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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박사, 공직자 충무공
〇 태어나면서부터 성경을 듣고, 배우면서, 읽고 있습니다. 청년시절에 성경은 옛 약속 이라는 뜻인 구약(舊約)과 새 약속이라는 뜻인 신약(新約)'으로 구분된 것을 가슴으로 깨달았습니다. 이 깨우침은 법도 지키고, 약속도 지키고, 배반하지 않아야 한다는 삶의 원칙을 갖게 하였습니다. 물론 모두 지키지는 못했습니다.
- 최근에 정해진 법을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개인과 단체를 보면서 너무 큰 두려움과 실망이 생겨서 『공직자 충무공』이라는 제목에 관심을 갖고 읽었습니다.
저자는 제44대 검찰총장으로 공직자 시선으로 이순신을 평가하여 전쟁 영웅인 동시에 철두철미한 공직자인 동시에 인간 경영의 전문가였다고 주장합니다. 충무공의 스펙타클한 승리보다 공직자로서 어려움을 당한 것을 중심으로 정리하고자 합니다.
〇내용요약
= 충무공의 공직생활 개요: 1576년 과거 무과시험에 합격한 충무공은 1598년까지 22년 동안 무관으로 파직 3회, 백의종군 2회, 부친상 1회를 포함하여 22회 인사발령을 받았다.
직급이 없는 백의종군에서 종1품 숭정대부까지 18개 등급 관직 중 17개 등급을 오르내리며 승진과 좌천, 파직, 재임용을 되풀이했다. 선조와 간신들의 농간으로 압송되어 투옥되고 의기소침해 낙향한 적도 있었다. 간신들의 농간으로 투옥되기도 하면서 온갖 수난과 어려움을 겪으며 공직생활을 이어갔고, 마지막 노량해전에서 왜군에 승리하고 명예롭게 전사했다. 공직생활을 한 장소는 한양보다 최전방인 함경도와 전라도, 경상도에서 주로 근무했다. 특히 공직생활의 절반이 넘는 11년 동안 전라도에서 보냈다.
= 파직: 직속 상관인 전라좌수사 성박이 객사 뜰에 있는 오동나무를 베어 거문고를 만들려고 할 때 충무공은 “오동나무는 관의 물품이고 여러 해 동안 기른 것이니 하루아침에 벨 수 없다”라며 거부하였다. 이 사건은 후에 충무공이 군기관리를 소홀히 했다는 내용의 장계로 이어져서, 결국 발포만호에서 파직당해서 낙향해 지냈다.
- 복직: 4개월 후인 1582년 5월 충무공은 종전 발포만호(장수)보다 8등급 아래인 훈련원 봉사로 복직하였다. 1583년 7월 조정은 무관 경험이 풍부한 이용을 함경남병사(함경도 남병마절도사)로 임명해 여진족 침입에 대비시키자, 이용은 함께 근무한 적이 있는 충무공을 함께 갈 군관으로 지명했다.
- 충무공은 건원보에서 유인작전을 펴 여진족 추장 우을기내를 생포했지만, 함경북병사 김우서가 충무공이 보고하지 않고 작전을 벌였다는 내용의 장계를 올리는 바람에 충무공은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 여진족과 싸우던 1583년 11월 15일 부친 이정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부친의 3년상을 치르기 위해 아산 고향집으로 내려갔다.
= 2차 파직과 백의종군: 1586년 1월 3년상을 치른 충무공은 4등급을 승진해 다시 장군으로 불리는 만호가로 다시 임용되어 1587년 가을 충무공은 두만강 하류에 있는 조산보 만호 섬으로 오늘날 러시아 영토인 녹둔도 둔전관을 겸직하게 되었다.
- 여진족 수백 명이 녹둔도를 기습공격하여 우리 군사를 모두 죽이고 벼를 수확하던 백성 160여 명과 말 15필을 끌고 갔다. 충무공은 여진족을 추격해 3명을 죽이고 60여 명의 백성을 구출해 왔지만, 우리 피해가 큰 패전이라고 충무공은 파직되어 투옥되었다.
