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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2496
8월23일 [연중 제21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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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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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 오늘 미사**
https://m.youtube.com/watch?v=kQfooxlaSbg
**서울 주보**
http://pf.kakao.com/_xhGxjBxb/552214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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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 저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밀려드는 군중들로 인해 눈코뜰새 없이 분주하셨던 예수님께서 적막하기 그지없는 요르단 강 상류 헤르몬 산 아래 위치한 카이사리아 필리피 지방에 도달하시자, 고요함 속에서 당신 제자들을 향해 결정적인 질문 한 가지를 던지십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마태오 복음 16장 15절)
제자단을 대표해서 수제자 시몬 베드로가 나서서 대답을 하는데, 그 대답이 예수님 마음에 쏙 드는, 기다리시던 대답이었습니다.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마태오 복음 16장 16절)
시몬 베드로의 대답은 간략하고 단순한 대답이었지만, 인류 역사에 대대적인 전환을 가져오는 위대한 대답이었습니다.
베드로의 신앙 고백은 구약 시대에서 신약 시대로, 육적인 이스라엘에서 영적인 이스라엘로, 유다 회당에서 그리스도교 교회로, 이스라엘 한 민족의 소명에서 온 세상 만민의 소명에로 넘어가는 대전환이 이루어진 고백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위대한 신앙 고백을 기초로 당신의 교회를 건설하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또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그러니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마태오 복음 16장 18~19절)
나약하기 그지 없는 한 인간 존재, 그래서 언제나 좌충우돌, 흔들리던 시몬 베드로에게 수위권을 맡기시고, 천국의 열쇠까지 맡겨주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묵상하면서, 얼마나 큰 마음의 위로가 되었는지 모릅니다.
마치 오늘 우리들처럼 지상 생활 내내 쉼없이 흔들렸던 시몬 베드로였습니다. 그는 언제나 스승님으로부터 잦은 질타를 받던 ‘관심 사병’이었습니다.
그러나 시몬 베드로는 자기 자신에 대한 인식이 정확했습니다. 그는 언제나 자신의 나약함, 죄, 인간적인 한계를 명확히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수시로 흔들렸지만 흔들릴 때 마다 겸손하게 외쳤습니다.
“주님 보시다시피 저는 보잘 것 없는 죄인 중의 죄인입니다. 저는 주님의 제자로서 부당한 존재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 아시다시피 저는 주님을 사랑합니다. 제게는 오직 주님 당신 밖에 없습니다.
주님을 떠난 저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저는 그저 당신으로 인해 가치있고 의미있는 존재입니다. 주님 손길 안에 머무는 것이 제게는 가장 큰 행복입니다.”
이렇게 시몬 베드로는 정확한 자기 인식의 기반 위에 각고의 노력을 더해, 마침내 그 어떤 세찬 비바람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든든한 교회의 반석으로 거듭났습니다.
시몬 베드로는 존재 자체로 오늘날 교회 및 사회 지도자들에게 큰 경종을 울리고 있습니다.
지도자들이 지녀야할 가장 기본적인 덕목은 자신이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아는 겸손함입니다. 그러한 겸손의 덕 위에 부단히 자신의 결핍, 나약함, 부족함이 무엇인지 알아가려는 솔직한 자기 인식을 위한 노력이 또한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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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성당보다 학교를 먼저 짓는 마음으로>
(묵상 동영상)
https://youtu.be/8dOPjY7w_S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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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는 창의력의 시대라고 합니다. 스마트폰과 같은 창의적인 발상이 세상을 바꿉니다. 그런데 그 창의력은 어디서 나올까요? 공부를 열심히 하면 창의력이 생길까요? 저는 ‘기분’이 창의력을 결정한다고 생각합니다.
‘올리버 색스’의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에서 한 조증 환자의 사례가 나옵니다. 올리버 색스는 영국의 신경과 의사입니다. 그에게 지나치게 기분이 좋아 보이는 미겔이란 청년이 찾아왔습니다. 올리버 색스는 그에게 동그라미에 엑스 표를 한 그림을 보여주고 그것이 무슨 그림인지 맞춰보라고 했습니다. 그는 늠름하게 “이건 뚜껑이 열린 상자인데요, 그 속에 사과가 하나 들어있네요”라고 대답했습니다. 엄청난 상상력이었습니다.
다음번에는 더 기분 좋은 모습으로 나타났습니다. 다시 동그라미 속에 엑스 표를 한 그림을 보여주었더니 그는 “아, 이거요. 어떤 아이가 연을 날리고 있는 것을 위에서 내려다본 것이네요.”라고 하였습니다.
며칠 후 그가 다시 왔습니다. 그런데 그는 매우 우울한 표정을 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조증이 온 것은 신경을 훼손하는 바이러스 때문이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안정제를 투여받았어요.” 올리버 색스는 역시 똑같은 그림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는 말했습니다. “이건 동그라미 속에 들어있는 엑스 표네요.” 정확히 맞추었습니다. 그에게 창의력이 완전히 사라진 것입니다.
창의력은 무엇일까요? 전혀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것일까요? 스티브 잡스가 스마트폰을 발명했다고는 하지만, 스마트폰은 그저 당시에 있던 전화기와 아이팟의 화면을 결합한 것에 불과합니다. 전혀 새로운 것을 만들 수 있는 분은 하느님밖에 안 계십니다. 창의력은 이미 존재하지만 남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는 눈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을 누구라고들 하느냐?”라고 물으십니다. 다른 이들은 예수님을 보고 세례자 요한아니, 엘리야, 혹은 예레미야나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오직 베드로만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고백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창의력입니다. 남들은 볼 수 없지만, 베드로만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창의력은 자신의 힘으로 생겨나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성령께서 주시는 능력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시몬 바르요나야, 너는 행복하다! 살과 피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것을 너에게 알려 주셨기 때문이다.”
아버지께서 그것을 어떠한 방법으로 알려주신 것일까요? 성령을 부어주신 것입니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 기쁨, 평화입니다. 좋은 기분입니다. 베드로의 창의력, 즉 남들은 볼 수 없는 것을 보는 능력은 아버지로부터 받은 성령으로 기쁘고 평화롭고 사랑하기 때문에 얻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시고 교회를 세우신 다음 “당신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당부하십니다. 분명 교회는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는 것을 증거해야 합니다. 그런데 말하지 말라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는 “네가 깨달은 방식대로 깨닫게 하여라”는 뜻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제대로 본 것이 성령님 때문이지 누구에게 설명을 들어서가 아닌 것처럼, 복음을 전하는 것도 사람들의 기분을 좋게 해 주는 것이어야지 설명으로 다가가서는 안 됩니다. 이는 마치 지하철에서 “예수 천국, 불신 지옥!”이라고 다른 사람을 괴롭히며 복음을 전하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기분이 나쁘면 아무것도 알고 싶지 않습니다.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에 이러한 사례도 나옵니다. 성악가 출신 P 선생의 이야기입니다. 그가 올리버 색스를 방문할 당시는 음악 교사로 재직할 무렵이었습니다. 완벽한 자신의 생활에 만족했던 P 선생, 그런데 그 일이 시작되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아이들의 얼굴을 인식하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학생들이 보이지만, 누가 누구인지 인식 불가하였고 결국 목소리로만 학생을 구분해야만 했습니다.
가끔은 웃지 못할 일도 벌어졌습니다. 길을 가던 중학교 학생들이 발견한 P 선생은 아무도 없는데 혼자 “너희 뭐 하니? 왜 그러니? 여기서 뭐 하니?”라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아이들이 “선생님, 주차 정산기랑 소화전 앞에서 뭐 하세요?”라고 물으니 선생님은 연기 연습하는 것이라고 하며 농담으로 간신히 넘어갑니다.
P 선생은 당뇨병으로 눈이 잘 안 보이는 게 원인인 줄 알고 안과를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안과에서는 눈의 질환이 아닌 것 같다고 신경 전문의에게 가볼 것을 권유했습니다. P 선생의 반사 반응 검사를 한 올리버 색스가 이제 신발을 신으라고 했을 때, P 선생은 자신의 발을 신발로 착각하고 있었습니다. 검사가 다 끝났다고 여겼는지 P 선생은 모자를 찾기 시작했고 함께 온 아내의 머리를 잡고서 자기 머리에 쓰려고 했습니다.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아내는 늘 있는 일이라는 듯 태연한 모습이었습니다.
아내는 남편이 항상 노래를 불렀는데 노래를 멈추면 이런 일이 자주 발생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노래를 부를 때 가장 행복했고 그때면 모든 것을 제대로 보이지만 노래를 부르지 못하는 상황이라면 제대로 보아야 하는 것도 보이지 않게 된 것입니다. 올리버 색스가 이런 처방을 내렸습니다.
“만약 제가 처방을 내린다면, 이제까지 음악이 선생님 생활의 중심이었다면, 이제부터는 생활 전부라고 생각하고 음악 속에 파묻혀서 생활하시라고 하고 싶습니다.”
질병의 점진적인 악화에도 불구하고 P 선생은 마지막 순간까지 음악을 가르치며 살았습니다. 물론 노래를 부르지 않을 때 가끔 일어나는 익살스러운 실수를 빼고는.
