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馬韓(마한) 때 부터 서서히 部落形成(부락형성)이 있었던 내포(內浦)의 들이다.
百濟(백제)때는 寺浦縣(사포현)에 속해서 農耕地(농경지)에 定着(정착)하는 百濟流民(백제유민)들로
크게 마을이 이룩되어 갔었다.
統一新羅(신라)때는 蘇浦縣(소포 현)에 속해서 西林郡(서림군)의 領縣(영현)에 속했으며 漁民 (어민)들의
마을形成(형성)이 두드러지게 나타났었다.
高麗 (고려)때는 顯宗(현종) 9年(1018)에 架林縣(가림현)에 속했다가 한때 왜구의 侵入(침입)으로 차츰
황폐화 되어 갔었다.
고려시대 잦은 왜구의 侵入(침입)에 焦土化(초토화)되었던 마을이 34代 (대) 恭讓王(공양왕)때부터 藍浦(남포)에
鎭(진) 縣(현)이 생기면서 부터 군사를 주둔시켜 왜구를 철저하게 몰아내고 흩어졌던 流亡人(류망인)들을소집(召集)
하으로 다시 재건을 보게된 地域(지역)이였었다.
朝鮮(조선) 太祖(태조) 6年 (1397)에 兵馬使(병마사)를 두어 縣事(현사)를 겸하게 하였으며, 世祖(세조) 12年(1446)에
藍浦縣(남포현)에 속하여 이 때부터 安心(안심)하고 生業(생업)에 종사할 수 있었던 地域 (지역)이었다.
道琛禪師(도침선사)의 말에 따르면 풀이해서 憂國(우국)의 人物(인물)이 많이 배출되며 또한 道學(도학)이 묻힐 곳이라
하는데, 熊川(곰내)의 周圍(주위)에 번지는 山과 들이 선비의 내음을 훈훈하게 하는 內浦(내포)의 외곽인 것이다.
世祖(세조)후에 충청수사영(忠淸水使營)의 儉使營(검사영)이 篁橋里(황교리)「 구진 」 에 있어서 水軍(수군)의 軍船(군선)이
드나들었던 곳이기도 하고, 高宗(고종) 32年(1895)에 藍浦郡(남포군)에 속해서 熊川(웅천)의 이름을 따서 熊川面(웅천면)이
라 하여 冠洞(관동)외에 18個里를 관할하다가
1914年 行政區域(행정구역) 改革(개혁)때 古邑面(고읍면)의 外城(외성) 외 8個 洞里(동리)와, 新安面(신안면)의 杜鳴里
(두명리), 습의면(習衣面)의 碧洞(벽동)과 深田面(심전면)의 東幕里(동막리)를 병합하여 熊川面(웅천면)이라하고
冠堂(관당), 獨山(독산), 小篁(소황), 篁橋(황교), 竹淸(죽청), 九龍(구룡), 盧川(노천), 杜龍(두룡), 大川(대천), 大昌(대창),
城洞(성동), 水芙(수부), 坪里(평리)의 13個里로 개편하여 관할하여 保寧郡(보령군)에 속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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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년1월 1일 법률 제4774호로 대천시와 보령군 통합, 보령시가 된후 `1995년 3월 2일 보령시 조례 제138호로
웅천면에서 웅천읍으로 승격되었다.
坪里 (평리)
百濟(백제)때는 寺浦縣(사포현)에 속했었다.
新羅(신라)때는 蘇浦縣(소포현)에 속했으며, 高麗(고려)때는 藍浦縣(남포현)에 속했었다. 朝鮮(조선) 때에는藍浦縣(남포현)에
속했으며, 朝鮮末葉(조선말엽)엔 藍浦郡(남포군) 古邑面(고읍면)의 地域(지역)인데 벌판이 되므로 (벌말) 또는 坪里(평리)라
하였는데,
1914年 行政區域(행정구역) 改革(개혁)때 水岸里(수안리) 一部와 深田面(심전면)의 東幕里(동막리)를 병합하여 다시 坪里(평리)
라 해서 保寧郡(보령군) 熊川面(웅천면)에 編入(편입)되었다.
1995년 1월 1일 법률 제4774호로 대천시와 보령군 통합, 보령시가 된후 `1995년 3월 2일 보령시 조례 제138호로 웅천면에서
웅천읍으로 승격되었다.
대섭말
「 중산골 」 東北(동북)쪽으로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 대섭말 」 이라고 부른다.
옛날에 대나무가 숲을 이룬 마을이라 「 대숲말 」 이라 부르다가 변해서 대섭말이라 부른다.
동막골
「 숯가마골 」 동쪽 골짜기에 있는 마을을 「 동박골 」 이라고 부른다. 골짜기에 처음 마을이 생길 때
山幕(산막)부터 시작된 마을이며 山幕(산막)이 있었던 마을이라 東幕里(동막리)라고 부른다.
매바위
「 동막골 」 東(동)쪽으로 냇가에 바위가 있는데 이 바위를 「 매바위 」 라고 부른다.
바위높이가 20m가량되는 바위인데 옛날엔 매가 많이 살았다 하며 또한 매같이 생긴 바위라 「 매바위 」 라고 부른다.
경치가 좋은 곳이라 놀이터가 되기도 한다. 應岩(응암)이라고도 한다.
벌말
坪里(평리)들에 자리한 마을을 「 벌말 」 이라고 부른다. 들에 마을이 있다해서 「 벌말 」이라고도 부르고
「 벌말 」 위쪽에 자리한 마을은 上坪(상평), 「 벌말 」 아래쪽에 자리한 마을은 下坪(하평)이라고 부른다.
증산골
「 벌말 」 뒤쪽으로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 증산골 」 이라고 부른다. 옛날 玉溪寺「 옥계사 」 의 중이
이 마을에서 살았다 한다. 「 증산골 」 아래쪽에 있는 마을은 「 아래뜸 」 이라고 부른다.
