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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독정사(熟讀精思)
자세히 읽고 정밀하게 생각하라는 뜻으로, 주자(朱子)의 독서법이다.
熟 : 익을 숙(灬/11)
讀 : 읽을 독(言/15)
精 : 정밀할 정(米/8)
思 : 생각할 사(心/5)
출전 : 주자독서법(朱子讀書法)
주자가 말하는 바른 독서법은 스물네 글자로 된 다음 여섯 가지다.
○ 순서점진(循序漸進)
기초에서부터 읽기 시작해서 한 권 한 권 읽는 책을 늘리고 높여간다. 책을 읽을 때는 글자, 단어, 구절, 문장 하나하나 그 안에 담긴 뜻을 제대로 알아야 한다. 독서는 낮은 것에서 높은 것으로, 또 얕은 곳에서 깊은 곳으로 나아가야 한다.
○ 허심함영(虛心涵泳)
자세하고 성실하게 읽은 후에 함께 모여 반복해서 토론하고 연구하고 연마하며 체험을 통해 뜻을 터득한다. 일을 할 때는 적당히 하는 것을 절대 삼가야 한다.
○ 절기체찰(切己體察)
사상, 경험, 수요와 결합하여 문헌 중의 의미를 몸으로 느끼면서 '종이에서 얻은 것은 결국 얕은 것이고, 이 일은 반드시 몸으로 직접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다(紙上得來終覺淺, 絶知此事要躬行)'는 것을 바로 알아야 한다.
○ 숙독정사(熟讀精思)
글의 뜻을 하나하나 잘 생각하면서 읽고 심각하게 그 뜻을 깨달음으로써 책 속에서 하는 말이 마치 자기의 입에서 나오는 듯하게 하고, 그 사상이 자기 자신의 사상으로 녹아들 때까지 사고해야 한다.
○ 착긴용력(著緊用力)
정신을 모으고 공을 들이고 힘을 써서 자신의 몸으로 익혀야 한다. 물을 거스르는 배가 앞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밀려나는 것처럼 잠시의 흐트러짐도 없이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 수교유의(須敎有疑)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의문을 갖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 의문을 갖는 것에서 출발해서 의문이 없는데 이르러야 바로 아는 것이고, 그래야 견실한 앎을 내 것으로 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주자는 이 여섯 가지 중에서도 특히 첫 번째 순서점진(循序漸進)을 더욱 강조했다. 어떤 사람이 책을 읽으면서 급한 성정대로 한 번 책을 펼치면 오로지 앞으로 나아가는 것에만 마음을 썼다.
그것을 본 주자는 마치 배고픈 사람이 음식점에 들어가서 탁자에 가득 차려진 음식을 맛도 음미하지 않고 마파람에 게눈 감추듯 게걸스럽게 먹어대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나무라면서 강조한 것이 바로 순서점진, 순차적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字求其訓, 句索其旨, 未得乎前, 則不敢求其後, 未通乎此則不敢志平彼,
글자에서 그 의미를 구하고, 구절에서 그 뜻을 찾으며, 앞에서 그것을 찾지 못했거든 그 다음으로 나아가려 하지 말고, 이곳에서 통하지 못했거든 저곳을 넘보려고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니,
如是循序漸進, 則意志理明, 而無疏易凌躐之患矣.
이와 같아야 순차적으로 나아가 뜻을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뜻을 잘못 알거나 놓쳐버리는 우환이 생길 뿐이다.
그는 또 말했다.
學者觀書, 病在只要向前, 不肯退步, 看愈抽前愈看得不分曉.
배우는 사람이 책을 읽을 때의 병폐는 앞으로 나아가려고만 한다는 것이니, 물러서려고 하지 않으면 앞으로 나아갈수록 더욱더 알 수 없게 된다.
독서란 견실해야 하고 얕은 곳에서 깊은 곳으로 들어가야 하고, 순차적으로 나아가야 하며, 또 자주자주 뒤를 돌아봐야 한다. 그렇게 잠깐씩 뒤로 한 발짝 물러남으로써 견실한 학문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주자(朱子)의 독서법
주자가 말하기를, '독서란 격물(格物) 한 가지 일이다.' 하였다. (朱子讀書法)
주자가 말하였다. '무릇 내가 일상생활 하는 것이 도서(道書)에 의거하지 않은 것이 없으면 그것이 내 마음에 접하고 내 마음에 모여들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반드시 먼저 몸에서 구한 뒤에 책에서 구하면 독서가 비로소 맛이 있게 된다.' (朱子語類)
또 말하였다. '독서의 법은 순서에 따라 점차 나아가고 익숙히 읽고 정밀하게 생각하는 데에 있다.' (讀書法)
또 말하였다. '먼저 반드시 익숙히 읽어서 그 책에 있는 말들이 모두 내 입에서 나온 것처럼 되게 하고, 이어서 정밀히 생각하여 그 책에 있는 뜻이 모두 내 마음에서 나온 것처럼 되게 해야 한다.' (讀書法)
또 말하였다. '일과(日課)를 엄격하게 세우고 생각을 너그럽게 하여 오래 하면 자연히 맛이 있게 된다.' (讀書法)
장자(張子)가 말하였다. '의리(義理)에 의심이 있으면 예전 견해를 씻어 버리고 새로운 뜻이 오게 해야 한다.' (仕學規範)
주자가 말하였다. '독서할 때에는 반드시 몸을 가다듬고 바르게 앉아서 천천히 보고 작은 소리로 읽으며, 마음을 비우고 깊이 빠져들고 자신에게 절실하게 성찰(省察)해야 한다. 한 구를 읽을 때에 반드시 이 한 구를 내가 장차 어디에 쓸지를 체찰(體察)해야 한다.' (朱子語類)
또 말하였다. '본문(本文)을 익숙히 읽되 한 글자 한 글자를 저작(咀嚼)하여 맛이 있게 해야 한다. 만약 이해되지 않는 곳이 있으면 깊이 생각하고 그래도 이해되지 않은 뒤에 주해(註解)를 보아야 비로소 의미가 있게 된다. 이것은 사람이 배고픈 뒤에 먹고 목마른 뒤에 마셔야 비로소 맛이 있는 것과 같다.' (朱子語類)
또 말하였다. '우선 그 풀이를 익숙히 보아서 작은 글자의 뜻을 분명히 알면 곧 큰 글자의 뜻을 깨닫게 되어 도리와 가깝게 된다. 도리는 글자가 없는 곳에서 자연히 보게 된다.' (朱子語類)
또 말하였다. '논어를 볼 때에는 전적으로 논어만 보고, 맹자를 볼 때에는 전적으로 맹자만 보아야 한다. 읽고 난 뒤에도 그 책의 내용에 배회하고 연연하여 놓고 싶지 않은 것처럼 해야 한다.' (讀書法)
또 말하였다. '한 장(章)을 읽고 있으면 다음 장을 보지 않고, 한 구(句)를 읽고 있으면 다음 구를 보지 않으며, 한 글자가 이해되지 않으면 아래 글자를 보지 않는다. 내가 예전에 글을 볼 때에 단지 나의 이 법을 지켰다.' (讀書法)
주자가 말하기를, '처음 배우는 후생(後生)은 먼저 소학(小學)을 보아야 하니, 이것은 사람을 만드는 본보기이기 때문이다.' 하였다. (小學)
북계 진씨(北溪陳氏)가 말하였다. '소학 책은 강령(綱領)이 매우 좋아서 일상생활에 가장 절실하니, 대학(大學)에서 인격이 완성되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정자(程子)가 말하기를, '초학자가 덕(德)에 들어가는 문으로는 대학(大學)보다 나은 것이 없다.' 하였다. (大學章句)
주자가 말하였다. '대학은 증자(曾子)가 공자(孔子)께서 옛사람들이 학문(學問)하던 큰 방법을 말씀하신 것을 조술(祖述)하였는데, 문인(門人)들이 또 전술(傳述)하여 그 뜻을 밝혔다. 앞뒤가 서로 연결되고 체통(體統)이 모두 갖추어졌으니, 이 책을 깊이 음미하여 옛사람이 학문을 할 때 지향했던 바를 알게 되며, 논어(論語)와 맹자(孟子)를 읽으면 들어가기가 쉬우니, 이후의 공부가 많지만 대체(大體)는 이미 서게 된다.' (大學)
연평 이 선생이 말하기를, '사람이 몸가짐을 하는 것은 의당 공자를 법으로 삼아야 한다. 공자와 시대적으로 1천 년 이상 떨어져서 직접 가르침을 받을 수 없고, 볼 수 있는 것은 논어 뿐이다. 논어는 당시에 문인(門人)들이 기록한 공자의 언행이다. 매번 읽어서 음미하고 완색(玩索)하여 연역(演繹)하며 미루어 실행한다면 공자에게 직접 가르침을 받지 못하더라도 사군자(士君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大學衍義補)
정자(程子)가 말하였다. '논어를 읽는 자는 공자의 제자들이 물은 대목을 자기가 질문한 것으로 여기고 성인(聖人)이 대답한 대목을 오늘 자기 귀로 들은 것으로 여긴다면 자연히 얻는 것이 있을 것이다.' (近思錄)
또 말하였다. '논어는 쓰인 말은 친근하지만 담긴 뜻은 심원하며, 말은 끝이 있지만 그 뜻은 무궁하니, 끝이 있는 말은 훈고(訓詁)를 통해서 찾아볼 수 있지만 무궁한 뜻은 자기의 정신으로 이해해야 한다.' (大學衍義補)
또 말하였다. '가령 논어를 읽기 전에도 이런 정도의 사람이고 읽고 나서도 이런 정도의 사람이면 곧 전혀 읽지 않은 것과 같다.' (論語集註)
한 문공(韓文公) 유(愈)가 말하기를, '성인(聖人)의 도를 보려고 한다면 반드시 맹자(孟子)로 부터 시작해야 한다.' 하였다. (孟子集註)
정자(程子)가 말하였다. '사람이 논어와 맹자 두 책만 자신에게 절실하게 보더라도 종신토록 효과를 보는 것이 참으로 많을 것이다.' (近思錄)
또 말하였다. '공자의 말은 글귀마다 자연(自然)이고, 맹자의 말은 글귀마다 사실이다.' (大學衍義補)
또 말하였다. '배우는 자는 먼저 논어와 맹자를 읽어야 한다. 논어와 맹자는 잣대나 저울 같으니, 이것을 가지고 사물을 달거나 재면 자연히 장단(長短)과 경중(輕重)을 알게 된다.' (近思錄)
주자가 말하기를, '중용의 공부는 치밀하고 규모가 크다.' 하였다. (朱子語類)
주자가 말하였다. '먼저 대학을 읽어서 그 규모를 정(定)하고, 다음으로 논어를 읽어서 그 근본을 확립하며, 다음으로 맹자를 읽어서 발휘되는 것을 관찰하고, 다음으로 중용을 읽어서 옛사람의 미묘한 부분을 찾는다. 대학을 보아서 처음부터 끝까지 완전히 꿰뚫어서 전혀 의심나는 것이 없은 뒤에 논어와 맹자를 읽어야 하고, 논어와 맹자에서 또 의심나는 것이 없은 뒤에 중용을 읽어야 한다.' (朱子語類)
공자가 이르기를, '시(詩)에서 선(善)을 좋아하고 악(惡)을 미워하는 마음을 일으키며' 하였다. (論語)
정자(程子)가 말하였다. '학자가 시경을 보지 않아서는 안 되니, 시경을 보면 사람으로 하여금 한 등급의 품격이 자라게 한다.' (近思錄)】
공자가 이르기를, '예(禮)를 배우지 않으면 확고부동하게 설 수 없다.' 하였다. (論語)
