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을 말할 때 꼭 필요하다 싶은데 표준어에서 이탈이 되었다든지 지금은 사용하지를 않아 들이밀기가 애매한 말들이 더러 있다. 국민학교라고 해야 실감이 나는데 초등학교로 바뀌어 영 느낌이 안 산다 싶고 얼마 전에 되찾은 짜장면이란 말도 한 동안 자장면으로 표기를 하는 바람에 영 꺼림칙하였다. 촌뜨기들이 서울말을 쓰다 같은 고향사람들을 만나면 어느새 사투리가 툭하고 튀어 나오듯이 그 시절은 그때 그대로 느껴야 제 맛이다. 그 시절을 회상한다는 게 무릇 그런 물성들의 그림자를 되짚는 것이 아닐까.
나는 그 시절 아이들하고 안양유원지를 곧잘 찾았다. 야! 저기 깔치 데리고 간다. 그러면 우리는 일제히 그들을 쳐다보았다. 새끼 손가락으로 표시를 하며 깔치라는 말을 음흉한 말투로 내뱉곤 하였는데 요즘은 그 말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썬글라스를 낀 연인이 폼을 잡고 걷는 모습을 왜 그렇게 침을 질질 흘리며 쳐다본 것인지. 지지대 고개 넘어 수원에 이목리는 딸기를 먹으로 가고 안양은 포도를 먹고 놀러들 많이 찾았다.
안양은 가만 보면 복받은 동네이다. 관악산과 삼성산의 물줄기가 안양으로 향하고 있으며 수리산의 물은 안양을 가로질러 안양천으로 향한다. 정조 대왕 시절 화성을 오가는 길이 당초 과천에서 안양으로 바뀌었다는 것은 단순히 경로변경이 아니라 가파르지 아니한 지정학적으로 평탄한 지형을 선택하였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지금도 삼성산이나 관악산 국기봉을 시발로 걸으면 바로 사당동에 이르고 삼성산을 바로 넘으면 서울대학교가 나온다.
삼성산의 계곡물이 끊임없이 안양을 향하듯 물 폭포처럼 한꺼번에 쏟아진 밀려든 인구로 안양은 1973.7.1 안양시로 승격이 되었다. 인구가 5만 이상이면 시로 승격할 수 있는 대상이 되는데 안양은 급작스런 인구밀집현상으로 도시가 팽창되어 당시의 시민이 18만에 이르렀다. 그러나 시가 되었는데도 도시기반시설은 인구의 집중에 비해 미치지 못하여 미비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나마 1974년에야 서울에서 수원까지의 1 번국도가 4차선으로 확포장되면서 경수산업도로의 역할을 제대로 하였으며 더불어 중앙로의 거리도 포장이 되었다.서울의 위성도시로 발전한 안양시는 위락시설로서도 서울시의 부담을 떠안았는데 토요일 오후와 일요일에 서울시에서 넘쳐내는 수많은 행락인파로 당시 안양유원지는 서울의 뚝섬 유원지와 더불어 꽤 유명한 명소로 자리매김을 하였다.
백만평 정도의 안양유원지에는 수영장과 보트등 각종놀이시설과 위락시설이 갖추어져 있을 뿐만 아니라 관광호텔시설까지 갖추어져있어서 주위에 산재한 포도밭과 함께 잘 어우러져 당시 서울시민이라면 누구라도 한번쯤은 이곳에 들를 정도로 쉼터로서의 역할을 다하였다. 우리는 한 여름철 할 일이 없을 때 서울 멋쟁이들을 보러 그곳에 가곤 했다.
안양 유원지엔 관악산 물줄기가 쏟아져 내려오는 계곡을 차곡차곡 막아서 만년풀이니 대형풀이니 풀을 만들어 서울손님을 맞이했다. 제일 비싼 곳은 당연 호텔에 있는 풀장이고 물줄기를 맞는 순서대로 입장료도 달랐다. 정작 안양촌놈들은 제대로 생긴 푸른 물통에 발 한번 못 넣어 보고 돈 한 푼 안내는 맨 아래에 위치한 그때 말로 자유풀이라 불리는 똥물에서 삼각팬티 차림으로 놀곤 했다.
그 자유풀 앞에는 빨간 색으로 덧칠을 한 캬바레가 하나 있었는데 기억하기로 이름이 참 묘했다. 아폴로 캬바레, 그 무렵 인간이 달에 착륙을 하자 너도나도 그 이름을 갖다가 붙여 달았다. 당시 아폴로박사를 탄생시키기도 하였고 당시 유행성결막염에도 아폴로눈병이라고 명명을 하였을 정도로 그 유명세를 자랑했으니 아마 그 캬바레는 최신식임을 말하였던 듯싶다. 어쩌면 별천지라는 의미를 담은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5학년 때 장태환이라는 친구 녀석 네가 대형 풀에서 매점을 한다기에 쫓아가 그곳에서 빵을 팔고 핫도그를 나르기도 했다. 나는 그게 무척 재미있었다. 심심하게 지내다 화사한 멋쟁이들을 보니 사는 맛이 이런 거구나 하며 엄마 몰래 곳에서 점원 노릇을 한동안 했다. 비록 핫도그 맛 한번 챙겨 먹지 못했지만 동경의 대상인 서울을 보는 듯 그들을 대하는 것으로 흡족했으며 변두리 처지로서는 그들 수발을 들고 돈을 버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것이란 생각을 했었다. 언제나 서울 한 번 구경을 해보나하는 생각을 굴뚝같이 했을 때였다.
