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맨해튼 견문기
방문지 ; 맨해튼 38ST 2AVe
방문기간 ; 2018. 5,12- 6,11/체류, 30일
방문 목적 ; 손자탄생 100일 축하 차
방문 타입 ; 아내와 동행
여행경로 ; 인천국제공항 2청사 - 뉴욕 케네디 국제공항
탑승기 ; 대한항공
탐승시간 ; 13시간
맨해튼의 첫 인상
맨해턴은 미 연방공화국 50개 주중 하나인 뉴욕주 안에 있는 도시다
맨해턴은 맨해튼 섬을 중심으로 본토의 마블힐 구역에 걸쳐 있으며, 이스트 강의 여러 작은 섬을 포함하고 있다. 허드슨 강, 할렘 강, 스파이튼다이빌 강, 이스트 강, 어퍼뉴욕 만과 접한다. 맨해튼은 세계최고의 상업·금융·문화 중심지의 하나로 여겨지며, 맨해튼 면적은 87㎢로 약 여의도 면적의 30배 수준에 가깝다.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거리에 속하는 브로드웨이와, 금융가인 월스트리트가 있고 UN본부가 자리하고 있다.
내가 존 F케네디 공항에 내린 것은 이슬비가 내리는 2018년 5월 12일 오후 9시경이었다
인천공항을 출발하여 13시간만에 도착했고 입국수속을 마치고 나오니 대충 14시간이 걸린 것 같다.
트럼프가 미국 대통령이 된 후 외국인의 미국 입국수속이 까다로워졌다고 해서 겁을 먹었는데 마음씨 좋아 보이는 흑인 입국 수속관이 먼저 "어서 오세요" 하며 한국 말로 인사를 건넨다. 뒤에 들은 이야기지만 이런 경우 흑인 검사관이라 하면 인종차별적 언어라 해서 조심해야 한다는 것이다. 잘못하면 경찰에 끌려가는 신세가 될지도 모른단다
아들이 입국 시 물어 보는 예상 질문을 10개 정도 적어 주어 공부했는데 대충 질문 내용은 입국 목적이 무었이냐? 얼마나 머물 것이냐? 이렇게 간단한 질문과 대답으로 통과 된 것 같다.
걱정이 되는 더 큰 것은 일인당 가져올 수 있는 23kg이내의 두 개의 가방인데 그 가방 속이 두려웠던 것이다.
아들과 며느리가 좋아하는 식재료와 한국 음식을 준비해 왔기 때문에 가방을 열면 압수 될 수도 있을 품목들이 있을 것 같아서다.
아무 문제 없이 검색대를 거쳐 나오니 아들이 반긴다. 6개월만에 만나는 상봉이다. 짐이 많아서 밴 정도 크기의 택시를 골라 아들이 사는 집으로 향했다. 공항은 비교적 도시 외곽에 있으니 차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호화롭지 않다는 느낌을 받았다.
공항을 나와 한 시간 정도를 달리다 보니 이스트 강 하저로 통과되는 긴 지하차도를 지나니 바로 빌딩 숲으로 들어선다. 20여층의 건물이 아니라 층 수도 셀 수 없는 높이다. 뉴욕의 상징 맨해튼 거리로 들어 선 것이다
드디어 아들이 사는 건물 앞에 차가 선다. 운전기사가 정확하게 집 앞에 세우는 것도 신기하고 나와서 직접 짐을 내려주는 모습도 고마웠다. 친절하기가 그지 없다. 공항 택시 터미널에서 출발하는데 공항안내요원이 맨해튼까지는 정액으로 56달러, 그리고 프러스 알파라고 알려준다. 속지 말라는 정보였다. 프러스 알파는 택시 기사에게도 팁을 주어야 한다는 이야기였다.. 이렇듯 팁은 맨하튼에서 항상 유효했다.
집에 들어서니 도어맨이 반갑게 반긴다. 중남미계 얼굴이다. 우리와 인사를 시킨다. 앞으로 건물을 드나들려면 얼굴을 익혀야 하기 때문이란다. 엘리베이터는 좀 이상하다. 건물 벽과 동일하게 색을 입혀 처음에는 분간하기가 어려웠다
엘리베이터의 승강 속도는 느렸다. 한층에 10세대가 살고 있고, 전체 높이는 17층 건물이었다. 원 룸과 투룸이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그것도 88년이나 된 1930년도에 지은 집인 것이다.
관리 상태는 대전에 살고 있는 우리 집보다 양호한 편이었다. 천정과 벽은 흰색 페인트다. 천정 마감이 안 되었고 벽에도 못을 못 박는다고 한다. 물론 외벽도 마감 석이 붙어 있지 않고 벽돌로 마감 처리하고 있는데 흠 잡을 데가 없다. 88년된 건물이라고는 도저히 상상이 안 가는 건물이었다.
입주했던 사람이 떠날 때는 원상 복구가 원칙이고, 새로운 입주자가 들어오기 전에 주인은 전체적으로 집안을 점검하여 도색하고 수리하는 것이 원칙이라고 한다. 옛부터 고층건물을 지으려면 문제가 되는 것이 식수를 고층까지 올리는 것이 문제였다. 이곳에서는 이미 100년 전에 이런 문제를 해결하였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었다.
주변 높은 건물들이 이런 식의 구조로 여러 세대가 사는 주거공간이었다.
원룸과 투룸 사이의 임대비 차이는 크다고 한다, 대부분 이민자들이 살고 있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부유한 편은 아니지만 한 달 임대료가 원룸이 300만원이고 투룸인 경우가 450만원 정도라는 것이 중론이다. 그것도 일년 선불로 하여 10개월분을 미리 내야 하니 부담이 가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수도물과 온수사용료는 맨해튼 시에서 무상으로 제공하고 있었다.
방바닥은 원목으로 마감 되었고 온돌방이 아닌 히터로 실온을 유지하니 방바닥에는 카펫을 깔아야 했다. 북박이가 세 개나 있어 어지간한 짐은 그곳에 보관할 수 있어 편리했다. 투룸은 우리나라 20평 정도라고 보면 될 것 같다
지하에는 헬스장이 무료로 이용되고 있고, 한 켠에는 빨레방에 대형 세탁기와 건조기가 6대씩 있어 셀프로 이용하는데 한번 이용하는 비용은 5,000원정도로 카드결제하고 있었다.
보편적으로 신혼살림을 하기에는 충분할 것 같다.
놀라운 것은 88년 돤 건물을 이렇게 깨끗하게 유지 관리하며 사용할 수 있느냐 하는 점이었다. 이곳에는 노후 건물을 철거하기 보다는 보수하여 사용하는 쪽으로 유지하는 것이 법적으로 되어 있는 것 같았다. 거리를 가다 보면 건물에 공사를 하느라 곳곳에 통행인의 안전을 위해 통행인 보호시설이 아주 견고하게 설치한 것이 인상적이었다.
우리는 20년만 지나면 재 개발이다 하여 때려 부수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2-30년 아파트를 보면 콘크리트가 부식되어 철근이 벌겋게 노출 되어 있는 것을 보게 되는데 30년을 건설업에 종사해 온 내로써는 얼굴이 화끈거려 오는 것을 느껴야 했다.
학교에서는 "콘크리트 수명이 100년이다." 라고 배웠는데 이곳에서는 그 기록이 연일 갱신되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맨해턴에 도착한지 첫날이라서 13시간의 시차로 졸음이 밀려 온다. 이제 잠을 자러 들어가야겠다. .
아들집
아들집 옥상에서 본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
Brooklyn Bridge
Brooklyn Bridge는 인구 밀집지역인 맨해튼과 공업지역인 브루클린을 잇는 교량이다. 토목을 전공해서 직업으로 선택한 나에게 Brooklyn Bridge는 최대의 관심을 갖게 하는 교량이다. 그것은 현수교의 효시이기 때문이다. 1869년 완공될 때 이 다리는 총연장 2,7km로 세계에서 제일 긴 다리였다.
이 때 우리나라에서는 대원군이 섭정하여 나라를 꽁꽁 닫아버리는 쇄국정치를 하던 때이니 기분이 묘하다. 그 시절 이곳에서는 주탑을 세우고 와이어로 연결한 다리를 구상했다는 것이 경이로울 뿐이다. 같은 시기에 스위스에서도 관광목적으로 몽불랑으로 올라가는 산악열차를 놓았다는 것에 놀란 적도 있었는데, 이곳에서도 지하철을 만들고 2,7 km의 다리를 놓을 생각을 했다는 것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게 한다. 그만큼 우리보다 먼저 가고 있었던 것이다.