숯가마골
下坪(하평)의 남(?)쪽으로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 숯가마골 」 이라고 부른다. 옛날에 숯가마가 있어서
숯을 굽던 마을이라 그때부터 「 숯가마골 」 이라고 불렀다 한다.
陽村 (양촌)
下坪(하평) 北(북)쪽으로 양지바른 곳에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陽村(양촌)이라고 부른다. 양지바른 곳에
자리한 마을로 藍浦(남포)의 縣監(현감) 한 사람이 이곳을 좋다해서 한유하면 자주 들렸던 곳으로 햇빛 밝은 마을
이라 마음도 밝다는 詩句(시구)도 남긴 마을이다.
水芙里 (수부리)
百濟(백제)때는 寺浦縣(사포현)에 속했었다. 新羅(신라)때는 蘇浦縣(소포현)에 속했으며 高麗(고려)때는 藍浦縣(남포현)에
속했었다.
朝鮮(조선)때에도 藍浦縣(남포현)에 속해서 朝鮮末葉(조선말엽)엔 藍浦郡(남포군) 古邑面(고읍면)의 地域(지역)인데,
1914年 行政區域(행정구역) 改革(개혁)때 上芙里(상부리), 下芙里(하부리), 水岸里(수안리) 일부를 병합하여 水岸(수안)과
부당(芙塘)의 이름을 따서 水芙里(수부리)라 하여 保寧郡(보령군) 熊川面(웅천면)에 編入(편입)되었다.`
1995년 1월 1일 법률 제4774호로 대천시와 보령군 통합, 보령시가 된후 `1995년 3월 2일 보령시 조례 제138호로
웅천면에서 웅천읍으로 승격되었다.
가름자골
「 새터 」 북쪽으로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 가름자골 」 이라고 부른다. 「 가암동 」 이라고도 부르는데 옛날에 庵子(암자)가
있었다해서 「 가름자골 」 이라고 부른다.
* 단원사(團園寺) *
「가름자골」 에 있는 절을 團圓寺(단원사)라고 부른다. 團圓寺(단원사)는 옛날 新羅(신라)때 범일국사가 創建(창건)한 九龍寺
절인데 壬辰倭亂(임진왜란)때 소실되었다.
옛날의 碑冠石(비관석)을 지금은 지붕아래에 보관중이라 하는데 連花紋(연화문)을 새긴 八角形(팔각형)의 石造臺座(석조대좌)
가 있다.
불근댕이(芙塘)
水岸(수안) 東(동)쪽으로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불근댕이」라고 부른다. 옛날엔 마을앞에 연못이 있었고 그 옆을 富近堂
(부근당)이라고 불렀다 한다.
水芙里(수부리)에서 으뜸되는 마을이다. 富近堂(부근당), 芙堂(부당)이라고도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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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터
「 불근댕이 」 뒤쪽으로 새로된 마을을 「 새터 」 라고 부른다. 「 불근댕이 」 뒤쪽으로 자리해서 새로 마을이 생겼다하여
「 새터 」 라고 부른다. 上富里(상부리), 新基(신기)라고도 부른다.
水岸 (수안)
「 불근댕이 」 남쪽으로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水岸(수안)이라고 부른다. 두 내가 마을을 둘러싸고 흘러서 삼면이 물로
되어있는 마을이었다 해서 옛부터 수안(水岸)이라고 불러오던 마을이다.
우리티(牛耳峠)
上富里(상부리)에서 嵋山面(미산면) 下開里(하개리)로 넘어가는 고개를 우이티(牛耳峠)라고 부른다. 마을 地形(지형)이
소(牛)와 같다해서 牛耳峠(우이티)라고 부른다.
下富里(하부리)
「 불근댕이 」 아래쪽으로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下富里(하부리)라고 부른다. 마을이 아래쪽에 자리해서 下富里(하부리)
라고 부르는데「 불근댕이 」 아랫쪽이라 그리 부르게 된 마을이며 臥牛形(와우형)이라고도 부른다.
城洞里(성동리)
百濟(백제)때는 寺浦縣(사포현)에 속했었다.
新羅(신라)때는 蘇浦縣(소포현)에 속했으며 高麗(고려)때는 藍浦縣(남포현)에 속했었다.
朝鮮(조선)때에도 藍浦縣(남포현)에 속했으며, 朝鮮末葉(조선말엽)엔 藍浦郡(남포군) 古邑面(고읍면)의 區域(구역)으로서
山城(산성)이 있으므로 城骨(성골) 또는 城洞(성동)이라 하였는데,
1914年 行政區域(행정구역) 改革(개혁)때 內城洞(내성동), 外城洞(외성동)을 병합하여 城洞里(성동리)라 해서 保寧郡
(보령군) 熊川面(웅천면)에 編入(편입)되었다. `1995년 1월 1일 법률 제4774호로 대천시와 보령군 통합, 보령시가 된후
`1995년 3월 2일 보령시 조례 제138호로 웅천면에서 웅천읍으로 승격되었다.
건너마을뜸
「 정자나무뜸 」 北쪽으로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 건너마을뜸 」 이라고 부른다. 「 정자나무뜸 」 건너쪽에 마을이있다
해서 「 건너마을뜸 」 이라고 부른다.
밧성골
城洞(성동) 바깥쪽으로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 밧성골 」 이라고 부른다. 옛날에 만들은 雲峰山(운봉산) 성터 바깥쪽으로
마을이 있다해서 「 박앗성골 」 이라 부르던 것이 변해서 「 밧성골 」 外城洞(외성동)이라고 부른다.
아래뜸
「 정자나무뜸 」 아래쪽으로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 아래뜸 」 이라고 부른다. 마을 아래쪽에 마을이 있다해서
「 아래뜸 」 이라고 부른다.
