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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수경의 왕험성고
《왕험성고(王險城考)》
양수경 저. 봉오선생 번역
《사기(史記)》·《한서(漢書)》에서 모두 말하기를, "조선왕 위만(衛滿)이 왕험(王險)에 도읍을 하였다"
고 하였다.
《사기집해(史記集解)》에서 서광(徐廣)이 한 말을 인용하여 "창려(昌黎)에 험독현(險瀆縣)이 있다"고
하였다.
사마정의《사기색은(史記索隱)》에서 위소(韋昭)의 말을 인용하여 "옛 고을 이름이다"고 하였고,
응소(應劭)는 《한서(漢書)·지리지(地理志)》에 주석하기를, "요동 험독현은 조선왕(朝鮮王)의 구도(舊都
: 옛 도읍)로서, 물이 험한 곳에 의지해 있기 때문에 험독(險瀆)이라 한다"라고 하였고,
신찬(臣瓚)이 말하기를, "왕험(王險)은 낙랑군 패수(浿水)의 동쪽에 있으며,이곳이 당연히 험독(險瀆)
이다"라고 하였는데, 안사고(顔師古)는 "신찬(臣璨)이 한 말이 맞다"라고 하였다.
생각건대 험독(險瀆)은 창려(昌黎)에 있었으니 요수(遼水)의 서쪽에 있었던 것이요,
게다가 《사기(史記)》에서도 분명하게 말하기를, 패수(浿水)를 건너서 진의 옛 공터(秦故空地)에 살았
다고 하였으니 응소(應劭) · 서광(徐廣)의 주장은 아주 틀렸다. 신찬(臣璨)은 왕험(王險)이 패수의 동쪽에
있다고 말했던 것은 그 성이 패수(浿水)에서 동남쪽으로 구부러져 흐르고 있는 곳으로 생각되기 때문에,
남쪽이라 말하지 않고 동쪽이라고 말했던 것임에 틀림없고, 동쪽이라고 한 이상 패수의 북쪽에 있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수경주(水經注)》에서 말하기를, "위만(衛滿)이 왕노릇하면서(원문은 '玉滿'으로 되어 있으나
'王滿'의 오식으로 보여지므로 그런 취지로 의역하였음, 필자주) 도읍을 한 왕험성(王險城)은 지금의
고구려국 도성으로 패수의 북쪽에 있다"라고 하였는데, 이는 평양성이 왕검성으로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당나라 위왕(魏王) 이태(李泰)가 엮은 《괄지지(括地志)》에서 이르기를, "고구려의 치소 평양성은 원래
한낙랑군 왕험성, 곧 고조선이다(高驪治平壤城, 本漢樂浪郡王儉城, 卽古朝鮮也。)"라고 한 뒤로부터
모두 다 이를 전거로 삼게 되었다.
내가 《사기(史記)·조선전(朝鮮傳)》을 읽어 본 결과, 왕험성(王險城)은 패수(浿水)의 남쪽에 있다고
하였으니 평양성(平壤城)은 왕험성(王險城)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러한 사실을 입증할 증거는 네 가지이다.
패수(浿水)는 지금의 대동강(大同江)인데 평양성(平壤城)은 대동강(大同江)의 북쪽에 있다.
그런데 《사기(史記)》·《한서(漢書)》에서는 똑같이 말하기를, "위만(衛滿)이 패수(浿水)를 건너가서
왕험(王險)에 도읍을 하였다"라고 하는 것이 그 첫번째 증거이다.
누선장군(樓船將軍) 양복(楊僕)이 제(齊: 산동성)에서 바다를 건너 열구(列口)<소림(蘇林)은 현이름이다.
바다를 건너자마자 바로 여기에 이르게 된다고 하였다>에 이르렀고, 좌장군 순체(筍彘)가 요동(遼東)에서
출발하였으니, 이는 한나라는 누선장군(樓船將軍) 양복(楊僕)이 물길(水道)을 통해서 왕험성(王險城)의
남쪽을 공격하고, 좌장군(左將軍) 순체는 육로를 통해서 왕험성(王險城)의 북쪽을 공격하려던 것인데,
누선장군이 왕험성에 먼저 도착, 전쟁에 패하여 산속으로 달아나 몸을 숨겼다고 하면서, 진격하거나 후퇴
할 때 모두 패수(浿水)를 건넜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좌장군도 조선의 패수의 서쪽 군사(浿水西軍)을 쳤다고 하였으니, 이는 좌장군 순체(筍彘)가 조선과 더불어
전쟁을 하면서 아직도 패수의 서쪽에 서쪽에 있었을 뿐 아직 왕험성에 이르지 못했다는 것이 그 두번째
증거이다.
조선의 왕 우거(右渠)가 항복하기를 원해, 태자를 들여 보내어 사죄를 하라고 하여, 태자가 막 패수(浿水)
를 건너려다가 좌장군 순체(筍彘)가 혹시 자기를 속여 죽이지나 않을까 의심을 하여 마침내 패수를 건너지
않는 상태에서 사람들을 이끌고 돌아가 버렸다는 것이 그 세번째 증거이다.
한무제(漢武帝)가 조선(朝鮮)을 평정하고 4군을 두었는데 낙랑군의 치소는 종전대로 조선(朝鮮)이라고
이름을 붙이고 왕험(王險)의 고성을 그대로 사용하였다.
이로써 조선(朝鮮)이 멸망당한 뒤 고구려가 맨 처음 일어나면서 환도성(丸都城)에 도읍을 하였고,
삼국시대에 때 위장 관구검(毌丘儉)에 의해 공파되어 그나라 왕(동천왕을 가리킴, 필자주)이 남옥저(南沃沮)
로 달아났다가 위군(魏軍)이 물러간 뒤 비로소 평양(平壤)에 도읍을 하게 되었던바<《조선사략(朝鮮史略)》
을 보라>, 그 당시 낙랑(樂浪) · 대방(帶方)은 모두 조위(曹魏)에 속한 군(郡)이었거니와 고구려가 상패
(喪敗)한 나머지 낙랑군 치소를 빼앗을 여지가 없었던 만큼 평양성이 왕험성(王險城)이 아니었음을 자세히
알 수 있을 것이다.
수·당에 이르러 고구려는 모두 평양성(平壤城)에 도읍을 했던 것인데 《괄지지(括地志)》를 편찬한 위왕
이태(李泰)와 《후한서(後漢書)·군국지(郡國志)》에 주석을 한 장회태자(章懷太子) 이현(李賢)이 이 점을
고려치 않고 위만의 왕검성과 같은 것으로 본 것이 잘못이었다.
(《王險城考》。《史、漢》幷言朝鮮王滿都王險, 《史記集解》引徐廣曰: "昌黎有險瀆縣也。" 《索隱》引
韋昭云: "古邑名。", 應劭注《漢志》云: "遼東險瀆縣, 朝鮮王舊都, 依水險故曰險瀆。" 臣璨曰: "王險, 在樂
浪郡浿水之東, 此自是險瀆也。" 師古曰: "瓚說是。" 案險瀆在昌黎, 則在遼水之西, 而《史記》明云, 渡浿水
居秦古空地, 則應劭、徐廣說誠非也。臣瓚說在浿水之東者, 必其城當浿水東南流曲處, 故不言南而言東, 言東
則不在浿水北, 可知矣。而《水經注》言, 玉[王]滿都王險城, 今高麗之國都城, 在浿水之陽, 是以平壤城,
當王險城矣。
故《括地志》云平壤城, 卽王險城, 古朝鮮也。《後漢書》云王險城, 卽平壤, 以後則無不以爲典據者。余讀
《史、漢·朝鮮傳》, 而知王險在浿水之南, 平壤城非王險城也。其證有四: 浿水, 今大同江也, 平壤城在大同
江之北, 而《史、漢》幷言, 滿渡浿水, 都王險, 證一也; 樓船將軍楊僕, 從齊浮海至列口<蘇林曰: '縣名。度
海先得之。'>, 左將軍筍彘出遼東, 是漢以樓船由水道攻其南, 左將軍由陸路攻其北, 樓船先至王險, 軍敗遁
山中, 進退皆不言度浿水。
左將軍擊朝鮮浿水西軍, 是筍彘與朝鮮戰, 尙在浿水之西, 未能至王險城, 證二也; 右渠願降, 遣太子入謝, 方
渡浿水, 太子疑左將軍詐殺之, 遂不渡浿水, 復引歸, 證三也; 武帝滅朝鮮, 定爲四郡, 而樂浪郡治, 仍名朝鮮,
其因王險故城。可知自朝鮮滅後, 高麗始興都丸都城<丸都在鴨綠江東北>, 至三國時, 爲毌丘儉所破, 王奔南
沃沮, 魏兵退, 始移都平壤<見《朝鮮史略》>。其時樂浪、帶方皆爲魏屬郡, 不容高麗以喪敗之餘, 奪其樂浪
郡治也。是平壤城, 非王險城審矣。至隋唐, 高麗幷都平壤, 魏王章懷不考, 遂以衛滿之王險城, 合而爲一誤矣。
<끝>
왕검성(王儉城)은 과연 어디에 있는가
이병도 선생이 쓴 《한국사대관(韓國史大觀)》에 그려져 있는 《위씨조선(魏氏朝鮮)과 한(漢)의 동방침략
도(東方浸略圖)》에는 오늘날의 대동강(大同江)으로 보이는 열수(列水) 남쪽에 왕험성(王險城)이 그려져
있고 왕험성 일대에 대해서는 그림을 확대를 하여 북쪽에는 좌장군의 육군이 포진하고 있고, 남쪽에는
누선장군의 수군이 각각 포진하고 있다는 것으로 그려져 있다.
(이병도, 《한국사대관(韓國史大觀)》, 보문각, 1964년, 30쪽 참조)
이병도 선생이 그린 이 지도를 보면 양수경 선생이 적절하게 지적한 바와 같이 위만조선의 도성인 왕검성
은 패수의 남쪽에 있는 것이 아니라 열수(列水)의 남쪽에 있다.
지도상으로 보면 패수는 청천강쯤으로 보인다.
