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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으로 되는 후사
롬 4:9-17
9 그런즉 이 복이 할례자에게냐 혹은 무할례자에게도냐 무릇 우리가 말하기를 아브라함에게는 그 믿음이 의로 여겨졌다 하노라
10 그런즉 그것이 어떻게 여겨졌느냐 할례시냐 무할례시냐 할례시가 아니요 무할례시니라
11 그가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무할례시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이니 이는 무할례자로서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어 그들도 의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12 또한 할례자의 조상이 되었나니 곧 할례 받을 자에게뿐 아니라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무할례시에 가졌던 믿음의 자취를 따르는 자들에게도 그러하니라
13 아브라함이나 그 후손에게 세상의 상속자가 되리라고 하신 언약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오직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
14 만일 율법에 속한 자들이 상속자이면 믿음은 헛것이 되고 약속은 파기되었느니라
15 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하나니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법도 없느니라
16 그러므로 상속자가 되는 그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 이는 그 약속을 그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 하심이라 율법에 속한 자에게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에게도 그러하니 아브라함은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
17 기록된 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가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시니라
롬 4:9-17 / 그러면 이제 이 복은 그리스도를 믿으면서 동시에 유대교의 율법을 지키는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것인지, 아니면 유대교의 규칙은 지키지 않더라도 그리스도만 믿으면 주어지는 것인지 의문이 생길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경우는 어떠했습니까? 우리는 그가 믿음을 통해서 이런 복을 받은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면 그것은 다만 믿음으로 얻은 것입니까? 아니면 유대교의 규례도 지켰기 때문이었습니까? 10) 여기에 답하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께서 언제 아브라함에게 이 복을 베푸셨느냐 하는 질문부터 대답해야 하겠습니다. 그것은 그가 유대인이 되기 전, 곧 유대인으로 인정받기 위한 의식인 할례를 받기 전의 일이었습니다. 11)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은 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믿음을 보시고 그에게 복을 내리겠다고 약속하신 때보다 훨씬 뒤의 일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할례를 받기 전부터 이미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런 까닭에 하나님께서는 그를 받아들이셔서 하나님 보시기에 올바르고 선한 사람이라고 선언해 주셨습니다. 할례의식은 그 확인의 표였습니다. 말하자면 아브라함은 유대교의 율법을 지키지 않아도 믿음으로써 구원받는 사람들의 조상인 셈입니다. 믿음의 조상이라는 말이지요.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규례를 지키지 않는 사람들도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는 인정을 받게 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12) 동시에 아브라함은 할례받은 유대인의 믿음의 조상이기도 합니다. 그들은 아브라함의 경우를 통해 오직 할례만이 구원의 길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아브라함이 할례받기 전에 가졌던 것과 같은 믿음을 본받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13) [믿음으로 이루어진 약속]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온 땅을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주겠다고 하신 약속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율법을 지켰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약속을 반드시 지키는 분이라는 것을 아브라함이 믿었기 때문에 주어졌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14) 그런데도 여러분이 하나님의 복은 율법을 지키는 사람에게만 내려지는 것이라고 주장한다면 `믿음을 가진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은 의미가 없다. 믿음이란 어리석은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이나 같습니다. 15) 그러나 실상은 어떻습니까? 우리가 아무리 하나님의 율법을 지켜서 하나님의 복과 구원을 받으려고 노력한다 해도 우리는 언제나 그의 진노를 사는 결과를 가져올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모든 율법을 다 지킨다는 것은 불가능하니 말입니다. 따라서 율법을 어기지 않는 한가지 방법은 어길 수밖에 없는 율법을 갖지 않는 방법뿐입니다. 16)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믿음을 보시고 값없이 주는 선물인 복을 베풀어 주십니다. 만일 우리가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을 가지고 있기만 하면 유대인의 관습을 따르느냐 따르지 않느냐에 구애됨이 없이 하나님의 복을 확실하게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같이 아브라함은 신앙적인 면에서 우리 모두의 조상입니다. 17) 성경에 하나님께서 ㄱ) `아브라함을 많은 무리의 조상이 되게 하셨다'는 것은 바로 이 일을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느 나라 사람이든지 아브라함같이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사람을 다 받아들이십니다. 이 약속은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고 장래에 될 일을 이미 지나간 과거의 일처럼 확실성을 가지고 말씀하시는 하나님께서 친히 하신 것입니다. (ㄱ. 70인역 창17:5)
바울은 아브라함이 의롭다 함을 얻은 때와 할례를 받은 시기를 통해 아브라함의 의로움은 율법이 아닌 믿음으로 되어진 것임을 증거합니다. 아브라함의 후손들에게 상속자가 되는 언약을 주셨습니다. 여기서 후손은 육적인 의미가 아닌 영적인 의미로서 믿음으로 되는 후손들을 일컫습니다.