안성골
雲峰山(운봉산)의 성터로부터 안쪽으로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 안성골 」 이라고 부른다.
성터 안쪽으로 자리한 마을이라 「 음지뜸 」 이라고도 부른다.
웃뜸
「 중뜸 」 위쪽으로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 웃뜸 」 이라고 부른다.
「 중뜸 」 위쪽으로 마을이 있다해서 「 웃뜸 」 이라고 부른다.
윗방아뜸
「 밧성골 」 東北(동북)쪽으로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 윗방아뜸 」 이라고 부른다. 옛날에 방앗간이 있었다해서
「 윗방아뜸 」 이라고 부르는 마을이다.
정자나무뜸
「 중뜸 」 서쪽으로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 정자나무뜸 」 이라고 부른다.
정자나무가 있는 마을이라 「 정자나무뜸 」 이라고 부른다.
중뜸
「 밧성골 」 중앙에 자리한 마을을 「 중뜸 」 이라고 부른다.
마을이 중앙에 자리해 있다해서 「 중뜸 」 이라고 부른다.
大昌里 (대창리)
百濟(백제)때는 寺浦縣(사포현)에 속했었다.
新羅(신라)때는 蘇浦縣(소포현)에 속했으며 高麗(고려)때는 藍浦縣(남포현)에 속했었다.
朝鮮(조선) 때에도 藍浦縣(남포현)에 속했으며 朝鮮末葉(조선말엽)엔 藍浦郡(남포군) 古邑面(고읍면)의 地域(지역)인데,
1914年 行政區域(행정구역) 改革(개혁)때 大川里(대천리), 防築里(방축리)와 習衣面(습의면)의 碧洞(벽동)을
병합하여 크게 창성하라는 뜻으로 대창리(大昌里)라 하여, 保寧郡(보령군) 熊川面(웅천면)에 編入(편입)되었으며 `
1995년 1월 1일 법률 제4774호로 대천시와 보령군 통합, 보령시가 된후 `1995년 3월 2일 보령시 조례 제138호로
웅천면에서 웅천읍으로 승격되었다.金用濟(김용제), 崔熙準(최희준) 先生(선생)의 出生地(출생지)이다.
한내
聖住山(성주산)에서 발원하여 扶餘郡(부여군) 外山面(외산면)의 중심을 흐르다가 嵋山面(미산면) 桃花潭里(도화담리)에
이르러, 北西(북서)쪽에서 오는 聖住川(성주천)을 합하여 珠山(주산)을 거쳐 大昌里(대창리) 앞을 스치는 「 한내 」옆에
자리한 마을이다.
「 대천 」 이라고도 부르는데 「 한내 」 냇물옆에 자리한 마을이라 「 한천 」, 「 대천 」 이라고도 부른다.
每園(매원) 黃羲敦先生(황희돈선생)의 出身地(출신지)이며 韓國(한국) 最初女判事(최초여판사) 黃允石先生(황윤석선생)의
出生地(출생지)이다
접동곡 (接洞谷)
市場(시장) 南東(남동)쪽에 자리한 마을을 接洞谷(접동곡)이라고 부른다.
「 접동골 」 이라고도 부르는데 마을과 접해있다해서 接洞谷(접동곡), 「 접동골 」 이라고 부르는 마을이다.
옛날엔 한 때 큰 마을이었다 (접동은 蝶洞으로도 쓰여졌다.
寺洞
碧南(벽남) 南(남)쪽에서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寺洞(사동)이라고 부른다. 또한 「 절골 」 이라고도 부르는데
옛날에 절이 있었던 마을이라 寺洞(사동), 「 절골 」 이라고 부른다.
양지뜸
碧洞(벽동) 북쪽에 자리한 마을을 「 양지뜸 」, 「 양지 」 라고 부른다. 양지 바른 곳에 마을이 있다해서 「 양지뜸 」, 「 양지 」
라고 부르고 碧洞(벽동) 응달쪽에 자리한 마을은 「 음지뜸 」, 「 음지 」 라고 부른다.
웅천장 (熊川場)
市場(시장)에서는 熊川面(웅천면)의 장이 서는 자리다.
大川里(대천리)구장터에서 장이 섰었는데
1929年에 이곳에 옮겨왔다.
웅천역(熊川驛)
市場(시장) 東北(동북)쪽에 長項線(장항선) 列車(열차)의 정류장을 熊川驛(웅천역)이라고 부른다.
1928年 8月1日에 이곳에 자리하기 시작했다 ........*최근 ( ) 년도에 운봉산 자락 웅천중.고등학교 뒤로 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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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정포(浣汀浦)
南塘(남당)과 碧洞(벽동)사이에 浦口(포구)가 있는데 이 浦口(포구)가 浣汀浦(완정포)라고 부르는 浦口(포구)다.
배가 드나드는 浦口(포구)다.
朝鮮中葉(조선중엽)까지는 靑淵浦(청연포)라고 불렀다.
시장 (市場)
碧南(벽남) 東北(동북)쪽으로 자리한 마을이 市場(시장)이라고 부르는 마을이다. 熊川場(웅천장)이 5日에 한번씩 선다.
* 1828 년도까지 구장터(花 汀/화락뫼 / 대천리)에 있던 것을 큰 홍수가 있어 유실 되면서 이곳으로 이전
삼바위샘
碧南(벽남) 東(동)쪽으로 「 운봉 」 산 기슭에 샘이 있는데 이 샘을 「 삼바위샘 」 이라고 부른다.
샘물이 매우 차서 약수로 통하는 샘물로 옛날에는 여기 약수를 마시러 많은 사람이 드나들었다.
碧洞 (벽남)
碧南(벽남) 중심에 자리한 마을을 碧東(벽동)이라고 부른다.
