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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심 가득한 귀향
42: 26-38
26. 그들이 곡식을 나귀에 싣고 그곳을 떠났더니
27. 한 사람이 객점에서 나귀에게 먹이를 주려고 자루를 풀고 본즉 그 돈이 자루 아구에 있는지라
28. 그가 그 형제에게 고하되 내 돈을 도로 넣었도다 보라 자루 속에 있도다 이에 그들이 혼이 나서 떨며 서로 돌아보며 말하되 하나님이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 일을 행하셨는고 하고
29. 그들이 가나안 땅에 돌아와 그 아비 야곱에게 이르러 그 만난 일을 자세히 고하여 가로되
30. 그 땅의 주 그 사람이 엄히 우리에게 말씀하고 우리를 그 나라 정탐자로 여기기로 창42:7, 9
31. 우리가 그에게 이르되 우리는 독실한 자요 정탐이 아니니이다
32. 우리는 한 아비의 아들 십 이 형제로서 하나는 없어지고 말째는 오늘 우리 아버지와 함께 가나안 땅에 있나이다 하였더니 창42:13
33. 그 땅의 주 그 사람이 우리에게 이르되 내가 이같이 하여 너희가 독실한 자임을 알리니 너희 형제중 하나를 내게 두고 양식을 가지고 가서 너희 집들의 주림을 구하고
34. 너희 말째 아우를 내게로 데려 오라 그리하면 너희가 정탐이 아니요 독실한 자임을 내가 알고 너희 형제를 너희에게 돌리리니 너희가 이 나라에서 무역하리라 하더이다 하고 창34:10, 21
35. 각기 자루를 쏟고 본즉 각인의 돈뭉치가 그 자루 속에 있는지라 그들과 그 아비가 돈뭉치를 보고 다 두려워하더니 창42:27
36. 그 아비 야곱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나로 나의 자식들을 잃게 하도다 요셉도 없어졌고 시므온도 없어졌거늘 베냐민을 또 빼앗아 가고자 하니 이는 다 나를 해롭게 함이로다 창43:14
37. 르우벤이 아비에게 고하여 가로되 내가 그를 아버지께로 데리고 오지 아니하거든 나의 두 아들을 죽이소서 그를 내 손에 맡기소서 내가 그를 아버지께로 데리고 돌아오리이다 창46:9
38. 야곱이 가로되 내 아들은 너희와 함께 내려가지 못하리니 그의 형은 죽고 그만 남았음이라 만일 너희 행하는 길에서 재난이 그 몸에 미치면 너희가 나의 흰 머리로 슬피 음부로 내려가게 함이 되리라 창37:35, 창4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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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식을 구하러 애굽으로 내려갔다가 돌아오는 야곱의 아들들은 애굽에서 예상치 못했던 일을 만났습니다. 양식을 파는 애굽의 총리에게 간접으로 몰린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모두 형제라는 사실을 밝힘으로 스파이가 아니라는 것을 입증하기 하려 했습니다. 자신들은 한 가족들을 굶주림에서 구하기 위해서 왔지, 결코 어떤 정보 기관에 연결되어 있는 스파이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열 명이나 되는 형제들이 모두 스파이가 될 수 있겠습니까? 라며 자기 가정의 가족 관계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했습니다. 막내아우는 연세 많으신 아버지와 함께 있고, 동생 하나는 없어졌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총리는 집에 있다는 그 막내아우를 데리고 와서 그들이 모두 형제관계임을 입증하라고 요구하면서 인질로 시므온을 잡아 두었습니다.
애굽에서 이런 일을 겪은 야곱의 아들들은 양식은 구했지만, 근심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함께 나가기만 하면 형제 하나를 잃고 돌아오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전에는 요셉을 잃고 돌아오더니 이제는 시므온을 잃고 왔습니다.
이 일을 아버지께 어떻게 보고할 것인가? 시므온을 석방시키려면 베냐민 막내 동생을 데리고 가야하는데, 요셉이 없어진 후 베냐민에게 더욱 애착을 보이는 늙은 아버지 야곱을 어떻게 이해시킬 것인가? 이러 저러한 생각에 근심이 많았습니다.
