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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묵상 나눔 하나님의 독생자로 인하여 하나님의 아들들이 된 성도들
장코뱅 추천 5 조회 329 26.08.15 07:30 댓글 36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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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작성자 26.08.15 07:37

    첫댓글 초신자와 바쁜 분들은 묵상본문만 읽으셔도 충분합니다. 여력이 되는 분만 아래 추가 설명을 읽으세요

  • 26.08.15 11:04

    알겠습니다!

  • 작성자 26.08.15 08:26

    <호크마 주석: 로마서>

    =====8:1
    그러므로 이제 - '그러나 이제'를 의미하는 헬라어 '뉘니 데'(* )가 그 동안 진술했던 내용보다 한 차원 높으나 반대되는 내용으로 나아가기 위한 진술이라면(3:21), '그러므로 이제'(* , 아라 뉜)는 그동안 진술에 대하여 결론을 내리기 위한 한 차원 높은 내용이 전개됨을 시사하는 접속사이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 공인 본문(Textus Receptus)에는 본 구절 다음에 '육신을 따르지 않고 영을 따라 행하는 자'(* , 메 카타 사르카 페리파투신 알라 카타 프뉴마)란 구절이 첨가되어 있다(who walk not after th flesh, but after the Spirit, KJV). 이 구절이 4절에 반복되고 있으나 다른 사본들(* , B, D)에는 대부분 생략되어 있다. 비록 4절이 본절의 의미를 보충해 주고 있는 것은 사실이나 '예수 안에 있는 자'만으로도 본절의 의미는 명확하게 알 수 있다. 오리려 공인 본문(Textus Receptus)과 같은 첨가가 본절에서 진술하고자 하는 바울의 의도를 흐리게 만들 수 있다. 즉 '예수 안에 있는 자'가 '육신을 따르지 않고

  • 작성자 26.08.15 08:27

    영을 따라 행하는 자'(* , 메 카타 사르카 페리파투신 알라 카타 프뉴마)란 구절이 첨가되어 있다(who walk not after th flesh, but after the Spirit, KJV). 이 구절이 4절에 반복되고 있으나 다른 사본들(* , B, D)에는 대부분 생략되어 있다. 비록 4절이 본절의 의미를 보충해 주고 있는 것은 사실이나 '예수 안에 있는 자'만으로도 본절의 의미는 명확하게 알 수 있다. 오리려 공인 본문(Textus Receptus)과 같은 첨가가 본절에서 진술하고자 하는 바울의 의도를 흐리게 만들 수 있다. 즉 '예수 안에 있는 자'가 '육신을 따르지 않고 영을 따라 행하는 자'에 의해 한정을 받음으로써 성도가 정죄로부터 진정으로 그리고 완전하게 해방되었다는 선포가 제한적인 의미만을 지니게 된다. 본절에서 바울이 '예수 안에 있는 자'란 표현을 사용한 것은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39절)는 신앙 고백적인 선언을 염두에 둔 것으로 이해된다.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며 그것을 행하기를 소원하지만 항상 죄의 법이 성도의 육신을 사로잡아

  • 작성자 26.08.15 08:27

    마음이 원하는 바를 못하게 한다. 이로 인해 성도는 심한 정죄를 받을 수밖에 없다. 바울은 이러한 현실에도 불구하고 성도가 결코 정죄당하지 않는다고 선포하고 있다. 그러면서 그 근거를 2절에서 34절에 걸쳐 자세하게 진술하고 있다.