교량은 도로에서 서로 떨어진 두 지역을 연결하는 것으로 교각과 기초를 포함한 하부가 있고 차가 다니는 상판을 상부로 구분을 한다.
교량을 만드는 금액이 상부와 하부의 공사비가 비슷한 구조물로 만들어질 때 우리는 경제적인 교량이라고 하는데, 계곡을 지나거나 강을 횡단할 때는 하부공사비가 증액 되는 경우가 발생한다. 이때 전체적인 공사비를 생각해서 하부의 교각 수를 줄이고 상부에 공사비를 좀 더 투입하는 방법으로 설계를 하게 되는데 그런 교량의 대표적인 것이 현수교다
현수교에서는 지금도 많은 공법과 기술과 돈이 필요로 하는 교량이다. 먼저 교량의 크기에 따라 다르지만 여러개의 와이어로 꼬아 만든 직경 500mm 정도의 큰 와이어를 교량 길이에 맞게 제작할 수 있어야 하고, 큰 중량물을 들어 올릴 수 있는 크레인이 있어야 하고, 물론 육상에서 제작하여 해상으로 운반 이동해야 하는 많은 장비들이 필요했을 것이다.
또한 교량 전체의 하중과 이동하중을 받아 줄 주탑의 기초 구조물을 암반까지 내려가게 하기 위해서는 기초공법으로 우물통 공법 중에 케이슨 공법이 있는데 공기 케이슨 공법은 잠관 내 고압의 산소를 불어 넣어 그 공기압 때문에 지하수가 작업장 안으로 들어오지 않게 하기 위한 공법으로 가장 합리적인 공법이지만 작업자도 압이 높은 곳에서 일을 하다보니 직업병에 걸릴 수 있으며 고액의 시공비가 소요되기도 한다. 일반 케이슨 공법은 수중에서 잠수부를 동원하여 고압젯트 호스로 소방차보다 더 쎈 수압으로 지하 토질을 교란시키고 나서 크람쉘로 퍼 올리는 공법도 있지만 이것도 수심 30m까지가 한계다. 그 이상 내려 가려면 잠수부의 건강을 위해 추가 시설이 필요하다
이런 여러 공법이 동원 되어야 하는 것이 현수교 시공 방법인데 지금도 그 현장은 신공법의 집합장이였다, 당시 기술로는 생각은 할 수 있을지 몰라도 시공을 결심하기까지는 큰 용기와 주변 투자자들을 설득하는대 어려움이 많았을 것 같다
더욱 놀라게 하는 것은 규모에서 지금도 밀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당시의 의식수준이나 경제규모면에서 보면 틀림 없이 과다 설계였을 것이다. 지금도 불편하지 않을 것 같은 인도와 자전거 도로 그리고 좌우 3차선인 차도가 왕복 6차선이다. 어떻게 150년 전에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머리를 떠나지 않는다.
부산시에 부두 도로를 12차선으로 만들고 설계자와 감독이 과다 설계로 감사원의 징계를 먹은 일과 비교하면 웃음이 나온다.
다음이 150년 동안 유지보수를 잘 해서 관리해 왔다는 점이다. 주탑에 가보니 크랙이 하나도 없다. 차도는 갈 수 없어 모르지만 인도로 걸어 보니 흠 잡을데가 없다. 와이어만 지금의 현수교보다 많을 뿐 교량 형태는 양호했다. 그리고 그 곳에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걸어가고 있다는 점도 놀랍다. 당시 설계자는 "저녁 노을이 보이는 석양을 바라보며 조깅하는 맨해턴 시민을 생각했다." 고 한다. 좌뇌로 살아가는 토목 기술자에게도 이런 낭만적인 발상이 있었다는 것에 존경을 표한다.
지금도 설게자의 유지를 받들어 대부분 뉴욕에서의 마라톤은 이곳에서 출발하던가 아니면 이 다리를 통과해야 한다고 한다.
아버지의 유업으로 시작하여 설계와 시공을 맡은 아들 부부도 이제는 하늘나라로 갔겠지만 얼마나 흐믓해 할까 생각도 해 본다.
돌이켜 보면 우리나라처럼 관리 능력이 부족한 국민도 없다. 우린 교량이 영구구조물로 생각하고 유지 보수가 전무한 상태다.
성수대교가 그래서 내려 앉았고 보수보강을 해서 사용해야 기술이 발전하는데 당산대교를 때려 부쉬고 새로 만들었다.
우리는 구두를 사서 깨끗하게 신으려면 구두를 닦아야 하는데 2-3년을 닦아 신다보면 구두 값보다 닦는 비용이 더 많이 들어간다는 것을 우리는 모르고 사는 것 같다.
시대를 초월한 발상과 유지관리가 이렇게 잘하면 교량의 수명을 늘리며 당초 생각했던 것 보다 더 오래 사용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며, 지친 몸을 달래기 위해 Brooklyn Bridge 공원 옆에 있는 Ice Cream Factory에 들리니 수제 아이스크림 맛이 일품이다.
자원도 부족하고 경제 규모도 작아 아껴가며 잘 유지 해야 하는데 오늘도 우리는 때려 부시기만 하고 있다, 한 때는 그 무리에 휩쓸려 살아왔다는 것에 죄책감을 느낀다.
답답한 마음으로 선상 버스를 타고 손자를 태운 유모차를 밀며 집으로 돌아왔다.
Grand Central Teminal
그랜드 쎈트럴 터미널은 유모차를 밀고 집에서 10분 거리에 있다.
이틀 동안 비가 내려 꼼짝 못하고 집 안에서만 지내다 손자를 유모차에 태워 동쪽의 중심도시 Midtown East인 기차역을 찾은 것이다.
겉 모습이 유럽풍이다, 옆 건물은 건물을 부수고 다시 짓고 있다. 이곳은 공사를 하려면 사람이 다니는 인도 위로 알미늄 빔으로 만든 철제 시설을 해서 행인을 보호하는 것이 의무화 된 것 같다.
보수를 하던 신축을 하던 인도 곳곳에 행인의 안전을 위한 시설물이 설치 되었음을 볼 수가 있었다.
'폴링 인 러브' 영화에도 나오지만 수 많은 영화의 배경으로도 등장하는 이 역사는 1913년에 지었다가 1998년에 3000억을 들여 새로 지은 건물이다
현재 남아 있는 뉴욕 황금 시대의 마지막 건물이기도 한데 44개의 플랫폼과 67개의 선로가 지닌 엄청난 규모의 역이다.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이나 록펠러 센터가 현대적이고 세련된 웅장함이 느끼는 곳이라면 그랜드 센트럴 역은 그리스의 거대한 유적지를 걷고 있는 듯한 클래식하면서도 뉴욕다운 모습을 느끼게 하는 곳이다.
새로 지은 그랜드 센트럴 터미널은 단순한 기차역이 아니다. 특히 이곳 중앙 홀의 넓은 천장에 그려진 별자리는 신비함이 느껴질 정도이고 화강암과 대리석을 사용한 보자르 양식의 건축물인데 미국의 상징인 독수리 전령과 나그네의 수호신인 머큐리 조각상을 지나 내부로 들어가면 철도역과 일반가게와 식당이 자리를 하고 있다. 역내에는 상가를 만들어 다양한 콘셉의 가게들이 자리하고 있는데 특히 식당가는 일부러 찾아오는 곳이 아니고 정말 미식가들이 찾아오는 레스토랑이 터미날보다 더 매력을 갖게 하는지도 모른다.
왼쪽 테라스에는 농구 선수 출신인 마이클 조던이 운영하는 스테이크 하우스가 있고, 지하에는 굴과 해산물을 가지고 음식을 만드는 식당인데 30여가지 종류의 매뉴와 착한 가격으로 즐길 수 있다고 한다. 그 중에서도 오이스터 바는 센트럴 역내에서 제일 맛 있는 식당으로 유명하다, 역대 대통령들도 자주 찾았다는데 특히 트루먼과 케네디 대통령이 즐겨 찾았던 곳이라고 한다.
오이스터 바 문을 열고 오른쪽으로 들어가면 좀 더 저렴한 해산물을 맛 볼 수 있지만, 왼쪽 라인에는 격식 있는 레스토랑들로 음식값이 비싸다고 한다. 그러나 실내 공기가 환기가 안 되어 탁한 것이 흠이었다.