북한의 리지린이란 학자는 이러한 주장을 한 바 있다.
"중국의 저명한 역사지리학자 양수경은 그의 저 《회명헌고(晦明軒稿)》 중의 《왕험성고(王險城考)》
에서 패수를 대동강으로 인정하였으나 패수와 왕검성의 지리적 관계를 고려하여 왕검성을 평양에 비정할
수 없다고 인정하였다.
즉, 그는 《사기(史記)·조선열전(朝鮮列傳)》과 《위략(魏略)》에서의 패수와 왕검성이 지리적 관계에
기초하여 문제를 고찰했던 것이다. 그가 역사적 사실에 기초하여 문제를 고찰한 태도는 옳았으나 그의
대국주(大國主義)의 사상은 그의 역사지리연구를 전진시킬 수 없게 하였던 것이다.
즉 그는 국경선이었던 패수를 대동강까지 잡았기 때문에 왕검성의 위치를 밝힐 수 없는 경지에 떨어지고
말았던 것이다.
요컨대 국경선인 패수를 압록강이나 대동강으로 비정할 수 없을진데 왕검성는 평양으로 될 수 없다.
고고학자들은 대체로 일치하게 왕검성을 평양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필자는 그들에게 다음과 같은 문제를 제기한다.
전술한 바와 같이 왕검성이 평양으로 되려면 압록강 이남에서 연(燕) · 진(秦) · 전한(前漢)의 유물이
다량으로 출토되어야 한다. 왜 그런가?
기술한 바와 같이 한(漢)과 고조선(古朝鮮)의 국경선이 압록강(鴨綠江)이었다면 연(燕)이 관리를 두고
장새를 구축하고 통치한 전한의 영역은 그 패수(浿水) 이동이라야 하며, 또 바로 그 지역이 진(秦)의
요동외요(遼東外徼)이며 전한(前漢)은 그 지역을 포기하고 패수 이서로 퇴각했으며 위만을 비롯한 수다한
한인들이 거기에 거주했기 때문이다.
오늘 고조선 역사 · 지리를 논함에 있어서 《사기(史記)·조선열전(朝鮮列傳)》과 《위략(魏略)》의 기록을
무시할 권리가 없다.
국경선인 패수(浿水)가 압록강이라면 압록강 이남 백여 리는 위만(衛滿)을 비롯한 수다한 중국의 피난민
들이 거주한 지역으로 돼야 한다.
또 방향으로 보아도 《위략(魏略)》에는 조선 왕이 그 서부 지방 백여 리를 위만에게 봉하였다고 썼다.
오늘 평양에서 압록강 이남 지역을 서부 지방이라고 말하기도 어렵지 않는가.
어쨌던 압록강 이남에서 연(燕)·진(秦)·전한(前漢)의 유물이 다량으로 출토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아직 이러한 유물들이 우리의 주목을 끌 수 있도록 출토된 사실을 알 지 못하고 있다.
또 소위 낙랑 고분에서 전한(前漢)의 유물이 도대체 얼마나 출토되었는가? 또 간혹 전한대의 유물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대체로 전한 말기에 속하는 것들이 아닌가?
한무제 시기의 유물이 도대체 얼마나 출토했는가? 왕검성을 평양이라고 주장했고 또 낙랑군을 오늘 평양
을 중심한 평안도 지역이라고 주장한 것은 바로 우리 봉건 사가들과 그후 내외의 사가들, 일본고고학자들
이였다.
우리는 특히 일본 고고학자들이 이렇게 주장한 목적을 잘 알고 있다.
조선 민족을 마음대로 모욕하고 유린하기 위한 수단이 바로 그들의 조선고고학이요, 조선역사학이 아니
었던가? 그들은 《사기(史記)》·《위략(魏略)》의 기록을 제멋대로 말살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나는 이상 천박한 연구이지만 그들의 설을 수긍할 수 없다.
그러면서 리지린씨는 왕검성을 개평(開平)으로 비정한 바 있다.
(리지린, 《고조선연구》, 백산자료원, 86~88쪽 참조)
본란을 통해 필자가 번역소개한 바 있는 중국 유절(劉節)이라는 학자가 쓴 《광개토대왕비문연구》에서도
패수와 왕검성의 지리적 관계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주장을 한 바 있다.
"《사기(史記)·조선전(朝鮮傳)》에 이르기를, "
한나라가 일어나면서 그곳이 멀고 지키기 어려우므로 다시 요동의 고새(故塞)를 수리하여 패수(浿水)로써
경계를 삼았다."라고 하였다.
또 이르기를, "동쪽으로 달아나 새(塞)를 나와 패수를 건너, 진고공지(秦故空地) 상 · 하장(上下鄣)에 살면
서 왕험(王險)에 도읍을 했다."라고 하였다.
또 "원봉 2년(B.C 109)에, 한나라가 섭하(涉何)를 시켜 우거(右渠)를 꼬였으나 끝내 천자의 명을 받으려고
하지 않았다. 섭하가 돌아가면서 국경인 패수에 이르러 마부를 시켜 섭하를 전송나온 조선의 비왕(裨王)
장(長)을 찔러 죽이고 바로 건너 요새 안으로 들어 갔다."라고 하였다.
이에 따르면 새(塞)라고 하는 것은 곧 지금의 산해관(山海關) 밖 옛날 장성(長城)의 유지(遺地)를 가리키는
것으로, 서쪽으로 유관(楡關)에서 시작하여 봉천(奉天) 서북계를 따라 개원(開原)에 이르기까지 두 갈레로
꺾여지는데 한 갈레는 동북끝 이통문(伊通門)에서 길림계에 이르기까지며 다른 한 갈레는 흥경 영청문
(永淸門)에 이르러 서남쪽으로 바뀌어 봉황청(鳳凰廳) 고려문(高麗門) 남저(南底)에서 바다에 이른다.
지금의 봉천의 관전(寬甸)·안동(安東)은 모두 새외(塞外)에 있었고, 이른바 진고공지(秦故空地) 상하장(上
下鄣)이란 틀림없이 그 지역에 해당되고, 고새(故塞)를 수리하여 패수에 이르러 이를 국경으로 삼았다는
말과도 부합된다.
만일 왕험성(王險城)이 멀리 대동강 남안에 있었다면, 강을 셋이나 건너고<대동강·대녕강·압록강> 그런
다음에 새(塞)에 다다르게 된 것이니 이른바 국경인 패수에 이르러 바로 건너서 새(塞)로 들어갔다는 것은
주장을 다 들어 보아도 사실에 부합하지 않게 되니 이것이 그 하나의 의문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면 고국원왕 13년(343) 뒤에 평양에 도읍을 하였고, 장수왕 13년(423)에
또 평양으로 천도하였는데 혹은 장안성(長安城)이라고 한다고 하였다.
또 《지리지》에서는 《고기(古記)》를 인용하여 평양(平壤)에서 장안(長安)으로 옮겨갔다고 하였다.
《통전(通典)·고구려전(高句麗傳)》에 이르기를, "동진(東晉) 이후에 그 나라 왕은 평양성에 거주하였으며,
또한 장안성이라고 한다. 산을 따라 이리저리 굽어 꺾이고 있으며 남쪽으로 패수를 내려다 보고 있다."
라고 하였다.
상기 두 조목의 기록에 의해 미루어 보건대, 동천왕 이후 도읍지로 한 평양은 틀림없이 지금의 평양이
아니다. 국내성은 원래 마자수(馬訾水)의 북쪽에 있기 때문에 호태왕이 비려(碑麗)를 치려고 염난수(鹽難水)
를 건너 비로소 그 지역에 이르게 된 것이다.
이제 이 비에서 말하는 왕이 하평양(下平壤)으로 순행하였다고 말하는 것으로 호태왕은 국내성에 도읍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지금의 평양에 도읍했던 것도 아님을 알 수 있다."라고 한 바 있다.
왕검성을 오늘날 평양으로 비정한 원조는 당나라 편찬된 《괄지지(括地志)》이다
《괄지지(括地志)》란 어떤 책인가?
이 책은 550권, 서략 5권으로 되어 있는데 당초 위왕(魏王) 이태(李泰)가 주편한 규묘가 매우 큰 지리서의
하나이다. 이것은 《한서(漢書)·지리지(地理志)》와 고야왕(顧野王)의 《여지지(輿地志)》 두 책을 편찬
상의 특징으로 흡수하되, 일종의 지리서 체재를 창립하여, 나중의 《원화군현지(元和郡縣志)》·
《태평환우기(太平寰宇記)》의 선하(先河: 효시)가 되었다.
위왕 이태(李泰)는 당태종의 네째 아들로서 선비를 좋아하고 문학을 사랑하였던 것으로 알려졌었다.
태종의 총애를 받아 그로 하여금 왕부에 문학관을 설치, 특히 스스로 학사들을 불러들여 학문을 깊이 연구
하도록 허용하였다.
정관 12년(638), 그는 사마 소욱(蘇勗)의 건의에 근거,《괄지지(括地志)》의 편찬을 주청, 태종으로부터
비준을 받았다. 그리하여 저작랑 소덕언(蕭德言)·비서랑 고윤(顧胤)·기실참군 장아경(蔣亞卿)·공조참군
사언(謝偃) 등을 주인(奏引)하여 그들에게 편찬 업무를 맡겼다.
그들은 5년간에 걸쳐 이 책을 완성하고 정관 16년(642)에 표를 올렸다.
《괄지지(括地志)》가 근거로 한 남본은
《서략(序略)》에서 언급한 《정관십삼년대부(貞觀十三年大簿)》
였다. 당고조 때 행정구획은 기본적으로 수(隋)의 구제를 답습하면서도 시세에 따라 정당히 처리하여
많고 적은 것을 폐치분합하였지만 도리어 종전보다 숫자가 많아지고 부실하였다.
정관 13년(639)에, 정치경제가 안정되자, 중앙집권적 봉건국가는 번영된 모습으로 들어나게 되었는바,
이러한 형세의 수요에 적응하기 위해 당조 정부에서는 전국 행정구역에 대해 전면 조정을 진행하였다.