정자(程子)가 말하기를, '서경(書經)을 볼 때는 반드시 이제(二帝)와 삼왕(三王)의 도(道)를 보아야 한다.' 하였다. (近思錄)
역(易)에 이르기를, '그 도(道)가 매우 커서 온갖 사물을 빠뜨리지 않는다. 그러나 처음부터 끝까지 두려워하는 것은 허물이 없게 하려는 것이니, 이것을 가리켜 역(易)의 도(道)라고 한다.' 하였다. (周易)
정자(程子)가 말하였다. '때를 알고 형세를 아는 것이 역(易)을 배우는 큰 방법이다.' (周易)
정자(程子)가 말하기를, '먼저 의리(義理)를 알아야 비로소 춘추(春秋)를 볼 수 있다.' 하였다. (近思錄)
주자가 말하기를, '몸을 닦는 법은 소학(小學)에 갖추어져 있고, 의리의 정미(精微)한 내용은 근사록에 상세히 기술되어 있다.' 하였다. (近思錄)
정자(程子)가 말하기를, '사서(史書)를 읽을 때는 반드시 치란(治亂)의 기미와 현인(賢人)과 군자(君子)의 출처(出處)와 진퇴(進退)를 보아야 하니, 이것이 바로 격물(格物)이다.' 하였다. (近思錄)
정자(程子)가 매번 사서(史書)를 읽을 때에 절반쯤 읽고는 책을 덮고서 그 성패(成敗)가 어떻게 될지를 생각해 본 뒤에 이어서 보고, 자기의 생각과 합치되지 않은 점이 있으면 또다시 정밀히 생각하였다. (御覽經史講義)
장자(張子)가 말하기를, '책을 통해 이 마음을 유지하는 것이니, 독서를 하면 이 마음이 항상 유지되고, 독서를 하지 않으면 끝내 의리를 보려고 해도 보이지 않는다.' 하였다. (近思錄)
장자(張子)가 말하였다. '책은 반드시 외워야 하고, 정밀히 생각하는 것은 대부분 밤중이나 조용히 앉아 있을 때에 해야 깨달음을 얻는다. 기억하지 않으면 생각이 일어나지 않는다.' (近思錄)
주자가 말하기를, '옛날에 이 선생(李先生)을 뵈었을 때 말씀하시기를, '네가 이렇게 많은 것들을 근거 없이 이해하고 있지만 눈앞의 일은 도리어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도(道)라는 것 또한 현묘(玄妙)한 것이 없고 단지 일상생활 가운데 착실히 공부하는 곳에서 이해하면 자연히 보게 된다'고 하셨다.' 하였다. (朱子語類)
주자가 말하기를, '천하에 있는 도(道)란 그 실상이 하늘이 명(命)한 성(性)에 근원하여 군신(君臣), 부자(父子), 형제(兄弟), 부부(夫婦), 붕우(朋友) 사이에 행해지고 있다.' 하였다. (朱子讀書法)
주자가 말하였다. '부자와 형제는 천속(天屬)이되, 인위적으로 합한 경우가 세 가지이다. 부부라는 것은 천속이 말미암아 이어지는 것이고, 군신은 천속이 의지하여 온전할 수 있는 것이며, 붕우는 천속이 힘입어 바르게 되는 것이다. 이것들은 인도(人道)의 기강을 잡는 것이고 인륜의 표준을 세우는 것이므로, 하루도 어느 하나라도 없어서는 안 된다.' (朱子語類)
또 말하였다. '붕우가 인륜에 있어 관계되는 것이 지극히 중요하다.' (朱子語類)
어떤 사람이 묻기를, '인륜에서 사(師)를 언급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입니까?'라고 하니, 주자가 대답하기를, '스승이라는 뜻은 붕우에서 나뉜 것으로 임금과 아버지와 같다. 붕우는 많고 스승은 적으므로 많은 것을 가지고 말하였다.'라고 하였다. (朱子語類)
1. 독서는 모름지기 마음을 하나로 집중해야 한다. 이 한 구절을 읽으면 우선 이 한 구절을 이해하고, 이 한 장을 읽으면 우선 이 한 장을 이해해야 한다. 모르지기 이 한 장을 철저하게 이해해야 비로소 다른 장을 볼 수 있다. 다른 장과 다른 구절은 생각할 필요가 없다. 다만 마음(心)을 가라앉히고 기운(氣)을 안정시켜 책을 살펴야 하며, 너무 지나치게 신경쓰며 사색하지 않아야 한다. 그렇게 하면 얼마 지나지 않아 도리어 정신을 놓치게 된다. 선배들이 '독서는 경(敬: 정신집중)해야 한다'고 말했는데, '경(敬)'이란 정신을 한 곳에 모으고 마음을 날뛰게 하지 않는 것이다.
2. 공부하는 법은 의심이 없는 곳에는 의심을 일으켜야 되고, 의심이 있는 곳엔 의심을 없애야 한다.
3. 독서하다 난해한 곳을 만나면 우선 모르지기 마음을 비우고, 그 의도를 깊이 탐구해야 한다. 때로는 깊이 생각할 일도 생기는데, 도리어 생각이 없을 때 깨닫게 된다.
4. 나는 예전에 '대체로 마음이 공정하지 못한 사람은 독서하지 못한다'고 말하는 사람을 보았다. 지금 살펴보니 정말 그렇다. 가령 성인의 경전을 풀이할 때는 오로지 자기 자신은 마음에 두지 말고(자신의 사견은 개입시키지 말고) 온전히 마음을 비우고, 단지 그 도리만 직접 시비(是非)를 살펴야 한다. 이처럼 글을 보더라도 여전히 저절로 구습(舊習)에 구속되어 점검할 곳을 잃게 된다. 온전히 한 개인의 삿된 뜻의 성현의 글을 본다면 이떻게 볼 수 있겠는가?
5. 글을 볼 때는 모름지기 마음을 고요하게 하고, 생각을 너그럽게 하고, 글에 푹 빠져서 반복하기를 오래하면 저절로 깨달을 수 있게 된다.
6. 마음을 풀어 놓고 그의 주장을 기준으로 그의 주장을 보고, 사물을 기준으로 사물을 보아야지, 자신의 기준을 주장으로 사물을 보지 않아야 한다. 그 글로서 그 글을 보고, 사물을 가지고 사물을 살펴보아야 한다. 먼저 자신의 견해를 내세우지 않아야 한다.
7. 배우는 사람은 들은 것이 있으면 모르지기 바로 '행(行)'해야 한다. 만약 한권의 책을 얻으면 모름지기 곧바로 읽고, 곧바로 생각하고, 곧바로 행해야 한다. 어떻게 이리 저리 생각하고 머뭇거리며 기다린 뒤에 착수할 수 있겠는가? 한 장의 종이를 얻었으면, 한 장의 종이에 있는 도리를 행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8. 독서(讀書)는 곧 '일을 처리하는 것'이다. 무릇 일을 처리할 때는 '시(是)'가 있고 '비(非)'가 있으며 '득(得)'이 있고 '실(失)'이 있다. 일을 잘 처리한다는 것은 그 경중을 헤아리는 것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독서하여 그 바른 이치를 강론하고 연구하여 그 시비(是非)를 판별하는 것은 일에 임하여 그 이치에 나아가려는 것이다.
9. 배우는 사람은 단지 익숙해지려고 해야만 공부가 순일(純一)해진다. 읽을 때도 익숙해져야 하고, 볼 때도 익숙해져야 하며, 이리저리 음미할 때도 익숙해져야 한다.
10. 사람이 일할 때는 모름지기 그 일에 집중하고 몰두해야 한다. 마치 장욱이 초서(草書)를 배울 때 공손대랑이 칼춤을 추는 것을 보고 깨달은 것과 같아야 한다. 만약 마음을 집중하여 뜻을 모으지 않으면, 어떻게 깨우칠 수 있겠는가!
11. 독서할 때 만약 이해한 것이 있더라도, 이것이 꼭 옳은 것만은 아니기 때문에 이것에 집착하지 않아야 한다. 우선 한편에 제쳐 두고 좀더 글을 읽다 보면 새롭게 보일 것이다. 만약 한 번의 이해에 집착하면, 이 마음은 바로 그 이해에 가려지게 된다. 비유하면 한 조각의 깨끗한 곳에 하나의 사물을 얹어 놓으면 틀림없이 가려지는 곳이 있는 것과 같다.
12. 대저 독서할 때는 우선 읽으려고 해야지, 단지 생각만 하려고 해서는 안된다. 입속에서 읽다 보면 마음속은 한가해져 바른 이치가 저절로 나오게 된다. 나도 처음 배울 때는 역시 이와 같이 했을 뿐, 다른 방법은 없다.
13. 글을 볼 때는 이미 이해된 것을 다시 살펴 볼 수 있다면, 이해가 더욱 오묘해질 것이다.
14. 독서할 때는 모르지기 철저하게 내용을 끝까지 파고 들어야 한다. 이것은 사람이 밥을 먹을 때 잘게 씹어야 비로소 삼킬 수 있고, 그런 뒤에나 몸에 보탬이 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15. 글을 읽을 때는 모름지기 맹장(猛將)이 병사를 운용할 때 단 한 번의 진형으로 온힘을 다해 끝까지 싸우는 것처럼, 인정없는 가혹한 형리가 형벌을 다스릴 때 끝까지 추궁하여 결코 용서하지 않는 것처럼 해야 한다.
16. 조금씩 보면서 숙독(熟讀)하고, 반복하며 체험하며, 미리 효험을 예상할 필요는 없다. 단지 이 세 가지 원칙을 지키는데 항상됨이 있어야 한다.
독서(讀書)
이상으로 주자가 학문에 관하여 논한 것을 간단히 살펴보았다. 널리 비울 것(博文)을 주장하고 물에 이르고 이치를 궁구하기(格物窮理)를 주장하며 여러 방면으로 구할 것(多方以求)을 주장하게 되니 필요성을 명백하게 주장한 사람은 다만 주자 한 사람뿐이다.
후세 사람으로서 그의 말을 모아서 주자독서법(朱子讀書法)이라고 이름 붙인 사람도 한 두 사람이 아니다. 본장에서는 다시 주자가 독서에 대해 논한 것을 요점만 뽑아서 기술해 보고자 한다.
당시 이학가들의 기풍은 새로운 주장을 창안하기에 힘쓰고 제각기 일가를 이루기에 급급하였다. 주자가 독서의 필요성을 말한 것은 대체로 이러한 폐단을 막고자 한 뜻에서였다.
처음 볼 때는 대단히 어리석고 졸렬한 것 같지만 실은 크게 교묘하고 지혜로운 것을 깨우쳐 준 것이며 지극히 둔하고 매우 완만한 방법 같으면서도 실은 지극히 빠르고 이로운 계기가 된다.
누가 '주역은 어떻게 읽어야 합니까?'라 물었다. '단지 마음을 비워서 그것의 바른 뜻을 구할 뿐 자신의 생각에 집착하지 말아야한다. 다른 책을 읽을 때에도 역시 그러해야 한다'고 대답하였다.
책을 읽을 때에 굳이 자신의 생각을 끼워 넣으려고 해서는 안 된다. 그 책 본문의 바른 뜻을 쫓아 읽어서 그 뜻을 분명히 아는 것이 중요하다. 이렇게 오래 반복하다 보면 자연히 마음(心)과 이치(理)가 한데 모이게 되고 힘을 얻는 곳(得力處)이 있게 된다.
독서할 때 약간 본 바가 있다 해도 그것이 반드시 옳다고 할 수 없으므로 거기에 집착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얼마동안 놓아두었다가 다시 읽으면 새로운 견해가 생겨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탁한 물이 가신 뒤에 맑은 물이 생기는 것과 같다.
옛 사람이 한 말을 억지로 자신의 생각에 끌어다 맞추어서는 끝내 진전이 없을 것이다. 모름지기 가슴을 열어야 마음이 밝고 상쾌해지는 법이니 마땅히 이와 같이 해야 한다.
누가 '책을 읽어도 요점을 모르겠습니다'고 여쭈었다. '어떻게 요점을 쉽게 알 수 있겠는가? 근대의 학자들 중에는 책을 버리고 한 두 마디 말속에서 바로 도리를 찾으려고 하는 사람들과 아무 책이나 닥치는 대로 읽어서 귀착한 바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 모두 학문을 아는 자라고 할 수 없다. 반드시 많이 읽고 깊이 생각하기를 오래하는 동안에 저절로 도리를 알게 될 것이니 이른바 요점이라는 것도 자연 그 안에 있게 된다'고 하였다.
