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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수열전 8번째. 오늘은 김영만 선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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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려한 찬사는 없었지만..
고교 졸업후 김영만은 동시대의 이상민,문경은,현주엽,서장훈같은 선수들에 비해선 그다지 화려한 기대와 찬사속에 대학에 진학한 편은 아니었습니다. 허나 그의 내실있는 재능은 진작부터 농구계의 인정을 받고 있었지요. 김영만은 고교시절 주로 포스트맨으로 활약했습니다. 당시로선 193cm라는 신장이 센터 포지션을 소화하기에 크게 무리가 없는 신장이었죠.
(190cm의 문경은이 "장신슛터"라 불리우던 시절 이니까)
김영만은 이때까지만 해도 외곽슛터라기보다는 정통 포스트맨에 가까운 플래이를 펼쳐주는 선수였습니다. 중거리 슛팅감각이 뛰어나긴 했지만 중장거리포보단 로포스트업을 주로 구사했죠.
마산고의 에이스로서 고교시절내내 탁월한 득점력과 그에 뒤지지 않는 수비력으로 유망함을 뽐낸 김영만은 당해 고교랭킹 전체 2위로 평가받았지만 그는 연대나 고대보다는 중대를 택하는 소신지원을 했습니다. 아무래도 중앙대로 진학하는 편이 팀의 중심이 되어 자신의 재능을 꽃피우기에 유리하다고 판단했던 것이죠. (이때 용산고의 양경민도 김영만과 마찬가지로 중대로 진학하게됩니다)
◈ 중앙대의 ACE
김영만의 중앙대 선택은 어찌보면 향후 '기아왕조'로의 진출을 염두에 둔 것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농대 최강 기아의 핵심맴버들인 강동희/허재/김유택/한기범 모두가 중앙대 출신이었으니까요. 감독조차도 중앙대를 나온 최인선... 그러다보니 당시엔 중앙대의 에이스는 '당연히'기아로 가는것이 기정사실처럼 인식되기도 했죠.
어쨌든 김영만의 중앙대 진학은 옳은 것이었습니다. 홍사붕/김승기/양경민등의 뛰어난 동료들이 있긴 했지만 역시 팀의 중심은 김영만 이었고, 홍사붕등이 졸업한 이후에는 확고부동한 ACE의 자리를 굳혔죠. 대학시절의 김영만은 고교시절과 같은 골밑 플래이는 물론이고 중장거리 슛팅과 농대 득점 수위권을 다툴 만한 걸출한 득점 감각이 궤도에 오르며 명성을 날렸습니다. 득점력도 득점력이지만 강력한 수비능력으로 말미암아 이때부터 이미 "이상적인 SF"라는 평을 듣기도 했죠. 당시의 중앙대는 김영만-양경민라인의 질식수비가 압권 이었고 홍사붕,김승기의 저돌적이고 타이트한 움직임도 돋보이는등 전체적으로 상당히 "끈끈함"을 느끼게 해주는 팀컬러를 갖추고 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이당시 중앙대가 보여주었던 명승부의 백미로는 역시 기아와의 농대 8강전을 들 수 있겠죠.
양팀의 베스트 5중 무려 9명의 선수가 중앙대 출신/현역 으로 구성되어 있다보니 마치 중앙대 OB 올스타전이 아닌가 싶은 생각마저 들게했는데 이시합에서 중앙대는 '왕자'기아를 무너뜨리는 파란을 연출합니다. 아무래도 노련미와 기량에서 뒤진다 판단한 중대는 대신 팀 전 선수들의 타이트한 수비와 체력,패기를 바탕으로 기아왕조에 도전했는데 수년간 우승을 독식하며 멤버들이 다소 매너리즘에 빠져있던 기아는 중대의 패기와 압박 수비에 시리즈 내내 고전.. 결국 대학랭킹 3위로 올라온 중앙대에게 8강에서 무너져 버리는 수모를 당한 것이죠. 기아로선 생각하기 싫은 완패나 다름 아니었습니다. 중앙대는 비록 4강전에서 상무에게 아깝게 패하고 말았지만 농구대잔치 내내 보여준 그들의 끈끈한 농구는 매우 인상적 이었지요.