마을을 「 양지뜸 」, 「 음지뜸 」 으로 나눈다.
防築 (방축)
碧南(벽남) 北東(북동)쪽으로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防築(방축)이라고 부른다.
마을에 방축이 있다해서 「 방축 」, 「 방축리 」 라 부른다.
남당(南塘)
碧南(벽남) 서북쪽으로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南塘(남당), 南塘里(남당리)라고 부른다.
大川里(대천리)
百濟(백제)때는 寺浦縣(사포현)에 속했었다.
新羅(신라)때는 蘇浦縣(소포현)에 속했으며 高麗(고려)때는 藍浦縣(남포현)에 속했었다.
朝鮮(조선) 때에도 藍浦縣(남포현)에 속했으며, 朝鮮末葉(조선말엽)엔 藍浦郡(남포군) 熊川面(웅천면)의 地域(지역)인데
「 한내 」 가 있으므로 「한내」또는 大川(대천)이라 하였고,
1914年 行政區域(행정구역) 改革(개혁)때 大川里(대천리)라 해서 保寧郡(보령군) 熊川面(웅천면)에 編入(편입)되었다.
`1995년 1월 1일 법률 제4774호로 대천시와 보령군 통합, 보령시가 된후 `95년3월 2일 보령시 조례 제138호로
웅천면에서 웅천읍으로 승격되었다.
화락매
「 구장터 」 西北(서북)으로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 화락매 」 라고 부른다. 花落山(화락산) 아래에 마을이 있다해서
「 화락매 」 라고 부른다.
향교말
「 화장 」東北(동북)쪽으로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 향교말 」 이라고 부른다.
옛날에 鄕校(향교)가 있었던 마을이라 「 향교말 」 이라고 부른다.
구장터
「 화락매 」 東南(동남)쪽으로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 구장터 」, 「 구시장 」 이라고 부른다.
1928년까지 熊川面事務所(웅천면사무소)가 있었고 市場(시장)이 있었는데 1929年 大昌里(대창리)로 옮겨갔다.
花汀 (화정)
「 구장터 」 북쪽으로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花汀(화정)이라고 부른다. 마을 뒤에 花落山(화락산)이 있고 마을앞에
「 한내 」 가 있어서 경치가 아름다운 마을이다.
* 웅천 초등학교가 있고 화락산 기슭을 따라 남쪽으로 集成堂이있다
杜龍里 (두룡리)
百濟(백제)때는 寺浦縣(사포현)에 속했었다.
新羅(신라)때는 蘇浦縣(소포현)에 속했으며 高麗(고려)때는 藍浦縣(남포현)에 속했었다.
朝鮮(조선) 때에도 藍浦縣(남포현)에 속했으며, 朝鮮末葉(조선말엽)엔 藍浦郡(남포군) 新安面(신안면)의
區域(구역)인데,
1914年 行政區域(행정구역) 改革(개혁)때 杜鳴里(두명리)와 龍臥里(용와리)를 병합하여 杜龍里(두룡리)라 해서
保寧郡(보령군) 熊川面(웅천면)에 編入(편입)되었다.
`1995년 1월 1일 법률 제4774호로 대천시와 보령군 통합, 보령시가 된후 `1995년 3월 2일 보령시 조례 제138호로
웅천면에서 웅천읍으로 승격되었다.
용안이
「 두루니 」 南(남)쪽으로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 용안이 」 라고 부른다.
杜龍里(두룡리)에서 으뜸되는 마을인데 옛날에는 龍地(용못)이 있었다 한다.
또한 地形(지형)이 龍(용)이 누운 형국이라 「 용안이 」, 龍化里(용화리)라고도 부른다.
마을 입구에 큰 바위가 둘이 있는데 이 바위를 「 쌍바위 」 라고도 부르는데 여기에서 龍(용)이 昇天(승천)하였다
한다.
두루니
「 용안이 」 북쪽으로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 두루니 」, 杜鳴 里(두명리)/두룡리라고 부른다.
山(산)이 앞뒤로 높은 산에 둘러싸여 있는 마을인데, 옛날에는 산새의 울음을 많이 들을 수 있는 마을이였다 한다.
웃말리(伊村)
「 두루니 」 뒤쪽으로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 웃말리 」 라고 부른다. 마을 위쪽으로 자리한 마을이라 "웃말리" 라고
부른다.
柏山 (백산)
「두루니」 東(동)쪽으로 산이 있는데 이 산을 柏山(백산) 또는 「 잔비산 」 이라고 부른다. 잣나무가 많은 산이라
柏山(백산), 「 잔비산 」 이라고 부르는 山(산)이다.
이어니굴
「 두루니 」 北東(북동)쪽으로 長項線(장항선) 列車(열차)의 굴이 있는데 이굴을 「 이어니굴 」 이라고 부른다.
굴의 길이는 約 (약) 500m나 되는 긴 굴로서 1931年에 뚫은 굴이다.
* 최근( 년 )에는 장항선 직선화 사업에따라 터널을 동북쪽으로 새로 뚫었고 웅천역사도
화락산 자락으로 이전 하였다
九龍里 (구룡리)
百濟(백제)때는 寺浦峴(사포현)에 속했었다.
新羅(신라)때는 蘇浦 縣(소포현)에 속했으며 高麗(고려)때는 藍浦縣(남포현)에 속했었다.
朝鮮(조선) 때에도 藍浦縣(남포현)에 속했으며, 朝鮮末葉(조선말엽)엔 藍浦郡(남포군) 熊川面(웅천면)의 地域(지역)으로서
아 홉 龍(용)이 구슬을 다투는 九龍爭珠形(구룡쟁주형)이라 하여 구룡(九龍)이라 하였는데,
1914年 行政區域(행정구역) 改革(개혁)때 長佐洞(장좌동), 下九里(하구리), 花望里(화망리)일부를 병합하여 九龍里(구룡리)라
해서 保寧郡(보령군) 熊川面(웅천면)에 編入(편입)되었고,
`1995년 1월 1일 법률 제4774호로 대천시와 보령군 통합, 보령시가 된후 `1995년 3월 2일 보령시 조례 제138호로 웅천면에서
웅천읍으로 승격되었다.白奎洙(백규수) 黃稷先生(황직선생)이 사시던 곳이기도 하다.
