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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미라지의 콤프방 원문보기 글쓴이: mirageknight [왕성국]
안녕하세요~~ 미라지나이트 입니다.
2011년도 가고 2012년 용의해인 임진년의 새해가 밝았습니다.
새해가 되면 보통 여러 계획을 세우기 마련인데요.. 가장 자주 하는 약속인 금연을 하자는등.. 다이어트를 해보자는등… 미라지는 새해를 맞이해 좀더 전문화되고 재미난 까페를 만들어 보기로 했습니다. 모형에 관한 가장 재미나고 유익한 곳... 그곳이 미라지의 콤프방이길.. 올해도 많은 관심과 사랑을 부탁드려봅니다.
2012년 첫 기획으로 이넘을 준비해봤습니다.
얼마전에 이 기체 데칼공구를 마쳤고 2차대전 최고의 전투기로 불리고 있고 또 우리 공군과도 친밀한 기체인 P-51 머스탱 (MUSTANG) 전투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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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51 머스탱 (MUSTANG) 전투기
*이글은 공군웹진(http://afbase.com/rok )에 기재된 X-WING 님의 글을 인용한 글 입니다.
1930년대에 독일의 히틀러는 나치당을 결성, 최고 권력자로 자리잡더니 1939년부터 게르만 족의 생존을 위해서라는 명목 하에 주변 국가를 침공하며 영토를 넓혀갔다. 히틀러가 이렇게 점차 정복전쟁을 일으키는 와중에도 당시 유럽의 군사 강국이었던 영국과 프랑스는 외교적으로만 이를 막아보려고 노력했으나 결국 실패했고, 특히 프랑스는 독일의 공격을 받아 1940년 6월에 어이없게 독일에 무릎꿇고 말았다.
[1940년, 독일의 독재자 히틀러가 파리를 점령한 후 에펠탑 앞에서 찍은 기념사진]
독일은 본래 1차 대전 때 패망, 베르사이유 조약에 의해 제대로 된 군대를 가질 수 없었으나, 다른 나라의 눈을 피해 몰래 전차와 전투기를 개발해왔기 때문에 이처럼 순식간에 유럽 땅의 다른 나라들을 공격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전함이나 항공모함 같이 커다란 전투함들은 몰래 만들 수 없었다. 1930년 중반 무렵 독일은 공식적으로 재무장을 선언한 뒤 전투함들을 생산하기 시작했으나, 이런 큰 배들을 갑자기 여러 척을 만들 수도 없었기 때문에 결국 독일은 항상 해군력이 부족했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독일은 국경을 맞대고 있던 프랑스는 지상군이 진격하여 어찌어찌 굴복시킬 수 있었으나, 바다건너에 있는 영국을 공격하기는 쉽지 않았다. 당장 지상군을 상륙시키려고 들었다가는 영국 해군의 전투함들이 몰려와 상륙정을 전부 침몰시켜버릴 것이고 설사 어떻게 지상군을 영국 땅 위에 올려놓는다고 하더라도 영국 해군에 의해 추가적인 병력과 보급물자의 공급이 차단되면 이 독일 지상군은 독안에 든 쥐 신세 밖에 못되기 때문이다.
게임이나 소설에서와 달리 실제 전쟁에서는 적 진영에 아군 병력을 상륙시키는 것 만으로 모든 상황이 끝나는 것이 아니다. 상륙군에게 계속 병력과 물자를 공급해주지 못한다면 상륙군은 점차 힘을 잃고 도리어 바다 쪽으로 쫓겨날 수밖에 없다(간혹 인터넷 등에 퍼져있는 가상전쟁 시나리오에서 이런 점을 생각지 않다 보니 ‘일단 적 영토에 지상군만 상륙 시키면 전쟁이 끝날 것’이라는 말도 안 되는 전쟁 시나리오가 등장한다. 당장 임진왜란 당시 충무공이 남해의 제해권을 틀어쥐자 한반도에 있던 왜군 지상병력이 어찌 되었던가..).
독일의 공군 원수인 헤르만 괴링은 빈약한 독일 해군이 영국 해군을 상대할 필요 없이 자신의 부하들, 즉 전투기와 폭격기만으로 영국 공군과 영국 해군을 쓸어버리고 독일 육군이 영국 땅까지 쉽게 상륙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호언장담을 하였다.
[헤르만 괴링의 사진. 괴링은 1차대전 때 에이스 전투기 조종사로 활약하였으며 이후 히틀러가 만든 나치당에 가입, 히틀러의 충실한 측근이 되어 정치적으로는 히틀러 다음 가는 2인자 자리에 앉았다. 괴링은 워낙 공에 대한 욕심이 많아서 무리하게 공군만 앞세운 전투를 자주 주장하였으며, 영국을 공격하던 당시에도 자신에게 해군과 지상군에 대한 지휘권까지 준다면 아예 영국을 점령해 보이겠단 말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섬나라인 영국은 앞으로 전쟁이 벌어진다면 하늘에서부터 적의 공격이 시작될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전투기의 생산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었다. 다만 영국의 주력 전투기인 허리케인과 스핏파이어는 독일 공군을 상대하기에는 성능이 충분하였지만 숫자가 부족했다. 강대국인 영국으로서도 많은 전투기를 짧은 시간 내에 생산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국은 프랑스가 함락되기 몇 달 전인 1940년 초, 자신들의 우방인 미국에서 자신들에게 부족한 무기를 사들여오기 위해 무기구매사절단을 파견하였다.
헨리 셀프 경의 지휘 아래 뉴욕에 도착한 영국의 무기구매사절단은 미국의 전투기들을 둘러 보았으나 생각보다 쓸 만한 전투기가 없었다(2차 대전 중, 후반 무렵에는 고성능 전투기를 쏟아내던 미국이지만 194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이들의 전투기는 세계적인 기준으로 놓고 보았을 때 ‘그럭저럭 쓸 만하다.’라는 평을 받는 정도였다). 그나마 쓸 만한 것은 당시 미 육군항공대의 주력전투기였던 P-40 워호크 정도였다. 이 전투기는 그래도 허리케인 전투기 정도의 성능은 갖췄고 또 영국이 현재 찬밥 더운밥을 가릴 처지가 아니었으므로 P-40을 구매하기로 하였다. 하지만 당시 미국은 아직 전쟁에 대비하고 있던 상황이 아니었다. 이때 까지만 해도 미국은 유럽에 전쟁이 벌어지더라도 자신들은 전혀 개입하지 않겠다는 생각이었기 때문이다(다만 미국은 우방국인 영국에게 무기 판매에 대해서는 적극적이었다. 이에 대해 독일이 ‘중립을 지키지 않으면 전쟁에 참여한 것으로 여기겠다.’라고 항의해도 미국은 ‘이건 어디까지나 비즈니스일 뿐, 전쟁에 개입하겠다는 것은 아니다.’라고 맞받아쳤다).
