 사람의 마음은 초상집에 가 있고 어리석은 사람의 마음은 잔칫집에 가 있다.”(「전도서」)는 말은 그대로 문학의 지도地圖이다.
롤랑 바르트R. Barthes는 “그의 고통이 내 밖에서 이루어지는 한, 그것은 나를 취소하는 거나 다름없다.”(『사랑의 단상』)고 하였다. 바르트는 이 전언이 나오는 장의 제목을 “나는 그 사람이 아프다”라고 붙였다. 타자의 아픔에 대한 공감 혹은 통감은 모든 사상과 예술의 기원이다. 아픔과 결핍의 타자에 관한 관심이 없다면, 예술-언어는 탄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정여운 시인도 세상의 통증에 민감하다. 그중에서도 그녀가 가장 민감한 촉수를 들이대는 것은 바로 어머니의 아픔이다. 이 시집의 압도적 다수의 시편이 어머니를 직접적으로 건드리고 있다. 정여운에게 어머니는 이 세상의 통증의 출발점이다. 그녀의 언어는 어머니의 통점을 지날 때 가장 심하게 떤다. 그 떨림은 정여운 시의 기원이며, 그녀의 애정이 부챗살처럼 세상으로 번져가는 꼭짓점이다.
새벽 두 시, 비몽사몽간에
쿵!
하현달이 창틀로 낙상했다
신음처럼 달빛은 책상을 싸안았다
…(중략)…
삭정이 같은 불면 속에서
그림자가 화드득 자라난다
내게로 내려앉은 어머니의 뼈 두 마디
비틀려진 詩가 아련히 들려온다
―「낙상 詩」 부분
이 작품은 정여운의 시 세계와 그녀의 어머니가 맺고 있는 상관관계를 잘 드러내 준다. 그녀에게 어머니는 “비몽사몽간에” 나타나는 존재이다. 즉 그녀에게 어머니는 무의식의 바닥에서 치고 올라오는 존재이자 전의식을 넘어 의식에 출몰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그녀에게 어머니는 마치 하늘에서 달이 떨어지듯이 나타난다. 그것은 충격처럼(“쿵!”) 그녀의 작업 공간인 “책상”으로 떨어진다. 시인에게 책상은 시를 쓰는 자리이고 그 위에 어머니는 “낙상”한 “하현달”의 모습으로 방문한다. 어머니는 그녀의 예민한 촉수를 건드려 시를 쓰게 하는 존재이다. 마치 어떤 절실한 바람이 가야금의 현을 울리듯 그녀의 어머니는 넘어져 다치며(“낙상”) 그녀의 시혼詩魂을 흔든다. 이때 어머니의 속성은 “신음”으로 요약된다. 그녀에게 어머니는 아픔이자 고통이며, 결핍이자 인내의 존재이다. 어머니의 고통은 시인에게 그대로 감염되어서 시인은 “삭정이 같은 불면”에 시달린다. 그 말라 죽은 가지 같은 황량한 시간에 어머니의 “그림자”가 자라나고, 어느 순간 그녀에게 “어머니의 뼈 두 마디”가 내려앉는다. 이렇게 그녀를 찾아온 어머니의 뼈마디가 그녀에게는 시, 즉 “비틀려진 詩”이다. 그녀의 시는 이렇게 어머니가 아프게 쓰러진 자리에서 시작되므로 “낙상 詩”이다.
