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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수아서 연구(1)
1. 여호수아는 어떤 책인가
여호수아서는 약속의 땅 가나안을 이스라엘이 어떻게 점령하여 자신들의 소유로 삼았는가를 기록한 책이다. 여호수아서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어진다. 전체의 절반인 1장-12장은 가나안을 점령하는 과정을 보여주고, 나머지 절반인 13장-24장은 지파별로 땅을 분배하여 각자의 소유로 삼는 내용을 소개하고 있다. 전체 내용은 비교적 단순해 보이지만, 이 책의 올바로 이해를 위해서는 그 중심 사상이 무엇인지를 파악할 필요가 있다.
여호수아서의 중심축은 가나안 땅임이 분명하다. 그 땅을 점령하고 차지하는 과정이 이 책의 핵심 내용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문제는 그 땅이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가하는 점이다. 가나안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에게 약속하신 특별한 땅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두 가지 약속을 주셨다. 하나는 자손을 번성케 하시겠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땅을 주시겠다는 약속이다. 하나님의 약속대로 이스라엘은 430년의 애굽 체류생활을 통해 거대한 민족이 되었으며, 출애굽 구원과 시내산 언약을 통하여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거듭났다. 그러나 땅의 약속은 여호수아 시대까지 기다려야만 했다. 그런 점에서 여호수아서는 땅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이 어떻게 성취되었는가를 보여주는 약속-성취 도식의 거룩한 역사 기록이다.
<느보산에서 바라 본 가나안 땅, 가까이에 요르단 계곡과 여리고가 위치하고 있다>
가나안은 이스라엘에게 축복으로 주신 하나님의 선물이다. 가나안이 하나님의 선물이라 함은, 그 땅이 이스라엘의 완전한 소유가 아님을 의미한다. 이스라엘은 단지 그 땅을 청지기와 같이 위탁받아 사용하고 있을 뿐이다. 그 땅의 소유권은 전적으로 하나님에게 속해 있다.(레 25:23) 땅을 제비뽑기로 나눈 것이나, 첫 소산물과 십일조를 하나님께 드려야하는 것(신 26:9-15; 14:22-29) 등은 모두가 땅의 소유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들이다.
땅이 하나님께 속했다는 것은 곧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기준을 지키며 살아가야함을 의미한다. 가나안은 이스라엘에게 특별한 생활양식을 요구하는 하나님의 땅이다. 특히 신명기는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 살면서 평생 동안 지켜야할 규례와 법도들이 무엇인지를 강조하고 있다(신 11:31-32). 가나안 점령을 책임 맡은 여호수아에게 여호와의 율법책을 주야로 묵상하며 그 안에 기록된 것들을 지켜야 한다고 당부한 것도 그 때문이다(수 1:8). 하나님의 율법은 거룩한 백성이 마땅히 순종하며 따라야할 삶의 올바른 방향이며 땅의 풍요로움을 안전하게 보호해주는 하나님의 튼튼한 울타리이다.
하나님이 주신 땅에 살면서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하는 것은 곧 그 땅에게 죄를 지우는 것이며(신 24:4) 그 땅을 더럽히는 일이다(민 35:33-34). 그런 불순종의 결과는 하나님이 주신 선물로서의 땅을 상실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런 비극적 상황을 성경은 ‘땅이 스스로 이스라엘을 토하여 내는 것’이라고 표현하였다(레 18:25).
반면에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순종하며 살아가는 것은 가나안을 축복의 땅 곧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출 3:8)으로 만드는 길이다. 하나님의 선물로서의 가나안은 무엇보다도 물질적 풍요가 넘치는 땅이다. 젖과 꿀이 흐르는 그 땅은 하나님께서 직접 보살펴주시는 땅으로서(신 11:12) 먹을 것이 결핍되거나 부족함이 없는 땅(신 8:9)이다. 그런 축복의 땅은 이스라엘에게 참된 안식을 제공한다. 그것은 물질적 풍요와 더불어 모든 외부환경으로부터 안전하게 보호를 받는 참된 평화이다(신 12:9-10). 그런 점에서 여호수아서는 약속하신 것을 끝까지 이루어주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그런 하나님을 믿고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이 곧 참된 복을 누리는 승리의 길임을 가르쳐주는 책이다.
2. 여호수아와 여호와 전쟁
"강하고 담대하라.
너는 내가 그들의 조상에게 맹세하여 그들에게 주리라 한 땅을 이 백성에게 차지하게 하리라" (수 1:6)
‘여호수아’라는 이름은 "여호와는 구원이시다"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에브라임 지파에 속한 눈의 아들이었던 여호수아의 본명은 ‘구원’이라는 의미의 호세아였다(민13:8; 신 32:44). 그런데 모세는 그를 자신의 수종자로 삼으면서 ‘여호와’가 더해진 여호수아라는 새 이름을 지어주었다(민 13:16). 젊은 시절부터 여호수아는 모세의 마음에 들만큼 신앙이 깊고 맡은 일에 충성을 다하는 인물이었다. 여호수아의 깊은 신앙은 가나안 땅 정탐을 마치고 나서 갈렙과 함께 신앙에 근거한 긍정적인 보고를 한 것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그런 신앙 때문에 여호수아는 갈렙과 함께 가나안에 입국한 단 두 명의 출애굽 제1세대가 되었다.
여호수아는 신앙의 인물이면서도 전쟁에 능한 훌륭한 용사였다. 여호수아가 용사로서의 탁월한 능력을 나타내기 시작한 것은 르비딤에서 벌어졌던 아말렉과의 전투에서였다(출 17:8-16). 그 후로도 여호수아는 가나안을 향하여 나아가는 과정에서 여러 차례 전투를 치렀다. 미디안 족속과의 전투를 비롯하여 요단 동편 땅에서 아모리 족속의 두 왕과의 전투는 모두 여호수아가 주도하여 이긴 전쟁이었다. 전쟁과 관련하여 여호수아와 모세와의 관계는 특별했다. 비록 전쟁터에 나가 직접 싸운 인물은 여호수아였지만, 전쟁을 승리로 이끈 실제 주역은 모세였다. 그것은 아말렉과의 전투에서 이스라엘의 승리는 전적으로 모세의 기도에 근거하였기 때문이다. 모세가 손을 들고 기도하면 여호수아가 승전을 거두었지만, 모세의 손이 피곤하여 내려오면 그것은 곧 이스라엘의 패배로 이어졌다. 그래서 전투가 끝날 때까지 아론과 훌은 모세의 양 손을 받쳐줌으로 더 이상 내려오지 않게 하였다.
<아말렉과의 전쟁이 벌어졌었던 르비딤>
모세의 기도에 힘입어 여호수아가 수행했던 전쟁을 가리켜 ‘여호와 전쟁’이라고 부른다. ‘여호와 전쟁’은 전쟁의 주도권이 여호와께 있음을 의미한다. 곧 여호와는 이스라엘을 대신하여 싸우시는 전쟁의 용사이시다. 전쟁에 참여하는 이스라엘은 자신의 힘으로 싸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싸우심에 순종하며 동참할 뿐이다. 그러기에 전쟁에 나서는 이스라엘에게 요구되는 것은 오르지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다. 하나님께 집중하지 못하거나 전쟁의 두려움 때문에 마음이 흔들리면, 여호와 전쟁을 제대로 수행할 수가 없다. 하나님께서 전쟁에 임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겁내지 말며 두려워 말며 떨지 말며 그들로 인하여 놀라지 말라”(신 20:3)고 명령하셨다. 그리고 새 집을 짓고 낙성식을 거행하지 못한 자, 포도원을 만들로 그 과일을 먹지 못한 자, 여자와 약혼만하고 정식 결혼을 못한 자, 심지어는 두려워서 마음에 겁을 내는 자는 모두 집으로 돌려보내라고 하시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신 20:5-8). 두려워하거나 집안일로 정신을 빼앗기면 여호와께서 주도하시는 전쟁을 망치게 된다.
모세가 죽은 후 가나안 점령을 눈앞에 둔 이스라엘의 최고 지도자 여호수아에게 하나님께서 거듭하여 당부하신 것도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수 1:6, 7, 9)였다. 그것은 앞으로 여호수아가 수행할 전쟁이 세속적인 정복전쟁이 아니라 거룩한 여호와 전쟁임을 보여준다. 모세에게 함께 하였던 것 같이 여호수아를 떠나지 않고 버리지 않겠다고 약속하신 하나님은 율법책을 그 입에서 떠나지 않게 하고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며 그 내용을 지켜 행할 것을 명령하셨다(수 1:8). 살벌한 전쟁터에서 신앙을 굳건히 지키는 길은 곧 하나님의 약속과 말씀에 집중하는 것이다.
구약시대의 여호와 전쟁은 오늘 우리들이 겪고 있는 영적 전쟁의 모형이다. 영적 전쟁에 임하는 우리들에게 하나님은 여전히 마음을 강하게 하고 두려워 말 것을 당부하신다. 그리고 하나님의 약속과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며 지켜 행할 것을 명령하신다. 그것이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능력으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을 이기신 우리의 용사이시며, 세상 끝 날까지 우리와 함께 하시는 영원한 주님이시다.
3. 여리고 정탐이 주는 의미와 교훈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싯딤에서 두 사람을 정탐꾼으로 보내며 이르되 가서 그 땅과 여리고를 엿보라 하매 그들이 가서 라합이라 하는 기생의 집에 들어가 거기서 유숙하더니" (수 2:1)
여호수아는 가나안 정복을 앞두고 두 명의 정탐꾼을 여리고로 보냈다. 여호수아는 왜 곧바로 가나안 땅을 쳐들어가지 않고 정탐꾼을 보냈을까? 가나안 정복을 약속하신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부족해서였을까? 여기에서 여리고 정탐이 주는 의미와 교훈을 찾을 수 있다.
(1) 전쟁의 승패를 쥐고 계신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가나안 정복을 분명하게 약속하셨다. 그러나 그 일이 어떻게 이루어질 것인가에 관하여는 명확한 지시가 없었다. 구체적인 것은 여호수아의 손에 맡겨져 있었다. 전쟁의 지도자로서 여호수아는 올바른 전략을 수립해야 했고, 그것을 위하여 적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수집할 필요가 있었다. 그런 점에서 여리고 성에 대한 정탐은 필수적이었다.
<느보산에서 내려다 본 요단계곡과 여리고 평원>
(2)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정탐을 지시하지는 않으셨다. 그러나 그것은 모세가 명령한 율법을 철저히 지키라는 말씀 속에 담겨져 있는 내용이다.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에게 ‘강하고 담대하라’는 격려의 말씀과 더불어 모세의 율법책을 주야로 묵상하며 그 안에 기록된 모든 것을 지키라고 하셨다(수 1:7-8).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주신 말씀 가운데에는 정탐꾼을 보내어 가나안의 사정을 알아보라는 명령도 포함되어 있다(민 13:1-2). 그런 점에서 여호수아가 정탐꾼을 파견한 것은 모세에게 준 하나님의 지시를 받아들인 것이 된다.
정탐꾼들을 파견하는 일과 관련하여 여호수아는 두 가지 점에서 이전의 모세와는 달랐다. 첫째는, 정탐꾼 파견이 비밀리에 이루어진 점이다. 모세는 가나안 정탐을 공개적으로 실시하였다. 그래서 열두 지파에서 각각 한 명 씩의 대표자를 선발하였고, 정탐 후에는 전체 백성들 앞에서 그 결과를 보고하게 하였다. 그러나 모세가 공개적으로 실시한 정탐은 국론의 분열을 초래하였고, 그로 인하여 가나안 입국은 40년이나 지연되었다. 여호수아는 모세의 잘못된 전례를 반복하지 않았다. 그는 비밀리에 정탐꾼을 파견하였다. 하나님의 일이 때로는 은밀하게 진행될 필요도 있다. 느헤미야도 성벽 재건의 전략을 세우기 위하여 아무도 모르게 예루살렘 성 주변을 순찰한 적이 있다(느 2:12). 두 번째는 지파별 안배 없이 자신의 측근 중에서 직접 정탐꾼을 선발한 점이다. 전쟁에는 치밀한 작전을 수립하는 것과 그것을 주도면밀하게 수행할 필요가 있다. 그렇게 하려면 일사분란하게 움직일 수 있는 명령 지휘 계통이 세워져야 한다. 두 명은 일의 효율성을 극대화시킬 수 있는 최소한의 인원이다. 성경은 재판에서 효력을 발휘할 수 있는 증언도 최소한 두 명의 증인에 의한 것이어야 함을 강조한다(신 19:15).
