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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미처 말을 다 하기도 전, 등을 보이고 있던 인물이 돌아보지도 않고 읊조렸다.
"인생무상(人生無常)이라더니 당신도 결국 한줌의 백골이 되고 말았구려. 고작 이렇게 되기 위해 그토록 복수심을 불태웠단 말이오?"
진일문은 상대가 자신에게 말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진일문이 상대방의 탄식에 의혹을 가질 즈음, 아라소가 들어왔다.
"그대는 아라소로군. 수십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이 곳에서 다시 만나게 되다니, 정녕 하늘의 뜻이 얼마나 높고 깊은지는 예측할 수가 없군."
진일문은 백의인이 몸을 돌리자 우선 그가 바라보고 있던 것이 한 구의 백골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살이라고는 한 점도 남아 있지 않아 백의인의 말마따나 인생의 무상함이 절로 느껴졌다.
소매가 넓은 옷을 입고 있었으며, 수염을 길게 기르고 있었다.
특이한 것은 그의 눈썹으로써 길이가 양쪽 관자놀이까지 이르고 있었다.
손에는 섭선을 말아 쥐고 있었는데, 종이로 만들어져 있으며 길이가 한 자 정도 되었다.
신음과도 같은그 부르짖음에 놀란 것은 오히려 진일문이었다.
'동방절호라고? 이 자가 그럼 광명교의 교주란 말인가? 그는 이미 수십 년 전에 죽었거늘.......'
이른바 마교의교주인 동방절호는 오십 년 전 삼천공에 의해 무극단에 떨어져 죽었다.
눈앞의 백의인이 동방절호라니, 진일문은 마치 꿈을 꾸는 듯한 기분이었다.
물처럼 담담했던 동방절호의 눈에 미미하게 이채가 스쳤다.
"두려운가 보군. 하긴, 지은 죄가 있으니 그렇기도 하겠지."
동방절호는 아라소에게서 시선을 떼어 진일문에게로 옮겼다.
진일문은 초탈한 상대의 태도에 사뭇 감탄을 금치 못했다.
'아! 기도를 보아하니 과연 일세의 영웅이로구나. 파사국의 총교가 만들어 놓은 계략에 빠져 엄청난 희생을 치루었으면서도 그 공범인 아라소에게조차 적대감을 노출시키지 않는구나.'
석실이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듯 심한 진동을 일으켰다.
진일문 역시도 고막이 터져 나가는 듯한 고통과 함께 기혈이 역류하는 것을 느꼈다.
동방절호는 광소를 뚝 멈추더니 입술을 슬쩍 말아 올렸다.
"후후... 세월이 약이라더니 그 말이 맞는군. 소형제, 내 자네를 통해 세월이 변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네."
그러자 동방절호의 눈이 짙은 회한을 담은 채 몹시도 일렁였다.
"진일문이라고 했던가? 노부는 소형제가 무척 마음에 든다."
동방절호는 침착하여 거의 무심하게 느껴지는 어조로 말했다.
"암흑제는 파사국에서 쫓겨난 이후로 복수심에 혈안이 된 나머지 노부에게 정교를 치자고 연합을 제의해 왔네. 그것이 벌써 육십 년 전의 일이지."
"뭐, 뭣이? 그 놈이 반역을 꾀한 것도 모자라 그런 짓까지......."
"당시 노부는 광명교의 교주가 된지 겨우 수년에 불과했네. 아무리 패주(敗走)했다고는 하나 암흑제에 비한다면 햇병아리였지. 더우기 그의 마공을 꺾을 자신이 없어 노부는 일단 그의 제의를 수락하는 척 했네."
동방절호는 아무 것도 그려지지 않은 섭선을 펼쳤다가 접었다.
"그러나 암중으로 그를 제압할 계획을 세워 이 곳에 감금시키는데 성공했네."
"그 후로 노부는 원(元)을 몰아내고 중토를 회복하는 일에 몰두해야 했기 때문에 그의 존재를 까맣게 잊고 말았네."
"와중에서 뜻밖의 일이 일어났네. 정교에서 사람을 보내 노부에게 본교의 비전지비인 광화비전을 요구했었지."