엄마가 입을 열면 붉은 꽃 시詩 쏟아지네
쪼록쪼록 내 뱃속에 밥 들어오라고 소리 하네
밥 찾으러 부엌에 가는 길, 십리보다 더 멀구나
…(중략)…
이슬비 뿌려가며 시詩를 매일 키우시네
글썽이는 봄날에 나도 시를 짓고 있네
―「십 리 부엌 길―사친별곡 2」 부분
시인의 각주에 의하면 두 번째 행은 “말년에 부르시던 어머니의 노래를 받아쓴 시”이다. 시인에게 “어머니의 노래”는 이미 시이다. 시인은 이미 시가 된 어머니의 노래를 받아쓰는 자이다. “엄마가 입을 열면 붉은 꽃 시詩 쏟아지네”라는 진술을 보라. 시인에게 어머니는 지상 최대의 뮤즈이다. 시인은 어머니-뮤즈를 불러내 그녀의 말을 받아 적는다. 이 상호텍스트성 때문에, 위 시에는 복수 화자dual narrator가 등장한다. 첫 번째 행은 시인의 목소리이고 두 번째 연은 어머니의 목소리이다. 시인에게 어머니는 무엇보다 ‘배가 고픈 자’이다. 어머니는 끝없는 허기에 시달리고(“쪼록쪼록 내 뱃속”) 그녀의 허기를 채워줄 “부엌”은 멀기만 하다. “밥 찾으러 부엌에 가는 길”이 “십 리보다 더” 먼 현실 속에서 어머니는 식구들의 배를 채우기 위해 과도한 노동과 헌신의 세월을 보냈다. 중략된 부분엔 그것에 합당한 대접을 받지 못하는 어머니가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는 대목이 나온다. 시인은 눈물이 “글썽이는 봄날”에 그것을 받아쓴다.
샛별같이 밝은 눈이 반 봉사가 되었구나
명 짧다고 우리 엄마 열일곱에 시집보내
온갖 풍파 다 겪으며 시집살이 겪어왔네
사자님아 사자님아, 나는 언제 데려갈래
내 나이 올해 칠십아홉,
모진 목숨 죽어지지도 않고
가고 싶다 가고 싶다 저승길로 가고 싶다
―「어머니의 비가悲歌―사친별곡 5」 부분
이 작품에서도 우리는 두 명의 화자가 주고받는 서글픈 노래들을 들을 수 있다. 첫 번째 연에서 시인이 어머니를 소개하면, 두 번째 연에서는 어머니가 등장해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 4·4조의 타령은 슬픈 민요처럼 모녀의 이야기를 실어 나른다.
II.
정여운 시인에게 슬픔과 아픔의 기원은 어머니이다. 어머니에게서 발원된 시의 물줄기는 다른 아픔과 슬픔을 찾아 흐른다. 시인은 수많은 ‘그들’의 아픔과 슬픔을 함께 아파하고 슬퍼하며 받아적는다. 그녀의 귀는 아픔의 종소리를 향해 열리고 그녀의 눈은 고통의 풍경에 가서 멎는다. 고통의 현이 울릴 때 그녀의 언어가 함께 울린다. 그녀의 시는 이렇게 두 개의 음파가 서로 스미고 엮여서 이루어진 화음이다. 그 음계마다 고단한 삶의 배후가 노을처럼 걸려 있다.
글라디올러스가 요에 붉고 노랗게 피어 있었다
죽을 때가 되면 안 하던 짓을 한다카더마는 인자 너그 아부지가 죽을랑갑다
오줌 싸는 것도 모자라서 피똥까지 싸니 내가 죽을 지경이다
등 굽은 노모 입에서 맵찬 바람이 불었다
꽃밭에 키 큰 측백나무 두 그루가 누렇게 말라가고 있었다
어머니는 채송화와 제비꽃에 물을 주고 있다
사방으로 흩어진 스테인리스 양푼이에 아버지의 오줌이 찰랑거렸다
오줌통을 턱 밑에까지 갖다 줘도 와 맨날 그릇에다 오줌을 싸노 말이다
내가 너그 아부지 오줌을 먹은 게 한두 번이 아이다
방 안에서 벽지만 뜯고 있던 아버지는 엉덩이로 꽃동산을 만들었다
이게 뭐꼬? 고마 죽으면 편할 낀데,
자는 잠에 가야 될 낀데 너무 오래 살까 봐 걱정이다
너그 아부지 두고 내가 먼저 죽으면 천덕꾸러기 되는데 우짜노
어머니는 침대 머리맡에 족자를 걸어놓고 매일 염불처럼 외웠다
千 자리 萬 자리 내 침수寢睡에 맞는 자리
황금을 뿌린 자리 불보살님 닿는 자리
이내 일신 갈 적에는 좋은 날 좋은 시에
자는 잠에 고이 가게 하시옵소서
이따금 찬바람이 와서 마당을 쓸어주고 갔다
뜰아래 꽃들이 쿨럭쿨럭 기침을 했다
글라디올러스가 요에 붉고 노랗게 피어 있었다
―「녹슨 글라디올러스」 전문
앞에서 살펴본 “사친별곡” 연작시처럼 이 작품도 시인과 어머니 사이의 이중창으로 이루어져 있다. 고대 비극에서 코러스가 상황 설명을 하면 배우가 등장해 연기를 하는 것처럼, 시인은 어머니가 처해 있는 상황을 설명하고 어머니는 자신의 대사를 읊는다. 인지 능력을 완전히 상실한 아버지와 그를 간병하는 어머니의 서사를 이 작품은 시적 상징을 동원해 극사실적으로 그리고 있다. 표제작이기도 한 이 작품에서 시인은 어머니의 고통에 이어 아버지의 늙음과 고통으로 시선을 확장한다. 아버지의 병은 어머니의 고통을 가중하고 둘의 고통이 겹친 무대 위에서 비극은 “글라디올러스”처럼 붉고, 처참하다. 치명적인 열정의 붉은 색은 죽음의 징후로 변하고, “녹슨 글라디올러스”는 자신을 통어할 능력을 상실한 치욕스러운 노년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 위에서 그려지는 것은 죽음의 그림밖에 없다. 어머니는 “자는 잠에 고이 가게” 해달라고 빈다.
