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연말부터 주역을 읽느라 다른 책을 읽지 못했다. 새해가 되니 소설가 50인이 뽑은 베스트 책 목록이 나와 3권을 샀다. 이 책과 "마음에 없는 소리", "아버지의 해방일기"
주역이 워낙 어려운 책이라 읽지 못하고 있다가 서울가는 기차에서 읽으려고 가지고 갔다가 남은 걸 서재에서 읽었다.
"이토록 평범한 미래"는 ‘미래’를 키워드로 두 개의 이야기가 맞물리면서 진행된다. 첫번째는 1999년 여름에 일어난 나와 지민의 이야기다. 스물한 살의 나는 1학기 종강 파티가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은 무렵 지민과 같이 외삼촌이 편집자로 일하는 출판사로 갔다. 출간이 금지되어 도무지 구할 수 없는 장편소설, 그러니까 지민의 엄마가 자살하기 전에 쓴 "재와 먼지"가 어떤 책인지 알아내기 위해서다. 평생 책만 읽어온 외삼촌은 1970년대에 나온 그 책을 떠올리고는 내용을 설명해주는데, 두 사람은 줄거리를 듣고 소스라치게 놀란다.
여기서 두번째 이야기가 시작된다. 소설에는 한 연인이 나온다. 그들은 자신들이 함께하는 시간의 끝, 즉 사랑의 종말이 다가오고 있음을 깨닫고 동반자살을 선택한다. 그런데 그 순간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이 눈앞에 펼쳐지면서 새로운 삶이 시작된다. 이번에는 과거에서 미래를 향하는 정방향이 아니라 역방향으로. 동반자살을 한 그날이 새로운 인생의 첫날이 되고, 자고 일어나면 그 전날이 되는 것이다. 외삼촌의 이야기를 듣고 나와 지민이 놀란 이유는 바로 그 줄거리가 자신들의 미래를 예언하는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그해 여름 동반자살을 할 생각이었다. 두 사람의 계획을 들은 외삼촌은 "재와 먼지"에 대해 이어서 설명한다. 그 소설에서 연인은 시간을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자신들이 처음 만났던 그 순간이 찾아온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때 자신들이 얼마나 기쁘고 설렜는지도. 미래에서 과거로 진행되는 두번째 삶에서 그들은 그 만남으로 인해 일어난 일들을 먼저 경험한다. 미래, 그러니까 원래대로라면 과거를 적극적으로 상상하는 동안 두 사람은 '가장 좋은 게 가장 나중에 온다고 상상하는 일이 현재를 어떻게 바꿔놓는지' 깨닫게 되고, 그 끝에서 시간은 다시 과거에서 미래를 향해 원래대로 흐르기 시작한다.
"다시, 2100년의 바르바라에게"는 조금 더 긴 시간의 차원에서 미래를 상상하는 일에 대해 설명한다. 나는 병원에 입원한 할아버지가 병세가 심해진 뒤로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듯 혼잣말을 하는데, 그 대화에 ‘바르바라’라는 세례명이 반복적으로 등장한다는 말을 듣고 오래전 기억을 떠올린다. 출판사에 다니는 나는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녹취해 책으로 만드는 기획을 진행하다 유야무야된 적이 있었다. 나는 할아버지의 이야기 속에 ‘바르바라’가 있었나 싶어 녹취 원고를 열어 검색해보고, 할아버지가 말하는 바르바라가 바로 할아버지의 막내 여동생, 그러니까 1949년 할아버지가 북한의 수도원에 있을 때 정치보위부원들에게 끌려가 억울하게 죽은 막내 여동생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 일로 할아버지는 영혼이 완전히 폐쇄되는 고통을 겪고 그전과는 다른 사람이 되었다. 하지만 고통 이후에도 삶은 계속되고, 할아버지는 그 속에서 다른 바르바라의 이야기들을 통해 삶을 지속해나갈 동력을 찾아낸다. 그것은 평생 동정을 지키기로 결심하고 스스로 병을 받아들이면서까지 성사를 받아 1850년에 죽은 또다른 바르바라에 대한 것이다.