독서의 요령에 있어서는 적은 분량을 익숙하게 읽는 것이 그 첫째이고 주장을 세우려고 애쓰지 않고 반복해서 읽고 즐기는 것이 그 둘째이며 이해에 몰두하고 본받고자 하지 아니하는 것이 그 세 번째이다.
이것은 주자가 제시한 독서법의 세 가지 강령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주자는 또 다음과 같이 말한다. '독서에는 한권의 책을 철저히 독파한 뒤에 비로소 다음 책을 보는 것이 필요하다. 반드시 한길 정로(正路)를 따라 곧장 나아가야 한다. 사면(四面)에 볼만한 것이 있어서 한번 본다고 해도 나쁠 것이 없으나 긴요한 것은 못된다.'
동파(東坡)가 권했던 독서법은 한권의 책마다 읽게 하는 것이었다. 독서는 수많은 보화가 있는 바다에 들어가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 그 속에 있는 보화를 모두 취할 수는 없고 단지 그가 바라는 것만 취할 수가 있다.
만약 바라는 것이 고금 역사의 흥망성쇠나 성현(聖賢)들이 하는 일이라면 별도로 한 번 더 읽어서 그 내용을 따로 구해 보아야 한다.
다른 것도 모두 이와 같다. 만약 배움이 이루어지면 사방에서 적을 맞이해야 하니 섭렵하기를 바라는 자들과 날을 같이하여 말할 수 없다.
황산곡(黃山谷)이 어떤 사람에게 써준 글에서 말하기를 '배우는 자들이 널리 아는가만 좋아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런 자들을 보면 정밀하지 못한 흠이 있다. 수많은 책을 이것저것 읽기 보다는 한권의 책이라도 정밀히 공부해야 한다. 그러고 나서 남는 힘이 있으면 여러 책을 섭렵한다 해도 그 정밀함을 얻을 수가 있다. 대개 내가 주체가 되어 책을 보면 곳곳마다 얻음이 있을 것이나 책을 많이 읽는 것으로서 나를 넓히고자 하면 책을 놓는 순간 모두 그것을 잃게 될 것이다'고 하였다. 선생은 이 말을 좋아하셨는데 배우는 사람들에게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동파(東坡)나 산곡(山谷)은 모두 문장가들인 만큼 이 학가들이 중히 여긴바가 아니었으나 주자는 그들의 말도 취하였다. 참으로 잘 읽기만 한다면 이학(理學), 경학(經學), 사학(史學), 문학(文學)을 막론하고 이와 같이 독서해야 한다.
주자는 또 말하기를, '독서할 때 처음 읽는 책을 두 권 겸해서 읽는 것은 옳지 않다. 그러나 이미 읽은 것을 재독(再讀)하는 경우라면 겸해서 보아도 상관없다. 이해해서 깨달은 곳은 반복해서 또 보아야 한다.'
누가 '책을 읽을 때 여러 가지 주장이 뒤섞여 있으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고 물었다. '마음을 비우고 주장을 한 가지씩 쫓아서 봐야한다. 한 주장을 알고 나서 다시 다른 주장을 보아야 한다. 또 글을 따라 보는 것에서 제각기 하나씩의 도리가 저절로 드러나게 되면 나중에는 자연히 관통하게 된다.'
여러 사람의 주장 가운데 그 차이나는 점을 주의해서 볼 필요가 있다. 갑(甲)의 주장이 이와 같으면 그것을 갑(甲)의 주장에 의하여 끝가지 추궁해 보고 을(乙)의 주장이 이와 같으면 을(乙)의 주장에 의거하여 끝까지 추궁해 본다.
두 사람의 주장을 끝까지 추궁해 본다. 두 사람의 주장을 끝까지 추궁하고 그를 참고 삼아 다시 궁구하면 반드시 하나의 진실 된 것이 나오게 될 것이다.
독서를 하는 중에 여러 가지 의문이 함께 일어날 때는 잠자고 밥 먹는 것조차 잊을 정도로 몰두할 수 있어야 큰 진전이 있다. 마치 전쟁에 있어서 한번 대대적인 살상이 있어야 크게 이기는 것과 같다.
근거도 없이 자기 주장을 내세워서는 안 될 것이나 그러나 독서를 하다가 의심되는 곳이 있고 또 깨달은 바가 있으면, 자기 주장을 내세우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자기주장을 내세우지 않는 자는 독서만 할 뿐 의심이 되는 곳에 이르지는 못한 사람이다. 독서를 오래하게 되면 저절로 의문이 생긴다. 만약 먼저 의문을 구하려고 하면 의문이 생기지 않는다.
독서의 폭이 넓지 못하고 이치를 구하는 것이 정밀치 못하면 의문이 생겨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먼저 자기 주장을 내세우기에만 급급하면 수고만 하고 이익이 없을 것이다.
배우는 자가 근심해야 할 것은 경솔하고 들떠서 깊이 침잠하지 못할까 하는 점이다.
독서를 함에 있어서는 차라리 상세할지 언정 소략하지 말며 차라리 낮을지 언정 높지 말며 차라리 소박할지 언정 억지로 꾸미지 말며 차라리 비근할지 언정 멀지 않아야 한다.
마지막 인용은 주자가 제시한 독서에 있어서의 네 가지 훈계라고 할 수 있다. 과연 상세하고 낮으며 소박하며 비근할 수 있으면 저절로 깊이 침잠하여 철저하게 될 수가 있다. 경박하고 들뜬 사람일수록 반드시 높고 멀며 억지로 꾸미며 소략한 것을 좋아한다.
또 말하기를, '독서를 할 때는 크게 힘을 기울여서 해야 한다. 정신을 곤두세우고 근육과 뼈에 긴장이 들어 있어야 하며 무기력하거나 칼등처럼 무뎌서는 안 된다.
독서를 약 끓이는 것에다 비유하면 먼저 센 불로 크게 끓이고 난 후 약한 불로 다리면 좋다. 시간은 길게 잡되 과정은 긴밀하게 해야 한다. 과정을 적게 잡고 노력을 크게 쏟는다.
가령 오늘 한권의 책을 읽을 수 있지만 그 반만 읽고 다음에는 또 그만한 힘으로 그 반의 반을 읽는다.
가령 활을 쏘는 경우에 있어서 다섯의 힘이 있으나 넷의 힘에 맞는 활을 사용한다면 곧 마음껏 쏠 수가 있어서 자신의 힘이 남보다 나아 보이게 할 수 있다.
독서도 이와 같은 것이다. 안으로 마음을 간직하여 성품을 기르고(在心養性) 바깥으로 이치를 궁구하여 앎을 극진히 하는 것(窮理致知)이 두 길이 아니라 한길이다.'
당시의 이학가들은 모두 다 심성을 말하는데 힘을 쓸 뿐 앎을 극진히 한다거나 이치를 궁구하는데 힘쓰는 일이 없었다.
더욱이 독서를 경시하여 이를 부차적인 것으로만 알고 또 책에 얽매이지 않도록 서로 경계하였다. 그런데 주자 홀로 그 폐단을 바로 잡기에 힘썼던 것이다.
그의 말을 들어보자. '무릇 내 마음에 얻은 바가 있으면 반드시 성현의 글에 비추어 따져 보아야 한다. 그리하여 조금이라도 어긋난 것이 있으면 다시 정밀히 생각하고 밝게 분변해서 더욱 지당한 견론을 얻도록 해야 한다. 잠시 궁구하는 수고가 싫어서 작은 의혹이나 확실하지 못한 이해로 인해서 더욱 큰 장애가 생기지 않도록 해야 한다.
구함에 있어서는 얕은 데서부터 깊은 곳으로 미치며 이르기는 가까운 곳으로부터 먼 곳으로 미치도록 하되 저마다 순서가 있도록 하여 결코 조급한 마음으로 해서는 안 된다.
얕고 가까운데서 도모한다고 하여 깊고 먼 것을 잊어버린다거나 내 마음을 버리고 성인의 마음을 구한다거나 나의 주장을 버리고 선유의 주장을 따라서는 아니된다.
내 생각에는 배우는 자들이 미치광스러운 생각을 버리고 쓸 데 없는 얘기들을 그만두고 착실히 독서에 열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처음엔 그저 문자에 매달릴 뿐이겠으나 오래되면 저절로 깨달아지는 곳이 있게 된다.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선유들이 말한 정경(正經)을 반복해서 충분히 공부하기를 오래 계속하면 저절로 그 뜻을 알게 된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마음을 비워서 성현(聖賢)들의 말씀한 바를 보기만 하고 자신의 여러 생각과 견해로써 그와 맞서서는 안 된다. 이렇게 물러나서 보기를 오래하면 저절로 융회되는 곳에 있게 된다.
자신의 생각과 견해가 반드시 그릇된 것은 아니더라도 자부심이 너무 강해서 도무지 옛사람의 말을 용납지 않으려 든다면 자기 견해의 잘못을 알 수가 없게 된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옛 사람이 논의한 것의 득실에 대해서 이제 어느 겨를에 그 옳고 그름을 따질 것이며 또 어느 겨를에 자신이 오늘에 본 바를 올바르게 취할 것인가?
반대로 자신이 본 것을 버리고 옛 사람들이 말한 것만을 가지고 일에 돌이켜 구하는 경우에도 얻음이 없을 것이다
옛 사람들의 책을 읽는 것이 바깥에 힘쓰며 남의 이목을 쫓는 것이라거나 옛사람의 시비만을 다투는 것은 아니다. 자신의 마음을 넓혀 많이 듣고 많이 알고 옛 사람들이 말한 도리에 대해서도 이해하고 받아 들여야 한다.
그렇다고 자기를 모두 버리고 남을 따라야 하는 것도 아니며 자기와 남을 융회하여 더욱 높은 경지에 이르도록 노력해야 한다. 만약 이와 같이 되려면 자기를 버리고 한 걸음 물러서서 마음을 비워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같이 되어야 한다.
남과 맞서려는 생각을 버리고 남을 이해하게 되면 저절로 의심할 곳도 생기고 분변(分辨)도 하게 되어 마침내 새로운 견해가 나오게 된다.
주자가 당시 사람들에게 가르친 이와 같은 독서의 방법은 당시 이학가들에 대해서만 훈계가 된 것이 아니고 오늘날 독서를 통해 진보를 꾀하고자 하는 사람에게 있어서도 마땅히 따라야 할 준칙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일에는 반드시 두 가지 길이 있기 마련이다. 저 사람이 낮에 관해 말하는 것을 보면 자신은 곧 밤에 관한 도리를 찾아서 반대하니 제각기 말하는 것이 어긋나서 서로 합할 수 없다'와 같이 될 것이다.
무릇 새로운 주장을 세우기에만 급급하고 전통을 경시하는 폐단이 모두 이와 같다. 뒷날에 가서 지금을 돌이켜 본다면 지금 이 시점에서 옛날을 돌이켜 보는 것과 같을 것이다. 진실로 전통이 없다면 또한 문제 삼을 학술도 없을 것이다.
주자는 또 스스로 설명하기를, '반평생을 장구(章句)와 훈고(訓詁)에 몰두하고 규범과 법도에 따르기를 힘썼으나 세상을 놀라게 할 만한 높고 깊은 오묘한 경지를 얻어 보지 못하였다.
다만 성현의 유훈(遺訓) 가운데서 평이하고 명백하며 망령됨이 없어서 반드시 행할 만한 것이 있다는 것을 다소나마 알게 되었다.' 이것은 바로 주자가 전통을 지켰을 뿐만 아니라 또한 새롭게 주장하게 된 점을 말한 것이다.
주자는 또 말하였다. '독서하는 데는 별다른 방법이 없다. 그저 자신의 사사로운 생각을 버리고 한자 한구마다 성현들이 말한 바를 따라서 바로 이해할 뿐이다.
한 구절이라도 자신의 생각을 삽입해 보려는 망령된 행동을 감히 하지 아니하기를 오래 계속 하면 자연히 얻는 것이 있을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아니하면 가령 불교에서 말하는바 보배로운 꽃이 어지럽게 쏟아진다는 것과 같을 것이니 그것은 다만 두찬(杜撰)에 불과할 것이다.'
새로운 사상도 또한 모두 전통을 통해서 나와야 한다. 전통을 말살하고 새로운 견해만을 구한다면 이것은 모두 두찬(杜撰)이다.
