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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궁극이
50편 14절-15절: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지극히 높으신 자에게 네 서원을 갚으며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환난에는 ‘일반환난’과 ‘특수환난’이 있는데, 우리는 이걸 잘 구별해야 한다. 왜냐? 세상 속화된 정신을 가지고 예수를 믿는 사람은 안 믿는 사람들도 익히 아는 육신적으로 겪는 일반환난을 주격적인 환난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자기에게 육신의 환난이 오면 그만 그 환난에 마음이 흔들리고 신앙 믿음이 흔들리게 되는 거다. 반대로 특수환난, 즉 영적 환난을 바로 아는 사람은 자기에게 육신의 환난이 와도 이는 자기의 영적인 면을 성장시키려는 하나님의 뜻임을 깨닫고 그 육신의 환난에 마음이 빠지지 않게 된다.
특수환난, 영적 환난은 믿는 사람만이 겪는 환난인데, 이 특수환난을 아는 사람은 자신이 비록 육신적으로는 풍요로울지라도 말씀 깨달음이 없고 진리말씀을 받을 곳이 없다면 영적인 면에 갈급성을 느끼면서 ‘이게 나에게 영적인 차원으로 온 환난이구나’ 라고 하면서 ‘영적인 차원에서 내 심령이 마르나이다. 내가 배가 고프나이다. 나에게 먹을 것을 주옵소서’ 라고 기도하게 된다.
성도는 영적인 환난을 자기의 참 환난으로 느껴야 한다. 그래야 자기가 참 사는 거다. 그런데 예수 믿는 나는 평소에 어느 위주로 생각을 하느냐? 육 위주로 생각을 하느냐, 영 위주로 생각을 하느냐에 따라 자기가 신앙인인지, 아닌지가 드러나는 거다. 목사가 교인들에게 굳이 ‘잘 믿어라. 못 믿어라’ 말할 것이 없다. 진리이치의 말씀을 줘서 교인들 각자가 말씀에 의해서 ‘내가 신앙인인지 아닌지, 환난인지 아닌지’를 빨리 알아서 영적인 면에서 배고픔을 당하지 않아야 한다. 그래야 자기에게 육적인 환난이 오더라도 영적인 면에서는 배고픔을 당하지 않는 거다. 말하자면 기름준비를 많이 했다 그 말이다.
우리 성도는 영이 중생된 생명이 하나 있고, 코로 숨 쉬고 밥 먹는 육의 생명이 또 하나가 있다. 안 믿는 사람은 육의 생명 하나밖에 없다. 그래서 안 믿는 사람은 하나밖에 없는 육신생명이 죽을까봐 세상에 빌붙어서 쩔쩔매며 사는 거다. 그러나 영이 생명이 하나 더 있는 성도는 육의 생명이 죽더라도 영의 생명은 죽지 않고 하늘나라로 가기 때문에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는 거다.
예수 믿는 사람이 자기의 신앙을 하나님의 의사단일성에 맞추게 되면 누가 환난을 주는지를 알게 되고, 환난을 왜 주는지 알게 되기 때문에 두 가지 생명 중에 어느 생명을 자기의 주격적 생명으로 살아야 하는지를 알게 된다. 영의 생명을 주격적 생명으로 삼고 사는 게 신앙이 바로 된 거다.
예수 믿는 사람이 걸핏하면 주일도 까먹고, 별로 급한 일도 아닌데 주일날 일가친척집에 가고, 주일을 낀 명절이 되면 고향으로 가버리고 한다면 이 사람은 어느 생명을 자기의 주격적 생명으로 삼고 사는 거냐? 자연생명, 밥 먹는 생명을 주격으로 사는 거다. 이렇게 되는 것은 사람을 두려워하고 세상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육 주격으로 사는 사람은 환경에 휘말리게 되지만 영 주격으로 사는 사람은 환경에 휘말리지를 않는다.
신실한 선지사도나 종들이나 주님께서 십자가상에서 기도하신 것을 보면 육신의 자연생명을 살려달라는 기도를 하지 않았다. 안 믿는 사람들은 기도를 하지도 않지만 만일 기도를 한다고 하면 자연생명을 살려달라고 한다. 그런데 믿는 우리가 ‘나를 살려주소서’ 이런 기도를 한다면 이게 육 위주로 기도하는 거냐, 영 위주로 기도하는 거냐? 어느 생명을 살려달라고 하는 거냐? 안 믿는 사람이 살려달라고 하는 기도와, 하나님의 백성이 살려달라고 하는 기도가 성질적으로 같아야 하느냐, 달라야 하느냐? 다르다. 분명히 달라야 한다. 그런데 오늘날 믿는 사람을 보면 안 믿는 사람과 똑같은 생각을 가지고 살려달라고 하고 있다.
