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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2: 9 별의 인도 2: 10 기쁨 2: 11 세 가지 예물
마 2: 9 별의 인도 - 박사들이 왕의 말을 듣고 갈새, 동방에서 보던 그 별이 문득 앞서 인도하여 가다가 아기 있는 곳 위에 머물러 서 있는지라. ( 박사들이 왕의 말을 듣고 갈쌔 동방에서 보던 그 별이 문득 앞서 인도하여 가다가 아기 있는 곳 위에 머물러 섰는지라. )
1] 박사들이 왕의 말을 듣고 갈쌔
마태는 분명히 '별'이 박사들을 예루살렘으로 인도했다고 기록하지 않았다. 그들이 10절에서 별을 보고 기쁨을 표한 것은 적어도 별이 계속 보이지 않았음을 시사한다.
'별'을 통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던 박사들이 그 '별'이 보이지 않게 되자(Meyer, Bengel) 유대인의 왕이 탄생할 장소는 당연히 예루살렘일 것이라는 스스로의 판단에 따라 예루살렘을 찾았고, 또 그 당시 유대의 유력자 헤롯의 '말'을 들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들은 헤롯의 경건하게 보이는 말에 고무(encouragement)되어 있었을 것이다.
2] 동방에서 보던 그 별이
자신들의 지혜에 의해 길을 잘못 들었던 박사들에게 바른 길을 제시하는 하나님의 밝은 계시의 별이 다시 나타났다.
실로 혼탁하고 부패한 세상 가운데서 참 생명 되신 예수께로 인도하는 유일한 힘은 하나님의 계시뿐이다.
* 시 119: 105 -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본문은 박사들이 궁(宮)을 떠날 때 이미 밤이 되었다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다. 낮이 무덥고 밤이 서늘한 중근동 지방에서는 먼 길을 가기 위해 밤에 별을 보고 여행하는 것이 관습이었다(Meyer).
3] 문득 앞서 인도하여 가다가
'문득'이란 말은 헬라어 원문에는 없는 말로서 갑작스런 상황을 더욱 분명히 드러내기 위해 의미상 첨가한 말이다. 박사들은 다시 '별'을 통한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바른 길을 갈 수 있게 되었다.
'앞서 인도하여'라는 헬라어 '프로에겐'(*)은 서술적 미완료 시상으로 동작(인도)의 계속성을 나타낸다. 즉 손으로 이끌듯 계속해서 인도해 가는 상태를 나타내는 용어이다(Chryststom).
문제는 이 말이, 별이 동방으로부터 베들레헴까지 움직였다는 것과 베들레헴 상공에 계속 떠있는 별을 보고 박사들이 왔다는 것(Bruce) 중 어느 것을 가리키는 말인지 확실하게 밝힐 수는 없다.
분명한 것은 박사들은 그 별이 '유대인의 왕'(2절)을 가리킨다고 믿었고, 그 별은 그들을 '아기 있는 곳'으로 인도한 것이다.
4] 아기 있는 곳 위에 머물러 섰는지라.
'있는 곳 위에'(*, 에파노 후 엔)란 '아기가 있었던 베들레헴의 특정한 장소 위'로 볼 수도 있고, 막연히 '베들레헴 동네 위'로 볼 수도 있다.
만일 전자를 받아들인다면 이 사건의 초자연성을 더욱 강조한 것이 될 것이다. 하지만 후자를 받아들여 일단 베들레헴에 도착한 박사들이 수소문하여 아기가 있는 곳으로 찾아갔다 할지라도 이 사건의 초자연성을 감소시키지는 못할 것이다.
여하튼 별은 아기가 '있는' 곳에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굳게 '머물러' 있었다. 실로 그곳에 인도(leading)와 축복과 그리고 구원이 있었다.
정녕 다윗의 자손 예수께서 '머물러 서' 있는 곳에 구원이 있는 것이다.
* 눅 18: 40-41 – 40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명하여 데려오라. 하셨더니 그가 가까이 오매 물어 이르시되, 41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이르되,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마 2: 10 기쁨 - 그들이 별을 보고 매우 크게 기뻐하고 기뻐하더라. ( 저희가 별을 보고 가장 크게 기뻐하고 기뻐하더라. )
1] 저희가 별을 보고
'별을 보고'라는 말은 그들이 새삼스럽게 별의 나타남(7절)을 보았다기 보다는, 아기 예수위에 '머물러 서'있는 별이 자신들의 기나긴 여행의 최종적인 목적지로서 하나님의 임재하심과 은혜, 곧 임마누엘이신 예수(1:23) 탄생을 드디어 목격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을 확신하였다는 말이다.