[P-40 전투기. 2차 대전 초반 미 육군 항공대의 주력 전투기였으나, 공중전보다는 지상공격에 초점을 두고 개발된 전투기이다 보니 영국이 원하는 만큼의 비행성능은 나오지 않았다. 그래도 2선급 전투기로 쓰기에는 충분했으므로 영국은 적지 않은 수량의 P-40을 구매하였다.]
프랑스가 함락되기 2달 전인 1940년 4월, 지구 반대편의 미국에서는 노스 아메리칸 항공의 사장 킨델버거(James H. Kindelberger)는 영국 무기구매사절단의 부름을 받고 이들을 찾아갔다. 본래 킨델버거는 영국 무기구매 사절단에 노스 아메리칸에서 새로 개발한 경폭격기, B-25 미첼을 제안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엉뚱하게도 영국 무기구매사절단은 킨델버거에게 폭격기가 아니라 노스 아메리칸에서 한 번도 만든적이 없던 전투기를 만들어 달라고 했다.
영국 신사들의 제안은 간단했다. P-40을 제작하고 있던 커티스 항공은 영국이 원하는 만큼의 전투기를 만들 일손이 모자라니, 노스 아메리칸에서 이 전투기를 라이센스 생산하여 영국에 납품하라는 것이었다. 킨델버거는 ‘정말 영국이 그 방안만을 원한다면’ 그렇게 해주겠지만, 영국인들에게 더 좋은 제안이 있다고 말했다.
‘120일 안에 P-40과 같은 엔진을 사용하면서도, 훨씬 성능 좋은 전투기를 개발하여 영국에 납품하겠습니다.’
요즈음처럼 전투기 한 대를 개발하는데 빨라야 5년, 길면 10년 이상 걸리는 시절과 달리, 당시에는 쓸 만한 전투기 한 대를 개발하는데 보통 1년 정도의 시간이면 가능했다. 하지만 이 킨델버거는 1년도 아닌 120일, 즉 4달 안에 전투기를 만들어 보이겠다고 했다. 영국인들도 처음에는 이 제안이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지만 썩 나쁜 조건만은 아니었다. 어차피 P-40을 노스 아메리칸에서 라이센스 생산한다고 해도 공장 설비를 준비하고 인력을 모으는데 3, 4달은 족히 걸리는데, 같은 시간을 들여 더 좋은 전투기를 만들어 준다면 확실히 영국으로선 이득이었다. 또 P-40과 같은 엔진을 사용하는 전투기라면, 이미 구매하기로 한 P-40을 살 때 여유분의 스페어 엔진 및 관련 부품을 함께 살 수 있으므로 돈도 절약되었다.
다음 달인 1940년 5월, 영국 무기구매사절단은 영국군과 협의한 뒤 노스 아메리칸과 다음과 같이 계약을 맺었다.
‘약속대로 노스 아메리칸이 120일안에 P-40보다 더 좋은 전투기를 만든다면, 영국은 즉시 300대의 전투기를 구매함. 다만 약속일을 지키지 못하거나 새로운 전투기가 영국군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이 계약은 무효임.’
노스 아메리칸의 사장 킨델버그는 왜 안전한 길(즉 P-40의 라이센스 생산)을 놔두고 이처럼 120일 안에 전투기를 개발한다는 모험을 한 것일까?
1928년에 키스(Clement Melville Kyes)가 문을 연 노스 아메리칸은 본래 직접 항공기를 제작하는 회사가 아니라 다양한 항공사나 항공기 관련 회사의 주식을 사고팔던 지주회사였다. 그러나 1934년에 노스 아메리칸은 항공기 제작사로 거듭나면서 더글라스 항공사에서 킨델버거를 영입해와 사장으로 추대한다. 이후 노스 아메리칸은 제너럴 모터스에 인수되어 제너럴 모터스가 가지고 있던 항공사, 제너럴 항공(General Aviation)과 합병되지만 회사 이름은 그대로 유지하였다. 아직 이렇다 할 항공기를 제작한 경험이 없던 노스 아메리칸은 복잡한 고성능 항공기 보다는, 좀 더 개발이 쉽고 경쟁이 덜 한 훈련기 시장부터 공략하였다. 이후 노스 아메리칸은 1930년 중반 무렵에 T-6 텍산을 만들어 훈련기 시장에서 큰 성과를 거두었으며 이 훈련기는 하버드란 이름으로 영국에서도 운용했다. 영국 무기구매사절단이 굳이 노스 아메리칸을 불러들인 것도 이처럼 이전부터 어느 정도 자신들과 관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T-6 텍산 훈련기. 당시 꽤 훌륭한 훈련기였기 때문에 미 육군 뿐만 아니라 해군이나 영국공군 등도 운용했다. 참고로 우리나라도 한국전쟁 직전에 캐나다를 통해서 10대의 T-6 텍산을 들여와 ‘건국기’라는 이름을 붙였다. ]
그런데 노스 아메리칸은 1940년대 초반 무렵까지 그럴싸한 전투기는 만들지 못하고 있었다. 이들은 1939년에 페루를 위해 만든 NA-50 전투기를 만든 적이 있었으나 그다지 뛰어난 고성능 전투기도, (당시기준으로) 현대적인 전투기도 아니었다.
이후 노스 아메리칸은 좀 더 고성능의 전투기를 만들기 위해 다양한 연구를 진행했으나 미 정부는 그다지 관심을 보여주지 않았으므로 노스 아메리칸으로서는 다른 고객을 찾아야 했다.