또한 이 건물의 독특한 것은 기둥에 얼굴을 맞대고 작은 소리로 속삭이면 대각선 방향에 있는 기둥에서 그 소리가 들린다고 한다,
이렇듯 맨해튼의 건물에는 시대의 역사가 스며 있고 존재 가치로 우리에게 영험을 주는 것 같다.
Central Park 가는 길
집에서 센트럴 파크까지 가는 길은 걸어서 40여분이 걸린다. 맨해튼에 와서 지금까지 가 본 곳 중 집에서 제일 먼 곳이다.
한국을 떠나기 전 지인들이 맨해튼에 가거든 센트럴 파크를 꼭 들려 보라고 한 말도 있고 해서 날씨 좋은 날을 택해 가기로 했다. 그동안 3일이나 비가 내려 겨울 옷을 입고 다닐 정도로 기온이 내려 갔는데, 오늘은 6월의 무더운 여름날처럼 느껴진다. 더구나 3일 동안 비가 내려 습도가 많은 장마철 같은 기후다. 가는 길에 먼저 록펠러 재단 건물이 보인다. 주변에 5개의 큰 건물이 더 있다고 한다. 한 때 미국에서 제일 부자로 꼽히기도 한 그가 이 곳에서 존경받는 것은 그가 사회에 기부를 많이 했다는 점이었다.
지금 UN본부가 자리하고 있는 땅도 그가 희사한 땅이라고 하는데, 우리나라 옛말에 '돈은 개처럼 벌고 쓰기는 정승처럼 쓰라' 고 한 말을 지구 반대쪽에 살고 있던 이분이 먼저 실천한 모양이다.
록펠러 재단에서 1930년도에 지은 건물로 록펠러 센터는 하나의 빌당이 아니라 19채의 건물로 이루어진 복합 건물이다. 건물에는 NBC방송국과 라디오시티 뮤직홀도 록펠러 센터에 들어 와 있으며, 센터의 가장 높은 곳에 GE빌딩 꼭데기에 '톱 오브 더 록' 전망대가 있다. 성탄절이나 추수감사절에는 트리 점등식으로도 유명하고 이런 전통은 1933부터 전해져 오고 있다고 한다. 록펠러 센터의 현지 발음은 '라커벨러'라고 하며 편의상 록펠러라고 한단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만남의 장소로 활용하고 이곳에는 식당과 각종 편의점 있으며 전반적으로 둘러 볼 수 있는 투어가 가능하다.
록펠러 센터의 역사와 건축. 그리고 미술에 대한 설명도 들을 수기 있었다.
전망대는 매일 10;00부터 입장이 가능하며 입장료는 25불이고 전체를 둘러 볼 수 있는 표를 구입하려면 48불이라 하니 작은 돈은 아니었다. 로비에 들려 맨해튼의 발전 과정을 그린 벽화를 감상하고 다음 견학지인 현 미국 대통령 소유의 '트럼프 타워'로 유모차를 몰았다.
화려한 5번가에 유난히 눈에 띄는 금빛 건물이 부동산 재벌이며 현 미국 대통령인 트럼프 대통령의 소유다.
빌딩의 중간부가 계단식으로 꺾이면서 독특한 느낌을 준다. 내부 인테리어도 호화스럽다고 한다. 한때 트럼프 부인이 백악관으로 들어가지 않으려고 한 이유 중 하나가 백악관이 이곳 트럼프 대통령이 살았던 집보다 불편하기 때문이라는 소문도 있었단다. 6층까지는 상점들이 있고 그 위로는 고급 아파트로 이루어져 있어 유명 인사들이 사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건물 앞 클래식한 금색 시계탑은 5번가의 아이콘이 되었다.
여기까지가 아들의 설명이다.
트럼프 건물 안으로 들어 갈 수가 없어서 바로 옆에 자리한 센트럴공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센트럴 공원은 거대한 도시 뉴욕을 든든히 지키고 있는 자연공원이다. 공원의 총면적이 3,5km2 크기로 여의도 크기의 1,2배 면적인데 누구에게나 다 무료로 개방되어 있다.
공원의 모습은 그 면적만큼이나 다양해서 깊은 숲 속 오솔길을 걷는 것 같다가도 광활한 잔디밭이 펼쳐지기도 하고, 기암 절벽이 나타나기도 하며, 숲 속 뒤 빌딩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자연 경관은 경이롭기까지 했다
자전거를 타는 사람, 달리기를 하고 있는 사람. 마차를 타고 가는 사람. 인력거에 몸을 실은 사람. 많은 사람들이 무리를 이루어 달려가고 있지만 공원 내에도 신호등이 있어 질서를 지키고 있었다.
잔듸 밭에 누워 있는 젊은이들. 옷을 벗고 썬팅을 하고 있는 사람들. 먹걸리를 입에 물고 이야기를 나누며 걷는 사람들. 모두가 번잡한 사회의 고민거리를 내려 놓고 대 자연 속에 동화되어 여유롭게 살아가는 모습이었다.
습기찬 더위에 나도 어려운데 유모차에서 세상을 바라보며 할아버지와 동행한 손자가 고생을 많이 했다
집으로 돌아 와 목욕을 하고 나시 스르르 잠이 몰려 온다.
Brodway에서 "오페라의 유령" 을
비는 추적추적 내리는데 강원이 엄마는 "오페라의 유령"을 보러 브로드워이를 가자고 한다. 내가 색소폰을 불고 전반적 예술을 섭렵하고 있어 관심이 많을 것으로 생각하고 일정을 잡았는지 모르지만 오페라는 본적이 없다. 다만 '불후의 명곡'에 출연하는 뮤지컬 배우들의 노래 부르는 모습에 반한 적은 있었지만 직접 극장을 찾아 오페라나 뮤지컬을 보러 온 일이 없으니 난감하다
더구나 3일 연속 비는 내리고, 며느리는 우리 부부가 체류하는 동안 스케줄을 짜고 그대로 행하고 있으니 따를 수밖에 없는 일이다
브로드웨이 42번가 있는 MAJESTIC 극장을 찾았다. 이곳에 공연되고 있는 "오페라의 유령"은 1910년도 소설로 발표 되었던 것을 1986년도에 오페라로 각색하여 초연한 작품인데 이를 보기 위해 입구에 서 있는 줄이 엄청 길다. 예약제인데도 이런가 싶다. 얼굴이 다른 인종들과 나이에 관계 없이 서 기다리고 있는 모습에서 이것이 브로드웨이구나 라는 생각에 행복해 보이고 여유가 있어 보인다.
인도에 줄이 몇번을 돌아 있어 사람들이 몰라서 본의 아니게 세치기를 하는 경우도 있지만 설명을 해 주면 공손하게 미안하다고 하면서 줄의 맨 끝으로 가고 있었다, 극장 측의 입장관리가 소홀하어 불편함을 느껴야 했다.
주말에는 하루에 2번 공연을 하고 주중에는 한번 한다는데 한번 공연에 2시간 반이 걸리고 객석은 600석이 매진이었다. 이곳 맨해튼 사람만 오는 것이 아니고 세계 어려 곳에서 오다 보니 비가 내려도 날씨가 추워도 문제가 되지 않고, 서 있는 얼굴 모습이 모두 다르다. 간간이 한국 사람의 얼굴도 보인다.
객석으로 들어 가기전에 입구에 기념품 파는 곳이 있는데 기념품을 사는 사람과 들어가는 사람이 서로 엉켜 아수라장이다.
이곳 사람들은 가다가 몸이 부딪치면 Sorry를 연발하는데, 다른 사람의 몸이 내 몸에 닿는 것을 싫어하는 것인지 모르지만 미안하다는 말에는 진정성은 없어 보였다.
조명이 어두운 객석을 안내원을 따라 가서 앉으니 무대를 보고 이층 중앙이다
이 건믈의 역사도 오래 된 건물이다. 건물을 지을 때는 투자 대비 손익을 보며 설계하고 시공하는 것인데, 이 건물을 지을 때는 그런 계산이 깔려 있지 않은가 보다. 먼저 이 건물의 건축 양식이.스페인의 모던 양식이라고 한다. 기교가 많고 분위기가 장중하다. 특히 객석의 의자 배열이 고전적이고 무대를 바라보는 객석 의자 구배가 급하다. 그러니 앞에 앉아 있는 사람의 뒷통수가 시선을 자극하지 않아 관람에 전혀 지장을 주지 않았다. 물론 극장 내부의 높이는 다른 건물에 비해 높았으니 공사비가 더 많이 투입 되었으리라.