건너마을 (정굴)
花望(화망) 南(남)쪽으로 건너에 자리한 마을을 「 건너마을 」 이라고 부른다.
건너쪽에 있다해서 「 건너마을 」 이라고 부른다.
花望 (화망)
長佐洞(장좌동) 北(북)쪽으로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花望(화망)이라고 부른다. 「 대천리 」 의 花落山(화락산)을 바라보는
位置(위치)에 자리한 마을로 꽃을 바라보고 있다해서 花望(화망)이라고 부른다 한다.
長佐洞 (장좌동)
花望(화망) 南(남)쪽으로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長佐洞(장좌동) 「 장좌울 」 이라고 부른다.
옛날에 長者(장자)들이 살았다 해서, 長者(장자)들이 자리한 마을이라 長佐洞(장좌동), 「 장좌울 」 이라고 부른다.
되고개
「 아래뜸 」 에서 「 마차울 」 로 넘어가는 고개가 있는데 이 고개를 「 되고개 」 라고 부르고,
그 고개를 자리한 마을도 고개 地名(지명)에 따라 「 되고개 」 라고 부른다.
九龍(구룡)의 아래쪽이 됨으로 下九里(하구리)라고도 부르는 마을이다.
마차울
長佐洞(장좌동) 서북쪽으로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 마차울 」 이라고 부른다.
또한 "마차"라고도 부른다 .
큰마을
안마을 바깥쪽으로 자리한 마을을 큰마을이라고 부른다.
花望里 (화망리)의 원 마을이다. 오래전부터 자리해 있는 마을이다.
아래뜸
長佐洞(장좌동) 아랫쪽으로 마을이 있다해서 이 마을을 「 아래뜸 」 이라고 부른다. 長佐洞(장좌동) 아랫쪽에 자리해
있다해서 「 아랫뜸 」 이라고 부른다.
안마을
큰 마을 안쪽으로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 안마을 」 이라고 부른다.
마을 안쪽으로 자리해 있다해서 「 안마을 」 이라고 부른 다.
굴고개
花望(화망)에서 藍浦面(남포면) 「 원전리 」 로 넘어가는 고개가 「 굴고개 」 라는 고개다.
「 큰마을 」 위쪽에 있는 고개인데, 고개아래엔 또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도 고개 地名(지명)따라 「 굴고개 」 라고
부른다
盤松亭 (반송정)
九龍里(구룡리)에 있는 소나무를 지금으로부터 180餘年(여년)전 에 白東賢(백동현)이란 사람이 아홉 살때
소나무 두그루를 심었는데, 이 나무가 뿌리가 되어 자라서 네그루가 되었다가 여덟 그루가 되었다.
白氏(백씨) 30餘號(여호)가 사는 마을에 있는 여기를 盤松亭(반송정)이라고도 부른다.
冠堂里 (관당리)
百濟(백제)때는 寺浦縣(사포현)에 속했었다.
新羅(신라)때는 蘇浦 縣(소포현)에 속했으며 高麗(고려)때는 藍浦縣(남포현)에 속했었 다.
朝鮮(조선) 때에도 藍浦縣(남포현)에 속했으며, 朝鮮末葉(조선말엽)엔 藍浦郡(남포군) 熊川面(웅천면)의 地域(지역)인데,
1914年 行政區域(행정구역) 改革(개혁)때 冠洞(관동), 堂峴里(당 현리), 看入里(간입리)를 병합하여 冠洞(관동)과
堂峴(당현)의 이 름을 따서 冠堂里(관당리)리 하여 保寧郡(보령군) 熊川面(웅천 면)에 編入(편입)되었다.
`1995년 1월 1일 법률 제4774호로 대천시와 보령군 통합, 보령시가 된후 `1995년 3월 2일 보령시 조례 제138호로
웅천면에서 웅천읍으로 승격되었다.
武昌里 (무창리)
武昌(무창) 西(서)쪽으로 浦口(포구)가 있는데 이 포구를 武昌浦 (무창포)라고 부른다. 朝鮮(조선)때 稅米(세미)
倉庫(창고)가 있 는 갯가에 포구라 해서 武昌浦(무창포)라 부른다.
당재
「 갓굴 」 북쪽에 자리한 마을을 「 당재 」 라고 부른다.
옛날에 당 집이 있었다.
口傳(구전)에 따르면 옛날 한 부부가 살았는데 아들을 낳을 때 아내가 죽고 아들만 자랐는데 그 아들이 장수가 될 아들이라
계모가 죽였다 한다. 아기장군이라 부르며 堂(당) 에서 제사를 지내줬다 한다.
堂(당)이 있는 마을이라 「 당제 」 라고 부른다. 堂峴(당현), 堂峴里(당현리)라고도 부른다.
간드리
「 갓굴 」 西南(서남)쪽에 자리한 마을을 「 간드리 」, 看入里(간입리)라고 부른다.
옛날 몸에 병이 있거나 벼슬길에서 그만둔 사람들이 이 마을에 들어오면 모두 편안하게 사는 마을이라 「 간드리 」,
看入里(간입리)라 부른다.
冠洞 (관동)
「 당재 」 南(남)쪽에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관동(冠東)이라고 부른다. 「 갓굴 」 이라고도 부르는데 마을 地形(지형)이
冠(관) 을 쓴 것 같이 생겼다 해서 冠洞(관동)이라고 부른다.
