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 오일쇼크: 1973년10월부터 1974년01월까지 석유가격 300~400%까지 인상 요인: 제4차 중동전쟁 2차 오일쇼크: 1978년 말 요인: 이란의 국내혼란(이란 혁명 1977~1979)과 이슬람혁명(1979~1981) 경제성장률 하락과 소비자 물가의 급상승 등 세계 경제에 큰 영향을 미쳤다.
1985.09.25. 플라자합의 엔화와 마르크화 등 환율에 대한 평가절상이 결정됨.
1987년02월 루브르 합의 달러화 하락 현상이 지속되자 달러화 안정화를 위해 일본 독일 등이 확장재정정책을 실시.
1988년 바젤1(BIS자기자본비율 시행)
---- 1장. 플라자합의와 루브르합의, 바젤회의
한국의 경제는 제1차 석유파동 때에 다른 국가에 비해 크게 영향을 받지는 않았으나, 제2차 석유파동 때는 극심한 피해를 입었다. 이는 제1차 석유파동 이후 경제 체질 개선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중화학공업 중심의 확대정책에 중점을 둔 것에 기인한 것이라는 시각이 높다.
이때 일본은 1970년대에 들어와 오일 쇼크로 타격을 받긴 했으나 여타 다른 경제 선진국보다는 그 피해가 적었으며 일본산 차량들이 연비가 좋다는 이유로 자동차 산업을 중심으로 수출이 가파르게 늘어났으며, 공업체질을 개선(생활가전: TV, 냉장고 등)하였고. 일본은 80년대에 접어들어 성공적인 경제 성장모델로 손꼽혔다. 이는 엔저(이때 환율 1달러=250엔)를 통해 이룬 것이다.
반면 미국은 고금리정책으로 달러 시장의 초호황으로 이어져 인플레이션도 정상화 되고 무역적자도 개선되는 듯 보였으나 인플레이션이 어느 정도 진정되자 다시 금리를 하락시키며 무역적자가 증가하기 시작했고 달러 위기를 막고자 G5 경제선진국(미국,독일,일본,영국,프랑스)들이 모여 합의를 하게 된다. 이게 바로 플라자 합의다.
플라자 합의(1985년09월25일)의 주요 내용은 달러위기를 막기 위해 달러가치를 하락하고 엔화와 독일의 마르크화를 평가절상 시키는 것이었다.
플라자합의로 곧바로 잃어버린 20년이 시작되었다고 잘못 알고 있는 분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그러나 EPA(Economic Partnership Agreement:자유무역협정(FTA)을 최종 목표로 하는 국가간 경제협력 방안이다)에 따르면 경제는 1986 년 11 월을 바닥으로 1991 년 2 월까지 4 년 3 개월 (51 개월)동안 경기가 확장되었고 이후 1993 년 10 월까지 둔화되었다. 버블 기간 동안의 경제 팽창은 1960 년대 후반 (Izanagi Boom)의 확장 이후 두 번째로 길었고 실질 GDP와 산업 생산은 연평균 5.5 %와 7.2 % 성장했다. 이러한 경제적 확장의 주된 엔진은 사업 고정 투자 였는데, 이는 GDP의 거의 20 %에 달했으며 이는 1960 년대의 높은 경제 성장기의 수준과 비교할 만하다고 보고하고 있습니다.
플라자 합의가 발표되자 외환시장은 즉각 변동을 보였으며 1년 뒤 엔화는 1달러 =242엔에서 1달러 = 120엔 까지 올라갔다. 엔화 초강세로 인해 일본의 수출경쟁력은 심각한 타격을 입게되고, 수출부진에 따른 경제성장률 저하를 막기 위한 궁여지책으로 통화 완화 정책(저금리정책)을 펼치게 됩니다.: (‘86년 1월부터 5%였던 금리를 13개월동안 2.5%까지인하⇒자산시장 버블 형성의 단초를 제공)
이와 더불어 미국은 금융자유화를 통해 동경을 Global 금융허브로 만들 것을 권고하고 이에 의해 즉각 변동환율제가 채택되고 외국인들의 주식 소유 제한이 철폐되고, 선물 시장이 개설되면서 외인들의 주식투자가 활성화되어 해외자본이 몰려들고 수급이 좋아진 일본증시는 폭등을 시작합니다. 또한 금리를 낮춰 저축을 억제 하려 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막대한 국내자본과 해외자본이 일본은행으로 돌아왔고 은행은 대출기준을 완화하여 돈을 빌려주기 시작합니다. 대출금들은 기업으로 재투자되었으며, 그결과 주식시장과 부동산시장은 폭등하기 시작합니다.