이때 마침 영국 무기구매사절단이 노스 아메리칸에 전투기를 만들어 달라고 제안해 온 것이다. 즉 노스 아메리칸은 사실 정말로 120일 만에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새로운 전투기를 하나 개발해 내겠다고 호언장담을 했던 것이 아니라, 이미 전투기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던 상황에서 이런 말을 꺼냈던 것이다.
여하간에 노스 아메리칸은 NA-73X라는 프로젝트 명으로 영국을 위한 전투기의 개발에 박차를 가했다. 이 전투기는 P-40과 똑같은 수냉식 앨리슨 엔진을 탑재한 1인승 전투기로 P-40보다 더 세련된 날개를 가지고 있었다. 또한 당시 대부분의 전투기들은 냉각을 위한 라디에이터에서 공기저항을 만들어 냈는데, 노스 아메리칸은 이 부분에서 나오는 뜨거운 열기로 오히려 부수적인 추진력을 얻게 하는 시스템을 만들었다. 사실 이 라디에이터 설계는 노스롭의 독창적인 개발이 아니라 커티스에서 개발 중이던 신형 전투기, XP-46에서 따온 것이었다.
커티스 항공사는 P-40보다 약간 더 작은 신형 전투기 XP-46을 개발 중이었으나 미 육군항공대가 이 전투기보다는 P-40의 개량형을 원했기 때문에 XP-46은 시제기 2대만 만들어진 채로 양산되지 못했다. 이렇게 되자 커티스는 쓸모없어진 XP-46과 관련된 데이터를 노스 아메리칸에 5만6천 달러에 팔아버렸었는데, 노스 아메리칸은 바로 이 데이터들을 NA-73X에 접목시켰던 것이다.
[커티스의 XP-46. P-40을 작게 만든 듯한 전투기였으며 P-40의 모습과도 비슷한 부분이 많다. 이 전투기의 동체 아래에 있는 냉각용 공기흡입구는 NA-73 개발에 큰 영향을 미쳤다.]
1940년 9월 9일, 킨델버거 사장이 장담한 120일로부터 아직 8일이 덜된 시점에 NA-73X가 LA에 있던 노스 아메리칸의 공장문 밖으로 나왔다. 이때의 NA-73X는 바퀴가 원래 계획된 것이 아니라 T-6 텍산 훈련기의 것을 가져다 붙인 것이었다. 게다가 예정된 엔진이 한 달이나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아직 엔진은 탑재되지도 않아서 비행시험을 할 수 없었다(엔진은 노스 아메리칸이 직접 구매하는 것이 아니라 영국이 앨리슨으로부터 따로 구매해서 노스 아메리칸에 전달하는 형태였기 때문에 엔진을 제때 장착하지 못한 것은 노스 아메리칸의 책임은 아니었다).
영국군은 이미 아직 날지도 못하는 이 항공기에 무스탕(Mustang : 야생마)라는 이름을 붙였다(원어 발음은 머스탱에 가깝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무스탕으로 널리 알려진 만큼 이 이름으로 계속 표기하고자 한다).
12일 뒤 예정대로 P-40의 것과 같은 V1710-39 앨리슨 엔진(최대출력 1120마력, 3000RPM)을 단 NA-73X는 지상 엔진 시험 및 활주 시험을 수행하였으며, 같은 해 10월 26일에는 드디어 첫 비행에 성공하였다.
[비행중인 NA-73X. 영국군은 아직 정식 채용도 하지 않은 이 항공기에 ‘무스탕’이란 이름을 붙였다.]
노스 아메리칸은 이 NA-73X로 각종 시험비행을 하면서 발견되는 문제점이나 미흡한 점을 고쳐나갔다. 그러던 중 1940년 12월 20일, 비행시험 중이던 NA-73X의 엔진이 갑자기 공중에서 멈추는 사고가 발생했다. 시험 조종사 발포(Paul Balfour)는 급한 대로 근처 농장에 불시착하였으나 이 과정에서 항공기가 뒤집히는 바람에 이 NA-73X는 더 이상 날기 어려워졌다(다행히 시험 조종사는 무사했다). 원인 분석 결과 시험조종사 발포가 연료탱크를 제대로 선택하고 바꿔주지 않은 탓에 비행기 연료탱크 내에 아직 연료가 남아있음에도 엔진으로 연료가 흘러들어가지 못해 항공기의 엔진이 꺼진 것이었다. 노스 아메리칸은 비록 시제기 한 대를 사고로 잃었으나 나머지 시제기로 시험을 계속 진행했다.
[사고로 뒤집어진 NA-73X. 불시착 중 뒤집어졌으나 시험조종사는 기적적으로 큰 부상 없이 살아남았다.]
[1/4 크기의 실험용 무스탕 모형. 사진속의 모형은 공기역학과 관련된 실험을 위해 풍동(Wind Tunnel)에 설치된 상태다.]
그리고 영국군을 위한 진짜 양산형 무스탕, 즉 무스탕 Mk.I은 1941년 4월 16일에 첫 비행을 시작했다. 영국은 양산형 무스탕 1호기는 노스 아메리칸에 남겨서 각종 시험용으로 계속 활용하도록 하였으며, 2호기는 영국으로 싣고 가서 각종 성능을 평가하기로 했다. 무스탕 Mk.1 2호기는 영국으로 가던 배가 북대서양에서 독일의 폭격을 받는 등의 어려움은 있었으나 결국 무사히 영국에 도착, 1941년 10월 24일부터 영국 공군의 손에 넘겨졌다.
[엔지니어들이 무스탕 Mk.1 2호기를 선박에 넣기 위해 분해한 뒤 컨테이너 박스에 넣어 포장하고 있다. ]
[영국 공군의 무스탕 Mk.I. 사진속의 모델은 정확히는 조종석 바로 뒤에 옆으로 찍을 수 있는 카메라를 단 정찰형 무스탕 Mk.I으로 보인다. 도색을 제외하면 쉽게 구별은 안가지만 전방 유리창 프레임을 비롯하여 몇 군데 NA-73X와 다른 곳이 있다. 한편 시험기인 NA-73X는 비무장인 반면 무스탕 Mk.I은 기수에 12.7mm(0.50inch) 기관총 2정, 그리고 날개에 7.7mm(3.03inch) 기관총 4정을 탑재했다.]