안 믿는 사람이 살려달라고 해서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들어준다면 이 사람이 무엇을 하겠느냐?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사는 쪽으로 더 열심히 내게 된다. 세상성적 소원 목적을 이루기 위한 열심에 더 힘을 쓴다. 반면에 옳은 진리이치를 듣고 깨달아서 바로 믿는 사람이 살려달라고 했는데 살려준다면 이 사람의 입에서 ‘하나님 감사합니다’ 라고 하게 되는데, 하나님께서 살려줬으니 이제 어떻게 하느냐? ‘나를 살려주셨으니 하나님을 더 잘 믿고 열심히 살겠습니다’ 하게 된다. 그러면 이 사람이 하나님을 더 열심히 믿겠다고 하는 생각의 뿌리가 육이냐, 영이냐? 영에 박혀있다. 신앙 믿음에 박혀있는 거지 불신에 박혀있는 게 아니다. 그러니까 영을 위해서 영 주격으로 들어가 있다 그 말이다. 남이 볼 때는 육신을 살려달라고 하는 것 같으나 그 기도를 하는 중심은 육 주격으로 들어가 있는 게 아니라 영 주격으로 들어가 있는 거다.
우리가 죽을병이 들었을 때 어떤 기도를 할까? ‘고통스러워서 못 살겠다. 빨리 죽여 달라’ 이런 기도를 할까, 아니면 ‘고통스러워서 못 살겠다. 빨리 살려 달라’ 이런 기도를 할까? 이런 기도가 육의 기도냐, 영의 기도냐? 그리고 살려달라고 하는 게 아파서 죽겠으니 살려달라는 말인지, 아니면 ‘살려주시면 살아생전에 여호와 하나님 앞에 이룰구원을 잘 이루는 열심으로 살겠습니다’ 이 말인지? 어느 게 영 주격이고, 어느 게 육 주격이냐?
우리 궁극교회 교인들이 몸이 아프면 기도를 해야 하느냐, 안 해야 하느냐? 살려달라고 기도를 하면 무조건 육이냐? 우리는 당연히 영 위주로 들어가야 한다. 그리고 육신이 죽을 지경에 다다르게 되면 마음이 약해지게 되는데, 이럴 때 ‘하나님, 나를 살려주옵소서. 나로 하여금 이런 와중에도, 이런 고통 중에도 내 마음이 육 쪽으로 빠지지 않게 해 주셔서 내 신앙 믿음이 흔들리지 않게 해 주옵소서’ 라고 기도를 해야 한다.
자기가 죽어가는 마당에도 자기의 신앙 믿음이 흔들리지 않고 마음이 육신 쪽으로 빼앗기지 않게 해 달라는, 육신이 어두운 가운데 처해져도 자기의 마음이 흔들리지 않게 해 달라는 순전히 영 위주로만 기도를 할 수 있겠느냐? 이런 기도를 한다면 이 사람은 자기의 육신이 죽고 사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에 맡기게 된다.
자기의 육신이 죽는다는 선언을 받았어도 자기의 마음이 육신이 죽어가는 쪽으로 빼앗기지 않고 하나님 앞에 믿음을 잃지 않는다면 자기의 육신이 죽고 사는 것은 하나님께 맡기게 되고, 이런 사람은 어떤 방편으로서 건 하나님의 역사를 보는 거다. 자기 마음이 육신의 고통이 빠지지 않는 것도 하나님의 역사를 보는 거고, 자기의 육신을 살려주는 것도 하나님의 역사를 보는 거다. 이 때 하나님께서 자기의 육신을 살려줬다고 해서 ‘그러면 그렇지. 내가 영적으로 옳은 기도를 하니까 육신적으로도 좋게 해 주시는구나’ 이렇게 생각하면 안 된다. 자기의 육신이 죽을 지경에 다다를지라도 이렇게 순 영 주격의 느낌을 가지고 기도할 수 있겠느냐? 성경에 보면 이런 깊은 기도가 있는 거다.