"노부는 총교를 존중했다. 그래서 암흑제의 요청도 거절한 것이지. 그런데 총교 측의 요구란 너무도 부당했네. 광명교는 비록 그 뿌리를 파사국의 정교에 두고 있었으나 오랜 세월에 걸쳐 중토에 나름대로의 기반을 구축하고 있었지. 내가 존중하는 것만큼 그들은 광명교를 존중해주지 않았다. 그렇지 않은가?"
비수와도 같이날카로운 논조에 아라소는 할 말을 잃었다.
"그, 그것은 본교가 쇠퇴일로를 걷고 있은 데다가 내분으로 인해 정통성을 잃었기 때문에 뭔가 복구의 계기가 필요해서......."
"알고 있다! 너희 총교 측은 노부가 그 제의를 거절하자 노부를 모함해 명예를 땅바닥에 떨어 뜨렸다. 중원정도 세력으로 하여금 노부를 마인(魔人)으로 몰아 치게 했었지."
"그것까지도 좋다. 오해란 본시 시간이 흐르면 불식되게 마련이니까. 너희들은 노부가 심혈을 기울여 키웠던 십대천왕(十大天王) 중 삼인을 구슬려 노부는 물론이거니와 나머지 칠왕(七王)을 암습하게 했다."
동방절호의 눈이 기이한 광망을 번뜩이며 그를 응시했다.
"아라소, 아라천 형제분도 그렇지만 그 일이 있은 후로 여생을 통한 속에서 살다 가신 세 분이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 동안 동방절호의 안색은 몇 차례나 변화를 거듭했다.
진일문은 삼성곡에서 겪은 일들과 더불어 삼천공의 유해를 떠올리며 천천히 얘기하기 시작했다.
얼마나 시간이지났을까?
"아아! 그들의 존재도 세월 속에 그처럼 묻혀 버렸구나. 결국 그들이 잘못을 깨닫고 못깨닫고에 무슨 차이가 있단 말인가?"
그 바람에 진일문과 아라소는 또 한 차례 가슴이 진탕하고 기혈이 역류하는 고통을 겪어야 했다.
아라소의 신음에 이어 동방절호는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했다.
"옳은 말이네. 진실은 중요하지. 향후를 위해서라면. 후후......."
일말의 자조가깃든 그의 웃음은 듣는 이의 가슴에 아프게 박혀 왔다.
"그 진실이라는 것을 한 가지 더 알려 주지. 당시 암흑제가 노부와 손을 잡으려 한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네."
"그것은 그 자가 익힌 마공이 극한에 이르러 스스로도 억제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네. 내게 있는 한 가지 물건이 필요했지."
"혹시 백옥미인상(白玉美人像)을 말씀하시려는 것 아닙니까?"
"유실에 있던 황금관 속에서 이 반지와 함께 발견했더랬습니다. 다섯 개의 철권(鐵卷)도 보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럼 암흑마환을 가져간 자가 바로 자네였단 말인가?"
의식도 하지 못한 찰나에 강한 흡인력이 작용한 것이었다.
동방절호는 낮은 신음과 더불어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으음, 노부에게 그 소녀에 대해 말해줄 수 있겠나?"
진일문은 곧 여취벽을 만나게 된 것과 열쇠를 얻게 된 동기를 숨김없이 얘기해 주었다.
그러는 사이, 동방절호의 청수하고 고요했던 얼굴은 무참할 정도로 일그러져 버렸다.
"오오! 문아(文兒), 네가 여국(黎國)까지... 그 머나먼 오지의 나라까지 피해 가 시집을 갔었더냐? 이 못난 아비 때문에......!"
심지어 잠깐 사이에 그는 고통으로 인해 눈이 움푹 꺼져 들어갔다.
'여취벽은 모친이 중원인이라 했다. 그렇다면 이 분과 그녀 사이에는 필경 모종의 관계가 있을 것이다.'
"취벽이라는 그 아이.... 여국에 가면 만날 수 있겠는가?"
"허허... 딸아이는 아비보다 먼저 죽고.... 너무 오래 산 아비는 손녀가 있는 것조차도 모르고 있었으니......."
