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비, 우산을 받쳐 쓰고
올겨울 들어 두 차례 한파가 엄습해 최저 기온이 며칠 영하권에 맴돌다가 날씨가 풀린 십이월 셋째 수요일이다. 마침 우리나라로 기압골이 통과하면서 전국적인 강수가 예상된 날이었다. 겨울에 눈이나 비가 와주면 산불 예방에 크게 도움 되리라 여겨진다. 특히 혹심한 가뭄으로 식수난과 생활용수 부족을 겪고 있는 호남 지역은 눈이라도 많이 와 물 부족을 들어주었으면 한다.
우리 지역은 날씨가 풀려 영상으로 올라 눈이 아닌 비가 예보되어 아침부터 부슬부슬 내렸다. 인터넷으로 검색한 날씨 현황은 시간당 강수량이 얼마큼 되고 바람은 그리 세차게 불지 않는다고 나왔다. 이 정도 날씨면 우산을 받쳐 쓴 산행을 감행해도 되리라 판단되어 평소 익숙하게 다닌 임도를 걸을 생각이었다. 전날 표고버섯을 키울 참나무를 함께 자른 벗이 동행을 제의해 왔다.
아침 이른 시각에 마산역 광장으로 나가니 비가 오는 관계로 노점은 펼쳐지지 않아 썰렁했다. 번개시장 들머리 콩국 파는 가게를 비롯해 몇 점포는 문을 닫은 상태였다. 건설 현장 노동자들이나 하루하루 벌어 생계를 잇는 사람들에겐 비가 내려면 수익 감소를 가져와 야속할 듯했다. 자주 들린 식당에서 김밥을 두 줄 마련하니 주인 아낙은 빗속 산행에 안전을 염려해주어 고마웠다.
역 광장 모퉁이 농어촌버스 출발지에서 서북동으로 가는 73번 버스를 탔다. 시외버스터미널과 삼성병원을 둘러 어시장을 거칠 때 평소 타던 할머니들이 없어 승객이 줄었다. 어시장에 푸성귀를 내다 팔고 해산물 시장을 봐 가던 산간 할머니들이 종종 있었더랬다. 밤밭 고개를 넘어 진북면 소재지를 거쳐 덕곡천을 따라 골짜기로 드니 빗속에 안개가 끼어 차창 밖 시야는 가려졌다.
동행한 벗과 함께 서북동 종점에 내리니 가랑비가 가늘게 내려 우산을 펼쳐 썼다. 날씨가 풀려 한기를 느낄 정도가 아니었고 바람이 불지 않아 우산이 날리지 않아 좋았다. 작은 암자로 가는 이정표의 임도 들머리에서 비탈진 길을 따라 서북산 중턱으로 올랐다. T자 갈림길에서 오른쪽 감재로 가질 않고 왼쪽의 부재고개로 향했다. 우산을 받쳐 쓴 우중 산행의 묘미도 괜찮았다.
봄부터 여름에서 가을까지 갖가지 야생화를 피웠던 길섶의 풀들이 모두 시든 겨울을 맞았다. 소나무와 활엽수들이 섞여 자라는 숲은 겨울비를 맞아 가지마다 투명한 물방울을 달고 있었다. 날씨가 영하권이었다면 눈발이 되어 날리고 얼음꽃 상고대가 피었을 텐데 그런 풍광은 기대할 수 없어 아쉬웠다. 도중에 소나무 그루 아래 길바닥에 퍼질러 앉아 벗이 가져온 담금주를 비웠다.
자리에서 일어나 부재고개로 향하니 길섶은 멧돼지가 경운기 로터리로 땅을 일구듯 파헤쳐 놓았다. 멧돼지 녀석이 주둥이로 흙을 뒤져 지렁이나 매미 유충인 굼벵이를 잡아 먹은 흔적이었다. 부재고개에 이르니 미천으로 가는 길과 의림사로 가는 길로 나뉘었는데 우리는 후자를 택해 걸었다. 수리봉으로 가는 갈림길에 이르러 바위에서 김밥을 먹으면서 남겨둔 담금주를 마저 비웠다.
쉼터에서 일어나 내리막 임도를 따라 걸으니 수리봉의 산세가 드러나고 의림사 골짜기에는 안개가 채워져 있었다. 산모롱이를 굽이굽이 돌아가 내려간 계곡에는 농업용수로 쓰일 인곡 저수지가 나왔다. 저수지 바깥 수리봉 기슭에 의림사가 위치했다. 임진왜란 때 왜구와 맞서 싸운 승병이 숲을 이루었다는 절집은 한국전쟁으로 불탄 이후 근년에 들어 중창된 부산 범어사 말사였다.
최근 세워진 일주문은 단청을 마쳐 놓고 편액을 걸지 않은 상태였다. 산문 밖에는 여항산 의림사라는 빗돌이 서 있기는 한데, 여항산은 먼 곳이고 서북산이나 인성산이 가까웠고 수리봉 기슭이라 산 이름을 정하기가 쉽지 않은 듯했다. 산문 바깥 요양병원 앞에서 시내로 가는 버스를 타고 마산합포구청 근처에 내려 어탕국수로 맑은 술을 몇 잔 기울이면서 우중 산행을 마무리했다. 22.1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