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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로운 자의 귀
성경본문: 잠언 15: 21-33
21. 무지한 자는 미련한 것을 즐겨하여도 명철한 자는 그 길을 바르게 하느니라 22. 의논이 없으면 경영이 파하고 모사가 많으면 경영이 성립하느니라
23. 사람은 그 입의 대답으로 말미암아 기쁨을 얻나니 때에 맞은 말이 얼마나 아름다운고
24. 지혜로운 자는 위로 향한 생명길로 말미암음으로 그 아래 있는 음부를 떠나게 되느니라
25. 여호와는 교만한 자의 집을 허시며 과부의 지계를 정하시느니라
26. 악한 꾀는 여호와의 미워하시는 것이라도 선한 말은 정결하니라
27. 이를 탐하는 자는 자기 집을 해롭게 하나 뇌물을 싫어하는 자는 사느니라
28. 의인의 마음은 대답할 말을 깊이 생각하여도 악인의 입은 악을 쏟느니라 29. 여호와는 악인을 멀리 하시고 의인의 기도를 들으시느니라
30. 눈의 밝은 것은 마음을 기쁘게 하고 좋은 기별은 뼈를 윤택하게 하느니라
31. 생명의 경계를 듣는 귀는 지혜로운 자 가운데 있느니라
32. 훈계 받기를 싫어하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경히 여김이라 견책을 달게 받는 자는 지식을 얻느니라
33.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지혜의 훈계라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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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는 말하는 일을 하는 혀에 대한 교훈들이 많이 나옵니다. 특별히 야고보서에 집중적으로 나옵니다. "말에 실수가 없는 자는 곧 온전한 사람이라"는 말씀도 있고 혀를 배의 방향을 정하는 키에 비유한 말씀도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에도 혀에 관한 말씀이 둘이나 있습니다.
23절 "사람은 그 입의 대답으로 말미암아 기쁨을 얻나니 때에 맞은 말이 얼마나 아름다운고",
28절, "의인의 마음은 대답할 말을 깊이 생각하여도 악인의 입은 악을 쏟느니라".
그런데 성경에는 듣는 일을 하는 귀에 대한 교훈도 많이 나옵니다. 사실은 혀에 대한 말씀보다 귀에 대한 말씀이 훨씬 더 많습니다.
혀를 잘 다스리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귀를 잘 다스리는 것도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한 일입니다. 귀를 잘 다스린다는 것은 모순된 말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우리는 "내가 이 말을 하리라. 이 말은 하지 않으리라"하면서 혀를 잘 다스릴 수는 있습니다.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런데 귀는 주변의 소리들을 자동적으로 듣습니다. 귀에 문이 있어서 이 소리는 들어오게 열고 저 소리는 들어오지 못하게 닫을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혜로운 사람은 귀도 다스릴 수 있습니다.
공자는 자기의 일생을 돌아보면서 "나는 나이 열다섯에 뜻을 세웠고 설흔에 스스로 섰으며 사십에 미혹을 받지 않게 되었으며 오십에 하늘의 명령을 알게 되었고 육십에 귀가 순해졌고 칠십에 마음 먹은대로 행하되 지나침이 없었다"라고 했습니다. 육십에 귀가 순해졌다는 것을 이순(耳順)이라고 합니다. "생각하는 것이 원만하여 어떤 일을 들으면 곧 이해가 된다"는 뜻입니다. 이 말은 육십이 되어서 귀를 잘 다스리게 되었다는 뜻으로 해석될 수도 있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귀도 다스릴 수 있다고 했는데 지혜로운 사람의 귀는 어떤 귀입니까?
첫째, 지혜로운 사람의 귀는 많이 듣기에 힘쓰는 귀입니다.
많이 듣는다는 것은 많이 받아들인다는 말입니다.