    =====8:2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 - 본 구절을 해석함에 있어서 두 가지의 난제가 발생한다. (1) '예수 안에 있는'이라는 수식어가 단지 '생명'만을 수식하는가 아니면 '생명의 성령의 법'을 수식하는가 하는 문제가 있다. (2) '생명'이 '성령'을 수식하는가 아니면 '법'을 수식하는가 하는 문제도 있다. 이 두 가지 난제는 함께 얽혀 있다. 성령은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신 후 성도들에게 생명을 주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6절). 따라서 생명은 성령과 불가분리의 관계에 놓여 있으며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이란 표현은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구속의 원리를 가리킨다. 성령은 이 원리에 따라 성도들에게 생명을 주는 역할을 담당하고 계신다. 이러한 점에 비추어 볼 때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이란 표현은 '생명의 성령의 법' 전체를 수식하고 있다. 이처럼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이라는

  • 작성자 26.08.15 08:28

    표현을 수식어로 사용함으로써 '생명의 성령의 법'이 나오게 된 원천을 분명하게 가르쳐 주고 있다.
    죄와 사망의 법 - 혹자는 "모세의 법은 올바르나 힘이 없으며 죄의 법은 힘이 있으나 올바르지 않다. 그러나 성령의 법은 힘이 있고 또한 올바르다"고 진술하고 있다(T.W. Manson). 여기서 맨슨은 '죄의 법'과 '모세의 율법'을 각각 분리시켜 생각하고 있다. 이러한 해석은 율법을 변호해 주면서 본 구절을 오해하도록 한다. 그러나 바울의 진술에서 '율법'과 '정죄'는 분리될 수 없다. 비록 '율법' 그 자체는 '선하고 의롭고 거룩'할 지라도(7:12) 죄는 그 율법을 가지고 성도를 정죄한다. 그렇기 때문에 율법은 죄와 사망이 인간 가운데서 역사할 수 있는 빌미를 제공해 주는 것이다.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 어떤 사본에는 '너'(* , 세) 대신에 '나'(* ,메)가 사용되고 있다. 7장에서 바울이 줄곧 자기 자신을 언급하고 있으므로 '너'보다 '나'가 본절에 더욱 어울리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7:25절부터 바울은 일반인 주어로 '우리'를 사용하기 시작했으며 본장에서는 '나' 대신 '너희'와 '우리'를 번갈아 가면서 언급하고 있다.

  • 작성자 26.08.15 08:28

    그리고 또한 권위있는 사본들(* , B, G)이 '너'를 지지하고 있다. 따라서 본 구절에서 '너'라는 독법(讀法)이 '나'보다 더욱 타당하다. 한편 '해방하였음이라'는 표현은 '정죄함이 없나니'란 표현과 일맥 상통하지만, 전자는 보다 적극적인 표현인 반면 후자는 소극적인 표현이다.

    =====8:3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 율법은 죄에게 종 노릇하는 육신으로 하여금 율법 자체의 요구를 이루게 할 수 없다. 오히려 율법은 육신을 지닌 인간으로 하여금 스스로 율법의 요구를 이룰 수 없음을 깨닫게 해줄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이 스스로의 힘으로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 보겠다고 노력하면 할수록 7:24과 같은 비참함을 경험하게 된다.
    하나님은 하시나니 - 블랙(M. Black)은 본 구절을 주해하기를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율법의 요구를 성취할 수 있게 하신다. 왜냐하면 성령의 도우심으로 우리는 율법의 요구를 성취할 수 있는 능력을 얻게 되기 때문이다"라고 진술했다. 그러나 본장 어느 곳도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성도가 율법의 요구를 이룰 수 있다고 선포하지 않는다. 성도는 오직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성취하신 바를

  • 작성자 26.08.15 08:28

    믿음으로 받아들일 뿐이며, 이를 하나님께서는 성고가 율법을 성취한 것으로 인정해 주시는 것이다. 자세한 것은 4절 주석을 참조하라.
    죄를 인하여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페리 하마르티아스'(* )는 영역 성경에서 '속죄 제물로서'(as an offering for sin, NASB)라고 번역되기도 하고 '속죄 제물이 되기 위해서'(to be a sin offering, NIV)라고 번역되기도 했다. 혹자는 그리스도의 업적과 관련지어 이러한 해석을 지지한다(Harrison, Black). 그리고 초대 교부 중에서도 이 해석을 시도한 사람이 있다(Origen). 그러나 본절뿐 아니라 본장 어느 곳에도 '속죄 제물'이 '제물'에 대한 언급이 없다. 그리고 '페리'(* )란 전치사가 '...을 위해' 또는 '...을 인하여'라는 의미보다 '...에 관해' 또는 '...에 따라서'라는 의미를 지니므로 본절은 '죄와 관련해서' 또는 '죄에 관해서'로 번역되는 것이 더 타당하다(Lenski).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 본절은 예수의 성육신(Incarnation)에 대한 암시이다. 예수는 죄가 없는 분이셨으나(히 4:15)