상술한 《대부(大簿)》는 이러한 조정에 있어서 비교적 활실히 믿을 만한 원시 기록이었다.
당시의 정부는 전국을 10도(道)·358주(州)로 획분하고, 제주 가운데는 41개의 도독부(都督府)를 포함하여
총 1,551현(縣)을 관할하였다. 그 이듬해에 고창(高昌)을 평정하면서 또 2주 6현이 늘어났다.
이것이 바로 당조 전성시기의 행정구획 상황으로, 《괄지지(括地志)》는 이를 벼리로 해서 전면적으로
정구(政區)의 건치연혁을 서술함과 아울러, 산악형승(山岳形勝)·하류구거(河流溝渠)·풍속산물(風俗産物)·
왕고유적(往古遺跡) 및 인물고실(人物故實) 등등을 기록하였다.
중당 이후 투르번이 하황(河滉)을 점거하고 방진(方鎭: 군권을 장악하고 한 지역을 진수하는 군사장관을
가리키는 말로, 진대의 '持節都督', 당나라 때의 '觀察使'·'節度使'·'經略' 등과 같은 사람을 말한다)이
할거하매, 하(河)·삭(朔) 역시 화외(化外: 교화 · 은택이 미치지 못하는 곳, 즉 외지)가 되었으며 변방에서
멀리 떨어진 주· 현에는 일부 허명(虛名)만 있는 것도 있었고, 심지어는 방위조차도 분명히 알 수 없었다.
다행스럽게도 《괄지지(括地志)·서략(序略)》을 통해서 우리는 이러한 분야에 대한 기록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애석하게도 《괄지지(括地志)》는 남송 때 이미 산실되었다.
(이태 등 저·하차군 집교, 《괄지지집교(括地志輯校》, 중화서국, 전언 참조)
이 책은 방대한 자료였다. 그런데 남송 때 이미 없어져 버렸던 것을 청나라 가경 2년(1797) 손성연
(孫星衍)이란 학자가 일찍이 당·송인들이 《괄지지(括地志)》에서 징인한 유문(遺文)을 모아 8권으로
만들어 대남각총서(岱南閣叢書)중에 판각한 것이 저 《괄지지(括地志)》로서 최초요 유일한 집본(輯本)
이란 사실이다. 집본이란 실전되어 지금 전해지지 않는 것을 옛사람의 글이나 작품에서 그러모아 책
으로 재구성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우리 고대사와 관련된 기록으로는 권4 동이(東夷) 조에 네 꼭지가 들어 있다.
첫째, 조선(朝鮮)·고구려(高句麗)·예맥(濊貊)·동옥저(東沃沮)·부여(夫餘) 다섯 나라의 영토로서, 이들
나라는 동서가 1,300리, 남북이 2,000리요, 경사(京師: 당나라 서울 장안)으로부터 동쪽끝에 이르러
바다의 동쪽으로 대해(大海)간 400리, 북쪽으로는 영주(營州)의 지경까지 910리, 남쪽으로는 신라국
(新羅國)까지 600리, 북쪽으로는 말갈국(靺鞨國)까지 1,400리 떨어져 있다.
(朝鮮、高驪[穢]貊、東沃沮、[夫餘]五國之地, 國東西千三百里, 南北二千里, 在京師東。東至大海四百里,
北至營州界九百二十里, 南至新羅國六百里, 北至靺鞨國千四百里。)
*정의 원문과 약간의 차이가 있음(필자주)
둘째, 고구려(高句麗)의 치소는 평양성(平壤城)으로,
원래 한낙랑군(漢樂浪郡)의 왕험성(王險城),
즉 고조선(古朝鮮)이다.(高驪治平壤城, 本漢樂浪郡王險城, 卽古朝鮮也。)
셋째, 예맥(穢貊)은 고구려(高麗)의 남쪽, 신라(新羅)의 북쪽에 있으며, 동으로는 대해(大海)까지,
서로는(자료가 없다).(穢貊在高麗南, 新羅北, 東至大海, 西(原缺)。)
*넷째, 백제국(百濟國)의 서남쪽 발해(渤海) 가운데에 큰 섬 15개가 있는데 모두 읍락이 있고, 사람들이
살고 있으며, 백제(百濟)에 속한다.(百濟國西南渤海中, 有大島十五小, 皆邑落, 有人居, 續百濟。)
문정창 선생의 평양=낙랑군설에 대한 반박
일제 때 일본 사람들이 평양 토성터를 발굴, 바로
그곳이 낙랑군의 수현(首縣)인 조선현(朝鮮縣)이 있었던
곳이라고 하였다.
그 증거로 내세운 것은 거기서 발견된 수많은 봉니였다고 하는데 문제는 그 봉니가 위조된 것이었다.
이에 가담한 자들 가운데는 파렴치한 일제 공직자들도 있었으니 평양복심법원 검사정 관구반씨(關口半氏)
라든가 평양경찰서 근무 경부보 중촌삼랑씨(中村三朗氏), 상공회사 기사 제강영치씨(諸岡榮治氏) 등이
수집에 혈안이 되어 고가로 총독부 박물관에 매각했다고 하였다.
원래 봉니는 수신처에서 발견되어야 하는데 어떻게 발신처에서 거의 완벽하게 발견된 것이라고 하니 정말
믿을 수 있겠는가. 조선총독부 발물관은 낙랑태수인(樂浪太守印)·조선우위(朝鮮右尉)·남한승인(言+冉邯
丞印)· 승지승인(增地丞印) 등 무릇 《한서(漢書)·지리지(地理志)》에 기록되어 있는 25개의 낙랑속현
중 23개에 달하는 현명의 봉니들을 고가로 구입하여 평양박물관(平壤博物館)과 덕수궁박물관(德壽宮博物
館)에 귀중하게 보관하고 있는데 그 총수가 76개에 달한다고 하였다.
봉니의 위조에 관해서는 일본사람 등전량책(藤田亮策)의 《조선고학연구(朝鮮考古學硏究)》에서 여지
없이 폭로되었는데 그 가운데서 대표적인 위조 사례로서, 한조는 대현(大縣)의 장을 영(令), 소현(小縣)의
수(守)를 장(長)이라 하였으며, 《한서(漢書)·예문지(藝文志)》는 동이령(東暆令)이라고 하였다.
그러하거늘 조선총독부 박물관은 한나라 관제에도 없는 동이장(東暆長)이라는 이른바 봉니를 보관하고
있다고 하며, 낙랑태수의 관명은 태수(太守)였고, 대윤(大尹)이라 하지 아니하였다.
대윤(大尹)은 왕망 연대의 지방관의 관명이었는바, 왕망은 낙랑군(樂浪郡)을 낙선군(樂鮮郡)이라고 개칭
하였다. 그러하거늘 관야정(關野貞) 등은 낙랑대윤(樂浪大尹)의 봉니가 발견되었다고 여러 곳에서 말하
였고 《조선고적도보(朝鮮古蹟圖寶)》에는 이것을 게시하고 조선총독부 박물관은 그것을 고가로 매수
하여 소중하게 보관하여 학계의 웃음거리가 되었다고 하였다.
필자는 본란을 통해 정인보 선생의
《조선사연구(朝鮮史硏究)》 저서를 통해 낙랑봉니 위조 행태 등에
관한 글을 소개한 적이 있다.
문정창 선생은 당시까지 존재하였던 조선총독부 박물관(국립박물관의 전신)의 봉니매입에 관한 전표를
분석하여 다음과 같이 폭로했다.
낙랑태수장(樂浪太守章) 봉니 1개, 매수가격 150원, 대정 11년 10월 30일, 납입자 산전재차랑(山田釮次郞)
낙랑태수장(樂浪太守章) 봉니 1개, 매수가격 100원, 소화 6년 12월 12일, 납품자 김성도(金聖道)
낙랑대윤장(樂浪大尹章) 봉니 1개, 매입가격 100원, 소화 9년 2월 12일, 납품자 김성도(金聖道)
문정창 선생은 봉니에 대하여 그것이 어떻게 만들어지는 것이며, 일제 때 위조된 봉니가 어떻게 조선
총독부 박물관에 매입되었는지 그 과정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봉니는 한대에 있어서 전달하는 공문서의 비밀을 유지하기 위하여 널리 사용되었던 일종의 토제봉랍
(土製封蠟)인 것이다. 즉 공문이 기입되어 있는 목판을 다른 요형(凹形)의 목판속에 엎어 넣고 양판을
노끈으로 묶은 다음 그 묶은 매듭을 특수 진흙으로서 봉하고 그 봉니 위에 발신관(發信官)의 관인을 찍어
그 봉표(封票)로 하여 제삼자가 개봉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봉니가 고고학의 대상으로서 오르게 된 것은 19세기 중엽이었으며, 1900년대에 이르러 서역학술조사대
(西域學術調査隊)가 니야지방의 유사(流沙) 중에서 원형을 보유한 봉니류를 얻게 된 이래 비로소 고고학
적인 가치를 인정받게 되었던 것이다.
봉니는 봉표임과 동시에 발신관의 관인이 찍혀 있었으니 만일 평양에서 낙랑관계의 봉니가 나왔다는 설이
성립된다면, 평양=당대 낙량평양설은 부인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인하여 당시의 공인(公認) 고분도굴업자 산전재차랑(山田釮次郞)이 등장하였으며, 산정재차랑(山田釮次郞)
은 날조한 봉니 낙랑태수장(樂浪太守章)으로써, 조선총독부 박물관으로부터 일금 150원(오늘날의 약
1,000천원, 이 책 출판은 1969년도임, 필자주)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한 바 산전재차랑(山田釮次郞)
의 그 소위 낙랑태수장(樂浪太守章)에는 금서룡(今西龍)마저 날조라하고 크게 반발하였다."라고 하였다.
(문정창, 《고조선사연구(古朝鮮史硏究)》, 백문당, 294쪽 참조)
필자도 어릴 때 엠원총 꼬질대를 이용하여 만든
도굴장비를 가지고 도굴을 하러 다니는 호리꾼들을 따라
다니면서 그들이 하는 짓거리를 눈여겨 본 적이 있다.
