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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로운 삶을 위하여
말씀 : 딤전 2:1~4,
어느 나라든 정치가 불안하면 그 나라 국민의 삶은 평안이 없습니다. 정치가 불안하면 경제가 무너지고 치안이 어려워지며 서로 간에 불신이 팽배해집니다. 그러면 국민들은 당연히 내일이라는 미래를 보장받을 수 없으므로 불안한 하루하루를 살게 되며 자기방어를 위해 웅크리게 되고 이웃을 돌아볼 마음의 여유가 없으므로 서로에 대한 배려보다는 서로를 경계하게 됩니다.
지난주에도 김형제님은 기도에 대한 설교를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 디모데전서 2장1절에도 “모든 사람을 위해 간구와 기도와 중보와 감사를”드리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은 몰라도 누군가의 기도에 의하여 거듭나게 되었고 영원한 생명을 얻은 후의 삶은 기도로 시작하여 기도로 마치게 되므로 기도란 영적생명의 호홉이라고 말합니다.
성경전서에는 “기도”라는 단어가 366구절에서 나타나며 “기도하라”는 명령이 22구절에서 나타납니다. 육신이 살아가려면 호홉을 해야 하듯이 거듭난 그리스도인이 건강하게 살려면 쉬지 말고 기도해야 합니다(살전5:17). 그런데 사실 기도는 쉽지 않습니다. 쉽지 않기 때문에 주께서 기도하라고 명령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기도를 통해서 주님과 교통교제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기도훈련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기도는 해도 되고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무엘은 기도를 하지 않는 것이나 쉬는 것은 죄를 짓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또한 나에 관한 한 너희를 위해 기도하기를 쉼으로 내가 결단코 {주}께 죄를 짓지 아니하며 선하고 옳은 길을 너희에게 가르치리니』(삼상 12:23)했습니다.
사도 바울도 골로새 성도들을 위하여 기도를 그치지 아니했다고 기록합니다. 『이런 까닭에 우리도 그것을 듣던 날부터 너희를 위해 기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며 이것을 구하노니 즉 너희가 모든 지혜와 영적 깨달음 면에서 그분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워지고』(골 1:9) 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나라의 정치가 크나큰 어려움에 처해 있음을 보며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해야 할 일은 집회에 나가서 시위를 하거나 울분을 표출하거나 누구를 헐뜯고 욕하기보다는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합당한 해결을 해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해야합니다. 『그러므로 나는 모든 곳에서 남자들이 진노하거나 의심하지 않고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기를 원하노라.』(딤전 2:8)
얼마 전에 저는 한 형제로부터 원망과 같은 불평을 들었습니다. 왜 교회의 명성 있는 목사님들은 이런 시국에 잠잠하고 있는지 모르겠다며, 목사 같지도 않은 사람이 목사라는 이름으로 정국을 혼란스럽게 하는 것을 보고도 왜 침묵하고 있는지 답답하다는 것입니다. 저는 명성 있는 사람은 아니지만 목사인 나에게 불만을 토로하는 것 같았습니다.
여러분들도 잘 아시겠지만 우리나라에 수많은 교회와 목사들이 있는데 모든 교회가 그렇지는 않지만, 정치적인 색깔이 강한 교회들이 있으며 그것도 교회마다 주장이 각각 다릅니다. 어떤 교회와 목사들은 적극적으로 정치에 참여하는가 하면 어떤 교회와 목사들은 정치엔 전혀 관여하거나 말하지 않고 침묵합니다. 그러면 과연 교회가 정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옳은가? 아니면 정치는 정치인들에게 맡기고 교회는 기도와 복음만을 선포해야 할 것인가?
제 생각이 전적으로 옳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께서 부르시고 세우신 목회자라면 세상 정치를 하라고 목사라는 직임을 주시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주님도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사회를 개혁하거나 정치를 하기 위해서 오시지 않으셨습니다. 전능하신 주께서 친히 자신의 오신 이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요10:10절에 [.......... 내가 온 것은 양들이 생명을 얻게 하고 생명을 더욱 풍성히 얻게 하려함이라.]하셨습니다.