또 말하였다. '겨우 '대학(大學)' 한 구절을 보고서 바로 '중용(中庸)'에 대해서 지루하게 늘어놓게 되면 이것과 저것이 다 같이 미혹되고 뒤얽히게 된다.
이것은 비단 '대학(大學)'에만 밝지 못할 뿐만 아니라 또한 '중용(中庸)'에 이를 만한 힘도 없게 된다. 정력만 허비하고 의논만을 일삼으며 이리저리 많은 말을 늘어놓되 자기 자신에게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
그래서 또 말하였다. '책을 읽을 때는 오직 마음을 비우고 생각을 통일해서 순서에 따라 점차로 나아가야 얻는 것이 있게 된다. 한상 떡 벌어지게 차린 요리를 한입에 다 맛 볼 수는 없다.'
결코 안이하고 조급하게 서둔다거나 평범한 것을 싫어하고 새로운 것만을 좋아하거나 지극히 이해하기 어려운 추상적인 말만 골라 암중모색하거나 함부로 제 생각으로 이리저리 따지면서 헛되이 마음과 힘을 낭비해서는 안 된다.
주자는 독서에 관해서 매우 많은 말을 하였다. 그 가운데 더러는 지극히 어리석고 졸렬하며 지극히 둔하고 요원하게 느껴지는 것도 없지 않다. 그러나 종래의 독서인으로서 누구도 주자만큼 넓게 읽고 두루 통하여 많은 견식을 가졌던 사람이 없다.
어떤 사람은 주자가 이학의 대유로써 심성(心性)의 수양에 힘썼어야 할 텐데 평생 힘쓴 곳이 오직 독서가 아니었던가 의심하기도 한다. 그러나 주자에게 있어서 독서는 동시에 마음공부이기도 했다는 것을 알지 못한 탓이다.
주자가 사람들에게 가르친 독서의 요령은 마음을 비우고 (虛心), 마음을 통일하며(專心), 마음을 편히 가지며(平心), 마음을 일정하게 하고(恒心), 자신의 생각을 주장하지 않으며(無慾立己心), 속히 효과를 바라는 마음을 없애며(無求速效心), 고상한 것만 좋아하는 마음을 없애고(無好高心), 바깥에 힘쓰는 마음을 없애고(無外務心), 세상을 놀래게 하고자 하는 마음을 없애고(無存驚世駭俗心), 함부로 늘어놓거나 터무니없이 파고드는 마음을 없애는 (務無杜撰穿鑿心) 등으로서 자신을 버리고 물러설 수가 있은 뒤에라야 비로소 망령되고 조급한 마음이 그치게 되고 어리석고 게으르며 잡스러운 마음을 경계할 수가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자기의 심성에 대한 공부를 해야만 이러한 마음의 여러 가지 덕을 갖출 수가 있고 그래야만 능히 주자의 독서를 본받을 수 있다. 그러므로 주자가 제시한 독서법은 동시에 일종의 함양(涵養)의 방법이기도 하고 천이(踐履)의 방법이기도 한 것이다.
이리하여 주자가 제시한 독서법은 이학가가 심성을 수양하는 일종의 최고 경계임과 동시에 일반 독서인에게도 가능한 가장 평이한 독서법이기도 하다. 이학이 귀중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러한 것이 곧 이학가들이 제시한 독서법으로 소홀히 넘겨서는 안 된다.
두 육(陸)씨가 아호(鵝湖)의 모임에서 읊은 시에 대한 주자의 회답시에서 말하기를, '옛 학문을 더욱 치밀하게 공부하고 새 지식을 함양하되 더욱 깊게 해야 하리'라고 하였다.
후세 사람이 주자의 글을 보고 흔히 그가 옛 학문을 더욱 깊이 따진 것이 사실이나 새 지식을 함양하여 더욱 깊게 한 바는 인정키 어렵다고 하였다. 그러나 옛 학문을 더욱 치밀하게 따지는 것이 곧 새 지식을 더욱 깊게 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주자가 새로운 지식에 깊이 침잠했던 바를 알기 위해서는 결국 주자의 독서법을 본받아서 '주자서'를 읽어 보면 차츰 알게 된다.
논어 술이편(述而扁)에서 공자가 말하기를, '기술하기만하고 창작하지 않으며 믿고서 옛 것을 좋아하는 점에 있어서는 나를 가만히 노팽에 비유할 수 있다(述而不作, 信而好古, 竊比於我老彭)'고 하였다.
주자는 '집주'에서 다음과 같이 이를 설명하고 있다.
기술한다(述)는 것은 옛 것을 해설한다는 뜻이다. 창작한다(作)는 것은 처음 짓는다는 뜻이다 창작하는 일은 성인이 아니고서는 할 수가 없으나 기술은 현인이면 할 수 있다. 가만히 비긴다(竊比)라는 것은 남을 높인 말이다. 나(我)란 공자 자신을 가리킨 말이다.
노팽(老彭)은 상(商)의 어진 대부로서 대개 옛것을 믿고 해설했던 사람이다. 공자가 '시'와 '서'를 더듬고 '예'와 '악'을 정하며 '주역'을 찬집하고 '춘추'를 정리했던 것은 모두 선왕(先王)들의 옛 것을 전하였을 뿐 일찍이 창작한 것은 없었다. 그래서 스스로 이와 같이 말했던 것이다.
감히 창작자로서의 성인을 자처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또한 드러내 놓고 자신을 옛 현인에 비유하지도 않았다. 그 덕에 성대해질수록 마음은 더욱 겸손해진 것이니 그 말이 겸손한 것조차 깨닫지 못하였다.
당시 창작한 것이 어지간히 갖추어졌으므로 공자께서 뭇 성인들이 지은 것을 집대성하고 절충하였던 것이다. 그가 한 일은 비록 해설한 것이지만 그 공적은 창작의 배가 된다. 이것을 알아야 한다.
이 말은 주자 자신에 관한 말이기도 하다. 공자가 옛 성인들의 사상을 집대성했다면 주자는 공자 이래의 여러 현인들의 사상을 집대성하였다. 그 주된 요점은 다만 잘 기술하는 곳에 있었고 감히 스스로 창작하는데 있지 않았다.
그러나 참으로 잘 기술할 수 있다면 그 공은 창작하는 것의 배가 된다. 이 말 가운데 숨은 깊은 뜻은 진실로 수천 년 중국 학술의 대전통을 알지 못하고는 쉽게 이해할 수 없다.
만약 반드시 창작하고자 하고 기술하는 것으로 만족할 수 없는 자가 있다면 이는 먼저 자신을 높이 내세우고 옛 사람의 글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마음으로 읽게 될 것이며 주자가 제시한 독서법에 대해서도 조금도 놀랍게 여긴다 하거나 쉽게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숙독정사(熟讀精思)
자세히 읽고 정밀하게 생각하라
유네스코에서 지정한 '세계 독서의 날'이 4월 23일인데, 어떤 달력에도 표시하지 않았다.
옛날 스페인의 카탈로니아(katallonia) 지방의 공주가 나쁜 용에게 납치되어 가자, 청년 조지(Joji)가 구출해 주었다. 공주가 그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서 책 한 권 선물했다고 한다. 그날이 4월 23일이었다.
스페인 사람들은 남녀 간에 책 선물하기를 좋아한다. 그래서 4월 23일을 '세계 독서의 날'로 지정하였다. 또 영국의 셰익스피어, 스페인의 세르반테스 등 많은 문학가들이 서거한 날이 4월 23일이기도 하다.
세계 150여 개 국가에서 '세계 독서의 날' 기념행사를 하는데, 우리나라 달력에서 표시를 하지 않은 것은 국가부터 '독서'에 아예 관심이 없다는 증거다.
우리나라는 조선시대에는 세계에서 책을 가장 좋아하던 나라였다. 그러던 나라가 어떻게 책에 가장 관심이 없는 나라가 되었을까? 모두가 눈앞의 이익에만 급급하기 때문이다.
지금 대한민국 성인의 1년 독서량은 7.5권에 불과하다. 2년 전의 9.4권보다도 1.9권 줄었다. 성인의 40% 정도는 1년에 단 한 권의 책도 읽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일본의 성인들은 1년에 70여권으로 우리나라의 10배다. 우리나라 성인들의 독서량은 세계 166위다.
세계 10위 경제대국이라면서 독서는 세계 최하위 수준이다. 물론 종이로 된 책 대신, 스마트폰으로 필요한 글을 읽고, 컴퓨터나 텔레비전 등 영상으로 글을 읽고 있으니, 종이 책 통계만으로 그런 주장을 하면 안 된다고 반박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종이책과 영상물에 대한 머리의 반응이 다르다. 그것은 지리산을 걸어서 올라가는 것과 케이블카 타고 올라가는 것처럼 차이가 크다.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가도 지리산을 볼 수는 있지만, 걸어 올라간 것처럼 자신의 땀과 느낌으로 조합된 정신적 육체적 경험이 될 수 없다.
종이책은 자기 머리를 작동시키지 않으면 자기 것이 되지 않지만, 영상물은 자기 머리를 작동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뼈와 핏속에 흡수가 되지 않는다.
흔히 책을 왜 안 읽느냐고 물으면, '시간이 없습니다', '한 번 보고 버릴 책인데, 비싼 돈 주고 살 것 있습니까?' 등등의 답을 한다. 그러나 좋은 책은 두고두고 여러 번 보아도 된다. 또 책값이 아까우면 도서관에서 빌려 봐도 된다.
우리나라에서 학문과 관계있는 노벨상을 아직 받지 못 하는 가장 큰 이유는 독서를 안 하기 때문이다. 진정으로 자기가 좋아서 책을 읽으면서 다급한 마음이 아닌 차분한 마음으로 읽으면 평생의 즐거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독서법(讀書法)
마음 비우지 않으면 책의 의미 들어설 자리 없다
지식을 얻기 위해 독서를 한다. 그런 점에서 '2차적인 일(第二事)'이다. 즉 도구적 의미를 갖는다.
'성학집요'는 책 읽는 자세를 이렇게 적고 있다. '몸을 가다듬고, 자리를 잡는다. 시선을 차분하게 두고, 작게 읊조린다. 마음을 비우고, 넉넉히 유영한다. 이때 자신과의 연관을 놓치지 않고 성찰한다. 한 구절을 읽으면 이것을 어떻게 적용 실천할지를 고민한다.'
朱子曰: 讀書, 須要斂身正坐, 緩視微吟, 虛心涵泳, 切己省察, 讀一句書, 須體察這一句我將來甚處用得.
옛것을 익혀 창조를 연다
독서의 함정
① 망각과 조급함
책을 읽어도 그때뿐인 걸 어떡하나. 책이 심신의 연관을 놓친 탓이다. 그때 '책은 책, 그리고 나는 나(書自書, 我自我)'로 따로 논다. 이 '망각'이 첫 번째 위험이다.
두 번째는 지식을 '소유'하려는 탐욕이다. 마음은 조급해서 여러 책을 이것저것 사냥하듯, 섭렵(涉獵)하려 든다. 한꺼번에 여러 책을 뷔페 식으로 맛보지 말라.
주자는 유머를 섞어 이렇게 말했다. '요즘 학인들은 읽은 것도 읽지 않은 것 같고, 읽지 않은 것도 다 읽은 것 같다(今之學者, 看了也似不曾看, 不曾看也似看了).'
기가 막힌 비유 아닌가. 읽어도 내용을 모르고, 누가 물으면 안 읽고도 아는 척 하는 지식의 스노비즘을 정말 콕 집어냈다.
독서법의 핵심은 '집중'이다. '마음을 비우고, 컨디션을 편안하게 유지하며, 입에 붙듯이 읽고 정밀하게 사유하라(虛心平氣, 熟讀精思).'
과시를 잊고, 소유의 탐욕을 내려놓을 것. 페이지 뒷면으로 향하는 마음을 다잡아 지금 읽고 있는 책에 집중하는 것, 그것이다. '심신을 이 한 단락에 집중해서 바깥에 무슨 일이 있는지 묻지 말아야 한다.'
흩어진 전표 뭉치처럼 단락 단락, 일정한 분량들이 묶이다 보면 어느새 훌쩍 자라 있는 자신을 발견할 것이다.
