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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79:1-4 하나님이여 열방이 : 칼빈
이 시는 극심한 환난을 당했던 교회의 탄식과 애가(哀歌)를 적은 것입니다.
성도들은 이 시에서 자기들의 환난을 비통해 함과 원수들의 잔인함을 호소합니다.
다른 한편으로 성도들은 이 환난이 자신들이 마땅히 받아야 할 것으로 알고 겸손하게 하나님의 긍휼을 간구합니다.
이런 성도들의 확신은 주로 교회를 억압하는 악한 자들이 하나님의 거룩하신 이름을 모욕하는 한 자기들이 당하는 환난이 하나님께서 모욕을 당하시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사실에 근거한 것이었습니다.
1. 본 시편의 표제는 “아삽의 시” 입니다.
이 시 역시 다윗이 죽은 지 훨씬 훗날에 기록되었다는 견해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저자가 이 시에 예언의 영으로 교회의 환난을 예언함은 물론 성도들에게 이러한 환난을 당하는 경우 십자가를 지고 견딜 수 있는 용기를 갖도록 해준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의 근거가 될 만한 것이 없습니다.
선지자들에게 있어서는 예언을 역사적으로 말한 경우가 흔치 않습니다.
이 시의 내용을 현명하게 잘 살펴본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이 시가 앗수르 사람들이 성전을 불태우고 성을 멸망시킨 뒤 백성들을 포로로 잡아 끌고 갔을 때가 아니면 안티오쿠스가 예루살렘에 거하는 사람들을 대량 학살하여 성전을 더럽혔던 때에 기록되었음을 쉽게 간파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시의 주제도 이 둘 중 어느 한 시기에 매우 잘 부합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돌려지는 이 탄식의 교회가 압제당하던 시기, 즉 가장 소망이 없는 상태에 빠졌던 때에 기록되었다는 사실을 시인하도록 합시다.
앗수르 사람들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얼마나 잔인했었는가는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안티오쿠스의 학정 밑에서는 누구든지 하나님을 경배하기 위해 단 한 마디라도 입을 놀리게 되면 그 즉시로 죽음을 면치 못했습니다.
2. 본문 1-3절은 “(1) 하나님이여 열방이 주의 기업에 들어와서 주의 성전을 더럽히고 예루살렘으로 돌 무더기가 되게 하였나이다
시편 79 편
(2) 저희가 주의 종들의 시체를 공중의 새에게 밥으로 주며 주의 성도들의 육체를 땅 짐승에게 주며
(3) 그들의 피를 예루살렘 사면에 물같이 흘렸으며 그들을 매장하는 자가 없었나이다” 입니다.
선지자는 성도의 입장에 서서 성전이 더럽혀지고 예루살렘이 훼파된 것을 탄식합니다.
2, 3절은 성도들이 무참히 살육 당하여 시체가 땅에 뒹군 사실을 탄식합니다.
거의 모든 단어들이 이와 같은 교회의 원수들의 잔인한 성격을 나타냅니다.
하나님께서 유대 땅을 자기 백성의 소유물로 택하셨다는 사실을 생각해 볼 때 그 땅이 이방 백성들에게 빼앗겨 여지없이 짓밟힘을 당하고 그 이방 백성들 마음대로 황폐케 되어 버렸다는 사실은 모순처럼 보입니다.
그러므로 선지자는 “열방이 주의 기업에 들어와서” 라는 말 속에서 자연의 질서가 사실상 뒤엎어져 버렸다는 사실을 탄식합니다.
선지자가 2절에서 말하는 성전의 멸망은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로서 땅 위에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 사라지고 종교가 파괴돼 버렸기 때문입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보좌가 있었던 ‘예루살렘이 돌무더기가 되어 버렸다’ 고 말합니다.
이 말은 사실상 무시무시한 방식으로 예루살렘이 멸망한 사실을 의미합니다.
성전을 더럽힌 것과 거룩한 성을 멸망시킨 행위 속에는 마땅히 원수들을 향해 내리시는 하나님의 분노를 유발시킬 만한 감히 하늘을 향한 불신앙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선지자는 그들에 대한 말로 서두를 시작해 성도들이 살육 당한 사실을 진술합니다.