공연이 시작되면 음악은 생음악으로 연주하는데 연주자의 절반은 무대 밑에 있고 절반만 노출 된 상태에서 지휘자의 지휘 아래 20인조 정도의 관현악단이 음악을 담당하고 있었다.
오페라 공연이 전개가 되면서 변하는 무대의 모습이 황홀하다 소품도 크고 무대 장식도 화려한 면도 있지만 그것이 가정집을 보는 것처럼 안정적이고 견고히게 보인다. 나오는 배우들의 의상 또한 화려하다. 빠르게 전개되는 상황에 빨려 들어가면서 내용도 모르는 내가 배우들이 말하는 대사도 알아 듣지도 못하지만 우리가 마당극을 보는 것처럼 주변 관객의 추임새 소리와 호응이 더욱 더 내 마음을 끌고 가는 것 같았다.
보고 나니 뭔지 모르지만 가면을 쓴 주인공의 사랑에 대한 갈망과 숨어서 자기 마음을 표현해야 하는 짝사랑의 절규가 절절한 음색과 음악으로 귀에 와 닿았다. 오페라를 보고 나오는 내내 잘 왔다는 기분을 이해하기 어렵지만 그래도 가슴은 뿌듯했다.
이것이 오페라고 뮤지컬이구나 라는 느낌이 오는 하루였다.
저녁 식사 예약이 여유가 있어 스퀘어가든에 전광판을 보러 갔다. 독도는 우리 땅이라는 광고를 했던 곳으로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곳이다. 비는 주춤하고 아직 어둠이 깔리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그 많은 전광판 중에서 삼성과 LG의 광고가 나오고 있었다.
며느리와 함께 집으로 돌아오는 우리 부부는 그저 감사한 마음뿐이다.
사실 뉴욕 맨해튼 브로드웨이에 와서 "오페라의 유령"을 보리라고는 상상도 못했기 때문이다.
저녁으로 찾은 스페인식의 생선 요리가 입에 착 달라 붙는다.
Roosevelt Island
Roosevelt Island는 맨해튼과 부르클린 사이에 이스트 리버가 흐르는데 두 고래사이에 붙어 사는 멸치처럼 작은 섬이 하나 있다. 그 섬이 바로 루스벨트 섬이다
맨해튼보다 땅 값이 싸서 아파트 가격도 저렴하고 경찰차와 병원차의 경적소리가 들리지 않아 조용하여 주거지역으로써는 최적인데 UN본부 직원들이 많이 살고 있다고 한다. 이렇듯 섬의 상부 쪽은 주거지역으로 활용하고 있고 섬의 하부에는 32대 미국대통령이었던 루스벨트 대통령의 이름으로 된 공원이 있다
그래서 이곳을 루스벨트 섬이라 하고 하부쪽을 루스벨트 파크라고 불리운다
루스벨트 파크는 별다른 시설은 없고 대통령의 흉상과 잔디로 깔려 있으며 시민들의 휴식공간으로 활용하고 있었다
집에서 센트럴 파크까지는 걸어가기가 다소 먼 거리지만 이곳 루스벨트 섬까지는 배로 두 정거장의 거리라서 2,7불이면 가니 찾아가기가 쉽다
오래 전에 이곳은 사람들의 접근이 어려워 1900년 초까지는 유행병 환자를 격리해서 수용하여 치료하던 병원이 있었으나 그 후 간호학교로 운영되다, 지금은 폐건물이 되어 말 없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루스벨트섬 서쪽 해안가는 약 30년생쯤 돼 보이는 벚꽃나무가 두 줄로 자리하고 있어 3-4월이면 벚꽃이 아름다울 것 같다. 이 벚꽃나무도 일본의 지원으로 심었다는데 UN본부를 뒷 배경으로 개화기에는 명소가 되었다.
이곳 섬과 맨해튼으로 가는 케이블카도 시내버스와 똑 같은 요금으로 이용료가 저렴하여 서민교통으로 이용하고 있었고,
UN본부을 내려다 보며 빌딩 숲으로 된 맨해튼 건물들을 바라보며 잔듸에 앉아 휴식을 취하기는 최적합한 장소였다
휴일에 가족 단위로 많이 찾아 온다니 행복한 사람들이다
뉴욕현대미술관 MoMa
오늘은 날씨가 좋다. 기온도 25도 바람도 살랑살랑 분다
맨해튼에 와서 머문 10일 중에 제일 좋은 날인 것 같다
분유와 젖병을 더 준비해서 미술관 나들이 준비하였다
이곳은 차를 타지 못하고 걸어서 찾아가는 길이 많으니 일찍 서둘러야했다
뉴욕현대 미술관은 트럼프 타워와 특히 록펠러 재단과 인접해 있다
뉴욕의 메트로 폴리탄 미술관이 고대로부터 동서고금에 망라하는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면, 뉴욕 맨해튼의 중심 53번가에 위치한 MoMa는 근현대 거장들의 작품이 총 망라되어 있는 미술관이다
건축물의 드로잉에서부터 회화, 조각, 사진 프린트, 일러스트북, 영화 미디어등을 포함하고 있는 소장품은 약 15만점에 이른다
도서관은 약 7만여 명의 파일에서부터, 정기간행물, 작가도록, 근 현대 역사와 관련된 책이 약 330 여만권에 이르는방대한 아카이브를 구축하고 있다. 내가 이렇게 글을 쓸 수 있는 것도 한국어로 준비된 안내서가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MoMa미술관 설립에 일등공신은 록펠러 가문이다
그 중 데이비드 록펠러의 어머니이자 이 집안 갑부 행렬의 시조 J,D록펠러의 며느리인 Abby록펠러이다
MoMa 미술관에는 2007년 5월 뉴욕 소더비 경매에서 7280만 달러 우리 돈으로 약 670억에 낙찰된 마크 크로크의 "화이트 센터"를 소장하고 있다
MoMa의 주옥같은 소장품 중에는 앙리 루소의 " 잠자는 집시", 마티스의 "춤", 모네의 "수련", 앤디위홀의 "켐벨 스프 깡통", 프리다 "칼리의 자화상", 달리의 "기억의 집",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 또 다량의 피카소 그림이 소장되어 있다
입장료는 25불 관객은 만원이다
석유로 번 돈을 이렇게 시민들에게 돌려준 록페러 가문 덕분에 많은 것을 볼 수가 있었다
나이도 어린 손자 돌보는 것이 어려운 일이지만, 손자 덕에 많은 것을 볼수가 있어 행복하다
High Line Park
오늘은 High Line Park를 가기 위해 집을 나선다
토요일 일요일 연휴로 들어가지만 이번 월요일이 미국 현충일이라서 황금같은 3일 연휴 시작이다
그래서 이번에는 아들 가족과 High Line Park 나들이를 같이하기로 한 것이다.
미국에 들어갈 때 아들과 약속은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는 애기를 보고 토요일과 일요일은 가까운 명소를 보기로 했었다.
특히 두번째 일요일부터는 2박 3일로 한국인이 운영하는 동부여행사를 통해 워싱턴과 나이아가라 폭포를 여행하는 것을 약속을 했는데 손자가 밖에 나가는 것을 좋아해서 비가 오지 않으면 하루에 3시간 정도 산책하기로 계획이 수정되어 맨해튼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고 있다
High Line Park 공원이 자리하고 있는 곳은 맨해튼의 서쪽 끝에 있다
눈 앞에 허드슨강이 흐르고 강 건너에는 한국교민이 많이 산다는 뉴저지주가 있다
애들 집이 동쪽 끝에 있으니 걸어서 가기는 거리가 멀어 택시를 불러 타고 가기로 했다
택시 종류도 많은가 보다. 노란색의 택시도 있지만 휴대폰으로만 부르는 표시 없는 택시도 있다. 요금에 차이도 있는가 보다
이곳 택시 요금은 한국처럼 시간과 거리를 병산하지만 거기에 출퇴근시간에는 할증이 붙어 요금이 더 비싸진다고 한다
High Line Park는 1934년도에 기차길이었으나 1980년에 선로가 폐쇄되었는데 폐쇠된 철도를 시민들의 후원과 협조로 공원으로 만들어 산책길을 만들었다고 한다.