◈ 기아왕조의 일원이 되다
90년대 초중반의 농구대잔치는 누가뭐래도 기아의 시대였습니다. 중앙대에게 수모를 당하는 바람에 우승을 한차례 연세대에 내준것 외에는 나가는 대회마다 우승, 또우승.. 그것도 전승에 가까운 완벽한 우승을 일궈내곤 했죠. 하지만 주전멤들의 대다수가 점점 노장화 되어가는 마당이었기에 그들은 장차 기아를 이끌어줄 차세대 기대주를 필요로 했습니다. 그리고 김영만은 대학졸업후, 예정대로 기아에 입단. 기아를 이끌 차세대 신성으로 주목받게 되죠. 김영만까지 가세한 기아는 강동희-허재-김영만-김유택이라는 레전드급 슈퍼 라인업을 형성, 이후의 농구대잔치에서 다시금 연속 챔프에 오르는데 성공합니다.
기아행은 김영만에겐 사실 행운이기도 했죠. 당대 최고의 가드라인업인 강동희-허재의 지원을 받을 수 있을뿐만 아니라 포스트엔 관록의 김유택-한기범이 버티고 있었으니까요. 최고의 환경에서 김영만은 아무 부담감 없이 자신의 재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었습니다. 김영만은 셋오펜스에서의 2점 플래이도 돋보였지만 강동희-허재가 이끄는 속공의 피니셔 역할도 훌륭히 해냈었던 기억이에요. 기아는 전통적으로 속공이 많이나오는 팀일 뿐더러 워낙에 찬스메이킹에 능한 투가드와 뛰다보니 김영만은 그리 어렵지 않게 득점을 올려갈 수 있었죠.
◈ 프로농구의 출범. 그리고 김영만의 전성시대
프로농구의 개막으로 많은 것이 바뀌어 버렸습니다. 룰의 변화, 용병의 등장, 실업팀의 재창단등....
농대를 주름잡았던 기아도 팀명을 '부산 기아 엔터프라이즈(왕조)'로 멋들어지게 개칭했죠.
팀내의 주포도 어느덧 김영만으로 변해있었습니다. 10여년간이나 팀의 리더이자 주포로 활약했던 허재는 김영만의 존재로 말미암아 이젠 공격보다 팀 조율에 보다더 노력을 기울일 수 있었어요.
프로출범후 약 5년간의 김영만은 국내 SF들중 가장 꾸준하고 높은수준의 득점원중 한명으로 자리메김하였을 뿐만 아니라 수비에 있어서도 리그 정상급의 기량을 변함없이 인정받을 수 있었습니다.
우선 득점력을 보면 매시즌 평균 20점을 넘나드는 돋보이는 스탯(20.4점-21.4점-20.2점-17.1점-22.8점)을 찍어주었을 뿐만 아니라 평균 야투나 평균 2점슛, 평균 자유투등 3점슛을 제외한 공격 전부문에 있어서 언제나 최상위권에 랭크되곤 했었지요. 그는 문경은이나 조성원, 우지원류의 "폭발형"슛터라기엔 거리가 있었지만 1,2,3,4쿼터에 걸쳐 꾸준하고 균등하게 점수를 뽑아주는 타입의 포워드였습니다. 이렇듯 공격력 하나만 놓고 봐도 그는 충분히 최상급의 SF였던것.
허나 아무도 김영만을 공격력만으로 이야기 하지 않았는데 공격력에 못지않은 강력한 수비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지요. 김영만이 매치업상대에게 자신이 넣은 점수보다 더 많은 점수를 내준다거나 하는 일은 거의 드물었습니다. 종종 회자되는 소문처럼 "김영만은 언제나 자기 상대를 틀어막고 자신은 다득점을 쏟아 부었다"는것은 사실과 다르지만 문경은,우지원,조상현등등 난다긴다 하는 포워드들이 김영만만 만나면 자기 평균득점 이하로 부진하는적이 많았던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지요.