2] 매우 크게
이 확신은 그들로 하여금 세상에서 맛볼 수 없었던 무한한 기쁨의 세계로 들어가게 했다.
그들의 기쁨을 표현한 본문 중 특별히 '가장'에 해당하는 헬라 '스포드라'(*)는 '충만하여 차고 넘치는 상태'를 나타내는 말이다.
'큰'(*, 메가렌) 역시 크고 놀랍고 장엄함을 뜻하는 단어이다. 이 두 단어의 만남은 결국 그 기쁨의 실체가 최상에 이르렀음을 암시향다.
3] 기뻐하고 기뻐하더라.(*, 에카레산 카란)
'기뻐하고 기뻐하더라.'는 기쁨을 뜻하는 헬라어 '카라'(*)라는 동일 어근의 중첩으로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기쁨을 기뻐했다'(they rejoiced with joy)가 된다.
이는 어떤 의미를 특별히 강조하기 위해 동일한 의미의 단어를 중첩해 사용했던 셈어의 영향을 받은 중언법적(重言法的) 표현이라 할 수 있다(Moule).
본문은 박사들의 기쁨이 절정에 이르렀음을 보여준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에 무관심한 택한 백성들의 소동(3절)에 비하여 얼마나 값진 일인가.
그들은 샛별의 인도를 따라 왔기 때문에 의(義)의 태양이신 그리스도를 뵐 수 있게 되었다.
* 벧후 1: 19 - 또 우리에게는 더 확실한 예언이 있어 어두운 데를 비추는 등불과 같으니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너희가 이것을 주의하는 것이 옳으니라.
그들의 기쁨은 자신들에게 닥친 크나큰 행운(메시야를 만나 보는 일)을 볼 수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4] 다시 나타난 별 ( 마 2: 9-10 )
동방 박사들이 예루살렘 왕궁을 나섰을 때 동방에서부터 기이하게 빛나던 그 별이 다시 나타나서 그들을 인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이 베들레헴의 요셉과 마리아가 묵고 있는 사관에 이르렀을 때 그 별은 멈춰 섰다.
이처럼 동방에서부터 세 박사를 베들레헴까지 인도하여 아기 예수가 누우신 곳 위에 머물러 찬연히 빛났던 이 별은 왕권을 상징하는 예언된 별로서 아기 예수가 인류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할 왕권을 가지고 오셨음을 상징하고 있다.
* 민 24: 17 - 내가 그를 보아도 이 때의 일이 아니며 내가 그를 바라보아도 가까운 일이 아니로다. 한 별이 야곱에게서 나오며 한 규가 이스라엘에게서 일어나서 모압을 이쪽에서 저쪽까지 쳐서 무찌르고 또 셋의 자식들을 다 멸하리로다.
(1) 박사들의 성급한 판단이 별을 잃어버리게 하였다.
동방 박사들이 별을 따라 유대까지 찾아온 것을 보면 그들은 디아스포라(흩어진 유대인들)들을 통하여 이미 유대에서 인류를 다스리고 구속할 왕이 탄생할 것을 알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그들은 유대인의 왕은 당연히 유대의 왕궁에서 태어날 것으로 여겨 별의 인도를 받지 않고 곧장 예루살렘 왕궁으로 찾아갔다. 따라서 그들이 별의 인도를 무시한 순간 별은 그들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① 성급한 인간의 판단은 진리의 빛을 잃어버리게 한다.
동방 박사들이 예루살렘 궁전으로 찾아가려고 판단할 때는 그것이 매우 지혜롭고 옳은 것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들의 인간적인 판단을 내리는 순간 진리 자체는 고사하고 진리로 인도해줄 빛 마저도 잃어버리게 되었다. 그러므로 인간은 절대로 하나님의 인도하심보다 자기의 지혜를 앞세워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의 지혜보다 뛰어나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의 강한 것보다 강하기 때문이다.
* 고전 1: 25 -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② 성급한 판단은 허탄한 말을 의지하게 한다.