야트막한 산 자락에 옛날 무덤이 있을 만한 곳을 여기저기 쑤시고 다니는 그들을 보았으며 어느 때는
밥사발 같은 것을 파내면서 한 껀 했다고 쾌재를 부르던 그들의 모습을 유심히 살펴 본 적도 있었다.
그들은 바로 일제때부터 횡행하던 우리의 매장 문화재 도굴 사범들이었다.
문정창 선생은 또 말하기를, "미천왕(美川王)은 일찍이 태조대왕(太祖大王) 69년(121) 수성(遂成)이 탈환
한 현도군을, 그후 산상왕(山上王) 연우(延友) 때(198)에 한에게 빼앗겼으므로 그것을 회수할 양 즉위
3년만에 친히 현도군을 격파하고 포로 8천 명을 잡아다가 평양(平壤)에 이치하였다.
이 8천 명의 포로를 이치한 곳이, 곧 일본학자들이 25현을 통관하는 대낙랑군(大樂浪郡)의 치지(治址:
치소)라고 주장하는 대동강면의 토성이었는지의 여부는 미상이다.
그러나 넓이 7만~8만 평 소면적의 주위에 토벽을 둘러싼 이 지점은 8천 명 포로의 수용소로서 적당한
규모의 것이었으리다."라고 주장한 바 있다.(문정창, 전게서, 282쪽 참조)
우리는 《삼국사기(三國史記)·고구려본기(高句麗本記)》를 통해서 다음과 같은 기록을 확인할 수 있다.
미천왕 3년(302) 가을 9월에, 왕이 군사 3만을
거느리고 현도군(玄莵郡)을 침입하여 8천 명을 노획하여
평양(平壤)으로 옮겼다.
미천왕 12년(311) 가을 9월에, 장수를 보내어 요동의 서안평(西安平)을 습격하여 취하였다.
미천왕 14년(313) 겨울 10월에, 낙랑군(樂浪郡)을 침입하여 남녀 2천 명을 사로잡았다.
미천왕 15년(314) 가을 9월에, 남쪽으로 대방군(帶方郡)을 침입하였다.
미천왕 16년(315) 봄 2월에, 현도성(玄莵城)을 쳐부수고 많은 사람들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고국원왕 2년(385) 여름 6월에, 왕이 4만의 군사를 출동시켜 요동을 습격하고 마침내 요동(遼東) ·
현도(玄莵)를 함락, 남녀 1만여 명을 포로로 하였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적군을 사로잡아 포로로 관리한다는 것은 인도적인 처사이다.
그러나 고구려는 이와 같이 대외 경략을 통해 사로잡은 포로들을 평양으로 후송하여 어떤 식으로든지
관리했을 것이 아닌가.
6.25전쟁 때 미군은 포로로 한 인민군과 중공군 수만 명을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수용하고 관리했다.
물론 제네바협정을 충실히 이행하기 위한 것이었을 뿐만 아니라 나중에 양측이 포로교환을 하는 데도
일조를 했다. 포로들을 관리하려면 이들을 수용한 시설이며 관리 인원 등 엄청난 인적 · 물적 시설이
필요로 하였을 것이다.
그들을 놀고 먹일 수는 없지 않은가. 아마 그 포로들을 이용해서 평양성을 쌓은 데 동원했을 것으로 보인다.
고산자 김정호(金正浩)의 평양설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를 완성했고,
《대동지지(大東地志)》라는 지리서를 쓴 고산자 김정호 선생의
평양설을 들어 보기로 하자.
"생각건대, 《삼국유사(三國遺事)》에 평양(平壤)이 세 조선의 서울이라고 하였고, 《통감집람(通鑑輯覽)》
패수(浿水)의 주에서 조선국 평양성 동쪽, 오늘날 대통강(大通江)<생각건대 대동강이다>이라는 곳에
있다고 하였으며, 왕검성(王儉城)의 주에서는 곧 평양성으로 기자의 고도이며 오늘날 조선국의 평양부
(平壤府)라고 말했는데, 이는 《수·당사(隋唐史)》 및 《동사(東史)》에 기록되어 있는 대로 기록했을
뿐이다.
평양이라 일컫게 된 것은 고구려 동천왕(東川王) 때로부터 시작되었으며, 곧 오늘날의 요양(遼陽)이다.
장수왕(長壽王)이 수도를 남으로 옮긴 뒤에 옛 서울인 평양(平壤)과 패수(浿水)를 새로운 서울에다
모칭한 것을 수·당에서도 역시 그대로 답습하여 이렇게 불렀을 뿐이다.
(按《遺事》以平壤爲三朝鮮故都, 《通鑑輯覽》浿水註: 在朝鮮國平壤城東, 今曰大通江<按大同江>; 王儉
城註卽平壤城。箕子故都, 今朝鮮國, 爲平壤府云, 此因《隋、唐史》及《東史》而記之耳。平壤之號, 始自
高句麗東川王, 卽今遼陽也。長壽王南遷之後, 冒稱舊都平壤、浿水之號於新都。隋唐亦因稱之耳。)
대개 유(幽)·영(營) 2주는 주(周)나라 때 변방지역으로 기자(箕子)가 수봉했다는 그 영토의 넓이는 조(曹)·
위(衛)·진(陳)·정(鄭)나라를 넘지 못하는 것으로 생각되는데 어떻게 이와같이 여러 주(州)를 뛰어넘고 또
십 수개의 잡호(雜胡)들이 차지하고 있는 지역을 벗어나서 오늘날의 평양((平壤)에 도읍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전국시대 말에 연나라에 공파당해 요좌(遼左)로 옮겨 간 뒤 위만(衛滿)이 도읍했던 곳이 곧 험독(險瀆)
으로, 한나라의 양평(襄平)이라고 하고, 또 평주(平州)라고도 하는 바로 이곳이야 말로 고구려의 옛 평양
이엇던 것이다.
비유컨대, 강좌(江左: 양자강 하류의 동남지역)의 송(宋)· 제(齊)·양(梁)·진(陳)은 연(兗)·예(豫)·청(靑)·
서주(徐州)의 원래 나라가 아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압록강 동쪽의 낙랑(樂浪)·평양(平壤)은 영원(寧遠)
과 금주(錦州)·요녕(遼寧)과 심양(瀋陽)의 옛 고을(舊邑)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단지 일시적으로 교치(僑置: 빼앗긴 지명을 그대로 쓰면서 그렇치 않는 것처럼 가장하는 것)된 주(州)를
근거로 수시로 그 치소가 옮겨가게 되면서 신·구(新舊)의 사실이 서로 어긋나게 되고,
동·서(東西)의 땅의 경계가 서로 서로 바뀌게 되었던 것이다."라고 하였다.
(蓋幽、營二州, 周時荒裔也。箕子受封, 其幅員, 想不過曹、衛、陳、鄭, 而豈跨此數州之地。又越十數雜胡,
而建都於今平壤乎? 戰國之末, 爲燕所破, 遷于遼左, 後爲衛滿之所都者, 卽險瀆。而漢爲陽平, 又爲平州,
是高句麗之舊平壤也。比如江左之宋、齊、梁、陳, 非兖、豫、靑、徐之本國, 鴨東之樂浪、平壤, 非寧錦、
瀋遼之舊邑, 徙憑一時僑置之州, 無常遷徙之置, 新舊事實相錯, 東西之界相換。)
(김정호 저, 《대동지지(大東地志)》(영인본), 아세아문화사, 567쪽 참조)
한사군의 위치- 낙랑군은 하북성 창려현에 있었다.
한사군의 위치
*낙랑군 치소: 초기에는 요양(遼陽), 후기에는 갈석산 창려현 부근으로 이동
[※ 참조: 이덕일,《한국사 그들이 숨긴 진실》,역사의 아침.]
1. 한사군 호칭은 다양: 같은 《한서》에도‘2군’,
‘3군’, ‘4군’으로 제각기 기록
《사기》의 저자 사마천은 朝·漢 전쟁의 목격자였음에도 “이로써
드디어 조선을 정벌하고 사군(四郡)으로
삼았다”라고만 적고 사군의 개별적 이름을 적지 않았습니다.
한사군의 이름은 위만조선과 漢과의 전쟁이 끝나고, 200여년 후 반고(班固)가 편찬한
《한서(漢書)》
<무제(武帝) 본기>에 처음 낙랑군(樂浪郡)·임둔군(臨屯郡)·진번군(眞番郡)현도군(玄菟郡)이란 명칭이
나타납니다.
전쟁의 목격자 사마천이 적지 않았던 이름을 200여년 후의 반고는 어떻게 적을 수 있었을까?
반고는 흉노 정벌에 나섰던 두헌(竇憲)을 따라 종군했던 데서 알 수 있듯이 중화(中華)사관이 강한 인물
이었습니다.
《한서》<지리지>에는 “현도·낙랑은 무제 때 설치했다”고 2군으로 적고 있으며,
<오행지(五行志)>는
“두 장군이 조선을 정벌하고 삼군을 열었다”고 3군으로 적었고, <무제본기>는 4군으로 적었습니다.
같은 《한서》인데 <지리지>에는 2군, <오행지>에는 3군, <무제 본기>에는 4군으로 제각기 기술하고
있는
것이죠.
이는 행정기구가 2군(낙랑·현도) ⇒
3군(낙랑·임둔·현도) ⇒ 4군(낙랑·임둔·진번·현도) ⇒ 2군(낙랑·현도)
⇒ 1군(낙랑)으로 여러차례 조정되었음을 말합니다.
초기에 낙랑군은 난하 유역에서 대릉하 유역의
왕검성[북진 일대]까지 가장 넓은 영역이었습니다.
그리고 현도군은 의무려산 북방의 부신(阜新) 서부지역에서 대릉하 상류 유역 사이에 있었습니다.
이곳이 '서안평(西安平)'입니다.
서안평은 동이족과 漢족 간에 이 요충지를 확보하기위하여 수없이 전투를 벌인 격전지입니다.