  • 작성자 26.08.15 08:29

    인간과 동일한 육신을 입으셨기에 죄의 유혹을 받았고 연약함도 경험하셨다. 이 과정을 통해서도 그는 범죄치 않으셨기에 율법의 요구를 다 이루셨던 것이다.
    육신에 죄를 정하사 -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가 없으시지만 인간의 연약한 육신을 입으사 인류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셨다는 의미이다. 예수는 하나님이시면서도 죄의 유혹과 인간의 연약함을 체험하셨고 거룩하신 몸에 죄 정(定)함을 입으시고 십자가에 달리시사 인간의 좌와 허물을 대속해 주심으로써 죄많은 인간과 달리 하나님의 요구를 온전히 성취하셨다.

    =====8:4
    육신을 좇지 않고 - 여기서 '육신'은 정죄된 육신을 가리킨다. 이미 정죄된 육신을 좇는 것은 육신대로 사는 것이며(13절) 육신의 원리에 따르는 것이며 또한 인생의 목표를 육신을 만족시키는 데 두는 것이다. 그런데 본문은 성도가 선을 행하기를 원하지만, 육신에게 져서 비참함을 당하는 상태에 빠지는 것과 본질적으로 다르다. 즉 바울이 지금 경계하고 있는 것은 선을 행하기 원하지만 육신에 져서 죄의 법 아래 사로잡히게 되는 사람이 아니라 전혀 하나님과 무관한 삶을 추구하는 자 곧 불신자들의 상태에 대한 것이다.

  • 작성자 26.08.15 08:29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 성도는 매일의 삶 가운데서 연약한 육신으로 인하여 끊임없는 갈등과 고뇌의 삶을 사는 존재이다. 그러나 성도는 육신을 좇는 자가 아니라 영의 원리를 따라 사는 자이다. 이 영의 원리에서 가장 근본된 것은 복음이며, 성도는 성령을 통해서 복음을 받아들이며 양자됨과 기업을 이어받는 것에 대한 보증을 받는다. 따라서 본 구절은 매우 추상적인 표현이지만 그리스도를 진실로 믿는 성도에 대한 것이다.
    율법의 요구 - '요구'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카이오마'(* )는 '의로운 행동', '계명'(NEB), '규칙' 등을 의미한다. 그러나 신약성경에서 이 단어가 사용될 때에는 '의로운 요구'와 같은 의미로 사용된 적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주석가들은 '디카이오마'를 '의로운 요구'(the just requirement)로 해석하기를 좋아한다(Lenski, Hendriksen, Murray, Stott, Black, Harrison, Barmby). 사실상 본 구절에서 '디카이오마'를 문자적으로 번역하면 '율법'과 같은 의미를 지니게 되므로 문장이 매우 어색하게 된다. 그러므로 본절에서는 '디카이오마'가 '의로운 요구'로 번역되는

  • 작성자 26.08.15 08:30

    편이 매우 자연스럽다.

    =====8:5
    육신을 좇는 자는...생각하나니 - 본절에는 육신을 좇는 자와 영을 좇는 자, 육신의 일과 영의 일이 대조를 이루고 있다. 많은 학자들이 여기서 언급되고 있는 '영'을 '성령'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바울의 저서에 있어서 '영'(* , 프뉴마)은 '성령'을 의미할 때도 있으나 단지 죄의 원리 또는 그 세력과 대조되는 의미로 사용될 때도 종종 있으며, 본장 전체에서도 '영'이 반드시 '성령'으로 해석될 수 없는 곳이 많다. 따라서 여기서의 '영'은 성령이 아니라 다만 육신과 대조되어 영원한 하나님의 말씀이나 뜻을 의미한다. '육신을 좇는 자'가 육신을 위해 모든 목표를 세우며 그것을 추구하는 자라고 하면 '영을 좇는 자'는 하나님을 위해 모든 목표를 세우며 그것을 추구하는 자다. 그리고 '영을 좇는 자'가 목표를 세우고 추구해 가는 모든 과정에는 성령의 개입이 필요하다. 그런데 '영을 좇는 자'라고 해서 연약한 육신을 이기고 마음으로 원하던 바를 모두 행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영을 좇는 자'라 할지라도 그 속에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는 것과 그것과 투쟁하는 죄의 법이 공존한다.