동방 박사들은 예루살렘 왕궁에서 아기 왕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을 뿐 아니라 베들레헴으로 가라는 지시와 함께 '아기에 대하여 자세히 알아보고 나도 가서 그에게 경배하게 하라'는 헤롯 왕의 가증스러운 거짓말을 들어야 했다. 그리고 헤롯의 사악한 성품을 모르는 그들은 그것을 100%진실로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
이처럼 성급한 인간의 판단은 하나님의 인도하시는 빛을 버리고 허탄한 인간의 말을 의지하게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스스로의 지혜와 지식에 의존하는 성급한 판단을 버리고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존해야 하겠다.
(2) 우매할지라도 진리를 찾으려는 자들에게는 하나님께서는 진리의 빛을 거두지 않으신다.
동방 박사들은 '박사'란 명예를 얻을 만큼 지식이 있었지만 어리석다고 생각될 정도로 성급한 판단을 내렸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은 그들의 신앙을 불신앙으로 단정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하나님은 그들의 성급한 판단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아기 예수를 만나려는 그들의 신앙을 기쁘게 여기셨다. 그리하여 그들에게 다시 동방에서 그들을 인도하던 별을 허락하셔서 그들이 아기 예수께서 누우신 사관까지 인도했다.
① 하나님은 진리를 찾느라 피곤하고 지친 자들에게 큰 위로와 힘이 되어 주신다.
예루살렘 왕궁 문을 나서는 동방 박사들의 발에 힘이 빠졌을 것은 당연한 노릇이다. 왜냐하면 예루살렘 왕궁에만 가면 새로 나신 유대인의 왕을 뵐 수 있으리라 믿었는데 그들은 다시 베들레헴으로 가야 한다는 말을 듣고 어쩌면 새로 나신 왕을 만나지 못하고 돌아가게 될지도 모른다고 비탄에 빠졌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다시 '그 별을' 비춰주심으로써 그들이 위로를 받고 힘을 얻게 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진리를 찾다가 낙망치 말아야 한다. 신실하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실수와 단점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진리로 인도하시기 때문이다.
② 하나님은 큰 기쁨을 허락하신다.
'저희가 별을 보고 매우 크게 기뻐하고 기뻐하더라'. 본문은 이들의 기쁨을 이렇게 강조하고 있다. 그러면 이들은 왜 이처럼 기뻐했을까? 그들은 먼저 그들의 확신이 틀리지 않았다는 사실에 기뻐했다.
그들이 오랜 여행 끝에 예루살렘 왕궁에 도착했음에도 유대인의 왕을 만나지 못하게 되자 스스로의 확신이 틀린 것이 아닌가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에게 동방에서 보았던 그 별이 다시 나타나자 자신들의 확신이 틀리지 않은 것을 알고 매우 기뻐했다.
베들레헴은 물론이요 아기 왕이 태어난 곳을 찾는 것이 매우 큰 기쁨이 되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진리를 찾는 당신의 백성들에게 가장 큰 기쁨을 허락하신다.
③ 하나님만 의지하도록 하신다.
이렇게 하심으로써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얄팍한 지혜나 지식보다는 하나님을 의지하게 하셨다. 베들레헴이란 분명한 지명을 알고 찾아가는 그들이지만 하나님께서는 별로써 그들을 인도하심으로 그들로 하여금 인간의 지혜나 지식보다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게 하셨다.
마 2: 11 세 가지 예물 - 집에 들어가 아기와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 아기께 경배하고, 보배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리니라. ( 집에 들어가 아기와 그 모친 마리아의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 아기께 경배하고 보배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리니라. )
1] 집에 들어가 아기와 그 모친 마리아의 함께 있는 것을 보고
누가복음에는 '아기가 나신 곳'이 마구간으로 되어 있다.
본문에는 '아기가 있는 곳'이 집으로 되어 있다.
* 눅 2: 1, 7 – 1 그 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 7 첫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따라서 박사들이 방문한 시기는 로마 황제 가이사 아구스도(Caesar Augustus, B. C. 27 - A. D. 14)의 명(命)에 의한 호적, 곧 인구 조사가 끝난 후(아마 수개월 경과 후, Wycliffe) 요셉이 거처를 마련한 다음이었을 것이다(Theophylact, Lenski, Alford 등).
2] 엎드려 아기께 경배하고
상대방에게 무릎을 꿇고 '엎드려 경배'하는 것은 헬라나 로마의 예법이 아니라 동방의 예법이다(2절).