행복하면 보이고, 행복하지 않으면 보이지 않습니다. 그 행복은 성령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교회를 세우시며 왜 예수님은 당신이 그리스도란 것을 알리지 말라고 하신 것일까요? 그 이유는 먼저 성령을 주려고 해야지 지식을 주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려주시기 위함일 것입니다. 교회가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 준다면 사람들은 그 교회를 만드신 분이 그리스도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고 기분을 상하게 한다면 아무리 합당한 증거를 대더라도 사람들은 믿으려 하지 않습니다.
이태석 신부님에게 어느 정도 돈이 모였을 때 그분은 아이들을 위해 더 좋은 것이 무엇인지 고민해야 했습니다. 성당을 먼저 세우는 것이 나을까, 학교를 먼저 세우는 것이 나을까? 신부님은 성당보다 학교를 세우는 것을 선택했습니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원하실 것이라 믿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에 따르면 그것이 옳습니다. 아이들을 먼저 기쁘게 해야 합니다. 그러면 아이들은 이태석 신부님을 통해 보이는 예수님을 알아보게 됩니다.
요즘 얼마나 종교들이 세상에 해악을 입히고 사람들을 힘들게 합니까? 그러면서 어떻게 복음을 전할 수 있을까요? 성당은 크게 지으면서 성당 옆에 있는 가난한 이들은 돌보지 못한다면 그들이 어떻게 예수님을 알아볼 수 있을까요? 예수님께서는 교회를 세우시면서 당신이 누구인지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분부하셨습니다. 교회는 세상에 성당보다 학교를 먼저 짓는 마음으로 다가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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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오늘의 전례는 베드로의 메시아 고백과 이에 따른 교회 전체에 대한 특별 ‘권한’이 주어지는 것으로 신약성서의 메시지를 총괄하는 듯한 장중한 모습을 우리에게 소개하고 있다. 베드로가 고백한 그리스도는 ‘고통받는’ 메시아로 십자가 위에서 당신의 사명을 다할 것이며, 교회가 이제 존속하기 위해서는 봉사와 직무는 베드로 안에 언제나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1독서에는 권한의 이양에 대한 개념이 많이 들어있다. 그 중에도 ‘열쇠’라는 개념은 더 높은 사람에게서 받은 충만한 권한을 말한다. 이것이 오늘 복음에 예수께서 베드로를 ‘교회’라고 하는 당신의 ‘집’의 책임자로 세우신다는 의미로 베드로에게 그 의미를 적용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복음: 마태16,13-20: 하늘나라의 열쇠를 너에게 주겠다.
오늘 복음은 ‘그리스도론적' 관점 외에 '교회론적' 관점이 있다. 오늘 복음의 '그리스도론적' 관점은 “사람의 아들을 누구라고들 하느냐?”(13절)에서 나타난다. 이 질문은 사람들의 생각을 알려는 것보다도 사도들이 당신의 '신비'에 깊이 들어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질문이다. '사람들'의 말은 당신과 일치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15절)고 물으신다. 이때 베드로는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16절)라고 고백한다.
오늘 복음의 고백은 다른 두 공관복음의 고백과는 다르다. 다른 두 복음에서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즉 메시아로만 고백하지만, 여기서는 '하느님의 아들'로서도 고백하고 있다. 베드로를 통해서 더 완전한 신앙고백을 하고 있다.
이 ‘믿는다는 것’은 순전히 이성의 힘으로만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그 지성을 넘어서는 어떤 사실에 대해 마음의 문을 여는 것이다. 믿음이란 예수께서 말씀하시듯이 하늘로부터 주어지는 순수한 ‘선물’이다. “시몬 바르요나야, 너는 행복하다! 살과 피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것을 너에게 알려 주셨기 때문이다.”(17절) 그러나 이 베드로의 고백은 단순히 개인적인 사실로서가 아니라, 교회에 항구히 바쳐져야 할 ‘봉사’의 상징적 표현이라는 것이다. 이 때문에 그리스도론적 내용이 교회론적 내용으로 이어지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수께서는 베드로에게 그가 비록 나약하지만 큰 책임을 맡기겠다고 선언하신다. “나 또한 너에게 말한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감히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또 나는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그러니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18-19절)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을 ‘하느님의 아들’로 고백한 베드로를 당신 교회를 세울 주춧돌로 삼으신다. 주춧돌의 역할이 주춧돌만이 아니라, 결합하는 역할이라는 것이다. 베드로의 역할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께 대한 유일한 믿음을 항상 새로이 제시하고 해석해줌으로써 하게 될 것이다.
예수께서는 “너는 베드로이다.”(18절) 라고 하시면서도 “세울 것이다.”(18절), “열쇠를 주겠다.”(19절) 라고 하신다. 이것은 베드로의 ‘봉사적 역할’이 영속적으로 계속되리라는 사실을 말하는 것이다. 즉 계속해서 베드로와 같이 인간의 구원을 위해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고백함으로써 이 교회의 주춧돌의 역할을 할 사람이 항상 필요하다.
이러므로 인간의 구원 활동을 방해하는 모든 악의 세력들(죽음의 힘)도 교회를 ‘누르지’ 못할 것이다. 베드로의 믿음이 이 세상 끝날까지 교회를 지탱해 나갈 것이다. 이 믿음은 이제 여러 문화적 상황들과 접하면서 거기에서 제기되는 문제들을 마주 대해야 할 것이다. 여기에서 베드로는 주님께 대한 충만한 믿음으로 결정적인 가르침을 주어야 한다.
“나는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그러니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19절). ‘열쇠’라는 상징적 개념은 랍비적 형태의 표현으로 일정한 행동을 금하거나 허락하는 것을 권위 있게 선언하는 의미이다. 이것을 종교적 차원에서 본다면 이 표현은 공동체에서 제외하는 권한 내지 받아들여 주는 권한을 가리킨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베드로가 받은 권한이 아니라, 베드로가 그리스도의 ‘전권대사’로서 행하는 모든 것을 ‘하늘에서’ 그대로 인정해준다는 사실이다. ‘베드로의 신비’는 여기서 유래하는 것이다. 베드로와 그의 후계자들 안에는 그리스도의 현존 자체로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께 대한 유일하면서도 확고부동한 믿음을 우리 모두에게 선포하여 알려주시고 또한 해석해 주신다.
오직 믿음만이 이성이 불가능하다고 하는 것을 가능한 것으로 받아들이게끔 해 준다. 이 때문에 사도 바오로는 헤아릴 수 없는 하느님의 계획에 찬미를 드리고 있다. “오! 하느님의 풍요와 지혜와 지식은 정녕 깊습니다. 그분의 판단은 얼마나 헤아리기 어렵고 그분의 길은 얼마나 알아내기 어렵습니까?...그분께 영원토록 영광이 있기를 빕니다. 아멘”(로마 11,33-36).
베드로의 신앙 위에 예수께서는 교회를 세우시고 권한을 주셨다. 그러나 이것은 세상과 인간의 구원을 위한 것이다. 권위라는 것은 봉사를 위한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어느 위치에 있든지 우리는 베드로라는 주춧돌에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고 우리도 그 같은 신앙을 고백하고 또 진정으로 봉사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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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박기석 사도요한 신부님]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사람의 아들을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질문하십니다. 제자들은 “세례자 요한, 엘리야, 예언자”라고 답을 드립니다. 명칭은 각기 다르나 공통점이 있는데, 하느님의 심판을 선포하고 세상 마지막 날을 예고하는 인물들이라는 것입니다. 이 대답에서 당시 사람들이 예수님을 어떻게 생각하였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생각을 물으십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베드로가 답합니다.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렇습니다. 제자들에게 연이어 질문하시는 예수님과 정답이 된 베드로의 신앙 고백 때문에 마음과 마음으로 미소가 번집니다.
어느 날 부처님이 제자들을 영산에 모이게 합니다. 그리고 한마디 말씀도 없이 연꽃 한 송이를 손가락 끝으로 잡은 채 제자들에게 보입니다. 다들 그 뜻을 알지 못하여 말 없이 스승의 손가락 끝에 들린 꽃만 보는데, 그 가운데 ‘가섭’만이 그 뜻을 깨닫고 빙그레 미소 짓습니다. 그래서 이를 ‘염화미소’라 하고, ‘이심전심’이라고도 합니다. 부처님이 돌아가신 뒤에 법을 가섭에게 맡겼는데 마음으로써 마음을 전했다고 하여 생긴 말입니다.
그동안 스승이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많은 가르침을 주시고, 기적을 통하여 그 의미를 밝혀 주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당신에 대하여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궁금하셨던 것입니다. 이때 베드로의 대답은 가섭의 미소처럼 완벽하였고, 베드로가 받은 하늘 나라의 열쇠는 가섭이 부처님에게 받은 법처럼 하늘의 뜻을 땅에 이루게 하는 도구였습니다.