이런 핍박과 극심한 잔혹성은 그들이 하나님의 종들을 죽였을 뿐 아니라 그 시체를 묻지 않고 짐승과 새들의 먹이가 되도록 내버려 두었다는 사실이 지적해 줍니다.
죽은 사람의 매장을 거룩하게 여기고 원수라 할지라도 무덤에 장사되는 영광을 빼앗으려 하지 않는 것은 그 당시 사람들의 아름다운 전통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죽은 시체가 짐승들에게 찢기고 삼켜지는 것을 보기 좋아하는 야만적인 자들을 잔인스러운 짐승들로 취급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또 “사람의 피를 예루살렘 사면에 물같이 흘렸으며” 라는 말씀은 이 핍박자들이 보통 원수들보다 훨씬 더 잔인하여 그 이상 가는 자가 없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이 구절은 살육하는 그들이 피흘리기에 만족하지 못할 만큼 갈하다는 사실을 봅니다.
“그들을 매장하는 자가 없었나이다”는 죽음당한 자의 형제나 친척을 가리킵니다.
그 성에 살던 자들은 자기들 앞에 나서는 모든 자들을 무자비하게 죽이는 분별없는 적들의 침입에 놀라 아무도 감히 나서지 못했습니다.
시편 79 편
하나님은 사람의 매장을 마지막 날에 있을 부활의 증거가 되게 하셨기에 성도들에게서 죽은 이후에 매장되는 권리를 빼앗아 버린 것은 이중으로 모욕을 가한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자주 이런 형벌로 버림받은 자들을 대하셨는데 왜 자기 백성들이 짐승의 밥이 되도록 하셨는가 하는 의문이 일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다른 곳에서도 말했던 것처럼 우리는 버림받은 자뿐 아니라 선택받은 자들까지도 육신에만 국한되는 일시적인 형벌을 받게 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 두 경우에 유일한 차이점은 하나님께서 진노의 수단이 되는 그 형벌을 가지 백성을 구하기 위한 수단으로 바꾸신다는 점입니다.
이와 같은 해석이 죽은 이후에도 매장되지 못했다는 말씀에도 해당됩니다.
하나님의 가장 뛰어난 종도 잔인하고 무참한 죽음, 즉 우리가 흔히 살인자나 기타 하나님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임하는 형벌로 아는 죽음을 당할 수 있습니다.
성도들일지라도 반드시 훌륭한 죽음으로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또 하나님께서 원수들의 노를 일으켜 성도들로 육신적인 부당한 핍박을 당하게 함으로서 그들이 자기를 얼마만큼 사랑하는지를 살펴보십니다.
이와 비슷하게 하나님께서는 버림받은 자들에게 분노의 표적을 내리시고 그들이 죽은 이후에도 그들을 묻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악한 왕을 위협하여 “그가 끌려 예루살렘 문밖에 던지우고 나귀같이 매장함을 당하리라”(렘22:19, 36:30) 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자녀들을 그처럼 모욕적으로 대하신 것이 그 당시에는 마치 그들을 버린 것처럼 보였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나중에 그것은 구원을 베풀기 위한 수단으로 바꾸실 것입니다.
또 하나님의 자녀들의 믿음은 이런 시험을 이기고 새로운 승리를 얻게 될 것입니다.
옛날에 죽은 자들의 몸에 기름을 바른 것은 이 예식을 통해 후대 사람들의 생활을 위한 교훈을 주고자 하는 것이며, 시체를 조심스럽게 보관한 것은 그들에게 보다 나은 생활에 대한 소망을 갖게 해주려는 의도였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매장을 당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아무런 손실을 보지 않습니다.
오히려 성도들은 이런 하찮은 도움을 훨씬 능가하는 믿음으로 부활할 때에 빠른 걸음으로 복된 영원 불멸의 세계로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3. 본문 4절은 “우리는 우리 이웃에게 비방거리가 되며 우리를 에운 자에게 조소와 조롱거리가 되었나이다” 입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긍휼을 자극시키기 위한 또 하나의 탄식이 언급됩니다.