이런 고민을 하며 무거운 걸음으로 고향으로 돌아오다가 여관에 들려서 짐을 풀어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게 왠 일입니까? 양식 값을 계산할 때 애굽 사람들에게 주었던 돈이 자루에 그대로 들어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정확하게 돈을 다 계산하여 줄 것을 주고 정당하게 곡식을 사 가지고 돌아오는데, 그들이 지불했던 돈이 도로 왔습니다. 이것이 무슨 조화일까요? 무슨 착오가 생긴 것일까요? 아니면 애굽 총리의 음모가 있는 것일까요? 애굽에서 스파이로 몰리는 일이 없었다면, 이것은 단순한 착오, 또는 사고일 뿐이라고 가볍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애굽에서 그런 어려움을 겪고, 인질로 시므온까지 잡혀 있는 상황에서는 이것을 단순 사고로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공짜로 돈이 생긴 것이라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이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습니까? 물질을 주고받는 것은 다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받은 사랑에 감사해서 선물을 주고받기도 하고, 어떤 일을 잘 봐달라고 청탁의 의미로, 또는 뇌물의 의미로 선물을 주고받는 사람이 있습니다. 조그만 것을 주고받아도 다 이유가 있습니다. 전혀 이유가 없이 오가는 물질은 없습니다.
만약 전혀 모르는 사람이 어떤 분명한 이유도 없이 수백 만원을 준다고 하면, 여러분은 그것을 쉽게 받을 수 있겠습니까? 아마 그것을 그냥 받는 사람은 한 분도 없을 것입니다. 당신이 누구며, 이 돈을 왜 주는 것인지 꼬치꼬치 캐물을 것입니다.
그런데 야곱의 아들들은 그 돈이 왜 거기에 들어 있는지? 누가 넣었는지? 왜 넣었는지?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불길한 생각이 앞섰습니다. 공짜 돈이 생겨서 좋은 것이 아니라 불안감, 두려움, 근심만 더해졌습니다. 그 자루에서 돈을 발견하자 그 돈 뭉치에서 자신들보다 더 큰 두려움과 공포에 떨고 있을 시므온의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이 돈 때문에 시므온의 생명이 왔다 갔다 할 수 있습니다. 아니 최악의 경우 그들 모두의 생명이 좌지우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외쳤습니다. "하나님이 어찌하여 이런 일을 우리에게 행하셨는가?" 이 말은 탄식입니다. 이 말은 오늘 우리들의 표현으로는 'Oh! My God!', '하나님 맙소사!' 라는 말입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생겼을 때, 일이 꼬이고 꼬여 잘 풀리지 않을 때 이런 표현을 합니다. 한편 이 말에는 안타까움, 후회가 담겨 있습니다. 일이 자꾸 잘못되는 것을 보면서 그들은 자신들이 저지른 죄를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무엇인가 잘못한 것이 있어서 이런 일을 겪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일이 안될 때마다, 꼬일 때마다 그들의 마음을 괴롭히는 것이 있었습니다. 동생 요셉을 팔아먹고 아버지를 속였던 일입니다.
양식 대금으로 지불한 돈이 어떻게 해서 자루 속에 들어가게 되었습니까? 애굽 관리들이 곡식을 담다가 실수로 돈이 자루에 들어갔습니까? 아니면 야곱의 아들들 중 하나가 훔친 것입니까? 아닙니다. 그것은 애굽의 총리 요셉이 일부러 자루 속에 돈을 넣은 것입니다. 25절을 보세요. "명하여 곡물을 그 그릇에 채우게 하고 각 사람의 돈은 그의 자루에 도로 넣게 하고 또 길 양식을 그들에게 주게 하니 그대로 행하였더라". 분명히 요셉이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러면 요셉이 왜 그렇게 했을까요? 그들을 도둑으로 몰기 위한 요셉의 음모였을까요?
되어진 일을 볼 때, 요셉이 형들에게 어려움을 주려고 꾸민 일은 아닙니다.
그럼 왜 돈을 도로 넣어 주었을까요? 그것은 형들에 대한 요셉의 사랑이었습니다.
요셉은 그의 형들에게 양식 값을 받지 않은 것입니다.
야곱의 아들들이 양식을 사기 위해서 두 번째 애굽을 방문했을 때, 그 돈을 그대로 가지고 가서 돌려주면서 자신들의 결백을 주장했습니다. 그러자 요셉은 그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43장 23절입니다. "너희는 안심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 하나님, 너희 아버지의 하나님이 재물을 너희 자루에 넣어 너희에게 주신 것이니라. 너희 돈은 내가 이미 받았느니라".