이렇듯 공격과 수비의 밸런스를 갖췄다는 점은 김영만을 동포지션의 다른 선수들에 비해 특히 돋보이게하는 이유였어요. 추승균이나 양경민같은 선수도 비슷한 부류이긴 하지만 사실 공격력의 세기나 파괴력, 꾸준함에 있어선 전성기의 김영만에게 훨씬 미치는 못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김영만이야 말로 공수의 밸런스면에서 역사상 가장 상급의 수준으로 갖춘 선수라 이야기 하고 싶네요.
허나 아쉽게도 그는 00~01시즌 선수로서의 정점에 오른 이후 급격한 추락의 길을 걷고야 말지요.(이에 대해선 아래에서 보다 자세히 다뤄보고자 합니다.)
◈ 1on1의 왕자
공간 찬스를 잡기위해 움직이다 패스를 받아 속사포로 던지는 캐치앤 슛이나 동료의 스크린을 이용해 공격기회를 만드는 방식, 혹은 약속된 팬턴에의해 공격하는 방식 모두 멋진 공격법이라 하겠으나 역시 팬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선수대 선수의 대결 구도를 가장 명확하게 부각시키는 공격법은 역시 1on1이 아닌가 싶습니다.
사견입니다만 허재이후로 가장 1on1에 능한 선수로 전 주저없이 김영만을 꼽고 싶군요.
전성기의 김영만은 결코 복잡한 방식으로 공격을 하는 선수가 아니었습니다. 이를테면 그의 찬스를 만들어 주기위에 스크린, 혹은 더블스크린까지 나오거나 선수들간에 유기적인 패턴 과정을 밟거나 하는경우는 별로 많지 않았죠. 김영만이 외곽에서 볼을 잡으면, 동료들은 공간을 벌려 주었고 김영만은 그 공간에서 자신을 막는 수비수와의 1on1을 통해 2점 공격을 펼치는 식으로 대부분의 공격을 풀어 나가곤 했습니다. 팀이 김영만의 1on1을 권장한건 역시 김영만이 워낙에 탁월한 1on1을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었죠.
포지션 최고 수준의 안정된 드리블능력과 창의적이고 효율적인 스탭, 상대수비를 적절히 교란 시키는 훼이크, 상대 압박 수비에 밀리지 않는 파워, 상대가 대응해오는 방식에 따라 효과적으로 모션의 변화를 기하는 임기 응변, 그리고 결정적으로 달인의 경지에 오른 미들 뱅크샷! 수비 능력을 어느정도 인정 받는 선수라 하더라도 김영만의 1on1을 감당하기란 결코 녹록치 않았죠. 언제인지 명확치는 않으나 저는 김영만이 1on1만으로 공격을 6번 연속으로 성공 시키는 것도 봤던 기억이 있네요. 정말이지 감탄스러울 정도였습니다. 1on1을 할때 김영만의 표정에선 이미 상대를 한수 내려다 보고 있는듯한 여유로움마저 느껴지곤 했죠.
아마 김영만의 1on1에 대한 자신감은 3점슛에 대한 문경은/정인교/조성원같은 선수들의 자신감 만큼이나 충만한 것이었으리라 봅니다. 만화 슬램덩크의 서태웅이나 정우성 같은 선수들이 연상 된다고 할까요?
그는 성공률 높은 1on1을 통해 언제나 수준급 야투율을 기록할 수 있었어요.
그는 1on1의 과정적인 부분이 탁월한 선수였지만 1on1을 다양한 피니쉬로 매듭 지을 수 있었다는 점이 그의 1on1을 더욱 위력적이게 만들었죠. 페이드어웨이슛, 터닝슛, 돌파후 레이업 마무리등 상황에 따라 모두 깔끔하게 이루어 졌으니까요.
누구보다 강한 1on1능력이야 말로 고득점을 뽑아낼 수 있는 바탕으로 작용했으며 이는 김영만이 매시즌 기복없이 높은수준의 평균득점을 유지해 올 수 있었던 비결이라 할 것입니다.