  • 작성자 26.08.15 08:30

    =====8:6
    육신의 생각, 영의 생각 - 이는 사람의 가장 깊은 사고(思考)의 원천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육신'으로부터는 하나님과 아무 상관없는 생각 곧 자기중심적인 생각만이 나온다. 그러나 '영'에게서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하는 생각이 나온다. 그런데 여기서 바울이 교훈하고자 하는 내용은 '영의 생각'을 가진 자는 오직 영의 일만을 좇게 된다는 의미가 아니다. 즉 인간에게는 뚜렷하게 구분되어 나타나는 두 종류의 생각이 있는데(7:21-23) 문제는 이 두 가지 생각에 의해 발생되는 갈등을 어떻게 해결하느냐 하는 점이다. 이 해결에 대한 답을 이미 1절에서 언급한 후, 바울은 미리 주어졌던 답에 대해 설명하기 위하여 다시 두 생각을 대립시키고 있다.

    =====8:7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 죄의 법 아래 사로잡혀 있는 육신은 하나님과 어떠한 관계도 맺을 수 없다. 왜냐하면 육신이 도모하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육신에 속한 자는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구원을 거부한다.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 혹자는 본 구절을 해석하기를

  • 작성자 26.08.15 08:31

    "하나님의 의로운 법에 순종치 아니하고 의지적으로 거부하는 것은 하나님과 원수된 증거요, 이는 모든 비참함의 근거다"라고 했다(shedd). 이처럼 육신의 생각에 따라 사는 자는 자신의 의도가 있든 없든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계획과 뜻을 거부할 뿐만 아니라 도전하기까지 한다.
    할 수도 없음이라 - 자연인의 전적 불능(不能)과 전적 부패성을 보여준다. 오직 성령에 의해 거듭난 자만이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고 기뻐하며 기꺼이 순종하는 마음과 의지를 가질 수 있다.

    =====8:8
    육신에 있는...할 수 없느니라 - 본절은 7절의 논리에 의해 필연적으로 초래되는 결과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생각을 하며, 이에 따라 육신의 일을 하게 된다. 즉 육신에 속한 자는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 전혀 생각지 않으므로 그에게서 나오는 모든 행동이 결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 이것이 죄의 법 아래에만 있는 자의 실상(實狀)이다.

    =====8:9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 성도는 누구나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는 성전이다(고전 3:16;고후 6:16). 여기서 바울은 그동안(4-8절) 육신의 영을 대립시킨 목적을 밝히고 있다.

  • 작성자 26.08.15 08:31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 하나님의 영이 거하는 자는 육신에 속하지 않는 자라고 바울은 선언하고 있다. 즉 성도가 비록 선을 행하기를 원할지라도 그것이 뜻대로 되지는 않지만, 성도로서의 신분을 자신있게 내세울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영이 그 속에 거하고 있다는 사실에 근거한다. 육신의 지배를 받고 있는 현실에도 불구하고 성도는 그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심으로써 '영에 속한 자'의 신분을 얻게 된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 본절에는 성령에 대한 바울의 견해가 매우 잘 나타나 있다. 즉 '성령='하나님의 영'='그리스도의 영'과 같은 등식이 보여 주듯이 성령은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 그리스도와 불가 분리의 관계에 계신 하나님이시다. 이에 대해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서(Teh Westminster Confession of Faith)는 '성령은 영원히 아버지와 아들에게서 나오신다'(the Holy Ghost eternally proceeding from the Father and the Son)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이 성령은 성도 가운데 거하시면서 성도의 영과 더불어 활동하신다(16절).