시편 79 편
악한 자들이 점점 더 교만해져서 우리를 조롱하고 넘어뜨릴수록 우리는 구원이 더 가까이 임박했다는 것을 확신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심히 교만하고 오만한 행위를 그냥 보고 게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자신의 거룩한 이름을 비방할 때에는 더욱 더 그렇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도 “여호와께서 그에 대하여 이같이 이르시되 처녀 딸 시온이 너를 멸시하며 조소하였고 딸 예루살렘이 너를 향하여 머리를 흔들었느니라 네가 훼방하며 능욕한 것은 누구에게냐 네가 소리를 높이며 눈을 높이 들어 향한 것은 누구에게냐 곧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에게니라“(사37:22,23) 라고 말했습니다.
또 ‘그들의 이웃’은 분명히 배신자의 무리 또는 아브라함의 타락한 자녀들과 원수들의 종교에 절했던 자들로서 이 불쌍한 백성을 괴롭히고 비방할 때 하나님도 모독하기를 쉬지 않았을 것임이 틀림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 성도가 탄식하는 것은 혼자 개인적으로 조소를 당하는 것이 아니고 그들이 하나님과 그의 율법을 간접적으로 반항하는 것을 보면서 탄식하는 것이라는 점을 기억합시다.
우리는 이와 비슷한 탄식을 이 시의 마지막 부분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시편 79 편
시79:5-9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시인은 하나님의 백성이 핍박자들에게서 받는 환난이 비참스러운데 대하여 말하면서 하나님의 구원을 기도합니다(1-7).
하나님의 백성이 그렇게까지 참상을 당한데 대하여는 하나님께서 더 참으실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비참한 사실들을 이유로하여 구원을 간청하는 것은 진리에 합당합니다.
시인은 하나님이 그 백성을 비참한 처지에서 구원해 주실 근거를 진술합니다(8-10).
(1) 시인은 “우리 열조의 죄악을 ......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라고 합니다(8절상).
이제 이 시인이 대표한 성도들은 이렇게 회개하며 하나님을 찾는 중에 있습니다.
그러한 만큼 그 조상들의 죄값을 당하지 않도록 기도할 만합니다.
(2) 시인은 ‘우리가 심히 천하게 되었으므로 불쌍히 여겨 주시기를’ 기도합니다(9절).
이것은 자기들에게 의(義)가 없음을 알고 다만 주께서 구원해 주시기를 원함입니다.
이것은 신약 시대 신자들이 그리스도의 공로로 구원받기 원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1. 본문 5절은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영원히 노하시리이까 주의 진노가 불붙듯 하시리이까 ”입니다.
우리는 이미 “어느 때까지”라는 말과 “영원히”라는 이 두 표현이 함께 연결될 경우에는 오래 되고 중단되는 일이 없는 환난을 가리킨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즉 앞을 내다 보았을 때에 자기들이 당하는 일의 끝이 보이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구절에 나오는 탄식이 교회에 대한 핍박이 시작된 후 1, 2개월 만에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오래 계속되는 환난으로 일어나는 지루함으로 성도들의 마음이 거의 파탄되어 버릴 때까지 계속될 것을 말한다고 결론지을 수 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당한 큰 환난의 축적이 주의 분노를 연상하도록 했다고 고백합니다.
악한 자들이 무엇을 꾀하든 하나님이 허락지 않는 한 해를 끼칠 수 없다는 사실을 충분히 깨달음으로서 그들은 이 사실을 의심할 수 없는 원리로 보고 결론을 내립니다.
곧 하나님께서 이방 원수들에게 자기를 핍박하도록 그 범위를 허락하셨을 때에는 하나님의 분노가 크게 자극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시편 79 편
이런 생각이 없었다면 그들은 하나님께서 손을 뻗치사 자기들을 구원하시리라는 소망을 갖고 하나님을 바라볼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고삐에 묶인 사슬을 풀어 주는 것이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채찍을 갖고 찾아오실 때마다 우리의 양심이 자신을 책망할 때마다 우리가 특별히 하나님의 손을 바라보게 됩니다.