제2독서인 바오로의 로마서 말씀은 베드로가 예수님에게서 받은 하늘 나라의 열쇠가 얼마나 큰 것인지 미루어 짐작하게 합니다. “오! 하느님의 풍요와 지혜와 지식은 정녕 깊습니다. 그분의 판단은 얼마나 헤아리기 어렵고 그분의 길은 얼마나 알아내기 어렵습니까? 누가 주님의 생각을 안 적이 있습니까? 아니면 누가 그분의 조언자가 된 적이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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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베드로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은,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며, 하느님이시고,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 아버지 하느님께서 보내신 구세주(그리스도)” 라고 믿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의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라는 신앙고백은 ‘예수님은 구세주’ 라는 믿음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이 신앙고백에는 예수님의 신성(神性)에 대한 믿음이 들어 있긴 하지만, 아직은 ‘예수님은 하느님’이라고 고백하는 단계에 도달하지는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라는 신앙고백은 예수님 부활 후에 토마스 사도가 하게 됩니다(요한 20,28).>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께서 ‘생명의 빵’에 관한 말씀을 하셨을 때,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스승님께서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라고 저희는 믿어 왔고 또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요한 6,68-69)라고 고백했습니다. 이 말은 ‘예수님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구세주’ 라는 신앙고백입니다. 또 사도행전을 보면, “그분 말고는 다른 누구에게도 구원이 없습니다. 사실 사람들에게 주어진 이름 가운데에서 우리가 구원받는 데에 필요한 이름은 하늘 아래 이 이름밖에 없습니다."(사도 4,12)라는 베드로 사도의 증언이 나옵니다. 이 증언은 사실상 ‘예수님은 하느님’이라는 신앙고백입니다. <“이 이름밖에 없다.”는 베드로 사도의 말은, 하느님의 이름 ‘야훼’를 버리고 ‘예수’ 라는 이름만 선택한다는 뜻이 아니라, ‘야훼’와 ‘예수’ 라는 이름을 동등하게 생각하고 있음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히브리서를 보면, “아드님은 하느님 영광의 광채이시며 하느님 본질의 모상으로서, 만물을 당신의 강력한 말씀으로 지탱하십니다."(히브 1,3)라는 신앙고백이 나옵니다. <이 말은 “예수님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보이는 형상이신 분”이라는 믿음을 고백한 말입니다.> 사실 사도들과 신자들은 처음부터 예수님을 제대로 믿은 것은 아니었고, 예수님과 함께 지내면서 차츰 깨닫게 되다가, 예수님의 수난, 죽음, 부활을 겪은 후에 마침내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온전히 깨달았고 믿게 되었습니다. 요한복음서 머리글에 있는, “한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요한 1,1).”, “아무도 하느님을 본 적이 없다. 아버지와 가장 가까우신 외아드님, 하느님이신 그분께서 알려 주셨다."(요한 1,18)라는 선언은 ‘완성된 단계에 도달한 신앙고백’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카이사리아 필리피 지방에 다다르시자 제자들에게, ‘사람의 아들을 누구라고들 하느냐?’ 하고 물으셨다. 제자들이 대답하였다.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예레미야나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시몬 베드로가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마태 16,13-16)
“사람의 아들을 누구라고들 하느냐?”라는 말씀은, “세상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말하더냐?”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의 생각이 궁금해서 물으신 것은 아니고, 이 질문은 제자들의 신앙고백을 준비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사람들이 세례자 요한, 엘리야, 예레미야,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말한다는 제자들의 대답은 당시의 소문을 말한 것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예수님이 보통 사람과는 다른 특별한 분이라는 것은 느끼고 있었지만, 메시아라고 생각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라는 말씀은, “너희는 나를 ‘무엇으로’ 믿고 있느냐?” 라는 뜻인데, 몰라서 하신 질문은 아니고, 제자들이 스스로 신앙고백을 하게 만들기 위한 질문입니다. 요한복음을 보면, 제자들은 처음부터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요한 1,41), 예수님의 신성(神性)을 믿은 것은 어느 정도 시일이 지난 뒤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만으로 바람과 호수를 고요하게 만드셨을 때, 제자들은 놀라서 “이분이 어떤 분이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라고 말했습니다.(마태 8,27) 제자들은 예수님의 권능과 권한을 체험하면서 차츰 예수님의 신성을 믿게 되었고, 마침내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그리고 마지막에는 ‘하느님으로’ 믿게 되었습니다.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라는 말은, “저희는 스승님께서 야훼 하느님의 아드님으로서 하느님과 똑같은 신성과 권한과 권능을 가지고 계신 분이고,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 하느님께서 보내신 구세주라고 믿고 있습니다.”라는 뜻입니다.
오늘날의 우리 입장에서는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라는 말씀을 우리에게 하시는 질문으로 바꿔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즉 “너는 왜 성당에 다니느냐?”로 바꿔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성당에 다니는 것은 예수님을 믿기 때문이고,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신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처음에 신앙생활을 시작할 때에는 어떤 소원을 빌기 위해서 시작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멈추면 안 되고, 궁극적인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향해서 나아가는 신앙생활로 발전해야 하고 성숙해져야 합니다. 만일에 그렇게 하지 않고,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복이나 빌고, 개인적이고 이기적인 복이나 비는 생활에서 멈추어 있다면, 그것은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는 것이 아니고, ‘기복신앙’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기복신앙은 겉으로 보기에는 신앙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신앙이 아닌, 미신을 믿는 것과 다를 것이 없는 일입니다. <“도대체 궁극적인 구원이란 무엇인가?” 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궁극적인 구원’은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어 누리는 것입니다. (죄와 죽음의 억압에서 해방되는 것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그 구원은 예수님을 믿는 순간부터 시작되어서 하느님 나라에서 완성됩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 사도를 축복하시면서 아버지께서 그것을 알려 주셨다고 말씀하신 것은(마태 16,17), 그의 신앙이 올바른 것임을 인정하신 것이고, 그의 신앙고백은 하느님의 계획에 속한 일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베드로 사도를 교회의 반석으로 삼으신 일과 그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신 일은(마태 16,18-19), 앞으로 전체 교회가(모든 신앙인이) 베드로 사도가 고백한 그 신앙을 바탕으로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신 일입니다. 물론 베드로 사도를 교회의 지도자로 임명하신 일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당신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분부하신 것은(마태 16,20), 당신의 부활 때까지 침묵을 지키라는 뜻인데(마태 17,9), 예수님은 그냥 구세주가 아니라 인류를 위해서 당신의 목숨을 바치는 구세주이고, 또 생명의 주님이신 분이라는 것을 사람들이 제대로 이해하고 믿게 되는 것은 예수님의 수난, 죽음, 부활 후에 이루어질 일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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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코로나19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보았습니다. 바이러스는 인류보다 훨씬 먼저 지구에서 살았습니다. 바이러스는 스스로는 복제를 하지 못하지만 숙주가 되는 생명에서는 세포 속으로 들어가 복제를 한다고 합니다. ‘스페인 독감, 사스, 신종플루, 메르스, 코로나19’와 같은 바이러스는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고 합니다. 그것은 동물에서 인간으로 바이러스가 옮겨온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 과정에서 바이러스는 변이가 생기고, 변이 중에는 인간의 몸에 큰 피해를 주는 바이러스가 있다고 합니다. 바이러스가 인간에서 동물로 옮겨지는 과정은 두 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하나는 인류가 양, 소, 돼지, 닭, 말, 개와 같이 가축을 기르면서입니다. 이런 동물과의 접촉에서 생기는 바이러스는 백신도 있고, 치료제도 있어서 어느 정도 예방도 가능하고, 확산을 막을 수 있다고 합니다.
다른 하나는 야생동물을 먹는 과정에서 바이러스가 전파되기도 하고, 서식지를 잃어버린 박쥐와 같은 동물이 인간과 가까이 있는 가축들과의 접촉을 통해서 전파되기도 합니다. 코로나19와 같은 전염병은 그 원인이 가축에게 있는 것도 아니고, 야생동물에게 있는 것도 아니고, 인간에게 있다고 합니다. 교통과 통신의 발달로 70억 인류가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는 것도, 대부분의 사람이 도시에 모여 사는 것도 바이러스에게는 복제를 할 수 있는 최적의 기회가 된다고 합니다. 원인을 알았으면 해결방법도 찾을 수 있습니다. 백신과 치료약을 만드는 것은 ‘사후약방문’이 될 수 있습니다. 엄청난 경제적인 피해와 희생자가 나온 뒤에 만들어지기 때문입니다. RNA 바이러스는 빠른 속도로 변이를 이룰 수 있다고 합니다. 인간의 백신과 치료제로는 바이러스의 확산을 미연에 막을 수 없다고 합니다.
자연을 보호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나의 생명이 소중하듯이 다른 생명도 소중하다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멈추면 보이는 것이 있듯이 발전과 개발의 패러다임에서 벗어나 명상과 성찰의 시간이 있어야 합니다. 봉쇄와 단절만으로는 바이러스의 확산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는 여권 없이도 이동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자유라는 이름으로 타인을 배려하지 않고 정부의 정책을 따르지 않으면 엄청난 피해가 생기는 것을 우리는 보았습니다. 연대와 협력으로 바이러스를 검사하고, 추적하고, 치료하는 것이 현재로서는 바이러스의 확산을 막는 최상의 방법입니다. 한국은 국제적인 모델이 되었습니다. 성숙한 시민의식이 필요합니다. 정부의 정책을 신뢰하고 따르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마스크를 착용하고, 사회적인 거리두기를 잘 지킨 나라는 피해자도 적었고, 확진자도 적었고, 확산도 막을 수 있었습니다.