  • 작성자 26.08.15 08:31

    한편 성도가 '그리스도의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의 영' 곧 성령에 의해서 뿐이다. 성령께서 오심으로써 성도를 하나님께로 인도하여 믿게 하시며 또한 그는 성도 안에 계시어서 하나님의 자녀로 인쳐 주신다. 따라서 성령이 거하는 자는 그리스도를 영접한 자이기에 그리스도께서 거하는 자이고(10a절) 그리스도의 사람이다.

    =====8:10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니라 - 예수께서는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 5:24)고 말씀하시고 또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라"(요 17:3)고 가르치심으로써 사람이 믿음으로 '영생'을 이 땅에서부터 소유하게 됨을 가르치셨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바울도 이신 칭의(以信 稱義)를 근거로 성도의 영이 살아 있음을 증거하고 있다(5:18;6:11). 그러므로 성도는 새 생명 가운데서 사는 자다. 몸은 죄의 도구가 된 육신으로 말미암아 죽을 수밖에 없으나 영은 이미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義)로 인해 살았다. 여기서 '살아 있다'는 의미는

  • 작성자 26.08.15 08:32

    1절의 '정죄함이 없나니'란 말씀과 2절의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는 말씀과 매우 깊은 관계가 있다. 즉 성도가 여전히 정죄받는 신분이라면 아직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되지 않았으므로 살았다는 신분을 얻을 수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는 정좌함이 없으므로,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는 속 사람인 '영'은 죄의 포로가 된 육신과 심각한 갈등 관계에 있을지라도, 성도는 그리스도께서 값없이 주신 의로 인해 살아 있는 존재이다.

    =====8:11
    예수를 죽은 자...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 본절은 10절의 선포에 대한 부가적인 설명이다. 그 설명을 요약하면 성령이 내주하는 자는 하나님께서 성령에 의해 예수를 사망 권세로부터 살리심같이 다시 일으킴을 받게 될 것이라는 말씀이다. 여기서 바울은 단순히 영이 살아나는 것만을 진술하지 않고 성도의 '죽을 몸'이 다시 산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10절에서 바울은 '몸은 죄를 인하여 죽은 것이나'라고 선포했음에도 불구하고 본절에서는 죽을 몸이 산다고 진술하고 있다. 형식상으로 볼 때 그 두 진술은 서로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나 내용면에서 그 두 진술은 서로 깊이 연결되어 있다. 즉 몸은 죄로 인해 죽는다.

  • 작성자 26.08.15 08:32

    그렇지만 영은 의로 인해 살았다. 이와 같이 죽을 몸도 영이 성령에 의해 살게 된 것처럼 다시 살게 된다.

    =====8:12
    그러므로 - 이 접속사는 1절에서 11절까지의 진술을 다시 실제의 삶에 적용하는 주제로 전환시키기 위해 사용되고 있다.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 혹자는 성도가 성령께 빚진 자라고 해석하고 있다(Calvin). 또 다른 학자는 영원에서 영원에 이르도록 이미 받았고 받고 있으며 장차 받게 될 모든 축복과 비교할 때 성도가 빚진 자라고 설명한다(Hendriksen). 이처럼 '빚진 대상'에 대해서 다양한 해석이 나오게 된 것은 그 대상을 바울이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다는 점에 기인한다. 그런데 본절의 '빚진 자'를 '성령'께 빚진 자로 해석하게 되면 그 의미가 매우 축소된다. 오히려 성도는 구원의 전과정에 있어서 성삼위 하나님께 빚진 자다. 특히 1:14에서 바울은 자신을 복음에 대하여 빚진 자라고 하였는데 이는 성삼위 하나님께서 이루어 놓으신 십자가의 은혜에 대하여 빚진 자라는 의미를 강하게 시사한 것이다.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 본 구절은 '빚진 자'로서의 삶을 사는 방법에 대한 제안이다.