◈ 추락하는 새에겐 날개가 없다
공수벨런스가 완벽한 믿을맨, SF의 교과서 등으로 불리우며 탄탄한 선수인생을 이어가던 김영만이 이토록 갑작스레 추락의 행보를 걸을지 누군들 예측할 수 있었을까.
추락의 기점은 01~02시즌 이었습니다. 당시 모비스는 시즌내내 하위권을 멤돌며 사람들로 하여금 "이제 화려했던 기아 왕조가 몰락하는가"하는 심사를 느끼게 했는데 용병들의 개인 플래이적 경향과 강동희의 노쇄화,백업 자원의 부재에서도 그 원인을 찿을 수 있었겠지만 무엇보다고 주포 김영만의 부진이 타격이었어요.김영만은 기록적으로 전시즌에 비해 평균득점은 무력 8점가량 하락했고, 리바나 어시같은 부분에서도 훠씬적어졌죠. 허나 기록이 문제가 아니였습니다. 김영만은 승부처에서 제역할 해내지 못하는 경우가 너무도 많았고, 시즌내내 극심한 기복을 보이고야 말았던 것이에요. 김영만을 대신해줄 득점원이 없는 모비스로선 뼈아픈 일이었죠. 급기야 "김영만의 득점은 영양가가 없다"라는 비아냥에도 시달려야 했습니다.
그러던중 전격 트래이드가 단행됩니다. 김영만은 정든 기아를 떠나 SK에 새로이 몸담게 되었죠. SK에는 기아시절부터 스승이었던 최인선 감독이 있었기에 김영만의 SK행은 꺼리낄것이 없었습니다. 이미 강동희도 떠난 마당이었죠.
전시즌에 사상 최악의 부진을 겪은 김영만의 의지는 남달랐습니다. 일본 전지훈련에 착실히 임하는등 새로운 둥지 SK에서 부활을 다짐했죠. 하지만 의지만으로 될 것은 아니었습니다.
김영만은 그해에도 지난년도에 비해 다를것이 없는 부진한 모습을 보였고, 급기야는 자신을 가장 잘 아는 최인선 감독에게 조차 버림을 받으며 엘지로 또다시 전격 트레이드.
불과 1년세에 팀을 두번이나 옮겨버린 것이었어요. 그것도 본인의 의지와는 별로 상관없이 말이죠. 오랬동안 정상의 자리에 머물러 왔던 김영만에겐 치욕과도 같았을 것입니다.
새로 옮긴 엘지엔 오랜시간 손발을 맞춰온 강동희가 있었고, 공격을 분담해줄 조우현도 있었지요. 하지만 엘지에서도 김영만은 추락에 추락을 거듭했는데 평균 득점도 간신이 10점대에 턱걸이 하는가 싶더니 급기야는 주전자리에서조차 밀려나 식스맨으로 전락하고야 말게된 것입니다. 그는 이미 경기에 지대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선수가 아니었고 김영만이란 존재는 팬들의 뇌리에서도 서서히 잊혀져 가는듯 했죠.
그리고 FA로 풀린 김영만. 이미 돈욕심을 낼 처지가 아니었던 그는 식스맨급 몸값을 감수하며 동부로 적을 옮겼습니다. 그리고 올시즌 '비중없는'식스맨으로서 경기에 간간히 출장하고 있는 처지가 되었네요.
추락하는 새에겐 날개가 없다고 했던가요? 김영만은 스타급 선수들 중에선 유래가 없으리만치 너무도 급격한 퇴보의 길을 걷고야만 것입니다.
◈ 무엇이 김영만을 나락으로 떨어뜨렸는가
핑계없는 무덤은 없는 바. 이 파트에선 김영만이 급격한 하락세를 보인 원인이 무엇이었을까에 대해 나름대로 집어 보고자 합니다.
