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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특집] 플럼빌리지와 틱낫한 성공비결위기를 기회로 활용해 끊임없이 자기변신 |
2002년에 한국을 방문했던 틱낫한 스님은 세계 곳곳에서 활발한 활동을 벌이며 아픔이 있는 곳마다 사람들의 마음을 위로해주고 갈 길을 제시해주고 있다. 1926년 베트남에서 태어나 16세에 행자가 되어 임제종의 법맥에서 그가 사미계를 받던 날 스승이 그에게 기워서 입혀준 가사장삼을 스님은 아직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통해 세계인들에게 평화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틱낫한스님의 수행중심처인 플럼빌리지에서 행선(行禪)을 하고 있는 수행자들. 사진제공=명진출판> 프랑스가 베트남의 식민지권을 놓지 않으려고 전쟁을 벌이던 중이라 물자가 아주 귀했던 당시 계를 받고 여법하게 입을 새 옷이 없었다. 스승은 헌옷상자를 뒤져 그중 가장 덜 헤진 옷을 골라서는 바늘에 실을 꿰어 밤늦도록 그 옷을 손수 기워 그에게 입혀주었던 것이다. 스님의 모체 상가(Sam.gha, 승단)라 할 수 있는 플럼빌리지는 1982년 설립된 이후 성장을 거듭해 현재 본부인 윗마을 인근에 5개의 수행건물을 가지고 상주인구가 100여명인 수행단체로 컸다. 현재는 미국 서부에 녹야원 승원(Deer Park Monastery)과 동부에 단풍나무승원(Maple Monastery) 및 청산승원(Green Mountain Monastery)를 설립하여 미국에도 튼실한 뿌리를 내리고 있다. 동남아시아의 작은 나라인 베트남 출신의 틱낫한 스님과 플럼빌리지가 그렇게 단시간에 급성장을 하며 많은 사람들에게 다가갈 수 있었던 것은 무슨 연유일까? 참으로 역설적인 일이라고밖에 할 수 없지만 중국인들이 티베트를 침략하지 않았다면 오늘날 티베트 불교가 그렇게 세계적으로 전파될 수 없었듯이 틱낫한 스님 역시 베트남 공산정권의 추방을 받지 않았다면 오늘날처럼 세계적인 상가를 설립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최대의 위기는 최대의 기회가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실례라 할 수 있다. 프랑스에 자리를 잡으면서 플럼빌리지는 늘상 자신을 변화시키고 새롭게 만들었다. 자신이 자리잡은 유럽 땅의 사람들에게 법을 제대로 전파하기 위해서다. 주민들의 이해를 받지 못하면 진정한 상가가 될 수 없기에 지역주민과의 유대를 강화하기 위해 오픈하우스 데이를 마련해 주민들을 초청하기도 했다. 그밖에 플럼빌리지가 성장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필자 나름대로 몇 가지로 정리해 보았다. 깨달음 키우는 스승이 존재 첫째, 깨달음을 얻었고 그 깨달음을 계속 키워나간 스승이 있었다. 1962년 틱낫한스님은 미국 프린스턴대학에서 불교를 가르쳤다. 치열한 사회운동을 잠시 접고 강의와 공부, 걷기 명상 등에 몰두할 수 있었던 당시를 그는 진정 공부에 몰두할 수 있었던 시간이라고 회상한다. 감기를 치료하기 위해 복용한 아스피린 때문에 잠을 이룰 수 없었던 어느날 밤 그는 뒤척이며 누워 있다가 자신이 왼쪽으로 누워있는 자세가 박물관에서 본 5000년된 미이라와 같다고 느꼈고 한순간 5000년이란 시간을 뛰어넘어 미이라인 자신의 몸과 현재 자신의 몸이 하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어 밤새 이어진 좌선 속에서 시공이 멈추었고 엄청난 의식의 폭포와 강물이 자신을 뚫고 지나갔다. 