마9:13절에서는 [오히려 너희는 가서, 나는 긍휼을 원하고 희생물을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우라. 나는 의로운 자들을 부르러 오지 아니하고 죄인들을 불러 회개하게 하려고 왔노라.] 하셨습니다. 주께서 육신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을 분명하게 말씀하신 것처럼 거듭난 그리스도인들도 주님의 뜻에 따라야 마땅합니다.
더 나아가 주께서 12제자의 대표 격인 베드로에게 무엇을 부탁하셨는지 기록된 성경을 보면 그를 목자로 세우신 이유가 명확합니다. 주께서 십자가에서 고난당하시고 피를 다 쏟으시고 죽어 장사되셨다가 3일 후에 부활하시고 제자들을 찾아 오셔서 그들을 위로하시고 실족한 베드로를 불러 그에게 물으셨습니다. “요나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것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그가 그분께 이르되, 주여, 그러하오이다.” 그의 대답을 들으신 주께서 그에게 무엇을 명령하셨습니까? “내 어린 양들을 먹이라.”(요21:15)하셨습니다. 이런 질문과 대답이 세 번이나 반복되었습니다.
요21:16절에 “내 양들을 먹이라.” 17절에도 “내 양들을 먹이라.”하셨습니다.
주님은 한 번도 제자들에게 세상을 개혁하라든가 정치를 잘하라든가 학문이나 과학을 발전시키라든가 너희 원수를 대적하여 멸하라고 명하시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너희 원수들을 사랑하고 너희를 저주하는 자들을 축복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선을 행하고 악의를 품고 너희를 다루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라.”(마5:44) 하셨습니다.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지거나 사상이 다르거나 정치 이념이 다른 자들은 나의 원수도 적도 아닙니다. 다만 그들은 사랑의 대상이요, 복음 전도의 대상이요, 기도의 대상일 뿐입니다.
오늘날 우리나라가 당면한 시국에 대해서 성경은 뭐라고 말씀하시는가 보다도 먼저 저는 각자 자기가 옳다고 여기는 대로 하게 내버려 두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내 의견과 다르다고 내가 그들을 내 생각대로 바꿀 수도 없거니와 당신의 생각이 틀렸다 한들 그들이 내 말을 듣지도 않을 것이고 다툼만 일어날 것입니다. 이는 그들이 나를 설득 하려 한대도 나 역시 그들의 말을 듣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직 이런 일들을 해결하실 분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조용하고 평화로운 삶을 살기 위해 기도해야합니다.
지역교회마다 성도들 가운데에도 세상일에 관심을 두고 보수를 지지하는 사람들과 진보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목회자의 눈치를 보거나 혹은 왜 우리 목사님은 침묵하고 있는지 모르겠다며 불만을 토로하거나 무엇이 옳은지, 말씀해 주지 않는다며 답답해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성도들은 목사님이 각각 자기 의견에 동조해 주면 좋아하겠지만 나와 반대 의견에 동조한다면 불만을 품을 것입니다.
저희 친교회의 후배목사님 한 분이 현 시국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밝힌 것이 있어 옮겨보겠습니다. 교회나 목사님의 이름은 말하지 않겠지만 그 교회의 성도들 간의 오늘날 계엄에 대한 찬성과 반대에 대해서 입장을 언급한 의견을 잠깐 소개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저의 교회에서는 이 문제에 대해서 교회의 차원과 개인의 차원으로 나누어서 가르쳤습니다. 교회의 주된 사명은 영혼 구원과 말씀선포이기에 교회가 정치에 개입하면 교회의 본질적인 사명이 훼손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희 교회 강단에서 특정정당이나 정치인을 지지하거나 반대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교회 차원에서 정치집회에 참여하는 것도 금지합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세속 권력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해야 하며 교회의 본질은 정치가 아니라 복음 전파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당시 로마제국의 정치적 부패와 압제 속에서 정치투쟁이 아닌 말씀선포와 하나님의 왕국 선포에 집중하셨음을 기억해야합니다.