우선 많은 분들이 그 이유로 꼽는 것은 "부상"입니다. 그렇죠. 김영만은 젊은 시절부터 고질적인 무릅 부상에 시달려 왔던 선수입니다. 언제나 부상이라는 것은 선수의 기량을 저하시키는 주 요인으로 작용하는게 사실이긴 하죠. 허나 김영만만 부상에 시달려 왔던것은 아닙니다. 고질적인 부상을 겪으면서도 꾸준히 좋은 활약을 보여온 선수들도 여럿 있죠. 때문에 김영만의 '급격한 추락'의 원인을 단순히 부상으로만 돌리는건무리가 있다고 봐요.
저는 김영만의 급격한 추락의 원인이 오히려 "시대의 변화에 대처하는데 실패"했다는 점에서 찾고 싶습니다. 프로농구가 도입된지 10년여밖엔 되지 않았지만 프로농구는 끈임없는 변화의 수레바퀴속에 있어 왔지요.
룰과 제도의 변화는 당연하거니와 국내 선수들의 역할 비중, 감독들의 전술 경향, 신인들의 장신화등 여러요소에 있어서 변화의 바람이 불었습니다. 선수들은 생존경쟁도 점점 치열해져 갔죠. 시대의 흐름에 부합되지않고 구태의연한 선수들은 점점 도태되어갈 뿐이었어요. 반면 끈임없이 변화를 시도한 선수들은 시대가 흘러도 여전히 자신만의 입지를 다져 왔죠.
몇몇 예를 들어 보지요.
현주엽선수는 본래 용병을 상대로 강력한 포스트 대결을 펼치던 선수였습니다. 힘과 기술에서 용병에 그닥 꿀릴게 없었던 그는 인사이드에서 국내선수의 자존심을 세워왔죠. 허나 용병의 기량에 따라 팀전력이 극도로 좌지우지 되는 경향이 더욱 심해지면서 각팀 감독들은 지극히 용병 중심으로 전략의 방향을 선회 할 수밖엔 없었고 국내 선수들은(PG를 제외하고) 너나 할 것없이 외곽의 한정된 역할비중으로 밀려나게 되었어요.
뿐만 아니라 KBL에 등장하는 새로운 용병들의 수준도 프로 초창기에 비해 훨씬 높아져 갔죠.
이런 흐름 속에서 현주엽은 더이상 골밑에 머물 수 없었습니다. 변화해야 했어요. 영리한 현주엽은 그걸 일찍 깨달았고 상무시절부터 체중감량에 노력하여 스피드를 키웠습니다. 한편, 3점슛과 같은 중장 거리 슛팅을 집중 연마하여 KBL형 SF화 되는데 어느정도 성공을 거두었죠. 이렇듯 자신의 본래 모습에서 탈피하여 시대의 흐름에 맞추어 변화를 시도한 현주엽은 비록 전성기마큼은 아니더라도 여전히 가치있는 선수이자 팀의 중심급 선수로서 활약하고 있지요.
추승균 선수에 대한 이야기도 해 볼까요? 추승균은 프로 대뷔 초창기 까지만 하더라도 전천후 득점원이 아니었습니다. 대부분의 공격을 이상민이 만들어준 찬스를 이용하거나 볼을 오래 소유하면서 1on1 포스트업 등에 의존했죠. 그리고 그는 보인도 인정하리 만치 3점슛엔 약점을 보인 선수였습니다. 스탠딩 노막 3점슛은 그럭저럭 괜찮았을 지언정 그이상은 무리였던 것이에요. 허나, 추승균도 근 몇년전부터 변화하기 시작햇습니다. 동료에게 기대거나 1on1에 집중적으로 의존하는 공격방식에서 탈피, 3점슛을 집중 연마하여 정통 슛터급의 강력한 3점 능력을 장착하게 된 것이죠. 이는 단순히 '3점슛이 강해졌다'라는 것을 의미하는게 아닙니다. 움직이는 와중에도 어느위치에서건 빠르고 정확한 3점슛을 구사할 수 있다는 것은 공격력의 상승과 더불어 '전술적인 쓰임세가 더욱 넓어졌다'라는 것을 의미했죠. 3점슛에 능하면 그 선수를 이용한 다양한 패턴 플래이를 구사할 수 있으니까요. 한편 추승균은 자기 개인기에 의조한 공격 방식에서도 탈피하여 용병과의 커뮤니케이션 플래이에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어시스트 능력도 점점 살아났구요.