작년에 미국에 왔을 때입니다. 꼭 필요한 것이 있었습니다. ‘운전면허증’입니다. 한국에서 30년 가까이 운전을 했지만 뉴욕에서는 한국의 운전면허증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면허증을 따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필요했습니다. 하나는 필기시험이고 다음은 실기시험입니다. 필기시험을 위해서 예상문제를 풀어보았습니다. 한국과 뉴욕은 교통법규도 다른 점이 있고, 신호체계도 다른 점이 있었습니다. 다행히 필기시험은 합격했고, 임시 운전면허증이 나왔습니다. 실기시험 당일에 1시간 정도 실습을 받았습니다. 감독관은 천주교 신자였고 사제인 제게 강복을 청하였습니다. 긴장되고 떨리던 마음이 진정되었고, 실기시험도 통과하였습니다. 몇 주 뒤에 5년 동안 미국에서 운전할 수 있는 면허증을 받았습니다. 한국에서 아무리 운전을 오래했어도 필기시험과 실기시험을 통과하지 않으면 미국에서 운전할 수 있는 면허증을 받을 수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문제를 냈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생각합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나를 누구라고 생각합니까?’ 제자들은 저마다 답변을 하였습니다. 누가 가장 예수님의 마음에 드는 답변을 하였을까요? 그렇습니다. 베드로입니다. 베드로는 이렇게 답변하였습니다.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베드로의 답변은 필기시험에는 만점을 받는 답변이었습니다. 실기시험에서도 만점을 받는 실력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베드로에게 이렇게 칭찬을 하셨습니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또 나는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그러니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운전면허증 대신 천국의 열쇠를 주셨습니다. 사람들의 허물과 잘못을 풀어줄 수 있는 권한을 주셨습니다. 이것이 고백성사의 시작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같은 질문을 하신다면 어떻게 답변하시겠는지요? 여러분에게 예수님은 과연 어떤 분이신지요? “하느님, 신자들을 한마음 한뜻이 되게 하시어 저희가 하느님의 가르침을 사랑하고 그 약속을 갈망하며 모든 것이 변하는 이 세상에서도 참 기쁨이 있는 곳에 마음을 두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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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당신을 아는 길>
마태오 16,13-20 (베드로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다)
예수님께서 카이사리아 필리피 지방에 다다르시자 제자들에게, “사람의 아들을 누구라고들 하느냐?” 하고 물으셨다. 제자들이 대답하였다.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예레미야나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시몬 베드로가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시몬 바르요나야, 너는 행복하다! 살과 피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것을 너에게 알려 주셨기 때문이다. 나 또한 너에게 말한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또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그러니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그런 다음 제자들에게, 당신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분부하셨다.
<당신을 아는 길>
내가
나로 있는 한
당신을 알 수 없습니다
내가
당신이 되어야
당신을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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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윤희동 바울리노 신부님]
<예수님 교회>
“나 또한 너에게 말한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마태오 복음 16장 18절)라는 복음 내용을 읽으며 살아 있는 예수님의 교회를 보고 싶습니다.
오늘날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의 교회가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완벽하게 그려내고 있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우리 그리스도인은 저승의 세력에 휘둘리지 않는 교회를 희망하며 나아가야 하겠지요? 저승의 세력은 무한대의 모습으로 우리 주변에서 건수를 찾아 자신의 동조자로 만들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느님 자녀요, 그리스도인이며, 주님의 종이라는 정체성을 잃지 않도록 늘 주변과 자신을 성찰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 성찰의 한 가닥에서 저는 나눔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의 삶은 당신의 몸을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신 그 저녁 식사자리에서 완성되었다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의 본질은 나누는 데 있습니다.
그런 차원에서 ‘예수님은 어떻게 나누셨을까?’를 스스로에게 늘 물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알맹이 있는 예수님 교회의 나눔을 겉모양만 요란스런 것이 되지 않게 하는 방법입니다.
또 나눔은 필요한 곳에, 적절하게 또 즉시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 나눔에 대해서는 누구라도 쉽게 얘기할 수 있지만, 우리는 이 좋은 나눔을 세상 이해관계에 매여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 코로나 여파로 힘들어하는 가정과 단체들을 위해 많은 분들이 나눔을 실천해 주셔서 교구 차원에서 즉각적인 지원을 하였습니다.
제가 속한 빈민 사목에서 운영하는 반송 빛둘레 나눔가게도 큰 도움을 받았습니다. 아마 다른 단체들에게도 큰 힘이 되었을 겁니다. 코로나로 모두가 힘들지만, 더 힘든 이웃을 생각해서 모금이 이루어졌고, 모두를 지원할 수 없어 안타깝지만 더 필요한 곳을 선정하여 즉각적으로 지원이 되었던 겁니다. 이렇게 살아 있는 예수님 교회의 모습을 우리가 보여주었던 겁니다.
나눔은 사람을 전화위복시킵니다. 그리고 전화위복의 원천인 하느님을 만나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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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이영재 대건 안드레아 신부님]
<당신은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
세계 4대 성인을 찾아보면 석가모니, 공자, 소크라테스 그리고 예수님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중 한 분인 소크라테스가 이야기한 명언 중에 ‘너 자신을 알라.’라는 말이 있습니다.
저는 신학교 시절에 이 말을 접하고, ‘누가 자기 자신을 모를까?’라며 의문을 가진 적이 있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신원을 안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려주십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들 하느냐?”라고 제자들에게 당신의 신원을 묻습니다. 제자들은 주변 사람들에게 들은 대로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엘리야... 예레미야나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합니다.”라고 전합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제대로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라는 질문에 시몬 베드로가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답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교회의 반석, 기초가 될 것을 약속하시며, 하늘 나라의 열쇠를 선물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신원에 맞게 우리를 죄와 죽음으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해 당신 자신을 기꺼이 성부의 뜻에 따라 봉헌하셨고, 베드로도 이를 증언하며 교회의 반석이 되셨습니다.
이제 우리 자신으로 돌아가 봅시다. ‘나는 누구인가?’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들입니다. 주변 본당에서 걱정이 많습니다. 코로나19 이후 신자들이 많이 줄었다고요!
그러나 저는 희망을 갖습니다. 현재 성당에 열심히 오시는 더 많은 신자분들을 보면서요. 이분들도 코로나19에 대한 위험성을 알고, 집에서 편하게 신앙 생활하는 것이 좋다는 것도 알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분들이 잊지 않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며 우리는 모두 그분의 자녀라는 사실 말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자녀들이라면 당연히 하느님을 사랑하고 공경하며,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코로나19 상황 속에서도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시는 모든 신자분들, 힘내세요. 하느님 나라의 열쇠는 이미 베드로 사도께서 받으셨지만(?), 주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의 문을 우리 모두에게 반드시 열어주실 겁니다.
파이팅!
참, 절친 중에 주일미사에 안 나오시는 분들께 전화 한 통 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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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교구 손대혁 루치오 신부님]
<예수님이 누구신지 진정으로 알고 고백하기>
찬미 예수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을 누구라고 하는지 질문하십니다. 처음에는 사람들의 생각을 물어보시고, 그러고 나서는 제자들의 생각을 물어보십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예수님의 이 질문은 오늘날 우리 신앙인들 각자에게 하시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참 행복과 구원으로 나아가기 위해 자신에게 끊임없이 물어보며 그 답을 찾아보아야 합니다.
‘나는 예수님을 누구라고 하는가?’ ‘나에게 예수님은 누구인가?’하고 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어떻게 찾아야 할까요?
우리 신앙인들에게 예수님이 누구신지 참으로 알게 해 주는 것은 다름 아닌 예수님을 따르는 삶, 제자로서의 삶입니다. 다른 사람의 생각을 듣고, 교리를 공부하고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진정으로 알기 위해서는 제자로서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무엇보다도 “나를 따라라.”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진정으로 예수님을 알수 있는 길입니다. 완전하지는 않더라도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로서의 삶을 끊임없이 살아감으로써 우리는 예수님이 누구신지 진정으로 알고 고백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베드로가 그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질문에 놀라운 대답을 합니다.
