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아는 지인과의 미팅 때문에 그의 회사에 갔었다.
그는 안정된 사업을 운영하고 있었다.
직원이 약 30여 명 정도 됐다.
미팅룸에서 커피를 마시며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테이블 위에 몇 가지 신문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매일경제', '조선일보', '스포츠서울', '한국일보' 등이었다.
그런데 '조선일보'가 맨 위에 올라와 있었다.
나는 '조선일보'를 구독하지 않는다.
'조선일보' 뿐만 아니라 '조중동' 자체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우연찮게 다른 회사의 미팅룸에서 맨 위에 놓여 있던 그 신문을 집어들었다.
마침 '주말판'이었다.
주말판이라 곳곳에 유력 인사들의 '심층 인터뷰'가 게재되어 있었다.
내 눈을 일거에 잡아 끈 기사가 있었다.
'김종필' 전 자민련 총재의 인터뷰였다.
기사가 매우 세밀했고 분량도 꽤 많았다.
미팅 시작 전에 그 자리에서 빠르게 훑어 보았다.
한때는 공중을 나는 새도 떨어트릴 만큼 권력의 정점을 거침없이 종횡했던 자였다.
그러나 야속한 세월 앞에 누가 '독야청청'할 수 있겠는가.
세월 앞에 장사 없었다.
지금은 늙고 병들어 존재감이 거의 없는 쇠락한 고목에 불과했다.
수십 년 동안 한국 정치사에서 강력한 파워맨으로 군림했던 자였기에 그의 다양한 인생 감회를 탐독해 보고 싶었다.
노 정객의 소회가 궁금했다.
미팅 후에 사장인 지인에게 양해를 구했다.
'조선일보' 주말판 '김종필 집중 인터뷰'를 카피하여 가져가고 싶다고 했다.
그랬더니 카피하지 말고 그 신문을 통째로 가져가라며 흔쾌하게 승낙해 주었다.
자기도 그렇지만 직원들도 신문에 별 관심이 없다고 했다.
신문을 보더라도 헤드라인만 빠르게 훑고 지나갈 뿐 정독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했다.
대부분의 신문은 펼쳐보지도 않은 채 그대로 폐지함으로 직행하기 일쑤란다.
'주말판'을 들고 내 사무실로 돌아 온 다음 몇 번을 정독했다.
그 사람은 지금 '구순'이 되었다.
'구순'은 '졸수'(卒壽)였다.
'인생을 졸업할 나이'가 됐다는 뜻이다.
남자가 '졸수'에 이르렀으니 비교적 장수한 편이었다.
언제나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권력의 '구중심처'에 있었던 남자였다.
나의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무소불위의 권력으로 한 시대를 종횡했던 자의 인생 마지막 무대가 되게 궁금했다.
그의 느낌, 근황, 감회, 회한, 후회, 여망 등등 단 하나의 편린이라도 탐독하며 확인해 보고 싶었다.
분명 배울점도 있을 거라 믿었다.
기사를 정독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집중하여 연거푸 서너 번을 읽었다.
노 정객의 집중 인터뷰, 결론은 딱 한 하나였다.
그의 입에서 나온 고백은 모든 것이 "헛되고 헛되고 헛되도다"였다.
"헐~~"
의외였다.
또한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세상의 모든 '부귀영화'를 다 누렸던 사람이 있었다.
그는 '솔로몬'이었다.
그가 인생의 마지막 무대에서 쏟아냈던 탄식과 동일했다.
'헛되고 헛된 인생'이었다.
2015년 현재, 세계 제일의 갑부는 단연 '빌 게이츠'였다.
그의 재산은 무려 47조 원 정도였다.
한국 최고의 갑부인 '이건희'는 약 14조 원 정도였다.
그러나 '솔로몬'이 보유했던 모든 재산을 현재 가치로 환산하면 약 125조 원 정도였다.
(학자들의 연구에 의한 결론임)
상상을 불허하는 엄청난 재산이었다.
측량할 수 없을 만큼의 재산과 권력, 천여 명의 여자들, 만인지상의 영광과 명예, 인간이 누릴 수 있는 모든 쾌락과 권력을 다 누렸던
제왕도 말년엔 '헛되고 헛된 인생'을 자복했다.
'졸수'를 맞이한 김 전 총재는 충남 부여의 선산에 미리 자신의 '비석'을 준비해 두었다고 했다.
비문의 내용은 이랬다.
김 전 총재는 일제시대에 태어나서 교육을 받았고, 독립과 한국전쟁 이후에도 '한자 혼용 시대'를 살았던 세대라
비문에 한자를 많이 썼다.