② 자신을 비워라
아, 하나 빠트렸다. 주자가 거듭거듭 경계하는 것이 하나 있다. '자신을 비울 것이다.' 마음을 비우지 않으면 책의 의미가 들어설 자리가 없다.
요즘 사람들은 먼저 자신의 생각을 세운 후에 책에 접근한다. 그래서 옛사람들의 말을 온통 끌어다가 자기 생각 속으로 밀어 넣는다.
이를테면 책을 읽는 것이 아니라 책을 향해 설교하고 있는 형국이라 할까. 주자는 제발 '남의 말을 다 듣고 나서 판결을 내려달라'고 호소했다.
이는 송사를 처리하는 것과 같다. 마음에 을을 지지하는 생각이 있으면 갑의 옳지 않은 점만 찾게 된다.
책은 나서서 맞이하는 것이 아니니, 독자는 책이 다가올 수 있도록 '한 발 물러서서, 참고 기다려야 한다.' 이 지침을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이렇다. '마음을 열고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들을 것. 사물로서 사물을 보아야지, 네 선입견과 투영으로 사물을 보지 말라.'
放寬心, 以他說看他說.
以物觀物, 無以己觀物.
의혹들과의 한판 승부
마음을 비우고 책을 향해도 처음에는 멀리서 본 꽃밭의 풍경만 보인다. 혹은 밖에서 바라본 집처럼 외관만 보인다. 더 가까이 꽃의 형태와 색깔을 구분해야 하고, 집 안으로 들어가 구조와 인테리어를 살펴야 한다.
문장들은 처음 막연한 인상을 보여주다가 두세 단락, 나아가 여러 단락으로 분절되어 보이게 된다. 흡사 '장자(莊子)' 소잡이의 눈에, 처음에는 소의 외관만 보이다가 도가 깊어지면서 그 세부 골격과 근육이 눈을 감고도 환해지는 것과 같다.
그러다가 한 글자 한 글자가, 저마다 있을 자리에서, 온몸으로 외치고 있는 것을 알아채게 된다.
독서가 깊어지면 이해와 더불어 의문이 같이 자란다. '의문이 없는 것이 초학자들의 공통된 병통입니다. 평일에 그저 많이 읽고 습득하기에 바빠, 자세히 읽지 못한 탓이지요.'
의문은 삶의 구체성이 제기하는 도전이다. 이 의혹이 깊어지면, '어느 것 하나 의문과 곤혹이 아닌 것이 없는 지경에 이른 이 혼돈이 공부가 크게 진전될 기틀이다.
율곡은 주자의 말을 인용하고 있다. '이 과정을 한 번 거치고 나면 점점 의혹이 풀리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의혹이 다 풀려 전체가 서로 연관되고 소통되는데, 이때가 배움이 성취되는 때이다.'
개혁군주 정조는 '남들이 모두 의혹하는 지점에 고개를 끄덕이고, 아무도 의혹을 가지지 않는 곳에 질문의 칼을 들이미는 것이 공부'라고 썼다.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 정독을 가르치자
주자는 특히 머리가 좋은 사람을 경계했다. 이해가 빠르면 주어진 언설을 바로 외우고, 곧바로 사용에 들어간다. 문장을 자랑하고 해설에 침을 튀기기도 한다. 교양이나 시험용으로는 좋으나 여기 치명적 함정이 있다.
골륜탄조(渾淪呑棗), 새가 대추를 통째로 삼키면 맛을 알 수 없듯이, 교과서와 백과사전에 갇힌 지식, 구호와 이데올로기로 변질된 사상은 소화불량을 일으키고, 심하면 병원으로 실려 가게 할 수도 있다.
독서는 이를테면 양파껍질을 벗기는 것과 같고, 골수를 향해 들이미는 칼과 같다. '오늘 한 겹을 벗기고, 내일 한 겹을 더 벗길 뿐이다. 껍질을 다 벗겨야 비로소 살이 보이고, 살을 다 벗겨야 뼈가 보이며, 뼈를 깎아내야 골수가 보인다.'
우리 학문의 위기는 책을 보는 법에 철저하지 않아서가 아닐까. 생경하고 소화되지 않은 개념들이, 맥락과 배경을 알 수 없는 이론들이, 현실적 적용을 본격 고민해 보지 않은 트렌드들이 종횡무진 중구난방하는 이 어지럽고 들뜬 풍경부터 걷어내야 하지 않을까.
그러자면 원론, 기초로 돌아가서 책을 자세(仔細)히 읽는 법부터 배우고 가르칠 일이다. 웬만한 정보와 기법은 네크워크로 공개된 시절이 되었다. 창조성은 깊이 읽는 연습, 아무도 닿지 않는 심연에서 피어 오르는 것은 아닐까.
讀書之要
朱子曰 : 所讀經文은 不可貪多務廣涉獵鹵莽하여 纔看便謂已通이라. 小有疑處면 卽便思索하고 思索不通이면 卽置小冊하고 逐一抄記하여 以時省閱하여 切不可含糊護短이라. 恥於質問이면 終身黯黯하여 以自欺也니라.
주자가 말하기를, '읽는 경서(經書)의 글은 많은 것을 탐내고, 넓은 것을 힘써서 공부가 거칠며, 글을 잠깐 보고서 곧 통달했다고 해선 안 된다. 조금이라도 의심나는 곳이 있으면 곧 그 이치를 생각해 보고, 생각해도 통치 못하면 작은 책자 하나를 마련하여, 이것을 하나하나 뽑아 베껴 두고 때때로 살펴보고 연구할 것이며, 결코 호도(糊塗; 풀을 바른다는 뜻으로, 어떤 사실을 얼버무려 넘김으로써 속이거나 감춤을 이르는 말)하여서 모르는 것을 그대로 덮어 주어서는 안 된다. 질문하기를 부끄럽게 여긴다면 몸이 마칠 때까지 깨닫지 못하며 스스로를 속이게 된다'고 했다.
李榕村讀書之法曰 : 凡書에 目過口過는 終不如手過니라. 蓋手動이면 則心必隨之라. 雖閱二十遍이라도 不如抄撮一更之功多也라. 能考究同異하고 剖斷是非하며 而自記所疑하여 附以辨論이면 則濬智愈深하고 著心愈牢矣리라.
이용촌의 독서법에 말하기를, '눈으로 스치고, 입으로 스치는 것이 손으로 스치는 것만 못하다. 대체로 손이 움직이면 마음이 반드시 이에 따르니, 비록 스무 번 읽어도 손으로 한 번 베끼는 효과만큼 크지 못하다. 능히 같고 다름을 살피고 옳고 그름을 판단하며, 의심나는 것을 기록해 두었다가 변론에 붙인다면 깊은 지혜가 더욱 깊어지고 집착하는 마음이 더욱 굳어질 것이다'고 했다.
高攀龍曰 : 人不患無才니 識進則才進이요 不患無量이니 見大則量大하니 皆得之學也니라.
고반룡은 말하기를, '사람은 재주 없음을 근심하지 말지니, 지식이 늘면 재주도 는다. 견해가 없음을 근심하지 말지니, 思考가 넓어지면 견해도 넓어진다. 이는 모두 배움에서 얻는 것이다'고 했다.
趙重峯은 自幼嗜學하여 衣履盡破하되 而從師不避風雨하고 每値禾熟이면 守宿田間한대 同學數人이 從之하며 各誦所讀이라 夜深同學이 皆睡臥나 先生은 誦不輟하고 久不假寐라가 鷄一鳴이면 又起誦之라 時牧牛에 牛行逐草하면 必執書隨之하며 且行且看하다 天雨면 則披卷于簑笠之下고 潛心探賾하다 每日採薪하여 熱親房하되 以書暎火光하다 農壟間에 爲架置書하고 休暇讀之하다.
조중봉은 어릴 때부터 배우기를 좋아하여 옷과 신이 모두 헤어져도 스승을 좇아서 비바람을 가리지 않았다. 해마다 벼 익을 때가 되면 전지(田地) 사이에서 묵으며 지쳤는데, 동학 몇 사람이 좇아와서 각자 그 읽는 글을 읽었다. 밤이 깊어 동접이 모두 누워서 잠들어도 선생은 글 읽기를 그만두지 않았으며, 옷을 입은 채로 잠들었다가도 첫닭이 울면 다시 일어나서 읽었다. 소를 칠 때는, 소가 목초를 따라 가면, 반드시 손에 책을 잡고 따라가면서 한 편으로 가며 한 편으로 읽었다. 날이 비가 내리면 삿갓 밑에다 책을 펴놓고 잠심(潛心; 어떤 일에 대해 마음을 가라앉히고 깊이 생각함)하여 사색에 잠겼다. 날마다 땔나무를 해마가 어버이의 방에 불을 땟는데, 그 때마다 불빛에 책을 비쳐 보곤 했다. 농토의 밭두둑 사이에 시렁을 만들어서 책을 올려놓고 쉴 때면 읽었다.
賀欽曰 : 今之讀書는 只是不信이라 故로 一無所得矣니라.
하흠은 말하기를, '지금의 독서는 다만 믿지 않기 때문에 하나도 얻는 것이 없다'고 했다.
或이 曰 : 凡讀書之暇에 縛籬築墻掃庭除糞飼馬決渠舂米之事를 可時時爲之니 則筋骨堅而志慮定矣리라.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독서하는 여가에 울타리를 엮고, 담 쌓고, 뜰을 쓸고, 거름을 치고, 말을 먹이고, 도랑을 치고, 쌀을 찧는 등 일을 때때로 한다면 몸이 굳세어지고 뜻도 정하여질 것이다'고 했다.
(解說)
이 글에서는 독서하는 방법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주자는 탐구의 정밀을 주장하여, 의심나는 것이 있으면 반드시 책자에 기록해 두고 수시로 연구하여 밝히도록 하고, 그래도 깨우치지 못하는 것은 아는 사람을 찾아 물을 것을 강조했다.
알지 못하고 그대로 넘어가는 것은 학문한다고 볼 수 없다. '반쯤 아는 것은 도리어 알지 못하는 것만 같지 못하다(半知反不如不知)'는 말이 있다. 다른 사람에게 묻기를 부끄럽게 여기는 것은 어리석은 태도이니, 과감하게 고쳐야 한다.
이용촌은 눈으로 보고 입으로 읽는 것보다도 손으로 써서 정신을 집중시켜 글을 정확하게 기억하고 뜻을 깊이 연구하는 방법을 강조했다.
그리고 의심나는 것을 기록해 두고 자기 힘을 터득하는 것이 지혜를 증진시키고 학문에 더욱 애착을 가지게 되는 현명한 길임을 말했다.
고반룡은 재주니, 관찰력이니 하는 것을 생각하지 말고 오직 학업에 정진할 것을 강조했다. 지식이 늘면 재질도 향상되고, 견해도 밝아진다는 것이다. 노력은 제2의 천재라는 말이 있다.
조중봉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시간을 아껴서 글을 읽고 뜻을 연구하여 학문에 종사했다. 마침내 우리나라의 손꼽는 학자가 되어 그 학설은 후세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중국 동진의 차윤은 반딧불에 글자를 비쳐 책을 읽고, 같은 나라의 손강은 눈(雪)빛에 글자를 비쳐 책을 읽은 고사가 있기 때문에 학업을 이루는 것을 '형설의 공(螢雪之功)'이라는 말로 표현하는데, 조중봉은 자기 부모의 방에 불을 때는 동안에도 아궁이의 불빛에 글자를 비쳐 글을 읽었으니, 그 향학의 열의를 알 수 있다. 피나는 노력이 아니고는 학문의 성취를 기대하기 어렵다.
어떤 사람은 또 독서하는 여가를 이용하여 힘 드는 노동일을 할 것을 강조했다. 인간의 모든 일은 신체의 건강을 필수 조건으로 한다. 건강이 없으면 무슨 일도 이룰 수 없기 때문이다.
학문을 닦는 것은 정신을 쓰는 일인만큼 더욱 더하다. 노동은 온 몸 운동이 되어 체력을 증진하고 굳센 의지를 함양하여서 향학의 활력소가 된다.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는 반드시 무언가 이상이 있어야 하고, 그 이상을 이루려면 먼저 심신을 단련하여서 건강한 신체와 굳센 의지를 길러야 한다. 안일을 꾀하는 것은 금물이다.