만일 추승균이 프로 초창기의 플래이 경향을 바꾸지 않고 고집했다면 추측컨데 그도 김영만과 비근한 길을걸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는 자기 자신을 끈임없이 변화/개발시켜 나갔고 결국 여전히 가치있는 플래이어로 팬들의 사랑을 받고 있죠.
문경은과 우지원같은 선수들도 마찬가지 입니다. 문경은도 본래는 자기주도적 공격을 펼치는 선수였으나 빅스로 이적하고 나서 부터는 용병과의 2:2 픽앤롤이나 캐치&슛 플래이로 득점하는 법을 집중 연마 하면서 꾸준히 위력적인 슛터로 남을 수 있었으며, 우지원도 몇년전부터 동료와의 콤비네이션 플래이에 눈을 뜨면서 개인공격 뿐만 아니라 전술적으로 움직여 줄줄 아는 선수가 되었어요.
헌데 김영만은 어떻습니까. 그는 예나 지금이나 변화란게 없습니다.
3점슛이 약했던 김영만은 여전히 3점슛이 약하고, 용병과의 2:2 픽앤롤능력이 부족했던 김영만은 지금도 마찬가지지요. 공격방식도 동료가 만들어주는 찬스를 받아 득점하거나 1on1에 의존하는 구태의연함을 도무지 벋어 던지지 못했어요. 그는 여전히 득점하기 위해선 본인이 볼을 오래 소유해야만 합니다.
허나 국내선수에게 공격시간의 큰부분을 허락하면서 주궁장창 1on1을 시도하게할 감독은 현 KBL에 아무도 없지요. 1:1을 해도 차라리 용병에게 시키는 편이 나을 것입니다. 현 KBL의 추세는 오펜스가 철저히 용병중심으로 돌아가고 있으며 국내선수들에겐 간결하고 군더더기 없는 플래이로 용병을 보조해주는 움직임이 요구되고 있죠. 자기 득점 하겠다고 볼을 질질 끌다간 대번에 벤치로 불려 들어가기 쉽상입니다.
혹자는 김영만을 일컫어 다재다능하다고 이야기합니다. 허나 전 예전부터 김영만이 결코 다재다능한 선수라는 생각을 해본적이 없어요. 오히려 그는 지극히 단순한 플래이를 펼치는 선수인데 그것은 바로 1on1에 의존한 득점과 상대선수에 대한 대인방어지요. 김영만은 경기 내내 이 두가지에 충실하는 선수이지 머리속에 다양한 그림을 그리며서 플래이 하는 선수는 결코 아니었어요. 그에겐 폭넓은 코트비젼이나 노련한 어시스트 플래이, 선수진을 장악하고 아우르는 리더쉽 같은 것도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패턴 플래이에 능한것도 아니었구요. 게다가 승부처에서 팀을 구하는 위닝샷을 터뜨려주는 선수도 아니고..
김영만이 이렇게 된데에는 기아시절 너무 훌륭한 선수들과 함께했던 측면이 크게 작용하는듯 싶군요. 최고의 리딩가드 강동희는 언제나 김영만의 도우미였고, 강력한 카리스마로 팀을 장악하는 허재, 골밑을 지배해주는 김유택, 그리고 제이슨 윌리포드나 클리프 리드같이 충중한 기량을 갖춘 에이스 용병들도 김영만의 동료들이었죠. 이렇듯 편안한 환경에서만 주로 있다보니 김영만은 그저 개인 공격과 수비.. 이 두가지만 열심히 해도 되었던 것이에요. 스스로 나서 복잡하게 머리굴릴 이유가 없었지요.그러다 보니 변화와 개발에 있어서 김영만은 동년배의 다른 선수들에게 뒤쳐지고야 말았던 것입니다.
