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파티필름 일기장 외 1편
아타세벤 파덴
그 수많은 일은 내가 화분으로 이사한 뒤에 일어났지
천원짜리 플라스틱 화분은 누가 봐도 답답해 보였지만 나만의 공간이 제일 편했지 온 세계에서 그 무슨 전염병이 돌고 먼 나라에서 전쟁이 일어나고 어딘가에서 대지진이 났지만 나는 여전히 햇빛을 부끄러워했지 커튼 밖 세상은 항상 멀었지 때로는 잎 끝이 말랐고 때로는 과습이 찾아왔는데도 난 튼튼한 편이라 잘도 넘어갔지 가끔씩 나랑 놀아주는 통풍이 멋있고 좋았지만 정말로 좋았지만 그가 언제 태풍을 데리고 올지도 모르는 탓에 의심이 가면서도 함께 할 때 참 즐거웠지 그리고 “너는 왜 집에만 있어” 소리를 자주 들었지 하지만 발을 내딛기라도 하면 내 속까지 타버릴 것 같아서 나는 바깥 세상을 상상해보지도 않았지 밖에서 자라는 애들은 그걸 잘 몰라서 그렇지 벌레도 엄청날 텐데 말이지 생각만 해도 잎이 가렵지 난 누가 내 몸에 손대는 것도 싫어서 잎을 잘 갈아입지도 않았지 그런데 그게 있잖아 나 혼자 있기가 뭔가 아쉬울 것 같으면 진짜로 그런 마음이 들면 서서히 흰 꽃대를 올렸지 사람들은 그런 나를 보고 평화의 꽃이라고* 불렀지
계절이 변해도 나는 한결같이 내 자리를 지키며 살았지
이것은 지금까지의 단조롭고 안전한 나의 일상이었지
*스파티플림의 튀르키에어 명칭
지문의 집
저 산이 알몸이 되었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너의 지문 위에 집을 지게 되었다
뜨거웠다가 차가워진 물
차가웠다가 뜨거워졌다
마실까 말까, 씻을까 말까
너와 나는 열쇠 구멍에서
은하수 다큐멘터리를 볼 거야
알고 있나 혹시
우리 고양이는 파동일까 빛일까
너의 지문에 지은 우리 집에는
죽지 않고 살아 있지도 않는
죽었으면서도 동시에 살아 있는
슈뢰딩거의 고양이가 있다
전자와 원자핵 사이의 먼 거리에서는
서로가 서로의 피부에 닿을 수 없다
우리에게는 원자만한 집도 충분하고 멀다
지문의 집에는 항상 나선 계단이 있다
이제는 계단도 저 산보다 멀다
구부리고 구부려진 낙엽은
병든 노인의 손
떨어졌다 떨어질 만큼
뜨겁고 차가운 것들은
내가 먼지가 될 때
고양이가 계단을 오를 때
네 손이 꼭 필요하다
지문 좀 보여줘 봐
아타세벤 파덴
1996년 튀르키예 출생.
앙카라 대학교 한국어문학과, 단국대 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석사 졸업.
2022년 시작으로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