박사들이 경배했던 대상은 마리아와 '함께'가 아니고 오직 아기 예수뿐이었다.
그들은 헤롯에게나 아기의 부친과 모친에게는 경배하지 아니했다. 경배의 대상은 오로지 만왕의 왕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 한 분밖에 없다.
* 마 4: 10 -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탄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3] 보배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리니라.
'보배합'은 '귀중품 상자'나 '보물 상자'를 의미한다. 그들의 '보배합'은 그들의 아름답고 고귀한 마음(예물)의 저장소였다.
* 마 6: 20 -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둑질도 못하느니라.
이방의 왕들이 메시야 앞에 예물을 드리고 복종하게 될 것이라는 구약 예언의 성취이다.
* 시 72: 10 - 다시스와 섬의 왕들이 조공을 바치며 스바와 시바 왕들이 예물을 드리리로다.
* 사 60: 6 - 허다한 낙타, 미디안과 에바의 어린 낙타가 네 가운데에 가득할 것이며, 스바 사람들은 다 금과 유향을 가지고 와서 여호와의 찬송을 전파할 것이며
고대 동양 풍습에서는 왕을 알현(audience)할 때 예물을 가지고 가는 것이 상례(常禮)였다(Derett, Clarke).
* 창 43: 11 - 그들의 아버지 이스라엘이 그들에게 이르되, 그러할진대 이렇게 하라. 너희는 이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그릇에 담아가지고 내려가서 그 사람에게 예물로 드릴지니, 곧 유향 조금과 꿀 조금과 향품과 몰약과 유향나무 열매와 감복숭아이니라.
* 삼상 9: 7-8 – 7 사울이 그의 사환에게 이르되, 우리가 가면 그 사람에게 무엇을 드리겠느냐? 우리 주머니에 먹을 것이 다하였으니 하나님의 사람에게 드릴 예물이 없도다. 무엇이 있느냐? 하니 8 사환이 사울에게 다시 대답하여 이르되, 보소서. 내 손에 은 한 세겔의 사분의 일이 있으니 하나님의 사람에게 드려 우리 길을 가르쳐 달라 하겠나이다. 하더라.
* 왕상 10: 2 - 예루살렘에 이르니 수행하는 자가 심히 많고 향품과 심히 많은 금과 보석을 낙타에 실었더라. 그가 솔로몬에게 나아와 자기 마음에 있는 것을 다 말하매
박사들이 헌상(offering to a superior)한 세 가지 예물 중 황금은 동서고금을 통해 매우 값지고 불변하는 성질의 귀중품으로 여겼다.
유향은 값비싼 향료로서 반질반질하고 향내 나는 흰색의 액체이며 아라비아 지방의 관목 껍질에 자국을 내어 얻는다.
몰약은 아라비아 지방에서 자라는 나무에서 추출되는 것으로서 고가의 향기를 지닌 액체로 시체를 썩지 않게 하는 방부제나 마취제로 사용되었다.
* 시 45: 8 - 왕의 모든 옷은 몰약과 침향과 육계의 향기가 있으며 상아궁에서 나오는 현악은 왕을 즐겁게 하도다.
* 아 3: 6 - 몰약과 유향과 상인의 여러 가지 향품으로 향내 풍기며 연기 기둥처럼 거친 들에서 오는 자가 누구인가?
* 막 15: 23 - 몰약을 탄 포도주를 주었으나 예수께서 받지 아니하시니라.
많은 주석가들은(Origen, Hendriksen등) 황금은 메시야 왕권을, 유향은 예수의 신성(神性)을, 그리고 몰약은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을 상징하는 것으로 여겨져 왔다.
칼뱅(Calvin)은 왕과 제사장과 그분의 장사 되심을 각각 상징한다고 봤다.
동방 박사들의 종교적 동기를 이해한다면 예물들에 상징적인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 옳다. 예물이 세 가지라는 사실에서 동방 박사들을 세 사람이라는 교회 전승이 형성되었다. 전설(legend)에 따르면 완전수에 해당하는 12명의 박사라고도 한다.
4] 보배합을 드리자.
예수님이 탄생하셨을 때 사람들은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그 당시 지도자들은 종교적 안일에 빠져 예수님의 탄생을 기대하지 않았으며, 외식함으로 그들의 탐욕만을 채우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러나 예수님의 탄생은 천사들에 의해 유대인 목자들에게 알려졌으며, 이방인인 동방 박사들에게 별을 통하여 알려지게 됨으로 유대의 낮은 자와 이방인이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게 되었다.
