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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u | wash | Deori/Deuri | Brown 95 | 74 |
شوی [shūy] 水의 북경어 발음 수이
(شستن의 어근) (شو) 씻다, 세탁하다, 목욕하다, 지우다
패수(浿水)
패-->배-->왜
Tibeto-Burman (previously published reconstructions) | ||||||
b-wa | white / yellow | *Tibeto-Burman | Matisoff 03 HPTB | 618 |
pero | yellow | Raji | Krishan 2003 | 634 | 1 note |
wa²² | yellow | Burmese (Rangoon) | Huang and Dai 92 TBL | 1008.27 | ||
wɑ²² | yellow | Burmese (Spoken Rangoon) | Sun H 91 ZMYY | 838.40 |
bɛ³³ | yellow | Kayah | Luangthongkum 13 | 339 |
bài | yellow | N | Kayan (Pekon) | Manson 10 Kayan |
고구려시대 서안평 실제위치
[ 동몽골 고구려 유적 ]
뉴 스 명 : 한겨레신문
등 록 일 : 96/07/30 이상수 기자
“을지문덕의 안내로 고구려 성터가 있었다는 곳의 위치를 확인해 더욱 기뻤습니다.”
지난 23일 몽골 국립과학아카데미 역사학연구소 학술위원회(위원장 아요다인 오치르)로부터 외국인으로는 처음으로 명예 박사학위를 받고 26일 귀국한 한·몽학술조사연구협회 회장 손보기 교수(74·연세대 석좌교수·고고학)는 보름에 걸친 몽골 유적답사의 성과를 이렇게 설명했다.
손 교수를 안내한 을지문덕(70)은 물론 옛 고구려의 장군이 아니라 동몽골 다리강가에서 낙타와 말을 기르는 몽골 유목민이다. `을지문덕'은 이 지역에서 대대로 살아온 그의 아버지가 좋아하는 고구려 장군의 이름을 본따 붙여준 이름이다. 몽골인들은 중국식 발음의 영향으로 그를 `을지문더'라고 부른다. 몽골어로 `을지'란 불로초를 상징하는 문양을 뜻하며, 장수·오래 사귐·영원함 등의 뜻도 담겨 있다고 한다.
손 교수는 강원대 사학과 최복규·주채혁 교수 등과 함께 지난 92년 몽골 국립과학아카데미와 공동으로 한·몽학술조사연구협회를 설립해 5년째 몽골 동부지역의 유적을 조사·발굴해왔다.
올해 조사에서는 중국과 접경지역인 찹친 토이롬에서 고구려 성터 위치를 확인한 이외에도 숨틴 토이롬에서 가마터를 찾아냈으며, 청동기~철기시대의 작품으로 보이는 바위그림을 새로 찾아냈다. 몽골의 바위그림은 서부지역에서는 많이 발견됐으나, 동몽골에서 찾아내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특히 동몽골은 우리 민족의 선사·고대 역사와도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어 이번 발견의 의미가 크다.
손 교수가 몽골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몽골에 고구려 유적이 있다는 몽골 고고학자 헤 페를레의 주장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이를 위해 손교수는 그동안 동몽골지역을 연 3천여㎞ 이상을 탐사했다. 그 결과 지난 해에는 고구려의 것으로 보이는 돌무덤 두 곳을 발굴하는 개가를 올렸다.
이 두 무덤은 몽골인들의 돌무덤 양식과는 전혀 다른 양식으로, 오히려 고구려의 돌칸무덤과 닮았다. 몽골인의 무덤은 길고 평평한 자연석을 세워 한 켜로만 쌓는 데 반해, 고구려의 돌칸무덤은 자연석을 반듯하게 다듬어 벽돌을 쌓듯이 여러 켜로 쌓아올려 만든다. 광개토대왕릉(장군총)이 바로 그런 양식으로 만들어졌으며, 손 교수가 동몽골 숨틴 토이롬에서 발굴한 두 기의 돌무덤도 바로 이런 양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런 양식은 흉노족이나 몽골인들의 무덤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다. 함께 발굴에 참가한 몽골 국립과학아카데미 역사학연구소 고고학실 부소장인 바이예르(55) 연구교수나 역사학연구소 오치르 소장 등도 이 돌무덤이 고구려의 것이라고 인정하고 있다.
손 교수는 이 두 무덤과 고구려의 돌칸무덤을 비교한 보고서를 최근 한·몽학술조사연구협회에서 펴낸 <한몽공동학술연구> 제4권에 발표했다.
올해 이 무덤터 부근에서 찾아낸 가마터에서는 숯도 함께 나와 구체적 연대까지 측정이 가능해졌다. 손 교수는 이를 미국 플로리다 대학 부설 분석기관에 보내 정밀 감식을 요청할 예정이다.
이 유적지에 대해 손 교수는 “고구려의 군사기지나 북방 전진기지라고 추정할 수 있다”며, “이 지역 선사·고대 유적지의 조사·발굴·연구를 통해 우리나라 고대의 역사 서술은 더욱 풍부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 고구려성 1천년의 전설 현실로/한·몽조사단 다리강가 성터 발굴 ]
연 재 명: 한국일보
등 록 일: 940829 21면(문화)
◎ 축성공법 백제·고구려 혼합형/적벽돌·기와 등 선조손길 확인/적석총은 중국 집안 발견유적과 유사/우리문화 몽골전파 연구에도 큰 도움
몽골 수흐바타르도(아이막) 다리강가 지역에서 발굴된 고구려 성터로 추정되는 유적과 유물은 고구려의 영토가 대흥안령산맥을 넘어 베이얼호 근처의 광대한 초원지대에까지 이르렀음을 보여주는 획기적인 단서라고 볼 수 있다. 이번 발굴은 다리강가 주민들 사이에서 1천년동안 떠돌던 고구려성터의 전설을 한국과 몽골의 고고학자들이 공동으로 참여하여 발굴함으로써 더욱 의미가 깊다.