논문 한 편을 읽고 그 것에 물을 타서 열 편의 논문을 쓰는 학자도 있습니다. 그러나 열 편의 논문을 읽고 그 것을 압축하고 거기에 자기의 주장을 덧붙여 작성한 한 편의 논문이 학문의 발전에 기여하는 값진 논문이 됩니다.
언어생활에 있어서도 한 마디 듣고 열 마디하는, 요즘 정당 대변인들이 발표하는 성명 같은 것들보다 열 마디 듣고 한 마디하는 말이 무게를 지닙니다.
설교도 마찬가지입니다. 많이 생각하고, 많이 읽고, 많이 묵상하고, 많이 기도하고 그 것을 압축한, 아니
농축(濃縮)한 설교가 무게가 있는 설교입니다.
우리는 많이 말하기 보다 많이 듣기에 힘써야 됩니다. 우리 몸에 귀는 왜 둘이고 혀는 왜 하나인지 잘 아실 것입니다.
회의에 나가보면 단골로 말을 많이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10월 28일부터 감리교 총회가 열리는데 또 그런 광경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은행의 주주총회 같은 데서는 이런 분들을 "총회꾼"이라고 하지요. 그런 분들의 발언은 비중이 높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뭐라고 합니까? "또 나왔어?" 합니다. 심지어는 "당신, 이 회의 전세냈소?" 야유를 합니다. 그 분들의 발언은 잘 통과되지 않습니다.
발언을 잘 하지 않던 사람이 한 마디 발언하면 무게를 가지고 통과가 됩니다.
구상(具常)이라는 원로시인이 있습니다. 독실한 천주교인입니다. 이 분이 고 박정희 대통령과 깊은 교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시해 당한 다음에 구상 시인이 안타까운 마음으로 이런 사실을 밝혔습니다.
"나는 박 대통령 집권 초기에 박 대통령을 자주 만나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한 시간을 이야기 했다면 처음에는 박정희 대통령이 50분 듣고 10분 말하는 정도였다. 그것이 얼마 안가서 30분 듣고 30분 말하는 것으로 바뀌더니 그 다음에는 10분 듣고 50분 말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그 다음에는 60분 내내 혼자서 말하고 나에게는 말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그래서 대통령과 만날 필요를 느끼지 않아 청와대에 들어가지를 않았다. 그러던 중에 시해 당했다는 충격적인 소식을 듣게 되었다"
이 분이 집권 초기처럼 50분 듣고 10분 말하는 자세를 끝까지 가졌더라면 그같은 최후를 맞이했을까 하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우리는 많이 듣기에 힘써야 합니다. 요즘 대심방 중인데 어느 권사님 댁에 심방 가니까 벽에 좋은 한문 문장이 붙어 있는습니다. "대해(大海), 큰 바다는 청탁(淸濁), 맑고 흐림을 가리지 않고 다 받아 들인다"는 뜻을 가진 문장이었습니다.
해납백천(海納百川)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바다는 백 갈래 냇물을 다 받아들인다는 뜻입니다.
예전에 「사상계」라는 잡지가 있었습니다. 지금 5,60대가 된 지성인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친 잡지입니다. 이 잡지를 발행하던 분이 장준하(張俊河)라는 분입니다. 한국신학대학을 나온 분으로 일제 시대에는 광복군으로 나라 찿는 일에 앞장 섰던 분입니다.
이 잡지사가 편집회의를 하는 광경이 좀 특이했습니다. 사회자가 있고 동의, 재청이 있고 의결을 하는 회의가 아니었습니다. 편집위원들이 난로가에 둘러 앉아 잡담처럼 많은 말을 주고 받고 발행인은 그저 묵묵히 듣는 것입니다. 그리고 편집위원들이 돌아갈 때는 많은 액수의 교통비를 드렸습니다. 그 다음에 그 분들이 한 말을 정리해서 좋은 잡지를 내곤 했습니다.
우리는 많이 듣고 그 것을 오래 오래 잘 소화해야합니다. 그런 다음에 한 마디 해야 합니다.
야고보 사도의 유명한 권면을 기억합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약 1:19).