(3) 정탐꾼들이 살펴본 내용은 여리성의 외적인 요인들이 아니라 여리고성 사람들이 지니고 있는 심리적 상태였다. 그런 점은 라합의 증언을 통하여 잘 드러나 있다. 겉으로는 태연한 척하고 있지만 실제는 너무도 두려워한 나머지 간담이 녹고 정신을 잃을 정도였다.(수 2:9-11) 특히 홍해를 마르게 한 일과 아모리의 두 왕 시혼과 옥을 전멸시킨 일 등은 여리고 백성들에게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그런 사건들은 여리고 사람들로 하여금 여호와께서 천지의 유일하신 참 하나님이심을 믿게 만들었다. 라합과 그의 가족은 그런 위기 속에서 용감하게 여호와의 신앙을 선택한 최초의 개종자자들이었다. 정탐꾼들이 돌아와 여호수아에게 보고한 내용도 “여호와께서 그 온 땅을 우리 손에 주셨고 그 땅의 모든 주민이 우리 앞에서 간담이 녹아있습니다”였다(수 2:24).
여호와의 전쟁은 우리에게 승리가 보장된 싸움이다. 그러나 구체적인 승리는 우리들에게 맡겨져 있다. 그래서 지혜롭게 전략을 세워 하나님의 승리를 우리의 것으로 삼아야한다. 예수님께서도 뱀처럼 지혜로울 필요를 강조하셨다. 그 길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순종하며 사는 것이고 믿음으로 앞서 이루어 놓으신 하나님의 승리를 거두어들이는 것이다.
4. 기적으로 요단강을 건넌 사건의 의미와 교훈
"온 땅의 주 여호와의 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바닥이 요단 물을 밝고 멈추면 요단 물 곧 위에서부터 흘러내리던 물이 끊어지고 한 곳에 앃여 서리라" (수 3:13)
이스라엘은 가나안의 첫 성 여리고를 점령하기 전에 먼저 요단강을 건너가야만 했다. 가나안 정복의 첫 과제는 인간이 쌓아올린 성벽이 아니라 요단강이라는 자연 장벽이었다. 가나안 정복 자체가 그러했듯이 요단강 문제도 여호와 전쟁 개념으로 이해해야 한다. 곧 앞서 전쟁을 수행하시는 하나님과 믿음으로 그 뒤를 따르는 이스라엘의 순종이 승리의 비결이었다.
앞서 행하시는 하나님은 레위 제사장들이 멘 언약궤로 나타났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스스로 성결케 하고이천 큐빗의 거리를 유지하면서 언약궤를 뒤따라갔다.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이 요단강에 잠기자 물은 북쪽 약 25km 떨어진 아담 성읍 주변에서 일어나 한 곳에 쌓였다(수 3:15-16). 그렇게 물 흐름이 끊어지자, 이스라엘은 요단강을 마른 땅처럼 건널 수 있었다. 여기에서 ‘강물이 일어나 한 곳에 쌓였다’는 것은, 지진활동으로 인하여 요단강 양쪽 언덕(고르지역)이 강 주변(조르지역)으로 무너져 내려 자연적인 댐을 형성하였던 것으로 해석된다. 실제로 요단강 계곡 지역은 지금도 지진활동이 자주 일어나고 있다.
<요 단 강>
요단강을 마른 땅처럼 건넌 사건은 여러 가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가나안 정복은 하나님의 주도로 이루어질 것이라는 확신이다. 그것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두 가지 교훈을 가르쳐주셨다. 곧 이스라엘로 하여금 항상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앙을 갖게 하신 것(수 4:24)과 하나님께서 모세와 함께 하신 것처럼 여호수아와도 함께 하심을 보여주신 것이다(수 3:7; 4:14). 요단강을 기적으로 건넌 것은 이스라엘뿐 아니라 가나안 땅에 살고 있던 다른 족속들에게도 커다란 영향력을 끼쳤다. 여호와의 손이 얼마나 크고 강한 가를 목격한 주변의 모든 백성들은 마음이 녹아 내리고 정신마저 잃어버릴 정도였다(수 4:24; 5:1).
요단강을 기적적으로 건넌 사건과 관련하여 성경은 후손들을 위한 교육적 기능을 강조하고 있다. 여호수아는 이스라엘의 각 지파에서 한 명씩 열두 명을 선택하여 마른 땅이 된 요단강 안에서 각각 하나씩 열두 개의 돌을 가져오게 하였다(수 4:2-3). 그리고 그 돌을 길갈에 기념비로 세웠다. 그런데 그것은 단순히 승전을 기념하는 것이 아니라, 후손들에게 역사적 교훈을 가르치는 더 큰 목적의 기념비였다. 후일에 후손들이 그 돌들이 무엇인가를 묻게 되면, 이스라엘이 기적적으로 요단강을 건넌 사건을 가르치라는 것이다(수 4:21).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요단강 기적은 다시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교육을 통하여 하나님의 역사는 다음 세대에게 이어져 아름다운 신앙 유산이 되었다. 교육은 하나님의 역사와 기적을 재생산하는 거룩한 통로이다.
요단강 사건은 가나안 입국과 출애굽 사이에 깊은 연관성이 있음을 보여준다.
첫째는, 홍해와 요단강을 하나님의 기적으로 건넌 것이다. 두 사건 모두는 물과 관련이 있고, 하나님은 인력으로 어쩔 수 없는 그 장벽을 기적으로 해결해주셨다(수 4:22-23).
둘째는, 모세와 여호수아의 지도력이다. 요단강을 건넌 사건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가 모세와 동등한 지도자임을 확증시켜 주셨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와 함께 하셨듯이 여호수아와도 함께 하셨고(수 3:7), 여호수아를 크게 하시어 모세처럼 백성들이 두려워해야할 지도자가 되게 하셨다(수 4:14).
셋째는, 두 사건 모두에 교육적 기능의 강조가 있다는 점이다. 출애굽에서는 유월절을 통한 교육이 관련되어 있으여(출 12:26-27), 가나안 입국에서는 길갈의 돌기둥들이 교육적 기능을 지니고 있다(수 4:21-22).
여호수아서는 왜 출애굽과 가나안 입국의 유사성을 부각시키고 있는 것일까? 출애굽이 이스라엘을 위한 구원의 시작이라면, 가나안 입국은 그 구원을 완결시키는 중요한 과정이다. 그러나 출애굽 후 이스라엘은 불순종으로 가나안 입국에 실패하였다.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수아의 새로운 영도력과 그를 따르는 순종의 신앙으로 가나안 정복을 이루는 주역이 되었다. 여호수아서는 그런 반전의 역사를 두 사건의 대비로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5. 길갈에서 행한 할례
“그 때에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너는 부싯돌로 칼을 만들어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다시 할례를 행하라 하시매 여호수아가 부싯돌로 칼을 만들어 할례 산에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할례를 행하니라” (수 5:2-3)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을 건넌 후 처음으로 진을 쳤던 곳은 길갈이다(수 4:19). 길갈은 ’굴러가다‘를 뜻하는 동사에서 파생된 것으로 애굽의 수치가 떠나갔음을 의미한다(수 5:9). 옛 길갈이 정확하게 어디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성경에서 ‘여리고 동편 경계’(수 4:19)라고 언급한 것을 볼 때, 요단강과 여리고 사이에 있던 위치하였음은 분명하다. 여리고로부터 북동쪽으로 2km 정도 떨어진 곳에 옛 길갈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것은 1세기 역사학자였던 요세푸스가 그의 책 「유대고대사」제 5권 1장에서 언급한 내용에 근거를 두고 있다. 길갈로 추정되는 지역 부근에서는 지금도 부싯돌들을 쉽게 볼 수 있다.
요단강을 건넌 이스라엘 백성들은 본격적인 가나안 정복을 앞두고 자신들을 점검한 필요가 있었다. 그들에게 무엇보다도 필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새롭게 하는 일이었다. 그런 마지막 과정이 진행되었던 곳이 길갈이다. 길갈에서 있었던 가장 중요한 사건은 할례를 시행한 일이었다(수 5:2-9). 여호와께서는 길갈에 도착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다시 할례를 행하라’고 명령하셨다(수 5:2). 여기에서 ‘다시’가 의미하는 것은 이미 할례를 받은 사람들에게 한 번 더 할례를 행하라는 것이 아니다. 애굽을 떠나기 전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두 할례를 받았었다(출 12:43-49). 그런 점에서 요단강을 건넌 후 길갈에서 행한 할례는 출애굽 이후 광야에서 태어난 새로운 세대들을 위한 것이었다. 그들은 광야에서 40년을 지내오는 동안 할례 받을 기회가 전혀 없었다.
애굽에서 있었던 첫 번째 할례와 길갈에서 있었던 두 번째 할례는 모두가 유월절 절기와 관련이 있다. 애굽에서의 첫 할례는 유월절 식사에 참여하기 위한 선제적 조치였다. 그 때에는 이스라엘 백성들뿐 아니라 그들과 함께 지내는 종들과 이방 거류민들도 할례를 받고 나서 유월절 식사에 참여할 수 있었다. 길갈에서의 할례 역시 유월절과 관련이 있다. 그들이 할례를 시행한 후 곧바로 지킨 절기가 유월절이었다(수 5:10). 역사적으로 이스라엘 민족 전체가 동시에 할례를 받은 것은 출애굽 때의 할례와 길갈에서의 할례 두 차례 뿐이었다.
할례의 기원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으신 언약과 관련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시면서 두 가지 곧 그의 자손이 번성할 것과 그들이 가나안 땅을 차지하게 될 것을 약속하셨다. 그러면서 아브라함에게 그 언약을 후손 대대로 지킬 것과 그 언약의 표징으로서 할례시행을 명령하셨다(창 17:1-14).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대로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큰 민족으로 성장하였고, 출애굽 구원과 시내산 언약을 통하여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새롭게 태어났다. 이스라엘 자손이 큰 민족으로 번성하게 될 것이라는 하나님의 첫 번째 약속이 구체적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이제 요단강을 건넌 이스라엘은 두 번째 약속인 가나안 땅 정복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이제 언약의 두 약속이 모두 이루어지는 역사적 사건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그런 중차대한 일을 앞두고 할례를 행한 것은 이스라엘이 언약백성으로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새롭게 재확인하는 기회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길갈에서의 할례는 그런 기본적인 의미 그 이상이 있었다. 그것은 길갈에서 행한 할례가 아브라함이 처음으로 행했던 할례와 보완적 관계에 있다는 점이다. 아브라함이 행한 첫 할례가 미래에 이루어질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수용하며 그 믿음을 굳게 지키겠다는 신앙고백이라면, 길갈에서 할례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의 최종적 성취를 이루기 위한 최종적 조치였다. 약속을 믿음으로 수용하는 차원이 아니라 그 일을 구체적으로 이루어나가겠다는 적극적 참여를 선언하는 결단이었다.
가나안 땅 정복을 앞두고 할례가 우선적으로 중요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이스라엘은 출애굽구원과 시내산 언약을 통하여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되었다. 지나간 40년의 광야생활을 통하여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지키시며 인도해주셨다. 그러나 마지막 가나안 입국을 앞두고는 하나님께서 언약의 외적 징표인 할례를 요구하신 것이다. 형식은 쓸데없는 장식이 아니다. 그것은 내용을 담은 중요한 그릇이기도 하다. 형식은 내용과 구별되는 요소가 아니라 오히려 형식 자체가 중요한 내용이 될 수도 있다. 모세는 출애굽을 위한 하나님의 지도자로 부름을 받았다. 그런 모세에게 남아있었던 문제는 자신의 아들에게 할례를 행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모세의 약점을 엄중하게 추궁하신 적이 있었다(출 5:24-26). 모세는 그때의 위기를 십보라의 지혜로운 행동으로 잘 극복할 수 있었다. 하나님께서 여호수아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할례를 시행하게 하신 것은 그들에게서 ‘애굽의 수치’를 떠나게 하시기 위함이었다(수 5:9). 여기에서 ‘수치’는 애굽에서 노예생활을 하며 겪었던 이스라엘의 낮은 신분을 의미한다. 길갈에서 할례를 행함으로 그들은 더 이상 애굽의 노예가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그 신분이 격상된 것이다. 그것이 가나안 정목이라는 언약의 성취를 앞두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해야 할 과제였다.