「 갓골 」 이라 부르던 것이 변해서 「 갓굴 」 이라고 부른다. 冠堂里(관당리)에서 으뜸되는 마을이다.
덕산골
「 갓굴 」 동쪽으로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 덕산골 」 또는 德 山谷(덕산곡)이라고 부른다.
옛부터 덕을 쌓는 사람들이 많이 사는 마을이다.
武昌 (무창)
「 갓굴 」 西(서)쪽으로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武昌(무창)이라 고 부른다.
朝鮮(조선)때 창고가 있었던 마을이다.
武昌浦海水浴場(무창포 해수욕장)
武昌(무창) 西(서)쪽으로 해수욕장이 있는데 여기를 「 무창포 해수욕장 」 이라고 부른다.
日帝(일제)때부터 서서히 개발된 해수욕장이다.
石臺島 (석대도)
「 간드리 」 서쪽으로 섬이 있는데 이 섬을 石臺島(석대도)라고 부른다.
옛날 口傳(구전)에 따르면 아기장군이 죽었을 때 황새가 떼지어 나타나서 슬프게 울었다는 섬으로 돌로 座台(좌대)가
놓인 것 같이 생겼다해서 石臺島(석대도)라 부르는 섬이다.
심교골(深矯골)
「 갓굴 」 西南(서남)쪽에 자리한 마을을 「 심교골 」 또는 深橋谷(심교곡)이라고 부른다. 옛날 한 장수가 살았는데 바다로
통하는 줄다리기를 여기까지 놓고 海龍(해룡)과 밤마다 줄다리기를 한 마을이라 한다.
아래뜸
武昌(무창) 서쪽으로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 아래뜸 」 이라고 부른다.
마을 아래에 마을 있다해서 「 아래뜸 」 이라고 부른다.
아랫간드리
「 간드리 」 서쪽에 자리한 마을을 「 아랫간드리 」 라고 부른다. 「 간드리 」 서쪽 위에 자리한 마을을 「 윗간드리 」 라고
부른다.
陽花(양화)
「 갓굴 」 서쪽으로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이 양화(陽花)라고 부른다.
꽃이 옛날에는 많이 피는 마을이며 地形(지형)이 꽃봉오리같다해서 陽花(양화)라고 부른다.
윗뜸
武昌(무창) 동쪽 마을뒤로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이 「 윗뜸 」 이라고 부르는 마을이다.
마을 위로 마을이 자리해 있다해서 「 위뜸 」 이라고 부른다.
중뜸
武昌(무창) 가운데에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 중뜸 」 이라고 부른다.
마을이 가운데에 자리해 있다해서 「 중뜸 」 이라고 부르 는 마을이다.
獨山里 (독산리)
百濟(백제)때는 寺浦縣(사포현)에 속했었다.
新羅(신라)때는 蘇浦 縣(소포현)에 속했으며 高麗(고려)때는 藍浦縣(남포현)에 속했었다.
朝鮮(조선)때에도 藍浦縣(남포현)에 속했으며, 朝鮮末葉(조선 말엽)엔 藍浦郡(남포군) 熊川面(웅천면)의 地域(지역)
으로서 홀로 된 산이 있으므로 「 홀미 」, 「 홀뫼 」 또는 獨山(독산)이라 하였는 데,
1914年 行政區域(행정구역) 改革(개혁)에 따라 獨山里(독산리)라 하여 保寧郡(보령군) 熊川面(웅천면)에 編入(편입)
되었다.
`1995년 1월 1일 법률 제4774호로 대천시와 보령군 통합, 보령시가 된후 `1995년 3월 2일 보령시 조례 제138호로
웅천면에서 웅천읍으로 승격되었다.
厚望里 (후망리)
「 홀뫼 」 북쪽으로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厚望(후망)이라고 부른다.
「 홀뫼 」 마을이 멀리 보이는 곳에 마을이 있다해서 厚望(후망)이라고 부른다.
黃竹島 (황죽도)
「 직언이 」 西(서)쪽에 섬이 있는데 이 섬을 黃竹島(황죽도)라고 부른다.
섬에 대밭이 있는데 바람으로 인해서 누렇게 색깔이 변해있다. 누런 대나무가 있는 섬이라 黃竹島(황죽도)라고 부른다.
직언이(直言島)
「 홀뫼 」 西北(서북)쪽으로 섬이 있는데 이 섬을 「 직언이 」 직언도(直言島)라고 부른다.
바닷가 육지와 좀 떨어져 있는 곳에 떠 있는 섬인데 옛날 지나가던 배가 파선되어 많은 시체가 밀려서 지게로 시체를
지어 냈다는 섬이다.
용굴
黃竹島(황죽도)에 굴이 있는데 이 굴을 「 용굴 」이라고 부른다.
龍(용)이 하늘로 昇天(승천)하였다는 굴인데 가뭄이 심할 때 여기에서 祈雨祭(기우제)를 지낸다.
獨山 (독산)
厚望(후망) 서쪽으로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獨山(독산)이라고 부른다.
「 홀미 」, 「 홀뫼 」 라고도 부르는데 홀로 떨어져 있는 山(산)아래에 마을이 있다해서 「 독산 」, 「 홀미 」, 「 홀뫼 」 라고
부르는 말이다.
말무덤과 말구멍
獨山(독산)에 말무덤과 말구멍이 있다. 옛날 南原(남원) 梁氏(양씨)집안에 장수 한사람이 탄생하였는데, 出生(출생)한지
1年도 못되어 아이 겨드랑이에 날개가 돋아나곤 해서 장수가 낳으면 집안이 망한다고 그 아이를 몰래 죽였다 한다.
그 아이가 죽자 바위가 들석 하더니 白馬(백마)가 튀여나와서 바닷가를 뛰여다 니다가 죽었는데, 그 말을 묻어준 자리는
「 말무덤 」 이라 부르고 말이 튀여나온 암굴은 「 말구멍 」 이라 부르는데 지금도 그 자리가 있다.