“스승님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베드로의 놀라운 이 대답은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로서의 삶에서 나온 것입니다. 부족했지만 제자로서 예수님을 따르는 삶에서 나온 참된 신앙 고백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이 대답, 신앙 고백을 들으시고는, 그것은 하느님 아버지께서 알려주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서 알려주시고 마련해주신 베드로의 신앙 고백, 그 믿음이라는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겠다고 말씀하시고,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매번 완벽하게 예수님을 충실히 따르지는 못하더라도 포기하지 말고, 제자로서의 삶을 끊임없이 살아가도록 합시다. 그 삶을 통해 우리는 예수님이 누구신지 진정으로 알고 굳건한 믿음을 고백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그러한 우리와 언제나 함께하시며, 믿음이라는 반석 위에 그 어떤 세력에도 흔들리지 않는 교회 공동체를 이루어 나아가실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이 모든 것을 알려주시고 마련해주시며 이끌어주시는 분은 바로 하느님 아버지이심을 우리는 잊지 말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새로운 한 주간도 힘차고 기쁘게 살아가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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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지금 제가 있는 갑곶 성지에서는 지난 5월 4일부터 봉안당을 운영합니다. 사람들의 관심이 이렇게 클지 몰랐습니다. 언젠가는 이 세상 삶을 마칠 테니, 죽음 이후 자신이 안치될 장소를 찾아서 많은 분이 오십니다.
저희 성지의 장점이라면 매일 미사가 봉헌되고, 특히 매달 돌아가신 분을 위한 미사가 봉헌되는 것, 무엇보다 봉안당 장소가 성당에 붙어 있다는 것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수도권 내에 남아 있는 유일한 봉안 시설이어서 그런지 장례가 나면 무조건 저희 성지로 연락이 오고 그래서 거의 매일 안치 예식을 하게 됩니다. 이는 매일 죽음을 봐야 하고 또 이에 대해 깊은 묵상을 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줍니다. 봉안함 크기는 가로세로 30cm가 조금 넘습니다. 그렇게 큰 공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조그만 공간 안에 유골함에 담겨 안치됩니다.
부자든 가난한 사람이든 상관이 없습니다. 이 세상 살아 있을 때 떵떵거리며 살았던 사람도 조그만 유골함에 담길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 곁에 갈 때 자신이 모은 재산을 1원이라도 가져갈 수가 있을까요? 자신이 누렸던 지위를 하늘나라에서 보장해 달라고 주장할 수가 있을까요? 모두가 불가능합니다. 결국, 하느님을 향한 여정만이 남습니다.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것보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으로 하느님을 향해 나아가는 우리가 되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진정한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사람의 아들을 누구라고들 하느냐?”라는 예수님의 물음에, 제자들은 세례자 요한, 엘리야, 예레미야나 예언자 가운데 한 분 등으로 말합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나서서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정답을 이야기합니다. 이 고백을 통해 베드로는 장차 교회의 반석이 됩니다. 여기에 하늘 나라의 열쇠까지 얻게 되었습니다.
사실 베드로는 후에 주님의 수난과 죽음을 받아들이지 않아서, 예수님한테 ‘사탄’이라는 소리까지 듣게 됩니다. 여전히 부족하고 나약한 인간 베드로입니다. 하지만 그의 고백을 통해, 우리가 어떤 고백을 해야 하며 어떤 마음으로 주님 앞에 나아가야 하는지를 깨닫게 됩니다.
주님을 단순히 세상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분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청을 들어주는 심부름꾼으로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을 주시는 분으로,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로 생각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 가장 행복한 삶이 됩니다. 베드로의 칭찬을 우리 역시 받을 수 있는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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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을 빼는 말에 굴복하지 마세요.>
가정 형편이 그렇게 좋지 않은 아이가 있었습니다. 아이의 아버지는 가족을 버리고 떠났고, 낙심한 어머니 역시 아이를 이모에게 맡기고는 떠나버렸습니다.
이렇게 모두 떠나는 상황에서 아이의 자존감은 떨어질 수밖에 없었고 ‘무슨 일을 해도 실패할 것은 뻔해.’라는 생각이 늘 가득했다고 합니다. 이모 집에 살고 있을 때, 어느 날 어머니가 찾아와 기타를 선물해주었습니다.
이때부터 아이는 기타에 빠져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모는 너무 기타에만 빠져 있는 것 같다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기타만 쳐서 절대로 큰돈 못 번다.”
그러나 아이는 이모의 말에 굴하지 않고 열심히 기타를 쳤고, 구성원을 구성해서 시대를 휩쓰는 그룹이 되었습니다. 그가 바로 비틀스의 존 레넌입니다.
주변에서 이런 말을 많이 듣지 않습니까?
“그것은 너무 어려워. 그만 포기해.”
이런 사회적 통념에 기가 죽고 그래서 포기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되겠습니까? 어떤 변화도 이루어질 수가 없습니다.
나 자신은 어떤 말을 하고 있는지 생각해보십시오. 힘을 주는 말입니까? 힘을 빼는 말입니까? 무엇보다 힘을 빼는 말에 굴복해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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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천국의 기적>
-사랑, 찬미, 감사-
가을 열매들 익어가는 계절이 되니 곳곳에서 발견되는 삶의 기적들입니다. 지상 천국의 기적들입니다. 벌써 가을 때가 되니 밤열매들 익어 밤송이는 저절로 벌어져 떨어지고 커다란 호박 열매도 익어가느라 온 힘을 다해 매달려 있습니다. 이들 또한 어떤 역경중에도 최선을 다해 살라는 가르침을 줍니다.
참으로 어렵고 힘든 시대요 세상입니다. 세계적으로 2300만명이 코로나19에 감염되어 80만명이 사망했고 국내도 하루 300여명의 확진자가 발생하여 수그러질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전대미문의 홍수와 더불어 코로나19 팬데믹이 참 어둡고 침체된 분위기를 만듭니다. 모든 이들의 삶이 참 위태해 보입니다.
도대체 아무리 묘책을 생각해도 당장은 방법이 없어 보입니다. 마스크를 꼭 착용해야 하고 거리를 유지하며 손을 깨끗이 씻고 비대면을 하며 예방에 만전을 기하는 일뿐입니다. 그러니 서로간의 만남은 필히 제약이 따르기 마련이요 참 외롭고 힘들 수뿐이 없습니다.
함께 만나고, 기도하고, 미사를 해도 마스크로 온통 얼굴을 가리니 제대로의 얼굴 보기도 힘듭니다. 말 그대로 지옥같은 상황의 전개입니다. 이런 와중에도 참 온화하고 온유하게, 내적 평화와 안정을 누리며 살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정말 자기계발보다는 자기관리가 화급한 시절입니다.
어떻게 하면 이런 연옥같은, 혹은 지옥같은 상황에서 천국의 기적을, 천국의 행복을 살 수 있을까요? 반드시 이렇게 살 수 있고 살아야 합니다. 바로 오늘 지금 여기서 천국의 기적을, 행복을 사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말씀에서 그 답을 찾았습니다. 바로 사랑, 찬미, 감사입니다.
첫째, 사랑하십시오.
사랑의 고백과 실천입니다. 사랑할 때 아름답습니다. 사랑할 때 행복합니다. 사랑할 때 천국의 기적입니다. 그러니 사랑을 고백하고 사랑을 하십시오. 온 마음과 정신으로 온 힘을 다해 하느님을, 예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못하더라도 미워하거나 증오하거나 차별하거나 혐오하지는 마십시오.
사랑할 때 압니다. 하느님을 예수님을, 이웃을 아는 것도 사랑을 통해서입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과 베드로의 사랑의 관계가 타의 추종을 불허합니다. 주님은 ‘사람의 아들을 누구라고 하느냐?’의 질문으로 세인들의 반응을 확인하다가 제자들은 물론 우리를 향해 단도직입적으로 묻습니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평생 화두로 삼아야 할 물음입니다. 예수님과의 관계를 묻습니다. 예수님과의 관계가 믿는 이들의 정체성의 핵심입니다. 제자들을 대표한 베드로가 정확히 옳게 대답했습니다. 주님을 사랑했기에 주님이 누구인지 알았던 베드로입니다.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참으로 주님을 깊이 사랑했기에 이런 믿음의 고백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사랑과 앎의 관계는 계속 깊이를 더해 가야 할 것입니다. 천국의 기적을, 행복을 살 수 있는 비결은 바로 여기 있기 때문입니다. 하여 이에 근거하여 ‘예수님 이름을 부르는 기도’를 권하는 것입니다. “살아 계신 하느님 아들, 그리스도 예수님, 죄인인 저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그대로 베드로의 고백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둘째, 찬미하십시오.
찬미의 고백과 실천입니다. 찬미할 때 아름답습니다.[찬미할 때 행복합니다. 하느님 찬미입니다. 사랑할 때 저절로 찬미의 표현입니다. 찬미할 때 천국의 기적입니다. 찬미의 사랑이 우리를 순수하게 합니다. 삶의 신비에 눈을 뜨게 합니다. 매사 놀랍고 새롭게 보게 합니다. 오늘 제2독서는 하느님의 신비에 놀란 바오로의 하느님 찬미가입니다.
“오, 하느님의 풍요와 지혜와 지식은 정녕 깊습니다. 그분의 판단은 얼마나 헤아리기 어렵고 그분의 길은 얼마나 알아내기 어렵습니까? 누가 주님의 생각을 안 적이 있습니까? 아니면 누가 그분의 조언자가 된 적이 있습니까? 아니면 누가 그분께 무엇을 드린 적이 있어 그분의 보답을 받을 일이 있겠습니까?”
