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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밤낮으로 일하면서 복음을 여러분에게 선포하였습니다.>
▥ 사도 바오로의 테살로니카 1서 말씀입니다. 2,9-13
9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우리의 수고와 고생을 잘 기억하고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여러분 가운데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밤낮으로 일하면서,
하느님의 복음을 여러분에게 선포하였습니다.
10 우리가 신자 여러분에게 얼마나 경건하고 의롭게
또 흠 잡힐 데 없이 처신하였는지,
여러분이 증인이고 하느님께서도 증인이십니다.
11 여러분도 알다시피, 우리는 아버지가 자녀들을 대하듯
여러분 하나하나를 대하면서,
12 당신의 나라와 영광으로 여러분을 부르시는 하느님께 합당하게 살아가라고
여러분에게 권고하고 격려하며 역설하였습니다.
13 우리는 또한 끊임없이 하느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가 전하는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 때,
여러분이 그것을 사람의 말로 받아들이지 않고
사실 그대로 하느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그 말씀이 신자 여러분 안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너희는 예언자들을 살해한 자들의 자손이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3,27-32
그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27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겉은 아름답게 보이지만 속은 죽은 이들의 뼈와
온갖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차 있는 회칠한 무덤 같기 때문이다.
28 이처럼 너희도 겉은 다른 사람들에게 의인으로 보이지만,
속은 위선과 불법으로 가득하다.
29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예언자들의 무덤을 만들고 의인들의 묘를 꾸미면서,
30 ‘우리가 조상들 시대에 살았더라면
예언자들을 죽이는 일에 가담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고 말하기 때문이다.
31 그렇게 하여 너희는 예언자들을 살해한 자들의 자손임을 스스로 증언한다.
32 그러니 너희 조상들이 시작한 짓을 마저 하여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Denunciation of the Scribes and Pharisees
말씀의 초대
바오로 사도는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밤낮으로 일하면서 복음을 선포했다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에게, 겉은 의인으로 보이지만 속은 위선과 불법으로 가득 찬 회칠한 무덤 같다고 하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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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오로 사도는, 테살로니카 신자들이 우리가 전하는 하느님의 말씀을 사람의 말로 받아들이지 않고 사실 그대로 하느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여 하느님께 감사드린다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에게, 겉은 의인으로 보이지만 속은 위선으로 차 있는 회칠한 무덤 같다고 하신다(복음).
오늘의 묵상
바오로 사도는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밤낮으로 일하고 “경건하고 의롭게 또 흠 잡힐 데 없이” 살면서 복음을 전한 자신의 삶을 들려줍니다. 그는 공동체 앞에서 설교하거나 대화를 나누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아버지가 자녀들을 대하듯 신자들이 참으로 성숙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격려하며, 하느님께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하는 그리스도인의 책임을 강조합니다. 또 신자들이 복음을 인간의 작품이 아니라 하느님 말씀으로 받아들인 사실에 대하여 감사를 드립니다.예수님께서는 무덤을 주제로, 외적으로 깨끗한 행실과는 대조적으로 내적으로 타락한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위선을 지적하며 비난하십니다. 무덤에 회를 칠하는 팔레스티나 관습은, 무덤을 쉽게 알아보게 하여 지나가는 사람들이 무덤을 피하고 법적으로 더럽히지 않도록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무덤의 아름다운 겉모습은 더러움으로 가득 찬 그 내부의 실재도 숨겼습니다.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을 두고, 겉은 의인으로 보이지만 속은 위선과 불법으로 가득하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들 대부분이 보여 준 엄격한 율법 준수는, 하느님의 법과 모순되는 삶을 감추려는 가림막일 따름입니다. 그들은 과거의 예언자들과 의인들의 묘를 꾸미고 기념비를 세우면서, 이스라엘 역사의 큰 인물들이 보여 준 충실함을 자신들의 영광으로 돌립니다. 그러나 실제로 참고 견뎌 내는 유일한 예언자들은 무덤에 묻힌 죽은 이들입니다.그들의 쓸모없는 과거 회상은 그들 조상이 예언자들을 살해한 자들이었음을 분명하게 해 줍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고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사도들과 선교사들을 박해하여 조상들이 시작한 짓을 마저 이루고야 맙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바리사이들의 자기만족 대신 회개의 결실을 묻고 계십니다. (안봉환 스테파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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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위선을 지적하시면서 그들이 “예언자들을 살해한 자들의 자손”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너희 조상들이 시작한 짓을 마저 하여라.” 하고 거침없이 비난하십니다. 이렇게 섬뜩한 말씀을 하시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예수님께서 ‘예언자들을 박해한 유다인들’에게 머지않아 죽임을 당할 것을 감지하셨기 때문입니다.
엘리야 예언자는 바알 신을 숭배하는 예언자들을 대항하여 싸웠으므로 아합 왕과 이제벨 왕비에게 쫓겨 다녔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하느님의 제단을 허물고 주님의 예언자들을 쳐 죽였습니다. 엘리야는 “이제 저 혼자 남았는데, 저들은 제 목숨마저 없애려고 저를 찾고 있습니다.”(1열왕 19,14) 하고 주님께 아룁니다. 여호야킴 왕궁의 사제들과 예언자들은 예레미야 예언자를 단죄하며 “이 사람은 이 도성을 거슬러 예언하였으니 그를 사형에 처해야 합니다.”(예레 26,11)라고 말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한 이스라엘 백성의 멸망으로 이방인에게 구원의 은총이 전해졌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의 수난과 죽음’을 통한 하느님의 심오한 구원 계획이 온 세상에 드러났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진실한 마음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인 테살로니카 신자들의 믿음을 칭찬하며 하느님께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면 그 말씀이 우리 안에서 살아 움직이게 됩니다. 하느님의 구원 계획에 순응하여 구원의 열매를 풍성하게 맺는 신앙인이 됩시다. (류한영 베드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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텔레비전에서 우리는 여러 종류의 커피 광고를 만나는데, 그 광고에 출연한 모델이 보통 때에도 그 커피가 다른 커피보다 맛있고, 그래서 과연 그 커피를 마실까요? 아니면 출연료를 받고 그저 모델 역할만 하는 것일까요?
복음을 전하는 사람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어제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자기가 “자녀들을 품에 안은 어머니처럼 온화하게”(1테살 2,7) 처신하였다고 밝히고, 오늘은 “아버지가 자녀들을 대하듯” 신자들 하나하나를 그렇게 대했다고 고백합니다. 마치 부모가 자녀들에게서 무엇을 받으려고 사랑을 베푸는 것이 아닌 것처럼, 그는 신자들에게서 영광을 찾지도 않았고, 그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자기 손으로 일을 했습니다. 어떤 대가를 바라고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지요.
사심 없는 순수한 마음은 어떤 방법으로든지 전해지는 모양입니다. 신자들이 바오로 사도가 전한 말을 사람의 말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은, 대가는 물론 사심 없이 투명하게 복음을 전하는 그의 솔직하고 담백하며 하늘처럼 맑은 마음을 헤아렸기 때문이겠지요.
오늘날 복음을 전하는 모든 이도 바오로 사도처럼 신자들 앞에서 경건하고 의롭고 흠 잡힐 데 없이 살면서 복음을 선포할 수 있었으면 참으로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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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에 이어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호되게 나무라십니다. 겉과 속을 달리하며 사는 그들의 모습을 두고 ‘회칠한 무덤’ 같다고 말씀하십니다.
요즈음 젊은이들 사이에는 ‘코스프레’라는 문화가 있습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만화나 게임에 등장하는 인물을 흉내 내어 그 의상과 행동을 따라 하는 축제 같은 것입니다. 코스프레를 할 때에는 현실 속의 나는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철저히 새로운 모습의 또 다른 인물로 탈바꿈하게 되는 것입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우리도 일상에서 코스프레를 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자신의 진실한 모습은 감춘 채 겉으로 꾸며진 모습을 연출합니다. 그래서 ‘내’ 안에 ‘꾸며진 나’와 ‘있는 그대로의 나’가 함께 존재하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문제는 가면 쓰는 것에 익숙하다 보면 그것이 위선이 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무엇이 자신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인지 분별하지 못하고, 결국에는 ‘참된 나’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이때 그 사람은 오늘 예수님의 말씀대로 불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가면에 익숙한 나머지 스스로를 속이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른 채 살았습니다. 오히려 자신들이 ‘의로운 사람’이라고 자부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그들 스스로가 이를 깨달아 하느님 앞에서 가면을 벗고 진실한 모습을 갖추라고 촉구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결코 행복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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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의 삶이 ‘회칠한 무덤’과 같다고 하시며 그들의 위선을 꾸짖으십니다. 그런데 이 ‘회칠한 무덤’이라는 상징은 예수님 시대의 종교 지도자의 모습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의 삶을 적나라하게 비추어 주는 거울이기도 합니다. 이 말에서 우리는 메마른 마음, 생기 없는 일상의 삶을 아프게 떠올려야 합니다. 아픈 자각은 익숙함과 결별하고 생명력이 충만한 삶의 여정을 시작하는 용기를 선사하기도 합니다.
스위스 출신의 유명한 철학자 파스칼 메르시어는 한 나이 많은 교수를 주인공으로 한 『리스본행 야간열차』라는 매혹적인 소설을 썼습니다. 주인공 그레고리오는 기이한 우연을 거쳐 손에 들어온 한 포르투갈 작가의 책 머리말에 나오는 다음 내용에 홀리고 맙니다. “우리가 우리 안에 있는 것들 가운데 아주 작은 부분만을 경험할 수 있다면, 나머지는 어떻게 되는 걸까?”
그는 곧바로 책을 내려놓고 시계처럼 철저했던 자신의 일상을 내버려 둔 채 불현듯 포르투갈의 항구 도시 리스본으로 가는 야간열차에 오릅니다. 처음에는 스스로도 이러한 여행을 시작하는 자기 자신을 이해할 수 없었던 그는 여행에서 돌아온 뒤, 이것이 메마름에 자족하는 것을 멈추고 충만한 삶을 향한 갈망이었음을 깨닫습니다.
몇년 전 흥미 있게 읽었던 이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를 올여름의 들머리에 보면서 나의 리스본은 어디인지 조용히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번에도 나 자신을 돌아보는 여행, 일상의 참의미를 찾는 떠남이 필요했습니다. 익숙함을 떠나 나의 일상에서 낯설음을 발견하고 지금까지 바라던 것이 참으로 의미 있는지 돌아볼 시간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여행에서 돌아온 지금, 나의 리스본은 주님의 말씀을 듣고 실천하며 나누는 기쁨의 순간들로 빛나는 내 삶의 자리임을 깨닫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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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법 학자는 공부하는 사람입니다. 불변의 율법을 ‘가변의 현실’에 어떻게 적용시킬지 고뇌하는 사람입니다. 당연히 하느님과 사람에 대한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좋은 율법’을 끝까지 지켜 낼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율법을 주신 것은 사람답게 살도록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율법으로 사람을 괴롭히고 있다면 분명 잘못된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율법 학자들을 위선자로 꾸짖으시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옛날 어떤 사람이 신발을 사려고 했습니다. 그는 자기 발의 모양과 크기를 종이에 그렸습니다. 다음 날 시장에서 신발 장수를 만났는데, ‘그려 둔 그림’을 가져오지 않았습니다. 그는 신발 장수에게 말합니다. “내 발을 그린 그림을 두고 왔으니 잠시 가서 가지고 오겠소.” 하지만 그가 돌아왔을 때는 장은 끝났고, 신발 장수도 가고 없었습니다.
사람들이 물었습니다. “당신이 직접 신어 보면 될 것을 왜 그리 번거롭게 하시오?” 그가 답했습니다. “나는 그림은 믿을지언정 내 발은 믿지 않소.”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하지만 역사에는 그런 사람들이 많습니다. 주님을 믿는 이들이 주님의 이름으로 싸웠습니다. 자기 식대로 믿었기 때문입니다. 율법 학자들은 ‘하느님보다’ 율법을 더 소중히 여기며 살았기에 예수님의 꾸중을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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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향기를 풍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밝고 환한 느낌을 주는 이들입니다. 그런 사람과는 가까이하고 싶어 합니다. 함께 있으면 기쁨이 남습니다. 그러나 악취를 풍기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피곤한 분위기를 만드는 자들입니다. 같이 있으면 힘들고 지겹습니다.
지식과 소유가 삶의 향기는 아닙니다. 자리와 권위도 아닙니다. 많이 배우고 재산이 많다고 좋은 향기를 저절로 풍기는 것은 아닙니다. 높은 자리에서 권위 있는 삶을 산다고 악취가 물러가는 것도 아닙니다. ‘삶을 대하는 태도와 사람을 대하는 자세’가 그대로 좋은 향기가 되거나 악취가 될 뿐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겉은 아름답게 보이지만, 속은 죽은 이들의 뼈와 온갖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차 있는 회칠한 무덤 같기 때문이다.” 속에서는 시신이 썩고 있는데 겉을 포장한다고 냄새가 없어지겠느냐는 말씀입니다.
바리사이들도 열심히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다만 그들은 포장된 믿음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경건함’이라는 회칠로 감싼 믿음입니다. 그러기에 주님의 질책을 듣습니다. 인생의 향기는 내적 문제입니다. 아무리 바깥을 꾸미고 단장해도 안에서 나는 냄새는 어찌할 수가 없습니다. 영혼이 바뀌어야 냄새도 바뀝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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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누구나 부지런해야 합니다. 부지런한 이의 창고에는 물건이 가득할 것입니다. 그러나 일의 노예가 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일의 노예가 되지 않도록 안식일을 만드셨습니다. 그렇다고 게으르지는 말아야 합니다. 게으름뱅이에게는, 잠언이 말하듯이, “가난이 부랑자처럼, 빈곤이 무장한 군사처럼 들이닥칩니다”(6,10). 그러나 삶의 여유는 필요합니다. 한 노인 어부가 낮잠을 즐기고 있었습니다. 대기업을 경영하는 사람이 충고를 하였습니다. 왜 일하지 않고 낮잠을 자느냐고. 일을 해서 더 큰 배를 사고, 그래서 더 많은 고기를 잡고, 다시 더 큰 배를 사고…. 그러자 그다음엔 무엇을 하느냐고 어부가 물었습니다. 경영인이 말했습니다. 노년을 즐길 수 있다고. 그 어부가 다시 묻고 스스로 답했습니다. 자기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 줄 아느냐고. 자신은 지금 노년을 즐기고 있노라고. 게으르지 맙시다. 그러나 적당한 여유는 가지도록 합시다.
몇 년 전에 요리하다가 주의를 기울이지 않아서 채칼에 손가락 끝이 베였던 기억이 생각납니다. 그냥 살짝 베인 줄 알았는데, 지혈이 되지 않을 정도로 피가 너무 많이 나는 것입니다. 어쩔 수 없이 병원 응급실에 가서 치료를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의사 선생님께서는 상처가 너무 커서 아물어도 흔적이 없어지지 않을 것 같다고 하시더군요.
그렇게 상처를 입어 치료를 한 지 벌써 3년이 넘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상처가 아직 남아 있을까요? 의사 선생님께서 흔적이 남을 것 같다고 했지만, 지금 현재 그 흔적조차 찾기가 힘듭니다.
비슷한 시기에 저의 운전 부주의로 자동차에 흠집을 내고 말았습니다. 그렇다면 그 흠집이 몇 년이 지난 지금 몸의 상처가 사라진 것처럼 똑같이 사라졌을까요? 큰 흠집이 아니었기 때문에 당시에 어떤 조치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그 흠집은 아직도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우리의 몸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의 몸은 스스로 치유까지 하는 놀라운 능력을 갖추고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런 몸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 것만으로도 기적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요? 기적은 바로 내 안에서 계속해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놀라운 몸을 가지고 있음에 감사하지도 못하고 있으며, 할 수 있는 것도 할 수 없다면서 쉽게 포기하는 경우가 너무나 많습니다. 그래서 내 안에서 계속 이루어져야 하는 기적이 나타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놀라움을 가지고 있는 우리의 몸이기에 주님께서는 그냥 겉으로 보이는 육체를 뛰어넘어서 보이지 않는 마음의 무장을 강조하십니다.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은 겉으로는 정말 대단한 사람처럼 보였지만 마음은 위선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래서 “너희가 겉은 아름답게 보이지만 속은 죽은 이들의 뼈와 온갖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차 있는 회칠한 무덤과 같다.”라고 하십니다.
무덤이 닫혀 있는 한 겉모양은 아름다울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무덤을 열면 그 광경은 참혹할 수밖에 없습니다. 바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겉으로만 그럴싸할 뿐 속마음은 역겹다는 것입니다.
겉과 속이 다른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 모습으로는 절대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으므로 불행하다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의 모습은 불행의 길로 가고 있을까요? 아니면 행복의 길로 가고 있습니까?
대단한 몸을 가지고 태어난 우리의 몸을 다시금 떠올리면서, 주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을 따라야 하겠습니다. 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하지 않았을 뿐입니다.
검은색도 닦으면 빛이 납니다(어느 구두닦이 아저씨의 말).
무엇을 담고 있는가?
요한 볼프강 폰 괴테의 글 중에 이런 시가 있습니다.
어느 날 하느님이 물으실 것입니다.
너희들은 내가 준 희귀한 선물을 잘 유지하였느냐?
너희의 얼굴을 내보이라.
기쁨과 희망이 잘 보존돼 있느냐?
맞습니다. ‘나’라는 존재는 정말로 희귀한 주님의 선물입니다. 너무나 많은 것들을 담을 수 있는 ‘나’입니다. 그런데 과연 무엇을 담고 있습니까? 주님께서 원하시는 사랑이 아니라, 부정적인 가치로만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요?
아름답고 사랑스런 죄인!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죄와 은총의 신비스런 관계에 대한 말씀을 접할 때 마다, 매일 밥 먹듯이 죄를 짓고 살아가는 죄인중의 대죄인으로서 큰 위안을 받기도 하지만, 때로 살짝 혼동이 오기도 합니다.
예를 들면 이런 말씀입니다. “죄가 많은 곳에 은총도 풍부합니다.”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그래서 가끔씩 갖게 되는 의구심입니다.
‘아니 죄가 많은 곳에 은총도 풍부하다면? 그럼 은총을 많이 받기 위해 더 많은 죄를 지어야겠네? 주님께서 의인보다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고? 그럼 괜히 기를 쓰면서 의로운 사람으로 살 필요가 없겠네.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니 그럼 더 큰 죄인으로 살아야겠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주님 은총 충만히 받고, 그분의 부르심을 받기 위해서라면, 늘 깨어 있으면서 기도해야 마땅하지, 일부러 타락과 방황을 거듭하며 죄를 지을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죄에 대해 좀 더 폭넓은 시선으로 바라봐야겠습니다. 사실 주님의 크신 자비 앞에 용서받지 못할 죄는 없습니다. 동시에 우리 인간 존재는 아무리 발버둥쳐도 죄와 악습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나름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없는 의인으로 자처하는 사람들 역시, 자신도 모르게 짓는 죄가 부지기수입니다.
요즘 주변을 돌아보면 정말이지 특별한 분들 참 많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은 다 아는데, 본인만 그 사실을 모릅니다. 무엇을? 자신이 얼마나 큰 죄인이라는 것을. 자신이 존재 자체로 주변 사람들에게 얼마나 큰 고통과 상처를 주고 있는 지를. 자신으로 인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함께 어둠과 죽음의 골짜기로 내려가고 있는 지를. 세상 사람 모두가 다 알고 있는데, 본인만 그것을 모릅니다. 참으로 안타깝기 짝이 없습니다.
그런 사람이 조용히 지내면 그나마 견딜수 있겠습니다만, 적반하장격으로, 온천지를 다니면서 당당하게 외칩니다. 자신은 의롭다고, 자신은 죄 하나 없다고 외치면서, 무고한 사람들을 죄인으로 몰고갑니다. 역사 이래 참으로 큰 죄인들, 역대급 대죄인들을 우리는 지금 눈으로 매일 목격하고 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정 반대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죄라고는 눈을 씻고 살펴봐도 찾아볼 수 없는 사람인데, 틈만 나면 이렇게 외칩니다. “저는 주님 앞에 큰 죄인입니다. 공동체 형제들 가운데 제가 가장 큰 죄인입니다.”라고 아침마다 외치며, 틈만 나면 가슴을 치면서, 자신을 성찰하고 채찍질합니다.
이런 죄인이야말로 주님께서 주시는 풍성한 은총을 받을수 있는 아름다운 죄인입니다. 주님께서 제일 먼저 불러주실 사랑스런 죄인입니다.
죄인 중에 가장 큰 죄인는 주님을 떠나서 사는 죄인입니다. 주님께서 끊임없이 불러주시고 사랑스런 시선을 보내심에도 불구하고, 끝끝내 주님으로부터 등을 돌리고 떠나가는 죄인입니다.
오늘 우리가 기억하는 아우구스티누스 주교 학자는 죄와 은총의 성인으로 유명합니다. 젊은 시절 그는 죄란 죄는 다 짓고 살았습니다. 한때 그의 삶은 죄의 종합선물셋트였습니다. 죄의 깊은 구렁 속에 푹 빠져들어가 도무지 헤어날줄을 몰랐습니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 주님의 은총은 한 인간 존재의 죄를 훨씬 능가했습니다. 주님의 뜨거운 자비와 사랑은 아우구스티누스가 지은 죄를 순식간에 태워버렸습니다. 용광로보다 더 뜨거운 주님 사랑의 불로 인해 아우구스티누스의 죄는 완전히 소멸되었으며, 주님께서는 재만 남은 폐허 위에서 새롭게 그를 창조하셨습니다. 얼마나 감사하고 은혜로웠던지, 목이 다 메인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신의 지난 어두웠던 나날들을 가슴치며 이렇게 부르짖었습니다.
“늦게야 님을 사랑했습니다. 이렇듯 오랜, 이렇듯 새로운 아름다움이시여, 늦게야 당신을 사랑했습니다. 님은 나와 함께 같이 계시건만 나는 님과 함께 같이 아니 있었습니다.”(고백록 중에서)
나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게
전삼용 요셉 신부님
어떤 시골 본당 신부님과 신자들은 힘겹게 성전 건축을 하고 있었습니다. 지역에서 생산되는 농산물을 도시 본당에서 팔고 다녔지만 건축자금은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그런데 그 지역엔 서울에서 이사와 전원주택을 크게 짓고 사는 연세 든 자매님이 계셨습니다. 그 자매님이 어느 날 본당 신부님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혹시 제 사랑이(개)에게 세례를 주실 수는 없나요? 그러면 제가 건축헌금으로 10억 봉헌하겠습니다.”
신부님은 말도 안 되는 제안에 바로 거절하려 했으나, 워낙 공사대금 지불이 다급한지라 잠시만 기다리라고 해 놓고 주교님께 전화를 걸었습니다. 그냥 눈 딱 감고 몰래 세례를 주면 아무 문제없을 것이라고 주교님을 설득했습니다. 그러자 주교님은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음 ... 전 신부, 그럼 ... 견진은 내가 준다고 그래.”
물론 우스갯소리지만 여기서도 배울 것이 있을 것 같습니다. 바로 양심에 어긋나는 일을 하면 그것을 사람들 앞에서는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것이 발각이 되지 않도록 그런 사람이 아닌 척 하고 살아야한다는 것입니다. 잘못이 없다면 그런 사람이 아닌 척 할 필요가 없지만 잘못이 있다면 반드시 그런 사람이 아닌 척 하게 됩니다. 그렇게 죄를 지으면 자연적으로 위선자가 됩니다.
예수님은 삼일 연속 바리사이-율법학자의 특징에 대해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들은 위선자들입니다. 신앙생활은 남보다 잘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구원에서 멀어져있는 이들인 것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어느 정도는 바리사이-율법학자이기 때문에 그 습성에서 벗어나려 노력해야합니다.
바리사이-율법학자의 첫 번째 특징은 ‘삶에서 무엇이 중요한지 모른다’는 것이었습니다. 율법은 다 지키지만 그 율법의 정신인 사랑은 실천하지 않는 이들이었습니다. 복음을 전하겠다고 돌아다니면서 정작 기도는 하지 않는 이들이었습니다. 성경은 열심히 읽지만 영성체는 하지 않는 것도 여기에 해당합니다. 봉사는 하는데 성체조배 할 시간이 없어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루 중 하느님의 친교를 이루는 시간이 가장 중요합니다. 필요한 것은 그것 하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특징은 ‘하는 일의 목적을 모른다’는 것이었습니다. 십일조를 내면서 하느님을 주님으로는 인정하지 않는 이들이었습니다. 십일조는 선악과와 같습니다. 선악과를 남겨놓으라고 하신 이유는 하느님께서 드시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선악과를 봉헌함으로써 아담과 하와가 당신을 주인으로 인정하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십일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거 바친다고 하느님께 아무 도움도 되지 않습니다. 다만 주님께서 주시는 것들에 대해 감사하고 주님을 진짜 주님으로 인정하게 하기 위한 우리들을 위한 도구였습니다.
미사는 사랑해야 함을 알고 사랑할 힘을 얻기 위한 목적인데 사람을 미워하는 마음으로 미사하면 바리사이-율법학자인 것입니다. 하는 일의 목적을 모르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미사나 기도를 많이 드린다고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그것을 통해 더 사랑하는 사람이 되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마지막 바리사이-율법학자의 세 번째 특징은, 오늘 복음에서 말씀하고 계신데, ‘회칠한 무덤과 같다’는 것입니다. ‘겉은 깨끗하지만 속은 썩고 있는 것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 이유는 자신의 정신을 자기 자신의 내면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더 집중했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 사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이들은 다른 사람들이 칭찬해주면 기뻤다가 인정을 받지 못하면 죽을 듯이 괴로워하고 화를 내고 분노를 터뜨립니다. 다른 사람들의 평가에 민감하다면 바리사이-율법학자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다른 사람의 평가에 민감한 이유는 이미 하느님께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음을 스스로 알기 때문입니다. 그 떨어진 평가를 다른 사람들에게라도 채우려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다른 사람들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우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양심에 어긋나는 일을 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면 됩니다. 양심은 하느님께서 넣어주신 법입니다. 양심에 어긋나는 일을 하지 않으면 하느님께서 나를 인정해주시고 그러면 다른 사람이 어떻게 말하던 크게 신경 쓰지 않게 됩니다.
페이스 북의 마크 주커버그는 한 가지 옷만 입습니다. 그리고 왜 다른 옷은 없느냐는 비아냥거림에 아무 신경도 쓰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이 있을지라도 그는 그 사람보다 더 부자임을 스스로 알기 때문입니다. 또 옷이 자신의 내면의 아름다움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가난하다고 자신을 평가하는 사람은 돈이 많게 보이려 노력합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이 그렇게 보아주지 않으면 분노를 터뜨립니다.
내 양심에게 칭찬을 받는 사람이 되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그러면 남들이 비난을 하던 비웃던 조롱을 하던 멸시를 하던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자신에게 신경 쓰는 사람은 이웃을 판단할 겨를이 없습니다. 자신의 내면을 바라보면 볼수록 자신보다 더 많은 죄를 짓는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더 남을 심판할 수 없고 또 그래서 남이 그렇게 심판해도 그저 “알아!”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항상 양심의 거울을 나의 앞에 놓고 그 거울을 통해 나만 바라보며 살아갑시다. 그래야 나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래도 마지막 때에는 주님 앞에 너무 부끄러운 것이 많아 고개를 들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에겐 남 신경 쓸 여유가 없습니다. 내면에 썩어가는 것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내 냉장고의 음식이 썩어 가는데 누구의 냉장고를 신경 쓸 수 있겠습니까?
<회칠한 무덤>
이용헌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겉은 아름답게 보이지만 속은 죽은 이들의 뼈와 온갖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차 있는 회칠한 무덤 같기 때문이다. 이처럼 너희도 겉은 다른 사람들에게 의인으로 보이지만, 속은 위선과 불법으로 가득하다.”
요즘 많이 쓰는 용어 중에 ‘내로남불’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저는 처음에 이 단어가 제가 모르는 사자성어인가 싶었는데, 그게 아니라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말의 줄임말이라고 합니다. 이 말은 곧 남에게는 엄격한 잣대를 가지고 비판적인 태도를 보이지만 자신에게는 지나치게 관대하게 합리화하는 경향을 말합니다.
심리학에서 이런 내로남불의 성향이 나오는 이유가 자신의 행동을 평가할 때는 결과를 유발한 주변 상황에 따른 판단을 먼저 하지만 다른 사람의 행동을 평가할 때는 그 사람의 내재한 기질적 원인에 의한 판단을 먼저 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대개의 사람들은 자신이 운전을 한다고 했을 때 자신이 급브레이크를 밟게 되면 주변의 상황이 그럴 수밖에 없어서 밟은 것으로 판단을 내리지만 앞에 있는 차가 급브레이크를 밟게 되면 그 사람이 운전이 초보이거나 습관이 나빠서 그런 것으로 판단을 내린다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 모두는 하느님 앞에 죄인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회칠한 무덤처럼 아무리 치장한다고 하더라도 무덤은 그저 무덤일 뿐입니다. 회칠을 어느 누가 잘했는지 못했는지는 결코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지금 요구되는 것은 바로 참된 회개이고, 우리가 오로지 바랄 것이 있다면 그것은 하느님의 자비입니다.
“너희가 겉은 아름답게 보이지만 속은 죽은 이들의 뼈와 온갖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차 있는 회칠한 무덤 같기 때문이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외적으로 행한 분명한 잘못
곽승룡 비오 신부님
“너희는 예언자들을 살해한 자들의 자손임을 스스로 증언한다.”(마태23,31)
모든 범죄에는 잘못이 드러나게 마련이다. 곧 세상은 정의를 그렇게 원하는데, 안대를 한 눈으로도 정의가 보이기 때문이다. 비록 사람들은 범죄와 비행의 원리가 되는 뿌리를 찾아내 기록하는 작가로 존재할 수는 없지만, 정의가 그나마 이뤄지는 공동체와 사회에서는 최소한 잘못을 발견하는데서라도 만족해야 하는듯싶다.
왜냐하면 범죄나 비행은 늘 감추고 드러나지 않으려는 속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발견된 불의에 대한 한 가지의 벌이 다른 모든 것을 보상하듯 면죄부를 주는 관습 때문일 것이다.
이성적으로 판단하는 이런 방법이 전적으로 성경의 생각과 일치하지는 않아 보인다. 죄에 대해 말을 할 때 성경의 저자들은 마치 모든 백성들처럼 범죄에 대한 복수를 늘 말하면서도 또한 그 죄에 대해 이해하고 합의하며 적용하고 있는 것이 성경이 던지는 메시지다.
요한 복음 8장의 간음하다 잡힌 여인의 경우처럼, 만일 단지 한 사람이 범죄를 저질렀다면, 모든 백성이 함께 정화되어야 한다. 범죄는 백성들 안에 있다. 궁극적으로 누군가의 안에 있는 것이기에, 모두가 벌을 받아야 한다.
오늘날 개인주의적 정신으로는 이런 태도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보편적인 죄의 의미를 잃어버린 것이기 때문이다.