그 이야기는 1980년에 나온 책에 실려 있지만, 할아버지는 그보다 50년 전에 자신의 할아버지로부터 직접 바르바라에 대해 들어 알고 있었다. 1850년의 바르바라가 1949년의 바르바라와, 또 자신과 이야기를 통해 직접 연결되어 있음을 깨달은 할아버지는 다음과 같은 결론에 이른다. '우리가 육체로 팔십 년을 산다면, 정신으로는 과거로 팔십 년, 미래로 팔십 년을 더 살 수 있다네. 그러므로 우리 정신의 삶은 이백사십 년에 걸쳐 이어진다고 말할 수 있지. 이백사십 년을 경험할 수 있다면 누구라도 미래를 낙관할 수밖에 없을 거야.'
"진주의 결말"은 범죄심리학자인 나와 용의자 유진주의 이야기를 다루며 사건의 진실을 탐색해나가는 소설이다. 시사 프로그램 '사건의 결말'에 출연한 나는 치매에 걸린 아버지를 살해하고 집에 불을 지른 혐의가 있는 삼십대 후반의 독신 여성 유진주에 대해 다음과 같이 분석한다. 그는 능동적인 범죄자라기보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아버지를 모시며 지내는 동안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며 살아온 탓에 우발적으로 범죄를 저지른 수동적인 희생자라고. 그리고 방송이 나가고 다음날 새벽 나에게 유진주가 보낸 메일이 도착한다. 유진주는 말한다. 아빠가 죽기를 바란 건 사실이라고, 아빠의 죽음에 죄책감을 느끼는 건 또한 맞는다고. 하지만 자신이 아빠를 죽인 게 아니라고. 그리고 이때부터 사건을 둘러싼 나와 유진주의 팽팽한 해석의 장이 열린다.
"진주의 결말"이 누군가를 이해하는 것의 (불)가능성을 살인사건을 경유해 탐색한다면, "다만 한 사람을 기억하네"는 연인 사이를 통해 누군가를 기억하는 것의 의미를 살핀다. "다만 한 사람을 기억하네"는 2014년 4월, 나가 옛 연인 희진에게서 메일 한 통을 받으며 시작된다.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처럼 길게 이어지는 그 메일에서 희진은 자신에게 벌어진 우연한 일의 연쇄에 대해 설명한다. 한국의 인디 가수를 대표해 일본에 와 있는데 공연에서 자작곡인 '한 사람을 기억하네'를 부르다 그만 울어버리고 말았다는 것. 공연이 끝나고 이어진 뒤풀이에서 자신을 이번 공연에 초대하기 위해 고생했다고 말하는, 후쿠다 준이라는 오십대의 남자를 만났다는 것. 왜 그렇게 자신을 찾았느냐고 묻는 그녀에게 후쿠다는 10년 전 자신에게 일어난 일에 대해 설명했는데, 그건 희진과 나가 아직 연인이었을 때 찾아간 일본 카페에서 당시 희진이 즐겨 듣던 '하얀 무덤'이라는 노래를 주인에게 틀어달라며 시디를 건넸다가 깜빡하고 시디를 그대로 카페에 두고 나온 일과 관련돼 있다는 것. 당시 연이은 실패 끝에 자살을 생각하던 후쿠다가 우연히 그 카페에 갔다가 어린 시절 자신이 좋아하던 바로 그 노래를 듣고 삶의 의미를 되찾았다는 것. 그리고 카페 방명록에서 '하얀 무덤'의 가사와 함께 ‘H.J’라는 이니셜이 적혀 있는 걸 발견했다는 것. 그래서 그때부터 HJ라는 이니셜을 가진 한국의 인디 가수를 찾았다는 것.
기나긴 설명 끝에 희진은 다음과 같이 덧붙인다. “어느 시점부터인가 줄곧 나를, 한 번도 만나본 적도 없고 얼굴도 모르는 나를 기억하게 된 일에 대해서 생각했어. 나는 그런 사람이 이 세상에 살고 있다는 것조차 모르고 있는 동안에도 나를 기억한 사람에 대해서 말이야. 그렇다면 그 기억은 나에게, 내 인생에, 내가 사는 이 세상에, 조금이라도 영향을 끼칠 수 있을까? 우리가 누군가를 기억하려고 애쓸 때, 이 우주는 조금이라도 바뀔 수 있을까?”