그러나 선조는 충무공과 이경록이 녹둔도를 지키고 여진족을 추격해 죽이고 우리 백성을 구출해온 사실을 참작해 곤장을 치는 장형에 처하고 백의종군하게 했다. 이것이 충무공의 첫 번째 백의종군이다.
- 1588년 1월 함경북병사 이일은 당시 백의종군 중이던 충무공과 이경록을 포함한 2,500여 명의 병력을 동원해 여진족을 공격하여, 여진족 시전 부락 200여 호를 불태우고 여진족 380명을 죽이고 말과 소를 빼앗아 왔다. 전공으로 충무공은 사면되어 1588년 낙향하여 8개월 동안 쉬었다.
〇 왜란의 조짐과 파격 인사: 1589년 2월 전라도관찰사 이광은 충무공의 실력을 인정하고 조방장(종4품)을 겸하게 했다. 이후 1589년 12월 충무공은 정읍현감(종6품)으로 부임했다. 고을을 책임지는 수령이 되었다.
- 정읍현감으로 재직하며 사실상 퇴임을 앞두고 있던 충무공에게 선조는 편법을 써서 충무공을 연거푸 승진시켜 정3품 전라좌수사로 배치했다. 1591년 2월 전라좌수사가 된 충무공은 전쟁이 곧 발발할 것으로 예상했다. 이후 1년 2개월 동안 거불선을 개발하고 장병들을 훈련하여 숙련된 정예군으로 만들었다.
= 임진왜란의 발발과 전개: 1592년 4월 13일 전쟁을 준비한 왜군 20만여 명이 쳐들어오면서 임진왜란이 시작되어 7년 동안 지속되었다. 왜군의 공격로에서 떨어져 전쟁의 참화를 겪지 않았고 농경지가 넓어 경제력이 높은 곡창지대 전라도의 군사와 의병이 참전하면서 전세가 바뀌기 시작했다.
〇 왜란에서의 활약: 충무공이 왜군과 싸운 해전은 1592년 5월 7일 옥포해전을 시작으로 1598년 11월 20일 노량해전 까지 왜군과 싸운 23회 해전에서 모두 승리했다.
- 1597년 2월 4년 가까이 진행된 명나라와 왜의 강화교섭이 결렬되자,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4만여 명의 병력으로 재침을 공언했다. 같은 해 2월 26일 충무공은 선조로부터 가토 기요마사의 왜군을 바다에서 막으라는 선조의 명을 어겼다는 이유로 삼도수군통제사에서 파직되어 투옥되었다. 같은 해 4월 1일 충무공은 가까스로 목숨을 건지고 석방되어 경상도 합천군 초계 도원수 권율 진영에서 백의종군했다.
-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592년 임진왜란 전투의 패배는 전라도를 점령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판단하고 전라도 점령을 목표로 삼았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4만여 명의 왜군을 좌군과 우군으로 나누어 경상도 남쪽과 북쪽에서 전라도를 향해 진군시켰다.
- 1597년 8월 3일 진주시 수곡면 원계리 손경례의 집에서 충무공은 선전관 양호로부터 전라좌수사 겸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한다는 교서와 유서를 받았다. 1597년 2월 26일 삼도수군통제사에서 파직된 지 5개월 만에 다시 삼도수군통제사에 임명된 것이다.
- 8월 15일 추석날 충무공은 선전관 박천봉을 만나 선조가 8월 7일 작성한 수군을 해산하고 육군에 합류해 싸우라는 유지를 받았다. 충무공은 수군에게 아직 12척의 함선이 남아 있으니 있는 힘을 다해 싸우겠다는 장계를 올려 반대의 뜻을 분명히 하고, 별도로 영의정 유성룡에게 수군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본인의 의지를 담은 편지를 써 전하게 했다.