6.길갈에서 그친 만나
“또 그 땅의 소산물을 먹은 다음 날에 만나가 그쳤으니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시는 만나를 얻지 못하였고 그 해에 가나안 땅의 소출을 먹었더라” (수 5:12)
길갈에서 있었던 중요한 또 다른 사건은 만나가 중단된 것이다. 이스라엘이 요단강을 건너 길갈에 진을 치면서 40년 광야생활 내내 아침마다 공급되었던 만나가 그쳤다. 만나의 중단은 그동안 베풀어 주셨던 하나님의 축복이 끝났다는 의미가 아니다. 만나의 중단에는 그 이상의 더 큰 의미가 숨어 있다.
만나가 처음 내린 시기는 출애굽한 후 한 달이 되던 때였다 당시 이스라엘은 홍해를 하나님의 기적으로 건너 엘림과 시내산 사이 신광야에 이르게 되었다. 그런데 사막 한 가운데에서 이스라엘은 큰 위기를 만났다. 그것은 애굽에서 준비해온 모든 양식이 떨어진 것이다. 양식이 없어 굶주리게 된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와 아론을 향하여 원망과 불평을 터뜨렸다. 애굽에서는 고기 가마 곁에 앉아 잘 먹고 잘 지냈었는데, 이제는 광야 사막에 나와 꼼짝없이 굶어 죽게 되었다는 것이다(출 16:1-3). 그런 위기 상황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만나 공급을 시작하셨다. 그리고 광야 40년 생활 동안 만나의 공급은 중단 없이 지속되었다.
하나님의 만나 공급에는 몇 가지 중요한 신앙적 요소가 들어 있다.
첫째는 만나의 공급이 이루어진 곳이 광야라는 점이다. 광야는 인간의 능력이 전혀 발휘될 수 없는 장소이다. 아무리 뛰어난 능력이라도 아무 소용이 없는 곳이 광야이다. 광야에서 인간의 능력은 극소화되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둘째는 만나의 공급은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를 책임져 주시는 하나님을 보여준다. 인간에게 절대 한계점이 되는 광야에서 하나님은 오히려 모든 것을 가능케 하시는 절대 긍정이 되신다. 그런 하나님의 모습은 만나의 공급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셋째는 만나는 단순히 삶을 유지시켜주는 양식이라는 차원에 머무르지 않는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광야는 가나안을 향하여 가기 위한 여정이다. 그런 점에서 만나의 공급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순종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축복이며 보장이다. 예수께서도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면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해주신다고 약속하셨다(마 6:33). 이스라엘이 매일 아침 만나를 거두어들이는 것도 하나님의 지시를 따라야만 했다. 곧 한 사람이 하루에 한 오멜만의 만나를 거둘 수 있었고, 다음날 아침까지 남겨두지 말아야 했다(출 16:16, 19). 반면에 안식일 전날에는 안식일 몫까지 합쳐서 두 배의 만나를 거두어 들였다. 그것은 안식일에 만나를 거두러 밖으로 나가지 말아야 했기 때문이다(출 16:23).
그러면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 길갈에 도착했을 때 왜 만나가 그친 것일까? 이스라엘은 더 이상 광야가 아닌 하나님의 약속하신 땅,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도착했기 때문이다. 광야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하신 하나님은 가나안 땅에서도 여전히 이스라엘을 책임져 주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이제는 삶의 환경이 바뀌었다. 그들은 더 이상 광야에 갇혀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들의 힘과 능력을 마음껏 발휘할 새로운 가능성의 땅 가나안 땅으로 들어섰다.
만나가 그친 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의 중단이 아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에게 일할 능력이 있음을 인정해 주신 하나님의 인격적 배려였다. 그런 점에서 만나의 중단은 오히려 더 큰 축복을 향하여 나아가는 전환점이 될 수 있었다. 성경에서 강조하는 축복의 근본적 의미는 ‘생산성’의 회복이다. 곧 축복은 만들어진 결과에 대한 관심이 아니라 우리에게 주어진 가능성에 더 큰 의미를 두고 있다. 특히 우리들의 삶과 직결된 땅과 관련된 축복은 더욱 그런 점이 부각되어 있다. 신명기에서는 토지의 소산이 많아지는 축복을 ‘여호와께서 하늘의 아름다운 보고를 열어 땅에 때를 따라 비를 내리시고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주시는 것‘이라고 하였다(신 28:11-12). 비를 내려주시는 하나님과 열심히 일하는 이스라엘이 함께 손을 마주 잡을 때 축복된 결실을 거둔다는 것이다. 가나안 땅에서 이스라엘은 가만히 앉아서 하나님이 주시는 만나만을 받아먹는 유아적 존재가 아니다. 이제는 스스로 일하여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축복의 결실을 창출하는 성숙한 신앙으로 거듭나야 한다. 그것이 길갈에서 만나가 그친 근본적 이유이다.
7. 여호와의 군대 대장 앞에서 선 여호수아
"여호수아가 여리고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에 눈을 들어 본즉 한 사람이 칼을 빼어 손에 들고 마주 서 있는지라 여호수아가 나아가서 그에게 묻되 너는 우리를 위하느냐 우리의 적들을 위하느냐 하니 그가 이르되 아니라 나는 여호와의 군대 대장으로 지금 왔느니라 하는지라 여호수아가 얼굴을 땅에 대로 엎드려 절하고 그에게 이르되 내 주여 종에게 무슨 말씀을 하려 하시나이까 여호와의 군대 대장이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하니라 하니 여호수아가 그대로 행하니라” (수 5:13-15)
요단강을 건너 길갈에 진을 친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정복을 위한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다. 이제는 믿음으로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 그 땅을 점령하는 일만이 남았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는 견고한 여리고가 버티고 있었다. 1907년부터 있었던 여러 고고학자들의 발굴 작업에 따르면, 여리고 성은 견고한 바윗돌 기초 위에 튼튼한 성벽을 세운 도시였다. 여호수아는 그런 문제들을 직접 점검하기 위하여 여리고로 가까이 다가가 성 주변을 답사하였다. 그러던 중에 여호수아는 여호와의 군대 대장을 만나게 된다. 그것은 가나안 정복을 앞둔 여호수아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여호수아가 여호와의 군대 대장을 만난 시점은 여리고 성을 둘러보던 중이었다. 가나안 정복의 책임을 맡은 지도자로서 앞으로 일전이 불가피한 여리고 성을 직접 점검하는 일은 중요했을 것이다. 더구나 여리고와 같이 견고한 성읍을 포위 공격해 본 경험이 없는 여호수아로서는 여러 정황을 상세하게 파악할 필요가 있었다. 그런 점에서 여호수아의 그런 행동은 적절한 일이었다.
그러나 견고한 여리고 성을 바라보면서 더욱 위축된 그의 마음이 문제였다. 눈앞에 다가온 현실 문제 앞에서 그의 마음은 크게 억눌려 있었다. 무엇보다도 여리고의 견고함에 비하여 열악한 이스라엘의 무기가 걱정스러웠을 것이다. 이스라엘이 보유하고 있던 무기로는 칼과 창과 활 정도였다. 그런 무기로는 여리고와 같이 견고한 성을 공략하기에 역부족이었음이 분명하다.
여리고 성 공격을 앞두고 여호수아가 느낀 심리적 부담은 여호와의 군대 대장을 만나 그에게 던진 질문 속에 잘 드러나 있다. 여호수아는 칼을 빼어 손에 들고 있던 여호와의 군대 대장에게 “너는 우리를 위하느냐 우리의 적들을 위하느냐”라고 물었다. 그런 질문 속에는 전쟁의 당사자가 이스라엘과 여리고 백성임이 분명하게 전제되어 있다. 여호와의 군대 대장은 제삼자적 입장에 있을 뿐이다. 이는 여리고와의 전쟁을 주도해야할 사령관이 곧 여호수아 자신임을 보여준다. 여호와 전쟁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그것은 크게 잘못된 자세였다. 여호와 전쟁에서 주도권은 이스라엘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있다. 이에 여호와의 군대 대장은 여호수아의 잘못된 자세를 고쳐주기 위해 나타난 것이다.
여호와 군대 대장의 답변은 “아니다”였다. 그는 이스라엘을 위해서 온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여리고를 위해서 온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여호와의 군대 대장’으로 왔다. 곧 이스라엘이 여리고를 점령하는 일은 여호수아가 책임질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직접 수행하시게 될 거룩한 전쟁임을 밝힌 것이다. 여호수아는 여리고와 맞서 싸울 진짜 지휘관이 아니다. 그는 거룩한 여호와 전쟁에 참여해야할 군인일 뿐이다. 전쟁의 주도권이나 전쟁의 승리는 모두가 하나님 손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여호와의 군대 대장을 만나 자신의 잘못을 깨우친 여호수아는 즉시 땅에 엎드려 절을 하였다. 여호수아는 자신의 잘못을 돌이키고 하나님 앞에 절대 순종의 자세를 취한 것이다. 이에 여호와의 군대 대장은 여호수아에게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고 명령하였다. 신을 벗는 행위는 종이 주인에게 보여주는 존경과 순종을 의미한다. 여호와 전쟁에서 승리를 얻는 비결은 겸손히 하나님께 무릎을 꿇고 그분의 권위와 능력 앞에 순복하며 따르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능력 있는 손아래서 겸손하게 행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높여주시는 분이시다(벧전 5:6). 여리고 성 점령을 앞두고 여호와의 군대 대장은 여호수아가 가지고 있었던 잘못된 자세를 고쳐주었다. 여호수아는 더 이상 여리고 성 점령의 부담에 억눌려 있을 필요가 없었다. 오히려 하나님의 명령에 믿음으로 순종하며 나아가 하나님의 승리를 얻는 것이 그가 할 일이었다. 그것이 가나안 정복을 성공적으로 이루는 비결이었다.
8. 여호수아가 함구령을 내린 이유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너희는 외치지 말며 너희 음성을 들리게 하지 말며 너희 입에서아무 말도 내지 말라 그리하다가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여 외치라 하는 날에 외칠지니라"(수 6:10)
여호수아가 여호와 군대장관을 만나고 난 뒤 본격적인 가나안 점령이 시작되었다. 가나안 점령의 첫 관문은 여리고성이었다. 여호수아는 더 이상 여리고성의 견고함을 두려워하거나 사기가 위축될 필요가 없었다. 가나안 점령은 여호와께서 주도권을 가지고 싸우시는 전쟁이기 때문이다. 그가 비록 이스라엘의 군사령관 위치에 있었지만, 그는 여호와의 전쟁에 참여하는 한 용사에 불과하였다. 그것이 여호와의 군대장관을 만나서 그가 배운 점이다.
여호와께서 주도하시는 전쟁은 이미 승리가 보장되어 있었다. 여호수아서 본문은 두 가지 점에서 그것을 강조하고 있다.
첫째는, 여리고 성문이 굳게 닫혀있고 출입하는 사람이 전혀 없었다(수 6:1). 그들의 사기는 이미 땅에 떨어져 있었다. 정탐꾼들의 정세파악에서 볼 수 있듯이, 출애굽 사건이나 요단 건너편 아모리 왕들이 당한 일들로 인하여 여리고 사람들의 마음은 녹아 정신이 없었다(수 2:11). 전쟁을 시작하기도 전에 패전을 자인한 셈이다.
둘째는, 여리고와 그 왕과 용사들을 이스라엘 손에 붙이시겠다는 하나님의 선언이다(수 6:2). 여호와 전쟁에서 하나님의 허락은 무엇보다 중요하였다. 아무리 잘 훈련된 군대와 훌륭한 무기를 갖추고 있다하여도 하나님의 허락 없이 전쟁에 나서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불신앙이며 패전을 자초하는 일이었다. 하나님의 허락은 곧 전쟁에서 이긴다는 보장이었다.
아무리 승리가 보장되어 있다고 하여도, 실제 전쟁에서 승리를 얻기 위해서는 철저한 준비가 필요했다. 여기에서의 준비는 전쟁을 위한 훈련이나 기술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대한 신뢰성 곧 하나님의 명령에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신앙적 자세를 의미한다. 어떠한 명령이 떨어지다 하여도 그것을 전적으로 믿고 따라야만 한다.