- 여기에 그치지 않고 달러화 하락 현상에 브레이크를 걸고 환율의 안정화를 꾀하기 위해 1987년 2월 다시금 각국이 협조하기로 하는 “루브르 합의”가 체결하게 되는데 이는 전형적인 확장재정정책입니다. 일본중앙은행과 시중은행의 양적완화정책으로 인해 이미 과열의 조짐을 보이고 있던 일본경제는 5조엔에 달하는 재정투자와 1조엔에 달하는 감세정책을 하게된 루부르합의를 체결함으로써 버블의 규모는 더욱 가속화됩니다.
1988년 BIS자기자본비율의 시행 (바젤1) -또한 국제 금융재벌들의 모임인 바젤회의를 통해서 일본은행들이 보유하고 있는 기업들의지분중 45%를 자기자본으로 인정하게되고 이는 은행들이 자기자본비율에 좀 더 여유를 갖게 됨으로써 부동산 담보 대출 및 주식시장의 거품을 더욱 가속화시킵니다
(당시 기업들은 영업이익이나 개발에 신경 쓰지 않고 당기순이익에만 집중했으며 그 결과 부실기업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버블 안에서는 모두가 돈을 벌기 때문에 그 사실은 외면당했다. 당시 국제정세도 동부유럽권의 몰락과 미국경제의 위기가 겹치자 세계 자본 또한 일본으로 흘러 들어왔다)
이로 인하여 1988년에는 일본의 주식시가총액은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는데 .
(1988년 전 세계 10대기업 중 1위 NTT(일본전신전화공사), 3위 주우은행, 5위 제일권업은행을 포함 8개가 일본기업(은행5, 국영기업2, 증권1)이었으며, 20대 기업중 16개가 일본의 기업이었음. 이중 눈여겨 볼 부분은 은행의 주식시가총액 1~10위 모두가 일본의 은행들이었음.)
그러나 거품이 최고조에 이를 쯤 국제금융재벌들의 모임에서 자기자본비율을 지키라는 권고(바젤1) 를 일본에 내림으로써 1989년 5월 75BP의 금리 인상을 시작으로 1990년08월 까지 16개월동안 무려 350BP 나 금리를 인상시키게 되는데(금리는 2.5%⇒6.0%로 상승) 여기에 1990년4월에는 부동산 대출을 규제하는 총량규제제도를 (LTV,DTI 도입) 도입하게되는데 이것이 곧 버블붕괴가 시작된 시점이며 잃어버린 20년의 시작입니다.
(주식: 1985 년 9 월 (12,598 엔) 플라자 협약 당시의 3.1 배인 1989 년 말에는 38,915 엔으로 최고치를 기록했다. 이런 주식시장의 거품은 1990년01월을 기점으로 하락하기 시작했고 그런 다음 주가는 1992 년 8 월 14,309 엔으로 급격히 하락하여 최고치보다 60 % 이상 떨어졌습니다.
부동산: 가격 상승은 도쿄에서 오사카, 나고야와 같은 주요 도시에서 시작하여 다른 도시로 시차를두고 퍼져 나갔으며, 도시의 토지 가격 지수는 1985년이후 년 10%가 넘어 1987년 45%까지 상승률이 확대되었으며, 1990 년 9 월에 상승률이 0%에 접근하면서 최고치에 이르게 됩니다. 이는 1985년9월의 부동산가격대비 400% 상승한 것과 같습니다. 이후 1991년부터 1996년까지 매년 20%~25%까지 하락하게 되고 97년 이후에는 10% 의 하락을 보이게 되어 1990 년 9 월 최고점대비 80%까지 하락하게 된다.)
2장 외환시장과 경제 관점.
보통 그 나라의 자산건전성(국가 신용도)은 통화량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 나라의 자산 및 화폐가치의 건전성은 외환보유고, 경상수지, 기타 변수에 의해 결정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외환보유고 즉 달러입니다. 외환보유고가 늘어나지 않고 자국통화만 증가한다면 세계 석유매장량 1위의 베네수엘라나 짐바브웨이의 통화가 휴지조각이 되듯 통화가치 하락만 가져올 뿐입니다.
모든 나라의 부채총량 즉 국내자본시장의 규모는 외환보유고가 커질 때 부채총량도 커지게 됩니다. 한국이 계속 부채총량이 증가하고 있는 것은 외환보유고가 계속 늘어나기 때문이기도 하며 중국이 그간 부채가 상상 이상으로 증가한 것도 3조5천억달러나 되는 외환보유고에서 이유를 찾을 수 있습니다.
다른말로 외환보유고가 줄어들 때가 거품의 붕괴를 가져오는 신호가 될 것입니다.
일본은 1988년까지 꾸준히 외환보유고가 증가하게 됩니다. 또한 엔이 준기축통화이기에 통화공급량을 늘릴수록 분모인
외환보유고(달러+엔)가 증가하고 통화량(부채총량)도 늘어가게 되며 이때 증시나 부동산은 최대의 호황을 구가하였던 것입니다.