할례에 의함인가 믿음에 의함인가(9-12) 바울은 아브라함의 예를 통해 오직 믿음으로 얻는 구원을 더욱 분명하게 합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후손이기 때문에 구원을 받는다고 여겼습니다. 할례는 그들이 진정한 유대인이라는 증거이며 이방인도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반드시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았을 때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을 때의 시간적 순서를 통해 그들의 주장이 옳지 않음을 입증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의롭다고 선언한 때는 아브라함의 85세 때입니다(창 15:6). 반면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은 것은 99세 때의 일입니다(창 17:11). 할례가 칭의보다 14년 늦은 것입니다. 따라서 아브라함의 의롭다함은 할례 때문이 아닌 그의 믿음 때문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믿음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흔히 믿음을 믿기지 않는 것을 믿으려하는 자기 최면 정도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적 믿음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를 위하여 행하신 일들을 인격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믿음은 내가 믿고자 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하심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누가 상속자인가(13-17)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후손들에게는 ‘세상의 상속자’가 되는 언약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유대인들의 주장처럼 육신의 후손을 일컫는 것이 아니요, 영적인 의미의 후손을 일컫습니다. 특히 그들이 가지고 있던 율법을 지킴으로 언약의 상속자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은 14절 말씀처럼 두 가지 문제점을 일으킵니다. 믿음은 헛것이 되며, 약속은 파기되는 것입니다. 율법에 속한 유대인 뿐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이방인까지도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은 은혜에 의해 아브라함의 후손이자 언약의 상속자가 됩니다(16). 17절이 이를 입증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유대인들의 조상만이 아닌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우신 것입니다.
적용: 당신은 믿음이 아닌 그 어떤 것으로 구원을 얻으려는 생각은 없습니까? 오히려 믿음조차도 자신의 의로 여기는 경향은 없습니까? 오직 은혜만이 우리를 구원함을 다시 고백하며 나눕시다.
어느 랍비가 죽어서 하나님 앞에 갔습니다. “하나님, 나는 우리 민족이 해방자 모세처럼 살지도 못했고, 예언자 엘리야처럼 살지도 못했습니다.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모세처럼 살지 못하고, 엘리야처럼 살지 못한 것이 잘못이 아니라, 너 자신을 살지 못한 것이 잘못이다.” 우리 모두는 유일무이하며 유례가 없는 하나님의 최고의 예술작품입니다. 꽃은 꽃이 됨으로써, 나무는 나무가 됨으로써, 그리고 나는 내가 됨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호크마 주석
=====4:9
할례자에게뇨 혹 무할례자에게도뇨 - 바울은 죄인을 의인으로 간주하는 하나님의 축복의 범위에 대해서 진술하고 있다. 지금 예로 들은 아브라함은 유대인의 조상이므로 무할례자된 이방인이 이 축복에서 제외될 수 있다는 문제가 유대인에 의해 제기될 수 있다. 그래서 행위에 관계없이 주어지는 하나님의 축복이 할례자인 유대인에게만 주어지는 것인가 아니면 이방인에게도 동등하게 주어지는 것인가에 대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바울은 본절의 질문을 제기했다. 할례는 율법과 더불어 유대인들에게 있어 하나님의 선민(選民)임을 보증해 주는 가장 중요한 요소였다. 그래서 바울은 본절에서 할례의 문제를 언급한 것이다. 바울 논지의 핵심은 비록 할례가 유대인들에게 중요시되고 있었지만 하나님께서 죄인들에게 베푸시는 칭의의 축복에 할례가 전혀 중요하게 작용하지 않는다는 점이다(J. Murray). 바울은 이러한 논지를 본절의 질문을 제기함으로 더욱 확고히 하고자 했던 것이다.