교회가 특정 정치 세력에 치우치면 복음의 순수성이 훼손됩니다. 또한 교회에는 다양한 배경과 의견을 가진 사람들이 모인 곳입니다. 특정 정치 이슈에 대해 교회가 입장을 표명하면 성도들 사이에 분열과 갈등이 생길 수 있고 교회가 정치에 깊이 개입하면 교회의 거룩성과 독립성이 위협을 받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개인 차원에서 자신의 양심과 믿음에 따라 정치에 참여하는 것은 성경적입니다. 에스더가 하만의 유대인 학살 계획을 막기 위해 왕에게 나아갔듯이, 다니엘이 바벨론의 우상숭배 명령을 거부했듯이, 반국가 세력이라는 악한 정치체제에 대해서는 그리스도인이 저항하고 목소리를 낼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의 법과 제도는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에 집적적인 영향을 미칩니다. 따라서 크리스천은 올바른 법과 제도를 지지하고 악한 시스템과 정책에 반대할 책임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저의 결론은 김호진 형제님이 자유민주주의 체제 수호를 위해 개인 적으로 정치집회에 참여해서 목소리를 내는 것은 얼마든지 성경적으로 가능합니다.
그러나 교회 차원에서는 그러한 특정집회에 공식적으로 참여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고 믿습니다. 왜냐하면 신약교회의 사명은 복음전파와 영혼 구원이지 정치적 논쟁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참고로 이사야서 58장에 나오는 “짓지 못하는 개”로 비유된 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지 않는 타락한 지도자들을 가리킵니다. 죄와 도덕적 타락에 분명히 목소리를 내야 한다는 말씀이지 교회가 모든 정치적 이슈에 대해 입장을 표명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교회는 죄와 진리에 대해 외쳐야하지만 특정정치 이슈에 대해 입장을 표명하거나 정치세력에 휘말리면 안된다고 믿습니다. 다만 개인 차원에서의 정치참여는 얼마든지 성경적으로 허용됩니다. ........... 샬롬]
그러면 성경은 무어라고 합니까?
오늘 본문 딤전2:1절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권면하노니 무엇보다 먼저 모든 사람을 위해 간구와 기도와 중보와 감사를 드리고](딤전2:1)라 했습니다. “그러므로”라고 서두를 시작하는 것은 앞 절에 어떤 사건이 있음을 말합니다. 1장 끝부분에 선한 양심과 믿음을 버린 후메내오와 알렉산더를 사탄에게 넘겨주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양심이 마비된 사람은 양심적이거나 일반 상식적인 것들을 버리고 자기고집대로 나아가며 이웃이 어떤 피해를 입든지 전혀 마음에 두지 아니하므로 주위의 모든 사람들을 힘들게 합니다. 우리 주위에도 신실한 믿음으로 시작했다가 성장한 다음에는 교만하여져서 믿음을 저버린 타락한 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구원을 잃지 안을지 몰라도 마귀에게 쓰임 받는 마귀의 일꾼으로 살아갑니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는 성도들은 성경 전체를 볼 수 있어야합니다. 어떤 특정 구절 하나만 고집해서는 안 됩니다. 대개의 목회자나 성도들은 로마서 13:1~2절을 들어 “높은 권력들에 복종하라”는 말씀으로 무조건 왕이나 대통령에게 복종하라고 권면합니다.
롬13:1~2, [모든 혼은 더 높은 권력들에 복종할지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은 권력은 없나니 현존하는 권력들은 하나님께서 정하셨느니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권력에 거역하는 자는 하나님의 규례를 거역하나니 거역하는 자들은 스스로 정죄를 받으리라.] 하셨습니다.
물론 성도들은 현존하는 권력들에 거역할 필요도 없지만 그가 분명 하나님 앞에서나 국민들 앞에 잘못하고 있는데도 절대 복종하거나 그를 보호하기 위해서 집회를 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습니다. 그것들은 세상일이요, 우리에게는 다만 그들이 복음 선포의 대상이요, 기도의 대상일 뿐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통치자를 세우시기도 하시지만 폐하시기도 하십니다.
단2:21, [그분께서는 때와 시기를 바꾸시나니 그분께서는 왕들을 폐하시고 왕들을 세우시며 지혜로운 자들에게 지혜를 주시고 명철을 아는 자들에게 지식을 주시는도다.]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왕들을 세우셨다고 그들이 죄를 짓지 않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께서 왕으로 세우셨더라도 그가 죄를 지으면 그에게서 왕권을 빼앗기도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초대 왕으로 사울을 세우셨지만 그가 죄를 지음으로 그의 왕권을 다른 이에게 주셨습니다. 삼상13:13~14,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왕이 어리석게 행하였나이다. 왕이 주 왕의 하나님께서 왕에게 친히 내리신 명령을 지키지 아니하였나이다. 이제 주께서 이스라엘 위에 왕의 왕국을 영원히 세우려 하셨으나 이제 왕의 왕국이 지속되지 못하리이다. 주께서 왕에게 명령하신 것을 왕이 지키지 아니하였으므로 주께서 자신의 마음에 맞는 사람을 구하셨으며 주께서 그에게 명령하사 자신의 백성을 다스릴 대장이 되게 하셨나이다.] 이와 같이 주께서 통치자를 세우시기도 하지만 폐하기도 하십니다.