외환보유고
증가시기 (1985년:267억달러, 1986년: 422억달러, 1987년 810억달러, 1988년 967억달러)
유출시기 (1989년: 840억달러, 1990년 785억달러, 1991년 720억달러, 1992년 716억달러)
증가시기 (1993년: 985억달러, 1994년 1258억달러, 1995년 1832억달러.....)
1992년부터는 GDP성장률이 급격히 떨어지며(1991년 3.4%, 1992년 1.0%, 1993년 0.2%)
투자처를 찾지 못한 일본 내 자금은 제3국으로 빠져나가게 되는데 이것인 엔케리트레이드라
불리는 자금유출입니다.
일본의 낮은 금리를 활용해 엔화를 빌려 제3국에 투자하고 수익을 얻으며, 엔화 약세 현상이 겹쳐 환차익도 얻을 수 있게 되면서 (엔케리트레이드의 목적) 분모인 외환보유고를 낮추는 역할을 하게 되며 이로 인해 분자인 부채총량은 같은 비율로 하락하기 시작하게 된 요인도 있습니다.
1998년 아시아 경제위기시 -1.1%의 성장률을 보인 이후, 1999년 0.1%, 2000년 2.8%,
2001년 0.4%, 2002년 -0.4%, 2003년 1.4%를 보인 후 2004년2.9%로 올라 2012년까지 2%~2.8%의
성장률을 꾸준히 기록하게 됩니다.
2004년이후 경제가 일정수준 회복되면서 외환보유고가 급격하게 늘어나고 엔케리트레이드자금을 웃돌면서
자산의 가격도 상승세를 보이며 현재의 일본 동경의 아파트 값이 유지되고 있는 것입니다.
3장 국제정세에서 읽기
미국은 패권국입니다. 패권국가는 2인자가 자신을 뛰어넘는 것을 절대 용인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국제 정세에서 독일과 일본은 1980년대 미국을 뛰어 넘는다는 자신감이 너무 컸고 이러한 패권의 도전은 일본의 자멸을 불러옵니다. 통화가치와 통상압박을 통해 플라자합의 를 가져왔고 이후 일본 기업은 속절없이 주저앉게 됩니다. 이후 일본은 더 이상 미국을 따 라 갈 수 없으며 경제패권국으로 불리우지도 못합니다.
이것이 지금 중국몽이라 불리는 제조2025와 너무나 닮아있는 듯 합니다. 독일과 일본은 미국 GDP의 40%가 넘기전에 당해서 현재는 30%이하로 떨어졌는데. 중국은 65%선에 접근해 있습니다. 이에 중국이 기세 등등하게 “중국몽”을 외치며 “일대일 로”를 부르짓고 있지만 이런 패권도전은 결코 용납되지 못하며, 미국은 중국을 철저하게 짓 밟아놓게 될것입니다. 이것이 이번 경제전쟁의 시작이며 끝이 될 것입니다.
혹자들은 11월 미국의 중간선거가 끝나면 미중이 합의하고 예전처럼 돌아갈거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는 숲을 보지 못한것 입니다. 결코 그리 빠르게 끝나지 않을 것이며, 합의가 이루어진다하면 그것은 플라자합의처럼 중국의 모든 것을 잃게되는 트럼프식 합의가 될것입니다. 그저 표면적인 “Cold Peace”(냉정한 평화)가 올 뿐입니다.
(개인적으로는 2019년 경제패권전쟁이 극에 달할 것으로 봅니다.)
추가로 1988년 주식시장 시가총액그룹과 2016년 시가총액 순위를 눈여겨 보아주세요......
(1988년 전 세계 10대기업 중 1위 NTT(일본전신전화공사), 3위 주우은행, 5위 제일권업은행을 포함 8개가 일본기업(은행5, 국영기업2, 증권1)이었으며, 20대 기업중 16개가 일본의 기업이었음. 이중 눈여겨 볼 부분은 은행의 주식시가총액 1~10위 모두가 일본의 은행들이었음.)
2016년 세계은행 순위 1위 중국공상은행(China). 2위 중국건설은행(China), 3위 중국농업은행(China), 4위 중국은행(China), 5위 홍콩상하이은행(영국), 6위 JP모건체이스(미국), 7위 BNP 파리바(프랑스), 8위 미쓰비시UFJ파이낸셜그룹(일본),9위 뱅크오브아메리카(미국), 10위 크레딧에그리꼴(프랑스).
일본이 무너지면서 그 돈 많은 일본 은행들이 모두 상위권에서 없어졌듯이..
중국이 무너지면 저 은행들은 어디에서 찾아볼 수 있을지 궁금합니다.
물론 그 신호탄은 기업부채와 부동산부채가 되겠지만 거품은 터질때까지는 아무도 모르는 것이라서......
첫댓글 좋은글 감사합니다.
이런기사는 어디서 부럽습니다
감사합니다..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