여기에 보면 하나님의 옛 백성들은 하나님을 부당하게 멸시하시는 분으로 비난하지 않고 자기들에게 마땅한 형벌을 내리시는 분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주님은 항상 자기 종들에게서 그들을 연단시키기 위한 정당한 근거를 찾으려 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종종 자신의 긍휼을 베푸심으로 그들의 죄는 용서하시되 십자가를 지게 함으로서 용서하십니다. 그 이유는 그들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불쾌함을 나타내시는 것과는 다른 목적에서입니다.
욥과 같은 인내로 단련시키고 그 순교자들은 영예로운 복지로 초대하기를 허락하심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은 이 구절에서 자발적으로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올라서서 자기들이 당하고 있는 환난이 자신의 죄 때문인 것으로 그 이유를 찾아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볼 때 이 시가 기록된 것은 바벨론 포로로 잡혀갔을 동안이었을 것이라는 추측이 분명해집니다.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의 학정 아래서는 다른 형태의 기도를 드렸었습니다.
“이 모든 일이 우리에게 임하였으나 우리가 주를 잊지 아니하며 주의 언약을 어기지 아니하였나이다 우리 마음이 퇴축지 아니하고 우리 걸음도 주의 길을 떠나지 아니하였으나”(시44:17, 18) 라는 말씀 속에서 우리는 성도들이 하나님을 반항하여 불만을 터뜨린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들이 이 말을 하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단순히 자기들의 죄악에 형벌을 가하는 것만이 아니라 또 다른 목적을 갖고 계신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곧 하나님께서는 이런 극심한 환난을 수단으로 해서 자기의 백성들에게 그들의 고귀한 부르심에 대한 상을 예비해 주십니다.
2. 본문 6-7절은 “(6) 주를 알지 아니하는 열방과 주의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는 열국에 주의 노를 쏟으소서
(7) 저희가 야곱을 삼키고 그 거처를 황폐케 함이니이다” 입니다.
1) 분명히 이 기도는 사랑의 법칙과 모순됩니다.
시편 79 편
우리는 환난에 대해서 괴로움을 느끼고 그것에서 벗어나기를 원할 때에 자신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건짐 받기를 바라야 마땅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이 여기에서처럼 행여나 불신자들이 구원을 받을까 우려하고 그들의 멸망을 원하는 것은 비난받아 마땅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앞서 언급했던 점을 명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곧 누구든지 이와 같은 기도를 올바르게 드리려는 사람은 반드시 공공 복리를 위한 열심히 불타 있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시인은 자신만을 생각하는 과오를 저지르면서 자기의 육체적인 환난을 더 이상 당하지 않기 원하며 자기 원수들의 격렬함을 피하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시인은 개인적인 관심을 제쳐놓고 오직 교회의 공통적인 구원에만 관심을 두었기에 이런 결론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다음으로 시인은 하나님께 분별력과 판단력을 주사 지각없는 열심히 억지로 기도를 드리지 않게 해달라고 간구하였습니다.
이것은 우리들이 보다 중요하게 다루어야 할 또 한 가지 주제입니다.
덧붙여 관찰되어야 할 사실은 이 구절에서 이 경건한 유대인은 모든 교회의 유익을 도모하기 위해 자기들의 특별한 이점을 나열할 뿐 아니라 그리스도에게로 눈을 돌려 주로 자기 원수들이 돌이킬 수 없도록 멸망시켜 주실 것을 간구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들은 이 구절에서 하나님이 이 원수들과 또 다른 원수들을 멸망시켜 주시도록 경솔한 기도를 드리거나 하나님의 심판을 고대하는 것이 아닙니다.
버림받은 자들이 마땅히 받아야 할 정죄 속에 포함될 것과 하늘의 심판이 임하여 선택받은 자와 버림받은 자를 갈라놓을 때까지 인내로 기다릴 것을 동시에 말합니다.