신앙인은 영특하고 지혜로워야 한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이렇게 되는 거냐? 성경을 보면 누누이 ‘나의 법도를 지키면. 나의 율례를 지키면. 나의 규례를 지키면 명철해진다. 이러면 스승보다 승하리라’ 이런 말씀이 있는데, 여기의 스승이란 세상스승을 말하는 거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교회에서 말씀의 가르침을 받을 때는 ‘목사님이 어느 기준에 놓고 가르치느냐? 나로 하여금 어디에 기준을 놓고 믿으라고 하는 거냐?’ 이 판단이 바로 들어가야 한다.
만일 교회에서 목사가 성도들에게 성경은 안 가르쳐 주고 종교적인 일만 죽도록 시킨다면 이건 누구의 기준이 되는 거냐? 목사가 기준이다. 우리는 말씀을 따라서 주님을 쳐다봐야 한다. 주님을 세워놓고 이 주님을 따라 올라가야 한다. 이렇게 해야 영의 사람으로 만들어지는 거고, 이렇게 올라간 것이 옳은 거다.
우리의 몸은 주님이 십자가의 보혈로 피로 값 주고 사신 주님의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육신이 죽고 사는 문제는 주님의 주권에 달렸다. 내 육신이 죽고 사는 문제는 주님이 알아서 할 문제다. 나의 자연목숨을 살려달라고 하면 살려주고, 죽여달라고 하면 죽여주는 거냐? 그게 아니다. 순전히 주님께 달렸다.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기도를 해야 되겠느냐? 내가 할 일이 뭐냐? 나의 육신을 위한 게 아니라 ‘세상만사를, 이 물질계를 어떻게 통치를 할까요?’ 하고 지혜를 얻어야 한다. 이 안에는 돈도 있고, 차도 있고, 비행기도 있고 다 있는 거다. 어리석지 말아라.
현재 자기가 돈을 버는 것은 어떻게 보면 자기의 지혜에 의해 되는 거다. 그러니까 자기가 돈을 벌려면 지혜를 써서 자기의 직장이나 사장을 다스릴 수 있는 자가 되어야 한다. 즉 자기가 남이 가지지 않은 기술을 가지고 있다면 다른 회사로 옮긴다고 하면 회사 사장이 가라고 하겠느냐? 우리는 이런 인물이 돼야 한다. 우리는 일을 하는 곳에서 자기가 부각이 되어야 한다. 이럴 때 다른 사람이 자꾸 자기를 헐뜯더라도 내버려둬라. 싸우지 말아라. 나만 하나님 앞에 바로 나가면 헐뜯는 자들이 거꾸러지는 것을 네가 볼 거다. 이건 하나님의 역사다.
자기의 신앙 믿음의 차원을 올리려고 해야지 안 올라가는 상태에서 맨날 교회만 왔다 갔다 하면 되겠느냐? 그만큼 믿었으면 사람이 다듬어지면서 모든 면에서 그만큼 올라가야 한다. 녹슨 쇠도 자꾸 닦으면 광이 나고, 잘 닦아놓으면 녹이 덜 쓸 듯이 우리의 마음과 정신이 말씀으로 세상의 녹 찌꺼기가 벗겨지면서 성령으로 기름이 채워져야 하나님 앞에서 ‘척 하면 이렇고, 척 하면 저렇고’ 이게 되어진다.
우리의 육신이 죽고 사는 문제는 주님의 주권에 달렸다. 그러니 성도는 뭘 위해 기도할까? 말씀을 붙들고 말씀에 떨어지지 않도록 기도를 해야 한다. 규례, 율례의 사람이 되면 법도의 사람인데, 이렇게 되면 모든 사물을 보는 눈이 예민해지고 사리분별을 바로 하기 때문에 모든 일을 하나님의 뜻에 맞게 척척 잘 하게 된다. 남에게 속을 일도 없다. 몰라서 자기가 당하는 일도 없다. 모든 일을 척척 해 나가는 지혜가 있다.