꽃을 무척이나 좋아하던 당신
꽃밭에서 딴 까만 꽃씨 하나
입속에 키웠다
당신이 입을 열면
봉긋봉긋한 목련, 빨간 튤립, 진달래꽃
활짝 피어난다
…(중략)…
엄마는 입속에서
보랏빛 작약과 흑장미를 많이 키웠다
읊어대는 꽃의 마디마디에
자꾸만 멍이 들었다
읊어대는 나무의 마디마디에
자꾸만 검은 옷을 입혔다
―「꽃을 중얼거리다」 부분
어머니의 머릿속엔 늘 죽음이 어른거린다. 글라디올러스가 ‘정열’에서 ‘죽음’의 기의를 바로 갈아타듯이, 엄마의 입속에서 시처럼 쏟아져 나오는 아름다움의 기표(“꽃”)엔 “자꾸만 멍이” 들고 “검은 옷”이 입혀진다. 고통의 끝에 있는 자에게 죽음은 소망이 된다. 어머니는 “고마 죽으면 편할 낀데”라는 말을 입에 달고 지내며 형형색색의 꽃들에 죽음의 색을 입힌다.
III.
세계는 가난과 절망과 고통의 도가니이다. 그러므로 결핍을 감추는 자는 희망을 이야기할 수 없다. 진정한 희망은 절망의 밑바닥을 치고 올라온다. 바닥까지 내려가 보기는커녕 마치 아무 일도 없다는 듯 태연한 제스처를 취하는 자에게 건강한 미래는 없다. 문학과 예술이 세상의 아픈 곳에 주목하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슬픔을 감지하지 못하는 자는 기쁨을 누릴 수 없다. 기쁨은 단독이 아니라 기쁨/슬픔의 이항 대립 속에 존재한다. 정여운 시인이 고통을 탐지하는 것은 고통 너머의 세계를 꿈꾸기 때문이다.
그녀에게 어머니는 슬픔의 샘물이고 아버지와 세상의 다른 슬픔은 그것의 지류들이다. 이 시집에는 그렇게 많은 결핍과 아픔과 슬픔의 기록들이 존재한다. 정신병원에 갇혀 있는 사람(「백장미」), 이별의 통보를 받고 자살을 시도한 청년(「스물한 살」), 저수지에 빠져 죽은 여자(「대어 낚시」), 재산을 독차지하려는 한 남자와 그 가족(「육전을 하던 날」), 유배 생활을 하며 가족을 그리워하는 남자(“아내에게 부치는 다산의 편지” 연작), 무당의 딸로 태어나 사랑을 이루지 못하는 여자(「쉰대부채춤」), 천한 신분으로 사랑을 잃은 남자(「그거 다 거짓말이제?」), 어려서 큰오빠에게 상습적인 폭력에 시달리다 농약을 마신 적이 있고 이제는 중년이 된 여인(「쉰다섯의 순덕이가 열다섯의 순덕에게―후배 순덕이를 위하여」), 스물일곱에 불에 타 죽은 여자(「스물일곱 새알」). 치매에 걸려 자신을 못 알아보는 어머니를 돌보는 딸(「치매에 갇히다」). 이들은 모두 세상의 슬픈 사연들을 담고 흐르는 서사들이다. 슬픔의 주체들은 차마 말을 하지 못한다. 이들의 서사는 시인의 입을 통해서 대신 말해진다. 그러므로 시인은 타자의 슬픔을 대신 울어주는 곡비哭婢이다. 시인은 세상의 슬픔을 감지하고 울음의 진원을 찾아가 그것과 하나가 되어 함께 운다. 그녀가 울 때, 세상의 슬픔은 위로받으며 비로소 슬픔 너머의 세상을 꿈꿀 수 있게 된다.