  • 작성자 26.08.15 08:33

    그리고 이 제안은 13절과 14절에 의해 더 보충되고 있다. 본 구절만을 따로 떼어서 생각하면 바울의 이 제안은 다시 7장과 같은 갈등 속으로 빠져들게 만든다. 왜냐하면 7:24의 절규는 성도가 육신대로 살지 않기 위해 발버둥치는 상황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절은 7:24과 같은 비참한 경험후에 성도가 자포 자기하여 영적인 것을 추구하기를 그만두는 것과 관련된다. 성도는 현실 삶에서 죄와의 투쟁 가운데 절망을 겪지만 이미 그리스도께서 그 절망을 극복하셨으므로 그에 의해서 극복된 축복을 소유하고 있다. 다시 말해 성도는 그리스도에 의해 이미 보장된 승리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이다. 그러나 이 사실을 모르고 그토록 심각한 좌절감이 찾아올 때에 예수 믿기를 포기하면, 이것은 곧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사는 삶이 되는 것이다.

    ====8:13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 성도는 그리스도의 영을 받아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었다(9절). 그러나 아직 '몸의 구속'(救贖)을 기다리면서 사는 존재이다(23절). 이 사실을 모르고 절망 가운데서 고민하다가 육신에게 져서 성도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는 것으로 판단하여

  • 작성자 26.08.15 08:33

    믿기 이전의 삶으로 돌아가 버리는 것은 영원히 사망의 종노릇을 하겠다는 것이다. 지금 바울은 구원을 성도 자신의 노력이나 의지로 성취하려는 것을 경계하면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의 원리를 가르칠 준비를 하고 있다.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 최후 승리는 성도 자신의 의지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직접 얻게 해주시는 것이다. 엡 6:10-19에서 바울은 성도가 대적 마귀와 싸워 이길 수 있는 방법을 나열했는데, 그 중에 인간 스스로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 모든 것은 오직 하나님께서 예비해 주신 것뿐이다. 만일 이러한 바울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하고 본절을 인간의 노력과 연관지어 이해하면 쉽게 새로운 율법주의로 빠지게 된다. 오순절 성령의 역사뿐 아니라 교회사 전체에 있어서도 성령의 역사는 성도의 어떤 노력이나 의지 여하에 따라 나타난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써 하나님의 원하시는 바에 따라 나타났다. 그러므로 본절은 성도가 그리스도 안에 머물 때에 당연히 주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령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 것이란 말씀을 인간의 노력과 행위의 차원에서 이해한다면 7:24과 같은 비참한 상태에 빠져

  • 작성자 26.08.15 08:33

    몸부림치게 될 것이다.

    =====8:14
    하나님의 영으로...하나님의 아들이라 - 성도는 그리스도의 영을 받은 자이기에 당연히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자이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의 사랑'(9절)이며 '하나님의 아들'이다. 예수께서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12)라고 가르치셨다. 성도는 성령의 인도함을 따라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써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이처럼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성도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는다.

    =====8:15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 '무서워하는 종의 영'과 비슷한 의미로 딤후 1:7에서는 '두려워하는 마음'(* , 프뉴마 데일리아스)이 언급되고 있다. 성도를 두렵게 하며 속박하는 것은 율법이다. 성도는 율법에서 해방됨과 동시에 율법이 주는 두려움과 속박(bondage)에서 벗어났다. 결국 성도는 율법을 통해서 성도를 정죄하는 그 모든 것으로부터 해방된 신분이므로 결코 '두려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않는 것이다.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 구약 시대에는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가 아버지와 자식의 관계로 보다