더욱이 지금 우리나라는 신정국가도 아니고 왕정시대도 아니고 기독교국가도 아닙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이 누구이든, 그들이 어떠하든 그들은 우리에게 기도의 대상이요, 구원받아야 할 혼들일 뿐입니다.
우리가 권력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딤전2:2, [왕들과 권위를 가진 모든 자들을 위해서도 그리하라. 이것은 우리가 전적으로 하나님을 따르며 정직한 가운데 조용하고 평화로운 삶을 살려함이라.] 우리는 조용하고 평화로운 삶을 살기 위하여 권위를 가진 자들을 위해 기도해야합니다. 정치에 참여하거나 선동하는 것은 교회가 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왕들과 권위를 가진 모든 자들을 위해 기도하는 목적은 그들이 구원 받아야 할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딤전2:3~4, [이것은 우리 구원자 하나님의 눈앞에서 선하며 그분께서 받으실 만한 것이니 그분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성도들에게 권위를 가진 모든 자들은 오직 구원의 대상이요, 기도의 대상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그들이 하는 일들에 분을 품거나 대적하지 말고 그들을 사랑하고 기도하고 복음을 전하십시오.
누구든지 자기의 분수를 모르면 교만하여 실수하거나 실패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권력을 가진 정치가들이나 사업에 성공한 사업가들이나 학문을 연구하여 존경받는 학자들이나 교회를 개척하고 부흥시킨 목사들이나 자기 분수를 모르고 더 높은 것을 취하고자하면 반드시 실패하고 맙니다. 모든 사람에게는 자기가 이룰 수 있는 주어진 분량이 있습니다. 그것을 깨닫는 것이 지혜요, 성공의 비결입니다. 옛 속담에 참새가 황새를 따라가다가는 가랑이가 찢어진다는 말이 있습니다. 과도한 욕심은 크나큰 재앙을 가져옵니다.
(고후 10:12-14) [우리는 자기 자신을 추천하는 자들과 감히 한 패가 되거나 혹은 그들과 우리 자신을 비교하지 아니하지만 그들은 자기들을 기준으로 자기들을 판단하며 자기들 가운데서 자기들을 비교하므로 지혜가 없도다.]
(지금 세상은 온통 자기자랑의 전쟁터 갔습니다. 주님은 자기를 추천하는 자들과 한 패가 되지 말라하십니다. 자기들 기준으로 자기를 판단하기 때문에 절대로 다른 사람들이 자기들보다 더 낫다는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특히 선거에 나오는 정치가들은 자기만이 이 어려운 정국을 바로 세울 수 있는 적임자라고 스스로 자신을 추천합니다. 주님은 그런 자들을 지혜가 없다고 하십니다.)
13)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분량 밖의 것들을 자랑하려 하지 아니하며 다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나누어 주신 규칙의 분량에 따라 자랑하려 하는데 그것은 곧 너희에게까지 다다른 분량이라.]
(우리는 각자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나누어 주신 규칙의 분량을 알아야합니다. 그것을 모르면 분량 밖의 것들을 행하려 하다가 자신은 물론 많은 사람들에게 크나큰 상처와 피해를 주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파하는데 한 평생을 보내었지만 주께서 주신 규칙의 분량을 넘어서지 않았습니다.)
14) [우리는 마치 너희에게 다다르지 아니한 것 같이 우리의 분량을 넘어 뻗어 나가지 아니하노니 이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하는 가운데 너희에게도 갔기 때문이라.](고후10:12-14) 여러분들은 각자 자기의 분수를 알고 감당할 수 있는 분량을 넘어서려는 수고와 교만을 버려야합니다. 그러기위해서는 주께서 나에게 주신 규칙의 분량이 무엇이며 어디까지인지를 알기위하여 주님 앞에 끊임없이 기도하여 지혜를 얻어야 합니다.
