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잉, 투명한 울림소리를 내며 탁구공이 앞으로 튀어 나간다. 공을 친 쪽도 받아칠 상대편도 한순간 탁구공의 향방에 정수리까지 바싹 긴장한다. 옆길로 새지 말고 곧장 나아가기를, 네트에 걸리지 말고 곧바로 넘어가 주기를, 이런 조바심과 전신(全身)의 긴장 상태가 싫지 않다. 얼마 만인가.
생기 찰박하고 날렵하며 팽팽하던 시간대엔 탁구공도 통통 탄력 있게 네트를 넘어간다. 어깨너머로 익힌 실력에 별다른 테크닉 없이도 가능했다. 휴일이면 산악회원들 대열에 합류하거나 탁구장을 찾는 일이 운동 겸 휴식이었다. 해 보고 싶은 것이 무진장이었는데 날이면 해야 할 일에 고삐가 잡혀 바동거리던 때다. 내 뜻과 상관없이 돌아가는 일상에서 주말이 오기만 기다렸다. 빡빡한 줄 끄트머리에 매달린 휴식의 시간이란 갑갑한 터널의 끝에 닿는 햇살이고 살랑바람이었다.
지금의 나? 주말이나 휴일이 그리 의미가 없다. 고삐 늘어진 시간은 차치하더라도 안팎에서 기를 꺾는 것들이 부지기수다. 오늘 바람 불고 비 많이 온다고, 엄청 덥다고, 너무 춥다고, 피곤하다고, 가만히 엎드려 있자는 몸의 투정과 꼬드김에 쉽게 동의해 버린다. 서늘한 바람의 감촉만으로도 여차하면 감기이고 까딱하면 몸살을 일삼는 체력을 핑계로 안락함, 쪽으로 눈독을 들인다. 어이없는 건 비행가가 추락했다는 빅뉴스나 지진이 일본열도를 흔들고 미사일이 전쟁 중인 어느 나라 하늘에 쏟아졌다는 속보에도 심드렁하다는 것, 기껏해야 “또?” 한마디가 관심의 시작이자 끝이다. 내 속에서 나를 주저앉히는 것들이 무언지 짐작은 하면서도 각오는 줄기차게 ‘내일부터’다.
탁구대에서 공이 자꾸 빗나간다. 한심하게 네트에 걸려 주저앉거나 뜬금없이 공중으로 솟구쳤다가 바닥으로 나가떨어진다. 방향감각을 잃고 갈팡질팡하는 탁구공이 흡사 목표를 상실한 누군가의 삶을 떠올려 주는 것 같다. 나에게서 찬연하게 반짝이던 것들은, 어디로 새 버렸다. 심장이 떨리도록 나를 일으켜 주던 동적인 세포들이 빠져나간 몸에서 식은땀이 흐른다. 결국, 통쾌한 스매싱 한번 못 때려 보고 한 시간 동안 스윙 연습만 하다가 돌아왔다.
힘이 빠지면서 신산한 것이 마음을 누른다. 안락과 평안이라 여겼던 것들에 돌연 의심이 간다. 나태하고 무력하고 썰렁하고 쓸쓸하고….
펼쳐 든 시집에서 급기야 가슴을 쿡쿡 찌르는 시를 읽는다.
“삶에서 ‘간절’이 빠져나간 뒤/… 몸 쉬 달아오르지 않는다/달아오르지 않으므로 절실하지 않고/절실하지 않으므로 지성을 다할 수 없다…” (이재무의 ‘간절’)
이 단출한 문장이 총체적 난국에 빠진 내 정신을 짚어 주다니, 자각은 자신을 직시하는 용기다. 나는 언제 ‘간절’을 잃어버렸는지 어둑한 마음 안을 들여다본다. 목숨붙이의 본색마저 퇴색시키는 시간 앞에 움츠러드는 자신감, 어디에도 닿지 못한 막막함과 느닷없는 허무, 앞섶을 암만 여며도 파고드는 시린 바람의 느낌, 그 위에 한 시절 나를 열렬히 고조시켰던 시간을 겹쳐 보다가 그만 울컥한다.
탁구공인들 패기와 열정이 가셔 버린 주인이 마음에 들 리 없었을 게다. 팔팔한 생명력과 민첩한 속도성과 통통 튀는 리듬감을 만끽하고 싶지 않았으리. 거침없이 네트를 넘고 목적지를 향해 쌩하게 날아가고플 테지, 바닥에 갈앉아 빛도 그림자도 아닌 것은 삶이 아님을, 하마 알았을 법하다.
때론 육체의 안락함이 어떤 유혹보다 치명적이라던가. 나를 짚어준 뜨거운 시 구절을 한 웅큼의 각성제인 양 속으로 삼켜 본다. 뜨끔거리며 넘어가다 꺽꺽 걸리는 불 가시가 찔러 댄다. “잠들어 죽지 않기 위해 제 머리를 바위에 부딪고 출렁이는 바다를 보라!” 그래, 홧홧한 간절함 하나가 내 속에 살아나 준다면 시(詩)든 탁구든 다른 무엇이든 상관없다. 팽팽한 설렘과 탄력을 간직했으면 그만이다.
뜻밖에도 심경에 와닿는 시 한 구절, 수필 한 문장이 축 처지려는 마음을 일으켜 세운 순간이 더러 있다. 오래된 심장도 다시금 설렘 준비를 하는 거다. 무기력의 늪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라도 허우적대는 정신을 갈아 봐야 할 시점이겠다. 시련이 끈질기게 시험한다고 아무 노력도 하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얻어지지 않으므로, 한 생이 농익는다는 게 절대 밋밋하거나 호락호락한 일이 아니므로.
곱씹어 봐도 고난은 아리지만 세상을 다시 볼 기회가 되어 준다. 인생의 한 경지에 도달한 사람도 숱한 좌절의 고비를 넘어왔으며, 소리꾼의 한가락 절창도 통증을 삭혀 낸 결과다. 나로부터 멀어졌다고 여긴 ‘간절함’ 또한, 아득한 거리가 아니라, 외려 회복 탄력성을 지닌 간격이라고 속을 달랜다. 내가 만든 무기력과 쓸쓸함과 절망에 속느니 희망에 속아 보는 건 더이상 두려움이 아니라며 마음 다진다. 이런 느닷없는 아픔과 허무도 우지끈거리는 두통이나 치통처럼 시련의 한순간일 뿐이
며, 이 불가해한 생을 건너는 주인공은 바로 ‘나’임을 새겨 넣는다.
자아를 변화시키는 힘은 나를 직시하는 자각에서 오는 것이리라. 한사코 희망 최면을 걸고 있다. 자신이 스스로를 부축해야 한다는 사실은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일일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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