아브라함에게는 그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 - 3절에서 언급했던 구절이 다시 반복되고 있다. 그러나 이 구절은 3절에서와 같이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을 재차 강조하기 위한 구절이 아니다. 이는 아브라함의 믿음이 의로 여겨지게 되었던 시점으로 화제를 전환하기 위하여 반복되는 것이다.
=====4:10
이를 어떻게 여기셨느뇨 - 이 구절의 헬라어 본문은 '포스 엘로기스 데'( )인데, 이를 직역하면 '그것이 어떻게 여겨졌느뇨 ?'가 된다. 다시 말해 '어떻게 해서 그의 믿음이 의로 여겨졌느뇨 ?'라는 질문이 된다. 그런데 이에 대한 대답이 의롭다고 여겨지게 된 시점(時點)에 관한 것이므로 '어떻게'보다는 '언제'라고 번역하는 편이 적절하다.
할례 시가 아니라 무할례 시니라 - 아브라함의 믿음이 의롭다고 여겨진 것은 할례 의식을 한 때로부터 20여년 전이었다(창 15:6;17:23, 24). 이 대답은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 할례와 전혀 상관이 없다는 바울의 논리를 뒷받침해 주는 결정적인 단서이다. 행 15:1에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는 말씀이 언급되어 있듯이 초대 교회 시대에 유대인들은 예수를 믿으면서도 자기들이 받은 바 우선권을 포기하지 않았다. 또한 예로 베드로는 이방인들(무할례자들)과 함께 애찬을 나누다가 할례자들이 들어오자 그들을 두려워하여 슬그머니 그 자리를 빠져나갔다(갈 2:12). 이처럼 초대 교회 당시는 할례자와 무할례자에 대하여 구별하는 관습이 남아 있었고, 그로 인해 복음의 본질이 변질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바울이 아브라함을 예로 들어 하나님의 의(義)의 전가(轉嫁)가 보편성을 지닌다는 점을 역설하고 있는 것은 그 당시 팽배되어 있는 그러한 분위기에 대하여 명백한 복음적인 해결책을 보여 주기 위함이었다.
=====4:11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 본절에서 바울은 그동안 문제시되었던 '할례'의 의미에 대해서 진술한다. 유대인들은 할례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정되는 유일한 증표로 믿고 있었으나, 바울은 그들의 신학이 잘못되었음을 보여 주고 있다. 창17:10, 11에는 할례가 '언약의 표징'( , 세메이온 디아데케스)으로 언급되어 있다. '언약의 표징'이라는 것은 언약을 맺은 것에 대한 증거로 나타내 보이는 표시(sign)이다. 그리고 구약 시대에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간에 언약을 맺는 것은 쌍무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인 것이었다(Robertson). 그러면서도 그 언약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 대하여 취하신 은혜와 사랑의 증표이며 약속이었다. 따라서 할례가 '언약의 표징'이라는 사실은 하나님께서 할례 이전에 베푸신 은혜와 사랑에 대한 증거이며, 앞으로도 그렇게 하실 것에 대한 약속이라는 의미를 함축한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와 같이 할례에 내포된 은혜의 비밀을 간과하고 겉모양만 취하여 그것이 매우 귀중한 것처럼 자랑하였다.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이니 - '인'( , 스프라기스)은 신약에서 책을 봉(封)하거나(계 5:1), 도장 찍는 것과 같은 증표(딤후 2:19;계 7:2) 등의 의미로 사용되었으며 주로 모든 일을 결론짓는 마무리를 나타낼 때나 또한 어떠한 것을 그대로 보존한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예수의 무덤을 봉인하였다는 것도 그의 죽음이 확인되었다는 뜻이다. 예수의 부활이 확실한 것은 세상이 인봉을 통하여 그의 죽음을 확고하게 증명했기 때문이다(마 27:65). 이와 같이 인(印)이라는 것은 어떤 사건에 대한 진실성을 최종적으로 확인하는 수단으로 쓰였다. 특히 본절에서는 이미 무할례시의 믿음으로 의롭게 된 사실을 확인하는 외적 보증의 의미로 이 용어가 쓰여졌다. 다시 말해서 할례는 의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며 또한 의의 수단도 아니며 단지 이미 의롭게 된 것을 입증하는 표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늘날 성도들에게 있어서 구원의 표적은 성령의 오심(엡 1:13;4:30)과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또한 함께 살아났다는 사실을 예표하는 세례라고 할 수 있다.