요셉은 오랜만에 만난 형들에 대한 선물로, 형들에 대한 사랑으로 그것을 준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셉의 형들은 두려워 떨었습니다. 근심하고 걱정하며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그 일로 고향의 모든 식구들을 근심으로, 염려로 사로잡히게 했습니다. 왜 사랑을 사랑으로 받지 못하고, 선물을 선물로 받지 못하는 것일까요?
한 마디로 모르기 때문입니다. 동생을 보고도 동생인지 몰랐습니다. 동생의 사랑을 받고도 동생의 사랑인지 몰랐습니다. 선물을 받고도 그것이 선물인지 함정에 빠뜨리려는 함정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죄 때문입니다. 죄가 그들의 눈을 가리고 있습니다. 죄가 그들의 마음을 가로막고 있습니다.
죄 때문에 그들은 눈이 멀었습니다. 죄 의식이 사랑을 사랑으로 느끼지 못하게 하고 있습니다. 죄 의식 때문에 삶에 자신감도 잃었습니다. 잘못한 일이 없는데도 잘못한 것 같이 느껴집니다. 바른 길을 가고 있으면서도 두려움과 의심으로 가득합니다. 무엇을 해도 확신이 없고 자신감이 없습니다. 무엇이 하나 삐끗해도 죄 때문이구나! 조금 이상한 일만 겪어도 음모구나, 모략이구나! 그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야곱의 아들들의 대한 이야기를 읽으면서 요셉의 삶과 그를 팔았던 형들의 삶이 대비되고 있음을 발견해야 합니다. 요셉도 종으로 팔리고,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들어가는 시련을 겪었습니다. 그런데 그럴 때 요셉은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불안에 근심에 걱정에 사로잡히지 않았습니다. 그는 되어지는 일들을 그대로 묵묵히 받아들였지만, 자기 인생에 대한 소망, 꿈은 잃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인생 걸음이 바르게 걷고 있는지에 대한 의심을 품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요셉의 형들을 보세요. 그들은 확신이 없습니다. 조그마한 어려움에도 두려워 떨고, 염려와 걱정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그들은 항상 당황하는 모습이고, 갈팡질팡, 우왕좌왕하는 모습입니다. 얼마나 높은 지위에 오르느냐? 얼마나 성공하느냐 도 중요하겠지만, 더 중요한 것은 얼마나 자신 있게 당당하게 살아가느냐 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른 길을 가고 있다고 확신하고 있습니까?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움이 없는 길을 걷고 있습니까?
인생에 고난이 있고, 시련이 있는 것은 문제가 아닙니다. 모든 사람에게 고난은 있습니다. 요셉도 고난받았고, 요셉을 팔았던 형들도 시련을 당했습니다. 의인이나 죄인이나, 믿는 자나 믿지 않는 자나 똑같이 다 시련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맞이하는 태도는 다릅니다. 믿음의 사람은 고난 속에서도 굳굳히 자기의 길을 가지만, 믿음이 없는 사람은 가면서도 갈팡질팡합니다. 행하면서도 자신이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확신있는 삶을 살기 바랍니다. 우리는 다 고향, 즉 저 본향을 향해 가는 삶입니다. 그 길이 두려움의 길입니까? 근심 염려의 길입니까?
그래서는 안됩니다. 사랑을 받고도 모르고, 축복을 받고도 두려워하고 의심하는 인생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받은 사랑에 감격하고, 받은 축복에 감사하며, 은혜를 은혜로 아는 그렇게 느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고향에 도착한 형제들은 아버지 야곱에게 애굽에서 있었던 일들을 자세히 보고했습니다. 그 보고를 받고 야곱도 두려움과 걱정에 사로잡혔습니다.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은 "다 나를 해롭게 하는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아들들의 보고의 요점을 야곱은 이렇게 정확하게 집었습니다.
36절입니다. "그들의 아버지 야곱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나에게 내 자식들을 잃게 하도다. 요셉도 없어졌고 시므온도 없어졌거늘 베냐민을 또 빼앗아 가고자 하니 이는 다 나를 해롭게 함이로다".