길도 만들고 나무도 심어 그늘도 만들고 각종 식물도 심어 볼거리를 제공한다
특히 쉴 공간으로 밴취를 만들어 쉬어가게 만들고 2Km 정도의 공원에서 중간중간에 들어오고 나가는 진출입로를 만들었고 그와 연계해서 각종 사업이 활성화 되고 있었다
특히 한 건물에 자리한 전통시장 분위기가 나는 마켓에는 각종 상점이 있는데 그 중에서도 먹걸이 장소로 유명한 식당가가 있어서 발 지딜 틈이 없이 사람들이 몰려오고 있었다
우리도 점심시간이 되어 랍스터와 초밥을 구입하여 미국식으로 서서 먹는 체험도 해봤다
그곳에는 '먹바'라는 한글로 된 간판도 보였다
우리나라에서도 철로가 페선되어 방치된 경우가 많이 있는데 이런 모습으로 개발하여 지역의 수익 창출에 도움을 주었으면 하는 생각을 해본다
나이아가라폭포
맨해튼 32번가 한인타운을 떠나 허드슨 강을 터널로 통과하여 30여분을 달리니 1차 집결지인 뉴저지주 한양 마트에 닿았다
이곳에서 위싱톤을 경유하여 나이아가라까지 2박 3일동안 함께 할 관광객이 집결하여 떠난다. 타고 보니 목적지가 서로 다르다. 관광을 하면서 헤쳐 모여가 빈번히 이루어지고 있었다, 다녀오는 동안 버스가 다섯번 바뀌고, 가이드도 세번이나 바뀐다. 우리를 도와 줄 여행사는 동부여행사인데 미국 동부에서 한인을 상대로 하는 제일 큰 여행사라고 한다
소문에 비해 운영면에서는 소홀한 부분이 많은 것을 느꼈다. 정원 57명이 탈 수 있는 좌석버스에 54명이 탔다. 차내에 화장실까지 겸비하고 있는 롱바디의 대형 버스다.
시민권자 영주권자 그리고 각 지역에서 온 분도 많다. 한국 여행사에서 모집한 괸광객도 있었다. 관광객의 모집형태가 다양하고 여러 곳에서 모인 것 같은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대부분 가족과 함께하는 관광객인데 자녀들이 학교나 취업문제로 찾아 온 분들이 많았다. 관광객 중에는 88세된 할머니와 사돈관계인 85세된 할머니. 시어머니와 친정어머니를 모시고 온 부부가 이채로웠다. 효도관광을 하는 것 같아 보기가 좋았다. 여행내내 식사도 잘하시고 모일 때도 항상 일등이시다. 핼리곱터까지 타셨으니 두 분의 노익장에 모두 박수를 보냈다
맨해튼 뉴저지주 볼티모어 워싱톤 아니 국경을 넘은 캐나다까지 지형이 비슷하다. 경작지 보다는 임야가 더 많고, 경작지는 목장과 밀밭이 대부분이었지만, 그 분포가 임야가 대부분이니 마음 속 한편으로는 질투심이 일어났다.
땅은 보편적으로 비옥하지 않을 것 같았다. 산 능선 구배는 대부분 완만하게 형성되었지안 표토의 흙의 두께 즉 토심이 얇고 토심 아래는 크랙이 많은 단층지대로 형성되여 나무가 뿌리를 내릴 공간이 적어 큰 나무로 자랄수 있는 환경은 아니었다. 그러나 공기 하니만은 끝내준다
국경은 나이아가라 강을 경계로 미국과 캐나다로 구분이 된다. 나이아가라의 뜻은 원주민어로 천둥폭포라고 한다.
미국에서 캐나다로 들어가려면 미국 검문소를 통과지만 다리로 강을 건너면 캐나다 검문소가 또 있다. 자기 나라를 찾아 온 관광객인데 고압적이었다. 같은 일행 중 아르헨티나에서 온 교포가 무슨 영문인지 모르지만 입국 불허를 받아 미국으로 돌아갔다. 나이도 많은 분들이었는데...
나이아가라 폭포는 두군데에 있다. 미국과 캐나다에 있는데 모든 관광객은 캐나다 쪽으로 몰린다.
나이아가라 폭포 중에서 규모면에서 캐나다 쪽에 있는 폭포가 미국 내 있는 폭포보다는 견줄 수 없을만큼 볼거리가 많다
규모면에서 캐나다가 장대하다. 모든 관광시설이 캐나다쪽에 있다.
배를 타고 폭포 밑에까지 다가가 볼 수도 있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수직으로 내려가 폭포 배면에서 볼 수도 있으며, 지상에서도 장대한 모습을 볼수가 있다. 또 전망대에서 내려다 보는 광경이 황홀하다. 야간에 보면 더 경이로웠다, 이곳에 모인 관관객을 보니 어쩜 7-80%가 한국사람인 것 같다
인천공항에서 하루에 대한항공의 경우 500석 비행기가 두 대가 뉴욕으로 뜨고 아시아나에서도 한 편이 뜬다고 한다
해외 항공사의 운송 승객까지 합하면 하루에 약 2,000명 정도가 뉴욕으로 들어오니 보이는 것이 한국 사람일 수밖에 없다.
더구나 미국 전체로 들어오는 관광객 수를 집계하면 한국의 한 도시인구가 매일 들어온다는 이야기가 된다.
나이아가라 폭포는 인간이 접근할 수 없는 신비함이 있다. 글로 표현할 수 없는 한계도 느낀다. 와서 봐야만 느끼는 감정이 생긴다. 폭포 끝이 일년에 1m씩 뒤로 후퇴한다고 한다. 지금 수km가 후퇴해 왔으니 많은 시간이 흐르면 나이야가라 폭포가 미국 땅에 존재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나이아가라폭포의 관광 혜택을 받는 곳은 캐나다였다. 유흥시설, 먹거리, 면세품점들이 손님을 유혹하고 있었다
건강식품과 아이스와인이 유명하단다. 아이스와인은 포도 수확시기를 놓쳐 눈을 마친 후 따서 어쩔 수 없이 포도주를 만들었는데, 그 맛이 일품이라고 한다. 포도주 한병 가격이 60불이었다.
아름다운 자연경관과 포도주 그리고 스테이크나 연어와 함께하는 식사시간도 일품이다
전망대에는 식당이 있는데 앉아 있는 테이블이 회전을 한다. 전망대 힌바퀴를 도는데 한 시간 정도가 소요된다. 앉은 자리에서 식사를 주문하고 먹다보면, 처음 앉은 자리로 돌아오는데 그래서 식사시간이 한 시간이었다
두루 구경하고 음식도 섭렵하면서 버스에 오르니 뉴욕까지 7시간 30분이 걸린다고 한다. 다시 30분 버스를 타면 당초 출발했던 맨해튼 한인타운에 내리게 된다. 장거리 버스 여행에 힘이 들었지만 감동을 주는 아름다운 곳이었다
이곳을 보고 가면 젊어진다고 한국 사람들은 '나이아가라.'를 '나이야 가라'를 외치며 돌아오고 있었다.
UN본부를 가다
애들 집은 맨해튼 38ST에 살고, UN본부는 45ST에 있어 북쪽으로 걸어가면 10분 정도의 거리다.
유유히 흐르는 이스트 리버를 바라보며 우툭 솟은 유엔본부는 크게 나누어 세 건물로 분류가 된다.
높은 건물에 유엔본부 사무국이 있고, 그 옆에 있는 건물이 도서관이고, 낮은 층으로 된 건물에 6개의 회의장이 있는데, 그 중에서 우리가 뉴스 시간에 자주 보는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의 회의 장소가 가장 활발하게 운영이 되고 있고, 9월에 있는 각국 정상들의 기조연설이 열리는 총회의장이 있다.
오늘은 UN 본부를 방문해 보니 경제심의 회의가 비공개로 열리고 있었다
일단 유엔 본부에 들어가기가 쉽다는 것이 마음에 든다. 신분증만 있으면 어려움이 없이 들어간다. 그들이 주는 스티커를 가슴에 붙이면 어디든 찾아갈 수가 있다.
유엔본부 총회의장은 9월이 되면 각국 수뇌들이 모여 연설하는 곳으로 유명하다. 회원국들이 뽑기에 의해서 일등으로 뽑히면 단상에서 봐 우측 처음 자리에 앉고, 다음부터 알파벳 순서로 이어서 자리가 배정된다. TV에서 각국 원수들이 올라가 연설하는 단상앞에서 나도 폼을 잡아보았다.