그와 대조적으로 도스토예프스키는 말한다. "모두가 모두에 대해서 책임이 있다"고 말하는 반면, ‘악마’는 ‘divide et impera 분할해서 통치하라’며 악용한다.
“너희 조상들이 시작한 짓을 마저 하여라”(매태23,32).
윤병훈 베드로 신부님
욕심부리고, 화내고, 어리석음을 범하는 것, 삼독이라 한다.
권좌에 앉으면 탐욕이 동하는가 보다. 엄청나게 가지고 있으면서도 더 가지려고 몸부림치는 탐욕의 독,
속이 깊숙히 썩어 환부를 도려내라고 상대가 말해주어도 자기는 아무런 부끄러움이 없다며 되례 성을 내는 속임의 독,
결정적으로 패가 망신하는 독이 있다. 욕심과 성을 내려놓지 않고 강도를 더하며 중독성 독기에 빠져 이성을 잃어버린채 불나방처럼 자신을 죽음의 구덩이에 몰아 넣는 독이다. 이보다 더 큰 독이 있겠는가?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겉은 아름답게 보이지만 속은 죽은 이들의 뼈와 온갖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차 있는 회칠한 무덤 같기 때문이다. 이처럼 너희도 겉은 다른 사람들에게 의인으로 보이지만, 속은 위선과 불법으로 가득하다.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예언자들의 무덤을 만들고 의인들의 묘를 꾸미면서 ‘우리가 조상들 시대에 살았더라면 예언자들을 죽이는 일에 가담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여 너희는 예언자들을 살해한 자들의 자손임을 스스로 증언한다.
그러니 너희 조상들이 시작한 짓을 마저 하여라”(마태23,27-32).
하루가 있다
하루가 시작된다. 아침 06:00 미사, 성무일도를 바친다. 아침식사를 갖는다. 이어서 묵주를 잡고 두시간 산행을 한다. 기도가 필요한 곳을 찾아 묵주의 기도를 30단 할 무렵 하산을 한다. 매일 일만보룰 걷는다. 잠시 텃밭에서 작물이 자라는 것을 관심있게 바라본다. 잡초가 있으면 깨끗이 뽑아준다. 작물이 고맙다고 인사를 하는듯 하다.
하루가 참 짧게 느껴진다. 오후에는 찾아가고 만나고 캄캄해져 집으로 돌아 온다. 저녁인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커피 갈아서 한잔 음미하며 책을 꺼내 들었다. 독서 삼매경에 빠져 시계를 본다. 어느덧 10시가 넘고 피곤해지면 잠을 잔다. 5분도 채 되지 않아 깊은 잠에 빠져든다. 아침에 일어나면 피곤기가 싹 가셔서 상쾌하다. 축복이고 은혜이다.
요즘 ‘놀이체험인성학교’ 양업 사회적협동조합’ 인가를 교육부장관으로부터 받고는 이사들과 함께 조합등록서류를 갖추고 법원등기를 하고 있다. 로고를 만들고, 내가 쓴 책, 출판기념회와 협동조합 개소식 준비를 하고, 자문위원단을 구성하고 전체 회의를 준비하고 있다. 교회내외 인력풀을 구성하고 있다. 내가 칠학년이면서 왕성하게 지냄은 능동적이고 적극적이고 피어나는 창의적 삶이 있기 때문이다. 내 인생 신앙과 철학 덕분에 뜻을 모은 분들과 함께 경영이 있고 내 안에 이웃을 위한 작은 바른 정치가 진행되고 있다. 늘 삶이 기쁘고 행복하다.
미리 알고 살면 안 됩니까?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님
열 감지 촬영이나 X-Ray 촬영 같은 투시력 눈들을 가졌다면 어떨까요.
고급 의류업계가 망할 것 같고요 병원 치료법도 달라졌을 테고 그렇죠.
사람 보는 눈이 달라지면 세상사는 모습도 달라질 공상하니 우스워요.
살아있는 한 속고속이는 세상생활에 길들며 재미 보겠다고 야단들이죠.
몸을 보는 눈보다 영과 정신을 보는 눈으로 변하는데 그 날이 죽는 날.
그런 눈 갖고 이제 영원히 살 거 확실한데 미리 알고 살면 안 됩니까?
우리보다 먼저 세상 떠난 이들이 세상 사람들께 잔소리하면 못살걸요?
죽은 자들이 주인 되고 산 자들이 노예 되는 거 싫으시면 믿으십시오.
겉은 그럴싸해 보이지만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을 책하시면서 “너희가 겉은 아름답게 보이지만 속은 죽은 이들의 뼈와 온갖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차 있는 회칠한 무덤 같기 때문이다. 이처럼 너희도 다른 사람들에게 의인으로 보이지만, 속은 위선과 불법으로 가득하다.”(27-28절)고 하신다.
의인들의 몸은 하느님의 성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은 언제나 하느님을 모시고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죄인들의 몸은 죽은 자들의 무덤이라고 한다. 영혼이 죽어있기 때문이다. 생명을 살리는 일을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면 그 몸은 이미 죽은 몸이나 다름없다. 무덤은 닫혀있는 한 겉모양은 아름다울 수 있지만 무덤을 열면 그 광경은 참혹하다. 위선자들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의 실체를 모르면 모두 칭찬받을 만한 이들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의 실체가 드러나면 그 모습은 역겹다.
위선은 선을 가장하는 것이다. 그러니 그것은 선이 아니다. 죽은 뼈들과 같다. 이것은 의로움을 가장한 모든 것은 죽은 의로움이며, 전혀 의로움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느님을 위하여 행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들 때문에 거짓으로 행하는 덕은 다 죽은 것이다. 이러한 것들은 자신이 아니면서도 그 사람과 똑같이 하는 배우들이 하는 일이다. 이런 사람들은 속은 “죽은 이들의 뼈”로 가득 찼지만 겉으로는 의로움을 보여줄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겉만 아름답게 보이는 회칠한 무덤’이 된다.
회칠한 무덤의 이야기는 우리의 삶에 있어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의 경고가 될 수 있다. 그렇게 보이는 행동이 아니라, 참 사랑이 담긴 진정한 주님의 자녀로서의 삶의 자세를 항상 가질 수 있도록 하라는 말씀일 것이다. 겉이 아무리 아름답다고 해도 속이 썩어있다면 그것은 죽음만이 있는 것이 아닌가? 주님께서는 인간이 살아있는 것을 원하시지 죽는 것을 원하시는 분이 아니다. 주님의 뜻을 올바로 실천하는 그래서 주님의 참된 영광이 될 수 있는 삶이 되도록 해야 한다.
예수님께서 바리사이들에게 불행 선언을 하신 것은 그들이 예언자들을 죽인 자들을 욕하는 척하면서 그들은 더 나쁜 짓을 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죽은 예언자들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살해를 정당화하는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은 책망하신다. 그러나 그들의 기질은 의도를 숨기려 해도, 아무리 가장을 해도 나타나게 되어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렇게 하여 너희는 예언자들을 살해한 자들의 자손임을 스스로 증언한다.”(31절)
그들은 결국 똑같이 사악한 짓, 아니 훨씬 더 사악한 짓을 벌이려고 한다. 그들은 “생명의 영도자를 죽였다.”(사도 3,15) 그리고 사도들까지도 죽였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러니 너희 조상들이 시작한 짓을 마저 하여라.”(32절)고 하신다. 우리는 회칠한 무덤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에 올바로 따를 수 있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나에게>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이 정도면 됐다 싶을 때
한 걸음 더 나아가는 거야
끝까지 쉼 없이 더디더라도
나 정도면 괜찮지 않아
아니지
넌 아직 아니야
다른 이들이 날 좋게 보잖아
아니지
네가 숨기는 것이 많은 거 아니니
난 그들과 달라
아니지
네가 그들보다 뭐가 나은데
나만큼만 하라고 해
아니지
너만큼 안하는 사람 어디 있어
나도 사람인데 다 그런 거지
아니지
넌 사람이기에 달라야만 하는 거야
이 정도면 됐다 싶을 때
더 깨끗하게 더 아름답게 더 의롭게
끝까지 쉼 없이 더디더라도
하느님은 속일 수 없습니다.
이종훈 신부님
사람과 세상을 속일 수 있어도 하느님은 속일 수 없다. 그분 앞에서는 모두가 알몸이다. 지옥에서 본당신부님과 주교님도 만났다는 우스갯말이 있다. 실제로 그럴 지도 모른다. 세상은 겉모양만 보지만 하느님은 그 속을 훤히 다 보고 계시기 때문이다.
엄격함과 철저한 금욕생활이 거룩함으로 이해되곤 한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그런 거룩함과는 거리가 멀다. 말장난이지만 그것은 거룩함이 아니라 거북함이다. 그런 사람에게 가까이 가고 싶지 않을 것이다. 예수님 주위에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들 중에는 세리와 창녀들도 있었고 어떤 세리는 예수님의 직제자로 부르심을 받기도 했다. 오늘도 하느님은 우리를 부르신다. 하느님은 생각보다 우리에게 훨씬 더 가까이에 계신다. 아니 내 안에서 사신다.
하느님의 거룩함은 사람들을 편안하고 평화롭게 그리고 자유롭게 한다. 그분의 거룩함으로 우리 죄로 죽을 수밖에 없었던 우리 운명이 바뀌어 살고 또 영원히 살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을 알고 믿는다면 하느님을 어찌 좋아하고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나.
그분 앞에 우리는 알몸이다. 아무 것도 감추거나 숨길 수 없다. 묵비권도 소용이 없다. 그런데도 그것이 두려움이 아닌 것은 그분은 바로 그런 우리를 사랑하시고 그런 우리를 위해 목숨을 내어놓으셨기 때문이다. 그분은 내가 본래 그런 줄 잘 아신다. 그것 때문에 괴로워하는 걸 다 보신다, 옆에 앉으셔서. 어깨를 늘어뜨리고 힘없이 앉아 있는 나에게 주님이 무엇을 어떻게 하시겠나.
주님, 사람들에게 받는 칭송과 칭찬은 제가 주님과 멀어지게 합니다. 그렇다고 비난과 고통을 일부러 찾아다니지 않지만 칭찬과 칭송은 피해 다닙니다. 제 삶이 회칠한 무덤이 되어버리게 놓아둘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혀와 귀에만 달콤한 것보다는 마음 속 깊은 곳을 든든하게 해주는 주님의 말씀을 잘 알아듣게 도와주소서. 아멘.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에 이르기까지 지난 며칠 동안 우리는 복음에서 목자 노릇을 제대로 하지 않는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향한 예수님의 서슬 퍼런 꾸짖음을 들었고, 독서에서는 주님 닮은 착한 목자의 모습을 사도들 안에서 보았습니다. 미사 독서 안에서 빛과 어둠이, 사랑과 악이 극명한 대비를 보였다고 할 수 있지요.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에 대한 예수님의 질타는, 내면과 외면의 통합, 즉 보이는 만큼 내면도 가꾸고 살라는 것이었지요. 겉으로는 존경받을 만하게 보이지만 실상 내면은 위선과 불법, 탐욕으로 가득찬 그들의 실체를 꿰뚫어 보시기에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너희 조상들이 시작한 짓을 마저 하여라"(마태 23,32).
예언자의 운명은 "예루살렘에서 죽을 수밖에 없는"(루카 13,33 참조) 결말을 안고 갑니다. 그 어두운 힘이 시시각각 예수님 앞으로 다가오는 이 시점에서 하던 짓을 완성하라니, 이 말씀이 매우 의미심장하고 또 비장하게 들립니다.
이스라엘 역사 안에서 하느님의 진리를 전하다가 살해당한 무수한 예언자들은 권력과 진리가 결코 손잡을 수 없다는 증거입니다. 하느님의 목소리가 되어 말씀을 전하는 예언자들과 위선자는 섞일 수 없는, 철저히 다른 부류지요. 게다가 대개 위선자 쪽이 권력을 쥔 경우가 대부분이니 당연히 예언자는 조롱 당하고 박해받다가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느님의 뜻과 위선자의 흑심은 조화를 이룰 수 없기에 그렇습니다.
"마저 하여라"(마태 23,32).
우리 주님께서 친히 악에게, 어둠의 세력에게 너희의 악을 완성하라고 허락하십니다. 이 간결한 말씀 안에는 예수님의 죽음과, 그 뒤를 따라 "어린양의 피로 자기 옷을 빨아 희게 할"(묵시 7,14 참조) 무수한 순교자들의 응답 "예!"(Fiat!)가 들어 있습니다.
종국으로 치닫는 악의 힘 못지 않게 사랑도 함께 절정을 향해 달리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순교자들의 희생이 악(어둠)의 승리로 끝나지 않는 이유입니다. 그 죽음, 희생의 동기와 목적이 사랑이고, 악(어둠)만이 아니라 사랑도 완성될 것이니 결국 사랑은 모든 것을 이겨낼 것입
제1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테살로니카 신자들에게 자기들이 쏟아부은 사랑과 정성을 이야기하면서, 자기들이 전하는 하느님 말씀을 인간의 말이 아닌 하느님 말씀으로 받아들여준 것에 대해 하느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 말씀이 신자 여러분 안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1테살 2,13).
하느님의 말씀을 인간의 말이 아닌 하느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였다니, 하느님 백성이면서 하느님의 뜻을 전하는 예언자들을 나타나는 족족 죽인 이스라엘은 영 면이 서지 않게 되었네요. 이방인이 자기 신을 버리고 확립한 신앙과 사랑이 놀랍습니다. 그 결단과 믿음에 대한 보상이 곧 그들 안에 살아 움직이고 활동하시는 말씀이십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말씀을 지키면 그 사람 안에서 참으로 하느님의 사랑이 완성되리라"(복음 환호송). 말씀을 내면에 간직하고 지키는 이에게서 하느님의 사랑이 완성된다고 합니다. 결국 예수님께서 허용하신 악의 완성은 사랑이 완성되는 순간 그 힘을 잃을 것입니다.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으니까요.
오늘 우리에게 "마저 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선인지 악인지, 빛인지 어둠인지, 사랑인지 미움인지, 자기가 그동안 무엇을 붙잡고 왔는지에 달려 있을 겁니다. 그리고 그게 뭔지는 누구보다 자신이 잘 알겠지요. 오늘 축일을 지내는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선과 악의 문제를 깊이 탐구하고 하느님의 빛으로 풀어낸 분입니다. 선함이 결여되고 부재하는 상태가 악이고 또 빛이 결핍된 상태가 어둠이라면, 하느님 빛의 자녀이며 그분 모상에 따라 선성을 타고난 우리는 주님께 힘 입어 악(어둠)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마저 하여라!" 하시는 주님 목소리에 힘을 내어 자신의 가정과 일터와 공동체와 사회와 국가와 세상과 온 우주에 사랑, 평화, 기쁨을 완성하는 하루가 되길 바랍니다.
성 아우구스티노,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아멘.
<그 복에 덕을 보는>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불행하여라, 너희가 겉은 다른 사람들에게 의인으로 보이지만, 속은 위선과 불법으로 가득하다.
재미있는 우리말이 있습니다.
‘있어 보인다.’는 말입니다.
저희 정동 수도원 근처에 사는 분이 있는데 근처 식당 몇 개를 가지고 계신 분입니다.
그런데 제가 그분을 볼 때마다 느끼는 것은 그리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는데도 늘 없어 보이고 불쌍타는 느낌입니다.
그렇게 없어 보이는 것보다 있어 보이는 것은 좋은 것 같고, 사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있어 보이려고 합니다.
그런데 뭐가 있어 보인다는 말입니까?
돈이 있어 보인다는 겁니까, 덕이 있어 보인다는 겁니까?
돈이 있어 보이는 것이 낫습니까, 덕이 있어 보이는 것이 낫습니까?
이렇게 질문을 하는 것은 사실 바보 같은 질문이지요.
덕은 없고 돈만 있어 보이는 사람일지라도 자기는 돈이 있어 보이기보다는 덕이 있어 보이고 싶다 할 것입니다.
그런데 덕이 있어 보이는 것이 쉽지 않으니 돈이라도 있어 보이려는 것이고, 그래서 옷으로 치장을 하고 명품으로 자신을 가꾸곤 하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덕과 복 중에는 어떤 것이 있어 보이는 것이 나을까요?
둘 다 있고 둘 다 있어 보이면 좋겠지만 제게는 덕이 많은 것보다는 복이 많은 것이 낫겠습니다.
하느님 없이 인간적으로만 보면 덕이 복을 짓는 것이니 덕이 많은 것이 낫지만 신앙인의 관점에서 보면 하느님께 복을 많이 받는 사람이 낫겠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의 주님은 겉이 아름답게 보이고 의인으로 보이는 것을 불행타 하시며 보이는 것 자체를 문제시하시는 것 같은데 맞습니까?
물론 주님께서 그러실 리 없지요.
정말 있어서 있어 보이는 것은 문제라 하시지 않고 다만 없으면서 있어 보이려고 하는 것을 문제시하시는 거고, 속은 비어 있는데 겉은 있어 보이려는 것을 문세시시하시는 거지요.
이것은 사상누각 곧 모래 위의 집과 같아서 금세 무너지고 금세 들통이 나는 것입니다.
요즘 똑똑하게 볼 수 있듯이 정치가나 연예인들이 겉은 의로운 것 같고 아름다운 것 같지만 그것은 보이는 것이고 실은 그렇지 않기에 어떤 사람은 들통이 나서 불행하게 되고 어떤 사람은 그런 자신을 보고는 스스로 곧 자살로 삶을 마감합니다.
이렇듯 있는 것이 보이는 것과 있어 보이는 것은 차이가 있습니다.
있어 보이는 것이 아니라 참으로 그것이 내 안에 있어야 하고, 돈이 아니라 덕이, 덕이 아니라 복이, 복이 아니라 하느님이 내 안에 계시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계시는 복이 충만하여 그 복에 덕을 보고 그래서 덕이 저절로 드러나게 해야 합니다.
인복이 아니라 신복이 많고 하느님 복에 덕을 보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 없는 의를 보이려고 애쓰는 불상한 위선자가 되지 말아야 함을 주님께도 배우고 요즘 세상사에서도 보고 배우는 우리들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산책하면서 동네 구경하는 재미가 있습니다. 어제는 서점을 보았습니다. 가격이 다소 비싸지만 읽고 싶은 책이 많았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는 밭에 묻혀 있는 보물을 발견하는 것 같다고 하셨습니다. 서점은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만난 것 같았습니다. 내면의 울림을 주는 류시화 님의 책을 샀습니다. 며칠은 책 읽는 재미에 빠질 것 같습니다.
책 제목이 ‘좋은지 나쁜지 누가 아는가? 새는 날면서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입니다. 함부로 판단하지 않으면 좋습니다. 결정했으면 후회하지 말고 앞으로 가면 좋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누가 나를 여러분의 선생으로 모셨습니까? 선과 악을 판단하는 분은 선하신 하느님이십니다.’ 우리는 너무나 쉽게 판단하고, 비난하고, 자신의 잣대로 평가합니다. 조금만 기다리면, 조금만 옆에서 바라보면 그럴만한 사정과 이유가 있음을 알게 됩니다. 제자들에게도 말씀하셨습니다. ‘쟁기를 들고 뒤를 돌아보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나를 따르면 됩니다.’ 아쉬움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결정했으면 앞으로 가는 겁니다.
오늘 축일로 지내는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은 많은 책을 남겨 주었습니다. ‘고백록, 신국론, 삼위일체론’은 초기 가톨릭교회의 기둥이 되었습니다. 성인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시간에 대해서 알고 있는데 시간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대답하기 어렵습니다.” 저도 그렇습니다. 분명 시간을 인식하고 있습니다. 핸드폰에 일정표가 있고, 약속이 잡혀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정확하게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오늘 성서 말씀은 두 가지 시간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욕망의 시간, 위선의 시간, 탐욕의 시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시간 속에 사는 사람을 책망하십니다. 겉은 화려하지만 내면은 텅텅 비어 있는 사람입니다. 불평과 불만의 시간을 사는 사람입니다. 남을 평가하고, 남을 판단하고, 남을 비난하는 시간을 사는 사람입니다.
다른 하나는 의미와 가치의 시간입니다. 오늘 제1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그런 시간을 이야기합니다. “여러분은 우리의 수고와 고생을 잘 기억하고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여러분 가운데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밤낮으로 일하면서, 하느님의 복음을 여러분에게 선포하였습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우리가 전한 하느님의 말씀이 여러분 안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예전에 읽은 글입니다. ‘나무는 독립적으로 서 있어도 하나의 숲을 이루는데 왜 우리는 하나의 숲을 이루지 못하나!’ 우리 안에 있는 시기, 갈등, 질투, 욕망, 원망 때문에 그런 것 같습니다. 신앙인들은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하나의 숲을 이루어야 합니다. 희망의 시간, 믿음의 시간, 사랑의 시간을 살아간다면 우리는 모두 신앙의 숲을 만들 수 있습니다.
오, 영원한 진리여, 참스런 사랑이여, 사랑스런 영원이여
성 아우구스티노 주교의 (고백록)에서 (Lib. 7,10. 18; 10,27: CSEL 33,157-163. 255)
거기로부터 내 자신으로 돌아오라는 타이르심에 당신의 이끄심 따라 나의 가장 안으로 들어왔삽고, 그리 될 수 있삽기는 당신이 나를 도와주신 때문이었습니다. 들어오고 나서 나는 무엇인지 모를 눈으로 영혼의 정신이 미치지 못하는 상주 불변의 빛을 보았습니다.
예사롭지 않고, 육안에 비쳐지지도 않는 이 빛은, 질은 같아도 크기가 더하여서 그만치 밝기를 더하고 모든 것을 비추는 따위의 그러한 빛이 아니었습니다. 그런 따위가 아닌 색다르고, 딴 모든 것과 아주 다른 빛이었습니다. 그것은 물 위의 기름이나 땅 위의 하늘같이 내 영혼 위에 있는 것이 아니오나 나를 만들었기에 내 위이고, 나는 그의 지음을 받았기에 그 아래였습니다. 무릇 진리를 아는 이 그를 알고, 그를 아는 이 영혼을 알며, 그를 아는 것은 곧 사랑이로소이다.
오, 영원한 진리여, 참스런 사랑이여, 사랑스런 영원이여, 그대 내 하느님이시니 그대를 향해 밤낮으로 한숨짓노라. 내 처음 그대를 알았을 때 그대 나를 맞아들여, 내가 볼 것이 무엇인지, 그러나 나는 아직 볼 자격이 없는 것을 보여 주었나니 …… 아찔하도록 쇠약한 내 안광에 세찬 빛을 쏘아주었기 난 사랑과 두려움에 떨고 있었노라. 마치도 하늘로부터 “나는 장성한 자의 음식이로라. 너는 커라. 이에 나를 맛보리라. 내 육체의 음식처럼 나를 네게 동화시키지 말라. 오히려 너를 내게 동화시킬 것이니라.” 하는 그대의 목소리를 듣는 듯 나는 얼마나 그대와는 멀리 등차의 세계에 있는지를 발견했노라.
당신을 누리기에 알맞은 힘을 기르고자 방법을 모색하여 보았으나 “하느님과 사람 사이의 중재자, 만물 위에 계시어 세세에 찬미를 받으실 하느님이신 인간 예수 그리스도”를 받들어 모시기까지는 얻을 수 없었나이다. 스스로를 가리켜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로라.” 부르신 그분께서 - 말씀이 살이 되심으로써 - (나는 아직 허약하며 먹지 못할 몸이었으나) 음식을 살에 섞으셨으니 갓난이 우리에게 당신 슬기의 젖을 먹이시기 위함이었고, 실상 그 슬기로써 당신은 이미 만물을 창조하신 것이었나이다.
늦게야 님을 사랑했습니다. 이렇듯 오랜, 이렇듯 새로운 아름다움이시여, 늦게야 당신을 사랑했삽나이다. 내 안에 님이 계시거늘 나는 밖에서, 나는 밖에서 님을 찾아 당신의 아리따운 피조물 속으로 더러운 몸을 쑤셔 넣었사오니! 님은 나와 같이 계시건만 나는 님과 같이 아니 있었나이다. 당신 안에 있잖으면 존재조차 없을 것들이 이 몸을 붙들고 님에게서 멀리했나이다. 부르시고 지르시는 소리로 절벽이던 내 귀를 트이시고, 비추시고 밝히시사 눈 멀음을 쫓으시니, 향 내음 풍기실 제 나는 맡고 님 그리며, 님 한 번 맛본 뒤로 기갈 더욱 느끼옵고, 님이 한 번 만지시매 위 없는 기쁨에 마음이 살라지나이다.
심홍보 베드로 신부님
아우구스티노 성인이 젊을 때 찾아 헤매었던 진리와 확신이라는 주제를 되새겨 봅니다. 뭇 사람들은 그를 보고 방황이라 했고, 그는 세례를 받고 주님의 교회에 귀의했을 때 회심이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그는 천주교회에서, 그가 찾아다니던 수많은 진리들을 포기할 만큼의 무엇을 발견하였을까?
그는 왜 회심이라고 하면서까지 자신의 선택을 확신할 수 있었을까?
오늘 예수님께서는 복음에서 말씀하십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겉은 아름답게 보이지만 속은 죽은 이들의 뼈와 온갖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차 있는 회칠한 무덤 같기 때문이다. 이처럼 너희도 겉은 다른 사람들에게 의인으로 보이지만, 속은 위선과 불법으로 가득하다.”(마태 23,27-28)
오늘 우리가 살아가면서 접하고 있는 여러 가지 사실들과 진리들 사이에서, 참 진리이신 주 하느님을 모시고 있다고 말할 정도의 흔들리지 않는 깊은 신앙을 간직하고 있는지? 물질적 풍요와 현세적 안락이란 유혹에 빠져 가난한 이들의 처지와 호소에 둔감해 있지는 않은지? 참 진리이자 구세주이신 주 예수님을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일상의 삶에 이르기까지 믿고 따르며 증거하고 있는지?
진리의 연인戀人, -하느님만을 그리워하는, 하느님만을 찾는 사람-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어제 성녀 모니카의 기념일에 이어 오늘은 그 아드님 성 아우구스티노 주교 학자 기념일입니다. 성인들의 축일을 맞을 때마다 마음이 설렙니다. 하느님을 찾는 열정을 불러 일으킵니다. 우리 희망의 표징, 회개의 표징, 구원의 표징이자 참 좋은 하느님의 선물들인 성인들입니다. 아침성무일도 찬미가도 아름답고 은혜로와 몇 대목 인용합니다.
-"하늘에 빛나시는 위대한 사제/찬란한 학자의 별 눈부시도다/광채를 뿜으시며 신앙의 빛을/순수히 온누리에 밝혀 주시네.
당신이 이승에서 관상하셨고/이제는 하늘에서 밝은 빛으로/그얼굴 마주보고 즐기시옵는/복되신 성삼위께 영광있으라."-
성인들의 축일을 맞을 때마다 늘 우선 확인해 보는 것이 생몰연대입니다. 너무 자명한 사실이지만 늘 새롭게 와닿는 탄생과 죽음입니다. 성인들도 반드시 언젠가는 죽는 다는 것입니다. 언젠가의 틀림없는 죽음을 앞두고 ‘얼마나’가 아닌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묻게 됩니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만76세 선종하기까지 참 치열한 삶을 사셨습니다. 삶이든 여성이든 학문이든 진리든 성인은 참 치열하게 사랑하였습니다. 성인의 지칠줄 모르는 탐구의 저력은 ‘진리에 대한 사랑’이었습니다. 바꿔 말하면, 하느님께 대한 사랑,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 교회에 대한 사랑이었습니다. 오늘 본기도 후반부는 그대로 성인의 삶을 요약합니다.
“저희도 성인의 정신을 따라 참된 지혜의 원천이신 주님을 그리워하고, 영원한 사랑의 근원이신 주님을 찾게 하소서.”
성인은 물로 우리 모두가 하느님을 그리워하는, 하느님만을 찾는, ‘그리움의 구도자들’입니다. 사랑 빼놓으면 성립이 안되는 성인들의 삶입니다. 성인의 생애를 한마디로 간추린다면 ‘진리를 향한 구원의 불꽃’으로 정의할 수 있고, 하여 성인을 한마디로 정의한다면 ‘진리의 연인’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진리의 연인’, 참 아름다운 말마디입니다. ‘진리의 연인’으로 살고 싶은 것은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된 우리 모두의 참된 소망이기도 합니다.
성인에 대한 일화와 주옥같은 잠언도 무궁무진 합니다. 사막의 수도자 ‘안토니오의 생애’에 큰 충격을 받았고 어느날 갑작스럽게 ‘Tolle lege’(집어 읽어라) 라는 끊임없이 들려오는 소리를 듣고 펴든 성서 구절이 바오로 사도의 로마서 13장 13-14절 말씀이었습니다.
“대낮에 행동하듯이 품위 있게 살아갑시다. 흥청대는 술잔치와 만취, 음탕과 방탕, 다툼과 시기 속에 살지 맙시다. 그 대신에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입으십시오. 그리고 욕망을 채우려고 육신을 돌보는 일을 하지 마십시오.”
하여 회심후 밀라노의 주교 성 암브로시오에게 387년 만33세 부활대축일에 세례를 받은 후 위 말씀 그대로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옷입고 참 치열하게 살았던 성인입니다. 고백록 서두의 고백 역시 감동적입니다. 아침 성무일도시 즈가르야의 노래 후렴도 여기에 근거합니다.
“주님, 당신께서는 위대하시고 크게 찬양받으실 분이십니다. 당신의 권능은 크고 당신의 지혜에는 한량이 없습니다.---그래도 인간, 당신 창조계의 작은 조각 하나가 당신을 찬미하고 싶어 합니다. 당신을 찬미하며 즐기라고 일깨우시는 이는 당신이시니, 당신을 향해서 저희를 만들어 놓으셨기에 당신 안에서 쉬기 까지는 저희 마음이 평온치 않나이다.”
이어 철학적 유언과도 같은 다음 고백도 감동적입니다. 저녁 성무일도시 성모의 노래 후렴은 이 말씀에 근거합니다.
“늦게야 당신을 사랑했습니다. 그토록 오래고 그토록 새로운 아름다움이시여, 늦게야 당신을 사랑했습니다.”
교회 역사상 바오로 사도 이후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성인입니다. 개신교 형제들이 가장 좋아하는 성인이 바로 바오로 사도에 이어 성 아우구스티노, 그리고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입니다. 사도 바오로의 열정에 필적하는 ‘진리의 연인’아우구스티노스의 지칠줄 모르는 열정입니다.
바로 오늘 제1독서의 주인공 바오로 사도의 삶은 얼마나 치열한지요. 이 또한 하느님께 대한, 그리스도께 대한 갈림없는 사랑의 표현들입니다. 신자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온갖 수고와 고생을 감수하며 밤낮으로 일하면서 하느님의 복음을 선포한 바오로 사도입니다.
사도는 참으로 경건하고 의롭게 흠 잡힐 데 없이 처신한 것에 대해서는 신자들이, 또 하느님이 증인이시라고 확신에 넘처 말합니다. 아버지가 자녀들을 대하듯 신자들 하나하나를 대하면서 하느님의 나라로 안내한 사랑의 사도 바오로입니다.