영국 공군이 평가해본 결과 무스탕 Mk.I은 전반적으로 훌륭한 성능을 보여줬다. 무스탕 MK.I은 고도 4.2km(1만4천 ft)에서라면 최대 615km/h(382mph)까지 속도를 낼 수 있었으며, 다른 비행특성도 노스 아메리칸이 장담하던 대로 P-40보다 나았다. 다만 아쉬운 점이 있었다면 고고도에서의 성능은 떨어지는 편이었으며, 고도 9.1km(3만 ft) 이상까진 올라가지 못했다는 점이다. 당시 유럽전선에서는 이런 높은 고도에서 공중전이 종종 벌어졌기 때문에 영국군 입장에서는 무스탕 Mk.1을 본격적인 전투기로 쓰기엔 부족했으나, 그래도 이 전투기는 지상공격이나 적 공격기를 쫓아내고 부족하나마 고성능 전투기들을 돕는 보조 전투기로서는 손색이 없는 성능이었다. 특히 무스탕 Mk.I은 영국 공군이 가진 스핏파이어 전투기나 허리케인 전투기 보다 꽤 장거리 비행이 가능했기 때문에 약간 개조하여 카메라를 단 정찰기로 쓰기에도 안성맞춤이었다.
[지상에서 대기 중인 영국 공군의 무스탕 Mk.I. 1942년에 찍힌 사진으로, 영국 공군은 이 전투기를 2선급 전투기로 운용했다.]
라이트 형제가 처음으로 항공기를 만들 무렵, 당연하지만 각 나라의 군대에는 공군이란 것이 없었다. 이후 군은 항공기를 연락기나 정찰기 등으로 전쟁에 쓰기 시작하다가 급기야 1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전투기가 등장하고 발전했다. 이 당시에는 각 나라의 육군에서 연락기나 정찰기를 사용하였으므로, 전투기나 폭격기 같은 것들도 육군에서 운용하였다. 그러나 각 나라는 좀 더 효율적으로 항공기들을 이용하기 위해 전투기나 폭격기처럼 전투용 항공기만 따로 운용하는 독립된 군대, 즉 공군을 조직하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모든 나라가 다 이런 것은 아니었으며 2차 세계 대전이 벌어지던 1940년대까지도 미국이나 일본 같은 나라는 여전히 공군은 없고 육군 소속 항공대만 존재했다(물론 공군을 가진 나라건 가지지 않은 나라건, 해군은 별도의 해군 소속 항공대를 가지고 있었다. 항공모함에서 운용하는 항공기 등이 필요하니까).
미국의 경우 2차 대전이 끝나고 나서도 2년 뒤인 1947년에야 육군 항공대를 독립시켜서 공군을 따로 창설했다. 사실 2차 대전 중에도 미 육군 항공대는 미 육군과는 거의 별개의 조직처럼 움직였지만...
참고로 미 육군 항공대는 그 휘하에 '공군(Air force)'라는 조직을 두었었으나, 이것은 육군, 공군, 해군과 같은 별개의 군이 아니라 육군 항공대 밑의 큰 조직 단위였다.
2차 세계 대전에 관심이 좀 있는 독자들은 이런 소리를 들어 보셨을지도 모른다. ‘P-51은 독일의 주력 전투기 Bf109와 매우 비슷하다. 이는 Bf109의 개발에 참여한 독일 출신 설계자가 미국으로 망명하여 P-51을 개발하였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는 P-51의 개발자 중 한 명인 에드가 쉬무트가 독일출신이란 데서 비롯된 루머다. 그는 본래 독일에서 태어났으며 항공기에 관심이 많기는 하였으나 실제로는 엔진 쪽에 관련된 일을 하고 있었다. 이후 그는 브라질로 가서 제너럴 모터스 브라질 지부의 공장에서 일하였다. 그러나 항공에 관련된 일을 꼭 하고 싶었던 쉬무트는 결국 미국에 있던 제너럴 모터스 산하의 항공기 개발사, 포커 항공사로 가서 항공기 설계자의 꿈을 펼쳤다(포커는 원래 독일에서 출발하였다가 네덜란드로 옮겨간 항공사로, 미국에도 지부를 차렸으나 나중에 제너럴 모터스가 이 포커 항공사 미국 지부를 인수하였다). 이때 슘트는 미국으로 가서 미국 국적을 땄으며 노스 아메리칸에 제너럴 모터스에 인수되자 자연스레 쉬무트도 노스 아메리칸에서 일하게 되었다.
결국 슘트는 Bf109와는 전혀 인연이 없었으며, 이것의 개발사인 메셔슈미트에서 일한적도 없었다. 2차 대전 마니아들 사이에서는 워낙에 독일 공군 전투기들이 인기가 높다보니 잘못된 정보로 어떻게든 Bf109와 P-51을 연관시키려다 이런 루머가 나온 듯하다.
최근에는 2차 세계 대전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는 사람들도 늘고 있고, 또 이를 배경으로 한 국산 게임들도 등장하고 있지만 아무래도 독자분들에게는 생소한 이름의 항공기들도 있을 법하다. 이에 본문에 등장한 항공기에 대해 간단하게 설명을 덧붙이려 한다.
스핏파이어 : 영국의 수퍼마린(Supermarine)이 개발한 전투기. 본래 1930년대에 유행하던 수상기 레이싱에 쓸려고 만든 항공기를 바탕으로 만든 전투기였다. 2차 세계 대전 초반, 독일 공군이 영국 공군을 침공할 당시 독일 공군의 주력 전투기인 Bf109와 여러모로 대등한 전투를 벌였으며, 특히 동 시대의 독일 전투기들에 비해 급선회 능력이 탁월했다. 이후 2차 대전이 끝날 때까지 계속 개량형이 등장하면서 영국의 주력 전투기 자리를 지켰다. 2차 대전 때 워낙에 유명했던 전투기이다 보니 지금도 영국군의 행사 때 종종 시범비행을 보이곤 한다.
허리케인 : 영국의 호커(Hawker)가 개발한 전투기. 기체 전방 부분이나 날개는 금속으로 제작되었으나, 동체 후방 쪽은 목재로 된 뼈대에 방수천을 덧대어 만들어 전(全)금속제 항공기와 방수천을 사용하는 항공기의 과도기적인 형태로 설계되었다. 전쟁 초반에는 영국 공군의 대부분의 전투기가 허리케인이었으나, 독일의 주력 전투기와 상대하기엔 비행성능이 좀 모자랐다. 영국 공군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스핏파이어가 독일의 전투기들을 물고 늘어지는 사이에 호위 전투기가 없어진 독일 폭격기 부대를 허리케인이 덮치는 전술을 사용했다.