매순간을 온전히 깊이 존재하며 사는 것만이 우리가 할 일이고 그것의 요체가 마인드풀니스라고 생각한 그의 깨달음은 이후 1974년 ‘마인드풀니스의 기적’을 저술할 때까지 점점 더 자라났다고 한다. 그런 깨달음은 그가 키우는 제자와 상가, 가르치는 방식, 사람을 대하는 방법에 속속 반영되었다. 오늘날 그의 깨달음은 단 6단어로 압축되었다. “나는 도착하였다. 집에 왔다.(I have arrived. I am home)”는 이제 플럼빌리지의 법인(法印)이 되었다. 둘째, 평등심으로 사람을 대한 스승이 있다. 혹자는 스님이 참여불교의 기수이고 베트남에서 사회운동을 해왔기 때문에 빈자들을 더 좋아하리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부자들도 엄청난 고통을 받고 있음을 잘 알고 있다. 그는 누구를 대하든지 평등한 마음으로 대하고 그 사람 마음이 편안하게 해준다. 정치가, 세도가를 만나든, 난폭한 사람을 만나든, 가난하고 상처받은 이를 만나든 그 사람을 깊이 이해하고 그 사람에게 필요한 말과 마음을 주는 것이다. 활동의 주목적은 ‘상가’ 구축 셋째, 상가 구축을 모든 활동의 핵심에 두었다. 함께 공부하고 사회운동 하던 도반을 떠나 추방자의 몸으로 처음 프랑스에 왔을 때 그는 몸에서 떨어져 나온 한 개의 세포 같은 기분이 들었다고 한다. 절체절명의 위기! 살아남기 위해 그에게는 몸이 필요했고 그것은 상가를 구축하는 것이었다. “만약 내가 하나의 개인으로서 지위나 명성을 찾아왔었다면 나는 분명 죽었을 것이다.” 그에게 있어 상가의 의미는 크기에 있지 않다. 상가는 마인드풀니스를 수행하는 사람들이 함께 살며 함께 결정을 하는 곳이어야 한다. 넷째, 플럼빌리지의 정체성은 베트남인을 위한 베트남 승원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위한 지구촌 승원이다. 처음에 베트남 난민들이 쏟아져 들어올 때 즉 1970년대 파리에 있다가 1982년 보르도 인근의 플럼빌리지에 정착한 초기에도 틱낫한의 품을 찾아든 이는 대부분 베트남인들이었다. 그들에게 일시적으로 보금자리를 제공하고 정착할 수 있도록 돕고, 또 정신적 문화적 갈증을 해소시켜주는 것도 그와 찬콩스님의 몫이었다. 1983년 플럼빌리지 최초의 여름수련회에 참석자는 117명이었고 이중 서양인은 5명도 되지 않았다. 하지만 84년엔 232명으로 2배가 되었고 이후 92년에 1000명을 넘어서면서 수련회 인구비율도 변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어느 날 베트남 청년들이 스님을 찾아와서는 플럼빌리지가 베트남 문화의 구심점 역할을 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이때 그는 조용히 말하기를, 베트남 문화를 계승하고 살리는 것은 베트남인들의 몫이라고, 프랑스인들을 보라고, 1차수련회에서 그들은 몇 명 되지 않아 구석에 앉아 눈에 띄지도 않았지만 이제 프랑스인들이 점점 늘어나니까 큰 자리를 차지하고 프랑스인만을 위한 프로그램도 생기지 않느냐고 말했다. 다섯째, 살아있는 계율, 현대에 맞게 조율된 계율을 지킨다. 2002년 한국 방문 때 그는 컴퓨터와 자동차가 없던 시대에 제정한 계율이 더 이상 다루지 못하는 부분이 많아 새로이 수정조율한 현대적 계율을 만들었노라고 발표한 적이 있다. 그것은 〈자유로 향한 발걸음(Stepping into Freedom)〉이란 책으로 세상에 나와 있다. 거기서 계율이란 고요하고 행복한 마음을 용이하게 닦을 수 있도록 붓다가 우리에게 준 조언일 뿐 어떤 속박이나 족쇄는 아니라고 강조했다. 실제로 책을 읽어나가면 정말 그렇다는 공감이 가는 부분이 많은데 이것을 플럼빌리지 식구들은 자주 배우며 지켜나가고 있는 것이다. 