신자들이 자신이 선포한 말을 사람의 말로 받아들이지 않고 사실 그대로 하느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인 것에 대해 하느님께 끊임없이 감사하는 바오로 사도의 순수한 사랑도 감동적입니다. 정말 강론도 사람의 말이 아닌 하느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일 때 놀라운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 말씀은 살아서 우리 안에서 활동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앞서 소개한 성 아우구스티노와 제1독서의 바오로 사도와 테살로니카 신자들과 비교했을 때 너무나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복음의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입니다. 엊그제에 이어 계속되는 불행선언이 무려 도합 7회입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겉은 다른 사람들에게 의인으로 보이지만, 속은 위선과 불법으로 가득하다.”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예언자들의 무덤을 만들고 의인들의 묘를 꾸미면서, 악행을 반복하는 이들! 너희 조상들이 시작한 짓을 마져 하여라.”
위선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누구입니까? 표리부동의 내적분열의 사람들입니다. 하느님을 모르고 자신을 모르는 무지와 무사유의 영혼없는, 생각없는 사람들입니다. 바로 무지와 무사유에 기생하는 악입니다. 정말 치열하게 하느님을 찾는 노력에 항구할 때 주님과의 내적일치요, 주님을 닮아 진실과 겸손, 지혜와 자비의 삶입니다.
절대로 이런 깨어 있는 ‘진리의 연인들’에게 악은 기생할 수 없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당신과의 내적일치로 주님을 닮은 진실과 겸손, 지혜와 자비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어제에 이은 화답송 시편 139장이 참 은혜롭습니다.
“주님, 당신 숨결 피해 어디로 가리이까? 당신 얼굴 피해 어디로 달아나리이까? 하늘로 올라가도 거기 당신이 계시고. 저승에 누워도 거기 또한 계시나이다. 제가 새벽놀의 날개 달아, 바다 끝에 자리 잡아도, 거기서도 당신 손이 저를 이끄시고, 당신 오른 손이 저를 붙들어 주시나이다.”(시편139,7-10).
늘 언제 어디서나 우리와 함께 계신 주님이십니다. 아멘.
옛 습관에서 벗어나자 <마태 23, 27-32>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인생을 오래 산 선배에게 “살아온 세상이 어떠합니까?” 물어서 대답을 구하지 말라는 이유는 세월은 흘러가며 변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일어나는 일에 마음을 쓰며 알고 깨우쳐야 합니다. 그 시대를 바로 알려면 그 시대를 사는 젊은이들에게 물어서 알아야 합니다. 옛 예언자 시대가 지나 새로운 예언자이신 주님은 구시대적 현상과 의미를 바로 아시므로 전하시는 말을 귀담아들어야 합니다. 듣지 않으면 모든 것을 옛 습관대로 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새로운 가르침을 알려고 하지 않고 옛것만 고집하는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들에게 “조상들이 시작한 것을 마저 하라”고 하시면서 그들의 잘못을 나무라십니다.
우리는 옛 습관이나 버릇으로 자기 생활을 이끌어 갑니다. “세 살 적 버릇이 여든 살까지 간다.” 그러나 세상은 아침저녁이 다르게 변합니다. 주님은 이 세상을 변화시키러 오시고 새 술을 주시려고 오셨습니다. 요사이 정치적 현상을 볼 때 아직도 해방 전후의 사정에 매여 있고 공산주의, 민주주의의 현상을 벗어나지 못한 이론과 사상에 매여 있으며 조선 시대 습성에서 벗어나지 못한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자유민주주의 시대입니다. 정치하는 사람, 교회 지도자들의 사고방식은 아직도 전근대적 사고에 매여서 살고 있습니다. 옛것에 대한 고집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상하에 대한 구별이 지나치게 심합니다. 계급적 차별, 갑질이 아직도 실생활에 이용되고 있습니다. 관청이나 부자나 남보다 조금 나으면 아랫사람을 종처럼 생각하고, “내가 권력자다.”하고 억누르고 자기 마음대로 하려고 합니다. 이런 생각이 각자 안에 현존하고 있으며 이로 인해 사회적 불균형이 생깁니다.
많은 상담자가 “신앙을 바로 살고자 하니 교회 안에 갑질을 극복하기가 힘듭니다.” 교회에서는 바티칸 2차 공의회 후 직책상의 차별은 있어도 신분상의 차별은 없습니다. 신자는 사제의 종이 아닙니다. 평등하고, 본당 운영에 참여할 의무가 있으며, 권리이기도 합니다.
민주주의 사회의 나라는 대통령이나 권력자에 의해 나라가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국민에 의해 국민이 운영하는 나라이고 국민이 주인입니다. 한 사람에게 권력이나 재력이나 명예가 집중되는 시대가 아닙니다. 높이 오르려는 사람은 가장 낮은 자가 되고, 섬김을 받는 것이 아니라 섬기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 자리에 오르면 더 가난한 마음이 요구됩니다.
아직도 구한말 시대를 벗어나지 못하였고 70년 전 공산주의와 민주주의 갈등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자유, 평화 통일도 못 하고 공동체의 일치도 불가능합니다. 아직도 인간의 약점을 잔뜩 짊어지고 있으면서 자신은 개혁자요, 인류 발전의 공로자라고 합니다. 곡식이 자라나는 원리가 밑거름 없이는 성장하지 못하는 것처럼 각자는 자기가 있는 자리에서 시대의 변화에 따라 평등, 자유, 일치의 원리를 따라 살아가야만 합니다. 힘으로 남을 억누르고 자기만족을 위해서만 살려는 사람은 어둠에서 벗어나고 밝은 세상으로 나와야 합니다.
자본주의 산하에서 내가 올라서고, 내가 너보다 나은 자리에 있어야 하는 경쟁에서 배려, 양보, 협력과 함께 진실과 사랑의 삶을 살도록 기도합니다.
교회의 진정한 아름다움
한재호 루카 신부님
“너희가 겉은 아름답게 보이지만 속은 죽은 이들의 뼈와 온갖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차 있는 회칠한 무덤 같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는 예전과 달리 종교계의 권위가 많이 실추되었습니다. 아름답고 화려한 성당, 예배당, 불당은 늘어났지만 그러한 겉모습에 사람들은 더 이상 큰 매력을 느끼지 않는 것 같습니다.
오히려 최근 각 종교 안에서 발생했던 각종 비리, 폭력 등의 범죄가 고발되고 종교인들의 윤리적 문제들이 드러나 언론에 보도되면서 적잖은 회의와 실망감을 느끼고 있는 것입니다.
종교의 본질적인 모습은 겉으로 드러나는 아름다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절대자에 대한 깊은 경외심과 그에 따른 합당한 삶의 태도입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 교종은 『복음의 기쁨』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자기 안위만을 신경 쓰고 폐쇄적이며 건강하지 못한 교회보다는 거리로 나와 다치고 상처받고 더럽혀진 교회를 저는 더 좋아합니다.”
그렇습니다. 건강하고 아름다운 교회의 모습은 상처받은 이와 함께 상처를 받고, 더럽혀진 이들의 죄를 속죄하는 자발적 희생에 달려 있습니다. 성직자, 수도자만이 교회는 아닙니다. 우리 각자가 교회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교회의 진정한 아름다움을 가꾸어가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러할 때 교회는 ‘회칠한 무덤’이 아니라, ‘성령의 거룩한 궁전’이 될 것입니다.
* 세상을 향해 열려 있는 교회가 되기 위해 우리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은 무엇인가요? 일상 안에서 할 수 있는 작은 일들부터 실천에 옮깁시다.
"우리가 전하는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 때, 여러분이 그것을 사람의 말로 받아들이지 않고 사실 그대로 하느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그 말씀이 신자 여러분 안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1테살 2, 13)
("Because, when you had accepted from us the Word of the hearing of God, you accepted it not as the word of men, but (as it truly is) as the Word of God, who is working in you who have believed.")
김웅태 신부님
+찬미예수님!
오늘도 주님의 축복 함께 하십시오.
오늘은 성 아우구스티노(Augustinus, 354~430) 주교 학자 기념일입니다. 바로 전날 그 어머니신 모니카 성녀의 기념일을 지냈고, 오늘은 그 아들이신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기념일을 지내게 됩니다.
참으로 이 두 분은 우리 교회 역사상 어머니와 아들이 성인성녀 품에 오르신 모범을 보여주신 분들이시지요. 아들이 올바른 길로 가도록 어머니이신 모니카 성녀의 끊임없는 기도와 권고, 수고와 눈물로 아우구스티노를 회개하게 하여 주님의 큰 일꾼으로 만들었습니다.
아우구스티노가 젊은 시절 방탕한 생활을 한 것으로 너무나 유명하고 또 이원론적인 근원을 갖고 있는 마니교(Manichaeism)에 심취해서 어머니가 믿는 하느님과는 다른 신관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어머니 모니카는 그리스도교의 하느님을 받아들이도록 끊임없는 기도와 수고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결국 아들 아우구스티노는 모니카 성녀가 돌아가시기 일년 전 쯤(386년)에 회개하고 밀라노의 주교 암브로시오(Ambrotius)로부터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 이후 아우구스티노는 사제가 되기로 결심을 했고, 마침내 391년 사제가 된 다음, 또 5년 후엔 로마제국 내 북아프리카의 주요 도시인 히포의 주교로 봉직을 하면서, 그는 그 당시 교회의 신자들 분열시키고 있었던 도나티즘(Donatism) 분리주의자들의 그릇됨을 반박하고, 그들을 가톨릭교회로 돌아오게 하는데, 온 정성을 다 바쳤습니다.
그리고 원죄와 유아세례의 필요성을 부인하고, 인간이 선행을 하는데 하느님의 은총보다는 인간의 내적인 힘이 더 유용하다고 주장했던 펠리기우스(Pelagius, ?~418)주의 이단과 싸우면서, 교회의 정통 교리를 확립하셨습니다.
아우구스티노는 주교로 있으면서도 과거 젊은 시절 방탕한 생활을 한 것을 크게 뉘우치면서 자신이 얼마나 죄악속에 빠져 있었는 지를 솔직하게 <고백록 Confessiones, 397~400년 경> 이라는 책을 통해서 눈물로 마음 깊이 참회했습니다.
그 이후 북아프리카 지역에 만연 돼 있었던 교회 내의 여러 이단들을 거슬러, 교회를 올바로 이끌어주신 교회학자입니다. 그는 또 <신국론 De Civitate Dei, The City of God, 5세기 경 저술>이라고 하는 책을 통해서, 이 세상에는 하느님이 계시며, 하느님의 은총받은 사람들에 의해 건설되어가는 하느님의 나라를 희망하며, 교회의 미래를 믿음으로 이끌어주었습니다.
오늘 제1독서(1테살 2, 13)에서 사도 바오로는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
"우리는 또한 끊임없이 하느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가 전하는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 때, 여러분이 그것을 사람의 말로 받아들이지 않고 사실 그대로 하느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그 말씀이 신자 여러분 안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1테살 2, 13)
아우구스티노는 사도 바오로의 신학적 영향을 많이 받은 분입니다. 특별히 인간이 선을 행하는 데 있어서, 인간의 의지와 노력으로만 충분하다고 여기고, 그럼으로써 하느님의 은 총이 필요없다고 여겼던 펠라기우스(Pelagius)주의를 배격하고, 인간은 그 선행과 구원에 하느님의 은총이 꼭 필요하며, 하느님께 대한 믿음은 선행을 하도록 이끌어주신다고 하는 신학적 견해를 가졌습니다.
그리고 그 당시 박해로 인해서 배 교했던 사람들이, 다시 교회로 들어오고자 할 때, 그 배교자들을 받아들이지 말아야한다고 주장했던 도나투수주의자들(Donatists)의 입장과는 달리, 배교자들이라 하더라도 참회하고 믿음을 고백하는 신자들을 교회 구성원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입장을 취했던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인간의 나약성과 하느님 은총의 필요성을 보여주는 신학적 입장이라고 보겠습니다.
이런 면에서 사도 바오로가 오늘 제1독서에서 말하듯이, 선포된 하느님의 말씀은 비록 사제나 주교를 통해서, 그리고 신자들을 통해서 말씀이 선포되지만, 그 말씀은 하느님 말씀이기 때문에, 그 자체로 힘이 있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활동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선포된 말씀은 결국 하느님의 뜻대로 움직이게 하는 그런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우구스티노는 바로 이러한 것을 굳게 믿고 신자들에게 하느님의 은총을 전했던 분이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받은 하느님의 말씀도 그것은 이미 하느님의 말씀으로써, 우리 각자 마음 안에서 우리를 하느님의 뜻대로 움직이고 있는 은총이 됨을 믿습니다. 아멘.
[생각해 봅시다]
• 나는 선행을 하는데 있어서, 내 의지와 뜻으로 그것을 행한다고 생각합니까?
• 나는 선행을 하는데 있어서, 하느님의 은총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까?
• 이에 대한 나의 느낌은 무엇입니까?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최민석 신부님
삶이 한 번뿐이듯 오직 한 번뿐인 내 인생의 여름이 가고 있다. 그 넓은 세상에서 내가 만난 여름이 지나가고 있다. 푸른 하늘 뭉게구름이 모양을 바꾸어 흐르듯 그렇게 흐르고 있다. 어느 덧 먹구름 되어 하늘이 어둡다. 내 가슴속 하늘도 마찬가지다. 나쁜 생각 하나를 하면 가슴속 하늘이 깜깜해진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기분이 좋고 상쾌한 것도 내 마음이요 왠지 모르게 어둡고 우울한 것도 내 마음이다. 비가 오는구나 하고 아는 것도 내 마음이요 나무인지 꽃인지 구별하는 것도 내 마음이다. 배가 고프다고 느끼는 것도 내 마음이요 피곤하여 쉬고 싶은 것도 내 마음이다.
아침에 눈을 떠서 밤에 잠들 때까지 심지어 꿈속에서조차 경험하는 모든 생각, 감정, 오감이 다 내 마음일 뿐이다. 그 모든 것이 하나도 남김없이 오직 ‘하나’인 것이다. 모두가 ‘하나’요 내 마음 아님이 없기에, 거기 어디에 취하고 버릴 것이 있겠는가. 오직 가려서 택하고 버리지 않으면 지금 여기 있는 그대로 부족함이 없는 온전한 천국이다.
지금 있는 이대로 모두가 완전하다는 실상에 비로소 눈뜨게 되면 삶의 모둔 순간은 기도가 되고 명상이 되며, 있는 그대로 자유와 해방이다. 자유와 해방은 어떤 상태나 조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이미 자유와 해방임을 깨닫는 것이다. 동시에 모든 의미의 ‘소유’가 끝난 그 텅 빈 마음속에서 비로소 참되고 영원한 것을 진실한 사랑을 모든 사람과 아무런 조건 없이 나누게 된다.
이렇게 깨어있는 상태로 인생의 꿈을 꿀 수 있다면 높은 자리에 앉아 있으면서 그 자리에 집착하지 않을 것이고, 지독한 곤경을 당해도 거기에 굴복하지 않을 것이다. 세상에 대하여 죽는 것이 꿈에서 깨어나는 것이다.
바오로는 “옛 인간을 벗어 버리고, 여러분의 영과 마음이 새로워져 진리의 의로움과 거룩함 속에서 하느님의 모습에 따라 창조된 새 인간을 입어야 한다는 것입니다.”(에페 4, 22-24)라고 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십시오. 거기에는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오른쪽에 앉아 계십니다. 위에 있는 것을 생각하고 땅에 있는 것은 생각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이미 죽었고, 여러분의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여러분도 그분과 함께 영광 속에 아타날 것입니다.”(골로 3,1-3)
나는 바오로의 이 권고에서 ‘땅에 있는 것’을 ‘우리 눈에 보이는 것들’로 ‘위에 있는 것’을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로 읽는다. 눈에 보이는 겉과 눈에 보이지 않는 속에 있는 것으로 읽어도 좋다고 생각한다.
만일 내가 땅에 있는 것들에서 하늘의 것을 보는 눈을 뜬다면, 요컨대 깨어 있는 상태에서 꿈을 꿀 수 있다면, 더 이상 눈에 보이는 현상에 속지 않을 것이다. 기쁜 일이 생길 때 그냥 기뻐하는 상태에 머물지 않고 그 사건 속에 감추어져 있는 어떤 경고에 귀를 기울여 그대로 따르고자 할 것이다. 슬픈 일이 생겨도 그냥 슬퍼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거기 숨어 있은 어떤 명령을 읽어 그것을 실현코자 할 것이다.
그러니 지금 나는 다만 그러고 싶을 따름이다. 나의 인생은 나에게 한바탕 꿈일 수도 있는 어떤 것에서 더 나아가지 않는다. 내가 아직 확연히 깨어나지 못했다는 증거다. 모든 사라지는 것들을 사라지게 하고 모든 허상을 허상으로 던져 버리는 그 자리에서 마침내 실상에 눈 번쩍 뜨는 ‘깨달음’은 빛날 것이다.
요즘 내가 배워야 할 ‘사랑’이 다른 말로 하면 ‘자유’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 참으로 자유로운 사람만이 진실한 사랑을 할 수 있다. 예수님은 내 눈에 자유의 화신이다. 아무도 아무것도 그분은 묶어 두지 못했다. 그분은 살아 움직이는 자유, 바로 그것이었다.
자유의 화신 예수님께서 주신 약속이다.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 그러면 너희가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한 8,31-32)
나는 이 약속이 나에게 주어진 것이라고 믿는다. 나는 내가 이제까지 어떻게 살아왔는지 잊고자 한다. 잘 살아왔든 잘못 살아왔든 그것은 아무 소용없는 과거지사일 뿐이다. 나는 다만 주님의 약속을 믿고 의지하며 날마다 순간마다 스승 예수님처럼 현존을 사는 자유인으로 살고 싶을 뿐이다. 그것은 나에게만 약속된 선물이 아니라 누구든지 원하기만 하면 받을 수 있는 것임을 또한 믿는다.
"속은 위선과 불법으로 가득하다."(마태 23, 28)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벌거벗은
한 영혼을
만나게됩니다.
맑아지면
모든 순간이
은총이 됩니다.
회개와 은총은
하느님 사랑으로
하나가 됩니다.
아우구스티노의
회개로 많은 이들은
희망을 다시 만납니다.
무상으로
받게되는
하느님
은총입니다.
은총안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우리의 고백 또한
죄와 허물을 통한
은총과 찬미를
체험합니다.
너무도 쉽게
무너지고
부서져내리는
우리를 기다려주시고
안아주시는
하느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은총으로
길을 찾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은총을 주십니다.
가장 맑고
가장 아름다운
은총은 이미
우리 삶안에
주어져 있습니다.
방탕과 위선까지
사랑으로
껴안아주시는
우리는 하느님을
떠날 수 없는
하느님 사랑의
참된 자녀들입니다.
1951년 미국의 프린스턴 대학과 다트머스 대학의 풋볼 경기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이 두 대학은 시작부터 과열된 양상을 보였는데, 이는 치열하게 경기에 임했던 선수의 부상으로 이어졌습니다. 프린스턴 팀 선수 중 한 명은 코가 부러졌고 또 다른 선수는 뇌진탕 증세를 보여서 급하게 들것에 실려 간 것입니다. 이로 인해 더욱 더 경기는 과격해졌고, 다음 쿼터에서는 다트머스 선수 한 명의 다리가 부러졌습니다. 경기는 프린스턴 대학의 승리로 끝났지만, 씁쓸함을 남겼습니다.
경기가 끝나고 일주일 뒤, 각 대학의 학생들에게 경기 녹화 영상을 보여주면서 이 거친 경기의 책임이 어디에 있었는지를 물었습니다. 먼저 다트머스 대학의 학생 중에서는 35%가 자기 대학 선수들이 거친 경기를 시작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상대 대학인 프린스턴 대학의 학생 중에서는 자기 대학 선수들이 거친 경기를 시작했다고 말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고, 상대팀에 책임이 있다고 응답한 사람이 자그마치 86%에 달했습니다.
객관적으로 이 영상을 평가한 사람들은 양 팀 모두 책임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다트머스 대학의 35%와, 프린스턴 대학의 0%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맞습니다. 객관적으로 평가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상대 학교의 잘못은 크게 인식하고, 반대로 자기 학교의 잘못은 작게 인식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는 옳고 남은 틀리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지요.
이는 지금 사회에서 특히 만연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인터넷의 댓글 창이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마치 전쟁터처럼 보입니다. 그리고 요즘 문제시되는 ‘묻지마 범죄’와 다를 바가 없다는 생각도 듭니다. 바로 객관적으로 바라보지 못하는 우리들의 모습인 것입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에게 겉은 의인으로 보이지만 속은 위선으로 차 있는 회칠한 무덤 같다고 하십니다. 의인들의 몸 안에는 하느님께서 계시기 때문에 마땅히 성전으로 불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위선으로 차 있는 사람의 몸 안에는 하느님께서 계시기가 힘듭니다. 따라서 죽은 자의 무덤과 같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무덤은 닫혀 있는 한 겉모양은 아름다울 수 있겠지만, 무덤 안을 열면 참혹할 수밖에 없습니다. 겉과 속이 다른 모습은 이렇게 끔찍할 수 있습니다.
객관적으로 바라보지 못할 때, 우리는 겉과 속이 다른 모습으로 살 수밖에 없습니다. 즉, 자신에게는 끊임없이 자비롭지만 타인에게는 너무나도 엄격한 모습으로 살게 됩니다.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을 때, 적대적으로 상대를 대하지 않고 겸손한 마음으로 상대를 받아들일 수 있게 됩니다. 그래야 불행선언의 주인공이 아닌, 행복선언의 주인공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오늘의 명언: 시각장애인으로 태어나는 것보다 더 비극적인 일은 앞은 볼 수 있으나, 비전이 없는 것이다(헬렌 켈러).
중독
1984년, 그때 저는 처음으로 컴퓨터를 접했습니다. 지금이야 컴퓨터가 삶 안에서 뗄 수 없는 소중한 물건으로 자리 잡았지만, 당시에는 솔직히 이 컴퓨터로 무엇을 할지를 몰랐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제 바로 위의 형이 어디선가 컴퓨터 게임 프로그램을 가지고 와서 설치를 하고 실행을 했는데, 완전히 다른 세상이 이 안에 있는 것입니다. 당시에 있었던 전자오락실의 게임보다 훨씬 재미있었기 때문이지요.
처음에는 공부하기 전에 기분 전환 삼아 가볍게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멈춰지지 않는 것입니다. 이제는 공부를 해야 하는데 ‘한 판만 더...’를 외치면서 하다 보니 게임을 멈추지 못하고 계속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엄청나게 나쁜 시험 성적을 받은 뒤에야 게임에서 벗어날 수 있었지요.
이처럼 중독은 황폐한 상처를 남기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게임 중독만이 아니지요. 알코올, 니코틴, 도박 등의 중독을 보십시오. 몸과 마음의 황폐함을 겪고 나서야 겨우 벗어나지 않습니까? 그래서 누구는 중독을 일컬어서 느리게 진행되는 자살 시도라고 이야기를 하더군요.
그런데 정말로 신기한 것이 있습니다. 나쁜 습관들은 쉽게 중독되고 벗어나기도 힘든데, 왜 좋은 습관은 쉽게 중독되지 않을까요?
주님께 중독되었으면 합니다. 그래서 주님의 뜻을 따르는데 나의 모든 것을 다 바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진정으로 행복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진실하고 책임 있는 사랑의 선포자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오늘 복음은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향한 예수님의 여섯 번째와 일곱 번째 질책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온갖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차 있는 회칠한 무덤 같다. 겉은 의인으로 보이지만, 속은 위선과 불법으로 가득하다.”(23,27-28)라고 하십니다. 유다인들은 무덤이 죽음과 닿아 있어 부정한 것으로 여겼습니다.
유다인들의 3대 명절 때는 순례자들이 붐벼 무덤에 몸이나 옷이 닿곤 했습니다. 그렇게 되면 불결해져서 축제에 참여할 수 없으므로 이를 피하려고 길가의 모든 무덤에 회칠을 해두곤 했지요. 사람들은 밤에도 무덤이 보이도록 무덤에 횟가루를 칠한 것입니다.
회칠한 무덤들은 맑은 날에는 하얗게 빛나 보였고 멀리서 보면 아름답게 보였습니다. 예수시대부터 유다인들은 성인들과 예언자들을 기억하고 예언자들이 당하던 박해를 보속하는 뜻에서 기념관과 같은 무덤을 지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처럼 겉으로는 의로운 체하지만 실제로는 율법에 불충하고 위선적인 그들을 질책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섯 번째 질책과 같은 맥락에서, 자신들은 흠잡을 데 없는 사람들이라 자처하는 그들을 질책하십니다. 그들은 그렇게 예언자들의 무덤을 만들고 의인들의 묘를 꾸미면서, ‘우리가 조상들 시대에 살았더라면 예언자들을 죽이는 일에 가담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고 말합니다(23,29-30).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위선적인 행동으로 예언자들을 박해하던 이스라엘인들 편에 서 있었지요. 그럼에도 그들은 자신들은 조상들의 잘못과 무관하고 흠도 없다고 합니다. 나 몰라라 하는 뻔뻔함이 그들의 덫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범죄하고도 회개하지 않은 조상의 후손들인 그들의 무책임과 위선을 책망하십니다. 그분께서는 그들을 썩어가는 시체의 악취로 진동하고 더러운 것들로 가득 찬 회칠한 무덤과 같다고 질책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아름답게 치장하고 유창한 말솜씨로 하느님에 대해 말하고 인생의 참된 길에 대해 말할 때가 많지요. 그러나 그 화려한 말을 하는 마음속을 들여다보면, 미움과 거짓과 탐욕으로 가득 차 있을 때가 적지 않습니다. 그런 표리부동의 모습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만이 아니라 나 스스로 부정적인 생각과 자기비하, 열등감, 절망, 포기를 붙들고 있을 때에도 드러나지요.
세상으로 눈을 돌리면, 이 사회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나라처럼 놀라운 경제성장을 이루고 IT강국으로 주목받는 나라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결코 인간다운 사회, 더불어 행복한 나라라 할 수 없습니다. 속은 빈부격차와 부패, 자본의 권력화 속에 인간이 도구화 하고 있고, 자살률 최고라는 불안정하고 비참한 실상을 보이고 있지요. 속빈 강정과 같은 실상입니다. 어디서나 바리사이와 같은 위선과 탐욕이 문제입니다.
또한 바리사이들에게서 드러났던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뻔뻔함과 왜곡된 의인의식과 무책임의 늪에서 벗어나야겠습니다. 누구든 잘못할 수 있지요. 그러나 진정한 사랑을 하려면 잘못을 인정함으로써 정의를 바로 세워야 합니다. 나는 흠도 티도 없다는 자만과 무책임은 교만에 다름 아닐 것입니다.
오늘도 내 속에 악취 나는 것들은 없는지 살펴보고, 안에 품은 아름다운 하느님의 선물을 행동의 향기로 뿜어내는 진실한 우리가 되도록 힘써야겠습니다. 그렇게 영혼을 바꾸고, 자신의 잘못을 직시하여 책임을 짐으로써 죽음의 십자가를 생명의 샘터로 바꿔가는 정직한 사랑의 선포자가 되었으면 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개는 기분이 좋으면 꼬리를 흔든다고 합니다. 반면에 고양이는 화가 나면 꼬리를 세운다고 합니다. 같은 모습으로 보이지만 감정은 다른 것입니다. 개가 꼬리를 흔들면 가까이 해도 좋지만 고양이가 꼬리를 세우면 조심해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꼬리가 아닙니다. 개나 고양이의 모습입니다. 꼬리는 겉으로 드러나는 표시일 뿐입니다.
서울교구는 89년부터 사제서품식을 체육관에서 하고 있습니다. 내년에도 고척동에 있는 돔구장에서 서품식을 하게 되었습니다. 명동 성당에서 서품식을 하셨던 신부님께서 체육관에서 서품식을 하는 것은 신비감도 떨어지고, 전례적으로도 생각할 필요가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외국에서 오신 신부님들은 체육관에서 서품식을 하는 것을 보면서 무척 놀라기도 합니다. 사제서품을 받는 신부님이 많다는 것에 놀라고, 많은 신자분들이 축하해 주는 것에도 놀랐다고 합니다. 서품식을 주관하는 저는 장소에 대해서 크게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 현실적으로 많은 인원이 함께 할 수 있는 성당이 없기 때문에 체육관에서 서품식을 하는 것으로 알았습니다.
중요한 것은 장소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이야기를 하는 상대방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이었습니다. 성당에서 서품식을 했을 때의 엄숙함과 분위기를 기억하는 것을 존중하면 되는 것입니다. 현실적인 어려움 때문에 부득이하게 체육관에서 서품식을 하는 것을 이해하면 되는 것입니다. 자신의 뜻을 이야기하기 전에 상대방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이, 아픈 이, 외로운 이들에게는 무척 관대하셨습니다. 아픈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다고 하셨습니다. 목자는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아서 밤을 새운다고 하셨습니다.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으면 기뻐한다고 하셨습니다. 돌아온 탕자를 따듯하게 맞아들이는 아버지의 자비하심을 이야기 하셨습니다. 지치고 힘든 이들은 모두 오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짐은 가볍고, 멍에는 편하다고 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의 위선을 꾸짖었습니다. 그들은 율법의 규정들을 이야기하면서 베짱이처럼 자신들은 열심히 율법을 지키려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변을 보면 세례를 받았지만, 신앙인으로서 충실하게 살지 못한 사람들을 볼 때가 있습니다. 주일미사에 참례하지 못하는 사람, 본당에서 준비한 피정, 교육에 참석하지 못하는 사람, 어려운 이웃들을 돕는데 인색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신앙의 뿌리가 깊지 못하기 때문에 곧 신앙이 식어버리곤 합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우리는 바오로 사도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아주 근면하고 성실한 사도였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뜨거운 열정도 있었습니다.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우리의 수고와 고생을 잘 기억하고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여러분 가운데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밤낮으로 일하면서, 하느님의 복음을 여러분에게 선포하였습니다. 우리가 신자 여러분에게 얼마나 경건하고 의롭게 또 흠 잡힐 데 없이 처신하였는지, 여러분이 증인이고 하느님께서도 증인이십니다.”
우리가 경제적인 풍요를 얻기 위해서 근면하고 성실하게 사는 것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오늘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의 복음을 위해서, 하느님께 나가기 위해서도 근면하고 성실해야 한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매일 기도하는 사람, 좋은 말씀을 듣기 위해서 피정과 교육에 자주 참여하는 사람, 어려운 이웃을 돕는 일에 적극적인 사람들은 신앙생활에서도 근면하고 성실한 사람들입니다.
여름에는 베짱이처럼 살아도, 개미처럼 살아도 큰 문제는 없습니다. 하지만 겨울이 온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건강하게 오래 살 수 있을 것 같지만 우리 모두는 언젠가 삶의 마침표를 찍어야 할 때가 온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개미들은 추운 겨울을 위해서 식량을 준비했습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무엇을 준비해야 하겠습니까? 나의 영혼과 이웃들을 위한 기도를 준비했다면,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이웃들을 도와주는 봉사를 준비했다면, 우리는 삶의 마지막이 온다 해도 아무 걱정 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말씀을 지키는 사람은 하느님의 사랑이 그 안에서 완성될 것입니다.’