- 1597년 8월 18일 아침 드디어 기다리던 함선이 군영구미에 도착했다. 충무공 일행이 함선을 타고 회령포에 도착해 보니 경상우수사 배설은 멀미를 핑계로 나오지 않았다. 충무공은 함선 12척과 1,000여 명의 장병, 상당한 군량과 무기를 확보했다. 전투가 끝난 후 충무공은 『난중일기』에 “정말 하늘이 도왔다”라고 적었다.
- 충무공은 추격해 오는 왜군 함대를 의식하며 치밀한 계획을 세우고 조류와 함선이 하루 동안 이동할 수 있는 거리와 항로 등을 고려하며 가장 적합한 장소를 선택해 이동한 것으로 보인다. 명량해전 이후 충무공과 우리 수군이 왜군 함대와의 충돌을 피하며 계속 북상한 것은 적에게 패할 가능성을 철저히 차단하고 빈약한 수군 전력을 최대한 보전하면서 왜군과 싸우면 반드시 이긴다는 전략이었을 것이다.
= 1598년 8월 18일, 임진왜란을 일으키고 정유재란 재침까지 지시했던 잔인하고 참혹한 전쟁의 총책임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은 뒤, 11월 중순까지 강화를 체결하고 조선에서 철군하기로 결정했다. 결국 치열했던 전투는 튼튼한 함선과 다양한 화포를 갖춘 화력이 우세한 조‧명 연합수군의 대승으로 끝났다. 왜선 200여 척이 격침되었고 100여 척이 나포되었다. 왜군 1만 5,000~2만여 명이 사살되거나 수장되었다.
- 충무공과 함께 노량해전을 승리로 이끈 진린은 충무공의 전사 소식을 뒤늦게 듣고 크게 슬퍼했다. 진린은 명나라와 조선 조정에 올린 보고서에서 충무공에 대해 ‘천하를 경영하는 인재로 나라를 바로잡은 공을 세웠다’라는 뜻의 ‘경천위지지재(經天緯地之才#), 보천욕일지공(補天浴日之功#)’이라고 적어 충무공을 극찬했다.
〇 느낀점
- 저자가 충무공을 공직자의 관점에서 살핀 것이 신선했고, 일본과의 관계를 우방이지만 지금도 조심해야 한다는 생각은 지울 수 없었습니다. 이유는 우리 민족에게 가장 큰 고통과 피해를 안겨줬었음에도 지금도 역사를 왜곡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 충무공이 해군이라는 생각이 자리잡고 있었는데 책을 읽으면서 육군으로도 오랜 세월복무한 것을 알고 고정관념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알게 되었습니다.
- 계속 어울한 일을 당하면서도 나라를 생각하는 것을 우선한 모습이 역역히 보였고, 정보의 소중함,원칙과 기준에 충실했고, 현장을 중시했으며, 소통하는 지도력을 보여주어, 오늘날 공무원들이 반드시 갖춰야 할 덕목과 일치합니다.
- 조선의 제14대 왕인 선조 때에 붕당은 같은 학통과 성향을 가진 사림들이
특정한 지역적, 학문적, 정치적 입장을 공유하는 양반들이 모여 구성한 정치 집단이었습니다. 신진 관료를 중심으로 동인이 형성된 후 남인과 북인으로 갈라졌고, 서인은 기성 관료를 중심으로 형성되었다가 노론과 소론으로 분립되었습니다.
- 당파의 이익을 위한 싸움이 국력을 역화시켰고, 이러한 정치적 상황이 충무공이 어려움을 당한것과 관련이 있었습니다. 유성룡과의 친분 때문에 어려움을 극복하기도 했습니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현실이 오버렙이 되었습니다.
- 만약 충무공이 살았다면 영웅으로 추대 받았을까 하는 의문이 들면서, 차리리 순국하였기 때문에 영웅이 된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무엇이 진실인지는 항상 정확한 시선으로 살피면서 살아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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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김오수 지음, 『공직자 충무공』, 동아시아, 2024년 11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