P-40 워호크 : 미국의 커티스(Curtiss)가 개발한 2차 세계 대전 초반 미 육군 항공대의 주력 전투기. 2차 세계 대전 이전까지만 해도 미 육군 항공대는 자신들의 전투기가 적 전투기와 공중전을 벌이는 일보다는, 해안으로 침투해 오는 적 선박과 상륙부대를 저지하는 임무에 투입될 일이 더 많을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P-40 워호크도 높은 고도에서의 적 전투기와의 공중전을 벌이는 임무 보다는 낮은 고도에서 벌이는 지상/선박 공격에 최적화 되었다. 그러다 보니 P-40은 2차 대전 초반 독일의 전투기나 일본의 전투기들과 공중전을 벌일 때 고전을 면치 못했다. 2차 대전 중반 무렵부터 공중전에 적합한 신형의 미 육군 항공대 전투기들이 속속 등장함에 따라 P-40은 공중전 보다는 원래 설계에 맞게 지상 공격에 많이 활용되었다. 후기형은 이름이 키티호크로 바뀌었으며, 영국군도 토마호크라는 이름으로 P-40을 운용하였다.
T-6 텍산 : 노스 아메리칸에서 개발한 훈련기. 전방석에는 훈련생이, 후방석에는 교관이 탈 수 있도록 2인승으로 제작된 항공기로 미 육군 항공대 뿐만 아니라 미 해군이나 영국 공군도 훈련기로 사용하였다. 한국 전쟁 당시에는 경공격기나 전방 관측기, 전선 통제기(적 지상군을 찾아내어 아군 공격기에게 그 위치를 알려주는 역할)등으로도 쓰였다. T-6는 2차 대전 중 사용된 일본 해군의 전투기 A6M(제로센)과 전체적으로 비슷한 곳이 있다 보니 2차 대전을 배경으로 한 영화에서 몇 군데 개조되어 A6M 대역으로 종종 등장하곤 한다.
B-25 미첼 : 노스 아메리칸에서 개발한 경폭격기. 대형 폭격기처럼 많은 폭탄을 탑재할 수는 없지만 대신 상대적으로 더 좋은 운동성을 이용하여 저고도 폭격이나 선박 공격용으로 많이 쓰였다. 특히 폭탄 뿐만 아니라 전방에 달린 8정 이상의 12.7mm 기관총을 이용하여 지상 및 해상 목표물에 대한 공격을 하기도 하였으며 일부 모델은 특별히 항공기용으로 개조된 75mm 야포를 탑재, 선박의 대공포 사거리 밖에서 포격을 하기도 하였다. 2차 대전이 끝날 때 까지 약 1만 대 이상 생산되었다.
대서양을 건너온 무스탕 Mk.1에 대한 영국 공군의 평가는, 고고도 비행성능이 부족한 관계로 독일군 전투기에 본격적으로 맞서 싸우기엔 부족하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무스탕 Mk.1은 저고도 비행성능이 탁월하므로 영국 공군은 이 전투기를 지상공격이나 정찰 임무에 쓰기 적합하다고 생각했고, 실제로 이런 임무에 투입하기 시작했다.
[영국에 간 무스탕 Mk.1의 모습. 사진에서와 같이 기수에는 0.50인치(12.7mm) 기관총을 2정, 날개에는 0.303인치(7.9mm) 기관총을 6정 탑재했다.]
무스탕 Mk.1이 영국에서 맡은 첫 실전 임무는 정찰이었다. 1942년 5월 10일, 무스탕 Mk.1이 영불 해협을 건너 프랑스 지역(프랑스는 이미 독일에 점령당한 뒤였다)에 있는 독일군 비행기지를 촬영하고 돌아왔다.
한 달 뒤, 무스탕 Mk.1 프랑스를 넘어 독일 본토의 루르 지방까지 정찰하고 돌아왔다. 이는 전투기 치고는 장거리 비행능력이 매우 탁월한 무스탕이었기에 가능했던 일로, 폭격기라면 모를까 당시 영국군의 다른 전투기들은 연료 탑재량의 한계로 인하여 프랑스 상공에 머무는 것이 고작이었고 독일 본토까지 갔다가 영국으로 돌아오는 것은 꿈도 못 꿀 일이었다.
[지도에서 ‘B'로 표시된 부분이 루르지방이다. 이곳은 독일의 산업단지가 몰려 있었기 때문에 종종 연합군의 폭격 목표가 되었다. 다만 루르지방은 영국에서는 600km가 넘는 거리에 있기 때문에 대형 폭격기가 아닌, 일반적인 전투기로는 왕복하기에 너무 먼 곳이었다. 그러나 무스탕은 당시의 어느 전투기보다도 장거리 비행이 가능했기 때문에 이 루르 지방에 대해 정찰을 하고 돌아오는 것이 가능했다.]
그리고 몇 달 뒤인 8월 19일에는 무스탕 Mk.1이 처음으로 공중전을 겪었다. 당시 영국군의 특수부대, 코만도는 프랑스 지방 북쪽 항구인 디에프에 상륙하여 이 지역을 기습공격하고 돌아오는 작전을 벌이고 있었는데, 무스탕 Mk.1 편대가 저고도로 날면서 이 작전을 지원하고 있었다. 곧 독일 공군의 Fw190 전투기들이 무스탕 Mk.1 편대를 덮쳤고 무스탕 Mk.1은 이들에 대항하여 싸웠다. 이 전투에서 무스탕 Mk.1은 Fw190을 격추, 최초로 격추 스코어를 올렸다. 물론 무스탕 역시 공중전 도중 Fw190에 의해 격추되어 최초의 작전 중 손실을 맛보았다.