그들이 이렇게 하는 것은 사랑이 요구하고 있는 애정을 내쫓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 원할지라도 그리스도의 원수들 중 일부는 도저히 구원되지 못한 채 절대적으로 지옥에 떨어질 것이 확실한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2) 그러나 문제가 아직 완전히 해결된 것은 아닙니다.
7절 말씀에서 보는대로 시인과 성도들이 자기 원수들의 잔인함을 규탄할 때에 그들은 보복이 임하기를 바라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기도를 드릴 수 있는 자는 다만 공적으로 옷 입은 자와 개인적인 생각을 던져 버리고 모든 교회의 복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는 자, 교회의 머리가 되신 그리스도에게 눈을 돌리고 있는 자, 마지막으로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그들의 마음이 하나님의 심판을 고대하기에 자기들에게 손해를 입혔던 도든 원수들을 무분별하게 죽기를 구하지 않고 쉽게 용서해 주며 오직 버림받은 자들에게만 그런 판단을 내리는 자뿐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시편 79 편
회개의 모든 소망이 사라지기 전에 서둘러 하나님의 보복을 구하는 사람들은 ‘너희는 무슨 정신으로 말하는지도 모르는구나’ 라고 지각이 없고 잘못된 열심을 갖고 비난하는 자들을 정죄하셨던 그리스도의 말씀을 잊어버린 자들입니다.
더우기 여기서 신실한 자들이 바라고 있는 것은 단순히 교회를 심히 악하게 핍박했던 자들의 멸망에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자기들과의 관계에서 보여주신 그 친밀감을 통하여 자기들을 핍박했던 자들이 형벌을 받지 않음이 얼마나 모순된 일인가를 말합니다.
이 말의 근거는 ‘주여, 어찌하여 주의 이름을 부르는 우리들에게는 그토록 극심한 환난을 주시고 주를 멸시하는 이방민족들은 보호해 주시나이까?’ 입니다.
신자들의 의도는 자기들만 이 세상에서 죄를 범한 자가 아니기에 하나님께서 진노를 쏟으실 곳이 다른 데도 얼마든지 있다는 사실에 대한 충분한 근거를 말함입니다.
3) 비록 우리가 하나님에게 행동 규칙을 정해 드려서는 안 되고 오히려 “하나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벧전4:17)라는 말씀에 끈기 있게 복종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자기 성도들이 불신자들이나 자기를 경멸하는 자들보다 더 나쁘게 취급되지 않도록 자기에게 호소하는 자유를 성도들에게 허락하십니다.
“주를 알지 아니하는” 이라는 말과 “주의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는” 이라는 말이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이런 각기 다른 표현 양식을 통해서 사도바울이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롬10:14) 라고 가르친 것같이 사람이 하나님을 알기 전에 하나님을 부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너는 내 백성이라”(호2:23)고 말씀해 주실 것을 기대하지 않고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호2:23) 라는 대답이 우리의 것이 될 수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기에게로 부르실 때에만 우리의 입을 열어 이런 말씀을 하나님께 드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종종 기도의 동의어로 사용됩니다.
그러나 이 구절에서는 꼭 그런 용도로 씌여진 것만은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의 안내를 받지 않고서는 참된 종교를 진지하게 고백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방 사람들은 어느 곳에서나 하나님을 섬긴다고 자랑하고 다닙니다.
그렇지만 그 말은 부패한 자들의 생각에서 만들어 낸 그들만의 신이요, 그들의 모든 종교적인 예배행위도 싫증나는 것이므로 그 말은 빈 껍데기에 불과합니다.
시편 79 편
심지어는 오늘날에도 자기들이 예배하는 하나님에 대해서 올바른 지식을 갖고 있지 못하고 또 자기가 시인하는 것을 자기 입으로 요구하지 못하는 죄악의 사람(Man of Sin)의 추종자들은 맹목적이고도 잘못된 종교적인 인습들을 고안해 냅니다.
이들은 분명히 하나님께 버림받을 것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자리에 우상들을 올려놓고 있기 때문입니다.