중국 동진의 장수 도간(陶侃)이 변방을 지키는 임무를 맡고 있을 때에, 날마다 아침이면 기와 백 장을 그 관부 안으로 부터 밖으로 옮기고 저녁이면 다시 안으로 옮겼다.
사람들이 이상히 여겨 그 까닭을 물으니 대답하기를, '국토방위의 막중한 임무를 맡은 사람이 안일을 도모하여 게을러진다면 적의 침략을 받았을 때 어찌하랴' 하여 유명한 이야기가 되었다.
위의 말들은 모두 우리가 글을 읽고 뜻을 연구하여 학문을 성취하는 데 있어 중요한 방법들이다. 우리는 옛사람의 교훈과 행적을 거울로 삼아 그 실천에 힘써야겠다.
선조들의 독서법
조선시대 옛 선비들의 저술이나 문집에서 독서에 대한 사유와 체험 등을 담은 글들만 가려 뽑아 우리말로 편집해 놓은 책인 '조선 지식인의 독서 노트'에 소개된 내용을 간추려 소개하고 한다.
율곡 이이는 '이 세상에 태어나서 독서를 하지 않는다면, 결코 올바른 사람이 될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최한기는 '독서는 사람이 살아가는 동안 평생 해야 할 일이다'면서 '스스로 깨달아 얻으려고 하지 않는다면, 비록 보잘 것 없고 사소한 일일지라도 근거로 삼을 만한 것이 없다'고 말한다.
허균은 위진남북조 시대의 중국인 학자 안지추의 말을 빌어서 '독서는 비록 크게 성취한 것이 없다고 해도, 도리어 한 가지 기술이나 재주는 될 수 있으므로 스스로 살아갈 수 있는 바탕이 되어 준다.'
정약용은 '독서는 집안을 일으켜 세우는 근본이다'는 주자의 말을 두 아들에게 써 보내고 있다. 즉, 독서는 결국은 수신(修身)과 제가(齊家)의 수단이 되기에 참으로 중요하다는 것이 조선시대 선비들의 생각인 것이다.
독서는 단순히 지식을 넓히거나 시간이 남아 책을 읽는 것이 아니기에, 조선시대 옛 선비들이 말하고 있는 독서 방법론 역시 진지하고 체계적이다.
확고한 뜻을 세운다
독서를 하는 이치는 활을 쏘는 이치와 같다. 활을 쏘는 사람은 마음을 과녁에 집중해야 한다. 마음을 과녁에 집중시킨다면 비록 정확하게 맞추지 못한다 하더라도 화살이 그다지 멀리 날아가지는 않는다.
이와 마찬가지로 독서를 할 때 뜻을 세우는 일보다 우선하는 것은 없고, 자신이 지향하는 것을 밝히는 일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
정약용도 “확고한 뜻이란 학문을 하고자 하는 마음이다. 또 효도하고 공경하는 마음이다. 효도하고 공경하는 마음을 근본으로 학문에 뜻을 둔다면, 학문은 자연히 두루 통하고 널리 미치게 되어서 독서를 할 때도 따로 차례를 정하여 굳이 그 차례대로 공부할 필요가 없게 되는 것이라고 했다. 곧 공부하겠다는 마음, 독서를 잘 하겠다는 마음을 먼저 굳게 다지고 책을 보는데, 공부하는 근본은 효도하고 공경하는데 있다는 것이다. 이런 두 가지 마음을 굳게 갖고 책을 읽는다면 스스로 읽고 싶은 것을 골라 읽어도 된다'고 했다.
즉, 독서는 자신의 지향점(指向點)을 세우는 일로써 그 출발을 삼아야 한다. 독서 는 자기가 겨냥하는 목표를 명확히 하는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
정성스러운 마음으로 책을 대한다
뜻을 세우고 난 뒤에는 닥치는 대로 마구 읽지 말고, 자신의 뜻에 맞는 책들을 잘 선택하여 정성을 다해 여러 번 거듭 읽는다. 이는 실제로 책을 손에 들고 읽어 나가는 단계이다.
책을 대하는 옛 선비들의 마음과 정성이 너무 지나쳐서 오늘날 우리가 보기에는 다소 우스꽝스럽게 여겨지는 것들도 있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간서치(看書痴)', 즉 '책만 보는 바보’라고 불릴 정도로 유명한 독서광 이덕무가 남긴 다음 글이다.
이덕무의 '사소절' 교습(敎習)에 보인다. '책을 읽을 때 손가락에 침을 묻혀 책장을 넘기지 말라. 손톱으로 줄을 긋지도 말고, 책장을 접어 자신이 읽던 곳을 표시하지 말라. 책머리를 돌돌 말아서도 안 되고, 책 표면을 문지르거나 땀이 찬 손으로 책을 들고 읽지도 말라. 책을 베지도 말고 팔꿈치로 괴지도 말라. 술 항아리를 책으로 덮어서도 안 되고, 먼지를 털어 청소하는 곳에서는 책을 펴보지도 말라. 책을 보다가 졸아서 어깨 밑이나 다리 사이에 떨어져 접히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책을 던지지 말고, 심지를 돋우거나 머리를 긁은 손가락으로는 책장을 넘길 생각도 하지 말라. 책장을 힘차게 넘기지 말고, 창문이나 벽에 책을 휘둘러 먼지를 떨지 말라.'
연암 박지원 역시 책에 침이 튀는 것을 염려하여 '책 앞에서는 하품을 하거나 기지개를 켜거나 침을 뱉지 말라. 만약 재채기가 나오면 고개를 돌려 책을 피한 다음 재채기를 하라'고 충고하고 있으니, 책을 사랑하다 못해 보물처럼 모시고 있는 듯한 옛 선비들의 모습에 웃음이 절로 나온다.
하지만 오늘날과는 달리 책이 몹시 귀하고 훼손되기 쉬운 값비싼 물품이었던 당시의 사정을 생각해보면 이는 쉽게 이해가 된다. 이러한 태도에서 느껴지는 옛 선비들의 진지함은 쏟아지는 책들의 홍수 속에서 아무렇게나, 그리고 험하게 책을 다루는 우리의 모습을 오히려 되돌아보게 만든다.
같은 책을 반복해서 읽는다
정성스런 마음과 더불어 자주 나오고 있는 또 다른 조언은 같은 책을 최소한 수백 번은 읽으라는 것이다. 그래야 책이 품고 있는 참뜻을 마음 속 깊이 새길 수 있다는 것인데, 실제로 옛 선비들은 수백 수천 번은 기본이고, 수만 번이나 반복해서 같은 책을 읽는 일도 드물지 않았다.
참으로 부지런한 독서가였던 김득신은 '사기'에 나오는 '백이전'을 무려 1억 1만3천 번이나 읽었다고 하니 정말 놀랍지 않은가? 세종대왕도 '백독백습'이라는 말을 남길 정도로 한권의 책을 100번씩 읽었다고 한다.
이러한 반복 독서 역시 당시 읽을 책이 그리 많지 않았던 사정에서 비롯된 것이겠으나, 한번 읽은 책은 더 이상 들여다보지 않는 오늘날 우리의 독서습관을 되돌아 보게 만든다.
무릇 좋은 책이란 곁에 두고 여러 번 반복해서 읽어야 하는 법인데, 우리는 너무 쉽게 책을 놓아버리고 만다. 그래서 몇 달 아니 며칠이 지나지 않았는데도, 읽은 책의 내용을 벌써 까맣게 잊어버리고 만다.
이렇게 같은 책을 거듭 읽고 또 읽어서 그 참뜻을 마음 속 깊이 새겼다고 해도 자신의 생각이 거기에 보태어지지 않는다면 그 독서는 온전한 것이 될 수 없다.
수 없이 읽은 책이라 입으로 줄줄 외운다고 해도, 그것은 보고들은 것을 그대로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는 천박한 수준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비록 많은 책을 읽었다고 한들 그게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책을 읽으면서 생각하고 기록한다
학문을 하는 사람은 독서할 때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생각을 하면 얻고, 생각하지 않으면 얻지 못하기 때문이다. 또한 생각이 있다면 기록하지 않을 수 없다.
기록을 하면 남고, 기록하지 않으면 사라진다. 그러므로 생각하고 기록하고 다시 생각하고 해석하면, '앎과 깨달음'이 더욱 자라나서 말과 행동이 두루 통하게 된다.
만약 그렇지 못하면 '앎과 깨달음'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과 행동은 꽉 막히게 되어, 얻었다 해도 반드시 다시 잃게 마련이다.
따라서 제대로 책을 읽기 위해서는 스스로 생각하면서 읽어야 하고, 떠오른 생각들을 나중까지 자신의 것으로 간직하기 위하여 기록을 해두는 것이 좋다.
가장 좋은 방법은 그런 생각들을 모아 잘 정리하여 서평을 쓰는 것이겠지만, 짤막하게나마 독후감을 적어 두는 것도 괜찮다. 그것도 어렵다면, 책을 읽는 동안 가슴에 다가왔던 몇 구절만이라도 공책에 옮겨 적는 것도 아쉬운 대로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다.
이덕무가 말하고 있는 것처럼 '대체로 글이란 눈으로 보고 입으로 읽는 것보다 손으로 직접 한 번 써보는 것이 백배 낫다'고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적어놓은 서평과 독후감 그리고 옮겨 적은 구절들은 나중에 언젠가 급하게 그 책을 참고해야 될 경우에 매우 유용할 것이기에 더욱 그렇다.
우리가 제대로 독서를 한다면 다독(多讀)이 결국은 다작(多作)과 다상량(多商量, 多思)으로 이어져서 하나로 만나게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독서할 때는 그 뜻을 분명하게 찾아야 한다
다산 정약용은 조선후기 사회 실학을 대표하는 학자로 평생 500권 이상의 책을 저술했으며, 대부분이 조선후기 사회를 올바르게 개혁하기를 바라는 내용을 담은 책이다.
그는 정조 때 중용되어 그 재능을 마음껏 펼칠 수 있었지만, 나이 40인 순조 1년에 천주교를 믿는다는 죄목으로 귀양을 갔다.
20여 년을 가족과 떨어져 살면서 두 아들에게 아버지로서 가르치고 싶은 것을 편지로 써서 보냈는데, 그 가운데서 독서에 관한 내용도 많았다. 이를 통해 다산 정약용의 독서철학과 독서방법을 알 수 있다.
다산 정약용(丁若鏞)의 처방을 들어보기로 한다. 다산 정약용이 아들 정학유에게 보낸 편지 중의 내용을 보면, '내가 최근 몇 년이래 독서에 대해 자못 깨달은 점이 있다. 한갓 읽기만 해서는 비록 날마다 백 번 천 번을 읽는다 해도 읽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다.
무릇 독서란 매번 한 글자를 읽을 때마다 뜻이 분명치 않은 부분이 있게 되면 널리 살펴보고 자세히 궁구하여 그 근원되는 뿌리를 얻어야 한다. 그래야만 차례대로 글을 이룰 수 있게 된다.
날마다 언제나 이렇게 한다면 한 종류의 책을 읽더라도 곁으로 백 종류의 책을 아울러 살피게 될 뿐 아니라 그 책의 내용도 환하게 꿰뚫을 수 있게 될 터이니, 이점을 알아두지 않으면 안 된다.
책을 그냥 눈으로 읽기만 하는 것은 하루에 책 1,000권, 글 100편을 읽을지라도 오히려 읽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일 게다.
책을 읽을 때는 항상 한 글자라도 그 올바른 뜻을 분명하게 알지 못하는 곳이 있거든 두루 찾아보고 깊이 연구해서 그 근본 뜻을 밝혀 알아냄으로써 마침내 그 글의 전체 의미를 환하게 알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날마다 이런 자세로 힘쓴다면 한 종류의 책을 읽을 때에 아울러서 수백 종의 책을 두루 찾아서 참고하게 될 것이다'고 했다.
빌린 책은 정성껏 보고 반납한다
이덕무의 편지를 보면 책을 빌리고 빌려주는 일이 허다하게 나오는데, 책을 빌리고 빌려주는 데에도 예의가 있다고 한다. 그는 '사소절'에서 책을 빌리는 예의에 대해 말한다.