의문형으로 물었지만 우리는 희진이 들려준 후쿠다 준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가 누군가를 기억하려고 애쓸 때, 이 우주는 조금이라도 바뀔 수 있다’는 것을, 그리고 이 작품이 세월호 사건이 일어난 해 겨울에 쓰였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이 말에는 어떤 간절함까지 담겨 있다는 걸 알게 된다.
"사랑의 단상, 2014" 또한 개인적인 차원에서의 변화가 사회적인 차원에서의 변화와 어떻게 연결될 수 있는지 보여준다. 연인과 헤어진 지 삼 년이 된 지훈은 '영원한 여름이란 환상이었고, 모든 것에는 끝이 있다'고 여겨왔지만, 우연히 뉴스 사이트에 ‘사랑해’라고 검색해보았다가 나온 기사들의 목록을 보며 '한번 시작한 사랑은 영원히 끝나지 않는다고, (…) 다만 잊어버릴 뿐이니 기억해야만 한다고, 거기에 사랑이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할 때 영원히 사랑할 수 있다'고 깨닫게 된다. 그 기사들의 목록이란 세월호 사건으로 죽은 아이들에게 부모와 친구들이 ‘잊지 않겠다’는 말과 함께 보낸 사랑의 편지다. 누구도 그 앞에서 사랑의 영원성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2014년의 김연수가 사회적으로 큰 사건이 벌어졌을 때 작가가 할 수 있는 일에 대해 고민했다면, 2020년대의 김연수는 어찌할 수 없는 재난 앞에서 작가가 할 수 있는 일에 대해 고민한 듯 보인다. "난주의 바다 앞에서"의 소설가 정현은 강연 요청을 받아 추자도로 갔다가 30년 만에 우연히 대학 동창 손유미를 만난다. 대학 시절 추리소설을 쓰는 게 꿈이었던 손유미는 그때의 바람대로 추리소설을 쓰면서 살고 있다. 그 시절과 다른 점이 있다면 몇 년 전 아이를 잃고 인생이 크게 한 번 휘청였다는 것. '어떻게 해도 이전의 삶으로는 돌아갈 수 없는 상황'에서 손유미를 일으켜세운 것 중 하나는 언젠가 정현이 들려준 ‘세컨드 윈드’라는 말이다. 운동하는 중에 고통이 줄어들고 운동을 계속하고 싶은 의욕이 생기는 상태를 가리키는 이 체육 용어는 정현의 설명을 따르면 극한의 고통에 이르렀을 때 불어오는 새 바람과 같다.
그리고 세컨드 윈드와 함께 손유미가 떠올린 이야기가 바로 정난주에 대한 것이다. 200년 전 멸문지화를 당하고 갓 태어난 아기와 함께 제주도로 유배를 가야만 했던 정난주는 극심한 고통의 상황 속에서도 할머니가 되도록 오래 살아남았다고 전해진다. 정난주가 어떻게 목숨을 포기하지 않고 그렇게 오래 살 수 있었는지 고민한 끝에 손유미가 도달한 결론은 정난주는 ‘자신이 살아야 아이가 살 수 있다’는 믿음을 붙잡았으리라는 것이었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진주의 결말" 속 '일어날 일은 일어나고 결말은 똑같다. 다만 어떤 징검다리를 거쳐 그 결말에 이를지는 각자가 선택할 수 있다'라는 문장을 상기하게 된다. 결말은 바뀌지 않지만 어떤 이야기를 선택할지는 각자에게 달려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선택은 분명 현재의 자신에게 영향을 준다는 것. 손유미가 현재 전해져 내려오는 정난주의 이야기와는 조금 다른 자신만의 이야기를 만들어낸 것처럼. 그리고 그 이야기가 결정적인 순간에 손유미를 일으켜세운 것처럼.
때문에 "이토록 평범한 미래"에 수록된 8편의 소설을 읽고 나면 우리는 ‘미래를 상상해야 한다’는 말이 ‘이야기를 적극적으로 상상해야 한다’는 의미로도 다가오는 걸 느끼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