작년 기조연설 때 참여한 문제인 대통령이 앉았던 자리에 앉아 보기도 했다.
다른 관광객은 지레 겁 먹고 단상에 올라가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데, 용기를 내 단상에 올라가 보니 어느 누구도 제지하지를 않는다
평화, 빈곤퇴치, 번영의 슬로건을 걸고 유엔본부가 창립 됐듯이 이런 정신으로 세계의 질서를 지키기 위해 협의 할 수 있는 자리 제공을 록펠러 재단에서 땅을 기부하였고, 각국에서 기부한 돈으로 유엔본부를 세울 수 있었다는데 세계가 평화를 갈구한 한마음이 된 결과가 아닌가 생각이 든다.
본부 내를 돌아다녀다 보니 각국에서 보내온 물품들이 진열되고 있었다. 우리나라에서는 금속활자가 보내어 전시하고 있었고, 기념품 가게에는 청자와 보석함이 진열되어 판매하고 있었다.
많은 관광객이 찾아오고 있었다. 인원이 많으면 상냥한 해설사가 나타나 설명을 해준다. 많은 것을 보고 느꼈다. 반기문 사무총장이 전직 총장 자격으로 벽에 큰 사진이 걸려 있다는 것에 한국사람으로 큰 긍지를 갖게 해 주었다.
북한에서 김영철이 뉴욕에 와 있다는데 북미 회담이 잘 되어 우리나라에도 밝은 소식이 전해지기를 기대해 본다.
오늘 하루 내가 세계평화를 걱정하는 사람이 되어 시간을 보낸 것 같다.
금융의 메카 월가
아침부터 이슬비가 내린다. 우산도 준비하고, 애기가 먹을 우유도 준비하고, 지저귀도 준비해서 집을 나섰다. 애들 집이 38번가이니 배를 타는 곳은 34번가 동쪽 끝에 있는 선착장이다. 오늘은 어느 섬에서 카니발이 열려 정기 운항하던 여객선들이 차출이 되어 배 운행 간격이 더 넓어졌다고 한다. 34번가 선착장에서 월가 선착장 까지는 15분 걸리는 직항로다.
월가선착장에 내리니 고층 건물들이 코 앞으로 다가와 숨이 막힌다.
사실 뉴욕주는 미국의 한 주에 불과하지만 우리나라 면적보다 1,45배나 크다. 뉴욕주 예산도 우리나라 예산의 80%정도를 쓰고 있으니 하나의 국가수준이다. 맨해튼의 행정구역 제도를 잘 몰라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중부 남부 북부 이런식으로 불려지고 있었다. 애들이 살고 있는 중부 맨해튼보다 건물의 크기와 높이에서 이곳 남부 맨해튼인 월가를 따를 수가 없을 것 같다.
그 큰 건물군 중에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건물도 자리하고 있었다. 트럼프 대통령 소유의 건물의 특징은 자기 이름을 따서 건물명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월가의 중심 증권거래소도 들려보고, 온 김에 주식투자의 비법을 듣고 가고 싶었는데 일요일이라서 객장에 들어갈 수가 없었다.
이곳은 무역회관이 9,11테러로 세계인이 보는 앞에서 비행기와 충돌하여 무너지는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줬던 곳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서 사망했는데, 이 곳을 9,11테러기념관으로 만들어 죽은 자들의 영혼을 달래주고 있었다. 기념관의 규모와 조형물의 디자인에 또 한번 충격을 받을 정도로 상징성이 뚜렸했다.
증권거래소 앞에는 월가의 상징인 황소상이 있고, 빈부격차의 위험성을 알리기 위해 황소 앞에 두 눈을 부릅 뜬 소녀가 항소의 행동을 노려보고 있었다
황소상 앞에 있는 소녀상을 시만단체에서 부의 편중을 감시한다는 명목으로 세웠다는데 이 소녀상을 철거해야 된다는 문제로 대립하고 있는 실정이지만 균형있는 미국인의 사고에서 생긴 발상이 아닌가 싶다. 이곳은 웰가를 보러 온 많은 관광객이 있지만 그 중에서 중국관광객은 그들만의 사고로 황소의 사타구니 밑에 쳐진 불을 붙잡고 사진 찍기를 좋아해서 황소의 불이 색이 바랠 정도였다.
오늘이 일요일인데도 관광객들이 많았다
월가를 돌아보고 자유의 여신상을 볼수 있는 여객선에 올랐다. 섬으로 가는 연락선인데 자유의 여신상 옆으로 가며 운임은 공짜인데 배가 엄청 커서 5-600명이 타도 배에 절반은 자리가 빈다. 오늘 따라 이슬비가 내려 배에서 사진을 찍어도 여신상은 선명하게 나오지를 않았다
섬에 도착하니 옆 부두에서는 돌아오는 배가 떠나려고 서두르고 있다. 배에서 내리자마자 돌아오는 배로 달리는 인파가 많다. 관광목적으로 자유여인상을 보기 위해 승선한 시람들이었다. 산책에서 머무는 시간이 깉다보니 손자가 응가를 해서 기저귀를 갈이 줄 장소를 찾다. 이내가 고생을 했다
다시 배를 바꿔 타고 집으로 돌아오니 다섯시간이나 걸렸다. 손자가 고생을 했다. 하지만 그동안 책에서나 TV화면에서나 볼 수 있던 장면을 직접 봤다는뎨 의미를 다하며 오늘 저녁은 치킨배달을 시켜 미국의 튀김 맛을 점검해 봐야겠다.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맨해튼 75번가에 있는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은 대영박물관이나 루불 박물관보다는 늦게 출발을 했지만 운영과정에서 국민들의 많은 기부금으로 돈을 주고 유물을 구입하게 되어 지금은 많은 소장품을 보유하게 되었다고 한다. 미국에서 기부문화가 활발하여 얻은 성과였다. 지금은 세계 4대박물관으로 그 위용을 과시하고 있다
박물관에서 유물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보유하고 있는 유물을 모으는 일과, 돈을 주고 구입하는 일. 그리고 이집트처럼 돈을 들여 자비부담으로 유적을 탐사하고 채굴하여 취득한 유물을 반반씩 나누어 가지는 방법으로 확보 되는 경우도 있으며, 마지막으로 미술관이 유명해질 것에 대비하여 당사국에서 기부하는 방법도 있다고 한다
그러나 나라별, 대륙별 유물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보유하고 있는 많은 유물들 중에 돈을 주고 구입한 것이 많다하니 안도되는 마음이 생긴다
세계 제1의 소장품을 자랑하는 대영박물관은 영국에서 출토된 유물은 하나도 없다. 모두가 전쟁으로 침략한 나라에서 빼앗아 온 유물들이다. 악질전인 것은 대문 기둥에서부터 미라까지 훔쳐왔다는 점이다. 그렇게 도둑넘으로 살아온 그들이 왜? '잰틀맨'이라고 했는지 평생동안 찾아도 해답이 없는 의문점이다.
전쟁으로 침략하여 정복한 나라에 가서도 그들은 예수님을 팔았다. 이리 탈을 감추고 양의 모습을 보이려한 파렴치한이었다
일본도 우리나라를 강점할 때 수탈해 간 국보급 문화재를 교또의 황실 지하 창고에 보관하고 있으니 우리 국민으로써도 속 터지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기부한 나라들 중에는 중국의 규모가 대단하다는 것을 느낀다. 국력과 비례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면적도 넓을 뿐더러 전시 유물도 다양하다. 그릇과 불교유물이 많이 차지하지만 다양성과 예슬성에 감탄을 한다. 이보다 규모는 작지만 일본관도 도자기류가 많았다. 우리나라는 면적도 협소하고, 유물도 많지 않은데 오늘따라 전시물 조정관계로 문을 닫고 있었다.
이 전시관은 국가에서 한 일도 아니고 개인기업인 삼성에서 자비로 만들어 기증했다고 한다. 규모는 작지만, 국가를 대신해서 착한 일도 하는데 우리민족은 대기업이라면 나뿐 사탄정도로 여기며 경끼를 일으키는 경향은 좋지 않은 국민성인 것 같다
초기 이 박물관에 한국관을 설치하는 것에 대해 교민들의 반대도 심했고, 기독교에서도 반대를 하였다고 한다. 속 좁은 마음에서 일거라고 생각이 든다
그 후 "신라황금왕국"이라는 제목으로 신라시대 유물전시화가 여기에서 열렸다. '금동여래상'이 첫 미국 나들이를 한 곳이다
박물관의 입장료 제도가 특이했다. 그동안은 기부형식으로 입장객 마음 먹은데로 내고 입장했는데, 2018 년 3월부터 성인 25달러. 65세 이상 노인에게는 17달러, 학생들에게는 15달러를 받고 입장시켰다
전체 유물을 자세히 보려면 약 3일 정도 걸린다는데, 입장료 티켓 한 장을 구입하면 3일동안 유효하다는 것이 특이했다.