몇 가지를 본다면 '남에게 책을 빌려주어 그 사람의 뜻과 사업을 키워주는 것은, 남에게 돈과 재물을 주어 그 곤궁과 굶주림을 구제해주는 것과 같다'고 했다. 하지만 남에게 책을 빌려주기를 강요해서는 안 된다다고 한다.
그리고 '남의 책이나 시문(詩文), 그림은 보고 난 뒤 빌려주기를 청할 것이며, 주인이 허락하지 않을 경우 억지로 빼앗아 소매 속에 넣고 일어나서도 안 된다.
남의 책을 빌리면 정하게 읽거나 베끼고 기한 내에 돌려주어라. 기한을 넘기거나 주인이 독촉하는데도 돌려주지 않으면 안 된다. 또 빌린 책을 돌려주지 않고 다시 다른 사람에게 빌려 주어서는 안 된다.
지켜야 할 예의는 이것뿐이 아니다. 남이 아직 완성하지 못한 책이나 장정이 안 된 서화를 빌려서는 안 된다. 완성품이 아니기 때문에 원작이 손상될 수 있는 탓이다. 빌려준 사람에게 보답도 해야 한다.
남의 책을 빌렸을 경우, 책 주인이 만약 호고(好古)하는 사람이라면, 그 책의 오류처를 바로잡아 종이쪽지에 따로 써서 그 곁에 붙여두어야 한다. 함부로 책 본문에 마구잡이로 어지러운 글씨로 적어서는 안 된다.
남의 책을 빌렸을 경우, 다 읽은 뒤 다시 먼지를 털어 차례대로 정돈하고 보자기에 싸서 돌려보내야 한다. 법서(法書)를 빌려서 베낄 경우는 다른 책보다 더러워지기 쉬우니, 더욱 마음을 써서 보호해야 할 것이다'고 했다.
건강을 해치지 않도록 쉬어가면서 독서하라
다음은 장영실이 세종대왕에게 충고한 독서 중에 잠시 쉬라는 것이다. '대군마마, 독서를 장시간 하지 마십시오. 한두 식경 하신 다음 잠시 쉬시면서 청솔가지나 대나무 숲을 보시면서 눈의 피로를 풀어주십시오. 녹색은 눈을 밝게 하는 효과가 있습니다. 한번 나빠진 눈은 좀처럼 회복될 수 없습니다. 더 나빠지지 않게 꼭 독서법을 고쳐 보십시오.'
세종대왕은 어려서부터 얼마나 열심히 책을 읽었는지 안질이 걸린 경우도 있다고 한다. 장영실이 위와 같은 말을 세종대왕께 간헌 함은 정신건강을 위한 독서지만 육적건강을 챙기라는 말이다.
책에서 얻은 깨달음을 실천하라
책을 읽는 과정 중에 우리가 새로운 깨달음을 얻게 되면 그걸로 독서는 끝이 아니라고 조선시대 옛 선비들은 말한다.
이익은 '독서란 깨달음과 실천을 겸해서 한 말이다'고 말하고 있다.
안정복 역시 '깨달음과 실천의 두 가지는 학문과 독서하는 사람이 가장 먼저 공부해야 할 내용이다'고 말하고 있다.
먼 길을 가려고 하는 사람에 비유하자면, 독서는 여행할 길의 지도와 안내를 담은 노정기이고, 실천은 말을 먹이고 수레바퀴에 기름칠을 하고, 또 노정기를 살펴 여행을 실행하는 것이다.
그런데 말은 달리지도 못하게 잡아 매놓고 수레는 손질만 해놓았을 뿐 몰지 않은 채 오로지 여행할 길의 지도와 안내를 담고 있는 노정기만 읽거나 토론하고 있다.
먼 길을 가려고 하는 계획을 아무리 잘 세워도 끝내 성공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독서를 길의 지도와 안내를 담고 있는 노정기를 살펴보는 일에 비유하고 있는 것은 '인생은 나그네 길'이라는 잘 알려진 노랫말만큼이나 진부하게 여겨질 수도 있겠다.
그러나 책을 읽고 새로 배우게 된 깨달음이 실천으로까지 이어지지 않는다면, 그만큼 무익한 독서도 없다. 그러한 독서는 무익하다 못해 해롭기까지도 할 터인데, 왜냐하면 아는 것을 행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악덕 중의 악덕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우리 선조들의 독서법을 참조하여 열독함으로, 우리 자라나는 후손들은 미래의 훌륭한 지도자로 성장하기를 바란다.
'뜻이 있는 곳이 길이 있다'는 말처럼 목표를 세우고, 목표를 이루기 위하여 정보화시대에 다방면의 지식을 섭렵하여 타인보다 한발두발 앞서나가 결승점에서는 월등히 앞선 자들이 되길 바란다.
▶️ 熟(익을 숙)은 ❶형성문자로 孰(숙)이 본자(本字)이다. 뜻을 나타내는 연화발(灬=火; 불꽃)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孰(숙)이 합(合)하여 이루어졌다. 향(亠+口+曰)은 신에게 바치는 일, 羊(양)는 양, 극(尹을 반대 방향으로 쓴 자)은 일을 함의 이 세 글자의 합자(合字)인 孰(숙)은 잘 삶다, 익숙하여짐, 나중에 글씨 쓰기 쉽게 享(향)과 丸(환)을 합(合)한 모양으로 쓰게 되었다. 孰(숙)은 누구, 어느의 한 뜻으로도 쓰게 되었으므로 본디의 잘 삶는다는 뜻은 연화발(灬=火)部를 덧붙여 熟(숙)이라 쓴다. ❷회의문자로 熟자는 '익다'나 '익히다', '여물다'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熟자는 孰(누구 숙)자와 火(불 화)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그런데 孰자의 갑골문을 보면 사당 앞에서 제를 지내는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그래서 고대에는 孰자가 익힌 제물을 바친다 하여 ‘익다’라는 뜻으로 쓰였었다. 소전에서는 여기에 羊(양 양)자가 더해지면서 익힌 제물을 바쳐 올린다는 뜻을 명확히 전달하였다. 그러나 후에 孰자가 '누구'라는 뜻으로 가차(假借)되면서 여기에 火자를 더한 熟자가 '익다'는 뜻을 대신하고 있다. 그래서 熟(숙)은 ①익다 ②여물다 ③무르익다 ④익히다 ⑤무르게 되다 ⑥숙련하다 ⑦익숙하다 ⑧정통하다 ⑨면밀(綿密)하게 ⑩상세히 ⑪깊이 ⑫곰곰이 ⑬익히 ⑭정련(精鍊)한 ⑮정제(精製)한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잘 알고 있는 손님을 숙객(熟客), 삶아서 익힌 달걀을 숙란(熟卵), 잘 아는 땅을 숙지(熟地), 잘 살펴봄을 숙찰(熟察), 깊이 잠이 듦을 숙침(熟寢), 충분하게 이루어짐을 숙성(熟成), 충분히 휴식함을 숙식(熟息), 불에 익힌 음식을 숙식(熟食), 찌꺼기를 없앤 맑은 꿀을 숙청(熟淸), 연습을 많이 하여 익힘을 숙련(熟練), 곤하게 깊이 자는 잠을 숙면(熟眠), 익숙하게 앎을 숙지(熟知), 곰곰이 잘 생각함을 숙고(熟考), 초목의 열매가 충분히 여묾 또는 생물이 충분히 발육이 됨을 성숙(成熟), 열매가 채 익지 못함이나 음식 따위가 덜 익음 또는 일에 서툼을 미숙(未熟), 능하고 익숙함을 능숙(能熟), 나이에 비하여 신체적이나 정신적인 발육이나 발달이 올됨을 조숙(早熟), 늘 사귀어 사이가 가까움을 친숙(親熟), 과실이나 곡식이 반쯤 익거나 여묾 또는 음식 따위가 반쯤 익음을 반숙(半熟), 오랜 경험을 쌓아 익숙함을 노숙(老熟), 충분히 생각한 끝에 과감하게 실행함을 일컫는 말을 숙려단행(熟慮斷行), 무슨 일이 익숙한 사람에게는 남이 당하여 내기가 어려움을 이르는 말을 숙습난당(熟習難當), 몸에 익숙하게 밴 버릇은 남이 고쳐 내기가 어렵다는 말을 숙습난방(熟習難防), 한 번 익힌 음식은 날것으로 되돌아 갈 수 없어 그대로 두면 쓸데없다는 뜻으로 남에게 음식을 권할 때 쓰는 말을 숙불환생(熟不還生), 문장의 뜻을 잘 생각하면서 차분히 읽고 음미함을 이르는 말을 숙독완미(熟讀玩味), 경쾌한 수레를 타고 익숙한 길을 간다는 뜻으로 일에 숙달되어 조금도 막힘이 없는 모양을 이르는 말을 경거숙로(輕車熟路), 깊이 생각하고 깊이 고찰함 또는 신중을 기하여 곰곰이 생각함을 일컫는 말을 심사숙고(深思熟考), 머리를 삶으면 귀까지 삶아진다는 뜻으로 중요한 것만 해결하면 나머지는 따라서 해결됨을 일컫는 말을 팽두이숙(烹頭耳熟), 오이가 익으면 꼭지가 자연히 떨어진다는 뜻으로 때가 오면 무슨 일이든지 자연히 이루어짐을 두고 이르는 말을 과숙체락(瓜熟蒂落) 등에 쓰인다.
▶️ 讀(읽을 독, 구절 두)은 ❷형성문자로 読(독)의 본자(本字), 读(독)은 간자(簡字)이다. 뜻을 나타내는 말씀 언(言; 말하다)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글자 賣(매, 독)이 합(合)하여 이루어졌다. ❷회의문자로 讀자는 '읽다'나 '이해하다'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讀자는 言(말씀 언)자와 賣(팔 매)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賣자는 물건을 파는 모습을 표현한 것으로 '팔다'는 뜻을 갖고 있다. 물건을 팔고 나면 얼마를 벌었는지 셈을 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팔다'는 뜻의 賣자에 言자가 결합한 讀자는 물건을 팔아(賣) 돈을 센다(言)는 것을 뜻했었다. 讀자에는 아직도 '계산하다'나 '세다'는 뜻이 남아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래서 讀자는 돈을 세며 중얼거린다는 뜻으로 쓰였었지만, 후에 이러한 뜻이 확대되어 '읽다'는 뜻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讀(독, 두)은 ①읽다 ②이해하다 ③세다 ④계산하다 ⑤구절(句節) ⑥읽기 그리고 ⓐ구절(두) ⓑ구두(읽기 편하게 구절에 점을 찍는 일)(두) ⓒ이두(두) ⓓ풍류의 이름(두)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책을 그 내용과 뜻을 헤아리거나 이해하면서 읽는 것을 독서(讀書), 책이나 신문이나 잡지 따위의 출판물을 읽는 사람을 독자(讀者), 글을 읽는 소리를 독음(讀音), 글을 읽어서 이해함을 독해(讀解), 지도나 도면을 보고 그 내용을 해독함을 독도(讀圖), 글을 막힘 없이 죽 내려 읽음을 독파(讀破), 글을 읽어서 익힘을 독습(讀習), 그림을 관상하며 음미함을 독화(讀畫), 책을 읽고 난 뒤를 독후(讀後), 단어 구절을 점이나 부호 등으로 표하는 방법을 구두(句讀), 자세히 살피어 읽음을 정독(精讀), 소리를 높이어 밝게 읽음을 낭독(朗讀), 처음부터 끝까지 내리 읽음을 통독(通讀), 책이나 신문이나 잡지 등을 사서 읽는 것을 구독(購讀), 풀이하여 읽음을 해독(解讀), 차례나 방법 및 체계가 없이 아무렇게나 읽음을 남독(濫讀), 식사나 축사 등을 대신 읽음을 대독(代讀), 글을 빨리 읽는 것을 속독(速讀), 많이 읽음을 다독(多讀), 열심히 읽음을 열독(熱讀), 글에 맛을 들여 자세히 읽음을 세독(細讀), 글을 소리내어 읽음을 송독(誦讀), 소리를 내지 않고 글을 읽음을 묵독(默讀), 익숙하게 읽음으로 글의 뜻을 잘 생각하면서 읽음을 숙독(熟讀), 독서를 하기에 적당한 세 여가 즉 겨울이나 밤이나 비올 때를 이르는 말을 독서삼여(讀書三餘), 책을 읽느라 양을 잃어 버렸다는 뜻으로 마음이 밖에 있어 도리를 잃어버리는 것 또는 다른 일에 정신을 뺏겨 중요한 일이 소홀하게 되는 것을 비유한 말을 독서망양(讀書亡羊), 책을 읽음으로써 옛 현인과 벗한다는 말을 독서상우(讀書尙友), 아무 생각 없이 오직 책읽기에만 골몰하고 있는 상태 또는 한 곳에 정신을 집중하는 것을 이르는 말을 독서삼매(讀書三昧), 글 읽기를 백 번 한다는 뜻으로 되풀이 하여 몇 번이고 숙독하면 뜻이 통하지 않던 것도 저절로 알게 된다는 말을 독서백편(讀書百遍), 낮에는 농사 짓고 밤에는 공부한다는 뜻으로 바쁜 틈을 타서 어렵게 공부함을 이르는 말을 주경야독(晝耕夜讀), 쇠귀에 경 읽기란 뜻으로 우둔한 사람은 아무리 가르치고 일러주어도 알아듣지 못함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을 우이독경(牛耳讀經), 갠 날에는 밖에 나가 농사일을 하고 비오는 날에는 책을 읽는다는 뜻으로 부지런히 일하면서 틈나는 대로 공부함을 이르는 말을 청경우독(晴耕雨讀) 등에 쓰인다.