<*현행 통설은
서안평을 압록강 북쪽 '단동(丹東)' 일대라고하나, 착오이므로 시정되어야 함.>
우리가 알고 있는 한사군의 낙랑·임둔·진번·현도라는 이름은 漢 무제 때 처음 생긴 것이 아닙니다.
이들 이름은 단군조선의 제후국[거수국(渠帥國)] 중에 있었던 동이족의 종족 이름이며, 또한 이들 종족이
살았던 부락이름이기도 합니다.
다만, 漢 무제가 위만조선을 멸한 후, 단군조선의 제후국이었던 이들 부락을 漢나라의 郡이라는 행정기구로
바꾸고, 행정관을 漢족으로 임명한 것이죠.
처음엔 관리들만이 漢족이었지만 점차 부락민 중에서 漢족 비율이 늘어나면서 동이족은 동쪽으로 이주해
갑니다.
한국과 중국
학계에서 가장 논란이 많은 고대사 부분이 「한사군의 위치」에 관한 것입니다.
동북공정도 「한사군의 위치」에 바탕을 두고 논리를 개발한 것입니다.
2. 수많은 漢족 들 고구려로 망명
단군조선 영역의 서부전선을 지키고 있던 위만조선이
BC108년에 무너지면서 제방이 터진 것처럼, 漢족
들의 이주민과 망명객들이 만리장성[秦長城] 너머 동쪽으로 밀고 들어왔지요.
망명객 중에는 漢족 지배층도 많았습니다. 이렇게 기원 전후에 만주와 한반도로 밀려온 漢족들이 수십만
명에 이릅니다. 이들 중에는 고구려에 의하여 잡혀온 포로들도 있었습니다.
이들이 들고온 유물들이 엄청 많았을 것입니다.
그러니 고구려 강역에서 漢족계 유물이 나오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이런 유물 속에 봉니(封泥)와 호구를 기록한 목간( 2005년 평양에서 목간 출토: 낙랑군 25개현의 인구
추정가능)이 있었다고 봅니다.
《삼국사기》고국천왕 19년(197년)조에 “중국에
대란이 일어나서 漢족들이 난을 피해 내투(來投)하는
자가 심히 많았다”고 전합니다.
또한 산상왕 21년(217)조에는 “漢나라 평주(平州) 사람 하요(夏瑤)가 백성 1천여 가(家)를 이끌고 와서
의지하므로 그들을 받아들여 책성(柵城)에 살게 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황해도 안악군 오국리 안악 3호분의 고분 벽화에는 동수(冬壽)라는 인물에 대한 묵서명(墨書銘)이 나옵
니다.
《자치통감》<진기(晉記)>에 따르면 동수는 연(燕)나라의 왕위 계승 전쟁에 가담했다가 패배하자 곽충
(郭充)과 고구려로 망명한 인물이죠.
이 명문 기사가 없었다면 안악 3호분도 한사군
유적으로 둔갑했을 것입니다.
평남 강서군 덕흥리(현 남포직할시
강서구역 덕흥리) 무덤에서는 요동·현도태수를 지낸 동리( 冬利)라는
인물의 기록도 있습니다.
장수왕 24년(436)에는 북연(北燕) 왕 풍홍(馮弘) 등이 망명해 왔는데 그 행렬이 전후 80리나 되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세계 제국의 성격을 갖고 있던 고구려에 많은 漢족 지배층들이 망명해 왔습니다.
고구려 강역에서 漢족계 유물이 나온다고 무조건 한사군 유물이라고 해석할 수는 없다는 것이죠.
3. 한사군의 위치에 관한 두 학파의 주장
중국은 동북공정에서 만주는 물론 한반도 북부까지
중국사의 영토였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북한 급변사태시 군사 개입할 수 있는 역사적 근거를 마련한 것입니다.
그 핵심 논거는 漢나라가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설치했다는 「한사군의 위치」입니다.
한사군의 중심지인 낙랑군은 위만조선의 수도였던 왕검성에 있었는데, 그 왕검성의 위치가 북한의 평양
지역에 있었다는 것이죠.
나머지 3군(진번·임둔·현도)도 한강 이북에 있었으므로 한강 이북이 곧 고대 중국의 식민지였다는 주장
입니다.
이처럼 한사군의 위치가 북한지역에 있었다고 본다면, 동북공정에 대응할 방안 마련이 어렵습니다.
또한 북한이 갑자기 붕괴되는등 급변 사태가 발생하는 경우, 중국은 한편으로 남북통일을 적극 방해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북한을 중국으로 흡수하기 위하여 묘한 술수를 부릴 것입니다.
그것은 북한에 친중국 괴뢰정권이 들어서도록 공작한 다음, 그들로 하여금 중국에 흡수되기를 바란다는
외교문서를 정식으로 보내도록 하는 수법입니다. 티베트와 몽골을 흡수하면서 써먹은 수법입니다.
최근 북한은 남한보다는 중국으로 기울고 있습니다. 참으로
심각한 문제입니다.
그런데 우리 사학계에는 한사군이 북한지역에 있었다고 주장하는 학자가 있습니다.
중국의 동북공정에 찬동하고 있는 부류이지요. 이에 반대하는 학자 부류도 있습니다.
여기에서는 편의상 전자를 ‘수구학파’라 하고, 후자를 ‘진보학파’라
부르겠습니다.
수구학파는 소위 정통 사학자[강단사학자. 식민주의사학자]라고 말하는 보수주의 주류 학자들입니다.
이들은 친일 사학자 이병도의 주장을 추종하며, 무의식중에 중국의 동북공정 논리를 돕고 있습니다.
이들의 주장이 정설이라면서 빛바랜 옛 이병도
견해를 고수하고 있습니다.
수구학파들은 북한 지역에 있는 중국계 유적·유물들을 ‘한사군
한반도설’의 결정적 근거로 삼고 있습니다.
그런 중국계 유적·유물로는 토성, 분묘, 석비(石碑:점제현 신사비), 봉니, 기와 등 이 있지요.
수막새기와가 평양지방의 대동강 유역 낙랑토성지에서출토되었다고 합니다.
수막새의 테가 두꺼우며 가운데 원형(圓形)을 중심으로 4구로 나누고 그 구역 안에 고사리무늬나 글자가
새겨 있습니다.
장생무극(長生無極), 예관(樂浪禮官), 낙랑부귀(樂浪富貴), 천추만세(千秋萬歲), 대진원강(大晋元康) 등
전자(篆字)로 양각(陽刻)한 것이 있고, 구름의 변형이나 꽃잎과 고사리 같은 무늬를 배치한 것도 있습니다.
이 기와는 기본적으로 한(漢)나라 풍 기와를 모방한 것이며 한반도에 있는 가장 오래된 기와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기와의 춭토경위가 불명합니다. 수입해 왔는지 모방하여 후대에 만들었는지도 불명합니다.
조선총독부에 의하여 포괄적으로 조작된 '한사군 한반도설' 음모작 중의 하나라고 봐요.
무거운 점제현 신사비를 배로 실어올 정도인데, 조그만 기와를 가지고 오는 것은 너무 쉬운
일입니다.
조선총독부에서 1915년 <조선고적도보>를 간행하면서 낙랑·대방군 유적으로 못 박은 후 현재까지 정설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진보학파는 민족주의사학자[재야사학자]라고 부르는데, 이들은 고대사 사적지를 직접 답사하고, 최근
발견된 유적·유물을 새롭게 해석하는 등 창의적 학자들입니다.
대학에서 사학을 전공하지 않은 학자들도 있습니다. 이들은 북한 급변사태시 한강 이북 땅을 흡수하려는
중국에게 역사적 빌미를 주지 않기 위하여 노력하는 학자들입니다.
윤내현, 우실하, 이덕일 등의 학자와 북한의 리지린, 리진순 등의 학자들이 이 부류에 포함됩니다.
곧 수구학파의 아성이 진보학파에 의하여 무너지리라고 봅니다.
4.
수구학파와 진보학파의 견해차이
‣ 목곽묘(木槨墓)
수구학파는 북한이 850여기나 발굴한 목곽묘를 한사군의 무덤이라고 하지만, 진보학파와 북한학자는
한사군 무덤이 아니라고 합니다. 한사군이 설립되기 이전부터 있었기 때문이죠.
북한의 리진순은 ‘평양일대 락랑무덤에 관한 연구’에서 “지금까지 발굴된 자료에 의하더라도 기원전 3세기
이전부터 기원전 1세기 말까지 존재한 것으로 볼 수 있다”고 썼습니다.
목곽묘는 낙랑군이 설치되었다는 서기전 108년보다 훨씬 앞선 시기부터 축조되기 시작해 한사군이 설치
된 지 오래지 않아 사라진 무덤이므로 한사군 유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 점제현신사비
점제현 신사비는 일본인 고고학자 세키노 다다시(關野貞)가 1913년 평남 용강군 해운면 운평동(현재 평남
온천군 성현리 어을동)에서 발견했다고 합니다.
《한서》<지리지>에 점제현은 낙랑군의 25개 속현 중의 하나라고 했습니다.
수구학파는 이를
근거로 이 신사비가 있는 용강군이 낙랑군 지역이었다는 결정적 증거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진보학파는 다음과 같은 이유로 일제가 점제현신사비를
다른 곳에서 옮겨다 놓았다고 보고 있습니다.
⑴. 치소(治所)는 방어에 유리한 지형에 있기 마련인데,
대동강변의 토성동은 사방이 탁 트인 낮은 구릉지
로서 적의 공격을 방어할 수 있는 지형이 아니라는 점.
《사기》<조선 열전>에 서한(西漢)이 5만명의 대군을 이끌고 공격하자, 고조선의
"우거왕(右渠王)은
군사를 일으켜 험준한 지세를 이용해 대항했다.(右渠發兵距險)" 그리고 우거왕은 지키고 있던 왕험성
(王險城: 왕검성)을 나와 적을 공격하니, 적군들은 흩어져 도주하고 양복(陽僕)장군은 "산 속으러 들어가
10여일을 숨어지냈다.(遁山中十餘日)"라고 적고 있습니다.