여호수아를 통하여 하달된 여리고성 점령계획은 너무나도 단순했다. 온 이스라엘이 양각나팔을 들든 제사장들과 함께 굳게 닫힌 여리고성을 일주일동안 도는 것이 전부였다. 첫 육일동안은 매일 한 바퀴씩 돌고, 마지막 날에는 일곱 바퀴를 돌아야 했다. 마지막 날 일곱 바퀴를 돌고나서 온 백성이 큰 소리로 외치면 견고한 여리고성이 일순간에 무너진다는 것이다(수 6:3-5). 전쟁을 위한 작전계획치고는 너무도 단순하여 오히려 현실성이 없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 명령을 따라야 하는 것이 승리의 비결이었다.
하나님의 작전계획을 전달받은 여호수아는 백성들에게 한 가지 특별한 명령을 내렸다. 그것은 마지막 날 온 백성이 큰 함성으로 외치기 전까지는 절대로 입을 열지 말라는 것이다. 여호수아는 그 점을 세 번이나 강조하고 있다. “너희는 외치지 말며, 너희 음성을 들리게 하지 말며, 너희 입에서 아무 말도 내지 말라”(수 6:10)
왜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런 함구령을 내린 것일까? 그것은 하나님의 작전계획에 대한 이스라엘의 신앙적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가를 보여준다. 견고한 여리고성을 포위한 채 하루에 한 바퀴씩 돌라는 하나님의 작전계획은 아무리 받아들이기 어려워도 그대로 순종하며 따라야만 했다. 처음에는 큰 어려움 없이 하나님의 지시대로 따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문제가 생길 여지가 많았다. 열심히 지시대로 따르고 있긴 하겠지만 성이 무너질 것 같은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을 수 있다. 그런 상황 속에서 성미가 급한 누군가가 쓸데없는 일을 한다고 하면서 불평을 털어놓는다면 그것은 순식간에 전체에게로 번져나갈 수 있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이 지시하신 마지막 날이 되기 전에 이스라엘은 중심을 잃게 되고 하나님의 계획은 중도에서 물거품이 될 수 있다. 여호수아는 그런 사태를 미리 막기 위하여 철저한 함구령을 내린 것이다. 여호와 전쟁에 참여하는 거룩한 병사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마지막까지 믿음을 지키며 인내로 견디는 것이다. 여호수아가 함구령을 내린 의미가 거기에 있다.
9. 운명이 뒤바뀐 두 가정
“아간이 여호수아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참으로 나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 범죄하여 이러이러하게 행하였나이다”(수 7:20)
여리고성 점령과 관련하여 운명이 뒤바뀐 두 가정이 있었다. 라합과 아간의 가정이다. 여리고성의 기생이었던 라합은 온 가족이 모두 죽을 운명이었지만 구원을 받았고, 승전의 기쁨을 나눌 아간은 그의 가족과 함께 돌에 맞아 죽임을 당했다.
라합과 그의 가족들이 멸망을 피할 수 있었던 것은 두 정탐꾼을 숨겨준 공로 때문이었다. 그녀가 동족을 배반하면서까지 그들을 숨겨준 것은 정탐꾼들의 처지가 불쌍해도 아니고 뇌물을 받고 눈감아 준 것도 아니었다. 그것은 그녀가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는 진실한 신앙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비록 소문을 통해서 들은 것이지만, 라합은 하나님에 대하여 정확한 정보와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출애굽 시키셨을 뿐만 아니라 광야생활을 인도하시면서 요단강 건너편 지역을 점령케 하신 전능의 하나님이셨다(수 12:10-11). 라합은 여리고성도 곧 하나님에 의하여 점령당할 것을 예견하면서 과감하게 하나님 편을 선택하였다. 라합은 하나님을 정확하게 이는 지식만이 아니라 확신과 함께 과감한 결단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녀는 균형을 갖춘 건전한 신앙의 소유자였다.
라합의 운명과는 정반대적으로 아간은 하나님 백성의 거룩한 대열에서 제외된 인물이 되었다. 아간이 그런 비극적 운명을 맞이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는 여리고성을 점령하는 과정에서 전리품 가운데 일부를 감추어 자기의 것으로 삼았다. 그것은 시날산 외투 한 벌과 은 이백 세겔, 그리고 오십 세겔 나가는 금덩이였다. 세겔은 보통 11.42 그램에 해당되는 무개 단위였다. 그렇다면 이백 세겔(2284g)의 은과 오십 세겔(571g)의 금은 상당한 액수의 귀금속이라 할 수 있다. 그가 훔친 물건이 고가의 귀중품이기 때문에 그런 혹독한 처벌을 받은 아니다. 그의 잘못은 그는 하나님의 명령을 경홀히 여긴 것이다. 여호수아는 여리고성 점령을 앞두고 전쟁에서 얻은 전리품은 모두 여호와께 바쳐야 할 것을 강조하였다(수 6:17). 아간은 그 명령을 어긴 것이다.
여기에서 ‘여호와께 바쳐야할 물건’은 히브리어로 ‘헤렘’이라 하는데, 이 단어를 우리말 성경에서는 여러 단어로 풀어서 번역하였다. ‘헤렘’은 여호와 전쟁에서 중요한 개념이다. 전쟁에서 승리한 자에게는 전리품이 주어지는데, 그것을 여호와 전쟁에서는 ‘헤렘’이라고 부른다. 우리말 성경에서 ‘여호와께 바칠 물건’이라고 번역한 것도 그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헤렘’을 철저하게 불태워 없애버리라고 명령하신다. 완전히 불태워 없애버림으로서 하나님께 온전히 드리는 제물을 삼으라는 것이다. 영어성경에서 ‘헤렘’을 ‘total destruction'으로 번역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여리고성에서 얻은 ’헤렘‘은 두 가지 방법으로 처리되었다. 사람과 가축을 비롯하여 모든 물건은 다 불태워버려야 했고, 은금과 동철기구는 여호와의 집 곳간에 들이도록 했다(수 6:19). 전리품을 완전히 불태워 없애버리는 이유는 이스라엘을 위한 하나님의 조치였다. 당시 사회에서 대부분의 소유는 이방신들을 섬기는 것과 관련이 있었다. 그런 물건들을 지니게 살다보면 자연히 이방신들과 관련된 문화와 풍습에 영향을 받을 수가 있었다. 그것을 미리 차단시키는 방법이 완전하게 소멸시키는 ‘헤렘’이었다. 아간이 하나님의 ’헤렘‘ 중 일부를 훔친 것은 작은 일처럼 보이지만, 전체 이스라엘을 위해서는 마땅히 도려내야만 했던 아픈 부분이었다.
여리고성 점령과정에서 운명이 뒤바뀐 사건과 관련하여 주목해야할 점은 한 개인의 행동이 전체 가족에게 중대한 영향력을 끼쳤다는 점이다. 공동체 안에서 개인은 전체의 운명을 바꿀 수 있는 영향력을 지닌 개인이다. 전체의 운명을 바꾼 한 개인의 행동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우선적이었다. 비록 기생 신분의 이방인이었지만 하나님을 전적으로 믿었던 라합은 하나님 백성의 거룩한 대열에 동참할 수가 있었다. 아간은 그것과는 정반대의 경우가 되었다.
10. 아간에게서 배우는 교훈
“내가 노략한 물건 중에 시날 산의 아름다운 외투 한 벌과 은 이백 세겔과 그 무게가 오십 세겔 되는 금덩이 하나를 보고 탐내어 가졌나이다 보소서 이제 그 물건들이 내 장막 가운데 땅 속에 감추었는데 은은 그 밑에 있나이다 하더라”(수 7:21)
가나안 정복의 첫 관문이었던 여리고성을 무너뜨린 것은 이스라엘에게 너무도 큰 감격이었다. 하나님의 도우심 앞에서는 어떠한 것도 맞수가 될 수 없다는 확신을 얻은 전쟁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승리의 기쁨 뒤에는 어두운 그림자가 하나 있었다. 그것은 아간의 범죄였다. 그의 잘못은 자신과 함께 가족 전체의 비참한 죽음을 가져왔을 뿐 아니라 여리고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 작은 규모의 아이성에게 패배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사도바울이 강조하였던 것처럼, 과거 이스라엘의 역사는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경계와 교훈들이다(고전 10:11). 그렇다면 아간이 저지른 범죄는 우리들에게 어떠한 교훈을 전해주는 것일까?
아간이 범한 죄는 여리고성을 점령하면서 하나님께 바쳐야할 전리품 가운데 세 가지를 감추어 자신의 소유로 삼은 것이다. 그것은 시날 산의 아름다운 외투 한 벌과 은 이백 세겔, 그리고 오십 세겔의 금덩이 하나였다. 아간 자신이 고백한 내용에 따르면, 그는 그것들을 보는 순간 탐심이 생기게 되어 결국은 자신의 것으로 삼게 되었다(수 7:21).
여기에서 그의 잘못은 세 단계를 밟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아간이 죄를 짓게 된 첫 번째 단계는 물건들을 보는 것이었다. 그것은 전쟁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불가피한 일일 수 있었다. 어쩌면 여호와께 바치기 전에 그 물건들을 잠시 아간이 보관하는 책임을 맡았는지도 모른다. 문제는 눈으로 보는 것에 머물지 않고 마음속의 탐심으로 연결되는 두 번째 단계가 있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런 탐심에 사로잡힌 아간은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마지막 실행 단계에 빠지고 말았다. 그러한 세 단계의 범죄 과정은 하와가 뱀의 꼬임에 빠져 죄를 짓는 과정이나 다윗이 밧세바를 범하는 과정에서도 마찬가지였었다(창 3:6; 삼하 11:2-4).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끊임없이 다가오는 유혹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요일 2:16)이다.
아간이 범한 죄의 본질은 탐심이었다. 그가 금과 은을 보는 순간 그는 그것이 자신에게 평생 걱정 없이 행복하게 살게 해 줄 것으로 착각하게 만들었다. 일종의 물질만능주의에 빠진 것이다. 또한 시날 산 고급 외투를 보면서 그는 그것이 자신의 외양을 멋있게 꾸며줄 것이라고 상상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모든 것은 하나님을 떠난 인간이 추구하는 잘못된 세속적 유혹일 뿐이다. 참된 행복과 의미 있는 삶의 보장은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다. 예레미야가 지적한 것처럼, 생수의 근원되시는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노력은 터진 웅덩이에 물을 모으려는 헛수고에 불과하다(렘 2:13). 예수님의 비유에 나오는 부자가 어리석은 자가 된 것도 하나님을 도외시한 채 세속적인 것에만 관심을 몰두했기 때문이었다(눅 12:13-21).
신약성경은 잘못된 탐심을 우상숭배에 해당된다고 규정하고 있다(엡 5:5; 골 3:5). 지나친 욕심이나 탐심은 관심을 하나님보다 물질을 더 앞세우는 것이기 때문에 눈에 보이지 않는 우상숭배이다. 욕심을 극복하기 위한 방법은 세상이 주는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하나님의 평강과 기쁨을 경험하면서 하나님의 것에 우선순위를 두는 것이다. 그것은 곧 무엇을 먹고 마실까를 염려하지 않고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바른 신앙의 삶을 의미한다(마 6:33).
이간의 일차적 잘못은 하나님의 물건을 범한 것에 있다. 그러나 그에 못지않게 결정적 잘못은 회개할 기회를 스스로 놓친 점이다. 아이성 전투에서 패배한 여호수아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하는 중에 실패의 원인이 이스라엘 내부에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는 범죄자가 누구인지를 색출하기 위하여 이스라엘 전체 지파를 모아놓고 해당 지파와 족속과 가족을 차례대로 선별하였다. 긴 선별과정을 거친 결과 아간이 뽑히게 된 것이다. 아간이 스스로 자신이 범한 죄를 고백한 것을 그런 긴 선발 과정을 거치고 난 이후였다. 너무 늦게 그것도 어찌할 수 없는 상황에 부닥치게 되자 자신의 잘못을 밝힌 것이다. 그것은 참된 회개라고 할 수가 없다. 더 이상 피할 길이 없는 막판에 몰려 자신의 잘못을 실토한 것에 불과했다.
참된 회개가 없이는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이 불가능하다. 가룟 유다는 예수를 은 삼십에 팔아넘기는 너무도 큰 죄를 범했다. 그에 못지않게 베드로 역시 예수를 저주하며 부인하는 무서운 죄를 범했다. 그러나 제대로 된 회개를 했느냐 안했느냐에 따라 두 인물은 전혀 다른 길을 가게 되었다. 베드로는 밖에 나가 통곡하며 회개한 반면에 유다는 회개의 기회를 제대로 살리지 못했다. 온 가족과 함께 돌에 맞아 죽을 수밖에 없었던 아간의 잘못은 탐심에 이끌려 하나님의 물건들을 자기의 것으로 감춘 것이지만 그것과 더불어 제 때에 바르게 회개하지 못한 점이 포함되어 있다. 그런 점에서 회개는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반전의 축복이라 할 수 있다.