▶️ 精(정할 정/찧을 정)은 ❶형성문자로 精(정)은 동자(同字)이다. 뜻을 나타내는 쌀 미(米; 쌀)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靑(청, 정)이 합(合)하여 이루어졌다. 음(音)을 나타내는 靑(청)은 푸른 색깔, 깨끗하다, 깨끗하게 하는 일을 뜻하고, 米(미)는 곡식으로, 精(정)은 곡식을 찧어서 깨끗이 하다, 정미(精米), 애벌 찧는 것을 粗(조)라는 데 대하여 곱게 찧는 것을 精(정)이라 하였다. ❷회의문자로 精자는 '깨끗하다'나 '정성스럽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精자는 米(쌀 미)자와 靑(푸를 청)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靑자는 초목과 우물을 함께 그린 것으로 '푸르다'라는 뜻이 있다. 이렇게 푸르고 깨끗함을 뜻하는 靑자에 米자가 결합한 精자는 '깨끗한 쌀'이란 뜻으로 만들어졌다. 수확한 벼는 탈곡 후에 다시 도정(搗精)과정을 거쳐야 한다. 도정과정을 잘 거쳐야만 깨끗한 쌀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먼 옛날에는 오로지 사람의 노동력으로 도정과정을 거쳐야 했기에 精자는 '깨끗하다'라는 뜻 외에도 '정성스럽다'라는 뜻도 함께 갖게 되었다. 그래서 精(정)은 (1)정수(精髓) (2)정수(精水) (3)정기(精氣) 등의 뜻으로 ①정(精)하다(정성을 들여서 거칠지 아니하고 매우 곱다) ②깨끗하다 ③정성(精誠)스럽다 ④찧다(쌀을 곱게 쓿다) ⑤뛰어나다, 우수(優秀)하다 ⑥가장 좋다, 훌륭하다 ⑦총명(聰明)하다, 똑똑하다, 영리(怜悧)하다 ⑧세밀(細密)하다, 정밀(精密)하다, 정교(精巧)하다 ⑨정통하다, 능통하다, 능(能)하다 ⑩순수한, 정제(精製)한, 정련한 ⑪몹시, 매우, 대단히 ⑫정기(精氣), 정신(精神), 정력, 원기(元氣) ⑬요정(妖精), 정령(精靈), 요괴(妖怪) ⑭도깨비 ⑮정액(精液)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정할 전(奠), 정할 정(定), 반대 뜻을 가진 한자거칠 조(粗)이다. 용례로는 마음이나 생각 또는 영혼을 정신(精神), 온갖 성의를 다하려는 참되고 거짓이 없는 성실한 마음을 정성(精誠), 가늘고 촘촘함이나 아주 잘고 자세함을 정밀(精密), 정밀하고 교묘함을 정교(精巧), 자세히 살피어 읽음을 정독(精讀), 정성을 들여 잘 만듦을 정제(精製), 정밀한 계산을 정산(精算), 어떤 사물에 대하여 밝고 자세하게 앎을 정통(精通), 상세하고 확실함을 정확(精確), 뼈 속에 있는 골 또는 사물의 가장 중심이 되는 알짜를 정수(精髓), 썩 날래고 용맹스러움 또는 정련된 군사를 정예(精銳), 암수의 생식 세포가 서로 하나로 합치는 현상을 수정(受精), 곡식 등을 찧거나 쓿는 일을 도정(搗精), 조촐하거나 깨끗하지 못하고 거칠거나 지저분함을 부정(不精), 자세히 연구함을 연정(硏精), 마음을 가다듬고 성의껏 힘씀을 여정(勵精), 순수한 금과 좋은 옥이라는 뜻으로 인격이나 문장이 아름답고 깨끗함을 비유해 이르는 말을 정금양옥(精金良玉), 쇠붙이가 충분히 단련되었다는 뜻으로 충분히 숙련되고 많은 경험을 쌓음을 비유해 이르는 말을 정금백련(精金百鍊), 사리에 밝고 판단에 민첩하며 역량과 재능이 뛰어나다는 말을 정민강간(精敏强幹), 삼가 게을리 하지 않고 일에 힘쓴다는 말을 정려각근(精勵恪勤), 여러 방면으로 널리 아나 정통하지 못하다는 말을 박이부정(博而不精), 몹시 애를 쓰고 정성을 들인다는 말을 각고정려(刻苦精勵), 아버지의 정기와 어머니의 피라는 뜻으로 자식은 부모로부터 그 정신과 육체를 물려받았음을 이르는 말을 부정모혈(父精母血), 배우는 일에 정성을 다해 몰두한다는 말을 학업정진(學業精進), 작은 것이 정밀하고 세차다는 뜻으로 보이는 모습과 달리 다부지고 강한 면모가 있다는 말을 단소정한(短小精悍) 등에 쓰인다.
▶️ 思(생각 사, 수염이 많을 새)는 ❶회의문자로 田(전; 뇌)와 心(심; 마음)의 합자(合字)이다. 思(사)는 '생각하다'의 뜻이다. 옛날 사람은 머리나 가슴으로 사물을 생각한다고 여겼다. ❷회의문자로 思자는 '생각'이나 '심정', '정서'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思자는 田(밭 전)자와 心(마음 심)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그런데 소전에서는 囟(정수리 신)자가 들어간 恖(생각할 사)자가 '생각'이라는 뜻으로 쓰였었다. 囟자는 사람의 '정수리'를 그린 것이다. 옛사람들은 사람의 정수리에는 기가 통하는 숨구멍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囟자는 그러한 모습으로 그려졌었다. 그러니 恖자는 머리(囟)와 마음(心)으로 생각한다는 의미에서 깊게 생각한다는 뜻으로 만들어진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해서에서부터는 囟자가 田자로 바뀌면서 본래의 의미를 유추하기 어렵게 되었다. 그래서 思(사, 새)는 성(姓)의 하나로 ①생각, 심정(心情), 정서(情緖) ②의사(意思), 의지(意志), 사상(思想) ③뜻 ④마음 ⑤시호(諡號) ⑥성(姓)의 하나 ⑦어조사(語助辭) ⑧생각하다, 사색하다 ⑨그리워하다 ⑩슬퍼하다, 시름 겨워하다 그리고 ⓐ수염이 많다(새) ⓑ수염이 많은 모양(새)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생각할 륜(侖)이다. 용례로는 돌이키어 생각함을 사고(思顧), 생각하고 궁리함을 사고(思考), 사유를 통하여 생겨나는 생각을 사상(思想), 정을 들이고 애틋하게 생각하며 그리워함을 사모(思慕), 마음으로 생각함을 사유(思惟), 여러 가지 일에 관한 깊은 생각과 근심을 사려(思慮), 생각하여 헤아림을 사료(思料), 생각하여 그리워함을 사련(思戀), 늘 생각하여 잊지 아니하고 마음속에 간직함을 사복(思服), 생각하고 바람을 사망(思望), 사물의 이치를 파고들어 깊이 생각함을 사색(思索), 서로 엉킨 많은 생각이나 생각의 실마리를 사서(思緖), 정의의 길을 그려 생각함을 사의(思義), 한 시대의 사상의 일반적인 경향을 사조(思潮), 마음 먹은 생각을 의사(意思), 생각하는 바를 소사(所思), 눈을 감고 말없이 마음속으로 생각함을 묵사(默思), 고통스러운 생각을 고사(苦思), 깊이 생각함 또는 그런 생각을 심사(深思), 묘한 생각을 묘사(妙思), 객지에서 갖는 생각을 객사(客思), 지나간 뒤에 그 사람을 사모함을 거사(去思), 곰곰이 잘 생각함을 숙사(熟思), 생각이나 느낌이 많음을 다사(多思), 저녁 때의 슬픈 생각을 모사(暮思), 생각이 바르므로 사악함이 없음을 일컫는 말을 사무사(思無邪), 어떠한 문제를 생각하여 해석이나 구명하는 방식을 일컫는 말을 사고방식(思考方式), 사모해 잊지 않음을 일컫는 말을 사모불망(思慕不忘), 여러 가지 일에 대한 생각과 사물을 제 분수대로 각각 나누어서 가름을 일컫는 말을 사려분별(思慮分別), 처지를 서로 바꾸어 생각함이란 뜻으로 상대방의 처지에서 생각해 봄을 이르는 말을 역지사지(易地思之), 평안할 때에도 위험과 곤란이 닥칠 것을 생각하며 잊지말고 미리 대비해야 함을 이르는 말을 거안사위(居安思危), 편안한 때일수록 위험이 닥칠 때를 생각하여 미리 대비해야 함을 이르는 말을 안거위사(安居危思), 눈앞에 이익을 보거든 먼저 그것을 취함이 의리에 합당한 지를 생각하라는 말을 견리사의(見利思義), 사람의 생각으로는 미루어 헤아릴 수도 없다는 뜻으로 사람의 힘이 미치지 못하고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오묘한 것을 이르는 말을 불가사의(不可思議), 마음을 수고롭게 하고 생각을 너무 깊게 함 또는 애쓰면서 속을 태움을 일컫는 말을 노심초사(勞心焦思), 깊이 생각하고 깊이 고찰함 또는 신중을 기하여 곰곰이 생각함을 이르는 말을 심사숙고(深思熟考), 능히 보고도 생각하기 어렵다는 뜻으로 보통의 이치로는 추측할 수 없는 일을 이르는 말을 능견난사(能見難思), 타향의 생활이 즐거워 고향 생각을 하지 못함을 이르는 말 또는 눈앞의 즐거움에 겨워 근본을 잊게 될 때를 비유하여 이르는 말을 낙이사촉(樂而思蜀), 몹시 뒤섞이고 착잡하여 어수선하게 생각함 또는 그 생각을 일컫는 말을 호사난상(胡思亂想), 즐거움에 젖어 촉 땅을 생각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쾌락 또는 향락에 빠져 자신의 본분을 망각하는 어리석음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을 낙불사촉(樂不思蜀), 보통 사람으로서는 헤아리지 못할 생각이나 평범하지 않는 생각을 일컫는 말을 비이소사(匪夷所思), 낮에 생각하고 밤에 헤아린다는 뜻으로 밤낮을 가리지 않고 깊이 생각함을 이르는 말을 주사야탁(晝思夜度), 물을 마실 때 수원을 생각한다는 뜻으로 근본을 잊지 않음을 일컫는 말을 음수사원(飮水思源), 일을 하면 좋은 생각을 지니고 안일한 생활을 하면 방탕해 진다는 것을 이르는 말을 노사일음(勞思逸淫) 등에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