그런데 대동강변 토성 주위에는 험준한 지세나 10여일간 숨어지낼 깊은 산도 존재하지 않으며,
또 《사기》는 “우거왕이 견고하게 성을 지키니, 여러 달이 되도록 성을 함락할 수 없었다.”고 적고 있는데,
대동강변 토성은 반나절도 지키기 어려운 곳이지요.
⑵. 비석이 발견된
지역은 현재 온천군인 데서 알 수 있듯이 유명한 휴양지이고 비석이 있던 곳도 사방이
탁 트인 평야 지대임에도, 이런 곳에 2000년 동안 서 있던 비석을 아무도 못 보았으나 세키노가 단번에
발견했다는 자체가 의문이라는 점.
⑶. 조선총독부에는
한반도의 역사를 조작하려는 불순한 의도가 있었다는 점.
첫째, 조선총독부는 평양일대의 유물은 최씨의 낙랑국 유물임에도, 漢의 낙랑군 유물이라고 집요하게
주장하고, 1915년 《조선고적도보(朝鮮古蹟圖譜)》를 발간하면서 이 지역을 정책적으로 낙랑군 태수가
근무하던 치소로 확정지었습니다.
이는 조선총독부의 의도가 낙랑군의 실제 치소를 찾자는 게 아니라 한국사의 시작을 중국의 식민지로
만드는데 있었기 때문입니다.
둘째, 중국과 일본은 예부터 역사를 정치적 목적으로 이용한 전통이 깊은 나라들이죠.
⑷. 비문 내용에 의하면, 비석을 세운 곳에는 이미 사당과 왕릉이 있었는데, 대동강변 토성동 일대에서
그러한 유적이 발견된 일이 없으며, 또 풍수지리상 사당이나 왕릉이 있을 만한 곳이 아니라는 점.
⑸. 비석을 발견한
다음, 동네 아이와 찍은 사진을 정상적 시각으로 볼 수 없다는 점.
역사적 유물을 획기적으로 발견하고 찍은 사진이 정상이 아니지요.
비석을 최초로 발견한 세키노 등 주역들은 빠지고 어린아이를 증인으로 하여 찍었다는 사실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이는 마치 히말라야 정상을 등정한 산악인이 셀퍼에게 깃발을 들게 하고 찍은 기록사진을 보는 것처럼
해괴한 일입니다.
그 이유는, 비석을 하북성 갈석산 부근(?)에서 배로 실어와
역사를 조작했으니, 차마 그 앞에서 자신의
얼굴이 들어간 사진을 찍을 수 없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조선총독부의 지령으로 역사를 조작했지만,
학자로써의 양심이 조금은 남아 있었을 것입니다.
⑹. 비석이 발견된 지역은 2천여년 전 물이 들어왔던 곳이므로,
그곳은 비석을 세울 수 없는 지역이라는 점.
<*손보기>
⑺. 비석의 성분을 분석한 결과 대동강 유역에서 생성된 화강암이 아니라는 점.
<*북한의 《조선고고연구》(1995년 제4호) >
지금도 온천군 부근에는 질 좋은 화강암이 많아 평양일대에서는 이 화강암을 많이 이용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북한 학자들은 비석을 만드는 석재를 가까이 있는 자기 지방의 것을 사용하지 않고, 먼 다른 지방
에서 가지고 올 이유가 없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2000년 전의 비석 기초에 시멘트를 사용했는데, 이는 결정적 조작의
증거로 봅니다.
‣ 임둔태수장(臨屯太守章) 봉니는 임둔군이 요령성 금서시(錦西市)일대라는 증거
봉니(封泥)란 대나무 죽간 등의 공문서를 상자에 넣어 묶은
끈을 봉하고 도장을 찍은 진흙 덩이를 뜻합니다.
조선총독부 박물관이 당시로서는 거금인 100~150원을 주고 매입했다는 봉니가 200여개에 달합니다.
이들은 요양(遼陽)일대 또는 그 서쪽에서 수집한 것이거나 위조품이라고 봅니다.
수구학파는 이들
봉니가 평양일대가 낙랑이었음을 입증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진보학파는 봉니가 위조품이거나 다른 곳에서 가지고 온 것으로 봅니다.
일제가 100원에 구입한 ‘낙랑대윤장’(樂浪大尹章)’ 봉니는 위조품이라는 결정적 증거이지요.
전한(前漢)을 멸망시키고 신(新)나라를 개국한 왕망(王莽)은 ‘낙랑군’을 ‘낙선군’으로 개칭하고 ‘태수’라는
관직명을 ‘대윤(大尹)’으로 고쳤습니다.
왕망 때 만들어진 봉니라면 ‘낙선대윤장’이어야 하는데 ‘낙랑대윤장’인 것은 위조품이기 때문이라는 것입
니다.
박지원이 1780년에 청나라 열하를 여행하고 돌아와 쓴 《열하일기》에도 중국인이 위조품을 만드는
기술을 자세히 소개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중국은 위조품 천국입니다.
1997년 중국 요령성 금서시(錦西市) 연산구(連山區) 옛 성터에서 발견된
‘임둔태수장’(臨屯太守章) 봉니는
조작 시비가 일지 않는 유일한 봉니입니다.
길림대 고고학과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복기대 박사는 <백산학보 61집>(2002)에 ‘임둔태수장 봉니를 통해
본 한사군의 위치’를 발표했습니다.
봉니 출토지는 물론 근처의 대니(大泥) 유적과 패묘(貝墓) 유적의 출토 유물을 종합적으로 검토한 논문입
니다.
그는 전국시대(서기전 475~221)에는 금서시 유적에서 고조선 계통의 유물들이 주로 발굴되다가, 전한
중기부터 후한 시기에 이르면 고조선의 특징은 약해지고 중국 특징의 유물이 주류를 이룬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뒤의 시기는
한사군 설치 시기와 일치합니다.
[중국 요령성 금서시에서 1997년 발견된 임둔태수장(臨屯太守章)
봉니]
이 임둔태수장 봉니가 '임둔군이 요령성 금서시 일대 에 있었다.'는 사실을 입증하고 있습니다.
5. 낙랑군 위치는 하북성 창려현 갈석산 일대
⑴. 수구학파가
주장하는 위치
수구학파는 한사군의 낙랑군이 평안남도와 황해도
북부에 걸쳐 있었고 그 치소(治所:낙랑태수부)는
대동강변의 토성동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토성동은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1913년 세키노(關野貞) 같은 식민사학자들에 의해 낙랑군의 치소,
곧 옛 조선현으로 만들어졌지만 식민사학자들 사이에서도 반론이 있었습니다.
고대 수도는 방어시설이 가장 중요한데 대동강변 토성은 사방이 탁 트인 낮은 구릉지로서 적의 공격을
방어할 수 있는 지형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사기》<조선 열전>은 고조선의
우거왕이 “험준한 곳에서 저항했다”고 적고 있지만 대동강변 토성
주위에는 험준한 곳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사기》<하본기 태강지리지>에 “낙랑군 수성현(遂城縣)에는 갈석산(碣石山)이 있는데
(만리)장성이
시작되는 지점이다”라고 했습니다. 이는 수성현, 갈석산, 만리장성이라는 세 개의 조건을 만족시키는 곳이
낙랑군 지역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수구학파는 이 수성현을 황해도 수안(遂安)으로 비정하고 있습니다.
이병도가 그렇게 보았기 때문이죠. 이병도 역시 조선총독부 산하 조선사편수회의 이나바 이와기치(稻葉
岩吉)가 일제시대 <사학잡지>에 쓴 ‘진장성동단고(秦長城東端考:진 만리장성의 동쪽 끝에 대한 논고)’
에서 황해도 수안을 만리장성의 동쪽 끝으로 본 것을 비판없이 따른 것에
불과합니다.
⑵. 중국사서 기록에 의한 위치
‣ 반고
《한서》<설선(薛宣)열전>: “낙랑은 유주(幽州)에 속해 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한나라 유주는 지금의 북경 일대였습니다.
‣ 《후한서(後漢書)》<광무제 본기>: “낙랑군은 옛
조선국인데, 요동에 있다”고 설명하고 있는데,
현재는 요하(遼河)를 기점으로 요동과 요서(遼西)로 나누지만 과거의 요하는 현재보다 훨씬 서쪽이었습
니다. 현재의 요하를 기준으로 삼더라도 만주 요동이 평안남도나 황해도가 될 수 없음은 물론입니다.
‣ 《후한서》<최인 열전>: “장잠현은 낙랑군에 속해 있는데 요동에 있다”고 쓰고 있습니다.
고대의 어떤
사료도 낙랑군을 한반도 내륙이라고 쓰지 않았습니다.
‣ 《사기》<하본기 태강지리지>: “낙랑군 수성현(遂城縣)에는 갈석산(碣石山)이 있는데
(만리)장성이
시작되는 지점이다”라고 했습니다.
수성현, 갈석산, 만리장성이라는 세 개의 조건을 만족시키는 곳이 낙랑군 지역이 되는 것입니다.
[갈석산과 갈석산 각자]
《사기》<진시황 본기> 32년(서기전 215)조는 “진시황이 갈석산에 가서…석문(石門)에 비를 새기게
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몽염(蒙恬)열전>은 ‘시황이 장성을 쌓게 했는데 임조에서 시작해 요동까지 이르렀다’고 썼고, 고대 역사
지리서인 《수경주(水經注)》는 “진시황이 만리장성을 쌓게 했는데 임조에서 시작해 갈석까지 이르렀다”
라고 적고 있습니다. 고대 중국인들은 갈석산을 요동지역으로 보았던 것입니다.
갈석산 부근의 산해관(山海關)이 만리장성의 동쪽 끝입니다.
《수서(隋書)》<지리지>는 수성현은 11개 속현이
있었는데 그 중 하나가 신창(新昌)현이라고 적고 있습
니다. 신창현은 후제(後齊) 때 조선현을 편입한 곳입니다.