무할례자로서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어 - 바르트(K. Barth)는 본절을 주석하면서 원(元)역사계와 역사계를 구분하여 설명하고자 시도했다. 즉 아브라함이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원역사적인 사실의 믿음의 의가 역사계에 나타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에게 있어서 역사적인 사건은 원역사적인 것 속에 파묻히게 된다. 이러한 주장은 암시적으로 율법 폐기론을 지지하는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율법은 원역사적인 하나님의 의가 현 역사 속에서 단순히 나타나진 것에 불과할 뿐 그 이상의 의미도 갖지 않는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울은 율법이 의의 전달 내지 계시로서 충분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강조했다(3:31). 성도의 신앙은 히 11:1에 언급된 바와 같이 원역사적인 것과 역사적인 실재가 동시적으로 의미를 지닐 때 올바른 길로 나아가게 된다. 예수의 천국 비유에서와 같이 하나님의 나라도 원역사적인 실재임과 동시에 현 역사적인 실재이다(Ridderbos). 할례는 무할례시에 주어진 믿음의 의(원역사적인 것)가 현 역사 속에서 공표되는 의미를 지닌다. 그런 연고로 구약 시대에는 할례가 의미있는 의식이었다. 그러나 신약 시대에는 그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으므로 그 표는 단지 그리스도를 부각시키고 확증시켜 주는 역할을 담당할 뿐이다. 따라서 할례 자체가 전혀 필요없는 것이 아니라 율법과 같이 그리스도 중심의 예언적 사건으로 그 의미는 항상 남아 있게 된다.
=====4:12
또한 할례자의 조상이 되었나니 - 아브라함이 할례자의 조상이 될 수 있는 것은 (1) 그가 처음으로 할례를 받아 혈통으로 자기에게서 난 자들에게 그 할례 의식을 전했으며, (2) 그 할례를 전할 때 할례만이 아니라 자기가 무할례시에 받았던 '믿음의 의'에 대한 것도 동시에 전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11절만 떼어서 생각하면 아브라함은 단지 무할례자의 조상이 되어 할례받은 유대인의 조상은 되지 않는다는 오해가 발생될 수 있다. 그래서 본절에서 바울은 아브라함이 할례자의 조상도 되는 이유를 설명하게 된 것이다.
무할례 시에 가졌던 - 본절에서는 '할례받을 자들'과 '믿음의 자취를 좇는 자들'을 동일 선상에 놓고 있다. 할례받은 유대인이라 할지라도 믿음없는 자는 아브라함의 후사가 될 수 없듯이 아브라함의 믿음의 자취를 따르지 않는 이방인 무할례자들도 당연히 아브라함의 후사가 될 수 없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무할례 시'가 아니라 아브라함이 가졌던 '믿음의 인'이다. 따라서 무할례든 할례이든 그것이 결코 구원에 있어서 유리하거나 불리한 조건이 될 수 없다. 우리가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1)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았다는 사실이며 (2) 또한 그 할례가 믿음으로 받았던 의를 '인치는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이다. 이 두 가지는 유대인이나 이방인 모두에게 중요하게 받아들여져야 한다(J. Murray). 바울이 할례 자체를 일방적으로 매도하지 않았다는 것은 디모데에게 할례를 행한 사실속에 잘 나타나며(행 16:3) 또한 할례를 믿음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은 디도에게 할례를 행하지 아니한 사건 속에 잘 나타난다(갈 2:3).
