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일벗는 북파공작원, 해군첩보부대 'UDU' 최성진 기자 [10.20_17:50]
해군내 직별에는 특이한 항목이 있다. 그것은 해당하는 사람들의 주민등록초본을 보면 더욱 구체화 돼 나타난다. 그 항목은 바로 "UDU"를 가르키는 것이다.
최근 잇단 남북화해의 분위기 속에서 그동안 금기된 영역처럼 생각됐던 북파공작원 문제 또한 수면위로 빠르게 부상하고 있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언급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 지금까지 논의되고 있는 북파공작원이라 하면 흔히들 'HID'나 'AIU'만 떠올리곤 했는데 기실 이는 육군첩보부대의 이름일 뿐 북파공작원을 가르키는 일반적 명칭은 아니다.
이에 본지에서는 HID와 더불어 대북 침투 공작부대의 한 축을 담당했지만 최근 제기되고 있는 보상과 명예회복에 대한 논의에서조차 제외되고 있는 해군첩보부대 UDU의 실체와 그 부대출신 요원들이 겪고 있는 아픔을 조명해본다.
위장명 UDU(Underwater Demolition Unit). 54년 만들어진 이 부대의 전신은 이미 48년 9월에 마련되고 있었다. 원래 방첩대였던 미국 CIC(Counter Intelligence Corps)가 은밀히 가동하고 있었던 대북공작대가 바로 그것. UDU란 명칭으로 처음 요원을 선발한 것은 55년 4월이었다.
신원이 확실한 방첩부대에서 차출된 1기, 2기요원들은 미국령 모 처에서 훈련을 받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부산 수영만에 1차 집결한 뒤 미군 수송기에 탑승, 오키나와를 거쳐 훈련장소에 도착했지만 비행하는 동안 내내 눈을 가리고 있었기 때문에 도착한 곳은 자신들도 알지 못했다고 한다. 3기부터는 훈련장소를 국내로 옮겨 서해 모 기지에서 훈련을 받기에 이른다.
이들이 수행한 임무는 주로 요인납치 및 암살, 폭파, 기습, 잔류공작원 보급 및 접수, 수송, 철로폭파, 적 통신시설 감지 등이었다. 이들의 북파공작은 71년까지 이어졌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 이후에도 부대는 현재까지 계속 유지되고 있지만 대북공작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UDU 부대가 초창기의 반양성·반음성적 성격에서 완전한 음성부대로 전환되면서부터는 현역 군인에서 차출하던 요원을 민간인 입영대상자에서 뽑게 됐다. 한번에 40∼50명 선발했고 이들이 안전가옥에서 실시하는 기본교육 6개월-이른바 밀봉교육을 거치면 정식 수료로 인정돼 공작원채용계약을 맺는 식이었다.
기본교육 6개월의 과정은 상상외로 혹독해 대부분은 탈락하고 채용계약을 맺게 되는 훈련병들은 대략 10명 안팎이라고 한다. 취재과정에서 만난 대부분의 UDU 출신들은 훈련과정에 대해서만큼은 말하기 꺼려했지만 자신들이 하는 훈련은 상대방과의 격투에 대비한 '일반 특공무술'이 아닌 효과적인 살상을 위한 '특수살상무술'이라고 밝혀 특전사나 UDT, 해병대 특수 수색대와는 다른 훈련과정을 거쳤음을 암시했다.
특이한 것은 이들의 부대가 군의 체제가 아닌 일반 회사 체제로 운영되고 있다는 점. 이를테면 소대장은 대리, 중대장은 계장, 부대장은 사장이라는 호칭으로 불렸다는 것이다. 부대의 노출을 얼마나 기피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부분이다.
현재 이 부대 출신들이 겪고 있는 가장 큰 어려움은 상대적인 박탈감이다. 일단 생존자들의 경우 그들이 목숨을 바쳐 국가를 위해 일했음에도 불구하고 제대후 그에 따르는 합당한 보상이 이뤄지지 않았다는 부분이 그들을 우울하게 만들고 있다.
또한 현재 공공연하게 실체가 인정되고 보상문제가 거론되고 있는 HID와는 달리 최근의 '북파공작원 논의'에서조차 제외되고 있다는 사실은 그들을 더욱 분통터지게 한다.
실종처리되고 있는 5·16 이전 공작원들의 생사확인 또한 시급하다. 지금도 북한내에 살아있는 것으로 추측되는 상당수의 UDU 요원들은 지난달 2일 북송된 대다수의 비전향장기수와 대칭을 이룬다는 점에서도 정부는 이들의 생사확인과 송환문제를 외면해선 안된다.
한편 국방부의 한 고위관계자는 "이 문제(북파공작원, UDU)는 개인적으로 알지도 못하는 부분이고 특수보안에 관한 사항이라 확인조차 힘들다. 하지만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 희생하신 분들이 있다면 군은 이런 분들의 노고와 희생을 결코 잊지 않을 것이며 적법한 절차에 의거해 보상해 준다는 원칙을 갖고 있다"고 밝혔다.
미니인터뷰-"10년간 총 40여회 북파공작임무 수행했다"
UDU 동지회는 1989년 만들어졌다
-최초 북파됐던 해는 언제이며, 모두 몇 차례 임무를 수행했나.
▲1961년 처음 임무를 수행했다. 그 뒤 71년까지 11년간 모두 40여 차례에 걸쳐 북파공작임무를 수행했다.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작전이 있었다면.
▲63년 지원공작임무를 수행할 때였다. 임무를 끝내고 돌아오는 공작원을 '접수'해서 복귀하다가 적들과 조우했다. 내륙에서 시작된 교전이 서해 백령도를 통해 귀환할 때까지 40여분간 계속됐다. 적 PT(해군고속정)와의 교전중 나중에는 권총 실탄마저 다 떨어져서 큰 고비를 넘긴 적이 있었다.
-주로 어떤 임무를 수행했나.
▲적 해안과 내륙을 정찰하는 임무, 통신시설을 탐지해내는 임무, 공작원 침투 호송, 폭파임무 등을 주로 맡았다.
-UDU 전역 이후의 생활에 대해서 말해달라.
▲71년까지 UDU에서 임무를 수행하고 그 뒤 첩보부대 공작과로 나와서 일반 근무를 했다. 80년부터는 일반 부대에서 북파공작과는 상관없는 일을 하다가, 87년 완전 전역했다.
-전역한 뒤 국가로부터의 보상은.
▲애초에 보상은 바라지도 않았다. 우리가 목숨 걸고 사선을 넘나들었을 때 돈을 바라고 그 일을 했겠는가. 그저 조국을 위해서 이 한 몸 바쳐 충성한 우리들의 순수한 뜻을 알아달라는 것이다. 훈장하나 받고 못받는 것이 뭐 그리 대수겠는가. UDU 동료들 대부분이 나와 비슷한 생각이다.
-사회적응하는데 어려움은 없었나.
▲주위에서 같이 근무했던 동료들 대부분이 죽었다. 남아있는 생존자들은 어업에 종사하는 등 대체로 어렵게 생활하고 있다. 군에 있을 때는 '내가 최강'이라는 자부심을 먹고 살았는데 사회에 나와 보니 그런 자부심은 생활하는데 있어 걸림돌만 될 뿐이었다. 이 부분은 마땅히 나라에서 책임져야 하는 부분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