신창현은 수나라 문제 십팔년(598) 때 노룡현으로 개칭되는데 《신당서》<지리지> 하북도(河北道)조는
창려현이 노룡현에 속한다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즉 수성현의 속현이었던 신창현이 당나라 때 창려현이 되었다가 현재까지 이어지는 것입니다.
현재의 창려현이 과거 수성현의 일부였다는 의미입니다.
이처럼 ‘수성현·갈석산·만리장성’이라는 세 조건에 부합하는 지역은 중국 하북성 창려현입니다.
창려현에 갈석산이 있고 만리장성이 있지요. 이곳이 낙랑군이 위치한 곳입니다.
6. 결어
《사기》《한서》같은 고대 역사서가 의문투성이로 기록하고 있는 한사군을 한반도 내에 있었다고 확고
하게 각인시킨 세력은 물론 일제 식민사학이었습니다.
한국사의 시작을 식민지로 만들려는 의도였지요.
이를 한국 수구학파가 현재까지 정설로 떠받들자 중국은 ‘이게 웬 떡이냐’하고 동북공정에 그대로 차용해
‘한강 이북은 중국사의 영토였다’고 주장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중국과 일본은 예부터 역사를 정치적 목적으로 이용한 전통이 깊은 나라들입니다.
중국은 고대부터 춘추필법이란 미명 아래 사방의 다른 민족들에 대해 의도적으로 비하하는 서술을 해왔
습니다.
《한서》<위현(韋賢)열전>은 “동쪽 조선을 정벌함으로써 흉노(匈奴)의 왼쪽 팔을 끊었다”라고 적고
있는데 조선과 흉노의 연관성은 차치하고라도 다른 민족의 이름을 ‘오랑캐(匈) 종(奴)’이라고 적는 데서
중국인들의 비뚤어진 시각을 알 수 있습니다.
서기 720년에
편찬된 《일본서기(日本書紀)》 역시 19세기에 나가미 지요(那珂通世)가 시조 신무(神武)
의 즉위년이 조작되었다는 참위설(讖緯說)을 주장한 것처럼
역사왜곡에 있어서는 뒤지지 않는 나라입니다.
중화 패권주의 사관의 발로인 중국 동북공정은 20세기 일제
황국(皇國)사관의 21세기 판에 불과합니다.
해방 60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의 눈이 아니라 타자의 눈으로 그린 것을 한국사의 시작이라고 가르친다면
후세에게 무슨 할 말이 있겠습니까.
◈ 위만조선의 멸망과 한사군의 등장이 곧 단군조선(고조선)의
멸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단군조선은 멸망한 것이 아니라 분열되었다.
분열되어 부여, 고구려 , 백제 등의 새로운 열국시대를 열어간
것이다.
일연대사(一然大師)의 암호 <북대방과 남대방의 위치>
삼국유사에 기록된 북대방과 남대방에 대한 기록이다. 고대사의 원형을 복원하기 위해서는 이 대방에
대한 진상을 해결하지 않고는 소모적인 논쟁만 있을 뿐이다.
너무도 엉뚱한 곳에 숨겨져 있던 사실을 밝혀내기 까지 수많은 난관이 있었지만 이정도만으로라도 독자
님들께 부끄러움을 면할수 있다면 다행으로 생각한다.
따라서 옛날 한반도를 부분지배했었다고 주장하는 중국은 엉뚱한 야욕을 버리기를 권한다.
진(동.서)의 평주 5군중 대방군의 위치(395년) <중국역사지도선집 2-2>2005년제작
강단사학계에서는 현도군이나 대방군을 어디에 비정하고 있는가.
이 지도에서는 요동반도의 남부에 비정하고 있다
지도설명:大明輿地圖 1536~1566 제작:명(明) 이 묵 (미 의회도서관 소장) 출처: 향고도
이 지도는 방향을 바꿔 동쪽에서 본 장산군도의 배열도다.
필리하(畢里河)는 벽류하의 다른 이름이다. 고려라는 표시는 요동반도가 고려의 영지었음을 알리는 뜻인데
원도에는 <고려>로 되어있다.
마안(馬鞍)이란 지명은 아마도 산동반도 래주에 있는 마안(馬鞍)에서 이전된듯하고 장자도의 동쪽에 있는
작은 섬인 변,진한은 크기가 작아서인지 생략되었다.
그렇다면 光頭라고 표시된곳이 왜로 추정하고 있는 해양도가 되는것이다.
三國遺事1卷-1紀異-北帶方-00
北帶方.
#三國遺事1卷-1紀異-北帶方-01
北帶方, 本竹覃城. 新羅弩禮王四年, 帶方人與樂浪人投于羅. [此皆前漢所置二郡名, 其後僭稱國今來降.]
#三國遺事1卷-1紀異-南帶方-00
南帶方.
#三國遺事1卷-1紀異-南帶方-01
曹魏時, 始置南帶方郡[今南原府], 故云. 帶方之南, 海水千里, 曰瀚海. [後漢建安中, 以馬韓南荒地, 爲帶
方郡, 倭韓遂屬, 是也.]
북대방(北帶方)
북대방(北帶方)은 본래 죽담성(竹覃城)이다.
신라 노례왕(弩禮王) 4년에 대방(帶方) 사람들이 낙랑(樂浪) 사람들과 함께 신라에 항복해 왔다
(이것은 모두 전한前漢 때에 설치한 두 군郡의 이름이다.
그 후에 참람되이 나라라고 불러 오다가 이때에 와서 항복한 것이다).
남대방(南帶方)
조위(曹魏) 때 비로소 남대방군(南帶方郡; 지금의 남원부南原府)을 두었기 때문에 남대방이라 한 것이다.
대방의 남쪽은 바닷물이 천 리(千里)나 되는데 한해(澣海)라고 했다
(후한後漢 건안建安 연간年間에 마한(馬韓) 남쪽의 황무지를 대방군帶方郡으로 삼았다.
왜(倭)와 한(韓)이 드디어 여기에 속했다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여기서 북대방(죽담성)은 최리의 낙랑국이 있던 대장산도로 고구려 대무신왕이 정벌하여 죽령군으로
삼은 곳이고, <백제의 온조왕이 "국가 동유 낙랑 북유 말갈">이라고 부르던 곳이다.
남대방은 대방고지로 부르던 소주산(小珠山)원시유적지가 있던 백제가 탄생한 광록도다.
그리고 <대방 의 남쪽으로는 바닷물이 천리나 되고 그곳을 한해(瀚海)라고 하였다.> 라고 한 이
바다는 요동반도의 남쪽해안, 즉 장산군도가 펼쳐진 서한만을 가리키는 말이다.
뿐만 아니라 <왜(倭)와 한(韓)이 드디어 여기에 속했다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라는 설명은 왜와 삼한이
모두 이 장산군도안에 있었다는 은어인 셈이다.
따라서 필자는 이곳에 삼한(三韓)과 왜(倭)가있었다고 주장하고 있는것이다.
만약 대방이 황해도에 있었다고 한다면 황해도의 남쪽으로 접한 천리나 되는 바다는 없을 뿐만 아니라,
있다 하더라도 황해도에서 일본까지의 거리가 천리만 되는것이 아니다.
<왜는 대방동남 대해중에 있다>라는 《삼국지》나 《후한서》의 <진한의 남쪽으로 왜와 접한다>는 수수
께끼 같은 기록은 이렇게 해석이 되는것이고, 삼한은 해도지상(海島之上)에 있다고 한 《통전》의 기록도
이렇게 설명이 되는것이다.
아마도 이 기록의 대목을 쉽게 풀리지 않도록 서술한것은 당시의 검열을 피하기 위한 골육지책이 아니었나
생각이 된다.
남대방이 장산군도라는 주장을 뒷받침할 기록은 광개토대왕 비문에서 그 단서를 찾을 수 있다.
이 대목은 본래 다음과 같이 훼손된 글자가 많았다.
그러나 권업신문에서 결문자를 채워서 해석을 시도한것이다.
그런데 그 결문자를 보충한 대목이 필자가 주장하던 장산군도의 석성도와 일치한것이다.
당연히 그래야만 지리적인 설명이 맞아들어간다.
十四年甲辰 而倭不軌 侵入帶方界 口口口口 口石城口 連船口口 口口口率口口 口平穰 口口口鋒 相遇王幢
要截刺 倭寇潰敗 斬煞無數
영락 14년 갑진에 왜가 법도를 지키지 않고 대방계에 침입하였다.....석성..배가 줄지어...평양...서로 맞
부딪치게 되었다.
왕의 군사가 적의 길을 끊고 막아 공격하니 왜구가 궤멸되었다. 참살한 것이 무수히 많았다.
이상 결자로 말미암아 문장의 중간이 끊기고 있었다.
그런데 아래와 같은 대목을 권업신문 1912-12-8일자로 발표된 광개토대왕 비문 해석에서 발견한것이다.
이렇게 석성도의 이름이 밝혀짐으로서 대방의 위치가 요동반도의 남쪽이어야 한다는 《삼국유사》의
기록이
증명된것이다.
十四年甲辰 而倭不軌 侵入帶方界 和通殘兵 至石城島 連船渡海□ 王躬率□□ 從平穰 □□先鋒 相遇王幢
要截盪刺 倭寇潰敗 斬殺無數
이상은 석성(石城)이 석성도(石城島)로 밝혀진 과정을 설명하고 있지만 <권업신문勸業新聞>의 1912년
12월 8일자의 이메지를 볼 수 없는게 유감이다.
아래는 <우리역사의 비밀>에 올려졌던 하정민님의 글이다.그러나 이메지가 사라져 확인하기가 어렵다.
다만 일본인 解法者라는 아이디로 올려진 석성도와 대방부분 내용은 다음과 같다.