말하기를 속히 하는 사람을 지혜로운 사람으로 여기기 쉬운데 아닙니다, 듣기를 많이, 그리고 속히 하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여러분 이런 지혜로운 귀를 가진 사람이 되기 바랍니다.
둘째, 지혜로운 사람의 귀는 훈계도 잘 받아들이는 귀입니다.
오늘의 본문 가운데 31절에서 33절 까지에 귀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생명의 경계를 듣는 귀는 지혜로운 자 가운데 있느니라.훈계 받기를 싫어하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경히 여김이라 견책을 달게 받는 자는 지식을 얻느니라.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지혜의 훈계라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니라”
"생명의 경계를 듣는 귀는 지혜로운 자 가운데 있느니라"는 말씀은 "목숨을 살리는 책망에 귀 기울이는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들 사이에 자리를 잡는다"라고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유익한 책망을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들 머문다"라고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지혜로워지려는 사람은 도움이 되는 나무람에도 귀를 기울여야한다"는 뜻입니다.
전두환 대통령 당시에 영락교회 원로목사인 한경직(韓景職) 목사님이 청와대에 들어간 일이 있었습니다. 전 대통령의 무리한 통치가 절정에 이르렀을 때여서 사람들이 여기에 많은 기대를 걸었습니다.
한 목사님이 대통령 면담을 마치고 나오자 교계 기자들이 집중 취재를 했습니다.
"목사님, 어떤 말씀을 하셨습니까? 그리고 대통령의 반응은 어떠하였습니까?"
한 목사님은 담담하게 "별다른 말을 하지 못했습니다. 대통령께서 말씀을 워낙 많이 하셔서 말씀드릴 틈을 얻지 못했습니다"
기자들이 또 물었습니다. "그렇다면 대통령께서 어떤 말씀을 그렇게 많이 하셨습니까?"
"축구 이야기였습니다"
전두환 대통령이 축구를 퍽 좋아했지요. 육군사관학교 시절에는 축구선수였었다고 합니다.
기자들이 "그러면 청와대에는 무엇하러 들어 가셨습니까?" 했더니 한경직 목사님은 "나도 모르겠습니다" 하고서 살고 계시는 남한산성으로 돌아가셨습니다.
그 때 교회들이 인권운동, 반독재투쟁을 왕성하게 할 때입니다. 그러니까 전두환 대통령은 "이분이 교계를 대표하는 인물이니까 틀림없이 듣기 싫은 이야기를 할 것이다" 하고 미리 봉쇄하기 위해서 그렇게 했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그와 같이 권면, 충고, 훈계, 이런 것을 거부한 결과가 어떠하였는가를 우리는 잘 보고 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도 그랬고, 전두환 대통령도 그랬고 이른바 "독재자"라는 소리를 듣는 분들은 아마도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충고와 훈계를 듣기 싫어하고 자기가 말을 하기를 좋아했다는 공통점입니다. 이승만 대통령도 이발사의 "각하, 잘 되갑니다"라는 소리만 듣다가 불행한 일을 겪었습니다.
북한에 대해 이야기할 때 "북한이 가난합니다. 굶주리고 있습니다. 형편 없습니다" 이런 소리를 들으면 이상한 쾌감을 느끼고 "북한이 의외로 강한 면이 있습니다. 북한의 이러이러한 면은 우리보다 낫습니다" 하는 소리는 듣기 싫어했습니다.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중거리 미사일인지 인공위성인지는 아직도 명확하지는 않지만 우리보다 앞서서 발사해서 한 방 크게 얻어맞은 꼴이 되지 않았습니까?
권면, 충고, 훈계 가운데 차원이 가장 높은 것은 신앙에 관련된 것입니다.
