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히 미국과 영국 최고 지도자들이 워싱턴에서 회담을 갖고 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의 세계 평화 문제를 논의한 과정에서 한국을 국제 감시 아래 두기로 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1943년 5월 10일 한국애국부인회를 비롯한 한국독립당, 조선민족혁명당, 조선민족해방동맹, 무정부주의연맹, 한국청년회 등은 공동으로 재중국 자유한국인대회(自由韓國人大會)를 개최하였다. 이때 선생은 한국애국부인회 대표로 한국독립당의 홍진(洪震), 조선민족혁명당의 김충광(金忠光), 조선민족해방동맹의 김규광(金奎光), 무정부주의연맹의 유월파(柳月波), 한국청년회의 한지성(韓志成)과 함께 주석단의 일원으로 추대되어 이 대회를 주도하였다. 여기에서 선생을 비롯한 이들 단체의 대표들은 어떤 외세의 압박과 간섭도 반대할 것을 결의하고, “한국은 마땅히 독립국이 되어야 하고, 한민족은 마땅히 자유민이 되어야 한다”고 하는 ‘자유한국인대회 선언문’을 발표하였다. 그리고 이들은 아래의 ‘각 동맹국 영수들에게 보내는 전문’을 성안 발송하여 한국 민족의 완전 독립을 요구하면서 우선적으로 임시정부의 승인을 촉구하였다.
1. 우리는 우리 민족의 영구한 생존발전과 전인류의 진정한 평화와 행복을 찾기 위하여 우리 국가의 완전독립을 주장한다. 2. 전후 한국을 국제 감시해야 한다는 것은 우리 민족의 요구에 위배되며, 또 동맹국의 대(對)일본 작전방침에 해로우며,
또 루즈벨트·처칠 선언의 기본정신에도 배치되는 것이므로 이것을 절대로 반대하는 바이다. 3. 우리는 동맹국의 승리와 일구(日寇)의 멸망을 확실히 믿음으로 단결하고 노력하여 일본을 반대하는 대혁명을 일으키려 한다. 4. 동맹 각국들은 우리 민족의 역량을 인정하여 적극적으로 물자를 원조하고 우선 임시정부의 국제적 합법적 지위를 승인해 주기 바란다.
아울러 이들은, “친애하는 동지 동포 여러분! 우리들은 실로 각 동맹국의 원조를 필요로 한다. 이 위에 가장 필요한 것은 우리 민족의 공고한 단결과 자력 갱생이다. 이러한 역량을 가져야만 완전 독립과 철저한 해방을 획득할 수 있는 것이다. 일어서라! 우리 임시정부의 깃발 아래로 어느 한 사람이나 한 단체라도 모두 모이라! 그리하여 승리적인 전도(前途)를 향하여 용감히 전진하자!”라고 하는 「각 지방 동지와 동포들에게 보내는 공개장」을 채택 발표하여, 임시정부의 깃발 아래 일치 단결하여 우리 민족의 완전 독립과 철저한 해방을 획득하자고 주장하였다.
이와 같이 선생을 비롯한 이들 단체의 대표들은 우리 민족의 완전 독립과 임시정부 중심의 독립운동을 여러 차례 절규하였는데, 이는 광복 이후의 외세 개입과 정치적 혼돈을 우려한 매우 시의적절 한 지적이고 주장이었다. 8·15 광복 이후 선생은 1945년 11월 23일 임정요인 1차 환국 때, 김구, 김규식, 이시영(李始榮), 김상덕(金尙德), 엄항섭, 유동열(柳東說) 등과 같이 그리던 고국 땅을 밟았다. 이후 1946년부터 1962년까지 모교인 정신여자중고등학교 재단 이사장과 이사 등으로 활약하면서 여성교육에 공헌하였다. 선생은 1976년 5월 17일 87세를 일기로 영면하였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