평생과제, -참사람이 되는 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어제는 참행복한 하루의 시작이었습니다. 아침 흰 뭉게 구름 배경의 가을파란하늘이 참 아름답고 신비로워 오랜만에 많은 지인들과 카톡으로 ‘가을하늘선물’이란 제하로 나눴기 때문입니다. 예전 써놓았던 짧은 자작시도 더불어 생각났습니다.
-하늘보면/마음은/훨훨날아/흰구름된다-
하늘을 향하는 마음은 바로 하느님을 향하는 마음입니다. 사람이 물음이라면 하느님은 답입니다. 하느님 중심의 삶만이 참사람이 되게합니다. 산상수훈의 참행복선언을 보면 참행복의 참사람이 되는데 바로 하느님은 결정적 답임을 깨닫습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얼굴을 볼 것이다.”
참행복과 하느님은 직결됨을 봅니다. 마음 가난한 겸손한 이들과 마음 깨끗한 진실한 이들에게 계시되는 하느님이십니다. 추상적인 하느님이 아니라 이처럼 직접적이고 실제적인 하느님이십니다. 참으로 이런 하느님을 체험할수록 참행복의 참사람이 됩니다.
오늘 시편 화답송의 하느님 고백은 얼마나 깊고 아름다운지요.
“당신 숨결을 피해 어디로 가리이까? 당신 얼굴을 피해 어디로 달아나리이까? 하늘로 올라가도 거기 당신이 계시고, 저승에 누워도 거기 또한 계시나이다. 제가 새벽놀의 날개 달아, 바다 끝에 자리 잡아도, 거기서도 당신 손이 저를 이끄시고, 당신 오른손이 저를 붙드시나이다.”
평생과제가 참 사람이 되는 일입니다. 참사람이 되는 일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흔히 수도자를 ‘무엇을 하기위해(to do)’ 수도원에 온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사람이 되기위해(to be)’수도원에 왔다고 말합니다. 하여 모든 수행도 진실하고 겸손한 참사람을 목표로 합니다. 어찌 수도자뿐이겠습니까?
하느님을 찾는 모든 믿는 이들의 평생과제 역시 하느님의 사람이 되는 일입니다.
오늘 복음의 율법학자들 및 바리사이들과 제1독서의 바오로 일행 및 데살로니카 신자들의 모습이 극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바로 ‘자기중심의 삶’과 ‘하느님 중심의 삶’의 차이입니다. 겉과 속이 다른 자기분열의 위선적 삶을 사는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참사람이 되는 공부에 실패했음을 봅니다. 참으로 자기를 모르는, 자기에 눈먼, 무지의 사람들입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회칠한 무덤처럼 겉은 아름다워 의인으로 보이지만 속은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찬 위선과 불법의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입니다. 이어 예언자들의 무덤을 만들고 의인들의 묘를 꾸미면서 예언자인 예수님과 그 제자들을 박해하는 모순적 행태를 보이는 이들입니다.
“그러니 너희 조상들이 시작한 짓을 마저 하여라.”
예수님의 이들에 대한 실망과 좌절이 얼마나 큰지 짐작케 하는 말씀입니다. 자포자기적 심정까지 느껴지는 구제불능의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입니다. 스스로 자초한 심판이요 참으로 회개가 절실한 사람들입니다. 끊임없는 회개를 통해 진실과 겸손을 회복하는 길이 불행에서 벗어나 참행복에 이를 수 있는 지름길입니다.
이들과 비교하면 바오로 일행의 삶은 얼마나 진실하고 아름다운지요. 겉과 속이 완전 일치된 참사람의 전형입니다.
“우리는 여러분 가운데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밤낮으로 일하면서, 하느님의 복음을 여러분에게 선포하였습니다. 우리가 신자 여러분에게 얼마나 경건하고 의롭게 또 흠잡을 데 없이 처신하였는지, 여러분이 증인이고 하느님께서도 증인이십니다.”
이건 자랑이 아니라 참으로 진실하고 겸손한 삶에서 토해내는 건강한 자부심의 자연스런 고백입니다. 아버지가 자녀들을 대하듯 신자 하나하나를 대하면서 이들을 부르시는 하느님께 합당하게 살아가라고 권고하고 격려하는 바오로와 그 일행들의 모습은 얼마나 아름답고 사랑스러운지 진정 사목자들의 귀감입니다. 복음의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과는 너무나 극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테살로니카 신자들의 반응도 호감이 갑니다. 사도들이 전하는 하느님의 말씀을 사람의 말로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사실 그대로 하느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하여 하느님의 말씀은 이들 안에서 활동함으로 이들의 마음은 더욱 정화되어 진실하고 겸손해졌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힘이 있습니다. 우리 안에서 살아 활동하시는 말씀의 은총이 우리를 진실하고 겸손한 참사람으로 변화시켜 줍니다.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진실과 겸손의 참사람이 되어 참행복한 삶을 살게 하십니다.
“주님, 당신은 저를 살펴보시고 잘 아시나이다.”(시편139,1). 아멘.
심홍보 베드로 신부님
예전에 할아버지 신부님들이 ‘은퇴준비를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젊을 때 이일 저일을 하면서 신자들과 어울려 뭔가를 할 때는 잘 몰랐지만, 나중에 겉으로 드러나는 뭔가를 하지 않을 때도 기쁘게 사제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미리 준비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겉은 다른 사람들에게 의인으로 보이지만, 속은 위선과 불법으로 가득하”(마태 23,28)기 때문에 불행한 사람들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외적인 화려함과 뭔가 하고 있다는 것 때문에 스스로 열심한 신자처럼 착각하고 있지만, 속은 텅비고 마음과 정신을 악에게마저 빼앗긴 사람들에 대해 안타까워하십니다. 그런가하면 복음환호송 알렐루야에 나오는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말씀을 지키면, 그 사람 안에서 참으로 하느님의 사랑이 완성되리라.”(1요한 2,5 참조) 라는 구절을 통해 우리에게 신앙이 안내하는 참 기쁨에 대한 새로운 문을 열어줍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을 생각하는 마음에 설레고, 주님의 말씀을 들을 때 회개와 새로운 삶에 대한 초대를 들으며 환희와 샘솟는 기쁨이 솟구칠 때 참으로 우리는 신앙의 의미를 살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주 하느님께 대한 희망과 사랑으로 그분께 마음을 열고 그분을 모심으로써, 주 하느님께서 말씀을 실현하고자 하는 우리에게 함께하시어 힘이 되어 주시고, 우리가 주 하느님께서 내려주시는 참 기쁨과 축복 속에 머물기 때문입니다.
겉과 속이 다른 삶은 불행하다.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저는 어려서 남모르게 아버지 옷 주머니에 손을 대서 돈을 꺼냈고, 불장난을 하다가 작은 댁의 사랑채를 다 태어버리기도 했습니다. 울타리를 엮은 구리철사를 풀러 엿을 사 먹기도 했으며 길에서 주운 돈을 주인에게 돌려주지 않고 개인적으로 쓴 적도 있습니다. 선생님 서랍에 있던 시험문제를 몰래 보기도 했고, 교실을 난장판으로 만들어 놓고 안 그런 척 했습니다. 큰 잘못을 저지르고도 숨긴 적이 여러 번입니다. 지금도 여전합니다. 사람들은 속아주었고 저자신은 뻔뻔스럽게 위기를 넘겼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모두를 알고 기다려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에게 꾸중을 하였습니다. ‘겉은 아름답게 보이지만 회칠한 무덤 같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겉은 의인으로 보이지만 속은 위선과 불법으로 가득하다’고 지적하셨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듣고 그 회칠한 무덤이 바로 저라고 생각했습니다. 신부이기 때문에 자동적으로 거룩한 삶을 사는 것은 아닙니다. 매일 미사를 봉헌한다고 성덕이 출중한 것도 아닙니다. 그에 상응하는 마음가짐과 정성을 담지 않으면 거룩한 것을 더 많이 접하기 때문에 오히려 더 불경한 잘못을 범하고 맙니다. 알면 아는 만큼 더 잘 살아야 하는데 그렇지 못합니다. 그래서 짐이 무거워집니다. 아는 것과 사는 것은 분명 다릅니다. 사실 신부이기 때문에 더 많은 위선을 떨고 이중적으로 사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니 불행합니다. 무엇 때문에 사는지 묻지 않고 적당히 타협하고 눈치 보며 사는 삶은 불행합니다.
신자들에게는 기도를 많이 하고 있는 것처럼 말을 하지만 최소한의 의무인 ‘성무일도’조차 거르고 지나갈 때가 있습니다. 성체조배는 물론 묵주기도를 하는 것은 기본이거늘 일반 신자보다 더 많이 기도한다고 얘기할 수 없습니다. 이러저러한 인간적인 욕망에 대해서도 절제 있는 기쁨을 누리지 못할 때가 너무도 많습니다. 그러면서도 아닌 척 하고 목을 빳빳이 세우고 다닙니다. 이런 모습에 주님의 마음이 얼마나 아프실까? 생각하면서도 몸은 여전히 육정을 따르고 맙니다. 그야말로‘마음은 간절하나 몸이 말을 듣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겉과 속이 다른 위선자를 얘기 하면서도 정작 자신이 그렇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살았습니다. 내 눈 안에 들보를 지닌 채 남의 눈의 티를 빼주겠다고 허우적거리는 모습이 부끄럽습니다. 주님께서는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 하여도 마음은 나에게서 멀리 떠나 있구나”하셨습니다. ‘이런 말을 하고 저런 행동’을 하며 위선과 허물로 누벼놓은 이날에 하느님의 크신 자비를 청합니다.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주님, 저의 허물을 용서하소서. 구원을 허락하소서. 아멘.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사랑합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도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에 대한 불행선언의 계속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위선자들을 “회칠한 무덤”(마태 23,27)에 비유하십니다.
그것은 그들의 영혼이 죽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삶이 생명의 본성을 뿜는 것이 아니라, 무덤의 냄새를 뿜고 있기 때문입니다.
<민수기>(19,16)에 따르면, 무덤에 닿으면 칠 일간 부정하기에 때문에 무덤을 회칠하여 표시함으로써 사람들이 불결해지지 않도록 했습니다.그러니,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회칠한 무덤’과 같다는 것은 부정을 타지 않도록 그들을 경계하라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겉은 아름답게 보이지만,속은 죽은 이들의 뼈와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차 있기”(23,27) 때문입니다. 또 “겉은 사람들에게 의인으로 보이지만, 속은 위선과 불법으로 가득”(23,28)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악”보다 더 추악한 것은 “거짓된 선”, 곧 “위선” 입니다. 마치 “선” 인양 자신의 얼굴을 꾸미고 사람들을 속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악보다 더 추악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이러한 “위선”에 대한 불행선언을 통해, 강력히 경고하면서 동시에 간절한 요청으로 회개로 초대하십니다.
또한 그들은 “겉으로는 예언자들의 무덤을 만들고 의인들의 묘를 꾸미면서, ‘우리가 조상들의 시대에 살았더라면 예언자들을 죽이는 일에 가담하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말하지만”(23,29-30), 실상은 그 반대로 살기에 “예언자들을 살해한 자들의 자손임을 스스로 증언”(23,31) 합니다.
이를 <루카복음>의 병행구절에서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너희는 불행하여라!
바로 너희 조상들이 죽인 예언자의 무덤을 너희가 만들기 때문이다”(루카 11,47)
그러니, 그들이 진리를 핍박하고 있음에 대한 질타라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예언자들의 무덤은 꾸미면서도 실은 그 예언자들을 죽인 조상들의 소행을 본 따라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곧 그의 조상들이 예언자들을 박해하고 죽였듯이, 지혜이신 당신을 핍박하고 있음을 말해줍니다.
그러나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리듯 진실을 가려보지만, 진리는 어김없이 가리고 있는 허울을 벗길 것입니다. 진실이 드러나지 않도록 가로막고, 드러난 진실마저 덮고 조작하려 해도, 빛은 끝내 가려지지 않고 오히려 가림 막을 태울 뿐, 감추어진 탐욕과 위선을 드러낼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도 우리는 겉을 그럴싸하게 꾸미고 치장하고 있지만,사실은 더러운 속을 감추고, 은폐하고, 기만하고, 심지어는 조작하기도 합니다.
하오니, 주님!
오늘 저희가 진리 편에 서게 하소서!위선의 껍데기를 벗게 하소서! 아멘.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최원석
언제간 한번 이런일이 있었어요 신부님이 미사를 집전하시는데 얼굴이 창백해지셨더라구요 .. 그러구 나서 그 다음주에 미사참례를 하기 위하여서 성당을 갔는데 전주에 교구청에서 어떤 주교님이 일요일날 아침에 본당에 오셔서 본당신부님께 무엇이라고 하시고 가신것 같아요 그것도 새벽에 오셔서요 .. 다음주에 신부님이 미사 집전하시면서 고개를 숙이시더라구요.. 전주에 주교님이 오셨다고 하면서 저도 부족한 인간이리고 하면서 잘 부탁한다는 인사였어요 .. 그것을 보면서 가슴이 많이 아팠습니다. 어떤 인간이 교구청가서 신부님을 일러 바친것입니다. 신부님 수녀님들 가지고 교구청 가서 일러 바치는 사람들 .. 괜한 소문 만들어서 수도자들의 가는 길을 막는 사람들 ..이런분들이 오늘 복음에 나오는 바라사이 같은 분 같아요 ..율법학자같은 사람들이요 .. 사회에서 죄를 지으면 이 죄가 진정한 죄인지 아닌지는 법리적으로 논쟁을 벌여서 죄의 유무를 가립니다. 1심에서 시작하여서 3심까지 가는 과정을 거쳐서 유무죄 여부를 가리지요. 그런데 신부님이나 수녀님들은 교구청에 투고 하나 가지고 힘든 생활을 하게되지요 ..법리 논쟁을 벌일틈도 없이 .. 참 부당한 대우인것 같아요 ..
왜 사람들은 성직자들을 교구청에 투고하는지 ? 사실 법리적으로 따지고 보면 죄도 없는데 교구청에 투고를 합니다.. 이것은 아마도 오늘 복음에 나오는 바리사이와 같은 성향의 사람들이라고 생각됩니다. 이사람들은 자신의 원칙에 충실한 사람들이지요 .. 나는 옳아 ..내 말데로 해 ..
교구청에 투고하는 사람들은 이런 논리로 성직자들을 투고하지요 성직자는 완벽해야되 하면서 앞뒤를 보지 않고 일을 저질르고 다니지요 .. 세상에 완벽한 사람이 어디 있어요 .. 완벽이라는 단어는 인간에 맞지 않는 단어지요 ..완벽이라는 기준을 성직자분들에게 들이데며 못할 짓을 하는 것이지요 .. 자기 자신의 삶은 돌아보지 않고 성직자에게만 완벽을 요구하는 것이지요 .. 완벽이라는 단어는 학술적인 단어지요 살아가는 인간에게 적용하는 것은 잘못이지요 ..완벽보다는 완전이 우리 인간에게는 어울릴것 같습니다.. 완전 .. 성찰하면서 주님을 닮아가는 삶.. 신부님과 수녀님들의 삶이 이런 완전으로 가시는 삶을 살고 계시지요 ..매일 매일 성찰하고 주님앞에서 기도하시는 삶을 살아가시지요 .. 그런데 그분들의 삶이 그분들만 그렇게 살도록 초대 받은 것은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다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완벽이 외향적인 단어라면 완전은 내향 ..주님을 닮은 삶이 완전한 삶이지요 ..일러바치는 삶이 외향적인 삶이라면 성찰하고 자신을 주님안에서 바라보면서 완전으로 가는 삶.. 이것이 진정 주님이 보시기 좋은 삶이지요 .. 성직자들 교구청에 투고하여서 주님 가슴에 피멍들게 하지 마세요 ..진정한 성찰하는 내가되었으면 합니다..
아멘.
박미라 도미틸라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계속해서 질책하시는 예수님이십니다!
“겉은 그럴싸해 보이지만 그 속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썩은 것이 가득 차 있는 회칠한 무덤 같다.” 고 하시네요.
또한 그들은 “겉으로는 옳은 사람처럼 보이지만 속은 위선과 불법으로 가득 차 있다.” 고....
착취와 탐욕과 위선과 불법으로 꽉 차 있으면서 겉을 잘 꾸며서 교묘히 사람들의 눈을 속이고 또 속이며 착한 척 살고 있는 사람들의 속을 확 뒤집어 파헤치시는 주님이십니다.
이 세상 그 어떤 쓰레기보다도 썩는 냄새가 더 나쁘게 진동하는 사람의 시체! 그 시체를 감추기 위하여 하얗게 회를 칠해 놓은 무덤!
겉만을 볼 수 있는 사람의 눈은 얼마든지 속일 수 있지만 우리의 은밀한 속까지 다 들여다보고 계시는 그분은 절대로 속일 수는 없는데 그걸 알면서도 사람들에게 인정받기 위해서... 사람들에게 칭찬 받기 위해서... 사람들에게 인기를 끌기 위해서 얼마나 많이 자신의 겉을 꾸미며 살고 있는지.....
이 세상에 그 많은 사람들 중에 사람들 보기에 좋게 살기보다 주님께서 보시기에 좋게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요?
매 순간 순간마다
매양 하는 모든 일마다
주님께서 보시기에 좋도록 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창세기 첫 장에 보면
하느님께서 이 세상 것을 하나하나 만드실 때마다
“보시니 좋더라.” 하시었습니다.
하느님께서 한 사람 한 사람을 만드실 때마다 그러실 것입니다.
“참 좋구나!”
그런데 날이 갈수록 그 안에 하나 둘 더러움을 집어넣는 것을 보시는 그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우리도 우리가 심혈을 기우려 어떤 작품을 만들어 놓았는데 그 작품이 손상되고 더러워진 것을 보게 된다면 얼마나 마음이 아프겠습니까?
오늘은 ‘겉은 아름답게 보이지만 속은 죽은 이들의 뼈와 온갖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차 있는 회칠한 무덤 같은 사람‘들을 보시고 화를 내시는 주님의 마음이 더 가깝게 다가오네요.
‘사람들이 나를 보고 어떻게 생각할까?’가 아니라, ‘주님께서 나를 보시면 어떠하실까?’를 생각하며 말하고 행동하는 그런 하루되시기를 바라오며 늦은 인사를 올립니다.
오늘도 우리 모두를 무척이나 사랑하시는 주님 안에서 행복한 하루 되세요..
“너희도 겉은 다른 사람들에게 의인으로 보이지만, 속은 위선과 불법으로 가득하다.” (마태오.23,28)
김종오 신부님
조금이라도 위선적이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조금이라도 자신이 위선적임을 아는 사람은 위선적인 삶에서 벗어나기 시작합니다. 위선적이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은 자신을 모르는 허풍쟁이입니다. ‘선하신 분’은 오직 주님 한 분 뿐입니다.
조금이라도 불법적이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조금이라도 자신이 불법함을 아는 사람은 불법적인 삶에서 벗어나기 시작합니다. 불법적이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은 자신을 모르는 거짓말쟁이 입니다. 율법의 완성은 사랑이신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겉은 의인으로 보이지만 속은 위선과 불법으로 가득’한 것은 우리의 인정받고 싶은 욕구 때문입니다. 우리가 가진 위선과 불법을 숨겨서라도 인정을 받고 싶기 때문입니다. ‘위선과 불법으로 가득’한 우리를 사람들이 거부하리라는 두려움 때문입니다.
위선과 불법을 저지르며 사는 자신을 깨닫는 만큼 우리는 위선과 불법을 고백하는 형제를 받아들이게 됩니다. ‘위선과 불법적인 자신’을 깨달아 이해하지 못하면 불완전한 다른 사람들의 한계와 고통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바리사이와 율법학자의 위선과 불법을 들추어내시는 것은 주님께서 그들을 미워하기 때문이 아니라, 회개하여 진실과 정의로 거듭나도록 성장통(成長痛)을 겪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숨겨진 위선과 불법을 보더라도 우리는 ‘죄는 미워하되’ 자신과 이웃을 미워해서는 안 됩니다.
참다운 의인은 위선과 불법이 없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위선과 불법을 회개하여 다시 태어나 자신과 이웃의 인간적인 한계를 이해하고 용서하며 위로하는 사람입니다. 선하고 의로운 세상은 바로 그런 의인들에 의해서 시나브로 이루어집니다.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차 있는 회칠한 무덤 같기 때문이다."(마태 23, 27)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세상을 보기 전에
먼저 제 내면을 보게됩니다.
내면을 만나지
않고서는
행복할 수 없는
우리의 삶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내면을 향해
말씀을 던지십니다.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차 있어
발 디딜 자리조차 없습니다.
우리 내면을
구원하실 분은 분명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내면을 살리시는 분께서
추악하고
흉칙한 내면을
보여주십니다.
우월한 위치에 있다고
착각하는 바리사이들을 향해
일침을 가하십니다.
우리가 놓치고
사는 것은
분명 우리의 내면입니다.
내면의 치유는
죽어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서
시작됩니다.
회칠한 무덤에서
나오는 은총의
시간되시길
기도드립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우리 내면이
살아나기를
애타게 바라십니다.
한 남자가 번화한 도시를 걷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먹을 것을 구걸하는 한 아이를 발견했습니다. 그 아이는 어른의 보살핌을 오랫동안 받지 못해서인지 지저분하고 더러운 누더기를 걸치고 있었으며, 배고픔에 너무 힘들어하고 있었지요. 남자는 화가 나서 하느님께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나도록 내버려두십니까? 왜 이 죄 없는 아이를 도우시지 않으십니까?”
그러자 그의 마음에서 이런 소리가 들리는 것입니다.
“나는 가만히 있지 않았다. 너를 만들지 않았느냐?”
주님께서는 우리를 동업자로 삼고 계십니다. 세상을 보다 더 나은 곳으로, 보다 더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 우리를 만드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느님의 이 손길을 거부할 때가 많습니다. 동업자가 되자고 하시는데 과감하게 거절하지요. 복자이신 마더 데레사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통해 이 세상을 사랑하신다.”
우리를 통해 사랑을 보여주시는데, 그 역할을 하지 않는 우리는 아니었을까요? 사랑을 전하지 않을 수밖에 없는 이유를 찾으면서 어쩔 수 없음을 고백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사랑의 주체가 내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만 있다고 생각했던 것은 아닐까요?
동업자이신 주님의 손을 잡고 주님께서 원하시는 방향으로 함께 나아가야 합니다. 주님의 사랑은 바로 우리의 손을 통해서 세상에 펼쳐지는 것입니다. 만약 이 역할을 하지 않는다면 입으로만 사랑을 외치는 것과 똑같습니다. 마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꾸짖는 종교지도자들의 모습인 것이지요.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불행하다고 말씀하시지요.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겉은 아름답게 보이지만 속은 죽은 이들의 뼈와 온갖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차 있는 회칠한 무덤 같기 때문이다. 이처럼 너희도 겉은 다른 사람들에게 의인으로 보이지만, 속은 위선과 불법으로 가득하다.”
겉과 속이 다른 위선자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입으로는 끊임없이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외치고 있으며, 사람들에게도 실천하라고 말하고 있지만 정작 자신은 실천하고 있지 않았던 것이지요.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내려 하기 보다는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는데 더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바로 사랑의 주체가 되어야 합니다. 즉, 말로만 외치는 사랑이 아니라, 몸으로 직접 실천할 수 있는 사랑이 되어야 합니다. 이런 사랑을 전하는 사람이야말로 주님의 참된 동업자로 참 행복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내 비결은 간단하다. 기도를 하는 것이다(복자 마더 데레사).
사랑의 힘
복자 마더 데레사께서 살아 계실 때, 가난하고 병든 자를 위해 모든 사랑을 쏟는 모습은 많은 사람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습니다.
한 번은 죽음을 목전에 둔 사람을 사람들이 데리고 왔지요. 그런데 이 사람은 쥐와 곤충들이 그의 무릎 아래 살을 파먹어 두 다리뼈가 하얗게 드러나 있었고, 남아 있는 살에도 구더기가 기어 다니고 있었습니다. 이제 죽음을 목전에 두었음에 의심할 바가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복자 마더 데레사는 포기하지 않고 그에게 최고의 사랑을 쏟아 부었습니다. 이 모습을 본 한 방문객이 복자 마더 데레사에게 말합니다.
“나 같으면 백만 달러를 준다 해도 그런 일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때 이렇게 대답하셨다고 하지요.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하느님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할 것입니다.”
우리가 잊어버리는 사실이 아닐까 싶습니다. 하느님을 생각한다면 사랑의 일에 있어서 주저할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하느님의 무조건적인 사랑, 그 사랑에는 다른 생각이 끼어들 틈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합리성과 편리만을 생각할 때, 사랑이란 단어는 자그마한 글자에 불과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행하는 사랑은 세상을 강하게 울리는 커다란 힘이 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저는 1991년 8월 23일 사제서품을 받았습니다. 지난주일 동창 신부님들과 조촐한 모임을 함께 하였습니다. 24년 동안 사제로 지내면서 부족한 점들은 반성을 하였고, 서로를 격려하는 자리였습니다. 한 친구는 10년 이상을 도시 빈민들과 지내고 있습니다. 한 친구는 24년을 본당 사목만 하였습니다. 3친구는 이번에 새로운 곳으로 이동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성소국의 일을 하고 있습니다. 꾸르실료, 엠이의 일도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복음화 학교의 일도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매주 신학교에 가서 강의를 하고 있습니다. 매일 아침, 복음 묵상을 나누고 있습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일은 많이 하는 것 같은데, 저의 내면을 돌아보고 성찰하는 시간은 늘 부족한 것이 사실입니다. 매 순간 충실하지 못하였고, 쓸데없는 것들에 많은 시간을 보내곤 하였습니다.
어릴 때, ‘개미와 배짱이’라는 이솝우화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개미는 뜨거운 여름에도 열심히 일을 하였습니다. 추운 겨울이 왔을 때, 개미들은 열심히 일해서 모은 식량을 먹을 수 있었고, 무사히 추운 겨울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배짱이는 여름 내내 신나게 놀았습니다. 주위에 먹을 것이 많았기 때문에 놀아도 걱정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겨울이 왔고, 이제 주위에 먹을 것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배짱이는 추운 겨울에 먹을 것이 없었고, 아마도 노숙자 배짱이가 되었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의 위선을 꾸짖었습니다. 그들은 율법의 규정들을 이야기하면서 배짱이처럼 자신들은 열심히 율법을 지키려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변을 보면 세례를 받았지만, 신앙인으로서 충실하게 살지 못한 사람들을 볼 때가 있습니다. 주일미사에 참례하지 못하는 사람, 본당에서 준비한 피정, 교육에 참석하지 못하는 사람, 어려운 이웃들을 돕는데 인색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신앙의 뿌리가 깊지 못하기 때문에 곧 신앙이 식어버리곤 합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우리는 바오로 사도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아주 근면하고 성실한 사도였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뜨거운 열정도 있었습니다.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우리의 수고와 고생을 잘 기억하고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여러분 가운데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밤낮으로 일하면서, 하느님의 복음을 여러분에게 선포하였습니다. 우리가 신자 여러분에게 얼마나 경건하고 의롭게 또 흠 잡힐 데 없이 처신하였는지, 여러분이 증인이고 하느님께서도 증인이십니다.”
우리가 경제적인 풍요를 얻기 위해서 근면하고 성실하게 사는 것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오늘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의 복음을 위해서, 하느님께 나가기 위해서도 근면하고 성실해야 한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매일 기도하는 사람, 좋은 말씀을 듣기 위해서 피정과 교육에 자주 참여하는 사람, 어려운 이웃을 돕는 일에 적극적인 사람들은 신앙생활에서도 근면하고 성실한 사람들입니다.
여름에는 배짱이처럼 살아도, 개미처럼 살아도 큰 문제는 없습니다. 하지만 겨울이 온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건강하게 오래 살 수 있을 것 같지만 우리 모두는 언젠가 삶의 마침표를 찍어야 할 때가 온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개미들은 추운 겨울을 위해서 식량을 준비했습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무엇을 준비해야 하겠습니까? 나의 영혼과 이웃들을 위한 기도를 준비했다면,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이웃들을 도와주는 봉사를 준비했다면, 우리는 삶의 마지막이 온다 해도 아무 걱정 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말씀을 지키는 사람은 하느님의 사랑이 그 안에서 완성될 것입니다.’
영적인 순수함과 유연함을 품고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오늘의 시대는 순수한 신앙의 가치를 살아내기에 너무도 힘들고 강력한 도전들이 널려 있다. 순수한 마음으로 살다 보면 속고 바보 취급을 당하기 십상이다. 제아무리 진실한 마음과 바른 생각을 지녔다 해도 그럴싸하게 보이지 않으면 제대로 평가받지도 못한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온갖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차 있는 회칠한 무덤 같다. 겉은 의인으로 보이지만, 속은 위선과 불법으로 가득하다.”(23,27-28 참조)라고 하시며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질책하신다. 율법을 형식적으로만 지키며 의로운 체하는 이들의 표리부동을 질책하신 것이다.
당시 길가에는 무덤들이 많았는데, 유다인들의 3대 명절 때는 순례자들이 붐벼 무덤에 몸이나 옷이 닿곤 했다. 그렇게 되면 불결해져서 축제에 참여할 수 없으므로 이를 막으려고 길가의 모든 무덤에 회칠을 해두는 것이 관례였다.
회칠한 무덤들은 맑은 날에는 하얗게 빛나 보였고 멀리서 보면 아름답게 보였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예언자들의 신앙에 참여하고 예언자들이 당하던 박해를 보속하는 뜻에서 기념관과 같은 무덤을 짓고 있었다. 그들은 “우리가 조상들 시대에 살았더라면 예언자들을 죽이는 일에 가담하지 않았을 것이다.”(30절)라고 말한다.
실제는 어땠는가? 그들은 위선적인 행동으로 예언자들을 박해하던 이스라엘인들 편에 서 있었다. 그들은 구세사를 제 입맛대로 해석하고 하느님과 이스라엘의 쓰라린 대화를 곡해하였다. 그들의 이런 태도야말로 가장 위선적인 태도가 아닐 수 없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썩어가는 시체의 악취로 진동하고 더러운 것들로 가득 찬 회칠한 무덤과 같다고 책망하신 것이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문제는 영적인 유연함의 결핍이다. 영적으로 유연하다는 것은 너그럽게 받아들이는 것이며 인내로이 기다리는 태도를 말한다. 하느님의 말씀을 들으려 하지 않고 다른 이들의 충고나 의견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독선은 영신 생활에 결정적인 걸림돌이다.
영으로 유연한 사람은 성 프란치스코가 가르치는 “어머니가 자녀를 사랑하듯” “사랑의 정신으로 자진해서 서로 봉사하고 순종하며”(인준받지 않은 수도규칙 5,14), “하느님의 사랑 때문에 가슴 태우는 사람”(권고 9)이다. 그리고 형제의 죄 앞에 인내와 겸손을 지닐 줄 아는 사람이다.