広開土王碑(23) 投稿者:解法者 投稿日:2011年
2月16日(水)13時00分19秒
>碑文の解釈(20)<
5.「十四年甲辰」条
「十四年甲辰而倭不軌帯方界和通残□至石城□連船□□□王躬率□□従平壌□□□鋒
相遇王幢要截盪刺倭寇潰敗斬殺無数」(第3面3行7字~4行20字)
① 「十四年甲辰」とは、「広開土王の在位14年甲辰年〔405年〕)」をいう。
② 「不軌」とは、「不法」という意味である。
③ 「帯方界」とは、あの有名な「楽浪・帯方、倭人有り」の「帯方」をいい、現在の北朝鮮の黄海道(38
度線の北側)一帯を指す。
④
「和通」、「和」については拓本を精査すると「禾」が見られるので、その後の「残」(「百済」)との関
連から、「和」としても誤りはなかろう。「通」については、これを欠字だとする者が多いが(「白崎
昭一郎」-前掲書 253頁、「武田幸男」-前掲書318頁)、拓本を精査すると「?」が確認され、
やはり、その後の関連から「通」あると判断した。「王 健群」も同様の見解である(前掲書 231頁)。
意味は、「倭と同盟した」である。
⑤
「残□至」の欠字であるが、「王 健群」は「兵」であるとする(前掲書 231頁)。
意味としてはそれで良いと思えるが、拓本を精査してもやはり判読できない。
⑥ 「石城」、固有名詞である。ただ、場所は確認できないが、「倭軍」と「帯方界」で
戦闘を交えていることから、黄海道にあったと考えられよう。
⑦
「連船」、これはそのとおり判読できるが、「単に船を連ね」と読むのが一般的であり(『天皇と日韓古
代戦史』牛島康允 自然と科学社 1993年12月25日 189頁、「白崎昭一郎」-前掲書 255頁)、
異論を見ない。解釈はこれで良いと思う。問題は、その主語が何かである。まず、主語を「倭」とする
考えがある(「朴 時亨」-前掲書232頁、「上田正昭」〔『日本古代国家論究』塙書房 1969年11月
73頁〕、「武田」①-135頁)。これは明治時代からある考え方で(「菅 政友」〔「高麗好太王
碑銘考」[『史学会雑誌』第2編第24号 51頁]〕、「那珂通世」〔「高句麗古碑考」[『史学会雑
誌』第4編第49号 43頁]〕)、ほぼ、通説化していた。それでも主語を「高句麗」とする考えが
あった(「福田芳之助」〔『新羅史』若林春和堂 1927年 89頁〕。しかし、これは福田が勝手に
碑文に「大王」(「高句麗王」)を挿入したもので、信じるに値しない。だが、こういう考えも有り得る
のではないかとの疑問が投げかけられている(「高句麗広開土王碑文の再検討」佐伯有清〔『続日本古代
史論集上巻』阪本太郎博士古稀記念会 吉川弘文館1972年7月1日40頁〕)。しかし、これは疑問だ
けで、主語が「高句麗王」とは断定してない。ただ、前の部分が「倭」が主語になっていることから、
ここでの主語もやはり「倭」と解するのが妥当ではないかと思える。
놀랍게도 마안(馬鞍)이란 지명이 산동반도의 래주(萊州)에 있었던 지도를 발견하였습니다.
그것은 중국편 <대청광여도>입니다.
원래 마한(馬韓)은 래이(萊夷)족이고 백제족의 근원이 래이족이라는 기록은 <양직공도>에서 볼수있습니다.
하지만 마한을 마안으로 지도는 표시하고 있습니다.
장산군도의 장자도를 마한으로 비정한 후로 이곳이 마안으로 표시된 지도는 처음입니다.
* 삼국유사는 삼국의 역사 전반에 관한 사서(史書)로 편찬된 것은 아니다. 또한 삼국의 불교사 전반을 포괄
하지도 못하였다 저자 자신의 관심을 끈 자료들을 선택적으로 수집분류한 자유로운 형식의 역사서(歷史
書)이다. 그러나 이 책이 말하고 있는 것은 저자의 각고의 노력과 강한 역사(歷史)의식이 쓰며 있다고
평가되고 있다
* 삼국유사는 석남본(石南本)과
송은본(松隱本)이 현존하고 있다.
송은본(松隱本)은 보물 제419호로 지정 되어있다.
* 성은 김씨(金氏) 처음
법명은 견명(見明)이다 경산(慶山) 출생이다 김언정(金彦鼎)의 아들이다.
처음 자는 회연(晦然) 그 뒤 자를 일연(一然)으로 함
자호(自號)는 목암(睦庵)이다
1,214년 전라도 광주 지방인 해양의 무량사(無量寺)에 가서 학문을 닦았다
1219년 설악산
진전사(陳田寺)로 출가하여 고승 대웅(大雄)의 제자가 되었다
그 뒤 여러 곳에서 수련하여 구산문(九山門) 사선(四選)의 으뜸이
되었다
1,249년에는 남해의 정림사로 자리를 옮겨 팔만대장경 주조작업에 참여하였다
1,261년에 고려24대 원종의 부름을
받고 강화도로 갔으며 선월사에 머무르면서 설법을 행하고 지눌(知訥)
의 법을 계승하였다
충렬왕(忠烈王) 즉위 후에는 청도 운문사(雲門寺)에 머무르면서 선풍을 크게 일으켰으며 이때부터 삼국
유사(三國遺事)를 집필하기 시작했다
삼국유사(三國遺事)는 1,227년에서 1,281년 사이에 집필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책은 왕력(王歷) 기이(紀異)
흥법(興法) 탑상(塔像) 의해(義解) 신주(神呪) 감통(感通) 피은(避隱) 효선
(孝善) 등 9편으로 구성되어있다
일연(一然)이 청년시절에 사료(史料)를 모아 70세 이후의 노년기에 집필한 것이다.
삼국유사는 시간이 흐를수록 한국고대의 역사
지리 문학 종교 언어 민속 사상 미술 고고학 등 모든 부부의
열쇠를 제공하는 총체적 문화유산으로 인식되고 있다.
즉 삼국사기에서 미처 담아내지 못한 내용들을 후세에 전달하여 민족성을 고취시키고자 했던 일연의 깊은
뜻을 되새기게끔 하고 있다.
<삼국사기는 1,140년~1,145년 12월(고려 17대 인종 23년 71세)에 5년에 걸쳐서 삼국사기 50권을 지었다.
즉 삼국유사(三國遺事)보다 136년 전에 삼국사기(三國史記)를 지었다>
몽고 침략으로
짓밟히고 빼앗기고 그 처참한 광경을 겪었으며 고려인들은 온갖 수모를 견디면서 나라를
구하기 위하여 고려팔만대장경을 1,251년(23대 고종 38년)에 완성하였다.
이때에 국사(國師)로 추대하였으나 그 명칭이 중국식이라 거절하고 국존(國尊)으로 받들어 모시고 고려
팔만대장경 회향식(回向式)을 거행할 때 일연국존을 최고의 자리에 모시었다.
♠ 삼국유사의 주
내용은
이때 즉 한웅천왕이 처음으로 곧 1세 한웅이신 거발한(居發桓) 한웅이 이러한 한인께서 물려주신 삼대
경전(三大經典)인 천부경(天符經) 삼일신고(三一神誥) 참전계경(叅佺戒經)을 물려받을 때에 곰 한 마리와
호랑이 한 마리가 같은 굴 속에서 살고 있었다. 들은 항상 신웅이신 즉 신시의 한웅에게 빌었다 즉 사람이
되어지길 원했다 즉 천계에 백성이 되게 하소서 라고 빌었다.
즉 원하옵건대 신시 나라의 계를 따르는 백성이 되게 해주시기를 원하옵니다 .
신의 세계로 갈 수 있는 고요함과 신령스러운 것이 되는 것을 쑥 1 다발과 마늘 20개를 내 놓으니 한웅
천왕이 말하기를 너희들이 이를 먹고 100일 동안 햇빛을 보지 않으면 신의 모습인 즉 인간다움을 얻으리라
곰과 호랑이의 두 무리가 이를 먹고 삼칠일 즉 21일 동안은 먹고 견덨다. 곰은 능히 배고픔과 추음 등을
잘 참고 견뎌 즉 100일을 잘 참고 견디어 마침내 신령스러운 여자의 모습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호랑이는 방종하고 게으르고 참을성이 없어서 그 기한을 극복하지 못하였다 이에 신령스러운 사람이
되는 것을 얻지 못하였다. 웅녀는 더불어 혼인할 사람이 없으므로 고로 매일 신단수(神壇樹) 밑에서 아이를
배게 해 주기를 간곡히 빌었다 임시로 한웅으로 변하여 이에 웅녀와 혼인을 하여 정을 나누니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니 호적에 즉 영의 세계에 실리게 되었다.
이에 한웅(桓雄)의 제1세 한웅천황 또는 한웅천왕 이라고 하며 또는 거발한(居發桓) 한웅 이라고 하였다
때는 BC 3,898년에 즉위하여 마지막 18세 천왕이신 즉 18대 한웅(桓雄)이신 거불단(居弗檀) 한웅께서
BC 2,381년에 즉위하였다 한웅의 총재위기간은 1,565년 이며 즉 1,565년이란 세월이 흘러서 BC 2,333년
에 신령스러운 아들을 단군왕검(壇君王儉=檀君王儉) 이라 하고 나라를 물려주시고 새로 나라를 세워서 나라
이름을 조선(朝鮮)이라 했다
□ 壇君王儉=檀君王儉(단군왕검) 탄생 [삼국유사에서는 壇君王儉(단군왕검)으로 표시하고 있다]
魏書云(위서운): 위서(魏書)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乃往二千(내왕이천): 지금으로부터 2천년 전에 載有壇君王儉(재유단군왕검): 단군왕검의 역사를 기록한
것이 있었다. 立都阿斯達(입도아사달): 단군은 아사달에 도읍을 정하고...(하략)
여기서는 단군왕검(壇君王儉) 이라고 기록하고 있으나 모든 역사책은 檀君王儉(단군왕검)
으로 기록하고 있다 즉 단군왕검(檀君王儉=壇君王儉)은 같은 뜻이다
위서(魏書): 중국 남북조시대(南北朝時代)의 북제(北齊)의 위수(魏收)가 편찬한 역사서이다.
또는 후한서(後漢書) 라고도 한다.
(九山)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