3. 본문 8절은 “우리 열조의 죄악을 기억하여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우리가 심히 천하게 되었사오니 주의 긍휼하심으로 속히 우리를 영접하소서 ”입니다.
경건한 유대인들은 이 구절에서 자기들이 앞서 간략하고 애매하게 말했던 것, 자기들이 받은 형벌은 마땅한 것이었다는 사실을 말한 이후에 이런 기도를 드립니다.
하나님과 화목해야 자기들이 당한 환난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으로 알았기 때문입니다
온갖 역경을 치료해 주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진노하신다면 아무리 큰 번영이라 할지라도 우리에게 유익과 행복을 가져다 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열조의 죄악”(이전시대의 죄악 -칼빈)이란 말씀이 어떤 사람들은 조상들이 범했던 죄악을 가리킨다고 생각하여 거기에다 자기들이 어렸을 때나 젊었을 때에 범했던 죄악을 추가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보다 넓은 의미를 갖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것은 자기들이 최근에 범했던 한 두가지 죄악을 고백할 뿐 아니라 자기들의 조상들과 함께 오래전부터 범했던 오래되고 허다한 죄악까지 포함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오랫동안 계속된 완악함 속에는 하나님을 향해 마음을 굳게 한 것이 내포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이런 지식은 선지자들이 그들을 향해 꾸짖던 것과 일치합니다.
거룩한 역사는 포로로 잡혀가게 했던 형벌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경험을 통해 자신들의 죄악을 치유될 수 없다는 것을 경험할 때 계속되었다는 사실을 증거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조상들의 죄가 자녀들의 깊숙한 곳에 있기에 그들의 죄에 대한 보응을 삼 사대까지 내리시겠다고 율법을 선포하신 것을 생각하고 자녀들이 자기 조상들의 죄악을 자기들에게 전가시키지 말아 달라고(출20:5)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을 볼 때 놀랄 필요가 없습니다.
“속히 ...... 하소서” 와 “열조의 죄악” 의 표현이 사용된 것은 주의할 가치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삼사백년 전부터 범해 오던 모든 죄악들을 엄격하게 계산하였더라면 그들의 구원의 날은 훨씬 더 지연되었을 것입니다.
시편 79 편
그러므로 성도들은 하나님께 자기들이 예전에 범했던 죄악을 기억치 마시고 속히 구원을 베풀어 주시라고 간구합니다.
자기들의 죄가 큰 장애물이 되어 지연된 원인이 되었으므로 그들이 “주의 긍휼하심으로 속히 우리를 영접하소서” 라고 간구하는 그 타당성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4. 본문 9절은 “우리 구원의 하나님이여 주의 이름의 영광을 위하여 우리를 도우시며 주의 이름을 위하여 우리를 건지시며 우리 죄를 사하소서” 입니다.
그들은 이 구절에서 다시 자기들이 당했던 고난은 어떤 것이든지 다 하나님의 진노하심에서 비롯된 것이요, 하나님께서 자기들과 화목을 이루어 주시지 않는 한, 그런 상태에서 도저히 위로를 받을 수 없었다고 합니다.
자기들이 많은 죄악을 범함으로 용서를 받을 소망에서 멀어졌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던 그들은 여러 가지 표현을 사용합니다.
첫째로 자기들에게 하나님께서 은총을 나타내 보여주시도록 하나님을 가리켜 “우리 구원의 하나님” 이라고 부릅니다.
둘째로 자기들에게는 하나님께서 긍휼을 베푸실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으므로 오직 하나님께서 영광으로 자기들에게 나타내 주셨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죄인들이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 것은 아름다운 행위로의 공로나 만족으로가 아니라 거저 주시는 공로 없는 사죄로 말미암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조금 전에 말한 것과 제6편에서 보다 자세하게 설명한 것은 여기서도 마음에 필히 간직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 단순히 외부적인 형벌에서 건짐 받기만을 바라지 말고 채찍을 가지시고 우리에게 찾아오실 때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바로 해주시기 위한 것으로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어리석은 병자가 자기의 병이 낫기만을 바라고 그 질병의 원인과 근원에서 구원받는 것을 생각하지 못하는 것과 같은 전철을 밟아서는 안 됩니다.