小篁里 (소황리)
百濟(백제)때는 寺浦縣(사포현)에 속했었다.
新羅(신라)때는 蘇浦 縣(소포현)에 속했으며 高麗(고려)때는 藍浦縣(남포현)에 속했었다.
朝鮮(조선)때에도 藍浦縣(남포현)에 속했으며 朝鮮末葉(조선말엽)엔 藍浦郡(남포군) 熊川面(웅천면)의 地域(지역)
으로서 황골 남(南)쪽에 있는 작은 마을로서 작은황골 또는 小篁洞(소황동)이라고 부르던 地域(지역)인데,
1914年 行政區域(행정구역) 改革(개혁)때 大篁里(대황리) 일부를 병합하여 小篁里(소황리)라해서 保寧郡(보령군)에
編入(편입)되었다.
`1995년 1월 1일 법률 제4774호로 대천시와 보령군 통합, 보령시가 된후 `95년 3월 2일 보령시 조례 제138호로 웅천면에서
웅천읍으로 승격되었다.
낫물
「작은황골」 南(남)쪽으로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 낫물 」이 라고 부른다.
땅을 파면 짭짤한 소금물이 나온다. 「 낫물 」, 午水(오수)라고 부르는 마을이다.
큰황골
「황골」 에서 가장 큰 마을이다. 大篁里(대황리)라고도 부르는 마을이다.
황골
小篁里(소황리)에 자리한 마을로서 小篁里(소황리)에서 으뜸되는 마을이다.
小篁里(소황리)와 篁橋里(황교리)에 걸쳐있는 마을이다.
새우양식장
「 작은황골 」 서쪽에 있는 새우를 기르는 곳을 「새우양식장」 이라고 부른다.
넓이가 20町步(정보)가 되며 年間(연간) 수십만 마리의 새우를 인간의 힘으로 부화하는 양식장이다.
篁橋里 (황교리)
百濟(백제)때는 寺浦縣(사포현)에 속했었다.
新羅(신라)때는 蘇浦 縣(소포현)에 속했었다.
高麗(고려)때에는 藍浦縣(남포현)에 속했 었다. 朝鮮(조선)때에도 藍浦縣(남포현)에 속했으며 朝鮮末葉(조선말엽)엔
藍浦郡(남포군) 熊川面(웅천면)의 地域(지역)인데,
1914年 行政區域(행정구역) 改革(개혁)때 廣岩里(광암리)와 大篁 里
(대황리), 小篁里(소황리)와 舟橋里(주교리)의 各一部를 병합하여 大篁(대황)과 舟橋(주교)의 이름을 따서
篁橋里(황교리)라 하여 保寧郡(보령군)에 編入(편입)되었다.
`1995년 1월 1일 법률 제4774호로 대천시와 보령군 통합, 보령시가 된후 `1995년 3월 2일 보령시 조례 제138호로
웅천면에서 웅천읍으로 승격되었다.
배다리
「무성골」 의 西北(서북)쪽으로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배다리」라고 부른다. 옛날 高麗(고려)때만 하여도 이곳 마을
앞까지 강물이 들어와서 배가 드나 들었다하여 마을의 이름을 舟橋 (주교)라 불렀다 한다. 「 배다리 」 舟橋里(주교리)
라고도 부른다.
中村 (중촌)
「 배다리 」,「 서고개 」가운데에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中村 (중촌)이라고 부른다. 마을과 마을 사이에 마을이 자리해
있다 해서 中村(중촌)이라고 부른다.
서고개
「배다리」 西北(서북)쪽으로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 서고개 」 라고 부른다. 獨山里(독산리)로 넘어가는 작은 고개가
있는데 이 고개를 「 서고개 」 라 부르는데 그 고개에 마을이 자리해 있다해서 마을도 고개 地名(지명)따라 「 서고개 」
라고 부른다.
배랑모랭이
「구진」 남쪽에 자리한 모롱이를 「 배랑모랭이 」 라고 부른다. 「 배지만 」 이라고도 부르는 모롱인데 옛날엔 이곳을
거쳐 배가 드나 들었다 한다.
뒷고개
廣 岩(광암) 서북쪽에 자리한 고개를 「 뒷고개 」 라고 부른다. 통달 산을 거쳐 小篁里(소황리), 「 낫물 」 로 넘어가는
고개라 고개 아래에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도 고개 地名(지명)따라 「 뒷고개 」 라고 부른다.
너분들
篁橋里(황교리)에서 가장 큰 마을이다. 마을에 넓은 바위가 있다 해서 「 너븐들 」 廣岩(광암), 廣岩里(광암리)라고
부른다.
구마량진터
廣岩(광암) 남쪽에 있는 옛날 忠淸水軍儉節制使營(충청수군검절 제사영)에 딸린 馬梁鎭(마량진)이 있었던 터를
「구마량진터」 라고 부른다. 朝鮮(조선) 中宗(중종) 5年(1510)에 둘레 1,271자 높 이 아홉자의 돌섬을 쌓았는데
孝宗(효종)때 李尙眞(이상진)이 巡撫(순무)차 이곳에 이르러 地勢(지세)를 살펴보고 선박의 내왕이 불편하다 하여
鎭(진)을 西面(서면)으로 옮겨갔는데, 그 전까지의 水軍(수군) 萬號(만호)가 자리하였던 水軍(수군)터다.
竹淸里 (죽청리)
百濟(백제)때는 寺浦縣(사포현)에 속했었다. 新羅(신라)때는 蘇浦 縣(소포현)에 속했으며 高麗(고려)때는
藍浦縣(남포현)에 속했었 다.