자기의 분수를 넘었다. 감당할 분량을 넘었다. 이는 참으로 크나큰 불행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은 죄인입니다. 주님 앞에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회개 하면 용서를 받습니다. 그렇다고 더 이상 죄를 짓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죄인으로 태어나 죄를 지으며 살아가는 우리 인생은 깨어있지 아니하면 너무나도 쉽게 죄를 짓게 됩니다. 그래도 죄를 지을 때마다 주님 앞에 엎드리고 회개해야합니다. 그리하지 않으면 더욱 더 크나큰 죄에 끌려가게 됩니다.
여러분들은 각자가 인생을 살아가는데 성공의 목표가 있고 계획이 있고 희망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들이 주께서 주신 것이 아니라면 망상으로 끝날 수도 있고 혹시 목표를 달성했다 하더라도 더 큰 다른 목표가 생길 것입니다. 그럴 때에 자기에게 주어진 분량이 무엇이며 어디까지인가를 알아야합니다.
오늘날 정치를 하다가 실패하는 사람들이나 사업을 하다가 실패하는 사람들이나 목회를 하다가 실패하는 사람들을 말씀에 비추어 보면 그가 분수를 넘었구나. 자기 분량을 넘었구나, 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정치가나 사업가나 종교가나 정도를 지나치게 되면 실패하게 됩니다. 그것이 단순한 실패로 끝나면 좋겠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고 상처를 주게 됩니다.
저는 여러분들에게 마태복음 13:31-32절의 겨자씨 비유로 각자가 자기분수에 맞게 살라고 권면하고 싶습니다. 겨자는 채소로 독특한 향을 지닌 식물입니다. 또한 겨자씨는 모든 씨들 중에 가장 작습니다. 그래도 그 씨를 뿌리고 그것이 싹이 나고 자라다보면 가장 커서 나무처럼 자라기도 합니다.
마13:31-32, [그분께서 다른 비유를 들어 그들에게 이르시되, 하늘의 왕국은 마치 어떤 사람이 가져다가 자기 밭에 뿌린 겨자씨 한 알과 같으니라. 32) 그것은 참으로 모든 씨들 중의 가장 작은 것이지만 자란 뒤에는 채소들 가운데 가장 커서 나무가 되므로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것의 가지들에 깃들이느니라. 하시니라.]
모든 채소는 다 자라기 전에는 연하고 부드럽고 맛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점점 자랄수록 억세어지고 맛이 없으며 나중에는 먹을 수 없게 거칠어집니다. 그러면 그것은 더 이상 채소로서의 값어치가 없습니다.
겨자씨가 밭에 뿌려지고 싹이 나고 자라서 나무가 되니 어떻게 되었습니까? 공중의 새들의 거처가 되었습니다. 이는 무엇을 말합니까? 채소가 자기분수를 넘었다는 것입니다. 자기 분량 이상으로 자라면 처음 목적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채소를 얻고자 씨를 뿌렸는데 너무 자라서 나무가 되어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것의 가지들에 깃들였습니다. 이는 씨를 뿌릴 때의 목적과 전혀 다른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마태복음 13장의 씨 뿌리는 비유에서 공중의 새들은 사람들에게 뿌려진 하나님의 말씀들을 채어가는 사악한 자들입니다. 여러분들은 이미 씨 뿌리는 비유에 대해서 설교를 들었지만 다시 한 번 더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마13:3-4, [그분께서 비유들로 많은 것을 그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보라, 씨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 뿌릴 때에 어떤 씨들은 길가에 떨어지매 날짐승들이 와서 그것들을 먹어버렸고] 4절에서는 날짐승들이라고 했는데 주님께서 씨 뿌리는 비유를 설명하실 때에는 날짐승을 “사악한 자”라고 하셨습니다.
마13:19, [어떤 사람이 왕국의 말씀을 듣고 그것을 깨닫지 못할 때에는 그 사악한 자가 와서 그의 마음속에 뿌려진 것을 채어 가나니 이 사람은 길가에 씨를 받은 자니라.]하셨습니다. 4절의 “날짐승”은 19절에 “사악한 자”라고 했으며 32절에서는 “공중의 새들”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공중의 새들은 마가복음 4:15절에서는 “사탄”이라고 하셨습니다.