위선에 빠지지 않으려면 영적인 허영으로 가득 찬 말을 중요시하는 착각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럴싸하게 보이는 성실은 쓸모가 없다. 화려한 언변이나 있어 보이는 외모나 옷차림, 명품 핸드백과 같은 것 때문에 다른 이에게 호감을 받거나 인정받을 수도 있다. 그런 것들은 자신의 내적인 불성실과는 상관없이 이루어진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행동은 참으로 경건했으나 그들의 내면은 교활했고 부패한 죄로 가득했다. 나 또한 속은 썩어 있고 미움과 탐욕, 절망과 부정적 시각으로 가득 차 있으면서 죽은 무덤을 실속 없이 화려하게 꾸미는데 열을 올리고 있지는 않은가? 나는 영적 유연함을 잃고 치명적인 독을 품고 있는 아름다운 빛깔의 독버섯이나 회칠한 무덤처럼 살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볼 일이다!
진실한 삶, -삶의 열매-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오늘은 ‘진실한 삶-삶의 열매’에 대한 묵상 나눔입니다. 아무리 농사과정에 충실했어도 수확의 가을이 되어 열매들 수확이 빈약하다면 그 마음 참 허전할 것입니다.
아무리 봄꽃들 만개하고 이파리들 무성했다해도 둥글게, 탐스럽게 익어가는 열매들이 없다면 그 마음 허망하기 짝이 없을 것입니다.
수확 풍성한 후의 텅 빈 배밭은 말 그대로 ‘텅 빈 충만’같이 느껴지겠지만, 온갖 병충해로 애당초 열매들 빈약한 배밭이었다면 말 그대로 ‘텅 빈 허무’의 느낌일 것입니다.
인생살이에도 그대로 해당되는 진리입니다. 인생사계人生四季란 말이 있습니다. 여러분의 나이는 인생사계중 어느 계절에 위치해 있는지요. 과연 삶의 열매는 잘 익어가고 있는지요. 인생 가을 나이가 되어 열매 빈약한 삶이라면 그 인생 얼마나 허전하겠는지요.
열매 ‘실實’자가 들어가는 말들의 느낌이 새삼스럽습니다. 진실眞實, 성실誠實, 충실充實, 과실果實, 결실結實 등 모두가 긍정적이고 꽉찬 느낌이 드는 말들입니다. 유명무실有名無實, 이름만 그럴듯 하고 열매가 없는, 즉 실속이 없음을 지칭하는 말도 생각이 납니다.
진실과 반대가 표리부동의 위선적 삶입니다. 계속되는 주님의 복음의 불행선언중 오늘 마지막 6,7번째로 결국은 대동소이합니다.
주님께서 겉과 속이 다른 위선적 삶을 얼마나 혐오하시는지 깨닫습니다. 참으로 어리석은 삶, 헛된 열매 없는 삶이 위선적 삶입니다. 마음의 중심 속을 보시는 주님이십니다.
속은 위선과 불법으로 가득한 채 그대로 놔두고 겉만 계속 회칠하여 아름다운 의인처럼 보인다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지요. 계속 예언자들의 무덤이나 만들고 의인들의 묘를 꾸민다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지요.
참 어리석은 헛된 노고입니다. 모두가 내적공허의 반영이요 내적분열의 표현입니다.
이런 내적공허, 내적분열의 이중적, 위선적 삶이라면, 거짓된 허영의 삶이라면 하느님과는 물론 이웃과의 관계도 불가능합니다. 진실과 신뢰의 바탕위에 형성되는 우정의 관계입니다.
하느님이 인생가을 수확기에 거두시는 것도, 우리가 하느님께 갖고 갈 수 있는 것도 관계의 열매들뿐입니다.
진실의 열매들인 믿음의 열매, 희망의 열매, 사랑의 열매들입니다. 위선적 삶이라면 애당초 이런 열매들은 불가능합니다.
하여 회개가 절박합니다. 예수님의 불행선언이 의도하는바도 우리의 회개임을 깨닫습니다. 세례자 요한이나 예수님의 선포의 핵심은 똑같습니다.
‘회개하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메타노니아)에 이은 친교(코이노니아)와 봉사(디아코니아)가 우선순위입니다. 거짓과 위선, 허영의 삶에서 진실한 삶으로의 전환이 회개입니다. 평생 끊임없는 ‘회개의 여정’을 살 때 진실한 삶입니다.
끊임없이 회칠하며 세우는 외적, 가시적 삶에서 마음의 창고를 깨끗이 대청소하는 내적, 영적 삶으로의 전환이 회개입니다. 진실한 삶을 바탕으로 성장, 성숙하는 관계의 열매들입니다.
진실한 삶을 바탕하지 않은 온갖 노력은 사상누각, 모래위에 집짓기처럼 헛된 노고일뿐입니다.
진실은 힘입니다. 진실한 삶이 감동을 줍니다.
누구나에게 신뢰받고 사랑받는 삶이 진실한 삶이요, 누구나 직감적으로 알아보는 보편적 삶이 진실한 삶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일행을 대표한 고백은 얼마나 진정성 넘치는 진실한 삶의 고백인지요.
회개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알려줍니다. 제 삶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충실하는 것입니다.
바로 우리 분도수도자의 정주서원이 이에 해당됩니다.
“우리는 여러분 가운데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밤낮으로 일하면서, 하느님의 복음을 여러분에게 선포하였습니다. 우리가 신자 여러분에게 얼마나 경건하고 의롭게 또 흠잡을 데 없이 처신하였는지, 여러분이 증인이고 하느님께서도 증인이십니다.”
이런 담대한 자부심이 그 진실한 삶의 진정성을 웅변합니다.
회개의 열매는 이렇게 뚜렷이 드러나야 합니다. 구원은 멀리 있는게 아니라 이렇게 가까이 내 삶의 자리에 있습니다. 말씀의 내적정화와 성화를 통해 회개의 완성입니다.
다음 바오로 사도의 테살로니카 교우를 향한 말씀처럼 마음의 내적, 근본적 대청소는 살아있는 말씀이 해줍니다.
“우리는 또한 끊임없이 하느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가 전하는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 때, 여러분이 그것을 사람의 말로 받아들이지 않고, 사실 그대로 하느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그 말씀이 신자 여러분 안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말씀은 살아있고 힘이 있습니다. 말씀은 영이요 생명이요 빛입니다. 말씀은 우리 안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말씀을 통해 주님과 친교의 우정도 깊어집니다. 말씀을 통한 내적정화와 성화가 진실한 삶의 원천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열매 풍성한 진실한 삶을 살게 하십니다.
“주님, 당신께는 생명의 샘이 있고, 저희는 당신 빛으로 빛을 보나이다.”(시편36,10참조). 아멘.
실속 있는 것은 알맹이다.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예수님께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에게 꾸중을 하였습니다. ‘겉은 아름답게 보이지만 회칠한 무덤 같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겉은 의인으로 보이지만 속은 위선과 불법으로 가득하다’고 지적하셨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듣고 그 회칠한 무덤이 바로 저라고 생각했습니다. 신부이기 때문에 자동적으로 거룩한 삶을 사는 것은 아닙니다. 매일 미사를 봉헌한다고 성덕이 출중한 것도 아닙니다. 그에 상응하는 마음가짐과 정성을 담지 않으면 거룩한 것을 더 많이 접하기 때문에 오히려 더 불경한 잘못을 범하고 맙니다. 알면 아는 만큼 더 잘 살아야 하는데 아는 것과 사는 것은 분명 다릅니다. 사실 신부이기 때문에 더 많은 위선을 떨고 사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신자들에게는 기도를 많이 하고 있는 것처럼 말을 하지만 최소한의 의무인 ‘성무일도’조차 거르고 지나갈 때가 있습니다. 성체조배는 물론 묵주기도를 하는 것은 기본이거늘 일반 신자보다 더 많이 기도한다고 얘기할 수 없습니다. 이러저러한 인간적인 욕망에 대해서도 절제 있는 기쁨을 누리지 못할 때가 너무도 많습니다. 그러면서도 아닌 척 하고 목을 빳빳이 세우고 다닙니다. 이런 모습에 주님의 마음이 얼마나 아프실까? 생각하면서도 몸은 여전히 육정을 따르고 맙니다.‘마음은 간절하나 몸이 말을 듣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겉과 속이 다른 위선자를 얘기 하면서도 정작 자신이 그렇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살았습니다. 내 눈 안에 들보를 지닌 채 남의 눈의 티를 빼주겠다고 허우적거리는 모습이 부끄럽습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이 백성은 말로만 나와 가까운 체하고 입술로만 나를 높이는 체하며 그 마음은 나에게서 멀어져 간다”(이사29,13). 하였고, 주님께서도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 하여도 마음은 나에게서 멀리 떠나 있구나”하신 말씀이 새롭습니다. 아무리 겉이 화려하더라도 실속이 있는 것은 알맹이입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삶을 봅니다. 그는 젊은 시절 방탕한 생활을 즐기는 가운데 마니교( 3세기경에 페르시아인 마니가 창시한 이원론적 종교입니다. 마니교는 조로아스터교, 기독교, 불교, 바빌로니아 원시 신앙 등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마니교의 교리는 세계를 선과 악, 광명과 암흑으로 구분하는 이원론을 핵심으로 합니다. 이와 같이 선과 악이 뒤섞인 세계에서 광명과 암흑으로부터 분리하기 위한 사자로서 마니가 왔다는 것입니다)에 깊이 빠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 모니카 성녀의 간절한 기도와 희생, 밀라노의 성 암브로시오 주교의 영향으로 회개하고 입교하였습니다. 아우구스티노는 고백록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늦게야 님을 사랑했습니다. 이렇듯 오랜, 이렇듯 새로운 아름다움이시여, 늦게야 당신을 사랑했나이다. 내 안에 님이 계시거늘 나는 밖에서, 나 밖에서 님을 찾아 당신의 아리따운 피조물 속으로 더러운 몸을 쑤셔 넣었사오니! 님은 나와 계시건만 나는 님과 같이 아니 있었나이다. 당신 안에 있잖으면 존재조차 없을 것들이 이 몸을 붙들고 님에게서 멀리 했나이다. 부르시고 지르시는 소리로 절벽이던 내 귀를 트이시고, 비추시고 밝히시사 눈멀음을 쫓으시니, 향내음 풍기실 제 나는 맡고 님 그리며, 님 한 번 맛본 뒤로 기갈 더욱 느끼옵고, 님이 한 번 만지시매 위없는 기쁨에 마음이 살라지나이다”(성 아우구스티노).
또 말합니다. “마음이 똑바로 향해 있으면 행동 또한 바릅니다. 마음과 행동이 일치할 때 구원의 은혜를 입을 것입니다.”과거가 중요하지 않고 새 삶을 시작 한 날이 중요합니다. 신앙인에게 있어 과거는 걸림돌이 아니라 디딤돌입니다. 과거를 하느님의 자비에 맡기고 앞날을 하느님의 섭리에 맡겨 드리며 주어진 오늘 이 순간을 사랑으로 살아야 하겠습니다. 이런 말을 하고 저런 행동을 하며 위선과 허물로 누벼놓은 이날에 하느님의 크신 자비를 청합니다.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주님, 저의 허물을 용서하소서. 구원을 허락하소서. 아멘.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우리는 여러분 가운데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밤낮으로 일하면서, 하느님의 복음을 여러분에게 선포하였습니다.> (1테살 2,9)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여러분은 남에게 폐를 많이 끼치며 사시나요?
남에게 폐를 덜 끼치려면 열심히 일해서 자신의 손으로 먹고 살아야죠.
여러분은 남에게 좋은 이야기를 많이 들려주는 편인가요?
아니면 부정적이고 안 좋은 이야기를 많이 하는 편인가요?
사도 바오로는 민폐를 안 끼치려고 밤낮으로 애써 열심히 일하고 남들에게 늘 기쁜 소식, 좋은 소식을 전하기 바빴다네요.
우리가 하느님 나라의 사도가 될 수 있는 방법은 의외로 간단하답니다.
가능한 한 민폐를 끼치지 않으려 열심히 일하고 늘 기쁜 소식, 좋은 소식을 전하려고 노력하면 우리도 하느님 나라의 멋진 사도가 된답니다.
오늘도 그렇게 삶으로써 하느님 나라의 사도 되시길 축원합니다.
외양과 내면
고진석 신부님
머리를 깎고 산 지 벌써 10년이 넘었습니다.
수도원에 들어올 때부터 마음은 있었으나 언감생심 감히 시도하지 못했고, 첫서원을 하고 공부할 기회를 얻어 외국으로 나간 틈을 타서 삭발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매월 마지막 날 머리를 깎으며 지난달을 정리하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새로운 한 달을 시작합니다.
파르라니 머리를 깎고 나면 부질없는 생각들이 정리되고 더욱 정진해야겠다는 각오가 섭니다.
머리를 깎고 사니 여러모로 편합니다.
머리를 깎아서 얻는 이점 중에 하나는, 한 십 년 젊어 보인다는 겁니다.
잘생긴 얼굴은 아니지만 남들이 동안이라고 말해 주면 기분이 좋습니다.
처음 삭발을 하고 다닐 적에는 공동체 형제들 중에 못마땅한 얼굴로 바라보는 분들이 많았습니다. 아마도 풋열심으로 혼자 열심히 사는 척 유세를 떨고 다니는 모양이 싫었던 것 같습니다.
『베네딕도 수도규칙』에도 삭발로 하느님을 속이는 거짓 수도승들에 대한 경계가 나옵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교만하고 위선적인 마음이 아주 없었던 것도 아닙니다.
곧 월말이 다가옵니다.
다시 한번 일상을 점검할 시기입니다.
덜 닦인 내 모습을 삭발과 수도복으로 위장하는 건 아닌지 겸허하게 살펴보아야겠습니다.
어느새 머리카락처럼 더부룩하게 자라난 위선과 교만한 마음을 잘라내고 싶습니다.
“그 말씀이 신자 여러분 안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김기현 요한 신부님
어제 구역미사에 갔었습니다. 구역 미사에서는 보통 강론을 하지 않고 작은 작업을 하고 나눔을 합니다. 지난번에는 신앙생활을 점검할 수 있는 그림을 한 번 그려보았고, 이번에는 행복한 순간을 떠올렸을 때 생각나는 이미지를 그려보라고 했습니다.
대부분 부담 없이 그리셨던 거 같은데요. 이 번 구역에서는 지난번에 어떤 할머님에게서 들었던 이야기를 또 들었습니다. ‘신부님, 이런 거 시키면 다음부터 구역미사 안 나올 거예요.’ 처음 그 이야기를 하셨던 할머님은 성당도 안 나오십니다. 두 번째 할머님은 어떨지 모르겠는데요.
개인적으로는 그러한 반응이 약간 서운하기도 하고 아쉽기도 하고 이해가 잘 되지 않기도 합니다. 일단 행복한 순간을 생각해 보라는 건데.. 생각 자체를 싫어하시는 거 같습니다. 또 그림 실력도 다 거기서 거기라 못 그렸다고 흉볼 사람도 없는데, 표현해 보는 거 자체를 거부하시는 거 같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는 제가 말하는 대로 한 번 따라가 보시면 익숙하지 않은 것일지라도, 필요한 것들을 다시 한 번 생각하고 점검하는 시간을 가지실 수 있을 거 같은데 그러지 않으십니다. 비슷한 반응들을 보이시는 것이 있죠. ‘성경을 읽어 보세요~ 모여보세요~ 찾아가보세요~’ 하면 비슷한 반응을 보이시는 분들이 또 계십니다. 농사 때문에 그렇다고 하시지만 꼭 그런 것도 아닌 거 같습니다. 농사하면서도 친목모임이나 다른 경조사는 챙기시는 걸 보면, 신앙 안에서 해야 할 일들은 자기가 하고 싶은 것만 자기가 하고 싶을 때 해야 한다는 마음이 있으신 거 같습니다.
그런 분들을 볼 때 마음속으로만 그런 생각을 합니다. 그럼 저도 여러분이 하시는 대로 해볼까요? 제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겁니다. 하느님의 말씀과 생각은 헤아리지 않고 내 뜻대로만 하는 겁니다. 그럼 어떨까요? 아마 이기적이고 불성실하고 예수님을 닮지 않은 모습만이 가득할 겁니다.
우선 제 성격대로라면 아무도 찾아가지 않겠죠. 어색하고 불편한 상황들을 피할 겁니다. 함께 하는 자리에도 없을 거고, 아마 조용히 있을 겁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때로는 다가가보라고 하시기도 하고, 열정을 품어보라고 하시기도 하고, 배워보라고 하시기도 하는 거 같습니다.
그래서 조금 달라졌습니다. 아마 두 분의 질문이 그런 느낌을 설명해 줄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한 분이 저에게 본당에서 하는 몇 가지 악기 활동들을 보고 ‘신부님은 원래 음악의 조예가 조금 있으시지요? 좋아하시지요?’ 그럴까요? 전에 저의 모습을 알던 사람이라면 제가 음악 근처에도 못 가본 사람이란 걸 잘 알 겁니다. 아무 것도 모르고 관심도 없었습니다.
또 지붕 공사를 하면서도 한 형제님이 ‘신부님은 원래 이런 건축 관련된 일에 관심이 많으시고 좋아하시죠?’ 예전에 그런 생각도 못했습니다. 지금 농사를 배우고 관련된 교육들을 받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르던 영역이었는데, 하느님께서 공동체를 통해서 보여주셨고 그 안에 좋은 길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해 주었습니다.
아마 저에게만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것은 아닐 겁니다. 공동체를 통해서 전해져 오는 목소리와 일들이.. 그것을 하느님의 말로 알아들을 수 있다면, 우리가 모르던 것을 알게 해 주고, 어렵지만 기쁘고 가야 할 길이라는 느낌이 전해져 오리라 생각합니다. 그런 모습이 공동체 안에 많이 보였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지금처럼 서운함을 토로하는 강론이 아니라, 바오로 사도처럼 감사의 말을 전하는 강론을 하고 싶습니다.^^;
우리는 또한 끊임없이 하느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가 전하는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 때, 여러분이 그것을 사람의 말로 받아들이지 않고 사실 그대로 하느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그 말씀이 신자 여러분 안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즐거운 하루 되세요~^^
한글교실 할머님들하고 나들이를 갔다.
한 할머님이 옛날에 커피 마신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시내에 나가셔야 했는데 버스를 놓치셨다고 한다.
겨울이고 추워서 기다리는 동안
다방에 들어가셔서 커피 한 잔을 시키셨는데,
나중에 계산 할 때 보니 커피 값이
시내에 택시타고 나가는 값이랑 같았다고... ^^;
"너희는 예언자들을 살해한 자들의 자손임을 스스로 증언한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첫단추가
중요합니다.
첫단추를 잘 못 꿰면
다시 바로잡기란
참으로 힘이 듭니다.
작은 것에서 시작한 것이
엄청난 파장을 불러옵니다.
예수님을 벗어난 삶은
회칠한 무덤처럼
길을 잃었기에
위선과 불법으로
가득 찰 수밖에 없습니다.
무엇이 귀한 것인지를
다시 묻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와 율법학자 같은
우리 영혼에 위험신호를
보내주십니다.
부패한 우리 신앙을
성찰하게 됩니다.
중심을 다시
세우는 시간이기를
기도드립니다.
신앙의 역사는
회칠한 무덤속에서
다시 시작하는 것입니다.
생명은 역사에
갇혀있는 것이 아니라
다시 새롭게 열어가는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막다른 골목에서
다시 저자신을 보게 됩니다.
우리가 꿰어야 할
첫 단추는
진실입니다.
진실은 그리스도의
전부이기 때문입니다.
"겉은 다른 사람들에게 의인으로 보이지만, 속은 위선과 불법으로 가득하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자식이라는 십자가를
끝내 포기하지 않으신
성녀 모니카 축일입니다.
십자가를 통해
우리는 우리 자신을
제대로 바라보게 됩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실상 모두 주님의 것이며
주님의 십자가임을
일깨워 줍니다.
우리의 시간은
주님을 찾는
시간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의 열매는
우리 자신을
아는 데서 시작됩니다.
우리의 삶은
무덤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위해 존재하는
시간들입니다.
진실한 사랑은
성녀 모니카처럼
언제나 주님과
함께하는 사랑입니다.
충실한 어머니의 사랑은
마침내 아우구스티노를
충실한 하느님의 존재로
바꾸어 놓습니다.
사랑은
많은 아픔을 통해
겸손한 존재가
되게 합니다.
신앙의 역사는
사랑을 체험한 이들의
살아있는 기도 여정입니다.
우리또한
성녀 모니카처럼
십자가를 원망하지 않는
은총의 자녀들이 되기를
기도 드립니다.
우리의 어쩔 수 없는
삶의 그림자마저
사랑하게 하는
십자가에 감사하는
하루 되시길 기도 드립니다.
사람이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사람입니다.
십자가는
내것이 아니라
주님이 주신
주님의 선물임을 믿습니다.
어느 회사에 방학을 이용해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대학생이 새로 왔습니다. 이 학생은 너무나도 붙임성이 좋았고 외향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어서 모든 직원들이 좋아했지요. 또 눈썰미가 좋아서인지 일도 너무나 잘했습니다. 드디어 아르바이트 기간이 다 끝났습니다. 그런데 이 학생에게는 아르바이트가 끝나도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습니다. 종종 회사 앞을 지나는 중이었다면서 음료수 몇 병을 사들고 찾아오고, 방학이 되어서는 도와드리겠다면서 진짜 한 식구처럼 며칠 동안 밤을 새가면서 함께 일을 하더라는 것입니다.
이런 학생을 좋아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을까요? 실제로 이 학생은 사장님으로부터 취업 제안을 받았고, 남들은 ‘청년 실업이다’ 하면서 취업 걱정으로 힘들어 할 때 떳떳하게 이 회사를 졸업 후에 들어가게 되었답니다.
이 학생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일할 곳이 없는 것이 아니라, 일할 마음의 자세가 부족한 사람들이 많은 것은 아닌가 라는 생각을 하게 되네요. 이 학생처럼 적극적으로 임하면 어디에서든 사랑을 받으면서 일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사업하는 사람의 말을 들어보니, 반드시 좋은 대학을 나왔다고 해서 능력 많은 사람이 아니라고 하더군요. 또한 스펙이 좋다고 해서 꼭 회사에서 필요한 사람도 아니랍니다. 대신 어떠한 상황에서도 긍정적인 마음으로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사람, 그리고 사람들과의 좋은 친분을 이어가는 사람이야 말로 회사에서 꼭 필요한 인재라는 것입니다.
이 학생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주님께서는 우리의 어떤 모습을 원하실까 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겉과 속이 전혀 다른 모습으로 겉으로만 그럴싸하게 살면서 속으로는 온갖 불의한 마음이 가득하다면 어떨까요? 주님과 전혀 대화를 하지 않고 혼자만 이야기하려 한다면? 또한 부정적인 마음을 갖고 불평불만만을 표현하는 사람은 어떨까요? ‘남들이 하겠지.’라는 생각으로 다른 이들에게 일을 미루는 사람 역시 주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이 아닙니다. 우리들도 받아들이기 힘든 모습은 주님께서도 당연히 싫어하십니다.
오늘 복음 역시 어제와 마찬가지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꾸짖으십니다. 그들은 겉과 속이 다른 모습을 가지고 주님께서 원하시는 모습과 정반대로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이 기준이 되어 있다 보니, 주님의 뜻을 무시하며 살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혹 우리 역시 주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모습으로 살려는 것은 아닐까요? 그래서 철저하게 주님의 뜻과 정반대의 모습으로 위선 덩어리를 안고 살아가는 것은 아닐까요?
예수님께서 직접 삶의 본보기를 보여주신 것처럼, 우리 역시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마음으로 주님의 뜻에 맞춰서 행동해야 언제나 그 사랑 안에 머물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하는 세계에 살고 미워하는 사람은 미워하는 세계에 산다. 당신이 만나는 모든 사람은 당신의 거울이다(켄 키즈).
타이어의 법칙
작년에 남미 페루의 ‘이카’라는 곳에서 아주 재미있는 샌드 보드 체험을 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사막을 차를 타고 곡예를 하면서 돌아다니다가 경사가 심한 사막산 꼭대기에서 샌드보드를 타고 밑으로 내려오는 것이지요. 정말로 재미있었고 신났습니다.
그런데 그때 참 신기한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사막을 돌아다니는 차를 보니 모두 타이어의 바람이 어느 정도 빠져 있는 것입니다. 솔직히 저희 차 타이어 바람이 빠져서 걱정이 되었는데, 다른 차 역시 마찬가지였던 것이지요. 그 이유를 물으니 모래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라네요. 만약 바람이 가득 채워 있으면 바퀴를 힘껏 굴릴수록 모래 안으로 더 깊이 빠져들기 때문입니다.
타이어의 바람을 빼야 모래 속에 빠지지 않는 것처럼, 우리들의 삶 안에서 빼어할 부분이 많지 않은가 싶습니다. 욕심, 이기심, 미움, 비교, 부정적인 마음 등등.... 그래야 모래사막과 같은 세상의 갈등 안에 빠지지 않고 주님의 뜻에 맞게 그리고 주님의 일을 하면서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정제천 신부님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에 대한 예수님의 맹렬한 비난의 연속이다. 예수님은 종교 지도자인 그들에게 대립각對立角을 확실하게 세우신다.
우리는 종종 실재의 예수님과 내가 만든 예수님을 혼동한다. 예수님을 부드럽고 따스한 분, 친절한 분, 말소리는 조용하고 차분하시고, 결코 화내는 법이 없는 그런 분으로 상상하곤 한다. 그러나 내가 만든 예수님, 내 문화가 만들어 낸 예수님을 믿는 것은 우상숭배다. 살아 계신 분을 믿어야 한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과 두루 편안하게 잘 지내신 그런 분이 아니었다. 만일 그렇게 사셨다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지 않았을 것이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정의를 설파하시고 끝까지 지키셨다. ‘무릎 꿇고 살기보다 서서 죽길 원하시는’ 분이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위선을 질책하신다. 그들은 겉과 속이 다르다. 겉으로는 하느님과 정의, 사랑과 자비를 말하지만, 속으로는 이권과 타산을 노린다. 하느님을 섬기라 하면서 사실은 자신을 섬기는 것이다. 이들의 모습은 나를 돌아볼 수 있는 성찰의 주제가 된다. 지금 내 모습은 어떠한가?
또 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예언자들과 의인들의 편에 서는 것처럼 행세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들을 죽일 음모를 꾸미고 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의 속마음을 드러내기 위해 “너희 조상들이 시작한 짓을 마저 하여라.” 하고 말씀하신다. 이는 십자가의 죽음을 이미 각오하셨다는 뜻이다.
가난한 사람과 병자, 세리와 창녀, 사회에서 손가락질받는 이들에게는 한없이 관대하고 따스한 그분이 종교적 위선자, 거짓 지도자에게는 분노를 참지 못하신다.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것, 교회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왜냐하면 꽤 괜찮은 사람으로 살아가고 싶은 자기 이미지 관리를 포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보다 더 예수님을 사랑해야 한다. 그분과 그분의 정신을 지키기 위해서 나를 바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회칠한 무덤!
김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님
“불행하여라, …… 회칠한 무덤 같기 때문이다.”(마태오2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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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호되게 꾸지람을 듣는다.
회 칠한 무덤!
위선이라는 말에 대해 이 이상 효과적으로 표현한 말을 찾을 수 없을 것 같다.
썩어가는 주검의 악취와 분해된 뼈들만이 존재하는 곳.
하지만 겉은 회를 칠해 외관은 깨끗해 보이고, 그 안에 있는 것들은 보이지 않는다.
당시 이스라엘의 무덤 형태가 그러했다.
오늘 복음을 통해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회 칠한 무덤과 같은 이들을 구태여 2천 년 전까지 소급해 올라가 찾을 필요는 없다.
오늘의 교회와 그 구성원인 우리 각자 안에서도 분명히 보이는 모습일 테니 말이다.
먼저 각자 자신을 보자.
겉과 속이 같은 삶을 살고 있는가?
모르긴 해도 우리 모두는 이 부분에 있어서 아픔을 숨기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으리라.
2천년 전의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들과 가장 비슷한 입장인 사람들이 오늘날 교회의 성직자들이 아닐까 싶다.
나 역시 내 안에 바리사이나 율법학자들과 같이 회 칠한 무덤처럼 되지 않기 위해 애를 쓰고 있지만,
내 안의 악취에 괴로워할 때가 있다.
어쩌면 남의 평가는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스스로에게 내리는 평가가 중요하고 아름다워야 한다.
비록 넘어짐의 반복을 체험할 수밖에 없다 하더라도, 최소한 회 칠한 무덤 같은 삶이 되지 않고자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를 위한 기도는 절대적이다.
어쩌면 우리는 저마다의 모습 속에 제각기 다른 회 칠한 무덤을 가지고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기에 더욱 그분의 힘이 필요하다.
주어진 시간은 너무나 빨리 지나간다.
이 귀한 시간을 후회만으로 채울 수는 없다.
희망하자.
어느 시인의 글처럼 ‘가장 큰 하늘이 그대의 등뒤에 있다’는 것을 믿고 애써 보자.
"주님, 저를 제대로 바라볼 수 있는 은총을 허락하시고, 옳지 않다면 어떻게 해서라도 바로 잡아주소서. 아멘."
이 시대 위선자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한없이 자비하시고 끝없이 인내하시는 사랑의 예수님이시지만 마냥 좋으신 분, 속없이 마음 좋으신 분만은 결코 아닙니다.
예수님의 애끓는 사랑의 경고 말씀을 귀담아 듣지 않는 사람들, 그 좋은 산상수훈을 듣고도 삶의 변화가 없는 사람들을 향한 질책의 말씀은 무척이나 준엄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는 하였으나 마음에 새기지 않고 다른 쪽 귀로 흘려보낸 대표적인 인물이 있었으니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의 강력한 경고를 받은 사람들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었다는 사실은 정말이지 뜻밖의 일이었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의 여러 부류 사람들 가운데 가장 엘리트 집단의 사람들이었으며 나름 하느님과 신앙에 정통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당대 유다 백성들 가운데 잘 나가던 주류층 사람들, 지도급 인사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정말이지 의외였습니다. 그리스도 심판의 번갯불은 가장 안전하다고 여겨졌던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집 위에 떨어졌습니다.
하느님 그리고 율법과 가장 가까이 있던 것처럼 보이던 그들은 하느님, 그리고 구원으로부터 가장 멀리 내쫓기게 되었습니다. 반대로 가장 멀리 있던 사람들이 가장 하느님과 구원에 가까이 부름을 받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은총이기도 하지만 강력한 요청이기도 합니다. 우리 인간에게는 그분 구원과 생명의 말씀을 수용할지 말지 선택의 자유가 주어지지만, 각자가 선택한 결과는 자신이 책임을 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구세주이신 동시에 심판지이기도 합니다. 그분의 복음은 평화롭고 고요하지만은 않습니다. 수용과 응답에 대한 강한 요구와 함께 우리에게 던져지는 은총의 선물입니다.