朝鮮(조선)때는 藍浦縣(남포현)에 속해서 朝鮮末葉(조선말엽) 엔 藍浦郡(남포군)熊川面(웅천면)의 地域(지역)인데,
1914年 行 政區域(행정구역) 改革(개혁)때 大靑里(대청리), 小靑里(소청리),
場基里(장기리), 峰伍里(봉오리)와 「주교리」, 「화망리」의 各一 部를 병합하여 竹淸里(죽청리)라 해서 保寧郡(보령군)
熊川面(웅 천면)에 編入(편입)되었다.
`1995년 1월 1일 법률 제4774호로 대천시와 보령군 통합, 보령시가 된후 `1995년 3월 2일 보령시 조례 제138호로
웅천면에서 웅천읍으로 승격되었다.옛날엔 淸洞(청동)이라고 부르던 지역 이다. 玉濟(옥제) 白觀亨(백관형) 先生(선생)의
出生地(출생지)이다.(五列士(오열사)의 한분)
봉오재
小靑里(소청리) 북쪽에 있는 山(산)을 「 봉오재 」 라고 부른다. 朝鮮(조선) 初期(초기)에 餘道岾烽首(여도참봉수)가
있어서 通達 山(통달산) 북쪽으로 保寧縣(보령현)의 助侵山烽首(조침산봉수) 에 통하였는데, 朝鮮(조선) 中葉(중엽)에
「 옥마산 」 으로 옮겨갔 었다.
봉수대가 있었던 산(山)이라 「 봉오재 」 라 부르고 산아래 에 있는 마을도 山名(산명)따라 「 봉오재 」 라고 부른다.
俸五里 (봉오리)라고도 부른다.
대청리(大靑里)
소청리(小靑里) 東南(동남)쪽으로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大靑里(대청리)라고 부른다. 대나무가 무성한 지역의
큰 마을이었다. 해서 옛날부터 大靑里(대청리)라 불렀다.
잣나뭇골
「 봉오재 」 북쪽에 자리한 마을을 「 잣나뭇골 」 이라고 부른다. 옛날엔 골짜기였는데 잣나무가 많은 골짜기였으므로
「 잣나무골 」 이라고 그때부터 그리 불렀었다.
각골
小靑里(소청리) 東南(동남)쪽에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 각골 」 이라고 부른다. 마을 갓에 자리해 있는 마을이라
「 각골 」, 「 갓골 」 이라고 부른다.
小靑里 (소청리)
大靑里(대청리) 西北(서북)쪽으로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小靑 里(소청리)라고 부른다. 竹靑里(죽청리)의 중심이
되는 마을이다.
양지뜸
「 각골 」 北(북)쪽으로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이 「 양지뜸 」 이라고 부르는 마을이다. 마을이 양지바른 곳에 자리해
있다해서 「 양지뜸 」 이라고 부른다.
음지뜸
大靑里(대청리) 東南(동남)쪽으로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 음지뜸 」 이라고 부른다. 마을이 음달진 곳에 자리해
있다해서 「 음지뜸 」 이라고 부른다.
장터
小靑里(소청리) 北(북)쪽으로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 장터 」 라고 부른다. 「 장기리 」 라고도 부르는데 옛날에
장이 섰던 마을이라 「 장터 」 라고 부른다.
이청(二靑)
大靑里(대청리)와 小靑里(소청리)를 통틀어 二靑(이청)이라고 부른다. 대나무(竹)가 많은 이곳의 큰무슬(大靑),
작은무슬(小靑)을 하나로 통털어 부를때는 二靑(이청)이라고 부른다.
盧川里 (노천리)
百濟(백제)때는 寺浦縣(사포현)에 속했었다.
新羅(신라)때는 蘇浦 縣(소포현)에 속했으며 高麗(고려)때는 藍浦縣(남포현)에 속했었 다.
朝鮮(조선)때에도 藍浦縣(남포현)에 속했으며, 朝鮮末葉(조선 말엽)엔 藍浦郡(남포군) 熊川面(웅천면)의 地域(지역)
인데,
1914 年 行政區域(행정구역) 改革(개혁)때 盧田里(노전리)와 沙川里(사천리)를 병합 盧川里(노천리)라 해서 保寧郡(보령군)
熊川面 (웅천면)에 編入(편입)되었다.
`1995년 1월 1일 법률 제4774호로 대천시와 보령군 통합, 보령시가 된 후`1995년 3월 2일 보령시 조례 제138호로 웅천면
에서 웅천읍으로 승격되었다.
가랏티
西村(서촌) 서쪽으로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 가랏티 」 라고 부른다. 盧川里(노천리)에서 으뜸되는 마을이다.
옛날에 갈밭이 었던 곳에 마을이 생겼다해서 「 가랏티 」 라고 부른다. 盧田(노전)이라고도 부른다.
녹락곡
「 사노네 」 西(서)쪽으로 골짜기에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녹락곡)이라고 부른다. 옛날에는 노루가 많이 살았다
하는데 노루가 사는 골짜기라 鹿洛谷 「 녹락곡 」이라고 부른다 한다. 지금은 마을이 들어섰다.
사근동 (思勤洞)
「 가랏티 」 東北(동북)쪽으로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思勤洞(사근동)이라고 부른다. 마을에 들어서는 입구 바위에
思勤洞天(사근동천) 네자가 새겨져 있는 마을이다.
「 사천 」, 「 사근리 」, 「 사근천리 」, 「 남그네 」라고도 부른다.
西村(서촌)
「 가랏티 」 서쪽으로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西村(서촌)이라고 부른다.
서쪽으로 마을이 자리해 있다해서 西村(서촌)이라고 부른다.
새터
「 사그네 」 동쪽으로 새로 생긴 마을을 「 새터 」, 新基(신기)라고 부른다. 마을이 새로 생겼다 해서 「 새터 」, 新基(신기)
라고 부르는 마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