[길가에 있는 자들은 이들이니 그들의 경우 말씀이 뿌려질 때에 듣지만 사탄이 즉시 와서 그들의 마음속에 뿌려진 말씀을 빼앗아 가느니라.](막4:15) 했으며 눅8:12절에서는 공중의 새를 “마귀”라고 했습니다.
[길가에 있는 것들은 말씀을 듣지만 그때에 마귀가 와서 그들의 마음에서 말씀을 빼앗아 가므로 믿지 못하고 구원 받지 못하는 자들이니라.](눅8:12) 했습니다. 결론은 공중의 새들, 즉 그 날짐승들은 사악한 자요, 마귀요, 사탄입니다. 그렇다면 겨자가 자라서 채소가 아니라 나무가 되어 버렸을 때 그 나무에 와서 깃들인 공중의 새들은 사악한 자들이요, 마귀요, 사탄입니다.
이는 무엇을 말합니까? 누구나 자기분수를 넘어 크게 자라게 되면 쓸모없는 것이 아니라 교만하고 사악한 자가되어 마귀 짓을 하고 사탄이 하는 짓을 하게 됩니다. 그가 종교인이든 정치인이든 사업가든 자기 분량을 넘어선 자는 더 이상 착하거나 의로운 자가 아니라 악마가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욕망은 끝이 없습니다. 누구나 성공하고 싶고 다다르고 싶은 목표가 있으나 그 목표에 다다른 자가 그것으로 만족하는 자는 거의 없습니다. 목표를 이루면 또 다른 목표가 생깁니다. 처음 목표에 이르렀을 때 만족하면 그가 이룬 성공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지만 그의 분량을 넘어서게 되면 주위의 많은 사람들에게 크나큰 불행을 가져다줍니다.
사람이 자기 분수를 넘어서면 자기도 모르게 교만하게 되고 우쭐대며 다른 사람들을 하찮은 것으로 취급합니다. 겨자 채소가 자라서 나무가 되면 사악한자들과 마귀들과 사탄이 깃들이듯이 사람이 자기 분수를 넘게 되면 하나님께 쓰임 받는 것이 아니라 마귀 사탄에게 쓰임 받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저는 눈물과 기도로 교회를 개척하고 크게 부흥한 훌륭한 목사님들을 많이 보았고 부러워했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받고 칭송받다보니 개척당시 낮아지고 겸손하던 그분은 간데없고 각종 악한 짓과 욕심에 찌들어 뭇 사람들에게 비난을 받는 경우를 많이 보았습니다. 참으로 슬픈 일입니다.
겨자는 채소로 있을 때 겨자로서의 소임을 다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즐기는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고 사랑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채소가 너무 자라서 나무로 장성했을 땐 성공이 아니라 전혀 다른 목적으로 쓰이게 되며 마귀들의 처소가 되어 사탄에게 쓰임 받는 악한 것이 되고 맙니다.
많은 교회가 겨자씨 비유를 들어 교회의 부흥에 비교하고 처음엔 겨자씨 같이 미약하나 나중엔 크게 자라서 나무가 되어 많은 성도들이 깃들이게 된다는 비유로 설교들을 합니다. 그러나 겨자씨 비유는 그런 뜻이 아닙니다. 부디 여러분들은 자기 분수를 알고 현재 가진 것으로 만족하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우리 크리스천들은 오늘날의 정치 상황을 보면서 어느 편을 지지하거나 적대시하는 우를 범하지 말고 “전적으로 하나님을 따르며 정직한 가운데 조용하고 평화로운 삶을 살기 위해”, “모든 사람을 위해 간구와 기도와 중보와 감사를” 드립시다.
다시 본문 디모데전서 2:1~4절까지 다같이 읽고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권면하노니 무엇보다 먼저 모든 사람을 위해 간구와 기도와 중보와 감사를 드리고 2, 왕들과 권위를 가진 모든 자들을 위해서도 그리하라. 이것은 우리가 전적으로 하나님을 따르며 정직한 가운데 조용하고 평화로운 삶을 살려함이라. 3, 이것은 우리 구원자 하나님의 눈앞에서 선하며 그분께서 받으실 만한 것이니 4, 그분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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