"신앙을 가지십시오"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십시오"
"그와 같이 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어긋납니다"
"그같은 말, 또는 행동은 교회의 화합에,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데 유익이 되지 않습니다" 이같은 권면과 충고와 훈계를 중요하게 생각해야합니다. 제일 중요하게 여겨야합니다. 겸손하게 받아 들여야합니다. 교역자의 말을 직장 상사의 말보다 더 무겁게 받아 들여야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은 영혼을 가볍게 여기는 것이라고 32절에 밝게 말하고 있습니다. 권면과 충고와 훈계, 특별히 신앙에 관련된 권면과 충고와 훈계를 받아 들이는 지혜로운 귀의 소유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셋째, 지혜로운 사람의 귀는 하나님의 소리를 구별하고 듣습니다.
하나님의 소리는 처음부터 "이 것은 하나님의 소리다"라고 포장되어 우리에게 전해지지 않습니다.
북한에서 발행되는 신문이나 간행물은 김일성이나 김정일의 말은 아예 굵고 진한 활자로 인쇄되어서 식별하기가 쉽습니다. 신포 경수로 건설현장에서 일하고 있는 우리 근로자들이 그런 내용이 있는 신문을 모르고 깔고 앉았다가 큰 말썽이 된 일이 얼마 전에 있었지요.
우리는 다 보고난 신문이나 잡지는 폐지수집을 해서 그것을 판매해서 유익하게 사용하는데 북한에서는 어떻게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은 처음부터 특별하게, 라디오 드라마에서 사용하는 방법처럼 울림(에코)을 동반하거나 휠터 처리를 해서 색다르게 들려오지 않습니다. 아주 평범한 형태로 전달됩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그러나 그 음성을 듣습니다.
모세는 미디안 광야에서 양을 돌보는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하루는 광야 서편 호렙산에서 불이 붙었으나 사라지지 않는 떨기나무를 봅니다. 떨기나무는 보잘 것 없는 나무입니다. 불이 붙었으나 사라지지 않는 떨기나무는 보잘 것 없어 보이지만 사라지지 않는 백성들을 상징합니다. 떨기나무 사이에서 들리는 음성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로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하는 음성을 듣습니다.
어머니에게서 받은 "너는 고난 받는 히브리 민족이다"라는 교육, "물에서 건지움을 받았다"는 뜻을 가진 자기 이름 모세의 유래, 동족을 도우려다가 오히려 쫓김을 받게 된 자기의 체험, 이런 것들이 "아, 이것은 하나님의 명령이로구나!" 하는 해석을 내리게 했을 것입니다.
아모스는 드고아 초원에서 양을 치며 뽕나무를 기르는 생활을 합니다. 아주 평범한 생활입니다. 그 가운데서 아모스는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에게 예언하라"는 말씀을 듣습니다.
이사야는 성전에서 기도하다가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하는 부름을 듣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은 아주 낮게, 조용하게, 세미하게 들립니다.
호렙산의 엘리야는 강한 바람과 지진과 불 가운데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것이 아닙니다.
강한 바람이 불 때 엘리야는 "그렇지! 하나님은 특별한 분이니까 하나님이 나타날 때는 이렇게 요란스러운거야!"하며 기대를 했을 것입니다. 지진이 일어날 때도 마찬가지였고 불이 일어났을 때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열왕기상 19장 11절과 12절에 "바람 가운데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지진 가운데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불 가운데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더니"라는 표현이 그 것을 증명해 줍니다.
하나님의 음성은 불 뒤에 아주 세미하게 들려왔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의 귀는 그 것을 포착합니다.
지혜로운 사람의 귀는 소리가 없는 가운데서도 귀한 소리를 듣습니다.
요즘 논두렁에 서면 벼가 익어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지 않습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땀흘리며 일하는 소리이기도 합니다.