주석가들이 ‘긍휼’ 또는 ‘호의를 베푸소서’ 라고 번역한 כפר(카페르) 란 단어는 정확히 ‘깨끗하다’ 또는 ‘속죄하다’는 의미를 가진 제사에 사용되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은총이 내리기 바랄때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기억합시다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히9:22).
시편 79 편
시79:10-13 어찌하여 열방으로
시인은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구원해 주실 진리의 근거를 계속 진술합니다.
(1) 시인은 “열방(列邦)으로 저희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말하게” 되지 않도록 구원해 주시기를 청원합니다(10,11).
이 시인은 이렇게 하나님의 백성의 구원문제보다 하나님을 위한 관심이 더욱 큽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존재와 위엄이 사람들에게서 무시(無視)되지 않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2)시인은 원수들이 주님을 훼방한 죄가 큰만큼 그들은 보복당해 마땅하다 합니다(12)
이 시인은 하나님을 훼방한 원수들 앞에서는 구원 소망을 가질 만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을 훼방하고 끝내 형통할 자는 없기 때문입니다.
(3) 시인이 백성의 구원을 원한 목적은 하나님께 감사하기 위한 것입니다(13).
1. 본문 10절은 “어찌하여 열방으로 저희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말하게 하리이까 주의 종들의 피흘림 당한 보수를 우리 목전에 열방 중에 알리소서” 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은혜의 보좌 앞에 간구하면서 전에 사용했던 것과는 다른 의미를 갖는 하나님의 이름을 사용합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을 위하여 우리에게 긍휼을 베푸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악을 값없이 용서해 주시는 자비하신 분으로 우리의 입을 다물게 하시고 자시만이 의로우신 분으로 여김을 받으십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여기서 하나님께 그의 거룩하신 이름을 악한 자들의 음모와 욕설의 대상이 되게 하지 말아 달라고 간구합니다.
우리가 구원과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열정에 주의를 집중하지 않는 것은 우리 기도를 우리의 경험에다 결부시키려는 옳지 못한 기도 방법 때문인 사실을 배웁니다.
하반절에 나오는 동일한 질문도 바로 이런 답변을 요구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원수들에게 보응하기로 선포하셨다고 할지라도 우리들은 그 복수에 대한 집념을 불태울 수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구절에 나오는 기도 형식이 우리가 요구할 때마다 모든 사람들이 무분별하게 그대로 사용할 수 있는 기도가 아니라 성령의 인도하심과 교훈하심에 따라 악한 자들에 대해서 모든 교회가 일반적으로 당하고 있는 처지를 변호하는 기도라는 점을 기억합시다.
시편 79 편
우리가 이런 형식의 기도를 올바르게 하나님께 구하려면 먼저 우리의 마음이 성령의 지혜로 조명을 받아야 하고 다음에 동일하신 성령의 감화로 확신케 되어 육체의 몽롱한 감정으로 말미암아 잘못되기 쉬운 우리의 열심이 순전하며 바른 입장에 서야합니다
그 다음에야 하나님께 자기 종들의 생명의 피를 흘리는 자들에게 어떻게 진노하고 계시는지를 분명한 증거로 보여주시라고 합법적으로 간구할 수 있습니다.
성도들이 마치 오래도록 그렇게 되기를 욕심내어 바라고 있었던 것처럼 사람의 피를 흘리는 모습에 만족하는 어떤 갈망이 표현된 것으로 여겨서는 안 됩니다.