동방절호가 한 말인즉 여취벽이 자신의 손녀라는 뜻이 아닌가?
그는 비로소 금약이 어찌하여 그녀의 손에 들어가 있게 되었는지를 깨달을 수가 있었다.
금빛이 일렁이는 열쇠를 응시하며 동방절호는 말을 잃었다.
초탈에 이르러 보이는 그도 천륜에는 어쩔 수 없었던 것인가?
"이 광명금약은 노부가 딸아이인 여문(麗文)에게 준 것이네."
"노부가 무극단에 떨어진 후로 본교가 무너지는 바람에 딸아이는 실종되었었지. 그런데 여국까지 흘러 들어가......."
'과연 누가 보상해 줄 것인가? 파사국은 물론이거니와 중원 무림 전체가 동방가문(東方家門)에 엄청난 빚을 졌구나.'
따지고 보면 광명교의 교주였던 그는 시운(時運)을 잘못 타고난 불운한 기인일 따름이었다.
그리고 그 기구한 운명이 유전 되어 그 딸에게까지 화가 미친 것이었다.
여취벽이 그를 좋아했었고, 그 자신 또한 그녀에게 호감을 가졌었던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것을 딱히 어떤 관계라고까지는 말할 수가 없었다.
"언제고 그 아이와 만나게 되면 자네가 직접 건네 주게."
"이것은 암흑제의 신물이니 노부가 보관하겠네. 세상에 나타나서는 안될 물건이니까."
그러자 끊어질듯 했던 동방절호의 음성이 새롭게 이어졌다.
"노부에게는 못된 아우가 하나 있네. 바로 당시에 본교의 부교주이면서 무당파를 집어 삼켜 천하를 장악하고자 했던 동방불후(東方不朽)지. 놈은 정파 육인 고수의 합격을 받았었다."
실상 그 일은 전 무림에서 삼천공와 우내삼기 외에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문제는 그 놈이 그러고도 정신을 못차려 암흑제를 죽이고 그의 마공을 탈취해 갔다는 것이네."
"내 비록 타의에 의해 파멸을 당한 형국이나 아우가 중원무림을 어지럽힌 덕분에 어느 누구에게도 유감이 없으이. 암흑제가 죽기 직전, 그 놈에 관한 글을 여기에 글을 남겨 놓았네."
과연 침대 위에는 그가 말한 내용이 글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노부는 실로 우려를 금치 못하는 바이네. 놈이 암흑제의 마공을 익혔다면 두 가지의 가능성이 있네. 주화입마 했거나 혹은 불사환생(不死還生)하는 방법을 터득했다는......."
"이제까지 나타나지 않았으니 결과는 예측할 수가 없네."
"저것을 얻지 못하는 한 그 마공은 영원히 미완(未完)이네. 미인상에 새겨져 있는 심법(心法)을 익히지 못하면 끝내 인성(人性)을 잃고 마니까."
'오호라, 그래서 백옥미인상의 혈로운행방식이 상리(常理)를 벗어나 있었던가? 마성을 제지하기 위해?'
한 기인의 인생을, 그것도 그 후대까지 망쳐 놓았으니 이제 와서 무슨 말을 하겠는가?
동방절호는 아라소를 바라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보아라. 정교가 그토록 원했던 것이 노부의 손에 있다."
그것은 바로 진일문이 황금관 안에서 보았던 물건이었다.
"정교는 지금이라도 이것만 있다면 얼마든지 부흥할 수 있다. 그렇지 않은가?"
하지만 그도 바보가 아닌 이상 마냥 감격해 하지는 않았다.
그는 한 가지 뿐만 아니라 천 가지 조건이라도 들을 용의가 있었다.
"대법왕에게 가 전해라. 중원의 고인(高人) 두 분을 풀어주라고. 본래는 노부가 직접 구할 생각이었으나 볼 일이 있어 가지 못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허허... 정교의 뇌옥에 갇힌 두 사람은 바로 소림사와 개방의 최고 기인들이지. 대법왕에게 그렇게 말하면 알 것이야."