11. 왜 여호수아는 아이성 전투에서 실패하였는가?
“여호수아가 여리고에서 사람을 벧엘 동쪽 벧아웬 곁에 있는 아이로 보내며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올라가서 그 땅을 정탐하라 하매 그 사람들이 올라가서 아이를 정탐하고 여호수아에게 돌아와 그에게 이르되 백성을 다 올라가게 하지 말고 이삼천명만 올라가서 아이를 치게 하소서 그들은 소수니 모든 백성을 그리로 보내어 수고롭게 하지 마소서 하므로 백성 중 삼천 명쯤 그리로 올라갔다가 아이 사람 앞에서 도망하니 아이 사람이 그들을 삼십육 명쯤 쳐 죽이고 성문 앞에서부터 스바림까지 쫓아가 내려가는 비탈에서 쳤으므로 백성의 마음이 녹아 물같이 된지라”(수 7:2-5)
이스라엘은 왜 아이성 전투에서 실패하였을까? 이 질문은 그에 대한 답이 너무도 명백하기 때문에 의미 없는 우문(愚問)처럼 보인다. 물론 아이성 전투에서 이스라엘이 실패한 근본 원인은 아간이 하나님의 물건을 훔치는 죄를 범했기 때문이다. 여호수아는 실패의 원인을 깨달은 다음 범죄자인 아간을 색출하여 처형시킴으로서 근본 문제를 해결하였다.
그러나 성경 내용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아이성 전투의 실패에는 아간의 범죄와 더불어 여호수아가 저지른 실수도 크게 작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아간의 범죄로 인하여 이스라엘이 아이성 점령에 실패한 것은 사실이지만, 패배의 실제적 원인은 여호수아의 잘못된 전략 때문이었다. 근본적 원인이 아간에게 있었다면, 실제적 원인은 여호수아에게 있었던 셈이다.
그렇다면 여호수아가 범한 실수는 어떤 것일까? 우선적으로, 아간의 잘못으로 인하여 여호수아에게까지 영적으로 전달된 부정적 영향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성경은 한 개인이 단순히 개인에 머물지 않고 전체에게 막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강조한다. 이간이라는 한 개인이 저지른 잘못 때문에 전체 이스라엘이 예상치 못한 패배를 겪어야 했고, 또한 한 개인 때문에 자신의 가족 전체가 죽음을 당해야 했다. 그런 것과 같이 아간의 범죄는 보이지 않게 이스라엘의 지도자인 여호수아에게 영적 판단력을 흐리게 만드는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과연 여호수아의 영적 판단력이 흘려졌다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그의 영적 긴장감과 집중력을 유지하지 못한 것과 관련이 있다. 여리고성 점령에 전력을 기울였던 여호수아는 그 후 안도의 한 숨을 쉴 수 있었다. 때로 우리들에게도 일과 일 사이에 잠시 동안의 휴식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것이 너무 지나쳐 긴장이 풀어지고 영적 집중력이 떨어지는 결과를 가져온다면 큰 문제로 이어질 수 있다.
아이성 전투에 임하는 여호수아는 다음과 같은 점에서 그와같은 영적인 해이를 보여준다.
(1) 첫째는, 하나님의 지시나 허락을 받지 낳고 전쟁에 나셨다는 점이다. 이것은 가나안정복이 여호와 전쟁이라는 속성을 잠시 잊은 처사였고, 그 결과 여호수아는 하나님께 우선적으로 드릴 기도가 부족했다. 그것은 후에 여호수아가 하나님의 허락과 지시를 받은 다음 아이성 공격에 나선 것과는 대조적이다(수 8:1).
(2) 두 번째는, 자신은 참여하지 않고 부하들만 전쟁에 내보냈다는 점이다. 그는 전쟁의 지휘관이 하나님이시라는 점을 잠시 동안 잊고 있었다. 하나님께서 전쟁의 지휘관으로 직접 참전하신다는 점을 잊지 않았다면, 병사에 불과한 자신이 뒤에 남아 있을 생각은 할 수가 없을 것이다. 후에 여호수아는 아이성을 재차 공략하면서 최선봉에 서서 전쟁을 직접 지휘하였다(수 8:3).
(3) 세 번째는, 여리고성 점령으로 인한 자만심이었다. 여호수아는 부하 장군의 조언에 따라 직접 전쟁에 나서지 않았을 뿐 아니라 삼천 명 정도의 병사들만 내보냈다. 자신감과 자긍심은 권장할만한 요소이지만, 허황된 자만심은 철저하게 배격해야할 경계 대상이다. 후에 여호수아는 삼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전쟁에 나섰다(수 8:3).
(4) 네 번째는, 작은 성이라고 얕잡아 보고 특별한 전략을 세우지 않고 무작정 전쟁터로 나셨다는 점이다. 이것은 전쟁에 임하면서 최선을 다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후에 여호수아는 주도면밀한 작전 계획을 세워 전쟁에 임하였다. 특히 패하는 척하면서 도주하는 연막작전과 함께 군사들을 매복시키는 작전을 병행하여 효율적인 기습공격을 감행하였다.
아이성 전투와 관련하여 여호수아가 보여준 실수와 그의 변화된 모습은 올바른 신앙인의 자세가 무엇인지를 잘 설명해 준다.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최선을 다하는 것, 그것은 신앙의 가장 기본적인 자세이며 늘 지켜야 할 덕목이다.
12. 세겜에서의 첫 번째 예배
“그때에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에발 산에 한 제단을 쌓았으니”(수 8:30)
아이성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세겜에서 하나님께 특별한 예배를 드렸다. 그는 우선 에발산에 새로운 돌 제단을 쌓고 번제와 화목제를 하나님께 드렸다. 그러고 나서 백성들 앞에서 율법을 그 돌에 기록하고 율법책에 기록된 모든 축복과 저주의 말씀을 선포하였다. 당시가 전쟁 상황이었다는 점을 고려해 볼 때, 여호수아의 그런 행동은 현명하지 못한 처사인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승전의 기세를 몰아 가나안 땅 중심부를 공격하는 일이 더 우선적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여호수아는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모든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가까이 나아가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겼다.
여호수아의 그런 행동은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것이었다. 신명기 27:1-8에 의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해야 할 우선적인 과제는 하나님 앞에 돌단을 쌓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는 일이었다. 그것이 여리고성과 아이성의 점령 이후로 미루어진 것은 보다 안정된 분위기 속에서 예배를 드리기 위한 조처일 뿐이었다. 곧 여리고성과 아이성 점령은 가나안 입국을 위한 교두보 마련이라는 측면과 함께 하나님께 드릴 예배를 보다 경건하게 드리기 위한 사전 작업일 뿐이었다. 그런 점에서 가나안 입국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로 시작된 셈이다. 시작이 그러했듯이 최종적인 가나안 점령 역시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로 종결짓고 있다(수 24장). 이것은 이 세상과의 영적 전쟁에서 예배의 중요성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가르쳐 준다. 세상에서 승리하며 살아갈 수 있는 힘은 하나님의 계획과 그분의 뜻을 따라가는 영적인 능력에 달려있다. 영적 전쟁에서 실패를 경험하는 주된 이유가 하나님과의 긴밀한 교제 곧 기도시간의 부족에서 오는 것도 바로 그 이유 때문이다.
가나안 땅을 정복해야하는 막중한 과제가 현실적으로는 우선적인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여호수아는 무엇이 더 우선적인가를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은 여호와 전쟁의 주도권을 쥐고 계신 하나님의 말씀을 철저히 따르는 것이고, 그 중심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아이성 전투 후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을 길갈에서 북쪽으로 48km 정도 떨어진 세겜에 모이게 한 것이다. 길갈과 세겜 사이는 험준한 산지이기 때문에 별다른 저항 없이 쉽게 전진할 수 있는 지역이었다. 다만 세겜성이 문제가 될 수 있었지만, 예배를 드리기 위하여 나가면서 이스라엘이 그 성을 점령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성경 자체가 모든 지역의 점령을 기록하고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성경에서 세겜성 점령이 빠진 것은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여호수아는 왜 세겜을 가나안에서의 첫 번째 예배장소로 선택하였을까? 무엇보다도 세겜은 가나안 땅 전체를 놓고 볼 때 중앙에 위치한 지역이다. 그런 점에서 세겜은 지리적으로 가나안 땅 전체를 대표하는 곳으로 이해된다. 더구나 세겜을 중심으로 남북 양쪽에 위치한 그리심산(남)과 에발산(북)은 가나안 땅을 남과 북으로 조망할 수 있는 해발 900m의 높은 산이라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이스라엘의 모든 산들처럼 이 두 산도 석회석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암석의 특징상 일정한 결로 갈라진 돌들은 백성들이 편안하게 걸터앉을 수 있는 자리가 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지리적 여건은 산 아래 쪽 낮은 분지에 위치하였던 세겜성과 함께 자연이 만든 일종의 거대한 원형극장을 이루었을 것이다. 또한 두 산사이의 거리가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기 때문에 산 위에서 선포된 축복의 말씀과 저주의 말씀들은 모두가 백성들에게 명확하게 전달될 수 있었다. 예수께서 갈릴리 바닷가의 지형을 이용하여 대중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셨듯이, 여호수아도 세겜의 자연지형을 효율적으로 활용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할 수 있었다.
13. 세겜에서 드린 예배는 어떤 성격이었을까?
여호수아의 주도아래 세겜에서 드린 예배의 성격은 어떤 것이었을까? 여호수아서 본문(8:30-35) 속에는 당시의 예배가 어떤 성격의 것이었는지를 보여주는 몇 가지 요소들이 들어 있다.
첫 번째는 이스라엘 백성이 다듬지 않은 돌로 제단을 쌓고 나서 번제를 하나님 앞에 드렸다는 점이다. 여기에서 번제는 하나님 앞에 완전한 헌신과 복종을 다짐하는 성격의 예배이다. 그러므로 번제는 제물을 송두리째 제단에서 불살라 향기로운 냄새의 화제로 드렸다. 온전한 순종이 빠진 번제는 아무 의미가 없다. 그러나 레위기 1:4에서 볼 수 있듯이, 번제에는 속죄가 그 기본적인 목적이다. 속죄제가 성막의 여러 부분의 구체적인 부정을 씻는 의미의 제사라고 한다면, 번제는 보다 일반적인 의미에서 속죄를 위한 제사이다. 하나님 앞에 헌신과 복종을 다짐한다는 것은 그보다 우선적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일이 필요한데, 그것은 속죄가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런 점에서 번제는 속죄를 통하여 하나님 앞에 나아간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온전한 헌신과 복종을 다짐한 예배라고 할 수 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 번제를 드린 다음 다시 화목제를 드렸다. 화목제는 의무가 아니고 원하는 자만이 드리는 제사라는 점에서 번제와 구별된다. 감사하는 마음이 생기거나 서원하는 일이 있게 될 때에 이스라엘은 특별한 화목제를 드렸다. 화목제는 제물의 일부를 예배 참여자들이 먹을 수 있다는 점에서도 완전히 불살라 바치는 번제와는 구별된다. 예배드리는 당사자와 더불어 주변에 있는 이웃 사람들이 함께 나누어 먹었다는 점에서 화목제를 ‘교제의 제사’라고 이해하기도 한다. 그런 점과 관련하여 성경은 화목제를 언약과 관련된 제사로 소개하기도 한다(출 24:5; 신 27:7; 왕상 8:63). 번제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새롭게 정립하면서 자신들의 헌신과 순종을 확인할 수가 있었다. 그런 다음 그들은 화목제를 통하여 온 백성들이 함께 음식을 나누는 한 민족 신앙공동체가 되어 하나님의 언약을 잘 지키겠다는 서원을 드린 것이다.
그런 점에서 세겜에서의 예배는 하나님께 대한 헌신을 다짐하면서 언약을 재확인하는 언약갱신제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율법을 돌에 새겨놓는 것이나 모세가 기록한 모든 율법을 백성들 앞에서 낭독한 것은 그런 예배의 성격을 더욱 분명하게 밝혀준다. 여기에서 세겜에서의 예배가 지닌 또 다른 성격을 알 수 있다.
