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말이 법이냐고 / 최미숙
벌써 일 년이 지났다. 다음 주 월요일(5월 30일)이 남편 생일이다. 이 년이나 깜빡 잊고 챙기지 못했다. 아이들 전화를 받고서야 생각났다. 바빴다는 핑계를 댔지만 이유가 궁색했다. 나이 드니 이제는 그런 것까지 잊는다. 자식들 생일은 며칠 전부터 챙기더니 본인은 뒷전이라는 생각에 서운했을 것이다. 올해는 실수하지 않으려고 맨 먼저 표시해 두었다. 며칠 전부터 애들이 돌아가면서 전화다.
서울 사는 큰아들과 며느리가 토요일에 온다고 한다. 아빠 놀라게 비밀로 하자고 해 말하지 않았다. 다섯 시 20분쯤 현관 번호 누르는 소리가 들린다. 거실로 들어서며 “아빠! 아버님! 짜잔” 남편은 깜짝 놀라며 “웬일이냐!”를 연발한다. “아빠 생일 축하하려고 왔어요.”라는 말에 입꼬리가 올라간다. 며칠 전 아들과 통화하면서 겨우 밥 두 끼 먹고 가는데 오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 입 밖으로 나오려는 걸 참았다. 앞으로도 당연하게 여길까 봐 말하지 않았다.
큰아들과 며느리는 아침 일찍 마장동에 갔다 왔다며 마블링이 골고루 퍼진 소고기를 들고 왔다. 케이크는 막내아들이 준비했다. 딸은 시험 문제 내야 한다며 오지 못했다. 저녁 먹고 축하 노래를 불렀다. 그동안 전화로는 길게 하지 못했던 직장 상사, 요즘 회사에서 맡아 진행하고 있는 일, 내년에 입주하는 아파트 이야기도 했다. 아들과 며느리는 잠자리에 들면서 일요일 아침밥은 둘이서 차린다며 양념 재료가 어디 있는지 묻는다.
애들이 대학생이 되어 집 떠나기 전까지 남편은 엄했다. 고등학교까지는 부모 통제가 필요하다며 못 하게 하는 것이 많았다. 애들 편들어 주다 부부싸움으로 번진 적도 여러 번이다. 우리 자식이라고 다른 아이들과 다를 거라고 생각하지 말란다. 자식을 왜 못 믿냐고 대꾸하다 감정싸움으로 갔다. 매번 같은 걸로 다투지만 남편은 단호하다. 사실 내 스스로도 어느 선까지 허락해야 하는지 혼란스럽기는 했다.
애들이 집에 한 번씩 오면 가장 먼저 하는 일이 할아버지, 할머니께 인사드리러 가는 것이다. 그냥 인사가 아니라 큰절을 한다. 가끔 싫을 때도 있을 텐데 말이 필요 없다. 무조건 가야 한다. 친구와 놀다 가지 못하면 불호령이 떨어진다. 다음 날이라도 들러야 한다. 또 친구를 만나면 자정까지는 들어와야 한다. 중고등학교 친구와 술자리를 갖다 보면 늦을 수도 있는데 남편은 잠도 안 자고 기다린다. 오죽하면 친구들이 ‘강데렐라’(성이 강씨다)라는 별명까지 붙였을까. 12시까지 가야 하는 신데렐라를 빗대 지었다고 했다. 웃기는 했지만 놀다 말고 혼자 일어나는 마음이 오죽하겠냐 싶어 안쓰러웠다. 남편에게 "만나는 친구가 자기 제자니까 착하다는 것 알잖아. 이야기하다 보면 늦을 수도 있지 왜 틀 안에 가두려고 하냐?"고 따지며 별명 이야기까지 했는데도 소용없다. “짜식들”로 끝이다. 슬리퍼를 신고 외출해도 안된다. 신발 찍찍 끌고 다니는 게 눈에 거슬린다며 단정하게 다녔으면 좋겠다고 한다.
중학교 제자였던 아들 친구들도 소문난 호랑이 선생님이었던 남편 성향을 잘 안다. 원칙에서 벗어난 것은 어떤 것도 허용하지 않는 것을. “그런 아빠 밑에서 어떻게 사냐?”고 묻던 친구들이 자정이 가까워지면 빨리 들어가라고 더 챙긴단다.
집안일은 모두 내가 알아서 하고 애들 공부로 잔소리 한번 한 적 없는데 유독 행동 규제만큼은 양보가 없다. 그러던 남편이 세 아이가 직장인이 되니 더 이상 간섭하지 않는다. 최대한 존중하려고 노력한다.
지난번 딸과 여행하며 어릴 적 이야기를 했다. 아빠가 통제하고 간섭했던 게 이 그때는 싫었는데 나이가 들면서 바르게 자랐다는 자부심이 생긴다고 했다. 큰 산처럼 무섭기만 했던 아빠가 나이 들고 늙었다고 생각하면 울컥할 때가 있다며 사이좋게 지내라고 당부한다. 애들에게 엄격했던 행동이 부정적으로 자리하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다.
강데렐라와 며느리는 점심 먹고 서울로, 막내아들은 여수로 갔다. 쉬고 싶을 텐데 아빠 생일이라고 주말까지 반납하고 온 며느리 마음이 더 예쁘다. 이제는 남편과 애들 문제로 싸우지 않는다. “자기 말이 법이라도 되냐?”고 따지며 목소리를 높이지도 않는다. 지금은 “자네 알아서 하소."를 달고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