그들은 다만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에게 과오를 저질렀던 자들에게 그의 분노를 벌하실 때 나타나는 아버지의 사랑의 역사를 보이셔서 자기들의 믿음을 확증시켜 주시기만을 바랍니다. 마땅히 자기들의 죄로 인해 형벌을 받았던 자들에게 “주의 종들”이라는 칭호를 쓴 것은 주의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비록 하나님께서 우리를 징계하실지라도 완전히 우리들을 내좇아 버리시는 것이 아니요, 오히려 그와 반대로 이런 징계를 통해서 하나님이 갖고 계시는 관심의 대상이 우리의 구원인 사실을 증명해 주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가 아는 대로 선인과 악인이 교회 안에 함께 섞여 있으므로 하나님의 진노가 전 교회에 임하게 되는데 이때 선인은 악인과 함께 형벌을 받습니다.
이는 마치 에스겔, 예레미야, 다니엘 그리고 다른 선지자들이 포로로 잡혀갔다는 사실과 마찬가지입니다. 사실상 그들에게는 전혀 과오가 없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그토록 극심한 환난이 임한 것은 그들 때문이 아니었음은 확실합니다.
그들은 보다 더 심한 괴로움을 당하는 것으로 악한 자들에게 보여졌을지도 모릅니다.
2. 본문 11절은 “갇힌 자의 탄식으로 주의 앞에 이르게 하시며 죽이기로 정한 자를 주의 크신 능력을 따라 보존하소서” 입니다.
우리는 성령 하나님께서 이 기도를 하도록 하신 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포로로 잡혀 있을 때였다고 확신합니다.
그러므로 “갇힌 자”라는 이름은 일반적으로 모든 백성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들은 앗수르와 갈대아 사람에 묶여 한 발자욱도 그곳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죽음의 형벌을 받은 자들과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사망의 자녀’(칼빈 ; 죽이기로 정한 자 -한글) 라 부른 것은 자기들의 포로로 잡혀 있다는 점에서 볼 때 죽이기로 정해진 정죄받은 자였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이 구절은 구속을 받고 감옥에 갇혀 있던 소수의 사람들에 국한시키는 것이 더 타당한 것 같습니다.
시편 79 편
따라서 이 말씀은 이전에 하나님 앞에서 자신들을 자랑하던 교만한 영혼들이 지금은 완전히 겸손해졌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팔의 위대하심” 곧 그 크신 능력을 간구하는 것은 하나님 편에서의 신호나 특별한 간섭이 없이는 교회의 회복에 대한 소망을 가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3. 본문 12-13절은 “(12) 주여 우리 이웃이 주를 훼방한 그 훼방을 저희 품에 칠배나 갚으소서
(13) 그러하면 주의 백성 곧 주의 기르시는 양 된 우리는 영원히 주께 감사하며 주의 영에를 대대로 전하리이다” 입니다.
우리는 보응에 대한 문제를 이미 충분하게 살펴보았습니다.
성도들이 보다 분명히 보여준 것은 자신들에게 손해를 입혔던 자들에 대한 개인 감정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하신 이름이 비방거리가 된 것을 볼 때 분개해 악한 자들이 산산히 부서져 버렸으면 하고 거룩한 열정으로 불타오르는 것입니다.
만약 이러한 감정으로 마음이 가득차고 성령의 지혜로 이런 말을 한다면 우리의 기도는 공정하신 하나님의 심판과 정확한 일치를 보게 될 것입니다.
마지막 부분에서 이 경건한 유대인은 자기들의 구원이 가져오는 열매는 ‘주의 이름이 찬송을 받게 되는 것’ 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다른 어떤 목적으로 우리들의 유익이나 복을 기대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값없이 우리에게 모든 것들을 베푸시는 뜻은 자신의 인자하심이 알려지고 높임을 받게 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이러한 환난을 당하던 자들은 자기들의 구원에 대한 감사를 깨닫고 이 사실을 단지 잠시만 아니라 세상이 끝날 때까지 후손들에게 대대로 기억시킬 것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그들에게 주어지는 “주의 백성 곧 주의 기르시는 양 된 우리”라는 독특한 표현도 주의해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이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하도록 선택을 받았고 그 찬송이 시온에서 다시 울려퍼질 것이라 한 것을 볼 때 백성들을 멸망시켰다 한들 그 결과로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기억마저도 없애 버렸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이 구절은 분명히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사43:21) 라는 예언과 일치하고 있음이 확실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