서울에서 수원 가는 국도 왼쪽에 성 라자로 마을이 있습니다. 음성 나환자촌으로서 지금도 103명의 나환자들이 생활하고 있습니다. 성 나라로 마을 원장으로 오래 수고한 분은 이경재(李庚宰)신부였습니다. 이 분이 지난 5월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천주교에서는 세상을 떠나는 것을 선종(善終)이라고 하지요. 후임으로 김화태(金華泰) 신부가 부임했습니다. 나환자들의 사고방식은 매우 특이해서 대하기가 어렵습니다. 나환자촌에서 오래 선교활동을 하던 목사님의 말에 따르면 음성나환자들이 많이 하는 일이 양계(養鷄)인데 때로는 달걀 하나를 가지고 살인 직전에 이르는 일을 겪으면서 당황한 적이 있다고합니다.
생소하고 특수한 분야의 책임을 맡은 후임 원장이 얼마나 어려움이 크겠습니까?
김화태 신부가 답답해서 전임자인 이경재 신부의 묘소를 두 번 찿았는데 "네가 하는게 아냐 하느님이 다 도와주셔 나도 내가 한 게 아냐" 하는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고 합니다.
소리가 없는 가운데서 귀한 소리를 듣는 지혜로운 귀를 가졌기 때문에 이 분은 어려운 사명을 잘 감당해 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성전신축을 해 나가고 있는 우리에게 도전이 되는 이야기입니다.
사무엘상 3장 1절의 말씀에 따르면 사무엘이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길 때는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였습니다(삼상 3:1).
오늘날은 하나님의 말씀이 없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새벽기도회에서도 말씀을 했습니다만 교회가 얼마나 많이 있고 교회 매스컴이 얼마나 발달해 있습니까?
오늘날의 문제는 지혜로운 귀를 가진 사람이 많지 않은 것입니다.
디모데후서 4장 3절 이하의 말씀이 오늘날 그대로 이뤄지고 있습니다.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
가장 지혜로운 시대, 컴퓨터를 통해 많은 지식을 축적해 가는 시대인 것 같지만 사람들의 귀는 점점 덜 지혜로워지고 있습니다.
바른 교훈을 받지 않습니다.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둡니다. 이 말은 귀를 즐겁게 하는 말을 들으려고 자기들의 욕심에 맞추어 스승을 끌어들인다는 것입니다. 진리에 대해서는 귀를 닫습니다.
헛된 이야기를 부지런히 좇아 갑니다.
그렇게 부지런히 좇아간 끝은 벼랑이 됩니다.
예수를 믿는 우리까지 이런데 휩쓸리면 이 시대는 정말 소망이 없어지고 맙니다. 성경에 시각장애인이 시각장애인을 인도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만 마음의 청각장애인이 인도하는 세상도 비극적인 결과를 가져옵니다.
예수를 믿는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지혜로운 귀를 가진 사람들이 되어서 이 시대를 바른 방향으로 끌고 가야합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과 약속을 하고 새로운 백성이 되었다는 뜻으로 신체의 일부분을 베어냅니다.
이 것을 할례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이 할례가 매우 형식적인 것이 되어서 바울은 "마음의 할례를 받으라"고 강권합니다.
우리의 혀도 할례를 받아야합니다.
동시에 우리의 귀도 할례를 받아야합니다.
예레미야 6장 10절의 말씀입니다.
“내가 누구에게 말하며 누구에게 경책하여 듣게 할꼬 보라 그 귀가 할례를 받지 못하였으므로 듣지 못하는도다 보라 여호와의 말씀을 그들이 욕으로 여기고 이를 즐겨 아니하니”
할례 받지못한 귀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오히려 욕으로 여기고 싫어합니다.
우리의 귀는 하나님의 말씀을 즐겨 듣는 할례 받은 귀가 되어야겠습니다.
목양의 성도들은, 그리고 컴퓨터를 통해 이 설교를 대하는 분들은 듣기에 힘쓰고, 권면과 충고와 훈계도 즐겨 듣고, 특히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기쁘게 듣는 지혜로운 귀, 할례 받은 귀를 가진 사람들이 되어 이 시대를 바르게 인도해 가는 사명을 잘 감당하게 되기를 우리의 기도를 즐겨 들으시는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