김영만은 특히 추승균을 본받을 필요가 있었다고 생각해요. 프로초창기만 하더라도 추승균은 그 누구보다도 김영만과 공통점이 많은 선수였기 때문이죠. 허나 지금은 이 두선수가 완전히 달라져 버렸습니다.
◈ 초라한 선수 인생의 말년.
김영만의 현 위치라는것은 정말 초라하기 그지 없지요. 공격가담은 거의 볼게 없는 수준이고 그나마 '아직은 조금 쓸모가 있는'수비능력 하나로 버티고 있다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본인 스스로도 "개인기록에 대한 욕심은 진작에 버렸다"라고 밝히는 김영만...
뛰어난 공수 밸런스를 바탕으로 리그 탑급의 SF로 화려하게 군림하던 김영만 선수가 어쩌다 이렇게까지 되었는지.. 이선수를 볼때마다 안타까운 마음 금할 길이 없습니다. 우지원처럼 식스맨으로라도 얼마든지 멋진 제2의 농구인생을 열어 갈 수도 있는 것이지만 김영만의 현 위치는 그조차도 요원해 보이네요. 이미 몇년전부터 그의 부활을 간절히 기대했건만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버렸을 뿐입니다. 정녕 천하의 김영만이 이런식으로 선수인생을 끝내게 되는 것이지...
그가 좀더 성실한 자기 관리를 했더라면.. 그리고 시대의 변화에 적절히 편승했더라면..
팬들의 변함없는 사랑을 받으며 훨씬 보람있는 선수인생의 말미를 보낼 수 있었을 텐데요..
허나 이제와서 돌이켜본들 속절없는 아쉬움만 커져갈 뿐.
이제 그도 지금 자신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는것 밖에는 없겠지요.
하지만 비록 뒤끝이 좋지 못했다 하더라도 그의 전성기 모습을 기억하는 팬들이 있기에 김영만은 언제까지고 두고두고 팬들의 추억거리로 남으리라 봅니다.
비운의 스타 김영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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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 고 <김영만의 역대 기록> ◀
-시즌----득점------RB------AS------ST------TO--
//~97 : 20.38 점 / 2.48 개 / 1.10 개 / 1.29 개 / 1.05 개
97~98 : 21.35 점 / 2.48 개 / 1.00 개 / 1.08 개 / 1.90 개
98~99 : 20.23 점 / 3.03 개 / 2.30 개 / 1.30 개 / 1.80 개
99~00 : 17.13 점 / 1.94 개 / 2.16 개 / 0.71 개 / 1.55 개
00~01 : 22.76 점 / 3.04 개 / 2.27 개 / 0.64 개 / 1.00 개
01~02 : 14.41 점 / 1.59 개 / 1.73 개 / 0.88 개 / 1.51 개
02~03 : 13.40 점 / 2.58 개 / 2.15 개 / 1.06 개 / 1.45 개
03~04 : 10.43 점 / 2.51 개 / 1.76 개 / 0.94 개 / 1.25 개
04~05 : 10.13 점 / 2.50 개 / 2.04 개 / 0.70 개 / 1.24 개
05~06 : 4.02 점 / 1.36 개 / 0.83 개 / 0.34 개 / 0.47 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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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 산 : 14.41 점 / 2.33 개 / 1.74 개 / 0.85 개 / 1.29 개
통산(총계) : 6,037 P / 2,283 야투(50.86%) / 929 FT / 976 RB / 730 AS / 356 ST / 540 TO
- 이건 제가 쓴 글은 아니고 예전 점프볼에 "김좌신"님이 쓰신 글입니다. 예전 제 블로그로 퍼가는 것도 허락하셨어서 이렇게 올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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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같은지역출신으로 정말 좋아하는 선수입니다...근데 고등학교당시 2위가 김영만에요?..랭킹 1위는 누구였어요? ;;
이상민이었죠 ^^ 그래도 김영만 고3때 신문에 이충희의 슛과 허재의 드리볼 이라고 하면서 신문에도 나오고 했습니다.