그러나 중요한 유물은 나라별 언어로 들을 수 있는 오디오 해설이 있어 7달러를 주면 이용할 수 있는데 한국어로 된 오디오 해설도 있었다. 주요 유물을 오디오로 해설 관람하는데는 90분이 걸린다고 하니, 관람객에 대한 배려가 아닌가 생각된다
부족한 점이 있다면 입장객이 너무 많아 실내 공기가 탁해 아이나 노약자에게는 불편을 주는 것 같았고, 화장실이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찾아다니기가 어려움이 있었다. 유모차를 몰고 온 주부에게는 중간중간 수유할 수는 공간이 없어 불편함을 겪어야했다. 애기와 함께 오다보니 찡얼 대서 세 시간만 보고 돌아와야 했는데. 시간이 있으면 촘촘히 보면서 그 옛날 형님들의 생각과 지혜를 느껴보고 싶어졌다
맨해튼 풍경
맨해튼은 미 대륙의 동북쪽에 위치에 있으며 뉴욕주의 동쪽에 바다와 접해 있다. 위도상으로는 우리나라 평양과 비슷한 위치인 것 같은데 대서양의 해양성 기후를 접하기 때문에 서울과의 온도가 3-5도 차이 밖에 느끼지 못하는 살기 좋은 기후대인 것 같았다
그러나 날씨는 영국처럼 변덕이 심하여 어제는 비가 내려 추워서 겨울옷을 입고 다녔지만 오늘은 반팔에 여름옷을 입어야 했다.
미국 내에서도 인구밀도가 제일 높고 또한 소득도 높은 편이라고 한다. 세계를 움직이는 UN본부나 웰가등 경제적 중심지로 이스트 리버를 끼고 있으면서 세계 여러 민족이 유입되어 살고 있어 인종적 차별도 적고 질서도 잘 지키는 편이지만 불편한 점도 많은 것이 사실이었다.
영화에서도 접해 본 일이지만 이곳은 어디서나 경찰차와 소방차 그리고 병원 앰브런스의 경고음이 안정적인 삶의 리듬을 깨고 있었다. 우리가 살기 편한 주거소음 기준인 일반주거지역, 준주거지역, 학교, 병원의 경우 도로변을 기준으로 낮(06:00~22:00) 시간 평균 65dB이상, 밤(22:00~06:00) 시간 평균 55dB 이상인 경우 소음규제로 들어가는데. 이곳은 기준을 넘어 대형작업차량이 지날 때 내는 80db이 넘는 소음이라는 사실이었다. 유모차를 몰고 가다 이런 차를 만나 경적소리를 들으면 아이들의 놀라움은 심각할 정도였다
다소 기준을 낮춰도 될 법한데 낮과 밤도 구분 없이 하루 종일 울어대는 경적소리를 이해할 수가 없는 일이었다.
다음이 주거공간이 적다는 점이다. 많은 사람이 유입되어 살다보니 사람이 기거할 수 있는 공간이 적어 건물은 하늘 높은 줄을 모르고 올라가고 있고 임대비는 가히 살인적이다. 신입사원 월급이 원룸임대로 지불하고 나면 남는 것이 없을 정도였다.
존경스러운 것은 그나마 관리를 잘해서 오래된 건물이 많다는 점이었다. 100년 된 건물은 오래 된 건축물 축에 들어가지도 못하는 실정이다
그리고 직업군이 나라 별로 구분되어 발전해 온 것에도 흥미를 갖게 된다. 방글라데시나 인도등 아시아권 사람들은 보통 노점상을 많이 하고 유대인은 웰가를 움직이고 있었으며, 중남미 사람들은 도어맨과 택시기사를 많이 하는 것 같았다. 우리나라는 세탁소, 슈퍼, 식당 같은 업종에서 많이 종사하고 있었고 최근에는 커피숍에도 많이 진출한다고 한다.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 주변에 우리 한인 타운이 형성되어 있다는 것에 긍지도 느꼈다
유럽에 가서 길거리에서 한국어로 말하는 사람을 보면 반가워서 한국 사람이냐고 묻는 것이 다반사지만, 이곳은 관심이 없다. 한인마트에 들려보니 한국 사람이 너무 많아 한국에 대형마트에 온 것 같은 기분이다
물건 값도 종류 따라 가격이 차이가 있지만 10-15%정도 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다. 집에서 15분 거리에 있어 유모차를 몰고 가보니 물건이 많음을 느낄 수가 있었다. 집 옆 마트보다 저렴하고 한국식 물건도 많아서 잘 이용하는 것 같다. 과일 값은 한국보다 저렴했지만 채소류와 공산품은 다소 한국보다는 비싼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수박 한 통에 가격이 3000원 정도였다.
이곳에서도 서민들은 노점상을 많이 이용하고 있었다. 좌판에 과일이 대부분이지만 하루 8시간씩 3교대로 근무하며 장사하고 있었는데 그들의 셈법이 무척 빠름을 느꼈다. 계산기를 두드리는 것도 아닌데 계산이 바로 나오고, 차이가 발생하면 상품을 덜어내는 것이 하나도 부자연스럽지 않았다
도시의 도로망은 바둑판식으로 구분하여 형성되었는데 동서로 이어지는 도로를 AVENUE인데 약자 AVe이라 하고 남북으로 이어지는 도로를 Street로 하는데 약자로 ST로 구분 되어 부르고 있었다.
AVe는 동쪽 바다 쪽에서부터 1AVe부터 시작하여 서쪽으로 가면서 2, 3 ,4로 가는데 이곳의 차량소통은 대부분 교행으로 운행하고 있고 ST는 남쪽에서 북쪽으로 1ST 2, 3, 4로 올라가는 식인데 이곳에서 차량은 대로를 빼 놓고는 일방으로 주행하는 것 같았다. 단 골목마다 주행방향이 교대로 바뀌고 있었다. 그러니까 택시를 타고 기사에게 35ST 8AV 100으로 가자고 하면 문 앞에서 내려 주는 것이었다.
사거리 건널목 운영은 좀 어설펐다
빨강은 정지. 파랑은 주행이었지만, 건널목 전광판에는 파랑불일 때는 사람이 걷는 모습으로 나오고, 우리나라 노랑불 신호일 경우는 손바닥이 보이는 화면에 숫자가 변한다. 숫자가 다 없어지면 손바닥만 남는데 이때는 건널 수가 없다. 그러나 일방통행이 많기 때문에 차가 오지 않는 것이 확인되면 빨간불인데도 사람들이 건널목을 건너가고 있었다. 교통신호를 관리하고 있는 경찰이 있는데도 아무 제지가 없었다. 외국에서 온 사람만이 지키고 있었다.
자전거는 이곳에서 인도로 다니지 않고 차도로 달리고 있었으며, 사거리 건널목에서 인도에서 도로를 내려갈 때 경사로가 좁고, 도로에 포장을 거듭하다 보니 비가 올 때는 물이 고여 유모차나 장애인의 전동차가 진 출입하기는 어려움이 있을 것 같았다/ 도로 노면의 평탄성이나 인도의 요철 관리는 선진국서열과 비례하는 것인데 이곳 도로의 로면 상태는 우리보다 못한 것 같았다.
또한 청소부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것이 아닌가 할 정도로 거리에서 청소하는 사람을 볼 수가 없다. 구석진 곳이나 길거리에는 휴지가 날라 다니고 쓰레기가 쌓여 있어 냄새를 풍기며 불결했다, 정원은 자기의 얼굴이라고 해서 깔끔하게 정리하고 사는데 건물 앞에는 시에서 설치한 쓰래기 통이 있는데도 자기 건물 앞 청소는 하지 않는 것 같았다. 이것만 시정되면 깨끗한 도시가 될 법도 했다. 시내에는 차량이 많이 다니고 있는데도 미세먼지가 없는 공기는 부러울 정도다.