이런 깨달음이 참으로 겸손하게 합니다. 정녕 대신비가 바오로입니다. 오늘날의 재앙은 이런 신비감각의 결핍에, 하느님 신비에 대한 깨달음의 결핍에 있음을 봅니다. 이어지는 고백은 찬미의 절정이요 우리 삶의 신비의 근원을 환히 밝혀 줍니다.
“과연 만물이 그분에게서 나와 그분을 통하여 그분을 향하여 나아갑니다. 그분께 영원토록 영광이 있기를 빕니다.”
하느님의 영광이 우리의 존재이유임도 분명히 드러납니다. 바로 이런 하느님의 신비에 대한 깨달음을 날로 깊이해주는 것이 바로 끊임없는 하느님 찬미입니다. 바오로의 하느님 찬미에 이어지는 권고도 참 고맙고 시의적절합니다.
“여러분의 몸을 하느님 마음에 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십시오. 이것이 바로 여러분이 드려야 하는 합당한 예배입니다. 여러분은 현세에 동화되지 말고 정신을 새롭게 하여 여러분 자신이 변화되게 하십시오. 하여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하느님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 분별할 수 있게 하십시오.”(로마12,1ㄴ-2).
하느님 찬미의 열매와 같은 참 귀한 고백입니다. 바로 하느님 찬미의 삶이 이런 삶의 원천이 됨을 깨닫습니다. 지상에서 천국의 기적을, 행복을, 아름다움을 살게 하는 하느님 찬미입니다.
셋째, 감사하십시오.
감사의 고백과 실천입니다. 사랑할 때 찬미요 찬미할 때 감사입니다. 그러니 감사하십시오. 참으로 감사할 때 기쁨이요 겸손입니다. 진정 믿음의 빛나는 표지가 감사와 기쁨, 겸손입니다. 지상에서 천국의 기적을, 행복을, 아름다움을 살게 하는 감사입니다.
성무일도 역시 ‘주님을 찬미합시다-하느님 감사합니다’, 찬미와 감사로 끝납니다. 바오로 사도 역시 어떠한 처지에서도 감사하라 합니다. 감사하는 자에게 모든 것은 잘 됩니다. 베드로의 고백에 이어 주님을 통해 베드로가 받은 큰 축복은 자기가 참으로 누구인지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행복선언과 동시에 베드로의 참 신원이 계시됩니다.
“시몬, 바르요나야, 너는 행복하다! 살과 피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것을 너에게 알려 주셨기 때문이다. 나 또한 너에게 말한다. 너는 베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이어지는 축복도 상상을 초월합니다. 베드로는 이런 주님과의 만남을 통해 참 나를 알게 됬고 하늘 나라 열쇠까지 받았으니 하느님 은총과 축복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으로 가득했을 것입니다. 제2독서 이사야서에서 엘아킴의 예언은 베드로를 통해 실현됨을 봅니다.
“나는 다윗 집안의 열쇠를 그의 어깨에 메어 주리니, 그가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그가 닫으면 열 사람이 없으리라. 나는 그를 말뚝처럼 단단한 곳에 박으리리, 그는 집안에 영광의 왕좌가 되리라.”
이런 축복의 예언을 받은 엘아킴이지만 내침 받은 시종장 세브나처럼, 엘아킴 역시 하느님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고 파멸로 끝나니 하느님께 대한 시종여일 한결같은 충실함이 얼마나 힘들고 중요한지 깨닫게 됩니다. 아무리 잘 하다가도 한 순간에 무너질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엘아킴의 실패를 완전히 만회한 베드로입니다. 때로 주님을 배반도 했지만 회개를 통해 주님께 돌아와 끝까지 충실했던 베드로 사도입니다. 이런 초대 교황 베드로 반석위에 세워진 2천년 전통의 가톨릭 교회입니다. 다음과 같은 주님께 대한 감미로운 사랑의 고백이 우리 모두 지상 천국의 기적을 살게 합니다.
-“주님, 당신은 저의 전부이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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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고해성사의 은총>
사랑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그 분은 사랑자체 이시기에 한없는 사랑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특별히 세례성사를 통해서 당신 자녀로 불러주셔서 죄를 용서해 주시고, 우리의 연약함으로 잃어버리는 거룩함을 회복시켜 주시기 위해 고해성사를 통해 우리를 부르시며 끊임없이 영원한 생명에로 초대하십니다.
이 시간 고해성사에 관해 묵상하는 가운데 우리의 마음을 회개에로 인도해 주시고 마음의 상처도 치유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어떤 분이 저에게 인사를 하면서 당신도 예전에는 성당에 나갔는데 지금은 예수교 나간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교 다니니까 고해성사를 보지 않고 하느님과 직접 통하니까 좋더라.’ 하시면서 꼭 신부를 통해서 용서를 청해야 하느냐? 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잘 들어라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또 나는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그러니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마태16,19)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20장22절 이하 에서는 제자들에게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교회를 세우시고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사도들에게 주셨다는 말씀입니다. 오늘날 사도들의 후계자가 주교이고 그 주교들의 협력자가 신부입니다. 그리고 신부는 주교의 위임을 받아 사목권을 행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해성사를 거부하는 것은 교회를 거부하는 것이나 마찬가지 입니다. 고해성사는 세례성사를 통해 모든 죄를 용서 받은 후에 또다시 범하게 되는 잘못에 대해 용서를 받을 수 있게 해준 것입니다.
이 성사는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 마련된 권리의 보장책입니다.(차동엽)
“이 성사를 고백성사라 하는 것은, 사제 앞에서 죄를 자인하고 고백하는 것이 이 성사의 핵심요소이기 때문입니다. 더 깊은 의미로는 이 성사가, 하느님의 거룩하심과 죄인에 대한 자비를 알아 뵙고 찬미하는 하나의‘고백’이기 때문이기도 합니다.”(가톨릭교회교리서)
오늘 1독서의 말씀을 보면 주 하느님께서는 엘야킴을 불러 특별한 소명을 줍니다. “나는 다윗집안의 열쇠를 그의 어깨에 메어 주리니, 그가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그가 닫으면 열 사람이 없으리라. 나는 그를 말뚝처럼 단단한 곳에 박으리니, 그는 자기 집안에 영광의 왕좌가 되리라.”(이사22,22-23) 하느님께서는 특별히 당신의 사람을 선택하여 당신의 일을 하셨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사실 사람은 감각적인 존재이고 보이지 않는 마음을 감각으로 확인하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외아들을 세상에 보내시어 당신의 사랑을 느끼도록 해주셨습니다.
용서도 마찬가지 입니다. ‘용서한다.’는 것을 단순히 말해 주는 것보다 그 용서를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느낄 수 있도록 해 주는 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마음의 막연한 소리가 아니라 사제의 음성을 통해 “당신의 죄는 용서 받았습니다.”라는 선언을 듣게 되는 것입니다. 구약의 백성들이 하느님을 독대하고 싶어 하며 답답해했지만 신약의 백성들은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의 사랑을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마찬가지로 ‘혼자서 회개하며 주님께서 용서하실 것이다’하는 것보다 고해성사를 통해 받는 은총은 훨씬 큰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제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고해성사는 단순히 인간에게 고해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함께하는 하느님의 자비에 나를 온전히 맡기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의 죄를 나의 기억에서 말끔히 씻어버리리라. 네 속을 내 앞에 털어 놓아라.”
“내가 너의 죄를 기억하지 않으리라.”(이사43,25)
고해성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느님께서 우리 영혼을 깨끗이 만들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너는 죄를 용서 받았다”는 선물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고해성사는 우리영혼을 깨끗이 만들어 줍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내어 주시어,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해방하시고 또 깨끗하게 하시어, 선행에 열성을 기울이는 당신 소유의 백성이 되게 하셨습니다.”(디도 2,14)
이사야서1장18절에는“너희 죄가 진홍같이 붉어도 눈과 같이 희어지며 너희 죄가 다홍같이 붉어도 양털같이 되리라.”적고 있습니다. 바로 고해성사는 세례은총을 지속시켜 영원한 생명을 살게 해 주십니다.
또한 하느님과의 관계가 더욱 친밀해 집니다. 거룩함과 완전함을 유지함으로써 늘 은총의 상태에 머물게 되고 그럼으로써 그분의 귀한 도구가 됩니다.
“자기 자신을 깨끗하게 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귀하게 쓰이는 그릇, 곧 거룩하게 되어 주인에게 요긴하게 쓰이고 또 온갖 좋은 일에 쓰이도록 갖추어진 그릇이 될 것입니다.(2티모 2,21)
그리고 고해성사는 교회공동체를 살아나게 합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영혼도 살려 주지만 용서 받은 사람이 또 다른 사람을 용서할 수 있는 마음을 얻게 되기 때문에 그 공동체가 살아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용서를 통해 마음이 거룩해 지는데 그 공동체가, 그 가정이 얼마나 빛나겠습니까? 십자가의 예수님께서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저들이 하는 일을 모르고 있습니다.’ 했던 마음으로 서로를 용서하는 데 거기에 얼마나 큰 기쁨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러한 풍요로움을 잘 받기 위해서 준비가 필요합니다.