그래도 그가 미리 준비한 비문인 만큼 비문에 나와 있는 글자를 그대로 옮겨 본다.
思無邪를 人生의 道理로 삼고 한평생 어기지 않았으며
無恒産 無恒心을 治國의 根本으로 삼아
國利民福과 國泰民安을 具現하기 위하여 獻身盡力하였거늘
晩壽에 이르러 年九十而知八十九非라고 恨嘆하며
세인들의 물음에는 笑而不答하던 者.
일생동안 內助하며 온정을 베풀어 준 永世伴侶와 함께
이곳에 누웠노라.
요즘 신세대들은 대부분 한자를 어려워 하고 낯설어 하므로 다시 한글로 변환하면서 의미를 풀어 설명해 보자.
내 개인적인 '주석'이니 참작하여 읽기 바란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사무사(생각이 옳바르고 반듯함)를 인생의 도리로 삼고 한평생 어기지 않았으며
무항산 무항심(제대로 먹고 살 수 있어야 바른 마음도 생김)을 치국의 근본으로 삼아
국리민복과 국태민안을 구현하기 위하여 헌신진력하였거늘
만수(오래 살아 죽음이 목전에 이름)에 이르러 연구십이지팔십구비(아흔이 되어보니 여든아홉까지의 인생 모든 것이 헛됨)라고 한탄하며
세인들의 물음에는 소이부답(그냥 웃을 뿐 대답하지 않음)하던 자.
일생동안 내조하며 온정을 베풀어 준 영세반려(영원한 반려자, 박영옥 님, 1929 - 2015, 향년 85세)와 함께
이곳에 누웠노라.
나는 그 사람의 지지자는 아니었다.
그리고 그를 존경하지도 않았다.
다만 이 비문을 몇 번이나 읽고 또 읽으면서 우리네 인생을 생각했다.
유장하고 큰 산맥 같은 우리 모두의 인생 앞에서 다시 한번 조용히 옷깃을 여밀 뿐이었다.
각 개인에겐 천하보다 더 귀한 생명이고 인생이 아니던가.
진정으로 소중한 것,
진정으로 가치있는 것,
진정으로 우리가 추구해야만 하는 것.
그것이 무엇인지,
또한 무엇이어야만 하는지,
그 물음에 대해선 저마다 대답의 논리가 다를 것이다.
한 시대를 쥐락펴락하며 세상을 호령했던 노 정객의 '만시지탄'을 보면서
다시 한번 내 자신의 '인생소명'과 '인생미션'을 뒤돌아 보게 된다.
그리고 낮은 자세와 하심으로 기도할 수밖에 없음을 고백한다.
작은 소유.
따뜻한 나눔.
진실된 사랑.
한결같은 감사와 배려.
이것이야말로 인스턴트 쾌락에 길들여진 현대인들의 메마른 영혼에 단비같은 축복이자 깊은 울림이 아닐까 싶다.
보슬보슬 겨울비가 내리는 일요일 오후다.
남은 시간도 내내 평안하기를 바란다.
안락한 휴식과 힘찬 에너지를 재충전하는 알찬 일요일이 되길 빈다.
파이팅이다.
2015년 1월 25일, 일요일.
풍운아 김종필 전 총재.
(김종필, 1926 - 2018, 향년 92세)
시간이 별로 없었다.
파란만장했던 그의 인생, 그 마지막 무대의 커튼이 내려오고 있었다.
여러 기자들이 그와의 인터뷰를 진행하고자 노력했다.
아직은 또렷한 정신력으로 어느 유력 일간지와 긴 인터뷰를 진행했다.
'헛됨'.
그의 인터뷰는 이 한 단어로 요약할 수 있었다.
여러번 읽고 나서 나도 마음 속으로 한 단어를 각인했다.
그것도 역시 '허망함'이었다.
각자에게 진정으로 소중한 것.
진정으로 가치 있는 것.
헛되지 않을 그 무엇을 위해 늘 깨어 기도하고, 그것에 집중하며 살았으면 좋겠다.
첫댓글 오.. 형님.. 성탄절 오전에 형님의 글을 읽어 내려가며 다시 한번 다짐해 봅니다..
"물질 보다 마음 씀씀이"에 더 집중하고 절제하며 살아가야 겠다는 생각!!!!
우리 인간들은 모두 하고 싶은, 갖고 싶은, 베풀고 싶은 우선순위 들이 있는데 대부분이 시간을 투입하는 절대양은
그 우선순위와는 아주 다르지요.
인간들의 우선순위는 가족, 친구, 선후배들과 사랑,우정,배려 등일 것인데요..
형님의 글이 한 세속적인 인간을 철들게 만들고 계시네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