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값 한 날
동지를 이틀 앞둔 십이월 셋째 화요일이다. 올겨울 들어 두 번째 찾아온 매서운 추위로 아침 최저 기온은 여전히 영하권이다. 남들이 일터로 출근하는 시간에 나도 덩달아 일손 돕기 현장을 나섰다. 친분 두텁게 지내는 대학 동기는 퇴직 후 전원생활을 보낼 시골에 낡은 집을 헐고 새로 짓는 집이 거의 완공 단계에 이르렀다. 연로한 장모님 부양과 함께 농사를 짓고 살려는 벗이다.
이 친구가 귀촌 귀농하면 마당귀에 참나무 토막을 세워 표고를 재배하려고 구상 중이다. 그렇게 하려면 겨울에 참나무를 잘라 서너 달 말린 상태에서 봄이 오면 버섯 종균을 심어 그늘진 곳에 두면 표고버섯이 자라 나온다. 친구가 퇴직 후 살려는 곳은 의령 가례인데 표고버섯을 가꿀 참나무는 북면 상천 야산에서 구할 셈이다. 거기는 집안 윗대 선산이고 그가 종친회장을 맡고 있다.
둘은 이른 아침 동정동으로 나가 창원역을 출발해 북면으로 가는 15번 마을버스를 탔다. 마을버스는 소형으로 주로 구석진 벽촌으로 운행됨이 일반적이었다. 지개리를 거쳐 승산마을을 두르더니 신촌에서는 중리와 현천을 거쳐 아산마을로 갔다. 아산은 함안 칠북의 산간이었다. 아산에서 나와 마금산 온천장을 거쳐 바깥 신천에서 내산에서 오곡을 거쳐 초소와 명촌에서 되돌아 나왔다.
마을버스가 봉촌마을에서 어윳골을 지난 소라에서 내렸다. 어윳골은 북면 상천리의 깊숙한 동네임에도 예전 홍수가 나면 범람한 강물이 밀려든 곳임을 알 수 있는 지명이었다. 물고기가 놀다가 가는 마을이라고 어유(魚遊)라 불리었다. 기사가 어윳골을 지난 소라에서 버스를 돌려 되돌아 나갈 때 우리는 내렸다. 소라에서 아스팔트가 포장된 비탈길을 따라 상천 고개를 향해 올라갔다.
산마루 숲속 어린이집은 원아 수가 적어져 운영이 어려운 듯했다. 그 곁의 요양원은 조용하긴 해도 노인들이 채워져 있지 않을까 여겨졌다. 입구를 지키는 몸집이 작은 개 두 마리가 우리를 보더니 요란스럽게 짖어대도 관계자는 내다보질 않았다. 산마루에 이르니 전에 보이질 않던 전원주택이 두 채 들어서 있었다. 그 집에서도 개를 길렀는데 우리를 보더니 적의를 품고 짖어댔다.
고개를 넘으면 함안 칠북 내봉촌인데 예전 친구의 선대가 그곳에 살아 상천 고갯마루에 선산이 조성되어 있었다. 친구네 집안에서는 가까운 일족들이 해마다 여름에 벌초하고 가을에는 시제를 지내는 곳이었다. 둘은 선산 아래 볕 바른 자리에서 담금주를 비우면서 작업을 구상했다. 벌초하러 와서는 오랜 세월 풀만 자르고 주변의 나무는 그대로 두어 봉분을 그늘지게 할 정도였다.
친구와 함께 무덤에서 가까운 참나무를 우선해서 밑둥치를 잘랐다. 참나무는 결이 단단해 톱으로 자르려니 쉽지 않아 힘이 많이 들었다. 친구는 표고를 키울 참나무 토막을 자르려고 이번에 공구상을 찾아 톱을 하나 사 놓았더랬다. 나는 집에서 쓰는 접이식 작은 톱도 가져갔는데 두 개 다 쓰였다. 둘을 번갈아 가면서 나무 밑둥치에 톱날을 넣어 높이 자란 참나무를 쓰러트렸다.
둘이서 힘을 들여 톱날로 쓰러트린 참나무는 배양된 표고 종균을 심어 키우기 알맞은 크기로 다시 토막을 내었다. 표준형 나무토막이 1미터 20센티로 정해져 있어 그 크기로 균일하게 잘라 두었다. 우리가 자른 참나무 둥치는 모두 다섯 그루였는데 표고를 키울 참나무 토막이 스무남은 개 나왔다. 잘라 둔 참나무 토막은 후일 친구가 집안 동생과 함께 트럭으로 운반해 가려고 했다.
참나무를 자르는 작업을 마치니 점심때가 늦어져 갔다. 고개 너머 내봉촌에서 북면 온천장으로 나가는 버스는 운행 시간이 맞지 않아 걸었다. 날씨는 많이 풀려 추운 줄 몰랐고 미세 먼지가 없는 겨울 하늘은 푸르기만 했다. 1시간이 더 걸려 온천장에 닿아 맛집으로 알려진 갈비탕집에서 맑은 술을 곁들인 늦은 점심상을 받았다. 모처럼 밥값을 톡톡히 하고 한 끼 점심을 해결했다. 22.12.20
첫댓글 우왕~~
왕갈비탕 드셨네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