언약에는 두 가지 차원이 포함되어 있다. 하나는 하나님이 베풀어 주시는 은혜의 차원이고, 다른 하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해야 할 실천적 차원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세로 하나님의 율법을 온전히 순종하는 일이다. 이스라엘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축복과 저주는 그들이 어떻게 율법을 지키며 사느냐에 달려 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하실 일은 무엇일까? 그것은 출애굽 시킨 이스라엘을 약속의 땅 가나안까지 인도하여 주시는 일이다.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언약에는 이스라엘의 출애굽과 가나안 입국이 기본적으로 전제되어 있다. 여호수아는 가나안 정복을 위한 전쟁 초기 세겜에서 언약갱신제를 드림으로서 가나안 땅에서 하나님의 율법을 철저히 지킬 것을 서원하였다. 그것은 가나안 땅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전적으로 수용한다는 신앙고백이 담긴 성격의 예배이기도 했다. 가나안 정복의 결과를 경험하고 나서 하나님의 언약을 지키겠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가나안 정복을 위하여 많은 과제가 남아있음에도 불구하고 과감하게 미래에 주어질 결과를 수용하겠다는 결단의 예배였다. 그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미리 내다보면서 확신하는 거룩한 행위이기도 하였다. 히브리서 저자가 강조한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는 믿음을 온 이스라엘이 세겜 예배를 통하여 몸소 실천한 셈이다.
14. 기브온 거민의 생존전략
여리고와 아이에 대한 이스라엘의 승전 소식은 급속히 가나안 전체 지역으로 퍼져나갔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요단강 서편지역의 산지와 평지와 해변지역의 가나안 왕들은 연합전선을 구축하여 이스라엘의 위협을 대처하게 된다(수 9:1-2). 이제 본격적인 가나안 정복 전쟁이 시작된 셈이다. 여호수아 10장은 남쪽에 위치한 가나안 왕들을 정복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으며, 11장은 북쪽 지역의 가나안 왕들과 정복전쟁을 소개하고 있다.
그런데 가나안 정복전쟁이 본격화되기 전에 흥미로운 에피소드 하나가 소개된다. 그 내용은 이스라엘에게 위협을 느낀 기브온 거민들이 자신들의 위기를 극복하는 내용이다. 다른 가나안 왕들이 연합전선을 구축하여 이스라엘의 공격을 대비한 것과는 달리 기브온 거민들은 이스라엘에게 무조건 항복하는 것만이 살 길이라는 것을 간파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무조건 손을 들고 투항한 것이 아니라, 주도면밀하게 전략을 세워 자신들이 살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하였다. 그렇게 하여 이들 기브온 거민들은 여리고성의 라합 가족과 함께 가나안 정복 전쟁에서 예외적으로 살아남은 사람들이 되었다.
여리고성의 라합이 그러했던 것처럼 기브온 거민들이 보여준 그들의 생존 전략에는 나름대로 신앙적 교훈이 담겨있다. 무엇보다도 기브온 거민들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행하신 모든 일들을 소상히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일회적이거나 우연한 사건이 아니라 가나안땅을 이스라엘에게 주시려는 하나님 계획에 의해 진행되는 필연적 사건임을 주목하였다(수 9:9-10). 더 나아가 그들은 하나님께서 가나안 정복과 관련하여 이스라엘에게 내린 지침이 무엇인지도 알고 있었다. 곧 가나안 땅에 거주하는 모든 주민들은 어떠한 경우에도 모두 전멸을 시켜야 했지만, 가나안 땅 이외 지역에 거주하는 사람들과는 화친 관계를 맺을 수 있었다(신 20:10-11). 그런 틈새를 노렸던 기브온 거민들은 길갈 진에 있는 여호수아에게 사절단을 보내면서 그들이 가나안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에 사는 사람들인 것처럼 위장하였다. 위장 방법은 말라서 곰팡이가 난 빵과 포도주가 담긴 찢어진 가죽부대를 가져갔고, 낡은 옷과 낚은 신을 신었다. 그런 모습은 먼 지방에서 온 것처럼 속이는 것도 있었겠지만, 여행에 지친 모습 자체가 처량하고 측은하게 보이게 하는 효과도 있었을 것이다. 결국 기브온 거민들은 살아남아 여호와의 단을 위하여 나무를 패며 물을 긷는 자들이 되었다(수 9:27).
멸망의 위기 앞에서 종족의 생존을 지키기 위하여 사력을 다하였던 기브온 거민들에게서 돋보이는 점은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그들의 역사인식이다. 출애굽 사건을 비롯하여 요단 동편의 아모리 두 왕 곧 헤스본왕 시혼과 바산왕 옥에게 행하셨던 하나님의 역사를 살펴보면서 그들은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이 하나님의 필연에 속하는 것임을 간파하였다. 비록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을 속인 것은 잘못된 일이었지만, 하나님께서 이끌어 가시는 역사의 흐름을 정확하게 파악한 것은 우리가 본받을 점이다.
예레미야의 거짓 선지자들과의 싸움 역시 하나님 역사에 대한 인식에서 비롯되었다. 예레미야는 유다가 바벨론에게 멸망당할 것을 예고하면서 바벨론에게 항복하는 것만이 살 길이라고 외쳤다. 그런 일이 있은 다음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다시 회복시켜 주실 것이라는 것이 예레미야의 메시지였다. 그에 비하여 거짓 선지자들은 예루살렘은 멸망하지 않고 영원히 견고하게 설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유다의 멸망보다 예루살렘의 견고함을 강조하는 편이 훨씬 더 애국자적인 모습으로 보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때로 하나님의 역사는 낭만적인 미래 청사진만으로 통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기브온 거민들이 바라본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이 그런 성격에 속하는 하나님 역사였다. 그런 점에서 그들은 예수께서 언급하신 옳지 못한 청지기(눅 16:1-13)와 닮은 모습을 지니고 있다.
15, 여호수아의 또 다른 실수
기브온 거민의 생존을 위한 필사적인 노력은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을 속이는 전략으로 나타났다. 비록 정직하지 못한 방법을 사용하긴 했지만, 거역할 수 없는 하나님의 역사를 내다보았다는 점에서는 긍정적인 평가도 가능하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의 입장에서는 커다란 실수를 범한 셈이다. 가나안 족속을 모조리 진멸시켜야 했는데, 기브온 거민들이 교묘하게 빈 틈새를 뚫고 빠져나갔기 때문이다. 아이성 점령의 일차적 실패가 첫 번째 실수였다면, 기브온 거민들에게 속아 그들을 살려준 것은 두 번째 실수라고 할 수 있다.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의 거듭된 실수는 어디에서 온 것일까?
무엇보다도 기브온 사람들의 외모를 보고 판단한 점이 잘못이었다. 먼 곳에서 온 것처럼 꾸민 기브온 사람들의 뛰어난 위장술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감쪽같이 속아 넘어갔다. 그만큼 그들의 계략은 주도면밀하였다. 그렇다고 하여도 경계심을 늦추지 않고 철저히 다루었다면 속임수 뒤에 숨어 있는 허점을 찾아낼 수 있었을 것이다.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의 방심 곧 겉모양만 보고 쉽게 판단을 해버린 것이 문제였다. 사무엘과 같은 훌륭한 하나님의 사람도 사울 왕을 대신할 새로운 인물을 선정하면서 외모를 보고 판단한 적이 있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삼상 16:7)고 하시면서 사무엘을 책망하셨다. 사도 바울 역시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말 것’을 권면하였다(고후 5:7). 믿음으로 행하는 것은 외모가 아니라 중심을 보고 판단하는 것이 반드시 포함되어야 한다. 외모에 판단의 기준을 두는 것은 곧 자기중심적인 사고이며 종국에는 객관성의 결여가 뒤따르는 위험한 일이다.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실수를 범한 더 근본적인 원인은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하지 않은 것에 있었다. 당시는 여호와의 전쟁을 수행하는 비상시국사태였다. 모든 일을 총사령관 격이신 하나님께 나아가 상의해야했는데도 자신들의 판단을 믿고 가볍게 처리한 것이다. 제사장들이 늘 지니고 있는 우림과 둠밈으로 하나님의 판단을 물어보는 간편한 방법도 있었다. 그런데도 그들은 하나님께 기도 없이 자신들의 선입견을 가지고 판단하는 잘못을 범했다. ‘쉬지 말고 기도하는 일’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가장 분명한 뜻이다(살전 5:17). 여기에서 ‘쉬지 말고 기도한다는 것’은 우리들이 살아가면서 겪는 모든 일을 하나님 앞에 가지고 나가 상의해야함을 포함하고 있다.
여호수아는 기브온 거민들에게 속아 그들과 화친조약을 맺고 그들을 살려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런 일이 있은 후 삼일이 지나고 나서 기브온 거민들이 먼 곳에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 가까운 지역 사람들이라는 것이 드러났다. 여호수아는 기브온 사람들과 맺은 언약이 거짓에 근거한 것이기에 원인무효를 선언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기브온 거민들과의 언약을 유효한 것으로 인정하였다. 그들과 맺은 언약은 인간과 인간 사이의 언약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로 맹세한 언약이기 때문이었다. 비록 속임수에 넘어가 맺은 언약이지만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한 것이어서 결코 변경할 수 없다는 신앙고백이 그 안에 담겨져 있다. 마음에 서원한 것은 해로울지라도 변치 말아야 한다(시 15:4).
그렇다고 기브온 거민들의 잘못이 정당화된 것은 아니었다. 여호수아는 그들을 불러 속임수를 사용한 것에 대한 엄중한 추궁이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범한 잘못에 대한 벌로서 그들은 이스라엘의 영원한 종이 되어 여호와의 전에서 나무를 패며 물을 긷는 자들이 되었다. 비록 그들은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 때문에 목숨을 부지할 수는 있었지만, 거짓 속임수를 쓴 것에 대한 처벌은 피할 수가 없었다.
16. 기브온을 구해준 여호수아
여리고와 아이성을 무찌른 이스라엘은 길갈에 진을 치고 있으면서 본격적인 가나안 점령을 시작하게 된다. 그 첫 번째 과정은 여호수아서 10장에 기록되어 있는 가나안의 중부 및 남부지역에 대한 공격이었다.
본격적인 가나안 정복 전쟁은 여리고와 아이를 점령했던 초기 때와는 다른 양상을 보여준다. 그때에는 도시 하나 하나를 공략하는 전략이었다. 따라서 한 도시를 점령하기 위하여 심사숙고의 과정을 거쳐 비교적 오랜 기간 동안 전쟁을 수행하게 되었다. 그러나 본격적인 가나안 점령은 연합군을 형성한 여러 왕들과의 싸움이었다. 여호수아는 그들을 기습적으로 공격하여 승리를 얻었고, 그에 따라 전쟁 기간도 짧았다. 이것은 초기의 전쟁이 탐색전 성격이었다면, 그 이후의 본격적인 전쟁은 심리적으로 위축된 가나안 왕들과 자신감을 얻은 이스라엘과의 전쟁임을 보여준다.
가나안의 중부 및 남부지역에 대한 점령은 이스라엘과 화친을 맺은 기브온과 관련이 있었다. 가나안 지역의 왕들이 연합군을 형성하여 기브온을 공격하였기 때문이다. 당시 기브온은 이스라엘과 화친조약을 맺기 전에 다른 가나안 왕들과 함께 동맹관계를 맺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런 기브온이 이스라엘과 가깝게 된 것은 곧 가나안 왕들에 대한 배신행위였다. 이에 가나안 왕들은 기브온을 먼저 응징해야한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런 전략의 배후에는 여러 요소가 작용하였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기브온이 비교적 큰 성으로서 잘 훈련된 군대 조직을 지니고 있었던 점이다(수 10:2). 그런 기브온이 자신들의 동맹체에서 빠지게 되면 자신들의 결속력이 크게 약화될 뿐 아니라 또 다른 배신자가 생길 가능성이 있었다. 더구나 기브온을 그대로 방치해 두면 곧 있게 될 이스라엘과의 일전에서 자신들이 협공을 당할 위험성도 있었다.
가나안 왕들의 연합군 형성을 주도한 인물은 예루살렘 왕 아도니세덱이었다. 예루살렘 왕이 연합군 구성에 앞장선 것은 지역적으로 예루살렘이 기브온과 가깝기 때문이었다. 이에 아도니세덱은 다른 네 도시의 왕들 곧 헤브론 왕 호함과 야르뭇 왕 비람과 라기스 왕 야비아와 에글론 왕 드빌에게 군대를 동원하여 기브온을 공격하자고 제안하였다. 이들 네 도시는 모두가 가나안 지역의 중심도시들이었다. 헤브론은 예루살렘과 함께 유다산지의 중심지였고, 야르뭇과 라기스는 쉐펠라(평지)지역의 중심지였다. 그리고 에글론은 해안평야지역의 중심지였다.
