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 합천 연호사를 찾아가다
108개의 절집 답사를 목표로 세워두고 절을 찾아다닌지도 어언 2년이 되어간다. 나이 든 부부가 대중교통을 이용하여 다니다 보니 찾아기기 쉬운 곳부터 우선하여 다녔다. 내가 사는 대구에서 찾아가기 쉬운 곳은 거의 다녔고, 이제는 교통이 불편하거나. 내가 가 본 일이 없는 곳의 절을 찾아야 했다. 해인사처럼 유명한 절을 지난 주에야 겨우 찾은 이유도 어디선가 들었는데 ‘차편이 불편하다’라는 잘못된 정보가 이유였다.
해인사를 가느라 대구의 서부 정류장에 들려서, 합천가는 차편의 정보도 얻었다. 합천은 작은 고을이라서 대구-합천 만을 다니는 버스는 없었다. 다른 먼 곳으로 가는 버스의 경유지였다. 차편도 많지 않았다. 버스 시간표를 보니, 12시 전후로 두 편이 있었다. 출발시간이 늦은 시간이지만, 합천읍이 가까운 곳이니 다녀오기에는 시간이 넉넉해 보였다. 합천을 다녀올 요량으로, 인터넷에서 합천서 가까운 절을 찾아 보았다. 주소로는 합천군 합천읍 합천리에 연호사라는 절이 있었다. 주소로 계산해보니 걸어서 다녀오기에는 오히려 가까운 거리로 느껴졌다.
인터넷 검색 창에 올라온 연호사 사진은 황강을 낀 절벽에 붙어 있어서 경치가 무척 아름다운 곳으로 보였다.
서부 정류장에서 합천을 경유하여 진주로 가는 버스를 탔다. 버스 차창 너머로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우리의 가을풍경은 풍경화 전시장에 들린 기분이다. 유화그림도 있고, 연한 채색의 수채화도 있고, 한국화로 그린 조선의 풍경도 있다. 중간에 쉬지 않고 달리는 버스는 우리 부부를 합천 시외 버스 정류소까지 금방 태워다 주었다.
정류소 밖의 큰 길에서 지나가는 노인네 분에게 연호사와 함백루를 물었더니 고개도 돌리지 않고, ‘몰라요’하고 지나친다. 뒤 따라 오는 다른 노인에게 물어도 대답은 ‘몰라요.’ 이다. 내가 기분이 나빠져서 ‘영감탱이가 불친절하기는’ 며 불만을 말했더니 집사람이 ‘저 사람들도 우리처럼 방문객인지도 모르잖아’ 한다.
나는 저만치 걸어가서 젊은이에게 물었더니, 가는 길을 멈춰서서 손으로 길을 가르키며 친절히 아르켜 준다. 그러면서 ‘좀 먼데요.’ 한다. 고맙다는 말을 하고, 저쪽에서 길을 물으려 지나가는 사람을 기다리는 아내를 불렀다. 그리고 젊은이가 아르켜 준 길을 따라 걸었다.
합천은 내가 처음 오는 읍내 마을이다. 지난날에 종종 낯선 읍내 마을에 가서 다방에 들려 흘러간 유행가 노래를 들으면 차를 마시는 상상을 한 일이 있다. 합천은 꼭히 그런 고을처럼 보인다. 그러나 지금은 인생의 황혼기라서 그런 낭만은 꿈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그런 다방도 있지 않을 것이다. 눈에 보이는 간판은 카페이고, 커피집이다. 걷다가 피곤하면 카페에 들려 차 한 잔을 시켜놓고 아내와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즐거움이고, 낙이다.
처음 걷는 길이니 주변을 둘러보는 것만으로도 즐겁다. 군청이 지나가고, 군청에 부속된 여러 기관의 건물이 지나가고, 합천 중고등학교 앞으로도 지났다. 교정이 대구에서는 상상할 수 없은 만큼 넓다. 바다만큼 넓다는 말이 나올듯도 하다.
굽이를 돌아 합천군 문화예술회관의 앞에 이르니 바로 황강의 둑이다. 강물이 가득하여 호수만큼이나 너르다. 잔잔하게 일렁거리는 수면의 모습이 호수 그대로이다. 저 앞쪽에 물든 단풍에 둘러싸인 낮으막한 산 둔덕이 보인다. 대야성 자리라고 했다. 황강에 닿아있는 쪽은 절벽이다. 그 산에는 신라시대의 ‘대야성’터가 지금도 흔적으로 남아있다. 산의 절벽 아래로에는 연호사가 있고, 바로 옆에 함백루라는 정자가 있다.
이곳은, 신라시대에는 나라의 변방지역이었다. 서쪽의 백제가 수시로 침범하였으므로 여기에 성을 쌓아 적을 막았다. 대야성이다. 대야성 아래로 연호사라는 고찰이 있다. 예전에는 대체로 불교는 호국신앙이었으므로 나라를 지키는 성이 있는 곳에 절이 있는 것은 흔한 일이다. 역사적 의미를 간직한 사찰이라 하더라도, 지금은 합쳔 팔경 중의 하나로 꼽는 명승지로 더 유명하다. 황우산을 등지고 법당은 절벽에 닿을 듯 서 있지만, 처마에서 떨어지는 낙수는 바로 강으로 떨어진다지 않는가. 달빛이 비추일 때의 절경은 할 말을 잊게 한다지 않는가. 달빛 속의 고요로움에 젖어 강물을 바라보면 세상의 온갖 번뇌망상이 강물을 따라 흘러가 버린다고 하였다.