믿음의 자취를 좇는 자들 - 이 부류에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의 구별없이 다 포함된다. '자취'에 해당하는 헬라어 '이크네신'( )은 신약 성경에서 '보조'(步調;고후 12:18) 또는 '본이 될 만한 모범'(벧전 2:21) 등을 뜻하는 말로 사용되었으며 갈라디아서에서는 예수의 '흔적'이라는 말로 번역되기도 하였다(갈 6:17). 본절에서 '믿음의 자취'는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살았던 삶의 흔적을 의미한다. 예수께서 유대인들에게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아브라함의 행사를 할 것이어늘"(요 8:39)이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는데, 여기서 '아브라함의 행사를 하라'는 것은 '아브라함이 걸었던 그 신앙의 노선을 따라가라'는 의미이다. 이 가르침은 혈통상 아브라함의 자손이 됨을 시사한다. 한편 '좇는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스토이케오'( )는 '대오(隊伍)를 이루어' 또는 '줄을 맞추어 행진한다'라는 뜻을 가진 군사 용어로서 '일관성 있는 행함'의 의미로 번역되었다(갈 5:25;빌 3:16). 여기서는 아브라함의 발자취를 따르는 대열에서 낙오되지 않고 일관성 있게 전진하는 것을 의미한다.
=====4:13
세상의 후사가 되리라고 하신 언약 - 이 약속은 창 17:4-8에 언급되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으신 언약은 율법보다 430년 앞서 주어졌으며, 후에 생긴 율법이 이미 주어진 언약을 취소할 수 없었다(갈 3:17).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은 율법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에 따라 된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약속은 율법에 선행하며, 약속의 원리를 따르는 자는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이 약속의 원리는 바울이 본절에서 진술하고 있는 바대로 '믿음의 의'뿐이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후에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던 것이지 율법에 근거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편 '세상의 후사'란 일차적으로 창 17:8의 말씀대로 가나안 땅을 그의 후손이 유업으로 받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보다 포괄적인 의미로는 창 17:4에 언급된 대로 아브라함은 '열국의 아비'이므로, 그의 신앙의 자취를 좇는 모든 민족이 후사가 되며 유업을 이을 자가 된다(갈 3:29). 따라서 본절은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인하여 모든 땅의 족속들이 복을 받으리라는 보증'(Hendriksen)과 관련된 것임이 분명하다.
=====4:14
속된 자들'을 의미하며 바울의 또다른 표현에 의하면 '율법의 종노릇하는 자들'로서 종의 멍에를 멘 자들을 뜻한다. 이들은 하나님의 약속도 오직 율법의 행위를 통해서만 성취된다고 믿고 있는 자들이다. 신약 시대에 이르러 펠라기우스(Pelagius)와 그의 추종자들, 그리고 로마 카톨릭 교회(Roman Chatholic Church)는 하나님의 약속이 선행을 통해서 성취된다고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헛되이 만들었다. 이런 자들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질시키는 자들이며(갈 1:7), 이렇게 전하는 자들에게 바울은 저주를 선언하고 있다(갈 1:8, 9). 만일...