요셉도 없어지고, 시므온도 인질로 잡혔습니다. 이제 시므온을 구해 오기 위해서는 베냐민을 데리고 가는 방법밖에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아들들은 어떻게 하든지 아버지를 설득해야합니다. 베냐민을 데리고 갈 수 있도록, 그래서 시므온을 구해 올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아버지를 설득하는데, 르우벤이 나섰습니다.
르우벤이 이렇게 설득합니다.
37절입니다. "르우벤이 그의 아버지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가 그를 아버지께로 데리고 오지 아니하거든 내 두 아들을 죽이소서. 그를 내 손에 맡기소서. 내가 그를 아버지께로 데리고 돌아오리이다."
르우벤의 이런 설득은 아버지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몇 가지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로 르우벤은 신뢰성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르우벤은 아버지의 첩 빌하와 성 관계를 가졌던 인물입니다. 그래서 장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장자로서의 지도력을 잃었습니다. 한마디로 그가 장자였지만, 아버지의 눈밖에 난 존재였습니다. 그가 어떤 말을 한다고 해도 야곱은 믿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야곱 가정의 불행입니다. 신뢰받지 못하는 아들이 있고, 이미 눈밖에 나서 이미 제외된 자식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아들이 장자입니다. 맏이가 그러하니 가정의 질서가 제대로 설 수 없었습니다. 아버지에게 무시당하는 큰아들은 동생들에게도 역시 무시당합니다.
가정이 잘 되려면 큰아들, 큰 딸, 맏이들이 잘해야합니다. 그래야 형제간에 질서도 잘 잡히고 우애도 있습니다. 우리 교회에 8남매를 두신 권사님이 계시는데, 그 자녀들이 모두 효자 효녀들입니다. 형제들간에 우애도 얼마나 좋은지 모릅니다. 그 자녀들이 어떻게 그렇게 어머니 권사님에게도 그렇게 잘하고 형제들 간에 우애도 그렇게 깊은지 그 비결이 무엇일까 하고 살펴보았더니, 그 권사님이 이렇게 가르쳤답니다. 제일 맏이가 딸인데, 그 맏이에게 권위를 실어 주었다고 합니다. 권위도 있고, 책임감도 있으니 그 동생들을 잘 이끌고 다스려 나갑니다.
그러니 가정에 질서가 잡히고, 형제간에 우애도 있고, 자신도 효도를 잘 받았습니다.
그런데 야곱의 아들들은, 그의 형제들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맏이가 잘못하고, 맏이가 아버지 눈밖에 나서 권위를 잃어버리니 형제들 간에 우애도 사랑도 없습니다. 그러니 미워하고 시기하고 팔아먹는 사태가 오는 것입니다.
어째든 야곱의 가정이 또 다시 위기를 만났을 때, 르우벤이 맏이로서 해결하려고 시도했지만 역부족이었습니다. 신뢰성을 잃은 그는 더 이상 아버지를 설득할 수 없었습니다.
둘째로 설득의 내용에 문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르우벤은 "내가 그를 아버지께로 데리고 오지 아니하거든 내 두 아들을 죽이소서" 라고 설득했습니다. 물론 이 말을 문제 그대로 생각하지 말고 르우벤 자신의 다짐이라고 생각해야겠지만, 그래도 지나친 표현입니다. 어떻게 할아버지가 손자를 죽일 수 있단 말입니다.
담보를 하고 각오를 말하려면 자기 생명을 내 놓을 일이지 왜 자기 자식을 담보로 합니까? 르우벤은 의욕은 좋았는데, 결국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르우벤이 하는 일을 보면 대부분 다 그렇습니다. 형들에게 요셉이 팔려 갈 때도 르우벤은 요셉을 팔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는 상황 판단을 잘 못하고, 우유부단하게 행동하다가 이미 팔려간 다음에 나타나 옷을 찢으며 야단을 쳤습니다. 르우벤은 결단력도 없고, 신뢰성도 없고, 다른 사람을 설득하거나 감동시킬 만큼 지혜도 가지지 못했습니다.
나중에 아버지를 설득했던 사람은 유다였습니다. 세월이 더 흘러 다시 양식이 다 떨어졌을 때, 유다는 아버지 야곱을 이렇게 설득했습니다.
43장 9절을 보세요. "내가 그를 위하여 담보가 되리니 아버지께서 내 속에서 그를 찾으소서. 내가 만일 그를 아버지께 데려다가 아버지 앞에 두지 아니하면 내가 영원히 죄를 지리이다".