1) 성찰을 잘해야 합니다. 자신의 마음을 구체적으로 살펴야지요. 어떻게 잘못했는지? 어떻게 하느님의 사랑을 거부했는지? 그리고 인정하고, ‘잘못했습니다.’ 해야 합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 ‘ ….한 것 같습니다.’ 라고 합니다. 그리고 자주 범하는 잘못은 그 원인을 잘 찾아내야 합니다. 그러나 너무 세심해서 죄책감에 짓눌려 사는 것은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영혼의 거울은 성경입니다. 주님의 말씀에 비추어서 성찰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를 들면 “남을 해치는 말은 입 밖에도 내지 마십시오. 오히려 기회 있는 대로 남에게 이로운 말을 하여 도움을 주고, 듣는 사람에게 기쁨을 주십시오.”라는 말씀으로 살펴본다면 남을 흉보거나 험담한 사실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침묵한 것도 잘못입니다. 남을 위해 이로운 말을 해 줘야 하는데 이웃에게 관심이 없었다면 그 사실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기쁨을 주는 일을 찾지 못한 것도 잘못입니다. 특별히 입을 조심하지 못한 사항을 찾아보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 25절에 보면 “성령께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으니 우리는 성령의 지도를 따라서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잘난 체하지 말고 싸움을 걸지 말고 서로 질투하지 말아야 합니다.” 성령의 지도를 따라 산다는 것은 내 뜻대로 살지 않고 주님의 뜻을 앞세운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무시하거나 업신여긴 일은 없는지? 남이 잘 되는 것을 인정하지 못하고 시샘하지는 않았는지? 등등 살피는 것입니다.
2)통회(뉘우침); 지은 죄에 대한 마음의 고통이며 다시는 죄를 짓지 않겠다는 결심으로 그 죄를 미워하는 것입니다. “옷만 찢지 말고 심장을 찢고 너희 하느님 야훼께 돌아오라. 주는 가엾은 모습을 그냥 보지 못하시고 좀처럼 노여워하지도 않으신다. 사랑이 그지없으시어 벌하시다가도 쉬이 뉘우치신다.”(요엘 2,13)
3)정개 (결심); 다시는 이탈하지 않겠다는 굳은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그러나 독일 속담에는 “정개의 징검다리를 건너 지옥 문 앞에까지 간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다시는 죄짓지 말아야지’ 하면서 마음을 고쳐먹기만 하고 결심한 것을 실행에 옮기지 못하니까 어느새 지옥 문 앞에 다다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바보들은 항상 결심만 하고, 남의 탓만 한답니다. 사실 성찰과 통회, 정개는 하나입니다. 성찰을 잘하면 통회는 자연히 따라오는 것이고 통회는 마땅히 결심을 포함하고 있는 것입니다.
4)고백; 알아낸 잘못을 말로 시인하는 것입니다. 부끄러워 감추는 것 없이 고백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무한한 자비 앞에서 행해지는 성사인 만큼 두려워 말고 주님 앞에 고백하는 것입니다.
죄의 횟수, 상황에 대해서 간단명료하게 해야 합니다. 혹 “몇몇을 고의로 숨기는 사람들은 사제를 통하여 용서해 주실 선한 하느님께 아무 것도 제시하지 않는 것이 됩니다.”
만일 환자가 부끄러워서 자신의 상처를 의사에게 감춘다면 치료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자기 죄를 고백하지 않고 남의 죄를 고백합니다. 자기는 잘못이 없는데…. 남에게 탓을 돌리며 변명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크게 잘못된 것입니다. 자기 죄만 고백하십시오. 고해의 비밀은 2천년 교회의 역사가 보증합니다.
5)보속; 보속은 일종의 영적인 형벌 행위입니다. 그러므로 꼭 이행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자비하심으로 미래의 죄에 대해서 보호해 주고 나머지 죄를 치료해 주는 것입니다. 기도와 선행, 충고를 받아들이고 실천함으로써 고해성사를 완성합니다.
보속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받기”(로마 8,17) 때문에 우리를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함께 공동 상속자가 되게 해 줍니다. 물질의 손해를 끼쳤으면 보상해야하고요, 명예를 실추시켰다면 명예를 회복시켜 주도록 해야 합니다.
가끔 어떤 분들은 잘못에 비해서, 보속이 너무 작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주님의 은총입니다. 아무리 큰 잘못에도 그분의 사랑이 있고 그분의 넘치는 자비가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용서를 믿는 것입니다. 우리는 잘못에 대한 벌을 생각하지만 주님은 언제나 자비와 사랑으로 용서하십니다. 그러므로 고해성사를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죄는 우리를 얽어매고 하느님 사랑의 흐름을 가로막습니다. 또한 죄책감으로 움추러 들게 합니다. 그러나 용서는 자유를 줍니다.
주 하느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에게 정결한 물을 뿌려, 너희를 정결하게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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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오늘 미사의 말씀은 우리의 행복이 어디서 오는지 이야기하십니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마태 16,15)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물으십니다. 사람들은 당신을 세례자 요한이나 엘리야나 예레미야나 예언자로 여긴다고 하는데, 그럼 당신과 함께 지내는 제자들은 어떻게 여기는지 제자들이 숙고할 기회를 주시는 겁니다.
"시몬 바르요나야, 너는 행복하다! 살과 피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것을 너에게 알려 주셨기 때문이다."(마태 16,17)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 메시아, 그리스도라고 고백한 베드로에게 예수님께서 큰 격려의 말씀을 주십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는 사람의 행복이 과연 어디에서 오는지 깨닫게 되지요.
사람은 육적 존재인 동시에 영적인 존재입니다. 감각과 직접적인 체험을 통해 알게 되는 것이 있기도 하고, 어떤 경로인지 인과 관계는 모호하나 영으로 깨닫게 되는 부분도 있습니다. 특히 영의 사정은 하느님께서 개입하셔야 주어지는 것으로 우리 욕심만 가지고 이룰 수 있는 무엇이 아닙니다.
오늘 베드로가 행복한 이유는 그가 자기 생각이나 견해로, 즉 살과 피로 주님의 신원에 대한 의견을 피력한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일으켜 주시는 영감과 사랑으로 답을 드렸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께서 알려 주시는 바에 순종하여 그 자신이 아버지의 목소리가 된 덕분이지요.
"오! 하느님의 풍요와 지혜와 지식은 정녕 깊습니다. 그분의 판단은 얼마나 헤아리기 어렵고 그분의 길은 얼마나 알아내기 어렵습니까?"(로마 11,33)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우리가 감히 범접할 수 없고 헤아릴 수 없는 하느님의 전지전능을 이야기합니다. 그분의 생각과 마음은 늘 우리를 앞서 가시면서 모든 것을 통찰하고 이끄시니 그 섭리에 영과 육을 내어 맡기고 주시는 대로 받으면 됩니다. 우리 쪽에서 감히 그 지식과 지혜를 탐할 수는 없고, 제 것을 섞거나 마치 제 것인 양 표절해서도 안 됩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알려 주신 대로 예수님을 바라보고 선포한 베드로를 "반석"이라 칭하시며, 하늘 나라의 열쇠까지 주십니다. 반석과 열쇠의 의미는 오늘 제1독서에서 잘 드러납니다.
"나는 다윗 집안의 열쇠를 그의 어깨에 메어 주리니, 그가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그가 닫으면 열 사람이 없으리라. 나는 그를 말뚝처럼 단단한 곳에 박으리니, 그는 자기 집안에 영광의 왕좌가 되리라."(이사 22,22-23)
사실 신탁은 대개 예언자나 임금에게 내리는데, 이 대목은 시종장 세브나를 대신해 앞으로 궁궐을 관리하게 될 엘야킴을 향하고 있습니다. 그에게 주시겠다는 "열쇠"는 다윗의 집안(왕실)을 관리하는 직책을, 그가 굳건히 딛게 될 "말뚝처럼 단단한 곳"은 "반석"과 연결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 베드로에게 주어진 열쇠와 반석의 의미는 엘야킴의 그것을 초월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에게서 받은 "열쇠"로 다윗 집안의 울타리를 넘어 온 세상에 세워질 주님의 교회를 관리하게 될 것이니까요 또 결국 엘야킴의 집안도 패망하여 "단단한 곳"에서 떨어져 나갈 터이지만(이사 22,41 참조) 주님께서 기초로 놓아 주신 반석은 영원히 이어질 것입니다.
"주님은 높이 계셔 낮은 이를 굽어보시고, 멀리서도 교만한 자를 알아보시나이다."(화답송)·
주님은 다 아십니다. 그분와 지혜와 지식은 완전하고 한계가 없으니까요. 우리의 얕은 꾀나 속셈, 야망과 탐욕도 한눈에 살펴 아십니다. 아시면서도 그저 쯧쯧... 안타까워 하시면서 모르는 체 참아주고 계시는 것뿐이지요. 우리 한계도 아시고 가능성도 아시니 유예의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분께는 우리의 무지와 연약함, 어리석음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필요하면 당신께서 채워주시면 되니까요. 그러니 주님께서 주시는 대로 머무르고 새기고 나누면 됩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깨달음과 앎에 자기 영광을 섞으면 오염되어 버리니 조심해야 하지요.