후사이면 - '후사'를 뜻하는 '클레로노모스'( )는 '상속자'라는 의미로서 아브라함에게 약속되어진 것을 물려받을 자를 뜻한다. 구약의 개념으로 상속자가 얻을 것은 (1) 약속의 땅 가나안(창 12:7;13:14, 15), (2) 믿음으로 자손된 이방인들을 포함하는 후손을 얻게 될 하나님의 축복, (3) 한 후손 메시야에 의한 세계 통치를 의미한다. 만일 율법에 속한 자들이 위에 열거한 세 가지 조건의 상속자라면 믿음은 의미를 잃게 되고 약속된 언약은 가치없는 것이 되고 말 것이다. 실제로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이 자기들의 아버지이기 때문에 자기들이 세상의 상속자라는 주장을 한다(요 8:39). 한편 본절에 대하여 바울은 율법과 믿음의 대립적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먼저 약속으로 시작된 구원의 역사가 믿음에 의하여 성취되었다는 것을 증명할 것인데 유대인들은 이를 두고 바울이 시작과 성취 중간에 들어온 율법의 무용성(無用性)을 말한 것이라고 한다(5:20). 그러나 바울이 의도한 요점은 율법 무용론이 아니다. 다만 바울이 말한 것은 중간에 끼어 들어온 율법이 앞서 있었던 약속을 변경시킬 수 없으며 율법에 의하여 후사가 결정될 수 없다는 것이다.
믿음은 헛것이 되고 약속은 폐하여졌느니라 - '헛것이 되고'( , 케케노타이)라는 것은 무가치한 것이 되었다는 의미보다는 원문상 '그 속의 내용이 없어졌다'라는 뜻에 더 가깝다. 다시 말해서 믿음이라는 것이 무가치한 것이 되었다는 의미보다는 믿음이 포함하고 있는 내용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허망한 것이 되고 말 것이라는 의미이다. 만약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무 내용 없는 것으로 변해 버린다면 약속도 더 이상 설 자리를 잃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와 연결되지 않는 약속은 효력을 발생할 수 없게 될 것이며( , 카테르게타이, '폐하여졌다') 또한 법적 신실성을 요구할 수 있는 권리를 잃게 될 것이다. 만약 율법의 행위로 약속이 보증된다면 율법 이전에 이미 보증받았던 아브라함이 약속은 무가치한 것이 되고 그 약속에 의하여 성취된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그 십자가를 좇는 모든 믿음은 오히려 율법의 종이 되고 말 것이다. 또한 율법으로만 약속이 보증되고 의롭다 여김을 받을 수 있다면 이스라엘의 신앙은 여타의 윤리 종교와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4:15
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하나니 - 율법은 행위의 완전함을 요구한다. 그러나 인간은 완전해질 수 없는 죄인에 불과하다. 이에 대한 율법은 인간을 정죄하고 저주를 선포한다(신 28:58ff.). 따라서 인간 편에서 볼 때 율법은 구원을 위한 것이 아니라 정죄와 저주의 근거로서의 기능만을 가진다. 그래서 바울은 율법을 받은 모세의 직분을 '정죄(定罪)의 직분'(고후 3:9)이라고 진술했으며,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심은 '율법의 저주'를 담당한 것이라고 선포했다(갈 3:13). 이런 의미에서 율법은 인간들을 위해 의를 이룰 수 없으며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시킬 수 없다.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함도 없느니라 - 쉬운 예로 어느 나라든지 그 나라의 법이 없다면 그 나라에 사는 백성은 아무런 범죄자가 되지 않는다. 오직 범죄자가 범죄자로 성립될 수 있는 것은 그 나라의 법률에 따라서만 가능하다. 이처럼 법률이 있음으로써 범법자는 죄인으로 정죄받고 심판을 받는다. 율법이 주어지기 전에 살았던 아브라함은 율법에 따른 정죄를 받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믿음의 원리에 따라서만 살았다. 또한 노아는 아브라함처럼 할례에 대한 규례도 받지 않고 살았던 사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의인'으로 인정되었다(창 6:9). 그가 의인으로 또한 완전한 자로 칭함을 받은 것은 율법적 판단에 따른 것이 아니었음은 분명하다. 그리고 그 당시 사람들이 하나님께 정죄를 받은 것(창 6:5)은 율법적 판단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불신앙 때문이었다. 그런 이유로 율법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의 '믿음'이 중요한 것이다.