수행과 삶은 ‘不一不二’ 여섯째, 플럼빌리지에서는 수행과 삶이 하나이다. 처음 수련회에 가서 고차원의 명상이나 수행법을 잔뜩 배워오리라 기대한 사람은 실망한다. 그래서 그곳에서는 마인드풀니스를 키워야 하고 깊이 보아야 한다. 법과 삶이 둘이 아니며 진리와 세상이 둘이 아님에도 우리는 자주 절에 가면 열심히 수행하고 집에 오면 다 잊어버린다. 하지만 플럼빌리지에선 하루 24시간을 마인드풀니스속에 행복하게 살아가는 법을 배운다. 그곳에 가면 밥먹는 법, 걷는 법, 말하는 법 등의 기본을 다시 배운다. 좌선은 아침 저녁 30분씩 그것도 희망자에 한해서 할 뿐이다. 스님에게는 요리도 청소도 설거지도 걷기도 모두 수행이기 때문이다. 스님은 플럼빌리지 역시 명상의 대상이며, 상(相)이 없고 가고 옴이 없다고 말한다. 캠코더에 녹화를 해도 플럼빌리지를 담아갈 수 없다고, 마음의 눈으로 전체를 다 담아가라고 한다. 또한 내일 당장 플럼빌리지가 없어진다 해도 상관이 없다고 한다. 중요한 것은 수행의 정신과 실제 수행이니 어디선가 다른 형태로 수행마을이 계속될 것이기 때문이다. 일곱째, 모든 사람을 돕기 위해 불교 색채를 뺀 수행을 전했다. 불교가 고통을 덜어주고자 나왔다면 고통은 불교도가 아닌 사람들도 다 느끼는 것이기에 불교의 진리와 수행법을 설명할 때는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말로 설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정념’이란 불교 용어 대신 누구나 알 수 있는 ‘마인드풀니스’를 사용했고, 그리스도교도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천국과 지옥은 우리 몸 세포 하나하나에 다 들어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상가’ 개념을 강조했는데 재가든 승가든 상관없이 마인드풀니스를 수행하는 사람이 4명이상 모이면 상가라고 했다. 그래서 가족들에게 상가임을 일깨우고 상가로서 화합의 정신을 실현하며 ‘개인의 눈’이 아니라 ‘상가의 눈’으로 보라고 했다. 또한 모든 이들의 수행과 이해를 돕기 위해 초기부터 노래를 많이 사용했다. 대부분 작사는 스님이 하고 작곡은 다른 사람들이 했는데, 삼귀의 노래는 스님이 직접 작곡도 했고, 또 어린이들이 작사, 작곡한 노래도 있다. 모두 단순하고 아름다우며 마음을 청아하고 용기 있게 해주는 노래들이다. 어린이와 가족 함께 수행 여덟째 어린이와 가족을 수행에 포함시켰다. 오늘날 많은 가정이 깨어지고 고통 받는 것을 돕기 위해 플럼빌리지에서는 수련회에 가족단위의 참가를 독려하고 가족이 서로를 이해하고 화목하게 지낼 수 있는 방법을 전하고 있다. 특히 어린이들에게 스님들은 좋은 프로그램을 만들어 함께 한다. 부모들이 억지로 데리고 온 아이의 겨우 처음엔 매우 힘이 들지만 얼마 후 다른 아이들이 하는 것을 보고 조금씩 마음이 변하기 시작한다. 그래서 플럼빌리지에서는 그렇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아이들에게 장학금을 주어 다음해에도 오도록 독려하고 있다. 10대는 또래집단으로부터 가장 많은 영향을 받으니 이는 매우 지혜로운 방편으로 보인다. 진우기 경기여고와 서울사대를 졸업하고 미국 텍사스 A&M University에서 평생교육학 석사. 현재 불교전문번역/통역가로 활동 중. 저서로 〈달마, 서양으로 가다〉가 있다. [불교신문 2291호/ 1월1일자] |
첫댓글 나는 도착하였다. 집에 왔다.................... 난 언제 집에 갈까........
나도 집에 왔는 데...
인연이 되면 꼭 가 보고싶은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