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군의 독립전쟁은 그 승패의 여부를 떠나, 투쟁 그 자체로서 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리고 민간 중심의 무장조직으로써, 일본 정규군을 상대하여 독립전쟁을 전개했다는 점에서 한국 독립군의 활동은 그만큼 더욱 값진 것이죠. 이렇듯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대첩의 주역으로 활동하신 안무 장군에 대해 알아보아요.호는 청전이며 본명은 안병호인 안무장군은 함북 경성에서 출생하였습니다. 1899년 대한제국 육군 진위대에 입대하였으며 한성교련관양성소를 졸업하고 진위대 교련관이 되었습니다. 1910년 일제의 국권침탈 때 안무 선생은 지린성으로 피신하시어 대한국민회를 조직하여 부회장이 되었습니다. 3.1 운동 후 독립군사령부를 창설 하셨으며 군무위원 및 사령관으로 독립군을 양성 하였습니다.1920년 홍범도의 대한독립군 및 최진동의 군무도독부군과 연합사령부를 조직하여 사령관 최진동의 부관이 되었는데요. 그 해 6월 봉오동 전투가 일어납니다. 봉오동 전투에서는 일본군 150여명을 전사시키는 대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그해 10월 청산리 전투에서는 간도 일대 독립군들이 일군 승리로 특히 홍범도와 안무부대는 봉오동 및 청산리 전투 모두에 참가해 큰 공훈을 세웠습니다. 청산리에서는 일본군 1.200여명이 전사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청산리 전투 후 독립군 부대들은 사실상 해체된 채 일본군 토벌작전을 피해 중·소 국경지대로 옮겨갑니다. 김좌진 장군은 흑룡강 넘어 영안현으로 옮겼고, 홍범도와 안무 장군은 러시아로 건너갔습니다. 그러나 안무 장군은 김좌진과 홍범도가 영안과 러시아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했던 것과 달리 독립군 재건을 위해 1924년 만주 간도에 잠입합니다. 그러나 용정시 모아산 부근에서 일본군에게 발각돼 기습 총격을 받고 부상당해 용정자혜병원에서 치료를 거부하다 당시 나이 41세로 숨을 거두게 됩니다. 그게 바로 1924년 9월 7일 안무 장군의 국민회군 활동기간은 2년 남짓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안무 장군은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의 숨은 영웅이었습니다. 또 모든 독립군들이 일본의 탄압을 피해 러시아로, 북만주로 떠났을 때 그는 간도로 다시 돌아와 독립군 재건을 꿈꾸다 일본군의 흉탄에 목숨을 거두셨습니다.안무 장군이 희생된 후 그의 시신은 용정 일본 영사관 지하실에 6일간 보관되었다가 용정 시내 영국덕이에 묻혔다고 합니다. 장례식 때 유혈폭동을 우려한 일본 경찰이 취한 선제 조치였습니다. 그만큼 안무 장군은 일본에게 두려운 존재였던 것이죠. 일본 경찰은 한인들의 소요를 우려, 자혜병원에서 숨진 안무 장군의 시신을 이곳 지하실에 6일간 안치한 뒤 가족에게 인계했다. 이 건물은 현재 용정시 청사로 사용되고 있다. 안무 장군이 봉오동, 청산리 전투에서 숨은 주역이었던 것은 2인자 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는 20년대 간도지역에서 가장 오랫동안 독립군을 이끌고 일관성 있게 무장투쟁을 벌인 항일운동가입니다. 1924년 순국하신 안무 장군의 순국선열을 우리는 오래토록 기억해야 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