본문은 이방인 동방박사들이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는 모습을 기록하고 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어떠한 태도로 받아들여야 하는가를 배우자.
(1) 동방 박사들은 아기 예수께 경배를 드렸다.
① 그들은 장소를 의식하지 않았다.
박사들이 메시야로 오신 예수님을 경배하기 위해 멀리 동방으로부터 올 때에는 기대가 부풀어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별을 따라 찾아간 곳은 화려한 왕궁이 아니라 마굿간이었다.
그곳에는 한 어머니가 아기를 안고 있는 모습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이러한 모습을 본 그들은 얼마나 실망했을까? 이 아기가 유대인의 왕이란 말인가? 이 아이가 정말로 왕 중의 왕이며, 인류를 구원할 구세주란 말인가? 라고 실망을 금치 못하며 의심이 생길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현명했다. 그 모습에서 하나님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을 바라볼 수 있는 분별력이 있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외형적 장소를 의식하지 않고 아기 예수께 경배를 드릴 수가 있었다.
② 그들은 자기의 주관을 버렸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화려한 왕궁에서 태어나야 될 것이라는 생각을 가졌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헤롯의 왕궁으로 가서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뇨'(2절)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이 잘못된 것임을 깨달았다.
그들은 자신들의 판단과 견해를 버리고 그들을 인도한 별빛을 따라 초라한 마굿간으로 갔다. 그들은 예수님이 왕궁에서 태어나야 한다는 그들의 주관을 버리고 순순히 별빛을 따라 유대 베들레헴으로 향했다. 초라한 마굿간이지만 하나님의 뜻으로 받들며 아기 예수께 경배를 드렸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우리의 생각을 초월하여 역사하시는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주관이 옳다고 무조건 주장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수 있는 분별력을 가져야 한다.
유대인들은 아직도 메시야가 오시지 않았다 하여 이스라엘을 구원할 자를 기다리고 있다. 그들은 자기들의 주관을 버리지 못함으로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외면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 것이다.
③ 그들은 경배의 대상을 확실히 하였다.
본문을 보면 '아기께 경배하고'라고 기록되어 있다. 로마 카톨릭은 마리아가 예수님을 낳았다 하여 '성모'라고 부르며 동상을 만들어 놓고 숭배하는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 마리아는 존경의 대상이지 경배의 대상은 아니다.
마리아 외에도 신앙의 훌륭한 선배들이 많이 있다. 예컨대 사도 바울이나 어거스틴을 비롯하여 웨슬레, 칼빈등의 인물들은 우리가 존경하며 본 받아야 할 대상이다.
그러나 그들을 광적으로 추종한 나머지 복음보다는 그들의 신학만을 옳은 것으로 인정하거나 성경보다 그들의 신학을 우선해서는 안 된다. 우리의 신앙은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뿐 아니라 완전한 계시인 성경에 근거해야 한다.
(2) 동방 박사들은 보배합을 열어 아기 예수께 예물을 드렸다.
① 그들은 황금과 몰약과 유향을 예물로 드렸다.
이것은 왕께 드려지는 예물로 조금도 손색이 없다. 고대 사람들은 왕을 알현할 때는 황금을 선물로 드리는 것이 예의였으나 박사들은 황금 외에도 예수님께 왕으로서의 모든 예의를 갖추기 위해 가장 값지고 귀한 몰약과 유향까지도 드렸다. 이것은 가장 값진 것을 드림으로써 예수님께 향한 그들의 신앙의 표현이었다.
② 우리는 주님의 탄생의 기쁨을 무엇으로 표현해야 합니까?
아기 예수께 경배하기 위하여 우리의 보배합을 열어야 한다. 예수님의 오심은 우리의 가장 큰 희망이요 소망이다. 우리는 그를 맞이하기 위해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보물이 묻힌 밭을 산 자같이 우리의 모든 가치를 예수님께 두어 우리 자신이 가장 귀하게 여기던 모든 것을 버리는 심정으로 보배합을 엽시다.
* 마 13: 44 -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
③ 우리 앞에 주님의 재림이 남았다.
다시 오시는 주님을 맞이하기 위해 무엇을 준비해야 할까요? 그는 성도의 신랑으로 오신다. 그렇다면 신부의 옷을 준비하시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