식당은 아이들을 대동하고 갈 때는 사전에 주인의 허락이 필요하다고 한다. 그만큼 테이블이 작고 의자도 제한적이다. 한인식당은 대부분 사절하고 현지 식당은 허락하는 곳이 많다고 했다. 그들이 앉는 테이블은 2인용이 표준이었다. 식당이 작아서 그런지 메뉴의 음식 종류가 적어서 그런지는 모르겠다.
음식 맛은 보편적으로 달고 짠 것이 대부분이었다. 이곳에서 간편한 피자나 맥도널드의 햄버그를 먹어 보기도 하고 스페인 풍의 식당도 가 봤는데 우리 입맛보다 훨씬 짰다. 이런 맛이 이곳 서민들의 건강을 위협하고 있다는 것을 보게 되었다. 허리는 이미 출장 가서 없고 가슴에는 수박 두 덩이를 달고 다니고, 궁둥이에는 큰 호박 두 덩어리를 매달고 다니는 체형으로 만들었는지 모르겠다.
술집은 저녁 7시 이전까지 마시는 것은 50% 할인을 해 준다니 애주가들이 좋아할 일일 것 같다. 주류 면세점에 가보니 우리나라 술중에 유일하게 진로소주가 7.99달러로 진열장에 자리하고 있어 반가웠다. 그들의 주량은 많지 않아 보였고 잔술로 먹는 것이 보였으며 내가 술을 좋아하지 않아 술집을 순례과정에서 빠지게 되었다. 그러나 캐나다산 언 포도로 만들었다는 아이스 와인 맛을 좀 색달랐다.
우리는 술 맛도 모르고 발렌타인 또는 고급 양주를 선호하지만 이곳의 삶에서는 주당들이 먹지 못하는 술이었다. 이들이 마시는 술은 70달러 정도하는 위스키이고 주로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이곳에 사는 뉴요커들은 차를 타지 않고 걷어 다니는 모습을 많이 볼 수가 있었으며 모자나 양산을 쓰지 않고, 선글라스에 수염을 기르고, 반팔 티에 반바지를 입고 다니고 있었다. 아직도 곳곳에서는 담배 피우는 남녀가 보였다.
특히 여자들의 모습은 얼굴에는 화장기가 보이지 않고, 옷도 평범한 옷이었다, 평범한 사람들이지만 실용적이고 남의 일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 모습이었으며, 이곳에서는 월급 받아 세금내고 생활하면 저축할 돈이 없이 빡빡한 삶이라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소득의 절반 정도가 세금으로 징수하고 의료보험이 정착이 안 되었으며 이곳 생리와 법 규정을 잘 활용해서 적응해야 살기가 편할 것 같은 마음이 들었다. 시민권자나 영주권자는 그래도 적응하기 쉽겠지만 불법 이민자는 발을 디딜 여유가 없어 보이고, 살인적인 집 값 문제가 풀지 못하는 숙제인 것 같았다.
이곳도 돈이 있으면 살기 좋은 곳이었다.
맨해튼의 서민
세계 어느 곳 도시보다 높은 빌딩 숲을 이루고 있는 곳이 맨해튼이다. 그곳에 세계에서 많은 사람들이 이민을 와서 살고 있고 오래 전부터 맨해튼 드림을 이루기 위해 살아가고 있는 곳이다. 그러다 보니 삶의 경쟁이 치열할 수 밖에 없고 직장 얻기도 어렵지만 먹고 살이아 하는 집 하나 구하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이번에는 모범적인 서민들이 사는 집을 주제로 소개를 하려 한다. 아들집은 맨해튼 38번가에 자리하고 있는데 전형적인 서민 아파트다. 옥상에 오르면 이스트 리버가 조금씩 보이기는 하지만 주변 빌딩 숲에 가리어 햇볕이 잘 들지 않을 정도로 160세대가 살고 있는 조금은 왜소하게 보이는 중소형의 아파트인 셈이다
1930년도에 지은 이 건물은 88년을 지탱해 왔는데 20년 밖에 안 된 대전 우리 집 아파트보다 관리상태가 더 양호한 편이다
전체 높이는 17층이고 한 층에 열 가구가 입주하여 살고 있다. 원룸과 투 룸이 조화롭게 이루어져 있고, 특징은 건물 내부에 마감인테리어가 흰 페인트로만 마감 했다는 점이다. 그러니 건물을 관리하기는 좋을 것 같다. 입주자가 벽에 못을 박는다던가, 훼손하는 행위는 할 수가 없다고 한다. 그만큼 관리에 신경을 쓰고 있다는 증거다. 입주자가 바뀔 때는 완전 정밀하게 점검하여 보수를 하고 도색을 해서 다음 입주자가 들어와 사는데 불편하지 않도록 한다고 한다. 며칠을 엘리베으트 타고 오르 내리면 발견한 것은 크랙이 한 곳 밖에 없다는 점이다.
건물이 오래 되면 건물 내벽에 들어 있는 수도 및 각종 배관이 부식되어 교쳬 했을 법도 한데 통로에만 조그만 배관이 보일 뿐이다
현관에는 도어맨이 있어 건물에 출입하는 사람들을 통제하고 있었으며 관리요원 7명이 하루 8시간 근무로 3교대 하면서 전체 건물을 관리 유지하고 있었다. 지하에는 분리수거 집하장이 있고, 옆에는 입주자 건강을 위해서 무료로 사용할 할 수 있는 헬스장이 있었다. 작은 아파트라서 공간이 좁아서인지 공동 빨레방을 운영하고 있었다. 대형 세탁기와 건조기가 두 대씩 있는데 일주일에 한번쯤 빨래를 하는데 4,000원 정도 사용료가 발생한다고 한다.
엘레베이트는 두 개가 운영되고 있고, 옥상에는 전망대와 휴식처가 있는데 특별한 것은 파티를 할 수 있는 공간이 있다는 점이다. 음식을 만들 수 있는 공간과 의자와 테이블이 있고 10여명이 충분히 이용할 수 있는 공간인데 인테리어도 잘 되어 분위기가 좋다. 이곳을 이용할 때는 사용료를 지불해야 한다고 한다
이 건물에누 주차공간이 없다. 그래서 이곳에서는 차를 소유하기가 어려웠다. 사설 주차장에서는 한시간에 35불 정도 주차비를 받으니 차량을 유지하기가 뉴욕에서는 어렵다고 한다. 이렇게 서민들이 살고 있는 집이지만 이곳 임대료는 비쌌다
인접한 허드슨 강 건너 뉴저지주에 방 6개 달린 저택과 맞 먹는 임대료이니 이곳 맨해턴에 살고 있는 서민들에게는 허리가 휘는 동네였다
맨해턴은
맨해턴은 이상적인 도시였지만 무릉도원은 아니었다. 많은 나라 사람들이 꿈을 가지고 모여 들었지만 살아가기에는 힘이 드는 도시였다. 초 현실적인 사고와 오랜 역사, 그리고 기본에 충실한 세월에 흐름이 좋아 보이기도 한 도시였다.
나에게 손해가 오지 않는한 남의 일에 관심이 없었고 기본의 노동력이 상존하는 곳이었다. 열심히 벌어 세금을 많이 내고 노후가 보장되는 나라였지만 열심히 번돈 저축할 여력이 없었으며 의료보험이 국가 시책으로 정착이 안 되어 엄청난 비용을 스스로 해결하던가 아니면 개인적 보험에 의존해야 하는 사회 구조였다. 일부 선택 받은 사람들이 시민을 상대로 많은 돈을 벌어 기부하는 모습을 보이지만 빈부의 격차는 더 벌어지고 서민은 항상 힘이 겹도록 살아야 하는 도시였다.
정당한 노동력이 요구되고 법에 의해 삶이 유지되는 도시. 100년 된 건물이 오랜 된 축에 들어가지 않으며 선진사고로 커 온 도시여서 그들이 세계를 리드하는 것은 당연한 일로 보이기도 하였다.
살기 편하지만 적응하며 살기에는 만만한 도시는 아닌 것 같았다.
그곳에서 아들과 손자가 한국인으로써 한국 정신에 맨해튼 정신을 접목하며 살다 돌아오기를 기대하는 도시였다.
농가주택 .시골집 수리하기.전원주택,통나무 주택,목조주택,주말주택,컨테이너 하우스, 아동식주택.세컨드 하우스.황토주택,
귀농,귀촌, 강원도 부동산, 횡성 부동산의 모든것이 산골 전원주택 이야기에 다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