자기가 살아가면서 당한 일이 어렵다? 그러면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라. 일 처리는 누가 하는 거냐? 자기가 해야 한다. 그러니 지혜를 구해야 한다. 지혜는 안 구하고 일만 잘 되기를 바란다면 사람이 없이 일끼리 척척 해결을 하느냐? 그런 법은 없다. 지혜를 얻어야 한다. 그 지혜는 말씀 속에 들어있다. 말씀을 멀리하면 미련한 사람이 된다. 매일 말씀은 듣는 사람과 안 듣는 사람은 천지차이가 나게 된다.
우리가 이 땅에서 육신적으로 고통을 당해서 이로 인해 육신의 생명이 끊어진다면 그 좋은 천국에 빨리 가니까 좋고, 안 데려가고 환난을 통과하게 하면 이룰구원 성화구원이 잘 되는 것이니 좋은 것이다. 그러니 원망 불평할 것은 하나도 없다. 같이 사는 사람을 원망하지 말아라. 세상 환경을 보고 원망하지 말아라. 자기가 살기 힘들다고 원망하지 말아라. 그러면 그럴수록 지혜를 얻는 면에 힘을 쓰면 자기는 그만큼 더 올라가게 되는 거다. 세상만사 원망 불평할 것은 하나도 없다. 문제는 자기의 지혜지식, 자기의 명철이다.
하나님의 본질인 진리신앙은 알지 못한 채 날마다 육신생활, 세상에 속한 것만 찾는다거나, 성경해석도 그런 식으로 하면서 세상 것을 이뤄달라고 부르짖게 되면 자기에게 환난이 왔을 때 그걸 이길 수도 없고, 거기에서 믿음의 지혜도 얻지 못한 채 고통은 고통대로 당하고, 심판은 심판대로 당하고, 귀신들린 신앙을 가지고 살다가 망하는 거다. 멸망을 받는 거다.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14절에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지극히 높으신 자에게 네 서원을 갚으며’ 라고 했는데, 말씀을 깨닫고 환난 가운데서도 말씀을 따라 행하면 하나님께서 건져주시고 하나님의 성품을 닮게 되는데, 이렇게 되는 것이 내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서원을 갚는 거다. 그런데 교인들이 서원을 물질이나 헌금으로 서원하는 것으로 말을 한다. 그러나 말씀을 자세히 보면 그건 아니다. 물질에 붙여서 서원을 말하게 되면 이건 벌써 성경해석이 달라져 버린다. 나를 진리로 건져주고, 진리로 무장화 자체화 시켜주니 하나님이 영화롭게 되는 거다.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이게 무슨 뜻일까? 첫째는 세상 속화된 인본주의 교인이 일반환난을 당하여 고통 중에 있을 때 하나님께 부르짖기를 ‘한 번만 살려주시면 하나님께 열심히 충성봉사하며 섬기겠습니다’ 라고 하니까 이적으로 고통을 면케 해 주셔서 자기로 통해서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셨다는 말이냐? 이렇게 되면 어떻게 되느냐? 이렇게 해석을 하면 어떤 허점이 있느냐? 아무 문제도 없는 거냐? 해석이 이렇게 되면 하나님께서 잘못된 신앙을 고쳐주려고, 영적인 면을 찾게 하려고, 영의 사람으로 세워주려고 환난을 주신 목적이 없어져 버린다. 이치를 알아야 한다.
그래서 영 주격으로 살지 않고 계속해서 육으로만 사는 교인이 육신적 물질적으로 어려움에 처해있을 때 우리가 그 사람을 무조건 도와주면 안 된다. 육신적으로 살다가 고통을 당하는 교인이 그 고통을 겪으면서 깨닫고 진리신앙을 따르지 않는 이상, 또 그렇게 살겠다고 하지 않는 이상 무조건 도와줬다가는 오히려 그 사람의 정신을 망치게 할 수도 있는 거다. 왜냐? 고통을 당하는 사람의 정신이 여전히 세상에 빠진 채 고쳐지지 않았는데 이런 사람을 도와주면 이 사람이 바로 믿겠느냐? 자칫하면 도움을 받음으로서 그 마음이 오히려 세상 쪽으로 더 기울어지게 된다.
물론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에 고무줄을 잡아당겼다 놓기도 하고 놓았다 잡아당기기도 하듯이 사람의 마음의 상태에 따라 도와줄 수도 있는 거지만 도움을 주는데도 끝내 육에서 돌아서지 않으면 이럴 때는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알아서 하시도록 하나님께 맡겨야 한다. 하나님께서 알아서 하시도록 해야 한다. 다른 사람이 바로 서는 일에 인간 내가 들어서 그 은혜를 가로막을 수도 있는 것이니 우리는 이 면에 지혜를 써야 한다.
