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준 기념관을 찾아
동지가 지난 십이월 넷째 금요일이다. 올겨울 들어 세 번째 찾아온 한파의 기세가 매서운 날이었다. 이른 아침부터 나서던 자연학교는 날씨가 너무 추워 집에서 미적대며 등교를 늦추었다. 햇살이 퍼진 아침나절도 영하권이었는데 평소 둘러매던 배낭은 걸치지 않고 현관을 나섰다. 두꺼운 잠바를 입고 털모자에 장갑을 끼고 목도리까지 둘렀으니 추위 대비는 단단히 한 셈이었다.
창원중앙역으로 가길 위해 아파트단지를 벗어나 퇴촌삼거리에서 창원대학 앞을 지나 도청 뒷길을 걸었다. 역세권 상가를 지난 창원중앙역에 이르러 부전을 출발해 순천으로 가는 무궁화호를 탔다. 가려는 행선지는 스무날 전 들린 함안 군북역이다. 그날은 백이산 솔숲길을 걷고 독립지사 이태준 선생 생가터 수몰지 명관저수지 둘레길을 둘러 이우환 화백 재종 동생을 만났더랬다.
이번 걸음은 예전 경전선 군북역에 들어선 이태준 선생 기념관을 살펴보기 위함이다. 이태준은 구한말 세브란스 의전을 나와 몽골로 건너가 그곳의 마지막 황제 어의를 지냈으며 몽골인들에게 의술로 헌신한 동방의 슈바이처로 통하는 인물이다. 우리에게는 국권 상실기 이역만리에서 독립운동 군자금 마련에 공을 세워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은 인천 이씨 집안의 자랑스러운 후예다.
내 고향 의령은 흔히 토박이 성씨를 기준으로 ‘강전리(姜田李)’라 이르고, 이웃 함안은 ‘조리안(趙李安)’이라 불렀다. 의령은 진양 강 씨와 담양 전 씨가 대성이고 이어 본관이 다른 이 씨들이 많이 살았다. 함안은 누구나 인정하는 함안 조 씨가 대성이고 그다음 본관이 재령인 이 씨를 비롯해 성산이나 여주도 있고 인천은 적은 편이다. 안 씨 본은 큰집과 작은 사이인 광주와 순흥이다.
명관리에는 인천 이 씨들이 집성촌을 이루고 사는데 앞서 언급한 이태준 지사가 그 마을 출신이다. 나라 밖에서 더 유명한 이우환 화백도 명관리에서 태어나 부모를 따라 면 소재지로 잠시 나와 살다가 서울 미대를 다니다 일본으로 건너가 지금은 고령임에도 프랑스에 머물며 현역 화가로 붓을 들고 있다. 인천 이씨는 수로왕의 김해 김 씨, 허황옥의 김해 허 씨와 같은 씨족이다.
경전선이 복선화되면서 마산역에서 상당 구간 지하의 터널을 통과해 함안역을 지난 군북역에 내렸다. 역사를 빠져나가니 매서운 한파를 실감했다. 이태준 기념관으로 향하면서 동촌 신창마을의 조홍제 생가를 먼저 들렸다. 그는 의령 정곡의 이병철과 진주 지수의 구인회와 함께 우리나라 경제개발 초창기 1세대 기업 창업주들이다. 삼성과 금성과 효성은 경제 중흥 시기 견인차였다.
덩그런 한옥의 조홍제 생가는 관리인이 잠시 부재중이라 대문이 닫혀 바깥에서만 까치발로 담 너머로 쳐다봤다. 그 집 곁에도 연륜이 오래된 한옥 한 채가 남향의 여항산 지맥을 바라보는 자리를 차지했다. 이후 들길을 걸어 초등학교를 지나 예전 경전선 군북역이 있던 터로 가니 철길에는 세월을 멈춰 세워 놓은 듯한 모형 증기 기관차가 세워진 함안의 독립공원이 조성되어 있었다.
함안 군북은 기미년 만세 운동 때 일제 총칼에 맞선 항거로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했던 독립운동의 성지였다. 그와 함께 지난해 이태준 지사의 기념관이 세워져 외지에서 찾아가는 이는 조국을 위해 산화한 선열의 숭고한 정신을 받들 만했다. 기념관에 전시된 이 지사의 행적을 하나하나 살피면서 100여 년 전 이역만리 타국 황야에서 펼쳤던 의술과 독립운동의 큰 뜻 앞에 숙연해졌다.
이태준 기념관을 나와 예전 군북역 사거리 사학재단 군북중학교 곁의 골목으로 들었다. 거기는 아까 이태준 지사와 같은 마을 출신으로 우리나라의 불세출 현역 화가인 이우환 화백이 자랐던 집터가 있었다. 그는 명관리에서 태어나 그 집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부산을 거쳐 서울대 재학 중 일본으로 건너가 나라 밖에서 더 유명해진 화가가 되어 후학들이 기림비를 세워두었더랬다. 22.12.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