"아무튼 노부는 천산에 있다가 이 곳으로 오기 전, 정교에서 그들이 구금되어 있는 것을 보았네."
아라소는 그것을 받더니 기쁜 낯으로 허겁지겁 살펴 보았다.
"고, 고맙소. 동방교주의 은혜는 죽어도 잊지 않겠소."
정교를 떠나온지도 벌써 수십년, 돌아가야할 명분조차 잃고 있던 아라소였다.
그러다 그 동안의 염원이었던 광화비전을 수중에 넣게 되자 그는 기대에 부풀어 몸을 떨었다.
아라소는 잠시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으나 곧 신경을 꺼버린듯 광화비전을 챙겨 가지고 황급히 돌아섰다.
"미안하게 되었네, 진소협. 돕고 싶었지만 어쩔 수가 없네. 자네에게는 중원의 일이 중요하겠지만 노부로서는 파사국의 일이 더 급하네. 이제까지야 아무런 대책이 없어서 포기 상태였으나 지금은 희망이 생기지 않았나? 노부는 아라천과 이 길로 정교로 돌아갈 생각이네. 그럼......."
"자네는 매우 특이한 인물일세. 더욱이 노부와는 놀라울 정도로 인연이 얽혀 있네."
"이 곳에는 현재 황궁의 동창 무사들이 들어와 있네. 그들은 유실 속에 남아 있을 본교의 보물들을 탈취하러 왔지."
진일문은 자삼인들의 시신을 보았으므로 놀라지는 않았다.
"노부가 알 수 없는 것은 단 한 가지, 그들의 배후 인물이 누구인가 하는 점일세."
"으음, 중원에는 몇 가닥의 암류(暗流)가 어지럽게 얽혀 있네. 어쩌면 노부의 아우도 관련이 있겠고......."
"무극단에서 극적으로 살아난 이후로 노부는 욕망과 복수 따위가 무의미하다는 것을 깨달았네. 결국 인간이란 아무리 발버둥 쳐도 모두 한줌의 흙으로 돌아갈 뿐이네."
암흑제의 유골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은 물처럼 담백했다.
"어떤 인간이고 하나같이 욕망에 사로잡히면 불을 보고도 그대로 뛰어드는 불나방이나 다름이 없네."
"이런 소리는 아직 약관인 자네에게는 들려줄 말이 아니었는지도 모르지. 헛헛......."
"광화비전을 왜 정교에 돌려 주셨습니까? 당년에는 거절하셨던 일이 아니었습니까?"
"우선 정교에는 광화비전을 익힐 인재가 없고, 또......."
"나는 분명 총교를 용서하지 않는다고 했네. 광화비전으로 인해 정교의 운명은 머지않아 종지부를 찍게 될 것이네. 새는 모이 때문에 죽고 인간은 보물로 인해 죽는 법이지."
"섬뜩하군요. 그럼 그들이 내분에 휩쓸리기를 원하십니까?"
"허허허... 노부 개인의 은원은 이미 오래 전에 잊었네. 그러나 억울하게 죽어간 수많은 고혼(孤魂)들이 있지. 바로 그들을 위한 다비식(茶毘式)을 준비하는 걸세."
"이곳에 들어와 있는 쓰레기들은 노부가 정리하겠네. 자, 그럼 또 보세."
그의 모습은 아까와는 달리 모래알처럼 흩어지더니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확고한 태도와 더불어 놀라운 신법....... 저 분이 만일 스스로 은원을 청산하지 않았더라면 중원과 파사국은 다 함께 내일을 장담하지 못했으리라.'
그는 일말의 두려움이 담긴 음성으로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고분 속에 들어와 있던 자삼인들의 숫자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으나 모두 죽어 있었다.
그런데 그들의 몸에는 아까와는 달리 상처라곤 전혀 없었다.
첫댓글 늘 잘보고있슴다.
즐독하구갑니다
즐감요!!!!1
늘 감사합니다.
즐감했습니다.
잘 보고 있습니다
굿,,즐감,,,
ㅎㅎ
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즐감했습니다.
쟴납니다
잘 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줄겁게 열독하고 갑니다.감사 합니다.
잘 보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