  • 작성자 26.08.15 08:34

    왕과 백성의 관계로 더 많이 이해되었다. 비록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가 아버지와 자식의 관계로 언급되었을지라도 신약 시대처럼 친밀한 관계를 보여주지는 않는다(J. Jeremias). 양자(養子)의 원리는 바울 신학의 중요한 주제 중 하나로 그 근원은 예수의 가르침에서 발견된다(마 6:9;막 14:36). 그리고 바울은 성도로 하여금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시는 분이 성령이라고 가르친다. 성령께서 성도 가운데 거하심으로 성도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보증으로 인쳐 주시는 것이다.
    아바 아버지 - 예레미아스(J. Jeremias)는 '아멘 아멘...'의 형식과 함께 '아바 아버지'란 용어가 '예수의 고유한 언어 구사 방법'(ipsissima vox Jesu)이라고 주장한다(요 20:11-29 주제 강해 '예수의 언어 사용에 나타난 자기 계시' 참조). 오직 예수만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아바 아버지'란 용어를 즐겨 사용했는데, 이는 (1) 아버지에 대한 아들의 철저한 복종과 긴밀한 관계, (2) 아들로서의 권위를 나타낸다. 예수는 이와 같은 용어를 제자들에게도 가르치셨는데(마 6:9), 이 용어는 신약 시대의 성도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장 잘 대변해 준다.

  • 작성자 26.08.15 08:34

    '아바'는 어린아이의 언어에서 유래되었다. 탈무드(Talmud)에 언급된 "어린이가 젖을 떼면서 밀맛을 볼 때에 '아바'(* )와 '임마'(* ) 곧 '아빠'와 '엄마'란 말을 배우게 된다"란 구절이 그 사실을 잘 암시한다. 그리고 탈굼역(The Targum)도 사 8:4을 "어린이가 '아바'와 '임마'라고 부르기를 배우기 전에"로 번역하고 있다. 이와 같이 '아바'는 매우 친밀한 언어로 하나님을 경외할 분으로만 알았던 유대인들은 기도 가운데서 하나님을 '아바'로 부를 수 없었으며 기도 형식의 문헌에조차 결코 사용된 적이 없다(J. Jeremias). 그러나 신약의 성도는 양자의 영에 의해서 하나님과 부자(父子)관계 속에 들어가게 됨으로써 '아바'란 말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 26.08.15 10:18

    진정으로 상세한 설명이네요. 최고입니다.

  • 26.08.15 10:23

    저도 소박한 묵상을 해봅니다.

    성도의 자유와 승리를 선포하는 소망의 말씀(롬8:1-3)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는 선포가 마음에 큰 위로와 자유를 줍니다.
    나의 어떠함이 아닌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생명의 성령의 법으로 죄와 사망에서 해방되었음을 다시금 깊이 깨닫습니다.
    연약한 육신으로는 결코 이룰 수 없던 율법의 요구를 하나님께서 친히 그 아들을 통해 이루어 주신 은혜에 감사가 넘칩니다.
    우리의 공로나 노력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대속의 은혜만을 겸손히 의지하게 됩니다.
    정죄의 공포에서 벗어나 온전히 참된 생명과 평안의 길로 담대히 나아가는 복된 삶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 26.08.15 11:05

    아멘!

  • 26.08.15 10:24

    성령 안에서 살아가는 성도의 삶을 향한 고백(롬8:4-6)

    내 힘과 노력으로 율법의 요구를 이룰 수 없음을 인정하며 오직 주님의 의를 의지합니다.
    연약함 가운데 갈등할지라도 육신이 아닌 하나님을 바라보는 영의 원리를 좇아가길 원합니다.
    자기중심적인 육신의 생각을 내려놓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영의 생각을 품게 하소서.
    매일의 삶 속에서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진정한 생명과 평안의 열매를 맺어가기를 기도합니다.

  • 26.08.15 11:10

    아멘!

  • 26.08.15 10:26

    성령으로 말미암아 살아가는 성도의 영적 정체성과 소망(롬8:7-12)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우리의 부패한 옛 성품을 깨닫고 오직 은혜의 부르심 앞에 겸손히 엎드립니다.

    우리의 어떤 자격이나 노력이 아닌, 오직 내주하시는 하나님의 영으로 인해 영에 속한 자가 되었음을 감사드립니다.

    성부와 성자로부터 오신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 안에 거하심으로 우리는 진정한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비록 우리의 육신은 죄의 결과로 쇠하여 지나, 그리스도의 의로 말미암아 우리의 영은 참된 생명을 누립니다.