=====4:16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 - '후사가 되리라'는 약속은 은혜와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취되었다. '믿으으로'( , 에크 피스테오스)라는 말은 '율법을 통해서'( , 디아 노무)라는 개념과 반대적인 의미이다. 특히 바울에게 있어서 '믿음으로'라는 말은 약속이라는 개념과 절대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으로서 약속된 그리스도를 포함하는 포괄적인 개념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원문이 '수단과 방법'을 뜻하는 전치사 '디아'( )를 사용하지 않고 '에크'( )를 사용한 것도 믿음이라는 것을 수단과 방법적인 것으로 전락시킬 수는 없기 때문이다. 믿음은 약속이 내용이며 동시에 약속 그 자체이다. 따라서 믿음은 약속이 성취된 곳에 나타나는 결과이며 동시에 약속이 하나님에 의하여 성취되었음을 나타내는 증거이다. 본절에서는 이것을 하나님의 은혜라고 표현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약속이 은혜로 말미암아 성취되도록 하려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이라는 주장이다. 따라서 본절에서 보다 강조하는 것은 믿음이 아니라 '은혜'라는 개념이다. 믿음에 의하여 은혜가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은혜에 의하여 믿음이 좌우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1) 믿는 자로 하여금 믿음의 의를 통해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게 하며 (2) 신앙의 확실성을 갖게 하며 (3) 궁극적으로 하나님 자신의 영광과 신실하심을 선포하심으로써 믿는 자들의 의를 성취하도록 하는 방편이며, 또한 궁극적인 의의 보증이다.
이는 그 약속을 그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 하심이라 - 율법은 진노를 이루는 것이기에 율법을 통해서는 하나님의 약속이 보증될 수 없다(15절). 하나님의 약속이 보증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은혜만이 유효하며, 이 하나님의 은혜는 믿음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따라서 믿음과 하나님의 은혜만이 하나님의 약속을 확증하고 보증해 준다.
율법에 속한 자에게 뿐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에게도니 - 바울은 '그 모든 후손'이 누구인지를 설명하기를 '율법에 속한 자'와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라고 했다. 통상적으로 '율법에 속한 자'는 단순히 유대인을 총칭하는 의미로 사용된다(14절). 이런 사실 때문에 헨드릭슨(Hendriksen)은 '율법에 속한 자'가 단지 '유대인'만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전반부에 언급된 '그 모든 후손' 곧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약속을 보증받은 '그 모든 후손'에는 분명히 '믿지 않는 유대인'은 배제되어 있다. 따라서 '율법에 속한 자'는 율법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믿음의 원리를 따르는 '유대인'을 의미하며, 그리고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는 믿음의 원리를 따르는 '이방인'을 가리킨다(12절 주석 참조). 이에 대해서는 곧이어 언급되는 하반절에 의해 더욱 지지를 받는다.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 - 바울이 '우리'라고 표현한 것은 믿음 안에 있는 '신앙의 공동체'에 대한 것이다. 이 신앙의 공동체에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의 구별없이 오직 믿음의 원리를 따르는 모든 족속이 포함된다. 지금 바울이 논하고 있는 것은 혈통적인 조상이 아니라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에 대한 것이다. 14절에서 바울은 혈통적으로만 '율법에 속한 자들'은 후사가 될 수없다고 선포했다. 그러므로 본절에서 아브라함을 조상으로 모실 수 있는 후사는 믿음의 원리를 따르는 자들뿐이다.