정말 김영만은 최고였죠. 갠적으론 아쉬움이 남는 경기는 중대시절 마지막 경기에서 고대 이지승한테 무득점으로 묶인거죠. 아마도 처음이자 마지막이 아니었을까... 실업팀,프로 이후 이지승은 김영만을 절대 못막았죠.
김영만만을 막을 수 없었다는 게 더 큰 문제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문경은이 항상 수비전담선수에게 시달린데 반해 기아엔 막아야할 선수들이 너무 많았으니까요. 수비전담선수는 대개의 경우 김영만이 아닌 허재를 막아야만 했고 어쩔 수 없이 김영만은 각팀의 주포들이 상대해야했으니까요.
지금 생각해 보아도 그 시절의 기아와 연대는 제대로 사기조합인 듯 하다는. 강동희-허재-김유택과 이상민-문경은-서장훈이라는 10년 국대(그것도 주전) 셋을 거느린 팀들이니.....
제가 기억하기로는 무릎이 굉장히 안좋아서 게임에 못나온적이 많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단순히 본인이 변화를 하지 않았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지 않나하는 생각이 듭니다.
기아 조합이란... 강동희-허재-김영만-김유택-한기범.... 만약 김영만선수가 5-6살이 더 많았더라면 아마농구가 나머지 선수들이 5-6살 어렸더라면 프로농구의 판도가 변했겠죠... 여담이지만 김영만이 기아에 가게된 계기는 이상민 때문이였죠.. 처음 김영만선수도 현대로 가기로 하고 팀 연습에도 참여햇습니다. 하지만 현대에서 워낙 이상민을 띄어주고 이상민 중심으로 돌아가서 그것이 싫어서 현대를 나왔습니다. 그때 중대 선배들의 권유로 기아에 입단하게 됬죠. 기아가 어부지리한 면이 있습니다..
김영만 선수같은 스타일의 많은 선수들이 그냥 묻혀지는 리그가 너무 아쉽네여.. 정말로 국내선수들의 파워넘치는 플레이나 1 on1을 보기 힘들어 지는 리그.. 그런 선수들은 그냥 묻혀지는 리그가 되는것 같습니다,.,
좋은글 퍼와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그런데 오타가 있어서...끈임없는(X)->끊임없는(O)
김영만 원래 고려대 갈려고했다가 중대로 가게된게기가 친구들떄문에 간거아닌가요 친구들 다 같이 입학시켜준다고해서 어디 비하인드스토리에서 본거같은데요
난 나다 // 말씀하신게 맞습니다. 당시에 비명문고에서 에이스급 선수가 나오면 특정대학에 진학하는 조건으로 동기들 몇명 달고가는 게 거의 관례였고, 마산고의 김영만도 비슷한 사정이었습니다. 중앙대가 김영만의 친구들을 더 많이 받아주겠다고 했었죠. 보통 그렇게 친구 따라 대학간 선수들은 곧 농구부를 나가서 일반학생이 되곤 했지만요.
한국 학원 스포츠계의 만연한 돈 문제와도 연관이 있죠.. 딸려가는 학생들이 그냥 딸려가는것이 아니라 또 돈을 내죠...=ㅅ =;
김영만선수 같은 대부분의 공격성향의 선수들이 용병제도가 들어오면서 급격히 떨어지기시작했죠. 이후 리그 정착에 성공한 다른선수들은 수비위주로전향을 하면서 슈팅의 정확도를 올린게 주효했다고 봅니다. 김영만 선수 떨어지면 3점, 붙으면 1:1해서 페이드어웨이 슛까지... 진짜 일품이었는데... 전성기에 비해 말년은 너무나도 소리소문없이 사라진것 같다는... 우리나라의 장신 스포들이 배워야될 교본적인 선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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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만의 3점슛을 노마크 3점으로만 한정하면 물론 최고 레벨의 선수이죠. 다만 문경은, 추승균처럼 스크린을 받아 돌면서 던지는 슛이 없었고 레인지에서도 아쉬움은 있었습니다. 물론 어디까지나 3점 스페셜리스트인 문경은이나 우지원 등에 비해서이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