그리고 그런 사람을 도와주면서 자칫 잘못하면 도와주는 자기가 이용만 당하게 되는 일도 있다. 이쪽에서는 신앙으로 죽자 사자 도와줬는데 도움을 받는 상대방은 육의 열매만 똑 따먹고 가버리는 일도 있고, 내가 처음에는 상대의 신앙을 위해서 도움을 주었는데 도움을 받는 사람은 계속해서 세상적인 도움만 바라고 세상에 속한 정신으로 살기 때문에 주던 도움을 끊으면 그동안 도움을 받은 사람이 도움을 주던 나에게 ‘사랑이 식었다느니 마음이 변했다느니’ 라고 비난하면서 교회를 떠날 수도 있다. 그러니 우리가 도움을 준다는 게 오히려 사람을 더 망칠 수도 있음을 알고 지혜를 써야 한다.
우리가 물질적으로 남을 도와줄 때 도움을 받는 사람은 신앙 믿음으로 더 들어가야 하는데 오히려 육신 쪽으로 더 들어가 버려서 결과적으로 도움을 받는 자들에게 이용되는 꼴이 되어서는 안 된다. 이렇게 되면 아무리 믿음으로 도움을 줬다고 해도 자기는 아직은 덜 만들어진 사람인지라 마음이 서운해지고 슬퍼지면서 ‘내가 괜히 했구나’ 이렇게 된다. 그러니 이렇게 되지 않도록 지혜를 써야 한다. 그럴 시간에 성경 한 자라도 더 보는 게 신앙에 유익이다.
우리가 어떤 어려운 상황에 처해졌을 때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면서 성경을 더 많이 읽어라. 그리고 하나님의 뜻에 맞는 기도를 하라. 예를 들어서 사는 게 물질적으로 어렵다고 주일도 까먹어 가면서 돈을 벌겠다고 해 봐라. 하나님의 진노를 사는 일을 해 가면서 설령 돈을 많이 벌었다고 해도 자기가 하나님과 담이 쌓인 것은 어떻게 할 거냐? 뭘로 헐겠느냐?
주님을 닮고자 하는 서원을 한 사람이 환난을 당할 때 그 가운데서도 신앙을 잃지 않게 도움을 요청해서 그 환난을 이겨 나오면 이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이 영화롭게 나타내는 거다. 성도가 하나님의 온전한 성품을 닮지 못하면, 하나님의 지혜지식이나 도덕성이나 능력성을 닮지 못하면 자기로 통해서 주님이 영화롭게 되지 않는 거다. 내가 주님을 닮아야 하나님이 영화롭게 되는 거다. 자기로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거다.
교인의 속 중심 사상이 마귀 속처럼 되어있다면 이 사람으로 통해서 어떻게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겠느냐? 이런 사람이 환난을 당하면 이 사람으로 인해 어떻게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겠느냐? 하나님이 아니라 마귀가 나타나는 거다. 속이 못돼먹은 자식이 시집장가를 가서 자식을 낳으면 속 못된 그것으로 자식을 가르칠 테니 그 자식이 어떻게 되겠느냐? 부모보다 한 술 더 뜬다. 그러면 부모가 자식의 그 짓을 보려고 하느냐? 그러니 서로 힘들다. 정신적으로 큰 문제가 되는 거다.
예수 믿으면서 속이 마귀를 닮은 사람이 주님을 위해 순교한다고 하다가 맞아죽었다면 이게 순교냐? 개죽음이다. 목사가 교인들에게 늘 세상정신을 심어주면서 교인들의 호주머니를 짜내서 큰 예배당을 세웠다면 이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겠느냐? 교인들은 세상정신을 받아서 진리환난이 된 상태인데 인도자 자기는 교인들의 호주머니를 짜내서 큰 건물을 세우고 ‘영광받으시옵소서’ 라고 한다면 하나님께 영광이 되겠느냐? 이건 완전히 하나님과 대적노릇이다. 완전히 마귀노릇이다. 가는 곳곳마다 주님을 욕 먹이는 교만한 사람이다. 진리진실의 사람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하나님 앞에 영광이다. 이 서원을 해서 이런 사람이 되는 것이 서원을 갚는 거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