가나안 연합군의 공격을 받게 된 기브온은 길갈에 진을 치고 있던 여호수아에게 긴급하게 도움을 요청하였다. 이에 여호수아는 즉각적으로 군대를 출동시켰다. 이로서 본격적인 가나안 정복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그런데 여호수아가 그렇게 신속하게 군대를 동원하여 기브온을 구해준 이유는 무엇일까? 물론 그것은 기브온과 화친을 맺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기브온과 평화조약을 맺은 것은 이스라엘의 요청이나 필요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기브온의 위장전술에 속아 억지로 맺은 것이었다. 그런 점에서 여호수아는 기브온이 당하는 위기를 오히려 자신을 속인 것에 대한 하나님의 적절한 보응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여호수아는 그들을 방치해 두지 않고 신속하게 군대를 출동시켰다. 그것은 잘못된 판단으로 맺은 평화조약이라 하더라도 자신의 약속을 지켜야 한다는 ‘헤세드’ 사상에 근거를 두고 있다. 우리말 성경에서 주로 ‘인자’로 번역되고 있는 히브리어 ‘헤세드’는 약속한 것을 끝까지 지킨다는 ‘신실성’(faithfulness)을 의미한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곧 어떤 상황 속에서도 우리에게 주신 약속을 지키시는 하나님이심을 보여준다.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헤세드’가 되신다는 것은 곧 우리들도 다른 사람들에게 ‘헤세드’의 이웃이 되어야 함을 뜻한다. 그것이 여호수아가 기브온을 향하여 지체하지 않은 군대를 동원하여 적극적으로 도와준 이유이다
17. 앞서 행하시는 하나님
이스라엘의 본격적인 가나안 점령은 위기에 몰린 기브온을 돕는 것에서 시작되었다. 이스라엘과 화친조약을 맺은 기브온 사람들은 아모리 사람들에게 미움이 대상이 되었다. 이에 자신들을 배반한 기브온을 공격하기 위하여 아모리의 다섯 왕들은 강력한 연합군을 결성하였다. 다급해진 기브온은 길갈에 진을 치고 있던 여호수아에게 도움을 요청하였다. 여호수아는 신속히 군대를 동원하여 기브온으로 파병하였다.
기브온 사람들의 도움 요청을 받은 여호수아가 신속하게 군대를 동원하게 된 이유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약속은 어떤 상황에서도 꼭 지켜야만 한다는 ‘헤세드’ 정신이다. 비록 기브온 사람들에게 속아서 맺은 것이긴 하여도 한번 맺은 약속은 성실하게 이행해야 했다. 더구나 그것은 여호와의 이름으로 맺은 약속이었다. 또 다른 하나는, 전쟁과 관련하여 여호수아에게 주신 하나님의 응답이었다. 출전을 준비하고 있는 여호수아에게 여호와께서는 전쟁에 담대하게 임할 것을 명령하면서 전쟁에서의 승리를 보장해 주셨다. “그들을 두려워 말라. 내가 그들을 네 손에 붙였으니 그들의 한 사람도 너를 당할 자가 없으리라”(수 10:8) 전자가 인간관계로서의 응답이하면, 후자는 하나님과의 관계로서의 응답이었다. 그것은 우리들이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중요한 기준이기도 하다.
여호수아가 이끄는 군대가 아모리 연합군을 공격하면서 사용한 전술은 기습작전이었다. 출전 자체도 신속했지만 밤을 새워 행군한 결과 예상보다 빠른 시간에 기브온에 도착할 수가 있었다. 성경은 이를 두고 ‘그들에게 갑자기 이르니’(수 10:9)라고 표현하였다. 이스라엘이 출전하려면 어느 정도의 시간이 걸릴 것이라고 예상했던 아모리 연합군은 이스라엘 군이 도착하기 전에 기브온 성을 함락시키려고 전력을 기울였을 것이다. 그런데 예상 밖에 이스라엘 군이 예상보다 빨리 갑작스럽게 들이닥친 것이다. 그만큼 여호수아는 아모리 연합군을 효율적으로 공격할 수가 있었다. 우리들의 신앙생활 속에서도 신속한 결단이 필요한 때가 많다. 하나님의 선한 일을 향한 마음의 작정이 서거나 혹은 하나님으로부터의 직접적인 감동이 있을 때에, 그것을 하나님이 주신 기회로 받아들일 뿐 아니라 적극적 자세로 순종하며 실천해야 한다. 그런 기회를 놓쳐버리면 그만큼 하나님의 역사를 그르칠 수 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우리들을 향하여 ‘세월을 아끼라’(엡 5:16)고 권면하였다. 여기에서 ‘세월을 아끼다’는 ‘주어진 기회를 선용하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본격적인 전쟁은 기브온에서 벌어졌다. 기습공격으로 기선을 제압한 이스라엘은 아모리 연합군을 그곳에서 크게 무찔렀다. 그러고 나서 도망치는 적들을 벧호론으로 올라가는 비탈에서 시작하여 아세가와 막게다까지 추격하였다. 당시 ‘벧호론으로 올라가는 비탈’은 해안지방에서 쉐펠라(평지)를 거쳐 유다산지로 올라가는 중심 교통로였다. 그 중심 교통로에 기브온이 위치하고 있었다. 이스라엘의 기습공격으로 다급해진 아모리 연합군은 쉽게 도주할 수 있는 벧호론 길을 선택했던 것이다. 그들의 도주는 쉐펠라(평지) 지역에 있던 아르뭇 근처의 아세가와 라기스 근처의 막게다까지 이어졌다.
여호수아는 퇴각하는 적을 끝까지 추격하면서 승리의 영역을 확보해 나갔다. 그러나 여호수아의 힘만이 전부는 아니었다.그보다 훨씬 더 큰 도움이 하늘에서 내렸다. 여호수아의 추격에 앞서 큰 우박 덩어리가 하늘에서 내려 도망치는 적들을 죽인 것이다. 벧호론 비탈길에서 시작하여 아세가까지 계속 내린 우박으로 이스라엘의 칼에 죽은 자들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지금도 우리들은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막중한 임무를 맡고 있다. 우리는 그 일을 위하여 주어진 여건 속에서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내 힘만으로 이룰 과제가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그 일을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실 뿐 아니라 최종적으로 그 일을 완성하시는 분이시다. 그러기에 우리들은 어떤 상황 속에서도 낙심하지 말고 담대하게 믿음으로 나아가야 한다.
18. 태양과 달을 멈추게 한 여호수아의 기도
여호수아가 맞서서 싸운 아모리의 연합군은 만만하게 볼 상대가 아니었다. 다섯 왕들이 힘을 모아 구성한 연합군이었을 뿐만 아니라 자신들이 살아온 지역에서의 전쟁이었기 때문에 지형지물을 적절하게 이용하여 유리한 군사작전을 펼칠 수가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막강한 군사력도 하나님의 도우심 앞에서는 소용이 없었다. 더구나 여호수아의 재빠른 기습공격으로 그들은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한 채 기선을 제압당했다. 기브온에서 크게 패한 아모리 연합군은 서둘러 퇴각을 결정하였고, 여호수아의 군대는 이들을 아세가와 막게다까지 추격하였다. 이런 상황 속에서 놀라운 하나님의 기적이 일어났다. 그것은 여호수아의 기도로 태양과 달이 멈춘 일이다. 여호수아서 본문에서도 그런 일은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없었던 역사상 초유의 사건임을 밝히고 있다(수 10:14).
천지를 창조하신 여호와 하나님은 우주와 역사의 주인이시다. 그분은 모든 것이 가능한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다. 그런 점에서 태양과 달이 잠시 멈추어선 것을 의심하거나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잘못된 자세이다.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행하신 갖가지 기적들이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면 못하실 일이 아무 것도 없다. 그렇다고 아무 때나 하나님의 기적이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기적은 꼭 필요한 상황 속에서만 일어난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그러면 여호수아가 태양과 달을 멈추게 한 기적은 어떤 상황 속에서 일어난 것일까?
그와 같은 기적은 퇴각하는 아모리 연합군을 추격하여 전멸시키는 과정에서 일어났다. 지금과 같이 조명탄이나 야간 전투 장비가 없던 당시로서는 낮 시간 동안만 전쟁이 가능했다. 이스라엘에게는 적을 추격하여 전멸시키는 일을 위하여 낮 시간의 연장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그것은 이스라엘 자신들을 위해서라기보다는 하나님께서 싸우시는 전쟁을 위해서였다. 가나안 정복은 이스라엘의 영토를 확보하기 위한 것이기도 했지만, 궁극적으로는 여호와를 위한 전쟁이었다. 여호수아서 본문은 그런 점을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싸우셨음이니라”(10:14)라는 표현으로 강조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기적은 불가피한 상황 속에서 우리를 도우시는 하나님의 적극적인 개입이지만, 최종적인 목적은 하나님의 역사와 뜻을 이루는 것에 있음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기적이 일어난 것은 여호수아의 기도를 통해서였다. 전쟁에 몰입해 있던 여호수아는 남아 있는 적을 공격하기 위해서 낮 시간이 더 필요함을 느끼게 되었다. 그는 곧바로 하나님께 나아가 아뢰었다. 여기에서 ‘아뢰다’에 사용된 히브리어 동사 ‘딥베르’는 ‘이야기하다’ ‘말하다’라는 의미를 지닌 동사로서 ‘상의하다’에 해당된다. 여호와 전쟁에 참여하고 있는 여호수아는 전쟁의 총 책임자이신 여호와께 나아가 당시의 전황을 보고하면서 적절한 조치를 요청한 것이다. 수준 높은 기도란 자신의 뜻이나 입장을 내세우는 요구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도록 자신을 헌신하는 기도 곧 하나님의 목적에 집중하는 기도이다.
낮 시간을 연장시키는 일이 절대적으로 필요했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도 불가피한 일이라는 것을 확신한 여호수아는 이스라엘이 보는 앞에서 공개적으로 태양과 달이 멈출 것을 기도하였다. 그런데 여기에서 여호수아의 기도는 하나님께 그렇게 해달라는 요청의 기도가 아니었다. 오히려 태양과 달이 멈출 것을 지시하는 일종의 명령형 기도였다. 태양과 달을 멈추게 하실 분은 분명 하나님이시다. 여호수아가 그런 점을 모를 리가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여호수아가 명령형으로 기도한 것은 하나님의 사역자들에게 주어진 특권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말해준다. 여호수아는 여호와 전쟁의 참여자로서 다급해진 상황 속에서 낮 시간의 연장이 필요하였고 하나님께서도 그 일을 원하고 계심을 알았다. 그런 상황에서는 얼마든지 명령형 기도를 드릴 수 있다. 예수께서도 복음전파를 이루게 될 믿는 자이 갖가지 표적을 행할 수 있는 특권을 부여하신 바가 있다(막 16:17-18). 여호수아는 태양을 멈추게 한 기도 속에서 그런 특권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것이다.
19. 왜 여호수아와 이스라엘은 길갈진영을 떠나지 않았는가?
가나안 정복을 위한 거룩한 전쟁을 수행하는 동안 여호수아를 비롯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길갈에 진을 치고 지냈다. 기브온 거민들이 이스라엘과 화친조약을 맺기 위해 대표자들을 보낸 곳도 길갈 진이었고(수 9:6), 아모리 연합군의 공격을 받아 위기에 처한 기브온을 구출하려고 여호수아가 급히 군대를 파병한 곳도 길갈 진이었다(수 10:9). 여호수아와 이스라엘군은 전쟁을 마친 후에는 항상 길갈 진영으로 돌아와 잠시 동안 휴식을 취하면서 다음 전쟁을 준비하곤 하였다(수 10:15, 45). 그런 일은 가나안 정복 전쟁을 마친 후 그 땅을 지파별로 분배하기까지 계속되었다.