그러나 대야성이 안고 있는 슬픈 역사 이야기는 참선만으로 씻겨지지 않으리라.
642년에 백제가 처들어와서 대야성을 지키던 신라 김품석 장군의 가족이 죽음을 맞았다. 성주 김품석 장군은 춘추 무열왕의 사위였다. 무열왕은 딸 소랑을 사랑하여 합천의 고티 땅을 속주로 주어서, 지아비를 따라 대야성에 있게 하였다. 백제의 윤충 장군이 군사를 몰아와서 성을 함락시키고, 김품석 장군만이 아니고, 소랑도 함께 목숨을 앗아갔다. 이 소식을 들은 무열왕이 사위와 딸의 복수를 하려 백제를 더더욱 쳐부수려 하였다고 전해온다.
이왕이면 역사 이야기를 조금 더 해보자.
신라는 백제와 동맹을 맺고 고구려를 쳐부수어서 북쪽 땅을 많이 차지하였다. 그러나 나제동맹을 파기하고 한강 주변의 땅을 독차지해버렸다. 이에 분노한 백제의 성왕은 한강 주변의 땅을 회복하려 옥천 땅으로 나와서 관산성에서 신라와 싸웠다. 그러나 대패하고 목숨까지 읺었다. 백제로서는 원한이 사무칠 일이었다. 대야성의 품석 장군 가족을, 더군다나 신라 군주의 딸이라니 살려주고 싶은 마음이 더 없었을 것이다.
이후 진덕여왕 때인 648년에 김유신 장군이 대야성을 수복하였다.
연호사의 주불전은 극락전이다. 아미타 부처님이 주재하시는 극락세게를 나타낸다. 극락세계란 죽은 자들이 가는 곳이니, 아마도 연호사는 옛날에 전장터에서 죽은 영혼이 극랑왕생하기를 빌어주는 절이 아니었을까. 이것저것을 생각해보면 연호사는 호국사찰이었고, 나라를 지키다 먼저 떠나가신 호국영령이 극락왕생하기를 비는 곳이었으리라 여겨진다.
신라 이후에는 오래 동안 남아있는 기록이 없다. 조선 영조 21년에 인조대사가 중수하였다고 전해온다. 지금은 전통사찰 94호로 지정되었고,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448호이다.
바로 이웃하여 유교의 상징물인 함백루가 있다. 함백루는 옛 산비들이 풍류를 즐기던 곳이다. 송시열이 바위에 새겨둔 함벽루라는 글씨가 큼지막하다. 루 안에는 이퇴계 선생이 지은 시도 걸려 있다. 강위에 함백루가 있고, 강물따라 세월도 흘러간다는 내용이었다. 합천이라면 남명 조식 선생의 유적이 여기저기에 있다. 남명 선생이 여기에 들렸음은 말할 것도 없다.
최근에는 합천군에서 강변을 끼고, 또 물위로 산책로를 잘 만들어두었다. 햇볕은 물결에 부딪혀 반짝이고, 강바람인지, 산바람인지 불어오는 바람은 부드럽고 정겹다. 대나무 숲 속으로도, 황강의 물 위로도, 그리고 길 위에 깔린 낙엽도 밟으면서, 걷는 길이 조금도 지루하지 않았다.
걸어서 다시 시외버스 주차장으로 갔다. 아뿔사 대구로 가는 오후 버스표는 이미 동이 나버리고, 없다고 했다. 이곳은 출발지가 아니고, 진주서 대구로 가는 차의 경유지라서 앞선 곳에서 표가 매진되면 합천서는 표를 팔 수 없다고 하였다. 자주는 아니지만 간간이 인터넷에서 안내하는 데로 차가 운행하지 않는 경우가 있었다. 이럴 때는 여간 낭패가 아니었다. 아내와 고령까지 택시로 갈까며서 걱정을 하고 있으니, 아가씨가 친절하게 안내를 해준다.
“고령 쌍림면까지 실어다주는 버스가 4시 40분에 출발합니다. 군청에서 운영함으로 무료입니다. 쌍림에 나가면 해인사에서 대구로 가는 버스를 바로 탈 수 있습니다.”
시계를 보니 3시 20분 경이다.
아내와 나는 옆에 있는 카페에 들려 커피를 시켜놓고 기다리기로 했다. 낯선 읍내의 찻집에서 집사람과 마주 앉아 우리가 살아온 지난 이야기며, 우리가 살고 있는 모습 등을 이야기로 나누었다. 나는 이런 분위기가 정말 좋다. 한 시간 남짓은 금방 지나갔다.
서틀 버스를 타고 쌍림에 갔다. 인적이 거의 없는 고그만 시골 마을이었다. 해인사에서 나오는 버스도 사람들이 가득했다. 오늘도 절집을 다녀오니 흐뭇한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