이 말에 아버지 야곱이 베냐민을 데리고 떠나기를 허락했습니다.
르우벤의 말과 다른 점이 무엇입니까? 르우벤은 자기 아들들을 죽이라고 했지만, 유다는 자기 자신이 담보가 되겠다고 했습니다. 내가 베냐민을 데려다 아버지 앞에 두지 않으면 아버지 앞에 자신이 영원한 죄인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에 아버지에 대한 유다의 사랑이 담겨 있습니다.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립니다. 아버지가 손자를 죽일 그런 사람은 아니지 않습니까? 단지 그가 염려하는 것은 베냐민의 안전입니다. 내가 그의 안전을 지키지 못하면 내가 영원히 죄인입니다. 그런 말로 아버지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누군가를 설득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무엇보다도 먼저 신뢰성이 있는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의 삶에서 행동에서 신뢰감을 주지 못한다고 한다면, 어떤 말에도 설득되지 않습니다. 그 다음은 말하는 지혜입니다. 경우에 합당한, 상황에 적절한 말을 해야 합니다. 너무 지나친 표현, 과장된 말은 오히려 신뢰감만 떨어뜨립니다. 실천 가능한 담보, 지불 가능한 조건을 제시해야합니다. 만약 약속을 지키지 못할 경우 자기 자식들을 죽이라고 제안한 르우벤보다는 자신이 아버지께 영원한 죄인이 됩니다 라고 솔직하게 고백한 유다의 말이 훨씬 호소력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야곱의 가정 이야기, 야곱의 아들들의 이야기입니다. 그들이 애굽을 왔다갔다하지만 역시 그들이 미워하고, 사랑하고, 죄짓고, 용서하는, 문제를 발생시키고 또 문제를 해결해 가는 그들의 삶의 이야기입니다. 갈등하고 문제를 발생시키다가 이제는 화해하고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과정에 있습니다. 형제를 팔아 씻을 수 없던 죄를 저지른 그들이 삶의 고비 고비마다 그들의 죄악이 생각나게 자극함으로 자신들이 저지른 죄에 대하여 후회하게 하고, 시기와 미움이 아니라 이제는 자기 생명을 걸고 형제를 동생을 지키려는 태도를 취할 수밖에 없게 만듭니다. 베냐민을 자기 생명처럼 여겼던 유다, 그를 자기 자식보다 더 소중하게 생각한다고 말한 르우벤 - 물론 그것이 과장된 표현이어서 아버지를 설득하는데는 실패했지만 - 이런 형제들이 있었기에 요셉은 그들을 용서할 수 있었고, 그 가족은 회복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배후에 누가 있습니까?
이렇게 그들이 회개하고 회복되어 가며, 또한 서로가 서로를 배려하고 지키려는 삶으로 변화되게 된 배후에 누가 있었느냐는 말입니다. 요셉 이야기에서는 하나님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에게는 하나님께서 시시때때로 나타나 '이리 가라 저리 가라' 지시했는데, 위기 때마다 나타나 구해주었는데, 이삭에게도, 야곱에게도 그렇게 나타나 역사 하셨는데, 야곱의 아들들의 이야기에서 하나님은 숨어 계십니다.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 이리 가라 저리 가라 한마디도 말씀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되어 가는 과정을 보세요. 그들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용서의 자리로, 화해의 자리로, 회복의 자리로 몰려가고 있지 않습니까? 그들 뒤에서 보이지 않게 하나님께서 간섭하시고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들 뒤에서 하나님께서 지켜보고 있습니다. 아니 그들의 삶을 하나님께서 이끌고 있습니다. 보이지 않지만, 요셉의 형들이 그런 하나님을 느끼지 못하지만 이미 하나님은 그들에게 역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도 것을 경험하지 않나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손길이 때로는 여러분을 위험에서 구해주시고, 때로는 꼬였던 인간관계를 풀게 하시고, 보이지 않는 그 하나님의 손 길 때문에 여러분의 인격이 다듬어지고, 신앙이 성숙하고, 그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손길이 있어서 '오늘 내가 여기에 산다'. 그렇게 고백할 수밖에 없는 경험을 하진 않았습니까?
출처/저자| 김문식목사
출처: 성경 벌레들 원문보기 글쓴이: 성경 벌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