영국 공군의 예상대로 실전에 투입된 무스탕 Mk.1은 저고도 임무에 뛰어났다. 무스탕의 장거리 비행능력은 정찰임무에 적합하였으며, 또 무스탕은 제법 많은 무장을 탑재할 수 있었기 때문에 지상공격 임무에도 유용했다. 영국 공군은 약 18개월간 무스탕을 운용한 결과 200대의 독일군의 화물수송 기관차와 200대의 독일군의 화물수송용 바지선을 파괴하였으며 정확한 숫자는 알 수 없으나 다수의 적 항공기를 지상에서 파괴하였다. 이 기간 동안 무스탕은 단 1대만 적 전투기에 의해 공중에서 격추당하였으며, 5대는 대공포에 의해 격추 당했고 두 대는 정확히 알 수 없는 이유에 의해 손실되었다. 독일군의 주력 전투기인 Bf109나 Fw190과 비교해보면 무스탕은 고고도에서 비행성능이 떨어졌으나 저고도에서는 이들 전투기들 보다 오히려 비행속도가 더 빨랐다. 특히 매우 낮은 고도라면 무스탕은 독일의 다른 전투기들 보다 더 선회력이 뛰어났다.
원래 무스탕 Mk.1은 기수에 2정의 0.50인치(12.7mm) 기관총, 날개에 6정의 0.303인치(7.9mm) 기관총을 탑재했으나 일부는 날개에 6정의 기관총 대신 4정의 20mm 히스파노 기관포를 탑재하였다. 20mm 기관포는 발사 속도는 느리지만 기관총과 달리 포탄에 폭약이 들어 있기 때문에 한 발, 한 발의의 위력이 훨씬 강하였으며 특히 지상 목표물의 공격에 적합하였다(7.9mm 기관총 6정은 지상군에게 기관총탄 세례를 퍼부을 수 있긴 하지만 탄 자체의 위력이 약하기 때문에 생각보다 위력적이지 못하였으며, 한편 적 항공기를 상대하기에도 그 위력이 부족하였다). 영국군은 이런 20mm 기관포 탑재 무스탕을 무스탕 Mk.1A라고 불렀다.
[주날개에 20mm 기관포를 탑재한 무스탕 Mk.1A. 이 기관포는 0.303인치 기관총이나 0.50 인치 기관총보다 훨씬 강력했기 때문에 지상의 장갑차량 등을 공격하는데도 유용했다.]
다시 시간을 약간 되돌려서, 막 영국군이 무스탕을 인도받기 시작했던 1940년으로 되돌아가보자. 미 육군(정확히는 미 육군 항공대)은 테스트 목적으로 영국군을 위해 만든 무스탕 두 대를 실험용으로 가져갔다.
사실 미 육군은 XP-51에 대해 별로 기대도 하지 않았고 흥미도 없었다. 그래서 미 육군은 XP-51을 격납고 안에 넣어 두고 놀리다가 1941년이 되어서야 이것을 꺼내어 비행시험을 했다. 그나마 이 비행시험은 XP-51의 성능시험이 아니라 영국 공군과 미 해군이 공동으로 개발하고 있던 새로운 공압식 기관총급탄 장치(Pneumatic Gun Charger)의 실험을 위해서였다. 1941년 후반, 이 공압식 기관총급탄 장치를 단 XP-51을 미 육군 항공대 소속의 테스트 파일럿이 타고 날아올랐다. 비행시험을 하고 돌아온 테스트 파일럿은 기관총급탄 장치에 대한 이야기는 제쳐두고 XP-51의 비행성능만 칭찬하였다.
[XP-51A. 영국군용으로 제작한 무스탕을 가져온 것이기 때문에 도색만 다를 뿐, 기체 자체는는 영국군의 무스탕과 동일하다. 심지어 XP-51의 주날개에 있는 기관총조차 영국군이 사용하던 0.303인치 기관총 그대로였다 (미군은 0.3인치(7.92mm) 기관총은 사용하였으나 0.303인치 기관총은 쓰지 않았다).]
이렇게 XP-51을 직접 몰아본 시험 조종사가 이 전투기의 비행성능이 매우 만족스럽다는 보고를 올렸음에도, 미 육군은 이를 신경도 쓰지 않았다.
미 육군은 무스탕이 어디까지나 영국군을 위해 만든 전투기라는 생각 때문에, 자신들에게는 잘 맞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대신 미 육군은 자신들의 입맛에 맞춰 만든 신형 전투기들, 즉 P-38 라이트닝, P-39 에어라코브라, 그리고 P-47 썬더볼트의 성능 시험에 더 관심이 쏠려 있었다.
1941년에 미 육군은 150대 가량의 P-51을 주문하였는데, 그나마 이것은 미 육군이 직접 쓰기 위해 제작한 것이 아니었다. 당시 미국은 영국에게 무기를 빌려준다는 명목하에 사실상 원조를 해줬었는데(어디까지나 자신들은 전쟁에 관계 없는 중립국이라고 우기기 위해서였다), 이 150대의 무스탕도 일단 미 육군 소속으로 등록된 다음 영국에 빌려 줄 예정이었다. 이 무스탕들이 앞서 언급한, 20mm 기관포를 탑재한 무스탕 Mk.1A였으며 미 육군은 이 기체들을 아파치(Apache : 유명한 인디언 부족 중 하나)라 불렀다가 나중에 영국군과 마찬가지로 무스탕이라 불렀다. 150대의 20mm 기관포 장착 무스탕 중 실제로는 93대만 영국으로 갔으며, 나머지 무스탕들은 미 육군 항공대에 남게 되었다. 1942년 일본이 하와이에 있던 미 해군 기지, 진주만을 공격하자 이제 미국도 전쟁이 더 이상 남의 나라 이야기가 아니게 된 것이다. 즉 미 육군 항공대도 전쟁을 위해 한 대라도 더 많은 전투기가 필요해짐에 따라 이 P-51을 (여전히 그 성능에 대해 별로 흥미는 없었지만) 쓰기로 했다.
[미군 마크를 달고 있는 무스탕 Mk.1A. 이 전투기는 처음에는 명목상으로만 미군의 자산이 될 예정이었으나, 미국 역시 2차 대전에 참전하게 되자 실제로 미군이 자신들의 전투기로서 사용하기 시작했다.]
한편 이 P-51중 일부 기체는 조종석 뒤 쪽에 카메라를 탑재한 정찰기 버전으로 개조되었으며, 이 정찰기는 F-6A라는 이름이 붙었다.