    예수님을 죽음에서 살리신 성령의 능력이 훗날 우리의 죽을 몸까지 완전히 부활시키실 것을 확신합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 역사하신 성삼위 하나님의 헤아릴 수 없는 은혜와 복음 앞에 평생 빚진 자임을 고백합니다.

    치열한 죄와의 싸움에서 때로 좌절하고 쓰러질지라도, 이미 예수 그리스도께서 승리하셨음을 기억합니다.

    절망에 빠져 육신에 굴복하거나 믿음의 길을 포기하지 않고, 주님이 주신 승리의 약속을 끝까지 붙듭니다.

    육신의 소욕을 따르던 삶을 벗어나 매일 성령의 인도하심에 온전히 순종하는 삶으로 나아가기를 원합니다.

  • 26.08.15 10:26

    부활과 영생의 확신을 품고 세상의 어둠을 이기며 하나님의 자녀다운 거룩함과 담대함으로 살아갑니다.

  • 26.08.15 11:08

    아멘!

  • 26.08.15 10:27

    성령 안에서 누리는 신분적 특권과 참된 자유(롬8:13-15)

    육신의 한계에 절망하여 과거 사망의 종노릇 하던 자리로 돌아가지 않고, 은혜의 원리 안에 거하게 하심에 감사드립니다.

    성령으로 몸의 행실을 죽이는 것은 나의 의지나 공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와 권능의 역사임을 고백합니다.

    율법이 주는 두려움과 정죄의 속박에서 벗어나 은혜 아래에서 완전한 참 자유를 누리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거룩한 정체성을 따라 주님의 진정한 자녀다운 삶을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우리를 하나님 아버지의 거룩한 양자로 삼아주시고 성령으로 자녀 됨을 인쳐 주신 은혜가 얼마나 가슴 벅찬지요.

    가장亲密하고 거룩한 이름인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짖으며 하나님 앞으로 담대히 나아가는 특권을 누립니다.

    어린아이와 같은 순전한 믿음으로 아빠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을 늘 신뢰하며 매일의 삶에서 승리하기를 소망합니다.

  • 26.08.15 11:05

    아멘!

  • 26.08.15 11:09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하나님의 양자가 되는 은혜를 입었음을 깊이 새깁니다.
    신성과 인성을 가지신 독생자와 피조물인 우리의 신분적 구분을 명확히 하며 겸손히 주를 따릅니다.
    하나님의 영, 그리스도의 영, 양자의 영이신 성령께서 내주하심을 믿고 매일 영의 생각을 품겠습니다.
    무서워하는 종의 영이 아닌 아들들의 권세를 주셨으니 세상 속에서 성령의 지혜로 승리하기를 소망합니다.

  • 26.08.15 11:26

    매우 좋은 말씀입니다. 성령의 내주와 성화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도 이단들의 오류를 정확하게 교정하는 효과를 발휘하는 말씀입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아들이 되게 하는 영이라는 현대인의 성경이 오해를 불식시키는 확실한 번역을 했군요. 오늘날 신사도운동, 오순절 은사주의 계열 등에서 성령의 은사와 능력을 강조하면서 은사와 능력이 많이 나타나면 사도로, 특별한 하나님의 종으로 추앙을 하면서 영적 권위주의로 흐르는 문제점을 노출시키고, 성령에 대해서도 크게 오해하고 인생을 허비하고 있습니다.
    성령의 은사와 능력이 초대교회에서와 똑같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에서 벗어나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결코 성령의 능력, 은사들을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은사와 능력은 선물로 받는 것이고, 인간의 노력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며,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고 거룩하게 산다면 능력은 적재적소에서 나타나고, 하나님의 필요에 의해 주어진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들은 마음을 비우고 생활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사도들이 강조했듯이 성도의 본분은 성령의 열매 맺기를 사모하며 힘써야 한다는 의미를 잘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 26.08.15 15:57

    성령이 내주하시고 우리가 순종하며 거룩하면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마땅히 자신을 드러내시고 영광도 함께 나타내실 것을 믿어야겠습니다.
    아멘 🙏

  • 26.08.15 11:30

    아멘! 좋은 내용과 핵심 짚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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