이 시대에도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과 같은 종교 지도자들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하늘 문을 열어주어야 하는데 하늘 문을 가로막고 있습니다. 영혼의 의사여야 하는데 영혼들을 악으로 인도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첫 번째 협력자가 되어야 하는데 반대로 그분의 훼방꾼이 되고 있습니다.
우리 역시 삶이 생각을 받쳐주지 못할 때, 강론이 생활을 뒷받침하지 못할 때, 말과 행동이 유리될 때 준엄한 예수님의 심판에서 자유롭지 못할 것입니다.
오늘 나를 돌아봅니다. 신심 없는 신앙, 실천이 뒤따르지 않는 믿음, 구체성 없는 결심, 본질과 핵심에 접근하지 못하는 아둔함, 공연한 선민의식...
나 자신에게 요청되는 의무나 요구들에는 불성실하면서 이웃들의 어깨에 무거운 십자가를 올려놓은 위선과 이중성, 허례허식...
회칠한 무덤이 되지 않기 위해
전삼용 요셉 신부님
미국의 심리학자 스키너(Skinner) 박사의 상자에 의한 쥐의 미로학습실험에서 쥐들은 전기자극이 오는 벌이 주어지는 쪽의 길은 피하고 먹이라는 보상이 주어지는 쪽의 길을 선택하였습니다. 따라서 벌과 상을 적절히 잘 이용한다면 학습동기를 유발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의견은 미국을 중심으로 퍼져갔고, 우리나라 역시 이러한 의견을 대체로 수용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칭찬과 상은 매우 중요한 것으로 인식되었습니다.
따라서 어른들은 직접적인 동기유발의 방법으로 경쟁심리를 부추기거나 상벌을 이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옆집 누구는 몇 등이라는데, 넌 왜 그렇게 못 하니?” “이번 시험에 몇 점 받으면 뭐 해 줄게”하며 아이들을 당근과 채찍으로 공부에 대한 동기유발을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위선을 질책하시는데 바로 내적으로는 썩어있으면서도 외적인 것만 신경 쓰는 회칠한 무덤과 같은 면을 지닌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학습의 목표가 몇 등 하느냐, 혹은 누구보다 잘 하느냐가 아니라 학습 자체의 즐거움보다는 부수적인 ‘외적인 결과’에 치중하게 하기 때문에, 결국에 가서는 학습자들에게 불안감을 조성하고 학업성취와 창의성을 떨어뜨리며, 부정적·적대적 대인관계를 형성하게 된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나중에는 이런 외적인 동기부여의 노예가 되어 내적인 만족감에는 신경을 쓰지 못하게 되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어느 신문사에 수습기자를 채용했습니다. 이 수습기자들이 매우 열심히 일했기 때문에 신문사는 많은 수익을 올렸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보수를 지급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리고 보수가 없을 때보다 더 열심히 일할 것을 기대하였지만 현실은 정 반대의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처음엔 일하는 즐거움 때문에 일을 하였는데, 이제는 보수 때문에 일을 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유치원 어린이들 교실에 새로운 놀이를 하도록 두 파트로 나누어 시켰습니다. 한 교실에서는 그 놀이를 한 어린이들에게 사탕을 주었고 한 교실 어린이들에게는 주지 않았습니다. 한 달 뒤엔 어떻게 되었을까요? 사탕을 받은 아이들은 더 이상 그 놀이를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 놀이의 즐거움을 사탕의 달콤함 때문에 잃게 된 것입니다. 물론 사탕을 받지 않은 아이들은 계속 그 놀이에 흥미를 느꼈습니다.
따라서 내적동기가 실제로는 더 중요한데 무절제한 외적동기 때문에 내적인 즐거움을 잃게 되는 경우가 많은 것입니다.
[참조: 네이버 블로그, 채희석-판스퍼미아, 내적동기이론]
오늘 예수님은 외적인 모습만 중시하고 내적인 것을 무시하는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을이렇게 비판하십니다.
“너희가 겉은 아름답게 보이지만 속은 죽은 이들의 뼈와 온갖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차 있는 회칠한 무덤 같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학생만큼 많이 공부하는 아이들도 없고, 또 수준도 우리나라만큼 높은 나라도 없습니다. 그러나 대학이상에 가서는 다른 나라 아이들보다 창의성이나 몰입도가 떨어집니다. 겉은 번지르르한 교육제도이지만 속은 전 세계 학생 중 가장 행복하지 못한 아이들이 되어버렸고 자살률도 세계 1위가 되어버렸습니다.
어쩌면 우리나라 지도자들이나 우리 부모님들도 이런 결과에 대한 책임이 없다고는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아이들을 위한다고 하면서도 결국 아이들을 가장 비참한 교육현실로 몰아넣었습니다. 학생들이 자살하며 죽어나가도 그 때뿐이고 자신의 자녀들은 경쟁에서 꼭 이겨 좋은 대학에 들어가기를 원합니다. 실제로는 아이들의 행복에는 관심이 없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먼저 종교교육을 철저히 시키는 유태인들이 그렇게 공부도 잘하고 노벨상도 휩쓸고 있는 현실을 우리 교육방식과 비교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의 후손들인 그들이 지금은 내적인 것부터 먼저 살피고 있습니다.
돈 때문에 자살을 생각했다면 자신의 전부가 돈이란 뜻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썩어 없어질 돈보다는 귀한 존재입니다. 외적인 것에 치중하지 말고 내적으로 온 우주의 주인을 모시고 있는지부터 살펴야합니다. 다 잃어도 하느님만 있으면 다 가진 것입니다. 회칠한 무덤이 되지 말고 속부터 살피는 우리들이 되어야겠습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그리스도의 뒤를 멋지게 따라갔던
성 아우구스티노 축일입니다.
온전한 영혼으로
성장하기위해 하느님 은총이
얼마나 간절한지를 성인의
삶에서 배우게 됩니다.
후회만이 아니라
오히려 넉넉한 영혼의 사랑을 통해
참된 회심을 봉헌한 성인의 삶에서
차고 넘치는 하느님 사랑을 만납니다.
부끄러운 역사조차
은총으로 만발할 수 있음을 성인에게서 배웁니다.
사랑스럽지 않은 것이 어디있겠습니까.
은총아닌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모든 것은 하느님의 은총이며 사랑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아우구스티노처럼
자기자신의 역사를 받아들이고 자신을 사랑하며
이제는 사랑이신 하느님과 같이 사는 것입니다.
하느님 사랑안에 살아가는 모든 존재는
아름답고 눈부십니다.
마침내 고통까지도 은총이 됩니다.
우리의 삶에서 울려나오는
가장 본질적인 한 마디의 봉헌이
하느님 사랑이기를 기도합니다.
회개는 사랑입니다.
사랑을 통해 모든 것들을
다시 사랑하는 하루되십시오.
성 아우구스티노, 우리의 빈곤한
사랑을 위하여 빌어주소서!
우리가 가야 할 길은 사랑입니다.
어떤 할아버지께서 여러 해 동한 심한 청각장애를 겪어오셨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도저히 안 되겠다고 생각하셨는지 직접 의사를 찾아가서 아주 비싼 돈을 주고 완벽하게 들을 수 있는 보청기를 다셨습니다. 한 달이 지나 할아버지께서 그 병원을 다시 찾아갔습니다. 의사 선생님께서는 이렇게 물으셨지요.
“청각이 완전하게 돌아왔군요. 이제 다시 들으실 수 있게 되었으니, 가족들이 정말로 좋아하시겠네요.'
이에 할아버지는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아니오. 가족들한테는 제가 보청기를 했다는 사실을 아직 말하지 않았어요. 그리고 나는 가만히 앉아 그들이 주고받는 이야기를 듣기만 한답니다. 그동안 유언장을 세 번이나 고쳤어요.”
할아버지가 유언장을 세 번이나 고쳤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가족들이 할아버지가 듣지 않는다는 생각을 갖고 아무렇게나 이야기했기 때문인 것이지요. 할아버지가 듣든 듣지 않든 변함없는 모습으로 다가서야 하는데, 듣지 못하시니까 아무렇게나 말했고 이를 통해 큰 상처를 받으셨던 것이었지요.
이러한 위선을 우리도 종종 갖게 됩니다. 즉, 겉으로는 그럴싸한 모습이지만, 속으로는 온갖 더러운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겉과 속이 다른 모습을 꾸짖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위선으로 살아가는 사람이야말로 ‘불행하다.’ 라고 선포를 하시지요.
복음 말씀을 잘 이해하기 위해 약간의 설명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먼저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향해 “너희가 겉은 아름답게 보이지만, 속은 죽은 이들의 뼈와 온갖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차 있는 회칠한 무덤 같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당시 무덤은 죽음과 닿아 있기 때문에 부정한 것으로 여겼습니다. 따라서 무덤에 횟가루를 뿌림으로 인해 사람들이 어둠 속에서도 그것을 알아보고 손을 대는 일이 없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즉, 겉은 회칠을 해서 그럴싸해 보이지만 역시 부정한 무덤에 불과한 것인데, 우리 역시 겉만을 꾸밀 뿐 가장 중요한 마음은 아무렇게 방치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또한 예언자들의 무덤을 만들고 의인들의 묘를 꾸미면서 조상들의 잘못된 판단을 지적하고 있지만, 사실 조상 못지않은 잘못된 판단으로 악행을 계속하고 있음을 말씀하십니다. 남을 평가할 위치가 아니라는 것이지요.
겉과 속이 다른 사람, 자신을 제대로 바라보지도 못하면서 남을 평가하는 사람을 가리켜서 주님은 ‘불행하다’고 선포하십니다. 단순히 말로만 불행한 것일까요? 아닙니다. 이런 모습을 하느님께서 받아주시지 않기 때문에, 그럼으로 인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에 참으로 불행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의 나는 과연 불행의 길로 가고 있나요? 아니면 행복의 길로 가고 있나요?
겉과 속이 일치하는 주님의 제자로 살아야 합니다. 또한 남을 평가하기에 급급한 것이 아니라 나의 마음부터가 올바를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래야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으며, 주님께서 제시하신 진리의 길로 걸어갈 수 있습니다.
세상이 자신에게 준 것보다 더 많이 세상에 되돌려 주는 것, 그것이 바로 성공이다(헨리 포드).
눈물 흘리는 영의정(‘좋은생각’ 중에서)
선조, 광해군, 인조 세 국왕의 지극한 총애를 받으며 영의정을 다섯 번이나 지낸 이원익은 조선 중기의 난국 속에 보기 드문 충신이었다.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왕위에서 쫓겨나고 한창 어지러운 시국이었다. 새로 임금의 자리에 오른 인조는 이원익을 영의정에 임명했다. 당시 인조반정의 주도 세력들은 광해군을 없애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자 이원익은 광해군 밑에서 영의정을 지낸 자신도 떠나야 한다는 말로 인조를 설득해 광해군의 목숨을 구했다.
얼마 뒤 인조는 이원익에게 광해군 시절, 부정한 짓을 저지른 사람들을 처벌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그 소식을 전해 들은 세도가들은 이원익에게 환심을 사기 위해 온갖 방법을 동원했다.
하루는 어느 세도가의 첩처럼 보이는 여인이 이원익의 집을 찾아왔다. 무슨 일로 왔느냐는 질문에 여인은 그에게 작은 보따리를 내밀었다. 보따리를 풀어 보니 값비싼 구슬이 박힌 신발이 나왔다. 곧이어 여인은 제발 자기 주인을 살려 달라고 부탁했다. 아무 말 없이 보석 신발을 보던 이원익의 눈에서 갑자기 주르륵 눈물이 흘렀다. 뜻밖의 모습에 당황한 여인이 어찌할 바를 모를 때 그가 탄식하며 말했다.
“신하의 집에 이렇게 귀한 보석이 있었으니, 어찌 나라가 어렵지 않을 수 있겠는가! 헐벗은 백성들이 굶어 죽는 마당에 한낱 첩에게 이런 신발을 신기고도 살기를 바라다니!”
이원익은 당장 그 신발을 가져가게 한 뒤, 그 세도가에게 엄한 벌을 내렸다.
인터넷 신문에서 이러한 기사 내용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 원문을 그대로 올려봅니다.
“10대였던 2003년도에 우리나라 돈으로 약 39억 원에 해당되는 어마어마한 복권에 당첨돼 인생역전으로 화제를 모았던 캘리 로저스(22)가 6년이 지난 지금 파산위기에 몰린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 청소부로 일하며 어렵게 생계를 유지하고 있는 그녀는 너무 어린 나이에 너무 많은 돈을 얻어 인생이 망가졌다고 하소연했다고 한다. 당첨된 후 그녀는 돈을 펑펑 썼고 가족들에게도 나눠줬다고 한다.
주위 사람들의 행복을 위해 돈을 썼지만 돌아오는 건 단지 자신의 돈을 노린 배신뿐이었고 마음에 상처를 받아 두 번이나 자살을 시도했다고 한다. 그녀는 가난해도 지금이 더 행복하다고 덧붙였다.
누리꾼들은 ‘아주 소중한 경험을 얻었네요.. 힘내세요’, ‘지금도 어린 나이인데 그 많은 상처들을 어떻게 감당해냈을까요...’라는 등의 반응을 보이고 있다.”
39억 원이면 결코 작은 돈이 아니지요. 어마어마한 액수이고, 이 정도면 못할 것이 하나도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쉽게 들어온 돈은 쉽게 나간다는 말도 있듯이, 6년 만에 파산위기에 몰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6년이라는 시간도 결코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두 번이나 자살을 시도했었지요.
여러분에게 39억 원이라는 돈이 생긴다면 어떠실 것 같습니까? 아니 누가 39억 원을 여러분의 통장에다가 아무런 조건 없이 넣어준다면 “이런 꽁돈이 생기면 행복하지 않데요. 그래서 저는 그 돈을 받을 수 없습니다.”라고 말하면서 거부하시겠어요? 아니지요. ‘다른 사람들이 불행의 길로 간다 할지라도 나는 달라.’라면서 흔쾌히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꽁돈이 생긴 사람들의 마음은 처음에 다 그랬습니다.
이 세상의 물질적인 것들에서 나오는 유혹을 이겨내기란 너무나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겉으로는 너무나도 보기 좋고 화려한 것이 이 세상의 물질적인 것들이니까요. 그러나 진정한 행복은 여기에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들을 떨쳐냈을 때 진정으로 행복할 수가 있습니다.
오늘 복음도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들을 꾸짖는 장면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꾸짖는 이유는 겉으로만 의인처럼 보이고 가장 중요한 속은 위선과 불법이 가득했기 때문입니다. 즉, 진정으로 중요한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고,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들의 유혹처럼 겉으로만 그럴싸하게 꾸미는 그 위선을 더 이상 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무엇이 중요할까요? 진정으로 중요한 것을 쫓는 우리들이 될 때, 오늘 독서의 사도 바오로처럼 하느님께 깊은 감사를 드릴 수 있는 신앙인이 될 수 있습니다.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의 차이는 한 사람의 결심에 달려 있다.(토미 라소다)
친절함의 가치(‘사랑밭 새벽편지’ 중에서)
어느 부자(父子)가 아들의 신발을 사러 신발가게에 갔습니다. 가게로 들어서자, 그 곳엔 다리를 꼬고 껌을 짝짝 씹으며 의자에 불량하게 앉아있는 직원이 있었습니다.
직원은 아들이 맘에 드는 신발을 고르자 "그게 좋으시면 5000원 깎아 드리겠습니다!" 라며 아무거나 골라라 라는 식으로 말했습니다.
"아들아 우리 다른 가게로 가자꾸나." 아버지는 아들을 데리고 다른 가게로 갔습니다.
다른 가게에 들어서자, "어서 오세요!" 라며 친절하게 맞아주는 직원과 방금 전 아들이 골랐던 신발과 흡사한 신발이 있었습니다.
"고객님께 어울리네요! 그 신발로 하실 건가요? 원하시면 맞는 사이즈를 가지고 오겠습니다."
아버지는 새로 산 신발을 아들에게 신긴 후, 가게를 나왔습니다.
가게를 나선 뒤 아들은 아버지께 물었습니다.
"아버지, 왜 두 번째 가게에서 신발을 사셨나요? 첫 번째 가게에서 샀으면 5000원이나 더 싸게 살 수 있었는데요..."
"아들아. 첫 번째 가게에서는 5000원을 깎아준다고 하였지만, 5000원 보다 더 큰 불친절을 우리에게 주었지. 그러나 두 번째 가게에서는 5000원을 깎아주지 않은 대신에 5000원 보다 더 큰 친절을 우리에게 주지 않았니?"
우리의 마음
박대남 신부님
“마음속에 있는 것은 밖으로 드러나고, 밖으로 드러나는 것은 그 마음의 거울이다”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 어떤 것으로도 마음속의 것들을 숨길 수는 없습니다. 누구나 그 행동, 행위를 통해 그 사람의 마음을 알 수 있고, 그 진심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삶이 그러하셨습니다.
오직 두 가지, 하느님 아버지께 대한 사랑과 순명 그리고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 이 두 가지 마음으로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하느님의 외아들이 되셨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안다고 하느님의 말씀을 설교하는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들, 이들의 마음도 두 가지입니다. 하느님을 잘 안다고 착각하는 편견과 인간을 사랑하기보다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이용하려는 것. 이 두 가지 마음이 밖으로 드러나기에 예수님의 눈에는 그들이 회칠한 무덤으로 보인 것입니다.
가식과 교만으로 가득찬 이들로 보였던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어떠합니까? 지금 내 마음은 어떠한지요? 우리의 큰 원칙 중 하나인 ‘신앙인의 삶은 다른 이들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보여주는 것’임을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말씀 안에 있는 바로 그 사랑을 보여주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말씀을 아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하느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진리는 하나
한은주
본당 수녀님의 소개로 한글을 함께 공부하는 아주머니가 계시다. 몇 년 전 직장을 은퇴하고 혼자 생활하고 계신데, 어릴 적 못 배운 한이 있어 이것저것 배우고 싶은 게 많으시다. 나이에 비해 얼마나 명민하고 적극적이신지 함께 공부하며 오히려 내가 힘을 많이 얻는다. 그런 아주머니와 얼마 전부터 정치 문제로 부딪치고 있다.
아주머니는 ‘나는 중립이다.’하면서도 그렇지가 않았다. 이후 나는 내가 읽는 진보적 신문을 슬그머니 놓고 오고 아주머니는 아주머니대로 내 생각을 바꾸고 싶어 안달이시다. 물론 정치에 대한 견해는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하지만 아주머니의 논리는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비복음적이다. 평화와 평등, 민주의 가치를 위해 애쓰는 사람들의 목소리까지 왜곡되게 바라보는 거대 언론의 보도를 그대로 되풀이해서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아주머니를 비난할 수도 없다. 외부 세계의 정보를 유일하게 얻을 수 있는 한가지 매체에만 의존해 들은 대로 전하기 때문이다. 이제는 거대한 조직과 힘을 갖고 교묘하게 진실을 은폐하는 언론과 싸워야 하는 때임을 절감한다.
올봄 청계광장에서 용산참극과 희생자들을 기억하는 시국미사를 마치고 명동성당으로 걸어가는 길에 내가 끼어 있던 선두그룹이 경찰에 포위되었다. 한 시간 넘게 대치 상황이 계속되었고 여러 명이 잡혀 갔다. 아무 무장도 하지않은 시민들 앞에 경찰은 방패와 물대포를 갖추고 있었다. 순간 공포심에 도망가고 싶었다. 그리고 그 급박한 상황에서 친분이 있는 신부님을 만났다. 몇 마디 인사를 주고받는 것으로도 큰 힘이 되었다. 신부님들은 시민들 둘레에 서서 인간띠로 보호해 주었고 명동성당으로 가서 마지막 강복을 받고 헤어질 수 있었으나 용산사태는 아직도 해결되지 않았다. 공권력은 계속해 용산의 진실을 밝혀내려는 투사들을 짓밟을 뿐이다.
언제쯤이면 ?진실이, 진정성이 모두의 가슴에 새겨지는 날이 올까.’지금도 용산에서는 정의구현사제단 신부님들과 힘없는 철거민들의 미사와 기도가 올려지고 있다.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 5,?3?10) 다원화된 사회이지만 우리가 추구해야 할 진리는 하나뿐이다. 그 복음적 가치를 위해 나도 작은 힘을 보태겠다고 다짐해 본다.
“서로 자신의 죄를 고백하십시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어렸을 때 작은 형과 길을 가다가 밍크코트를 입고 유난히 장신구를 많이 하고 화장을 진하게 한 아줌마가 지나가는 것을 보고 “우와~ 왜 저러고 다니지?”하고 형에게 물었습니다.
형은 “응, 속이 비어서 그래. 속이 비어서 그걸 감추기 위해 겉을 저렇게 포장하는 거야”라고 대답해 주었습니다. 어린 애들 대화 같지 않죠? ㅋ
저는 그 때부터 어떤 사람이건 솔직하지 못한 사람은 그 안에 감추고 있는 안 좋은 것들이 있다고 판단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제 자신도 포장하며 살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한 분이 저에게 상담을 하였습니다. 어렸을 때 돈을 훔치는 버릇이 있었는데 지금도 사람들이 자신을 도둑놈처럼 보지는 않을까 두려워 마음을 잘 터놓을 수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저절로 자신을 포장하게 되고 솔직하지 못하니 저절로 깊은 인간관계를 가질 수 없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그런 죄를 짓지 않으니 괜찮다고 몇 번이고 되뇌어도 마음속에선 여전히 용서받지 못한 채 남아있는 것 같아 괴롭다는 것입니다.
죄를 지으면 양심이 죄인이라 자신을 심판하기 때문에 그것을 보이지 않기 위해 자신의 겉을 포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위선자들을 꾸짖을 때 썼던 비유인 ‘회칠한 무덤’입니다. 겉은 회를 칠해 하얗게 빛나지만 속엔 썩은 송장으로 가득하다는 뜻입니다. 속이 더러우니 겉이라도 번드르르 하게 꾸미는 것입니다. 따라서 빈 깡통이 요란한 법이고 속이 빈 사람들이 허영을 떠는 것입니다.
먼저 다른 사람에게 잘 보이려는 자신을 포기해야합니다. 하느님께 죄를 지어 잘못 보이게 된 것에 대한 보상심리고 다른 사람에게 인정을 받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 인정을 받은 사람은 사람에게 잘 보이려 하지 않습니다.
며칠 전에 한 자매님이 고해를 볼 수 없느냐고 저를 찾아왔습니다. 본당 신부님은 자신의 성당 후배였던 분이고 자신의 목소리도 잘 알고 있는데 가까이 살면서도 성당에 나가지 못해 본당 신부님께는 고해보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저는 저의 동기 신부들이나 가까이 지내는 신부들에게 고해를 합니다. 사실 아무 성당에나 가서 고해하는 것이 더 쉽습니다. 죄가 나의 치부라면, 그것을 가까운 사람들에게 무릎을 꿇고 고백한다는 것은 어쩌면 굴욕적이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가만히 살펴보면 가까운 사이일수록 서로 높아지려는 마음이 있어서 자신의 치부를 숨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부부 사이에서도 말 못하는 것들이 있게 마련입니다. 사랑은 신실해야하고 겸손해야 하는 것을 알면서도 자신의 치부를 고백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상대까지 자신을 무시할 것 같아서입니다.
과연 예수님께서 꾸짖으시는 회칠한 무덤처럼 되지 않기 위해서 우리가 실천해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어렸을 때 도마뱀을 잡으려다가 놓친 적이 있습니다. 하도 빨라서 손으로 잡기엔 쉽지 않았습니다. 저는 도마뱀의 꼬리를 재빠르게 밟았습니다. 도마뱀은 꼬리를 자르고 도망갔습니다. 잘려진 꼬리는 여전히 꿈틀거리고 있었습니다. 도마뱀이 꼬리를 자르고 도망간다는 얘기는 들었었지만 그때 처음 보았습니다.
그리고 깨달은 것은 ‘가장 중요한 곳을 잡지 않으면 다 잡을 수 없다.’입니다. 두 손으로 잡으면 바로 꿈틀거려 빠져나가는 큰 물고기를 들 때도 두 손가락을 아가미 사이에 끼어 넣으면 상처를 입지도 않으면서 쉽게 들어 올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도 사실 그들처럼 위선자가 되지 않기 위해 진실한 사람이 되라고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진실하게 사는 것의 핵심은 어디 있겠습니까? 바로 서로서로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것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그의 편지에서 “서로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기도해 주십시오.”라고 권고합니다.
아닌 것처럼 겉을 꾸미고 감추려하지 말고 우리의 잘못을 서로서로 고백합시다. 그러면 진실하다는 것이 겸손하다는 것과 같은 말이고 그것으로부터 모든 관계가 시작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며칠 전에 운전을 하다가 라디오에서 들은 재미있는 이야기입니다.
어떤 개구리 한 마리가 길을 지나가다가 대중목욕탕 입구에 쓰여 있는 글을 우연히 보게 되었답니다. 그곳에는 이러한 내용의 글이 적혀 있었지요.
“입 작은 동물이 입 큰 동물의 등을 밀어주는 목욕탕.”
개구리의 입이 좀 큽니까? 이 목욕탕만 가면 다른 동물이 자신의 등을 밀어 줄 생각을 하니 기분이 너무나 좋았습니다. 그래서 당당하게 이 목욕탕에 들어갔지요. 하지만 개구리는 신나게 남의 등만 밀어주고 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마들이 단체로 목욕탕에 들어왔기 때문이지요.
개구리는 정말로 억울했습니다. 그래서 성형외과에 가서 입을 크게 하는 수술을 받았습니다. 이제 하마보다 큰 입을 갖게 되었기에 다시 그 목욕탕을 찾았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도 신나게 남의 등만 밀어주고 왔습니다. 왜냐하면 목욕탕에 악어들이 단체로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개구리는 다시 성형외과를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악어보다도 큰 입을 갖게 해달라고 의사 선생님께 말씀드렸지요. 그런데 의사선생님께서는 그렇게 입을 크게 하면 하루 밖에 살지 못한다고 하십니다. 개구리는 자신의 체면만 살릴 수 있다면 하루만 살아도 억울하지 않다면서 당장 수술을 해달라고 했습니다.
드디어 개구리는 악어보다도 큰 입을 갖게 되었습니다. 물론 수술 후유증으로 하루밖에 살 수 없었지만, 그래도 괜찮았습니다. 모든 동물들이 자신의 등을 밀어준다면 그것으로 족했습니다. 개구리는 이제 자신 있게 목욕탕을 찾아갔습니다. 하지만 개구리는 그 자리에서 기절을 할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글쎄 목욕탕 입구에 이러한 글이 적혀 있었거든요.
“금일휴업”
자신의 부와 명예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지요. 그런데 그 모습이 마치 이 어리석은 개구리의 모습처럼 보이지 않습니까? 가장 중요한 것을 보지 못하고, 부차적인 것이 전부인 것처럼 착각하는 모습. 그 모습을 우리 주님께서는 가장 싫어하신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랑 그 자체이신 분이지요. 그래서 모든 이들에게 따뜻하게 다가가셨고, 또 따뜻한 말과 사랑 가득한 행동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에도 나오듯이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에게는 ‘불행선언’을 하시면서 ‘위선자’라는 말을 서슴없이 던지십니다. 바로 중요한 것을 행하지 않고 중요하지 않은 것이 전부인 것처럼 착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여기서 더 나아가 다른 사람들도 중요하지 않은 것만을 추구하도록 만들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은 이러한 모습을 추구해서는 안 됩니다. 가장 중요한 계명인 사랑의 계명을 마음 한 가운데에 간직하면서, 철저히 주님의 뜻에 맞게 살아가는 현명한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불행선언’의 주인공이 아닌, ‘행복선언’의 주인공이 될 수 있습니다.
남보다 더 나아지려는 욕심을 버립시다.
아름다운 승리(내 영혼의 핸드북/ 이기한)
육신의 장애를 극복함으로써 더욱 위대한 업적을 남긴 사람들이 많이 있다.
<일리야드>와 <오딧세이>를 쓴 호머와 <실락원>을 쓴 밀턴은 실명한 장님이었다. 중국의 역사가 사마천은 패장을 변호하다가 궁형을 당하였고, 거세당한 치욕을 참지 못하여 은퇴한 후 기록하기 시작한 것이 역사서이자 문학서이기도 한 <사기(史記)>이다. 법학가요 철학자인 한비자는 심한 말더듬이였기 때문에 자신의 이론에 대해 있을지도 모를 논박에 대한 반론을 글로 쓸 수밖에 없었고, 이렇게 해서 쓴 것이 그의 이름을 딴 <한비자>이다. 희랍의 유명한 웅변가인 데모스테네스는 본래 심한 말더듬이에다 발음도 정확하지 못하였으나, 입에 자갈을 물고 피나는 발음 연습을 한 끝에 훌륭한 웅변가가 된 사람이다. 돈키호테의 작가 스페인의 문호인 세르반테스는 한 쪽 팔을 잃은 상이 군인이었고, 미국이 루스벨트 대통령은 서른아홉 살에 소아마비로 두 다리를 못쓰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네 번이나 대통령에 당선되었었다. 그 외에도 베토벤은 청각 장애자였고, 바그너는 피부 질환으로, 반 고호는 환청에 시달렸으며, 손자는 절름발이였다.
이들은 모두가 장애를 극복하고 아름다운 승리를 이룬 주인공들이다.
우리의 삶에는 많은 선택이 있다. 하지만 무엇을 고를 것인가는 자신의 마음에 달린 것이다.
마음의 문
장재봉 신부님
마음은 모든 행복의 원천이지만 모든 불행의 근원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품은 생각만으로도 하느님께 기쁨을 드릴 수 있는 이유입니다.
열린 마음은 우주를 품을 수 있을 만큼 넓지만 닫힌 마음에는 실오라기 하나 들어갈 틈조차 없이 딱딱합니다. 하느님의 뜻을 깨어 생각하지 않을 때에 우리의 생각은 잔인하고 치명적인 무기로 변할 수 있음을 예수님께서는 단호히 밝히셨습니다. 악한 생각은 이미 내 것이 아니라 나를 조정하는 사탄의 것입니다. 때문에 자신의 생각과 마음에 예민하고 민감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나쁜 생각을 했더라도 회개하고, 그른 생각이 스친 자리라면 씻고 깨뜨려야 옳습니다.
입술에 돋은 가시를 뽑아내기 위해, 그리고 검은 속내를 가렸던 마음의 휘장을 찢어내기 위해 주님께 나아가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오늘 세상이 온통 우리들의 잘못된 생각과 악한 마음이 깨지는 소리로 요란했으면 좋겠습니다. 모든 저주가 사라지고 악한 시선이 녹아져서 우리의 예수님을 깜짝 놀라게 해드리면 참 좋겠습니다.
그래서 악의 문을 닫고 선의 문을 여는 복된 오늘이면 정말 좋겠습니다.