15: 아침마다 솔가지로 불 때면서 소죽을 끓였지. 불길이 활활 내 얼굴로 달려들면 매캐한 연기에 눈물이 났어. 그리고 참외밭에 가서 거적을 열어놓고 학교에 갔지.
55: 노는 사람이 좀 하지. 너는 시킨다고 다 하냐? 학교에 가 버리지. 왜 말도 못하고 도망도 안 가고 맞고만 있었어? 바보같이.
15: 난 바보였어. 가출을 한 번 했는데 하루 만에 잡혀 왔어. ‘내가 사라지면 되겠구나’ 생각했어. 창고에 굴러다니는 농약병이 보였어. 손이 떨렸고 심장이 쿵쾅거렸어. 엄마 아버지 얼굴이 떠올랐고 눈물이 흘러내렸어. 눈 딱 감고 마셨지.
55: 왜 그렇게 나약한 생각을 했어? 누가 들어봐도 네가 잘못한 게 없는데 왜 그렇게 쉽게 목숨을 버리려고 했냐고.
15: 깨어보니 병실이었어. 다음날이 졸업식이었는데, 병실에서 눈 내리는 겨울 끝자락을 보고 있었어. 그 후, 나는 큰오빠한테 내가 맞아서 농약 마신 일, 덮자고 했었지.
55: 얼마나 때렸으면 그 어린 애가 못 견디고 죽으려고 했을까. 네가 죄지은 것도 아닌데 왜 그 일을 덮자고 했어? 엄마 아버지한테, 다른 오빠들한테도 말했어야지.
15: 그럴 용기도 없었어. 매일 맞다 보니 기가 죽었어. 그런 내가 싫었지만 참을 수밖에 없었어. 그 후 야간고등학교 다니면서 번 돈, 세 오빠 대학등록금으로 생활비로 다 썼어. 나를 위해 써본 적 없었어. 오빠들 밥해주며 뒷바라지했었어.
―「쉰다섯의 순덕이가 열다섯의 순덕에게―후배 순덕이를 위하여」 부분
이 작품엔 두 명의 화자가 등장하지만, 사실 이 둘은 한 사람, 즉 “순덕이”이다. “쉰다섯”의 순덕이는 마치 정신과 의사처럼 “열다섯”의 순덕이가 속에 억압된 것들을 말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한 주체 안의 두 자아는 마치 친숙한 자매처럼 격의 없이 대화를 주고받는다. “쉰다섯”의 순덕이는 자기 안의 또 다른 내면인 “열다섯” 순덕이가 말을 할 수 있게 해주고 들어준다. 이 시에서 “쉰다섯” 순덕이는 꼭 시인 같다. 시인은 말을 못 하는 것들이 말을 할 수 있게 하거나,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거나, 울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대신 울어주는 자이다. 위 작품에서 시인은 자신 안의 다른 자아에게 말을 거는 자이다. 2016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미국의 대중 가수 밥 딜런B. Dylan은 한 인터뷰에서 “나는 나의 말이다I am my words”라고 고백하였다. 시인은 말을 하지 못하거나 하지 않는 자 대신 말을 해주는 말words이다. 시인은 울지 못하는 자 대신 울음의 말을 해준다. 시인의 어머니는 시인을 통해 울음의 말을 세상에 전한다. 이 시집에 나오는 모든 슬픈 자들은 시인을 통해 눈물의 신호를 세상에 풀어놓는다. 시인이 타자의 울음을 실컷 울 때, 시의 숲이 천천히 우거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