[F-6A의 모습. 조종석 뒤쪽에 아래로 향하고 있는 것이 정찰용 카메라 렌즈다. 이 사진에서는 보이지 않지만, F-6A는 조종석 뒤 이외에도 동체 뒤쪽에 아래를 향한 정찰용 카메라가 하나 더 있다. ]
미 육군 항공대는 전쟁이 터지자 정작 P-51을 전투기로 쓰기 보다는, 아예 지상공격만 전문으로 하는 급강하 폭격기로 개조해서 쓰는 편이 더 좋다고 생각했다. 이 요구사항에 맞춰 노스 아메리칸은 NA-97이란 프로젝트 명으로 P-51을 개조한 항공기를 개발하였으며, 미 육군 항공대는 이 항공기에게 A-36이란 이름을 붙였다.
급강하 폭격기란 이름처럼 45도 이상의 각도로 급강하를 하면서 폭탄을 투하하는 항공기를 말한다. 급강하를 하면서 폭격 할 경우 목표물을 정확히 조준하기 쉽고, 또 급강하 하는 항공기에 의해 속도가 붙은 채로 떨어지는 폭탄은 바람의 영향을 덜 받기 때문에 폭격 명중률이 더 올라가게 된다. 다만 급강하 폭격기는 급강하를 한 뒤에 다시 급상승을 해야 지면에 부딪히지 않으므로 비교적 날렵하게 움직일 수 있어야 하기 때문에 전투기나 이것 보다 약간 큰 사이즈로 개발되었다.
[A-36 급강하 폭격기. 전투기인 무스탕과 달리 이것은 지상공격을 전문으로 하는 공격기다.]
A-36은 이런 임무에 맞게 급강하시 속도를 줄일 수 있도록, 날개 위아래로 펼쳐지는 급강하용 브레이크를 탑재하였다(만약 급강하시 속도를 줄이지 못하면 중력에 의해 속도가 점차 붙게 되어 다시 급상승하지 못하고 지면에 충돌할 위험이 매우 높아진다). 영국군의 무스탕이 날개에 0.303인치(7.9mm) 기관총 6정이나 20mm 기관포 4정을 탑재한 것과 달리 A-36은 0.5인치(12.7mm 기관총)을 4정 탑재하였다. 기수에는 영국군의 무스탕과 마찬가지로 0.5인치 기관총 2정 장착되었으나, 일선 부대에서는 이 기수 기관총을 빼버리기도 했다. 또 A-36은 좌우 날개에 각각 1개의 227kg(500파운드) 폭탄이나 75 갤런(280리터) 들이 연료탱크를 탑재할 수 있었다. 또한 엔진은 V-1710-87로 교체되었는데, 이것은 원래의 무스탕 것과 같은 계열의 엔진이지만 좀 더 저고도 비행에 성능이 특화된 물건이었다.
미 육군 항공대는 500대의 A-36을 구매하였으며 1943년부터 주로 지상공격 임무에 사용하였다. 다만 A-36도 종종 공중전에 휘말리는 경우가 있었는데 아무래도 P-51 보다는 기체가 무거워진 탓에 기동성이 떨어졌지만, 그래도 태생이 전투기인지라 다른 지상공격기들과 달리 쉽게 적기에게 격추당하지는 않았으며 선회로 적의 공격을 피하거나 최대속력으로 적기로부터 벗어나기도 했다. 심지어 드물게는 역으로 적기를 격추시키기도 했다.
A-36은 자료에 따라 무스탕, 인베이더(Invader : 침략자), 혹은 아파치로 불리운다. 원래 아파치는 위에 본 바와 같이 미 육군 항공대가 P-51 초기형에 붙이려던 이름으로 노스 아메리칸에서 추천한 이름이었으나 이 때문에 혼동되어 A-36도 아파치라 언급하는 자료가 있다. 한편 A-36은 유럽 전선, 특히 시실리에서 큰 전공을 새우면서 인베이더(침략자)란 별칭을 얻기도 했으나 이 별칭은 이미 A-26이란 공격기가 사용 중인 이름으로 공식적으로 미 육군 항공대가 붙인 것은 아니었다. 미 육군 항공대도, 그리고 현재의 미공군 자료에서도 공식적으로 A-36은 무스탕이란 이름으로 부르고 있다.
[박물관에 보관중인 A-36. 날개 밑으로 급강하시 속도를 늦춰주는 브레이크가 내려와 있다. 이 사진에서는 보이지 않지만 A-36은 날개 위로도 브레이크가 펼쳐지며, 이것이 펼쳐진 모습은 사진 오른쪽 위와 같다. ]
강건너 불 구경 하듯 전쟁을 구경만 하던 미국은 이제 세계 대전이란 불구덩이에 직접 내던져 졌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A-36 같은 공격기도 필요했지만 역시 전투기도 필요했다. 이미 미국은 몇 종류의 전투기를 가지고 있긴 했으나 전쟁을 벌이려면 한 대라도 더 많은 전투기가 필요했다. 결국 전혀 관심조차 안 가지던, 영국을 위해 주기로 준비해뒀던 P-51 몇 대를 가져오는 것을 시작으로 아예 이 전투기를 미 육군 항공대의 입맛에 맞게 설계하였다.
미 육군 항공대는 1942년 8월에 1200대의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설계된 무스탕, 즉 P-51A를 구매하기로 노스 아메리칸과 계약을 맺었다. P-51A는 기본적으로 영국군용 무스탕 Mk.1과 비슷했지만 무장은 A-36처럼 0.50인치 기관총 4정을 날개에 탑재하였다. 대신 기수에 달았던 2정의 0.50인치 기관총은 없애 버렸다. 엔진은 종전 무스탕에 탑재된 것 보다 더 고성능인 앨리슨 V-1710-81이 탑재되었으며, 이에 맞춰 프로펠러도 더 큰 것이 탑재되었다.
[비행중인 미군 소속의 P-51A. 날개 밑에 달린 것은 보조연료탱크이며, 필요한 경우 공중에서 떼어버릴 수 있다. ]
P-51A는 3.3km(1만1천 피트)에서 660km/h(409mph)의 속도로 비행할 수 있었는데, 이는 당시 미국은 물론 영국이나 독일, 일본 등의 주력 전투기들보다도 더 빠른 수준이었다. 그러나 여전히 P-51A에 탑재된 앨리슨 엔진은 높은 고도로만 올라가면 힘을 못 썼기 때문에, P-51A는 완벽한 전투기라 할 수는 없었다.