길갈은 이스라엘이 요단강을 건넌 후 처음으로 머물렀던 장소다. 현재로서 길갈이 정확하게 어디에 있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다만 성경에서 ‘여리고 동편 경계’(수 4:19)라고 언급한 것을 근거로 요단강과 여리고 사이의 한 장소일 것이라고만 추정할 뿐이다. 요단강을 건넌 이스라엘 백성들이 첫 번째로 진영을 마련한 길갈은 성경 어디에도 무력으로 점령했다는 기록이 없다. 이스라엘은 아무런 저항 없이 길갈지역에 들어갈 수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당시의 길갈은 중요한 거점지역이 아니라 아무도 살지 않는 도시 주변의 빈 공간일 가능성이 높다. 그런 길갈 지역을 여호수아와 이스라엘은 정복전쟁이 끝날 때까지 떠나지 않고 본거지로 삼은 것이다. 여리고와 같은 견고한 성벽이 있고 잘 발달된 도시를 점령하면서도 왜 이스라엘은 그런 도시지역에 관심을 갖지 않고 문명의 외곽지역인 길갈에 머물러 있었을까?
무엇보다도 그것은 가나안 점령과 관련하여 하나님께서 내리신 명령에 순종하기 위해서였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 땅에 들어가 그 땅을 점령하고 차지할 것을 명령하셨다(수 1:11). 그러나 그 땅의 도시들을 완전히 파괴시켜 하나님께 온전히 바치는 거룩한 제물을 삼을 것도 함께 명령하셨다. 그리고 무너진 도성을 다시 건축하는 일도 철저히 금지시키셨다(수 6:17, 26). 그만큼 가나안 도시들을 완전히 파괴시킬 것을 명령하신 것이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서 이방문화나 이방종교에 물들 수 있는 위험성을 미리 차단시키시려는 하나님의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길갈 진을 떠나지 않은 것은 전쟁에 임하는 그들의 자세를 보여준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당시의 길갈은 도시가 세워진 번성하는 곳이 아니었다. 그곳은 아직도 개발되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빈 땅에 불과하였다.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가나안 땅 점령에 전념하기 위해서는 다른 일에 관심을 갖지 말아야 했다. 이스라엘이 길갈에 진을 치고 그곳을 중심지로 삼은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40년을 지내면서 하나님으로부터 철저한 신앙훈련을 받았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긴밀하게 유지하는 훈련이었다. 비록 아무 것도 없는 빈들의 광야였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모든 것이 되어 주셨다. 하나님을 최고 우선순위로 삼고 살아가는 것이 곧 광야에서 이스라엘이 생존할 수 있는 비결이었다. 가나안은 분명히 광야를 벗어난 비옥한 지역에 속한다. 그러나 그 가나안 땅을 완전히 점령하기까지 이스라엘은 여전히 광야에 머물러 있었던 셈이다. 하나님을 삶의 우선순위에 두지 않는 한 가나안 점령은 그들에게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런 점에서 그들은 가나안의 외곽지역인 길갈에 진을 치고 지내면서 가나안 점령을 위한 전쟁을 수행하였다.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들도 때로는 영적 싸움의 승리를 위하여 광야와 같은 길갈로 되돌아갈 필요가 있다. 그곳에서 우리들은 하나님을 삶의 우선순위에 두고 있는지를 점검해 보면서 단순화된 삶의 패턴(simple life style)을 통해 영적 긴장감을 되찾을 필요가 있다. 그것이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길갈을 떠나지 않았던 이유이자 그들의 신앙적 자세였다
20. 막게다에서 있었던 일
아모리 연합군에 대한 여호수아의 공격은 아세가와 마게다까지 추격하는 것으로 일단락되었다(수 10:10). 막게다의 정확한 위치는 알려져 있지 않다. 성경에 언급된 내용으로 미루어볼 때, 막게다는 세펠라의 남부 지역인 아세가와 라기스 근처의 한 도시일 것으로 추정된다(수 10:10; 15:41). 여호수아가 점령한 지역 명단에 막게다가 포함되어 있기도 하다(수 12:16). 일차 원정을 마치고 길갈 진영으로 돌아온 여호수아에게 새로운 소식이 전해졌다. 그것은 황급히 도망치던 아모리 다섯 왕들이 막게다 근처의 어느 동굴 속에 은신하여 있다는 일선 병사들의 첩보였다. 막게다는 석회암으로 이루어진 산지에 위치하고 있어서 곳곳에 석회암 동굴들이 산재해 있었다. 아모리 왕들은 그런 동굴 중 하나를 자신들의 은신처로 삼아 숨어든 것이다.
여호수아는 곧바로 출동하여 아모리 연합군을 완전히 전멸시키는 제이차 원정길에 올랐다. 여호수아가 취한 첫 번째 조치는 왕들이 숨어 있는 굴의 입구를 큰 돌로 막는 일이었다. 그렇게 함으로서 동굴 안에 숨어있던 왕들을 꼼짝 못하게 잡아 놓을 수 있었다. 그러고는 뿔뿔이 흩어진 연합군의 남은 군대를 추격하여 진멸시켰다. 굴속으로 숨어든 이들 왕들은 결국 자신의 군대를 포기해 버린 셈이었다. 왕이 없는 아모리 군대는 사기도 땅에 떨어졌고 지휘권마저 무너져 제대로 작전을 세울 수가 없었다. 이들 왕들이 동굴로 도망친 것이 오히려 여호수아에게는 효과적으로 남은 적을 전멸시킬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왕들을 체포하여 처형하는 것은 어느 것보다 우선적으로 중요하고 신나는 일임이 틀림없다. 그러나 굴 안에 갇혀 있는 그들은 살아 있으나 죽은 목숨과도 같았다. 오히려 도망치고 있는 남은 적들을 추격하는 일이 현실적으로는 더 없이 급한 일이었다. 그런 점에서 굴 입구를 막아 놓고 도망치는 적을 추격한 것은 우선순위를 앞세운 여호수아의 지혜로운 판단이었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 안에는 주어진 책임과 함께 지혜롭게 행동하는 것이 포함되어 있다.
아모리의 남은 군대를 전멸하고 난 다음 여호수아는 왕들이 숨어 있는 동굴로 돌아와 그동안 뒤로 미루었던 아모리 왕들에 대한 처형을 시행하였다. 여호수아는 다섯 왕들을 동굴 밖으로 끌어냈다. 그리고 군장들로 하여금 왕들의 목을 밟도록 시켰다. 전쟁에서 패한 왕의 목을 밟는 것은 고대근동지방에서 완전한 승리를 확인하는 절차였다. 고대 이집트나 앗수르 승전기념비 가운데에도 승전국의 장군들이 패전국 왕의 목을 밟고 있는 그림이 새겨져 있다. 그것은 완전히 이겼다는 승리의 선언이면서 패전국이 승전국에 절대적으로 예속되었음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그런 승전의식을 거행하면서 여호수아의 관심은 승리를 자축하는 분위기에 휩싸여 있지만은 않았다. 오히려 그런 기회를 통하여 하나님께 대한 신앙을 재확인하면서 가나안 정복을 완수할 수 있다는 확신을 백성들에게 심어주었다. 다섯 왕들의 목을 밟고 있는 군장들에게 여호수아는 “두려워 말며 놀라지 말고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너희가 더불어 싸우는 모든 대적에게 여호와께서 다 이와 같이 하시리라”(수 10:25)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해 주었다.
승전 의식을 마친 다음 여호수아는 다섯 왕들을 죽여 각각 나무에 매어 달았다. 시체는 석양까지 매달아 놓았다가 저녁나절 나무에서 끌어내려 굴에 넣고 장사를 지내주었다. 여기에서 저녁나절 시신을 나무에서 끌어 내린 것은 “시체를 나무 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고 당일에 장사하라”(신 21:23)는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기 위함이었다. 승전의 분위기에 흡뻑 빠져있을 수 있는 상황 속에 여호수아는 전쟁이 여호와께 속한 것임을 재확인하였고, 비록 패전국의 왕들이지만 밤이 새도록 시체를 나무 위에 매어 달아 놓지 않고 끌어내려 장례를 지내주었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신앙의 기준을 잃지 않으려고 애쓰는 여호수아의 모습은 그가 지니고 있는 깊은 경건이요 영성이라 할 수 있다
21. 마무리된 가나안 남부지역 정복
여호수아서에서 비교적 상세하게 설명된 가나안 정복은 여리고와 아이와 기브온에서 있었던 전쟁이다. 여리고는 가나안의 첫 관문이라는 점에서 상세하게 설명할 필요가 있었다. 아이의 경우는 이전에 있었던 여리고 점령과는 대조적으로 어이없이 실패를 경험한 전쟁이기 때문에 그 원인과 해결과정들을 상세하게 기록해 둘 필요가 있었다. 기브온의 경우는 자신들과 평화협정을 맺은 우방을 끝까지 지켜주어야 한다는 신앙적 명문 때문에 특별한 사건이 되었다.
상세하게 기록된 이 세 전쟁을 통하여 여호수아서가 강조되고 있는 점은, 가나안 정복이 하나님께서 주도하신다는 것과 그런 전쟁을 수행하는 과정 속에서 이스라엘이 해야 할 일이 매우 중요했다는 점이다.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 전쟁의 승패는 그분의 손에 달려있었다. 그래서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전쟁을 수행할 수가 없었고, 전쟁의 승리도 하나님의 기적을 통하여 이루어졌다.
그런 전쟁에서 최종적으로 이스라엘이 승리를 얻는 비결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다. 일주일동안 여리고성을 도는 일, 마지막 날 일시에 함성을 지르는 일, 그리고 점령한 성을 완전히 불태우고 전리품은 모두 하나님께 바쳐야 하는 일 등은 이스라엘이 순종하여 따라야할 하나님의 명령이었다. 그런 일들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면 이스라엘은 곧바로 패전이라는 엄청난 대가를 지불해야했다. 비록 잘못된 판단에 의하여 맺은 언약이긴 해도 기브온과의 유대관계를 끝까지 지키는 것 역시 이스라엘이 지켜야 할 책임이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이스라엘의 바른 신앙적 자세를 통하여 효율적으로 가나안 남부지역을 점령하는 기회를 마련해 주셨다. 아모리 다섯 왕들이 연합군을 결성하여 대항하였던 것도 결과적으로 여호수아가 비교적 빠른 시간 안에 전체 남부지역을 장악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주었다.
위의 세 지역을 제외한 나머지 전쟁과정은 간략하게 기록되어 있다. 그것은 남부지역뿐 아니라 북부지역에 대한 전쟁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가나안 남부지역에 관한 나머지 정복과정은 여호수아서 10:28-42에 기록되어 있다. 그 내용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앞부분(수 10:28-39)은 전쟁의 마무리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를 보여주고 있으며, 뒷부분(수 10:40-42)은 그런 전쟁의 결과를 짤막하게 요약하고 있다.
마게다 굴에 숨어 있던 아모리의 다섯 왕들을 처형시킨 여호수아는 막게다를 비롯하여 주변지역의 일곱 중요도시를 차례대로 점령해 나간다. 그런 점령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 앞부분 내용이다. 막게다에서 시작된 여호수아의 진격은 립나와 라기스와 게셀과 에글론과 헤브론과 드빌로 이어졌다. 이들 일곱 도시들은 유다산지와 세펠라지역에 위치하고 있는 지역들이다. 우리말 개역성경에서 ‘평지’로 번역된 ‘세펠라’는 유다산지와 해안평야 사이에 위치한 구릉지로서 해안지방과 유다산지를 이어주는 전략적 요충지이다. 그런 내용과는 대조적으로 뒷부분에는 여호수아에 의하여 점령된 남부지역이 짤막하게 요약되어 있다. 40절에는 “온 땅 곧 산지와 남방과 평지와 경사지”가 언급되고 있고, 41절에는 “가데스 바네아에서 가사까지와 온 고센 땅을 기브온에 이르기까지”로 되어 있다. 여호수아가 점령한 지역은 남쪽으로 가데스 바네아에서, 북쪽으로는 가나안 중앙부에 해당되는 기브온까지 이른다. 그리고 서쪽으로는 지중해 해변에 위치한 가사에서부터 동쪽으로는 예루살렘과 헤브론이 위치한 유다산지까지이다.
여호수아가 가나안의 남부지역에서 실제로 점령한 곳은 헤브론을 포함하여 일곱 도시였다. 그러나 성경은 남부지역 전체가 여호수아에 의하여 정복되었음을 밝히고 있다. 그렇게 기록된 것은 당시 일곱 도시가 그 지역의 거점도시 역할을 하였고 그런 도시들의 영향력이 주변지역으로 퍼져나갔었기 때문이다. 사도바울의 초기 전도활동도 주요 거점도시들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하나님나라의 확장은 전체에 관심을 두되 전략적으로 중요한 거점지역에 우선순위를 두는 일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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