나는 그 무렵까지도 서울을 가 본적이 없었다. 한 번은 미군들이 야한 여성들을 데리고 와서는 비싼 소고기를 구워 먹는데 고기를 구우면 개들이 달라붙듯 그만 신경 줄이 흐트러져 그들 구경에 넋이 빠졌었다. 여직 맡아 본 적이 없는 뇌를 자극하는 그윽한 냄새에 멋진 영화 한 편을 본다 여겼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 영향은 훗날 지대하게 작용하였다.
부러움에 미련 남은 것이나 동경의 대상은 언제고 기억에 남는다. 지금도 나는 ‘가까운 듯 먼’ 이라든지 ‘아직도 못 다한’ 같이 말에서 풍기는 미련 남는 사물에 유독 더 정이 쏠린다. 끝 가장자리에 놓인 것들의 애틋함에 대해 생각하기를 즐겨 하였으며 지금도 가슴 졸여가며 그것들에서 시선이 멈춰진다. 삶의 언지리라 할지 느낌의 변두리라 하는 삼류의 것이나 싸구려 눈물에 유독 감동 받는다.
깔끔한 정취가 묻어나는 자리나 고결한 대상들 앞에선 주눅 들고 밋밋할 뿐 감흥이 적은 것이 그 시절의 삼류적 발상 탓이 아니겠느냐 싶은 것이다. 이를테면 자유 풀 같은 언저리에서 놀던 내 동심이 나이 들어 변두리란 단어와 용케도 매칭이 되어 그런 연상이 쉽게 이루어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70년 대 후반 윤흥길의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라는 소설을 보고 깊은 동질감을 가진 것도 알고 보면 성남의 단대리라는 동네나 내가 살던 주제비 동네나 변두리적 발상이 그대로 담겨 있다 싶어서가 아닐까 싶다.
그런 애틋한 연민으로 나는 내 아들을 끼고 부모를 모시고 안양유원지에 간 적이 있다. 한 번도 들어 가 본 적이 없는 안양관광호텔, 나는 내 어릴 적 보던 서울 멋쟁이들처럼 썬 글라스를 끼고 아들에게 핫도그를 손에 쥐어주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그렇게 부러워하던 서울 티 나는 여유로운 느낌은 살아나지 않았다. 아내는 눈병 옮기기 꼭 알맞다며 아들을 물속에도 못 들어가게 하며 뭐 이런 곳을 오냐며 핀잔을 주는 통에 나는 졸지에 그 시절 같은 처량한 처지가 되고 말았다. 그쯤 안양유원지는 안양사람들도 찾지 않는 폐허가 득실거렸다.
그러고 보면 동경은 꿈 같은 낭만을 수도 없이 쌓아서는 시간과 더불어 폐허되어 아픔으로 사라지는 유령같은 존재다. 한 때는 그 시절의 꿈이고 추억 속에 다가가련 한 낭만이었는데 때 지나 궁상맞은 폐허로 일시에 탈바꿈하여 아쉬움을 더욱 짙게 만들고 마니 말이다. 그리움이 온전히 되살아 난 경우는 이 세상에는 없다. 그러면서도 그 시절을 그리워 하는 것은 왜일까. 어쨌거나 그 시절의 추레함을 들추는 것은 풋풋한 과거가 그리워서도 그러하지만 못생긴 과거를 들쑤셔 지금의 나를 다시금 일깨워 생동감 넘치는 현실을 맞고 싶어서이기도 하다. 아니 폐허 속에 다시 핀 그리운 낭만이라고 해두자.
낭만은 사전에 나온 대로 적는다면 “실현성이 적고 매우 정서적이며 이상적인 상태”로 정의된다. 나의 자의해석은 간략해서 이렇다. “참담한 현실과 부적절한 정서를 한번쯤 처절하게 느끼고 겪은 자만이 알 수 있는 마음속 서정적 현실이 아닐까. 또는 현실적 희망 ” 행복은 참담함을 겪지 않아도 어떤 경우 거저 얻어 낼 수 있는 행운도 있지만 낭만은 상대적 아픔이 있어서 그 아픔 한가운데 속에서도 또는 아픔을 밀치고 새로운 무형의 형상으로 승화, 포용, 대비되어 마음속 서정적 현실이 된다싶다.
북극에서 낭만은 있을 수 있어도 행복은 없다. 즐거움만으론 낭만이 이루어지질 않는다. 나에게 있어서는 분명히 그렇다. 젊은 시절 추레함과 변두리 의식이 스며들지 못하였다면 지금의 난 얼마나 황폐화되어 있을까. 젊은 시절 사고의 혼돈을 겪지 않았다면 지금의 삭막한 물질 속 뭐라 변명하고 살고 있을까. 지금도 시원치 않지만 보다 훨씬 덜 된 인간에 넉넉지 못한 맘으로 살고 있지 않을까. 그 시절의 암담함으로 지금 난 나만의 낭만을 느끼고 산다. 동경의 대상은 늘 사람을 꿈꾸게 한다.
시골 사람이 상경을 하는 것은 단지 돈 때문만은 아니다. 요즘은 서울 사람이 한적한 시골을 동경하지만.
첫댓글 잘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