우리의 행복은 여기에 있습니다. '앎'도 '소유'도 '관계'도 '소명'도 주님께서 주시는 만큼 감사히 받아 기쁘게 살아가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우리의 행복은 살과 피의 차원을 넘어 사랑이신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오기 때문입니다.
"너는 행복하다! 살과 피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것을 너에게 알려 주셨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벗님! 우리에게 보내시는 주님의 이 격려에 힘 입어 오늘도 용기를 내시기 바랍니다. 주님을 알고 사랑하고 섬기는 우리는 그것으로, 그만큼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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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연중 21 주일입니다. 장마의 극성스런 비도 지나가고, 더위도 한풀 꺾였습니다. 결실이 영글어 갈 때입니다. 그런데 나에게는 무엇이 영글어가고 있을까요?
오늘 <복음>에서 베드로는 고백합니다.
“스승님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마태 16,16)
그렇습니다. 그분은 우리 가운데 살아계신 분이십니다. 살아계시며, 생명을 살리십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과연 만물이 그분에게서 나와, 그분을 통하여 그분을 향하여 나아갑니다.”(로마 11,36)
그런데 오늘 우리는 그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행동하는가? 그분을 통하여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가? 그분을 향하여 나아가는가? 만약, 오늘 나의 모든 것이 그분으로 말미암아 있지 못하고 그분을 통하여 행해지지 않고 그분을 향하여 나아가지 않고 있다면, 대체 나는 어디로부터 와서, 어디를 통하여, 어디를 향하여 가고 있는지를 바라보아야 할 일입니다.
사실 오늘 <복음>은 카이사리아 필리피 지방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사람의 아들을 누구라고들 생각하느냐?”(마태 16,13)라는 질문으로 시작 됩니다.
‘카이사리아 필리티’는 분봉왕 헤로데 필리피가 로마 황제를 기념하여 건설한 곳으로 로마화 된 계획도시였습니다. 그래서 황제숭배가 팽배했고, 시민들을 ‘황제는 신입니다’라고 서로 인사하였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예언자 가운데 한 분으로 생각할 뿐입니다. 만약 구세주로 고백한다면 황제를 거부하는 것으로 로마에 반기를 드는 것에 해당했던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장소에서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마태 16,15)하고 물으신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이 질문은 큰 도전이었습니다. 그러니, 베드로의 “스승님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마태 16,16) 라는 고백은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고백임과 동시에, 황제를 거스르는 대답이었던 것입니다.
사실, 베드로의 이 고백은 그리스도의 신비를 분명하게 드러내줍니다. 곧 성부 하느님에 대한 고백이요, 성자 그리스도에 대한 고백이요, 성부 하느님과 성자 그리스도와의 관계에 대한 고백입니다. 그것은 메시아인 그리스도가 살아계신 하느님과 절대적이고 유일한 관계를 지니신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는 신비를 드러냅니다.
그런데 이 신비는 베드로가 스스로 깨달은 것이 아니라, 베드로를 통하여 하늘에 계신 하느님께서 밝혀주신 계시였습니다. 곧 베드로는 성부께 지명을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말씀하십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것을 너에게 알려주셨다.”(마태 16,17)
이제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밝혀주신 이 계시 위에 교회를 세우십니다. 곧 교회는 바로 “하느님 아드님”이신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에 근거하여 세워집니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나는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그러니 ~네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마태 16,18-19)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신앙의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시며, 베드로에게 권한을 부여하십니다. 여기에 또 하나의 놀라운 신비, 곧 교회의 신비가 있습니다. 교회는 이 계시의 신앙 위에 세워질 뿐만 아니라, 베드로에게 하늘나라의 열쇠가 주어지고 “매고 푸는” 특별한 권한이 부여됩니다. 이는 그가 행한 것을 “하늘에서” 그대로 인정해준다는 놀라운 신비입니다. 교회의 신비는 바로 여기에서 유래됩니다. 곧 교회 안에는 사람이 활동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로부터 오는 “계시”가 활동한다는 사실입니다.
이제 하늘이 땅에서 열린 것입니다. 곧 우리는 하늘을 땅에서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매인 것을 푸는 일은 하늘에 가서 하는 일이 아니라, 땅에서 하는 일이 되었습니다. 곧 우리가 땅에서 용서하고 화해하고 사랑할 때 하늘을 만나게 됩니다. 그것은 하늘이 이미 땅에 와 있기 때문입니다. 다름 아닌 바로 우리의 사랑의 행위 안에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이제 우리는 땅에서 하늘을 열어야 할 일입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형제를 용서하는 일입니다. 오늘 우리가 아직 용서하지 못한 사람이 있거든, 바로 지금 용서해야 할입니다. 오늘, 용서의 축제일이 되기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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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나는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마태 16,19)
주님!
당신께서는 하늘나라의 열쇠를 하늘에 두지 않으셨습니다.
땅에 있는 저희에게 주시고,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 풀리게 하셨습니다.
형제를 받아들임이 당신을 받아들임이라 하시고, 제 형제를 당신 나라를 여는 열쇠로 주셨습니다.
하오니, 묶인 것, 막힌 것을 풀게 하소서!
오늘, 이 땅에서 당신의 나라를 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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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스승님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마태16,16)
'나에게 예수님은 누구이신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당신의 신원에 대해 물으십니다. 먼저 밖에 사람들이 당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물으십니다. "사람의 아들을 누구라고들 하느냐?"(마태16,13) 이에 제자들이 예수님께 대답합니다.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예레미야나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합니다."(마태16,14)
그러자 예수님께서 다시 제자들에게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마태16,15) 하고 제자들의 마음에 대해 물으십니다.
이에 시몬 베드로가 나서서
"스승님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마태16,16) 하고 대답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베드로에게 수위권을 주시어, 그 위에 당신 교회를 세우시고, 그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십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첫 번째 그리스도의 이 지상 대리자인 교황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나에게 있어 예수님은 어떤 분이시며, 나도 베드로와 같은 신앙고백을 드릴 수 있는가?
베드로의 신앙고백처럼, 예수님은 나를 올바른 길로 이끄시는 스승님이신가?
예수님은 지금 나와 함께 계시는 살아있는 임마누엘 주님이신가?
예수님은 나에게 있어 신성을 지니신 하느님의 아드님이신가?
예수님은 지금 나를 일으켜 세워주시고, 나를 살려주시고, 나를 부활케 하시는 나의 그리스도, 곧 나의 구세주이신가?
그렇게 되기 위해서 우리는 하느님의 극진한 사랑의 표지인 십자가를 바라보고, 그 사랑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그 머뭄 안에서,
그 머뭄을 통해서,
우리도 예수님께 이런 신앙고백을 드리도록 합시다!
"예수님은 나를 올바른 길로 이끄시는 나의 스승님이시며, 지금 나와 함께 계시는 살아 있는 분이시고, 하느님의 아드님으로서, 지금 나를 부활케 하시는 그리스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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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소보둥지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vBVuvkV2pPM&feature=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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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마태 16, 15)
힘이 들 때
예수님을 찾는다.
힘이 듭니다.
그분은 나를 그냥
받아들이신다.
그냥 함께하시는
좋으신 분이시다.
헤맬 때
예수님을 찾는다.
길을 잃었습니다.
그분은 길을 잃은
나를 기다려주신다.
뜨겁게 기다려주시는
기다림이시다.
아플 때
예수님을 찾는다.
많이 아픕니다.
그분은 실컷 울고
있는 나를 따뜻이
안아주신다.
그분은 아픔을
껴안아주시는
아픔이시다.
수도 공동체가 싫어서
도망치고 싶을 때
예수님을 찾는다.
떠나고 싶습니다.
그분은 비겁한 나를
이해한다 말씀하시며
당신 십자가의 상처를
보여주신다.
십자가로 다시
돌아가게 하시는
첫 마음의 주님이시다.
화가날 때
예수님을 찾는다.
화가 나 죽겠습니다.
그분은 화가 난
나의 분노를 끝까지
귀기울여 들어주신다.
그분은 작은 한 마디도
놓치지 않고 내 마음을
헤아려주시는
마음의 참된 치유자시다.
닫힌 문을 여시듯
마음을 여시고
관계를 여시고
용서를 여시는
살아계신
주님이시다.
주님을 알기에
힘들어도
희망하고
희망하기에 다시
감사할 수 있게
하시는 감사의
주님이시다.
끄집어 내시고
일으켜세우시고
방향을 바로잡아
주시는 주님이
계시기에 우리의
가을은 더욱
알찰 것이다.
모든 계절의
주님이시며
아픔을 통해
성장을 이루시는
당신을 두고
어디로 가겠습니까.
당신은 제삶의
빛이며 어둠이며
갈망이며 열정이며
기도이며 오늘입니다.
당신은 이러한 저를
사랑하게 하시는
벌거벗은 가난한
주님이십니다.
함께 징검다리를
건너고 함께
새로운 고개를
넘게하시는
새로움이십니다.
새로운 출발
새로운 교회
새로운 계획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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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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