[한랭지용 P-51A. 미 육군 항공대는 P-51A에 바퀴 대신 스키를 달아서 눈이 많이 오는 한랭지에서 쓸 생각도 했었다. 다만 실제로 미군이 2차대전 중 이런 눈이 많이 오는 한랭지에서 싸울 일은 없었다.]
P-51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P-51A도 카메라를 장착한 정찰기 버전이 개발되었으며, 이는 F-6B라 불리었다. F-6A는 날개에 기관포를 그대로 탑재한 것과 달리 F-6B는 정찰임무에 불필요한 무장은 제거한 비무장 기체였다. 보통 정찰기는 혼자 다니는 경우가 많으므로 적기와 마주쳐도 수적으로 불리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정찰기는 무리하게 적 전투기와 싸우는 것보다는 빠르게 도망치는 편이 나으므로 기체를 가볍게 하기 위해 무장을 제거한 것이다.
한편 영국 공군도 P-51A를 도입하여 무스탕 Mk.II란 이름으로 운용하였다.
당시 영국 공군이 사용하던 전투기들은 대부분 매우 날씬한 편이고 날개 끝이 둥글었다. 한편 미 육군이 사용하던 전투기들은 대부분 좀 더 크고 뚱뚱하였으며 마찬가지로 날개 끝이 둥그스름했다.
그런데 P-51은 날개 끝이 각지고 기체가 약간 늘씬한 편이었다. 문제는 이런 생김새가 독일 공군의 주력 전투기, Bf109와 유사했다. 이렇다보니 P-51이나 A-36이 막 배치되었을 때, 무스탕에 익숙하지 않은 연합군의 대공포 사수들은 자주 이 항공기를 독일군의 Bf109로 오인하였다.
[독일 공군의 주력 전투기 Bf109E. 물론 이렇게 큰 사진으로 보면 이 Bf109와 무스탕은 확연히 달라 보이지만, 항공기를 주로 먼 실루엣으로만 보던 대공포 사수들은 무스탕을 이 전투기로 종종 오인했다.]
물론 무스탕 운용부대는 국적 마크를 큼직하게 그려 넣고, 또 독특한 무늬를 그려 넣는 등 다양한 방법으로 자신들이 아군임을 강조하려 애썼다. 그러나 대공포 사수들에게는, 여전히 먼 거리에서 실루엣으로 보기에 무스탕은 Bf109와 유사했다. 덕분에 초반에 무스탕 운용 부대는 적기와 싸우는 것 못지않게 아군 대공포 사수들에게서 살아남기 위해 고심해야 했다.
일반적으로 사수가 기관총을 쏠 때는, 기관총 바로 뒤에서 가늠쇠/가늠자를 통해 조준한다. 그러나 1차 대전 무렵, 처음 전투기라는 물건이 등장했을 때는 기관총을 조종사 바로 앞에 둘 수 없었다. 그랬다가는 기관총탄이 프로펠러에 부딪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초반에는 기관총을 조종사 머리 위쪽에 장착하였다. 당시 항공기들은 보통 날개가 2개인 복엽기내지 3개인 삼엽기들이었으므로 조종사 머리 위에도 날개가 하나 있는 경우가 많았고, 여기에 기관총을 장착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1차 대전중, 프랑스에서는 기관총을 자신의 바로 앞쪽에 배치하는 대신에 프로펠러 뒤쪽에 철판을 덧대는 방안을 고안했다. 기관총을 발사하면 총알들은 프로펠러 사이를 빠져나가며, 설사 프로펠러에 부딪혀도 철판에 맞고 튕겨져 나가버리므로 최소한 프로펠러가 기관총탄 때문에 부서질 일은 없었던 것이다. 독일은 프랑스의 이런 방식을 알아차린 뒤, 더 나은 방법을 고안했다. 즉 프로펠러의 회전에 맞춰 프로펠러가 기관총 앞을 가릴 때는 방아쇠를 누르고 있어도 총알이 발사되지 않도록 톱니바퀴와 캠을 맞물린 기계장치를 개발한 것이다. 이를 기관총 동조장치라 부른다.
독일은 이 방법을 비밀로 하려 했으나 결국 연합군도 이런 방법을 고안하여 사용하기 시작했다.
몇 십년이 지난 2차 대전 중에도 기관총 동조장치를 사용한 전투기들은 여전히 존재했다. 다만 1차 대전 중에는 1, 2정의 기관총만으로 적기를 격추시킬 수 있었으나, 이제 기체 전체가 금속으로 뒤덮인 전투기를 격추시키기 위해서는 더 많은 기관총이 필요했다. 그래서 독일, 소련, 일본 등은 전투기의 기수에 2정의 기관총을 탑재하고 추가로 날개에 2~4정의 기관총내지 기관포를 탑재하였다. 반면 영국은 기수에 기관총을 탑재하지 않는 대신 날개에 더 많은 기관총/포를 탑재하여 적기를 맞출 확률을 높였다. 미국은 2차 대전 초기에는 몇 몇 전투기에 이런 기관총 동조 장치를 사용했으나, 나중에는 기수 기관총은 없애고 영국처럼 날개에 많은 기관총/포를 탑재하는 방향으로 바뀌었다.
현재 미 공군은 전투기에 전투기(Fighter)의 약자인 F를 붙인다. 이를 테면 F-4 팬텀, F-16 파이팅 팰콘, 이런 식으로 말이다(뒤의 숫자는 미 국방부에 등록된 순서). 하지만 2차 대전 중 미 육군 항공대는 F대신 P를 썼으며, 이는 추적자(Pusuiter)의 약자였다. 그래서 2차 대전 중 미 육군 항공대의 전투기들은 P-40, P-51 같은 식의 이름을 가지고 있다. 한편 이 당시 미 육군 항공대는 F를 사진정찰기에 붙였으며, 이 때문에 P-51의 사진정찰기 버전이 F-6가 되었다. 참고로 이 당시 미 해군은 전투기에 F(Fighter)를 붙였기 때문에 F4U 커세어 같은 식의 이름을 썼다 (자세한 것은 팬텀 1화의 ‘알아도 그만, 몰라도 그만 1’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