발굴현장인 다리강가군(솜)은 몽골에서도 목초의 질이 좋아 고대부터 정착민들이 무리를 지어 살고 있었으며, 몽골 고고학자와 주민들이 모두 『고려성이 있었다』고 증언하고 있는 곳이다.
몽골 고고학 및 역사학계의 대표적 학자인 헨 페를레가 1961년에 출간한 「몽골인민공화국 고중세 성읍지약사」중의 『다리강가 지역에 건물벽돌이 많이 출토되고 엣 건축물 흔적이 있는데,고려성 자리로 보인다』고 적은 기록은 이 지역 사람들의 증언과 일치한다.
이같은 조사기록과 주민들의 증언에 따라 발굴된 유적·유물은 성의 지반을 다진 흔적과 주춧돌, 적색벽돌, 적색기와, 돌을 장방형으로 쌓아 만든 적석총 등 10여점이다.
성터의 경우 건물과 성벽이 모두 무너져 겉으로 드러나 보이지는 않았지만, 군데 군데 작은 둔덕을 형성하고 있어 주변지역과는 확실히 구분되었다. 또 성터 안쪽으로는 주변에서는 찾기 힘든 돌들이 무더기를 이루고 있있다.
조사단은 성터의 중심과 성벽으로 보이는 세 곳을 선정하여 가로 2와 세로 5정도의 넓이로 계단식으로 발굴한 결과 3∼4개의 지층으로 형성돼 있는 것을 확인했다.
손보기 한몽공동학술조사단 단장은 『이 지역은 몽골초원, 만주, 중국중원을 연결하는 군사적·경제적 요충지인 만큼 고대부터 각 국간 세력다툼이 치열했던 곳이다. 따라서 이 지역의 주인이 바뀔 때마다 성을 증축했고, 각 지층은 해당시기를 나타낸다』고 말했다.
그는 또 『기록과 증언에 의하면 맨 위층이 원나라때 구축된 것이며, 그 아래는 시기적으로 10세기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특히 맨 아래층은 성을 쌓는 공법이 백제계의 판축(판자를 측면에 대고 성을 쌓는 방법)과 고구려계의 석축(판축외면에 돌을 쌓고 자갈로 다지는 방법)이 혼합된 형태로 보여 고구려와의 관련이 깊다』고 밝혔다.
더욱이 기둥을 받치는 주춧돌이 배수를 고려한 형태로 만들어져 그 제작시기를 삼국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게 한다는 것이다. 또 성터 지반의 아래층에서 출토된 붉은 벽돌과 기와는 고구려 건축물에서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것으로 고구려 유적의 증거로 보고 있다.
성터 안쪽에서 둥그런 봉분형태로 발견된 적석총은 오랜 세월을 거치며 무너져 내리긴 했지만, 3∼4단으로 이루어진 기단 흔적이 뚜렷하여 중국 길림성 집안일대에서 무더기로 발견된 고구려 무덤과 유사한 형태를 보인다.
특히 적석총에 사용된 돌의 형태와 흙의 사용여부에 따라 시기를 추정할 수 있는데, 다리강가의 경우 흙을 사용하지 않고 모난 돌로 무덤벽을 쌓은 형태이므로 BC2∼AD1세기때 만든 것으로 보고 있다.
조사단의 학술대표로서 2년전부터 다리강가 지역의 전설과 설화를 수집한 주채혁교수(강원대)는 『동몽골 지역과 우리나라는 기원설화, 건국설화, 민속 등이 매우 흡사하여 고대부터 깊은 관련을 지닐 것으로 보았다. 이번 조사과정에서 고려인의 후예가 발굴하러 왔다는 말에 무척 놀라는 주민들의 모습을 보고, 이 지역이 고구려땅이라는 확신을 가졌다. 유적과 유물의 발굴로 잃어버린 역사를 찾게 되었다』고 흥분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손단장은 『이번 발굴은 전체 유적 중 일부만을 대상으로 했기 때문에 고구려인의 활동내용의 전모를 밝힐 수는 없지만, 고구려인의 숨결을 확인할 수 있었다. 돌벽이 무너질 우려가 있어 발굴을 중단한 적석총을 집중적으로 조사하여, 이 곳이 고구려 성터임을 증명해주는 결정적인 증거들을 보완해 나갈 계획』이라며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학계는 군사적·경제적 요충지인 이 지역이 고구려와의 관계가 있는 것으로 밝혀진 것을 매우 놀라운 일로 받아들이면서 앞으로 미발굴지역의 집중적인 조사로 체계적인 정리를 해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윤내현교수(단국대)는 『이번 유적 발굴지역은 고구려의 영향하에 있었던 곳으로 밝혀진 흑룡강 상류로부터 약 2백 떨어진 곳이다. 지금까지 고구려땅으로 추측했던 이 지역에서 유적발굴로 고구려 영토확장 만이 아니라 우리문화가 몽골지역에 전파된 경로를 연구하는 데도 큰 도움이 된다』고 강조했다.
【다리강가(몽골)=최진환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