내 안에 가득한 것
-김정임-
세례를 받은 지 어느새 20여 년이 훌쩍 넘어버렸다. 사람의 나이로 치면 성년을 넘어선 것이다. 그러면 이제는 좀 더 어른스러워지고 제대로 살아가는 틀이 잡혀야 하는데 여전히 주님 앞에서는 철없는 아이마냥 버둥거리며 살고 있다. 처음 신앙을 가졌을 때보다 기도도 안 하고, 봉사도 못하며 어정쩡하게 성당만 오가며 살고 있다. 에고, 한심한 일이다. 내 안에 들어 있는 욕심과 쾌락에 의지하는 나약함을 버리고, 주님의 따뜻한 사랑과 배려하는 마음과 나누는 지혜로움으로 나의 영혼을 채워야 하는데…. 머리로는 아는데, 삶은 왜 내 뜻대로 살아지지 않는지….
갑갑한 마음에 눈을 감으니 한 신부님의 모습이 떠오른다. 한때 성서모임에 열정적이었을 때 만났던, 내 신앙에 커다란 힘을 불어넣어 주신 분이시다. 그분께 들었던 수많은 말씀은 아직도 내게 큰 힘이 되곤 하는데 오늘도 그분의 말씀이 나의 마음을 채워준다.
“내 마음이 작은 그릇이라면 하느님의 사랑은 커다란 항아리라 할 수 있다. 작은 그릇으로 물을 담아 커다란 항아리에 담으려고 애쓰지 말고, 작은 그릇을 물이 가득 담긴 커다란 항아리에 넣어라. 그러면 작은 그릇에 물이 가득 찰 것이다.”
내 작은 그릇으로 사랑을 담으려고 버둥거리지 말고, 그냥 주님을 믿고 따르며 주님의 사랑에 푹 젖을 수 있도록 나를 주님의 커다란 항아리에 집어넣으라고 하셨다. 애써 내 안의 악함을 없애버리려 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의 나를 주님께 맡기면 우리 주님께서 모두 해주신다고 하시던 그분의 모습이 오늘은 참 그립다. 내 안에 주님을 담으려 하지 말고, 나를 주님께 온전히 봉헌하라. 그러면 내 안에 주님의 사랑이 충만히 넘치리라.
노동 - 하느님의 뜻
경규봉 신부님
테살로니카 교우들 가운데에는 일하지도 않으면서 다른 이에게 폐를 끼치는 이들이 있었다. 주님을 믿는다는 핑계 하에 노동을 하지 않음으로써 자신의 십자가를 지지 않는 이들이 있었던 것이다. 어쩌면 그들은 임박한 종말에 대한 기대로 말미암아 극도로 긴장된 상태에 있었기에 일하기를 거부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사도 바울로는 일하기를 거부하는 자들을 게으른 자들이라고 하며, “일하기 싫어하는 사람은 먹지도 말라.”고 강하게 경고했다. 바울로는 자신의 모범을 따라 일하기를 권고한다.
하느님 나라를 준비하는 자세는 지상에서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서 그저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주어진 소명에 충실하고, 주어진 일을 성실히 하면서 하느님 나라를 준비하는 기다림이어야 한다.
하느님 나라에 대한 기대와 희망으로 사는 사람들은 이 세상의 것들에서 즐거움을 찾지 않는다. 하느님 나라에서 얻을 영원한 기쁨과 행복에 대한 기대가 너무 크기 때문에 세상 것들로부터 만족을 얻을 수 없다. 그래서 세상의 것들을 하찮은 쓰레기처럼 여긴다. 오직 주님만을 바라보고 산다. 그런데 이들 가운데 어떤 이들은 자칫 잘못에 빠질 수 있다.
하느님 나라를 너무 중시한 나머지 세상 삶 자체를 무가치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육신을 마치 영혼을 구속하는 감옥이나 껍데기처럼 생각하고, 현세의 삶을 그림자처럼 생각하여 현세적 삶에 전혀 의미를 두지 않을 수 있다. 그래서 자신이 해야 할 일도 전혀 하지 않고, 자신의 십자가를 지지도 않을 수가 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만드실 때, 좋고 아름답게 만드셨고, 사람으로 하여금 이 세상을 잘 다스리며 살도록 하셨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위하여 친히 에덴동산을 만드셔서 그 동산에서 사람이 행복을 누리며 살도록 하셨다. 동산에 보기 좋고 맛있는 열매를 맺는 온갖 과일나무를 만드시고 그 열매를 따먹도록 하셨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에게 생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노동을 하도록 하셨던 것이다. 노동을 통해서 행복을 누리도록 하셨다. 때문에 하느님께서 만드신 세상에 살며 노동하는 것은 나쁜 것이 아니라 좋은 것이다. 육체노동이든 정신노동이든 노동은 그 자체로 하느님의 뜻에 따르는 것이다.
더욱이 하느님 나라는 현세와 전혀 무관한 것이 아니라, 현세의 삶과 밀접한 관계에 있다. 예수님께서도 친히 육체노동을 하셨다. 그리고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마태 16,24)라고 말씀하셨다. 현세의 삶이 중요하며, 현세의 삶 속에서 자기 십자가를 지고 살아야 한다는 말씀이다.
그리스도교의 영성을 충실히 간직하며 보전하는 수도회들은 기도와 더불어 노동에 대하여서도 소중히 생각한다. 그들은 기도를 통해서만이 아니라 노동을 통해서도 하느님께 가까이 나가곤 한다. 그들은 다른 이들의 도움 없이 스스로 노동을 통해서 수도회를 유지해 나간다. ‘기도와 일’을 하느님께 나가는 소중한 길로 생각한다.
오늘, 노동의 신성함에 대해 생각하자. 노동은 곧 하느님의 뜻이며, 하느님께서는 노동을 통해서 행복을 누리도록 하셨음을 생각하자. 나에게 주어진 일을 충실히 행하는 것, 그것은 자신의 십자가를 충실히 지는 것이며,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것임을 생각하자.
외적인 행위와 내적인 동기의 현저한 갭(Gap)
박홍도 신부님
오늘 복음도 월~화요일에 이어 예수님께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을 책망하시는 내용입니다. 그 책망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예수께서는 여러차례 내면의 중요성에 대해 이야기 하셨습니다.
마태오 5.8에서 “예수께서는 오직 마음이 깨끗한 자들만이 하느님을 뵙게 될 것이다.” 라고 하십니다. 또 입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사람을 더럽힐 수 없으며 참으로 사람을 더럽히는 것은 마음에서 나오는 생각과 말이라고 마태오15장에서 이야기 하고 계십니다. 또 오늘 복음 앞 구절 23, 25-26 에서는 정결예식에서는 중요한 것은 외적인 의식 즉 컵과 그릇은 닦는 것이 아니라 속마음이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그들의 외적인 행위와 내적인 동기는 심히 동떨어져 있었습니다. 이런 그들의 삶을 예수님께서는 “회칠한 무덤”과 같다고 책망 하십니다. 옛날 이스라엘 사람들은 시골에 있는 무덤들을 사람들이 즉시 알아오고 우발적으로라도 무덤을 만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회를 칠해야만 했습니다. 왜냐하면 무덤에 닿게 되면 의식상 부정하게 되어 기도나 예배에 참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바리사이파와 율법학자들을 회칠한 무덤이라고 한 것은 무덤은 겉에서는 그럴싸하게 보이지만 그 속은 썩는 것으로 가득 차 있듯이 그들도 겉으로는 의로운 사람같이 보이지만 속은 위선과 불법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예수께서는 율법학자들과사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무딘 마음을 책망하고 계십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예언자들과 의인들의 묘소를 돌면서 “우리가 우리 조상들 시대에 살았다면 조상들이 예언자들의 피를 흘리는 일에 가담하지 않았을 것이다” 합니다. 이렇게 그들은 자기들이 조상들보다 더 훌륭하며 자기들이 무덤을 꾸며 놓은 의인들의 편에 서 있다고 뻔뻔스럽게 생각하십니다. 이러한 착각으로 인해 그들의 눈은 더 멀어졌고 마음이 더 무디어 진 것입니다.
오늘 독서에서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과는 다른 삶의 모습을 바오로 사도가 말해주고 있습니다.“우리는 여러분과 함께 있을 때에 게으른 생활을 하지 않았고 아무에게서도 빵을 거져 얻어 먿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여러분 중 어는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밤낮으로 수고하며 애써 노동을 했습니다. 그렇게 한 것은 우리가 여러분에게 요구할 권리가 없어서가 아니라 여러분에게 우리를 본받게 하려고 스스로 모범을 보인 것 입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마음을 깨끗이 하고 하느님과 스스로에게 정직할 수만 있다면 그들의 외적인 행동과 사람들에 대한 태도도 즉시 깨끗하고 진실한 것이 될 것입니다.
언젠가 천둥이 치고 비바람이 갑자기 쏟아지던날 공소 미사를 하러 가게 되었습니다. 제 차안에는 반주자와 그 딸이 함께 타고 있었는데 천둥소리를 듣고 무서워하던 그 아이가 곧바로 엄마품에 안겨 잠을 자고 있는 것 이었습니다. 금방 무섭다고 했는데 엄마를 믿고 엄마품에 안겨 금방 잠이든 것이었습니다. 그 아이를 보면서 왜 예수께서 어린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 하늘 나라에 들어 갈 수 없다고 하셨는지? 왜 그렇게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을 그렇게 책망하셨는지를 조금이나마 피부로 느낄 수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외적인 것에, 세상의 것에 매여 불안과 위선 속에 살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 스스로에게 정직한 삶을 살도록 노력해야 되겠습니다. 아울러 우리 본당의 아이처럼 하느님품에 안겨 사는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작년 11월. 어떤 분께서 성지에 나무를 기증해주셨습니다. 워낙 큰 나무이기 때문에 장비를 이용할 수밖에 없었고, 이 장비로 땅을 깊이 파서 나무를 심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 날 저는 깜짝 놀랄만한 광경을 보고 말았습니다. 글쎄 그렇게 큰 나무들이 모두 뽑혀있는 것입니다. 혹시 누가 와서 나무를 뽑았나 라는 생각도 했지만, 이렇게 큰 나무를 누가 뽑을 수 있을까요? 불가능한 생각이었습니다. 범인은 바로 ‘바람’이었습니다.
갑자기 불은 돌풍으로 인해서 심었던 나무들이 뿌리째 뽑혔던 것이지요. 그렇다면 왜 이렇게 큰 나무들이 힘없이 뽑혔을까요? 바로 심은 땅에 아직 자리를 잡지 못했기 때문에, 즉 뿌리를 내리지 못했기 때문에 강한 바람에 쓰러질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결국 이 나무들을 다시 새우고, 쓰러지지 말라고 나무 지지대를 세웠습니다. 그리고 이 나무 지지대는 거의 1년이 되어가는 지금도 여전히 세워져 있답니다. 아직도 뿌리를 완전히 내렸는지 모르니까요.
이 나무들을 보면서 이런 생각이 듭니다. 나무들이 땅에 뿌리를 내려야 쓰러지지 않는 것처럼, 우리 역시 주님께 뿌리를 내려야 쓰러지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들은 주님께 뿌리를 내리지 않습니다. 대신 이 세상의 세속적인 것들에 뿌리를 내리려고 하다 보니, 점점 주님을 떠나고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요?
만약 앞선 성지의 큰 나무들이, “나는 크니까 굳이 이렇게 답답한 땅에 묻혀 있을 필요 없어.” 하면서 땅에 뿌리 내리는 것을 거부한다면 어떨까요? 아무리 큰 나무라고 할지라도, 이 나무는 결국 뿌리가 말라 죽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우리 신앙인들도 이와 똑같습니다. 자신의 능력이 대단한 것처럼 사람들 앞에서 스스로를 자랑하고 내세운다면, 그래서 겉으로는 아름다운 것처럼 보이려고 노력하면서 속은 각종 위선과 불법으로 가득 차 있다면, 마치 나무뿌리가 말라서 죽어버리는 것처럼 우리들도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하고 말라 죽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주님께서는 이렇게 위선적인 사람들을 향해서 큰 소리로 말씀하셨지요.
“불행하여라~~~”
나는 과연 어디에 뿌리를 내리고 있을까요? 정말로 주님이라는 좋은 땅에 뿌리를 내려서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지… 그래서 세상의 누구보다도 행복한 사람이 되고 있는지를 반성해 봅니다.
나무를 사랑합시다.
사랑이 있는 풍경(셍떽쥐베리)
사랑이 있는 풍경은 언제나 아름답다
하지만 아름다운 사랑이라고 해서
언제나 행복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그 사랑이 눈부실 정도로 아름다운 만큼
가슴 시릴 정도로 슬픈 것일 수도 있다
사랑은 행복과 슬픔이라는
두 가지의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행복과 슬픔이 서로 다른 것은 아니다
때로는 너무나 행복해서
저절로 눈물이 흐를 때도 있고
때로는 슬픔 속에서 행복에 잠기는 순간도 있다
행복한 사랑과 슬픈 사랑
참으로 대조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 둘이 하나일 수 있다는 것은
오직 사랑만이 가질 수 있는 기적이다
행복하지만 슬픈 사랑 혹은 슬프지만
행복한 사랑이 만들어가는 풍경은 너무나 아름답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서로 사랑하면서
잠을 이루지 못하는 불면의 밤을 보내는 것이다
사랑이란 내가 베푸는 만큼 돌려받는 것이다
깊은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기꺼이 바치는 일이다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다 내주었지만
그 댓가로 아무것도 되돌려 받지 못한 경우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사랑을 원망하거나 후회할 수는 없다
진정한 사랑은 댓가를 바라지 않는다
나는 사랑으로 완성되고 사랑은 나로 인해 완성된다
예언자의 어려움
김광태 신부님
구약의 예언자들이 회복시키려 하던 이스라엘의 정신은 이집트를 탈출하고 광야를 방황하던 시절에 형성된 것입니다. 꼭 필요한 것 외에는 소유하는 것을 포기하고 함께 사는 사람 모두를 소중히 여기며,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하시던 야훼 하느님을 따르던 광야의 삶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는 완전히 바뀝니다. 더 많이 가지려 하다보니 다른 이들의 소유마저 빼앗고,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외면하게 되었습니다. 즉 하느님을 추종하고 인간을 중심으로 하던 삶이, 하느님을 잊고 자기 왕국을 건설하는 일과 물질 중심의 삶으로 바뀐 것입니다. 이런 삶을 용납할 수 없었던 예언자들은 안정과 번영을 추구하려는 이들에게 끊임없이 경고의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런 예언자들의 목소리가 거슬리자, 그들을 제거하여 자기들의 행실을 합리화했습니다. 예수님에 이르기까지의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서 보듯이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나 본능이 동일하기 때문에 어쩌면 예언자는 영원히 반대의 표적이 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서는 결코 인간을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그 마음을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표현하십니다.
“암탉이 제 병아리들을 날개 밑으로 모으듯, 내가 몇 번이나 너의 자녀들을 모으려고 하였던가?”(마태 23,37).
욕하면서 닮는다
‘우리가 조상들 시대에 살았더라면 예언자들을 죽이는 일에 가담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여 너희는 예언자들을 살해한 자들의 자손임을 스스로 증언한다.'
김보경 수녀님
한밤중에 벨소리가 울리더니 술 취한 여인의 푸념이 쏟아진다. 사는 게 너무 힘들고 지난날 자신을 미워한 아버지가 밉고 그런 아버지를 닮은 자신이 또 밉다고 울먹인다. 여인은 결혼할 때 양가가 마련해 준 전세금과 혼수 가구를 지난 15년간 이 일 저 일 전전하느라고 야금야금 다 까먹고 친정 돈을 빌려 낡은 집에 월세로 살고 있다. 남들은 결혼 햇수가 늘면서 재산도 는다는데 여인은 오히려 그 알량한 재산마저 점점 줄어들었다는 것이다.
그들 부부는 한 가지 일을 지긋하게 하지 못하고 힘들면 그만두기를 거듭하여 지금은 조그만 가게를 하면서 양가에게서 한 푼 두 푼 받아서 간신히 살고 있다. 둘 다 능력이 없는 것은 아니다. 곤란을 견디는 끈기와 자존심을 수그릴 겸손이 부족하다. 여인의 친정아버지도 그랬다고 한다. 좋은 기술이 있어도 자존심 때문에, 또 힘든 것을 못 견디고 한 직장에 오래 있지 못해서 가장 역할을 못하고 궁핍하게 살았다. 반면 다른 형제들은 그런 아버지를 미워하기보다 자신의 삶에 충실하고 성실하게 안정된 가정을 꾸미고 살고 있다. 그런데 여인은 아버지를 ‘욕하면서 닮았다’.
성덕은 악습을 연구하여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좋은 것을 거듭 실천하여 자신의 것으로 삼은 ‘좋은 습관’이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율법학자들이 자기 조상의 잘못을 들추어 비난함으로써 자신이 옳다고 주장하려는 것을 불행하다고 말씀하신다. 우리도 남의 잘못이나 부족한 점을 밝힘으로써 자기도 모르게 악습을 쌓느라 정작 좋은 것을 습득하는 성덕 쌓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는지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임종욱 신부님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아름다운 알프스에 한 소년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 소년은 아름다운 자연과 함께 놀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맑은 시냇물에서 하루를 보내던 그 소년은 갑자기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물 속에서 예쁜 돌멩이를 줍고 있던 그 소년은 "여기 물 속에 있던 돌멩이의 속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
속이 말라 있을까? 아니면 젖어 있을까?" 라는 궁금증이 생겼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소년은 궁금증을 확인하기로 하고서는, 물 속에 있는 돌멩이 중 주먹만한 돌멩이를 건져내었습니다.
그리고는 큰 돌에 던져 반을 쪼개버렸습니다. 그런데 그 돌멩이는 어땠을까요?
그 돌멩이는 완전히 말라있었던 겁니다.
근데, 이 돌맹이가 물속에 있었던 시간은 과연 얼마나 되었을까요?
10년, 20년 아니면 100년... 아니 그보다도 훨씬 더 오래 있었을 수도 있겠지요?
어쨌든 돌멩이는 오랫동안 물속에 있었지만 그 물을 한 방울도 자신의 몸에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아무리 좋은 사랑 속에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마음이 돌처럼 딱딱하면 그 사랑을 한 방울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겠죠.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 속에서 푹 잠겨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마음이 돌처럼 굳어 있으면 하느님의 사랑을 받기는 어려울 겁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분명 우리를 감싸고 있는데 우리는 그걸 종종 깨닫지 못할 때가 더러 많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위선을 책망하십니다.
위선자는 연극 배우처럼 가면을 쓰고 살아가는 사람을 말합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왜 위선자로 책망을 받았을까요?
그들은 누구보다도 하느님을 잘 알고 하느님의 뜻을 잘 실천하는 사람이라 스스로 자부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율법과 규율을 내세워 하느님 뜻보다는 자기들의 생각과 실천이 전적으로 옳고, 또한 그렇게 모든 유대인들이 따라야된다고 주장했기 때문에 예수님께 지탄과 책망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어떻게 보면, 그들이 수천 가지나 되는 규칙이나 규례를 준수하는 것은 어찌보면 참으로 대단한 일이고 어려운 일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뜻이 본질적으로 사랑이라는 사실을 잊고 지낸다는 것은 가장 중요한 핵심을 모르는, 그래서 마치 눈먼 사람이 길을 안내하는 어리석은 행동이나 위험한 일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또한 율법학자나 바리사이들은 온갖 율법의 조문들과 규칙들의 가르침을 통해 하느님을 따르는 사람, 하느님의 자녀로 이끄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제자로 만드는 누를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 신앙인들은 참으로 하느님의 뜻이 아닌 것을 제도화해서 만들어 놓은, 특히 상급자가 자기 편의대로 부리기 위해서 만들어 놓은 것이 마치 하느님의 뜻인 양 강요하고 괴롭히지나 않는지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삶의 모든 기준과 잣대를 예수님 안에서 찾아야 할 것이며, 그것은 서로의 인격존중과 자유와 선행에 기초를 두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불필요하게 사람을 괴롭히는 어떠한 미사여구의 규칙이나 관례도 하느님 앞에는 의미가 없는 것임을 생각하고 고쳐 나가야 할 것입니다.
제도와 규칙에 앞서 이것이 진정으로 사람을 위하는 일인가, 괴롭히는 일인가를 먼저 생각해야할 것입니다.
여기에서 참으로 하느님의 사랑이 나올 것이며 그 사랑이 이웃에게로 전해질 것입니다.
내가 율법주의자가 될 때, 나 자신만 규칙과 규정에 속박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다른 사람들까지 불필요하게 고통을 주는 결과를 낳는다는 것을 생각해봐야겠습니다.
사람은 참으로 귀한 존재들입니다.
모든 사람이 하느님께로부터 났고 하느님을 닮은 사람임을 항상 기억하며 이웃을 대하는 우리가 되면 좋겠습니다.
저희는 당신 빛으로 빛을 보옵나이다
이기양 신부님
오늘 복음을 묵상하다 보니 옛 시조 한 수가 저절로 떠오릅니다.
"까마귀 검다고 백로야 웃지 마라
겉은 검은들 속조차 검을소냐
겉 희고 속 검은 이는 너뿐인가 하노라.“
까마귀가 검다고 비웃지 말라는 거지요. 속조차 검지는 않다는 겁니다. 비웃는 백로야말로 겉은 희지만 속은 검으니 겉 다르고 속 다른 것을 노래한 시입니다. '열 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속담이 있듯이 겉 다르고 속 다르다는 뜻의 고사성어가 많이 있습니다. 말 그대로 겉 다르고 속 다르다는 뜻의 '표리부동(表裏不同)‘이라는 성어가 있는가 하면 입에 꿀이 있고 배에는 칼이 있다는 뜻의 '구밀복검(口蜜腹劍)‘도 있습니다. 또 웃으면서 속에는 칼을 감추고 있다는 뜻의 '소리장도(笑裏藏刀)‘라는 성어도 있지요. 모두가 겉과 속이 다르니 겉만 보고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교훈이 담겨 있습니다.
사람들은 겉 다르고 속 다른 사람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그런 사람들을 좋아하실 리가 없지요. 성경을 보면 예수님께서 단 한 번도 칭찬을 하지 않으시고 매번 꾸지람만 내리신 사람들이 있습니다. 말 그대로 ?’나만 미워해!?“하고 속상해 할만한 사람들이 있지요. 바로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는 형식주의적이고 위선적인 종교지도자들을 비판하고 단죄하고 계십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겉은 아름답게 보이지만 속은 죽은 이들의 뼈와 온갖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차 있는 회칠한 무덤 같기 때문이다.“(마태 23,26-27)
회칠한 무덤이 무엇인지를 알면 오늘 복음의 의미를 좀더 쉽게 알아들을 수가 있을 것입니다. 예부터 우리는 무덤 안에 회칠을 하였지만 유다인들은 무덤 겉에 회칠을 하였습니다. 유다 지방은 길가에 무덤이 많습니다. 그래서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무덤에 닿는 일이 종종 발생합니다. 특히 유다인들의 3대 명절인 유월절, 오순절, 초막절이 되면 순례객들로 거리가 뒤덮이고 비좁은 길을 가다보면 무덤에 닿는 일이 더 자주 일어나지요. 무덤에 몸의 일부가 닿는 것을 우리는 대수롭지 않은 일로 여기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은 몹시 부정타는 일로 여겨서 불결하게 생각하였고 명절 행사에는 참석하지도 못하게 하였습니다. 그 이유가 민수기 19장에 나옵니다.
"누구의 주검이든 그것에 몸이 닿는 이는 이레 동안 부정하다.“(민수19,11)
이러한 부정을 막기 위하여 유다인들은 길가에 있는 무덤에 회칠을 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회칠한 무덤이 멀리서 보면 햇빛에 반짝 반짝 빛나는 것이 여간 아름답지가 않았습니다. 속에서는 시체가 썩어가고 역겨운 냄새가 진동을 하지만 겉은 아름답게만 보였지요. 그래서 겉과 속이 다른 것을 회칠한 무덤이라고 표현했던 것입니다. 대단히 좋지 않은 의미인 것이지요. 그런데 오늘 예수님께서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에게 회칠한 무덤 같다고 맹공을 퍼붓고 계십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열심한 신앙인인 척 하지만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고 회개하지 않으며 성경의 참된 정신을 훼손하는가 하면 심지어는 하느님께서 보내주신 예언자들까지도 죽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겉과 속이 똑같을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 인간에게 겉과 속이 같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지나치게 다르면 안 되겠지요. 지금 이 시대는 너무나도 겉만을 중요시하며 살아갑니다. 한 때 이런 가사의 유행가가 있었습니다. 오늘 잠깐 생각해보니 요즘 이 노래가 들리지 않는 것 같습니다.
"얼굴만 예쁘다고 여자냐? 마음이 고와야지 여자지~“
요즈음 이 노래를 부른다면 바보로 취급당할지도 모릅니다.
이렇게 너무나도 포장과 겉모습에만 온 힘을 기울이는 요즈음이지만 또 많은 사람들이 그런 것에서 끝없이 갈증을 느끼며 채워지지 않는 진리에의 갈망을 느끼며 살아갑니다. 내면이 준비되지 않은 화려한 겉모습은 우리를 금방 질리게 할 뿐입니다. 정(情)도 느껴지지 않을 뿐더러 재미가 없지요. 마치 인스턴트 식품을 먹는 것처럼 처음 잠깐은 맛이 있는 것 같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허전할 뿐입니다. 사람의 참된 아름다움은 겉모습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면에 있는 것입니다. 신앙 생활도 마찬가지이지요. 겉과 속이 똑같을 수는 없지만 우리는 내면이 알차지도록 끊임없이 노력을 해야 합니다.
지금 계절은 가을의 문턱을 들어서고 있습니다. 가을은 풍성한 열매가 차곡차곡 쌓이는 결실의 계절이지요. 올 한 해 동안 신앙생활을 하면서 나의 신앙과 인격적인 성숙이 하느님 안에서 얼마나 풍요로운 열매를 맺었는지를 되돌아볼 시간이 되었습니다. 하느님께로 좀 더 나아가고, 또 이웃과 좀 더 친근하게 나의 것을 나눌 줄 아는 성숙한 신앙인의 모습으로 발전했는지를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자칫 겉모습만 추구하면 우리도 예수님께 회칠한 무덤이라는 꾸지람을 들을 수 있습니다. 겉모습보다는 내면을 가꾸는 멋진 신앙인이 주는 그리스도의 향기를 함께 나누고 싶은 하루입니다.
위선이라는 병의 치유(治癒)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아마 인간의 보편적 현상중 하나가 위선일 것입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는 겉은 아름답게 보이지만 죽은 이들의 뼈와 온갖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차 있는 회칠한 무덤 같기 때문이다.
이처럼 너희도 겉은 다른 사람들에게 의인으로 보이지만, 속은 위선과 불법으로 가득 차 있다.”
과연 여기에 해당되지 않는 사람들 얼마나 될까요? 누구나 정도의 차이 일뿐 위선이란 병을 지니고 있다고 봅니다. 저는 위선 역시 하나의 영혼의 질병으로 간주합니다. 겉과 속이 다른 표리부동을 위선이라 한다면, 겉과 속이 같음을 진실과 정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위선의 병든 삶이 아닌, 진실의 건강한 삶을 살 수 있을까요?
아침 식사 후 산책 중 며칠 전 모종한 어린 배추들이 뿌리내려 자라나는 건강한 모습이 참 싱싱하여 예뻤습니다. 엉뚱한 곳에 한 눈 팔지 말고 내 삶의 현실에 건강히 뿌리내릴 때 비로소 치유되는 위선임을 깨닫습니다. 삶의 현실에 뿌리내려 진실을 체험하며 흡수해 갈 때 영육으로 건강한 삶입니다.
“기도하고 일하라(Ora et Labora)"
우리 분도회의 모토가 위선은 물론 허무주의나 우울증에 대한 최고의 치유제입니다. 기도와 노동으로 삶의 현실에 뿌리내리는 것입니다. 기도와 노동에 충실하다보면 도저히 잔머리 굴리는 위선적 언행은 있을 수 없습니다. 진실하고 정직하고 단순하고 순수한 사람들이 됩니다.
얼마 전 잔디밭의 풀을 잠시 뽑으면서 노동의 중요성을 새삼 실감했습니다. 노동을 통해 자신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함께 노동하면서 성미 급한 사람은 저절로 자기를 절제하게 되므로 성급하게 서두르지 않게 될 것입니다. 특히 농사나 건축일은 서두른다고 되는 일이 아니기에 때를 기다리는 인내와 믿음을, 때를 아는 지혜를 터득해 가면서 자기 완성과 자기실현에 도달하게 된다는 것이지요. 그대로 수행으로서의 노동인 것입니다. 몸 노동을 통해서 비로소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한 분야에서 오랜 동안 노동에 종사해 온 분들에게서 저는 종종 수도자의 모습을 보기도 합니다. 뭔가 힘들고 불편하고 더딘 육체노동이 위선의 치유와 영신 건강에 제일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건강히 양성된 사람들, 결코 바다이야기 같은 사행성 도박의 유혹에 빠져 인생 망치지는 않을 것입니다.
바오로의 진솔한 고백이 심금을 울립니다.
“우리는 여러분과 함께 있을 때에 무질서하게 살지 않았고, 아무에게서도 양식을 거저 얻어먹지 않았으며, 오히려 여러분 가운데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수고와 고생을 하며 밤낮으로 일하였습니다.”
이런 자발적인 몸 노동이 없어 공짜와 요행을 바라며 돈을 헤프게 쓰는 겁니다. 정작 자기가 몸으로 일하여 건전하게 번 돈이라면 함부로 쓰지는 못할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 정말 기도와 노동의 사람입니다. 기도가 빠진 노동이라면 얼마 못가 영혼도 육신도 망가집니다. 끊임없는 기도를 통한 영혼의 기쁨이 노동에 스며들 때, 또 기도와 노동이 균형과 조화를 이룰 때 비로소 노동은 거룩한 수행이 되어 영육을 더욱 건강하게 만들 것입니다. 비로소 위선이나 우울, 허무주의의 병은 치유되어 진실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이 거룩한 미사 은총으로 우리의 위선의 병을 치유해주시는 참 좋으신 주님이십니다.
아멘.
마지막 불행선언 (6,7)
박상대 마르코 신부님
권력(power)이란 참으로 묘한 것이다. 딱 잘라 말하면 권력이란 아주 ‘위험한’, 그러면서도 아주 ‘필요하고 유용한’ 도구로서, 직무나 직책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고대 그리스 철학에서부터 권력에 대한 많은 고찰이 있었다. 그러나 ‘정치의 시대’라고 하는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권력에 대한 정확한 정의를 내리기는 어렵다. 넓은 의미의 권력은 ‘물리학적 에너지’에 해당하는 것으로서 ‘의도한 효과를 만들어내는 힘’(러셀)이다. 그러고 보면 권력은 좋은 것이다. 그러나 의도하는 바가 불순하거나 부당한 것이라면 문제는 심각해진다. 악(惡)을 위해 사용되는 도구로서의 권력이 아무리 중립적으로 선(善)하다 하더라도 목적을 정당화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일의 ‘결과’도 간과할 수 없는 요인이다. 그런데 목적이 항상 결과와 일치하지는 않는다. 필자는 권력을 ‘선(善)이라고 생각되는 장래의 어떤 것을 획득하기 위하여 그가 현재 가지고 있는 방법’이라고 정의한 홉스의 생각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예수님 시대의 율법학자들은 구약시대를 통틀어 백성들의 지도자로서 율법을 보호하고 전수하는 임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권력을 행사하였다. 그들이 지향하는 권력의 목적이 선(善)이었다고 하나 그 결과는 악(惡)을 초래하였다. 선의의 목적이 악을 초래한 결과를 보지 못한 것은 그들의 눈이 멀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예수님의 판단이다.(마태 23,16.17.19.24.)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에 대한 예수님의 엄중한 심판이 고조되는 가운데 오늘은 여섯 번째와 일곱 번째 치욕적인 불행선언이 잇따른다.
여섯 번째 불행선언은 율사들의 속에 가득 찬 위선과 불법을 향한 것이다. 예수께서는 율사들의 ‘겉과 속’을 회칠한 무덤에 비유하신다. 무덤의 외부를 회칠하는 이유가 내부를 덮어버리기 위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외부를 덮어버린다고 해서 내부가 달라질 리는 없다. 그것은 무덤을 아무리 아름답게 겉치장한다 하더라도, 화려한 겉치장으로 그 속에 잠들어 있는 사람이 하려해 질 수 없기 때문이다. 속은 속이고 겉은 겉이다. 다소 옳게 보이는 겉모양이 속내를 가릴 수는 있으나, 예수님의 눈에서는 불가능하다. 그분은 율사들의 속내에 가득 찬 위선과 불법을 꿰뚫어 보시기 때문이다.
일곱 번째 불행선언은 예수님 당대의 지도자들이 구약의 성자들과 예언자들의 죽음에 그 책임을 회피하려는 태도에 대한 고발이다. 그들은 자기들을 조상들과 조상들이 죽인 예언자들과 차별을 두면서 “우리가 조상들 시대에 살았더라면 조상들이 예언자들을 죽이는 데 가담하지 않았을 것이다”(30절)고 자신 있게 말한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바로 이 주장이 그들 스스로를 살인자, 박해자의 후손임을 자백하는 것으로 지적하신다.(31절)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너희 조상들이 시작한 일을 마저 하는 것’(31절)이다. 이것으로 예수님의 율사들과 바리사이에 대한 불행선언이 끝났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더 심하고 치욕적인 예수님의 언변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다. 이 언변은 유다교의 총체적인 종말을 의미하며, 야훼 하느님의 이스라엘 지도자들에 대한 마지막 심판이다. 어쩌면 겉과 속이 무덤의 겉과 속처럼 판이하게 다른 사람들의 운명일지도 모른다.
일하는 목적
전삼용 요셉 신부님
오늘 수원교구 어떤 본당의 한 보좌신부가 이번에 교황님이 오시는 것을 계기로 자신의 성당에서 4백 명이 넘는 입교자를 받았다는 말을 해 주었습니다. 요즘 같은 때에 그렇게 많은 입교자를 받는다는 것은 기적에 가깝습니다.
몇 달 전에 그 본당 주임신부님이 교황님이 오시는 것을 계기로 무언가를 해야 되지 않겠느냐고 이야기 한 적이 있었는데 저는 그저 한 귀로 듣고는 한 귀로 흘려버렸었습니다. 그런데 그 신부님은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던 것입니다.
먼저 소공동체와 레지오 두 파트로 나누었다고 합니다. 소공동체 각 구역별로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곳에 현수막을 설치하고 전단지를 돌렸습니다. 물론 그 성당 이름이 새겨진 물티슈도 함께 나누어 주었습니다. 레지오는 상가나 가정을 다니면서 현수막과 전단지, 물티슈 등을 돌렸습니다. 이렇게 사용된 돈이 천만 원 정도 된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신자들 모두에게 물티슈 세 개씩을 주고 각자 선교할 것도 권했습니다.
그리고는 교황님이 며칠 동안 한국에 머무실 때 본격적으로 입교자를 받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많이 입교신청을 하게 된 것입니다. 모든 언론에서 교황님이 대서특필되기 때문에 사람들의 마음도 가톨릭에 대한 관심으로 크게 기울었던 것입니다.
교구 복음화국에서 일하고 있는 저로서는 ‘이 운동을 전 본당에서 했다면 어땠을까!’라는 아쉬움이 크게 남았습니다. ‘그 신부님처럼 조금만 더 부지런하게 뛸 마음이 있었다면 얼마나 많은 영혼들을 구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을까!’라고 생각하니 주님께도 죄송스러웠습니다. 아마도 우리의 게으름으로 주위의 많은 영혼들을 잃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 독서에서는 바오로가 게으름에 대해 경고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러분과 함께 있을 때에 무질서하게 살지 않았고, 아무에게서도 양식을 거저 얻어먹지 않았으며, 오히려 여러분 가운데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수고와 고생을 하며 밤낮으로 일하였습니다.”
“일하기 싫어하는 자는 먹지도 말라”고 합니다. 일중독이란 말이 생각나게 할 정도입니다. 그러나 바오로가 ‘일하는 것’만 강조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일이 중요하긴 하지만 “항상 기뻐하십시오”라고 하며, ‘기쁨’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도 잊지 않았습니다.
가끔 동료 사제들과 이야기하다보면 사목을 위해 많은 일을 하는데도 ‘기쁨’을 못 느끼겠다고 말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행복하지 않기 때문에 사제의 길을 포기하기도 합니다. 우리들은 과연 가정을 위해서 자녀를 위해서 많은 일을 하며 살아왔는데 정말 기쁘고 보람스럽습니까? 기쁨이 없는 노력이란 열매가 없는 나무와도 같습니다.
‘돌아온 탕자’의 비유에서 작은 아들은 돈을 쓰며 흥청망청 놀았고 큰 아들은 일만 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아버지의 집에 들어가게 된 것은 아버지를 위해 쉬지 않고 일했던 큰 아들이 아닌 놀기만 했던 작은 아들이었습니다. 과연 큰 아들의 문제가 무엇이었을까요?
불교에서 가장 어리석은 여인을 표현할 때 물동이를 이고 땀을 흘리며 어디론가 계속 걸어가는 여인이라고 합니다. 일은 열심히 합니다. 그러나 그 여인은 목적지를 모른다고 합니다. 계속 돌아다닐 뿐인 것입니다. 그것이 어리석음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일을 합니까? 그 목적이 명확하지 않으면 언젠가는 자신이 한 모든 일이 헛수고였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작은 아들은 일을 하지 않는 것 같았지만 결과적으로는 아버지를 더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 집에 머무는 것이 더 행복하게 되었습니다. 반면 큰 아들은 아버지를 위해 일을 한다고 하면서도 행복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아버지를 원망하는 사람이 되어버렸습니다. 아버지는 당신을 더 사랑하는 자녀를 원하시지 그렇게 일만하는 사람을 원하시지 않습니다. 일은 하인을 시키면 그만입니다. 우리가 일 하는 목적은 하느님을 더 사랑하고 그래서 더 행복해지려는 목적이어야 합니다. 작은 아들은 행복했고, 큰 아들은 불만이 가득했습니다. 그래서 작은 아들이 큰일을 한 것입니다.
일을 해야 행복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도 일 하는 분이시기에 행복하신 분입니다. 마치 여인이 고생하여 자녀를 출산하면 기쁨을 느끼는 것과 같이, 결국 일을 하는 목적이 결국 나의 행복 때문임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겉은 아름답게 보이지만 속은 죽은 이들의 뼈와 온갖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차 있는 회칠한 무덤 같기 때문이다.”(마태오23,27)
김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님
회칠한 무덤이라면 겉은 깨끗해 보이는데 속은 썩고 있다는 말임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회칠한 무덤 같다고 일컬어진 이들은 단지 2천년 전 지중해 동남방에 있는 한 작은 나라의 법과 종교를 책임지는 자들에게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시대를 막론하고, 윗자리에 앉아서 사람들의 행동이나 세상 돌아가는 일들에 대해 예단하고 재단하는 일을 하는 이들은 늘 있어왔습니다.
제대로 된 사람들이 제대로 된 역할을 하면 백성들의 삶은 덜 고달파진다는 것이 역사의 체험입니다.
예, 그렇습니다.
오늘의 말씀은 일차적으로 소위 힘을 가진 삶을 사는 이들에게 하시는 엄중한 경고 말씀이십니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말이 있습니다.
가끔 저는 어느 것이 먼저인지 헷갈릴 때가 있습니다.
높은 자리에 앉았기에 사람이 변하는 것인지, 아니면 욕심이나 상처가 많아 삐뚤어진 인격을 가진 이들이기에 높은 자리까지 올라갈 수 있었는지 말입니다.
제 눈에는 마음이 병들어 보이는 이들이 높은 자리에 너무 많이 앉아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삼척동자도 혀를 찰 어이없는 짓거리들이나 생각을 보면 답답할 때가 참 많이 있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사람들을 이끌어야 하는 역할을 가진 이들은 조건 없이 깨끗해야 합니다.
사심을 포기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공인으로서의 자격을 잃게 되는 것입니다.
말과 행동에 대한 선택 기준은 옳음이고 최선입니다.
자리를 통해 얻는 것이 있다면 잃어야 하는 것들도 반드시 주어지기 마련입니다.
교회의 모습을 바라봅니다.
교황님께서 교황직을 수행하신 지 얼마 되지 않아 하신 말씀이 떠오릅니다.
사제에게 양들의 냄새가 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교계를 감투로 보아서는 안 됩니다.
높은 자리에 앉아서는 결코 양들의 냄새를 묻힐 수 없기 때문입니다.
너무도 상식적인 이야기를 우리 교회는 외면하며 지내왔습니다.
어떻게 양치기에게서 양의 냄새가 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양들을 위해 목숨을 바칠 수 있는 것이 양치기이고, 하느님의 양들을 위해 그렇게 하는 것이 사제들의 정체성입니다.
분명 목자가 바로 서면 그 교회는 무너지지 않습니다.
목자가 하느님의 뜻대로 제대로 살고자 노력하는 삶의 모습을 보인다면, 신자들은 방향을 잃지 않게 되어있습니다.
그러기에 누구보다도 복음적 영성으로 가득 차야 하는 것이 사제들입니다.
사제들이 삶의 현장으로 뛰어들어 불의에 맞서 소신을 펴는 것을 정치적이라고 해서는 안 됩니다.
쉽게 살 수 있습니다. 아니 누구나 편히 살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그분의 말씀에 재촉 받아야 하는 것이 사제들의 숙명입니다.
정치든, 경제든, 문화든, 모두가 사람을 주체로 하고 대상으로 하는 것이고, 그 사람들을 위해 살고 죽어야 하는 것이 하느님께서 주신 사제의 임무라면, 그 어떤 두려움에도 맞서야 하는 것이 사제들의 삶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삶은 기도 없이 결코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사제들은 알고 있습니다.
사제들을 위해 기도해주십시오.
똑같이 약한 인간입니다.
하지만 하는 것이 옳기 때문에 행동해야 하는 삶입니다.
목자답게 살 수 있어 행복한 사제들이 될 수 있도록 기도 해주셔야 합니다.
저 역시 회칠한 무덤이 아니기를 희망합니다.
눈물의 아들은 멸망하지 않습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의 한평생에 걸친 화두는 두 가지였습니다. 죄와 은총. 죄가 많은 곳에 은총이 더 풍부하게 내리고 있음을 아우구스티누스 성인께서는 우리에게 가르쳐주셨습니다. 죄는 나쁜 것이고, 우리를 힘겹게 하는 것이지만 죄는 다른 한 편으로 우리 인간 각자의 나약함을 알게 하고 하느님께로 나아가게 하는 도구로 사용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의 회개 과정에서 어머니 모니카의 역할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어머니 모니카는 요즘으로 치면 극렬 여성, 교육열이 엄청난 극성 어머니, 자식을 위해 뭐든 다 하는 어머니였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회심하기 전까지 약 10년 세월동안 마니교라는 이단에 빠졌습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신천지에 완전히 빠져든 것입니다. 더구나 모니카의 남편은 신앙심은 빵점이고 출세욕구나 야심으로 가득 찼던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과정에서 모니카는 언젠가 가족 모두가 하느님께로 반드시 돌아올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죽기 살기로 기도했습니다. 남편의 구원을 위해 16년 동안 꾸준히 기도해서 응답을 얻었습니다. 아들을 위해서는 30년간 하루도 빠지지 않고 기도해서 마침내 응답을 얻었습니다.
유학 떠나기 전에 아우구스티누스와 모니카는 북아프리카 지역, 요즘으로 치면 모로코 정도 되는 곳에서 사셨는데, 모니카가 어느 날 아주 좋은 특급 정보를 얻어왔습니다. 밀라노에 가면 암부로시오라는 아주 좋은 주교님이자 교사가 있다는 정보였습니다. 그리고 아들을 그쪽으로 유학보내기로 결심합니다. 그뿐 아니라 모니카는 아들 유학길에 같이 따라나섰습니다. 요즘 우리 극성 부모님들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그리고는 마니교도인 아들을 자연스럽게 암브로시오 주교와 접촉하도록 은근슬쩍 기회를 자꾸 만들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본의 아니게 주교님의 강론을 듣게 되고 조금씩 조금씩 회개의 기회를 만들기 시작한 것입니다.
아들의 회개를 위해 지극정성을 다 하는 모니카의 노력에 암브로시오 주교는 탄복합니다. 그리고는 열심히 아들을 도와줍니다. 그러면서 모니카에게 이런 유명한 위로의 말씀을 남겼습니다.
“눈물의 아들은 멸망하지 않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의 회개는 절대로 아들 혼자 이뤄낸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들과 어머니, 그리고 좋은 교사 암브로시오 성인, 그리고 하느님 네 사람이 만들어낸 합작품이었습니다. 네 명이 합작해서 만들어낸 향기롭고 찬란한 명품이 바로 교회 역사상 가장 위대한 교부이자 신학자인 성 아우구스티누스 주교님인 것입니다
이중적이지 마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저는 어려서 남모르게 아버지 옷 주머니에 손을 대서 돈을 꺼냈고, 불장난을 하다가 작은 댁의 사랑채를 다 태어버리기도 했습니다. 울타리를 엮은 구리철사를 풀러 엿을 사 먹기도 했으며 길에서 주운 돈을 주인에게 돌려주지 않고 개인적으로 쓴 적도 있습니다. 선생님 서랍에 있던 시험문제를 몰래 보기도 했고, 교실을 난장판으로 만들어 놓고 안 그런 척 했습니다. 큰 잘못을 저지르고도 숨긴 적이 여러 번입니다. 지금도 여전합니다. 사람들은 속아주었고 저자신은 뻔뻔스럽게 위기를 넘겼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모두를 알고 기다려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에게 꾸중을 하였습니다. ‘겉은 아름답게 보이지만 회칠한 무덤 같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겉은 의인으로 보이지만 속은 위선과 불법으로 가득하다’고 지적하셨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듣고 그 회칠한 무덤이 바로 저라고 생각했습니다. 신부이기 때문에 자동적으로 거룩한 삶을 사는 것은 아닙니다. 매일 미사를 봉헌한다고 성덕이 출중한 것도 아닙니다. 그에 상응하는 마음가짐과 정성을 담지 않으면 거룩한 것을 더 많이 접하기 때문에 오히려 더 불경한 잘못을 범하고 맙니다. 알면 아는 만큼 더 잘 살아야 하는데 그렇지 못합니다. 그래서 짐이 무거워집니다. 아는 것과 사는 것은 분명 다릅니다. 사실 신부이기 때문에 더 많은 위선을 떨고 이중적으로 사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신자들에게는 기도를 많이 하고 있는 것처럼 말을 하지만 최소한의 의무인 ‘성무일도’조차 거르고 지나갈 때가 있습니다. 성체조배는 물론 묵주기도를 하는 것은 기본이거늘 일반 신자보다 더 많이 기도한다고 얘기할 수 없습니다. 이러저러한 인간적인 욕망에 대해서도 절제 있는 기쁨을 누리지 못할 때가 너무도 많습니다. 그러면서도 아닌 척 하고 목을 빳빳이 세우고 다닙니다. 이런 모습에 주님의 마음이 얼마나 아프실까? 생각하면서도 몸은 여전히 육정을 따르고 맙니다. 그야말로‘마음은 간절하나 몸이 말을 듣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겉과 속이 다른 위선자를 얘기 하면서도 정작 자신이 그렇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살았습니다. 내 눈 안에 들보를 지닌 채 남의 눈의 티를 빼주겠다고 허우적거리는 모습이 부끄럽습니다. 주님께서는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 하여도 마음은 나에게서 멀리 떠나 있구나”하셨습니다. ‘이런 말을 하고 저런 행동’을 하며 위선과 허물로 누벼놓은 이날에 하느님의 크신 자비를 청합니다.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주님, 저의 허물을 용서하소서. 구원을 허락하소서. 아멘. 사랑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혼인을 앞둔 젊은이들과 혼배 면담을 할 때가 있습니다. 부모님은 알아도 혼인 당사자들은 잘 모를 때가 있습니다. 제가 젊은이들과 소통하는 방법은 편지를 써 달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만났는지, 결혼 준비는 어떻게 하는지,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지’에 대해서 메일을 보내 달라고 부탁을 합니다. 젊은이들은 진솔하게 자신들의 이야기를 제게 해 주곤 합니다. 저는 당사자들의 편지를 요약해서 강론 때 전해 주기도 합니다.
혼인을 앞둔 젊은이들에게 강조하는 것들이 몇 가지 있습니다. 첫 번째는 물론 신앙입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 하느님께 의지하고 기도하도록 당부합니다. 둘이 마주 보려하지 말고, 같은 곳을 보라고 이야기를 해 줍니다. 마주 보면 상대방의 허물과 잘못이 보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같은 곳을 바라본다면 화복한 가정, 충실한 신앙생활을 바라본다면 파도처럼 밀려오는 삶의 도전들을 극복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는 성실함입니다. 아내에게 성실한 남편이 되기를 부탁합니다. 남편에게 성실한 아내가 되기를 부탁합니다. 자신의 삶에 성실하기를 당부합니다. 주어진 일에 충실할 수 있기를 이야기합니다. 만나는 이들에게 최선을 다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성실함은 많은 부족함을 극복할 수 있게 합니다. 하지만 게으름과 나태함은 많은 장점들을 빛바래게 하기 마련입니다.
오늘 제1독서의 주제는 성실함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다른 나라 사람들과 비교할 때 정말 근면하고, 성실하다고 합니다. 일주일의 노동시간도 그렇고, 휴가를 보내는 시간도 그렇습니다. 이민 가서 한국 사람들이 하는 일들은 대게는 편의점과 세탁소의 일입니다. 다른 나라 사람들은 그 일을 잘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아침 일찍 가게 문을 열어야하고, 늦은 시간까지 일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한국 사람들은 그렇게 힘든 일을 정말 열심히 해서, 처음에는 고생을 하지만 나중에는 다들 집도 장만하고, 나름대로 삶의 기반을 잡습니다.
뒤에서 남의 이야기를 하는 것은 쉬운 일입니다. 하지만 팔을 걷어붙이고, 직접 봉사를 하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새벽에 쓰레기를 치우는 환경미화원이 있기에 거리는 깨끗할 수 있습니다. 예전에 읽었던 시가 생각납니다.
나태주
마당을 쓸었습니다.
지구 한 모퉁이가 깨끗해졌습니다.
꽃 한 송이 피었습니다.
지구 한 모퉁이가 아름다워졌습니다.
마음속에 시 하나 싹 텄습니다.
지구 한 모퉁이가 밝아졌습니다.
나는 지금 그대를 사랑합니다.
지구 한 모퉁이가 더욱 깨끗해지고
아름다워졌습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겉으로 드러나는 화려함보다는 드러나지 않지만 세상을 아름답게 하는 그런 사람들을 이야기 하십니다.
사랑의 눈물
인영균 끌레멘스 신부님
눈물의 의미가 다시금 생각나는 날입니다. 눈물은 여러가지 의미로 해석할 수 있지요.
아들 성 아우구스티노의 회개를 위해 어머니 모니카는 많은 눈물을 흘렸습니다.
처음에는 아들의 방황으로 말미암아 아프기 때문에 흘렀습니다.
나중에는 아들의 회개를 보고 고마워서 흘렀습니다. 그러니까 성녀 모니카 엄마 안에서 고통과 아픔의 눈물이 기쁨과 감사의 눈물로 의미가 변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모니카 성녀의 눈물은 근본적으로 사랑의 눈물이었습니다.
가장 고귀한 눈물은 사랑 때문에 흘리는 눈물입니다.
성녀 모니카가 흘린 눈물을 오늘 또 봅니다. 단식 45째로 맞는 ‘유민 아빠’ 김영오님의 눈물입니다.
이 눈물을 의심하고 음해하는 눈들이 많습니다. 또 이러한 음해성 정보에 속아 넘어가는 신자들도 참 많습니다. 정말 서글픈 우리 사회의 자화상입니다. 마이너스 통장과 두 딸과 나눈 카카오톡 대화까지 고스란히 공개해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사랑의 눈물을 흘리는 이는 어떠한 고난이 오더라도 인내하며 나아간다는 사실입니다.
당신이 추기경으로 계실 때 2009년 화재 참사 5주년 미사 강론에서 하신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말씀을 기억했으면 합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부에노스 아이레스는 울 필요가 있습니다. 부에노스 아이레스는 아직 충분히 울지 않았어요. 부에노스 아이레스는 일하고 아첨하고 돈 버는 데 골몰하고 주말을 어떻게 즐길까 신경쓰느라 더는 여기에 없는 우리 아이들을 위해 충분히 울지 않았어요.”
생각해 보면 해도 해도 너무 했습니다.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님
누가 그랬지요. 예수님 때문에 먹고 사는 사람들이 참 많다고요.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저부터 사목 외에 다른 일은 하지 않으니까요. 침례교 구원파의 유병언 목사를 생각해 보면 해도 해도 너무했습니다.
얼굴 화장 멋진 차림새 근사한 차량 등 멋스런 신분까지 들이대니까요. 속은 위선 불법뿐이면서 의인이나 모범인물로 보이려는 사람들 많습니다. 깊은 대화가 통하지 않고 남 말에 귀 기우리지 않는 걸 보면 속 보이지요.
“이처럼 너희도 겉은 다른 사람들에게 의인으로 보이지만, 속은 위선과 불법으로 가득하다. (마태오 23,28)”
악어의 눈물
김민수 신부님
흔히 위선자의 거짓된 모습을 비유할 때 ‘악어의 눈물’이란 말이 사용됩니다.
이 말은 나일 강에 사는 악어가 사람을 잡아먹고 난 후 눈물을 흘린다는 이집트 전설에서 비롯된 말입니다. 실제로 악어는 먹이를 먹을 때 눈물을 흘리는데, 이는 눈물샘 신경과 입을 움직이는 신경이 같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악어의 눈물’은 감동이나 참회의 순간에 솟구치는 진실한 눈물이 아니라, 전략적이고 계산적인 속내에서 나오는 건조한 물질일 뿐입니다. 신앙인 중에도 겉과 속이 다른 이중적인 행동을 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위선적인 신자들의 공통점은 겉으로만 열심히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입니다.
어느 날 한 비신자가 저를 찾아왔습니다. 자기 옆집 주인이 집을 리모델링하면서 사람이 다녀야 할 골목길을 자기 땅이라고 없앴다는 것입니다. 그 주변에 사는 사람들은 주인에게 찾아가 호소를 했지만 막무가내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주인이 성당에 다니는 신자라서 그 사람을 설득해 달라고 저에게 온 것입니다. 오죽 답답했으면 저에게까지 왔을까요? 알고 보니 그는 매일 새벽미사에 참석하는 신자였습니다. 열심히 봉사하기 때문에 참 괜찮은 신자라고 생각했는데 어느 날마음에 맞지 않는다고 다른 신자에게 심하게 폭언을 하고 몸싸움까지 하는
경우도 보았습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분명히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불행하여라, 겉과 속이 다른 신자들아!”
한상봉과 함께하는 수요묵상
‘박해가 많으면 성인도 많다.’는 말이 사실인 모양이다. 신앙인의 진면목은 고난 가운데 드러나기 마련이다. 순교 성인들은 자신의 목숨을 신앙과 맞바꾼 사람들이다. 그러나 나중의 영광을 위해 현재의 고통을 받아들이기란 쉽지 않다. 사실상 성인으로 추대될 줄 알고 순교한 사람도 없다. 내 삶에 빛으로 다가온 결정적인 경험이 없고서야, 그 희망의 한끝이 없고서야 죽음은 여전히 두려운 절망이다.
소설가 김훈이 쓴 「흑산」에서 정약종이 토설한 말이 귀에 쟁쟁하다. “너의 이른바 천주가 실재해서 세상을 주관하고 있음을 네가 증명할 수 있느냐?” “증명할 수 있다. 쉬운 일이다. 어린아이가 웃으면서 걸어올 때, 나는 천주가 실재함을 안다. 그대들이 국법의 이름으로 백성들을 가두고 때릴 때 저들의 비명과 신음이 천주를 증명한다. 그대들의 악행을 미워하고 또 가엾이 여기는 내 마음을 통해서 천주는 당신을 스스로 증명하신다.” 정약종은 서소문에서 참수되어 영원히 기억되었다. 어린아이의 티 없는 웃음에서, 가엾이 여기는 내 마음에서 하느님을 느끼는 사람, 그 사람은 이미 하느님 자비의 바다를 건너가고 있었던 것인데, 그러니 죽음인들 두려울 턱이 없다.
김훈은 「흑산」에서 가장 애정을 느낀 인물이 평안도 정주 역참의 마부 ‘마노리’였다고 한다. 마노리는 말고삐를 잡고 북경과 조선을 오가며 교회의 메신저 역할을 했는데, 김훈은 이 사람을 “한국교회를 있게 한 보석 같은 존재”라고 표현했다. “길 걷기가 단잠처럼 편안했다.”는 마노리는 “길에는 오는 사람과 가는 사람이 있었고 주인은 없었다.”고 말한다. 지상에 머물 땅 한 평 없어도 행복할 수 있는 ‘순례자’였던 마노리의 자유로운 영혼에서 우리는 ‘순교’가 ‘영성’임을 깨닫는다. 이들이 바로 하느님의 자비와 정의를 드러낸 예언자가 아닐까? 이 생생한 증언을 순교기념관이나 박물관에서 기념할 필요는 없다. 우리는 지금도 부질없는 탐욕으로 지상을 지옥으로 만드는 이들에 맞서 싸우는 이들 가운데서 이들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위선>
송영진 모세 신부님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겉은 아름답게 보이지만 속은 죽은 이들의 뼈와 온갖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차 있는 회칠한 무덤 같기 때문이다.
이처럼 너희도 겉은 다른 사람들에게 의인으로 보이지만, 속은 위선과 불법으로 가득하다(마태 23,27-28)."
유대인들이 무덤에 회칠을 한 것은 무덤이라는 것을 표시해서 사람들이 부정 타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습니다.
"사람의 뼈나 무덤에 몸이 닿는 이는 모두 이레 동안 부정하게 된다(민수 19,16)."
그런데 하얗게 회칠을 한 무덤들을 멀리서 보면 아름답게 보였다고 합니다.
만일에 유대인들의 관습을 모르는 사람들이라면 그것이 무덤이라는 것을 모르고 아름다운 건축물이라는 생각만 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회칠한 무덤'이라고 표현하신 것은 '겉으로는 의인으로 보이지만 속은 위선과 불법으로 가득한' 그들의 모습이 겉만 아름다운 무덤과 같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아름다워도 무덤은 무덤일 뿐입니다.
겉모습이 대단히 예쁘고, 아주 귀한 보물 상자처럼 보여도 속에 쓰레기만 들어 있다면 그것은 그냥 쓰레기통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대단히 값비싼 고급 승용차로 보여도 속에 엔진과 주요 부품들이 하나도 없다면 그것은 그냥 고철 덩어리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무덤에 회칠을 한 것은 무덤이라는 것을 감추기 위해서가 아니라, 무덤이라는 것을 표시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말씀을 본래 의도대로 해석하려면 유대인이 아니라 이방인의 관점에서 생각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위선'이란, 겉모습만 잘 꾸며서, 속을 모르는 사람이 그 겉모습만 보고 칭찬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는 위선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스스로 자기의 모습을 끊임없이 살피면서 잘못된 점을 고치는 자기반성을 날마다 계속해야 합니다.
그러면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 자신들은 자기들이 위선자라는 것을 알고 있었을까?
모르고 있었습니다.
"너희가 눈먼 사람이었으면, 오히려 죄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너희가 '우리는 잘 본다.' 하고 있으니, 너희 죄는 그대로 남아 있다(요한 9,41)."
그들은 자기들의 위선이 위선인 줄 모르고 선(善)이라고 생각하면서 예수님의 비판이 부당하다고 반발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옳고, 예수님이 틀렸다고 믿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위선자들이다.' 라고 하시는데, 그 사람들은 '예수는 사기꾼이다.' 라고 말합니다.
"나리, 저 사기꾼이 살아 있을 때...... (마태 27,63)"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 라는 속담처럼 겉모습만으로는 어떤 사람이 위선자인지 아닌지 판단하기가 어렵습니다.
더 큰 문제는 자기 자신도 자기가 위선자라는 것을 잘 모른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위선은 위험합니다.
자기의 말과 행동이 거짓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면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고칠 가능성이 있지만, 자기가 옳다고 믿고 있다면 믿는 대로 계속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 위선자가 '자기만' 옳다고 믿는 '독선'에 빠지면 더욱 위험해집니다.
자기만 옳고 다른 사람은 모두 틀렸다고 믿는다면 사람들을 박해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잘못된 신념은 많은 사람들을 고통스럽게 만듭니다.)
그런데 당시의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전부 다 위선자들이었던 것은 아니고, 나타나엘처럼 예수님께서 칭찬하신(요한 1,47) 율법학자도 있었고, 온 백성에게 존경을 받았던 가말리엘이라는 율법학자도 있었습니다(사도 5,34).
가말리엘은 바오로 사도의 어린 시절의 스승이었습니다(사도 22,3).
사도들이 체포되어서 재판을 받을 때, 그 가말리엘이 이런 말을 합니다.
"저 사람들 일에 관여하지 말고 그냥 내버려 두십시오.
저들의 그 계획이나 활동이 사람에게서 나왔으면 없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에게서 나왔으면 여러분이 저들을 없애지 못할 것입니다.
자칫하면 여러분이 하느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사도 5,38-39)."
이 말은, "만일에 예수가 사기꾼이라면 그 제자들도 사기꾼일 것이고, 그리스도교는 오래 가지 못하고 없어질 것이다.
그러나 예수가 사기꾼이 아니라 진짜로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그리스도교는 영원히 지속될 것이다."로 바꿀 수도 있습니다.
이 말을 반대로 생각하면,
"우리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예수의 말대로 위선자들이라면 우리는 결국 없어질 것이다."가 됩니다.
가말리엘은 일종의 예언을 한 셈인데, 실제 역사를 보면 그의 예언대로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