=====4:17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바울이 여기서 창 17:5의 말씀을 인용한 것은 아브라함이 혈통과 관계없이 모든 사람의 조상이 되는 이유에 대한 성경적인 증거를 위한 것이다. '많은 민족'은 문자적으로 '혈연 공동체'이면서 동시에 영적으로 '믿음의 원리를 좇는 모든 사람들'을 의미한다. 여기서 '모든 믿는 자들의 새로운 공동체'는 아브라함을 조상으로 둔 이유로 인하여 아브라함의 후사에게 주어진 특권과 유익을 함께 소유하는 공동체이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모든 사람의 조상이 됨으로 말미암아 인종적 보편성이 성취되었다. 따라서 아브라함이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우심을 받았다는 표현은 '무할례자로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라는 표현과 '할례자의 조상'이란 표현을 포괄하는 보다 광범위한 표현으로서 하나님 앞에서 모든 사람들이 차별없는 동등한 부르심을 받았음을 시사하며 또한 세계 도처의 모든 민족들이 아브라함의 믿음의 자취를 따름으로 후사가 될 수 있다는 개연성을 강조한다(J. Murray).
그의 믿은 바 하나님 - 바울은 아브라함이 믿었던 하나님을 정의함으로써 자신이 가지고 있는 신관(神觀)을 정의하며 동시에 모든 믿는 자들의 신관을 정의한다. 이는 두 가지의 사실을 전제로 하는데, (1) 창조주 하나님으로서 그분은 모든 사람들의 하나님이 되신다는 것이며 (2) 아브라함이 하나님 앞에서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는(16절) 사실이다. 바울은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을 정의한 후에 그 하나님께서 인정하고 확고히 하신 '아브라함의 조상됨'을 설명하고 있다. 따라서 아브라함을 모든 사람의 조상으로 삼으신 하나님 곧 예수를 죽인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을 믿는 자는 누구든지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죽은 자를 살리시며 - 이 구절은 살아 역동하는 하나님의 속성을 말해주며 또한 생명을 부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고 있다(엡 1:20). 본절에서 그 의미는 크게 두 가지를 포함한다. (1) 이삭의 출생이며 (2)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이다. 바울은 아브라함과 사라가 자식을 낳지 못하는 상태에 처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후손에 대한 약속을 저버리지 아니하고 믿음으로 끝가지 기다렸던 역사적 사건을 상기하면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유추하고 있다. 아브라함은 이삭의 출생을 기다리며 장차 있을 메시야의 세계와 그의 승리를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Lenski, J. Murray, E.F. Harrison). 사실 '죽은 자를 살리시는 이'라는 표현은 유대인들이 흔히 부르는 하나님에 대한 일반적인 표현이었으나 바울은 유대인 뿐만 아니라 모든 믿는 자들에게 적용함으로써(24절)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셨다는 것과 또한 그것을 믿는 자들을 의로 여기신다는 두 가지의 핵심적 진리를 동시에 증거하였다.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이 - 이 구절은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하시는 하나님의 창조주로서의 특성을 묘사한 것이다. 하나님은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을 만들 수 있는 분이시며(마 3:9;눅 3:8) 그 어떠한 인간의 공로나 반항에도 구애받지 아니하시고 택하신 자들을 부르시는 절대 주권의 능력을 행사하는 분이시다. 그분 앞에서는 아브라함의 늙은 육체도 문제가 되지 않으며 죄인의 추함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나님은 무엇인가 될 수 있는 것 같은 가능성 속에서 역사하지 아니하시고 그의 미리 정하신 작정과 통치 속에서 결정해 놓으신 것들을 성취해 나아가신다. 다시 말해서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후손을 바라보았다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언약이 성취될 것을 확신하였다는 뜻이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결정하시고 약속하신 것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을지라도 성취된 것으로 인정하였던 것이다. 바로 이와 같은 확신이 아브라함의 믿음이었으며 본절과 같이 하나님을 정의할 수 있는 신앙이다.
< 설 교 >
나를 위해 죽으신 주
로마서 4:13-25 / 박조준 목사
이미 봉독한 말씀 중에서 25절 말씀을 다시 받들어 읽겠습니다.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 라. 오늘 사순절 마지막 주간에는 예수님이 나귀 타시고 예루살렘성에 입성하신 것을 기념하는 종려주일을 맞이하여 나를 위해 죽으신 주님 에 대하여 생각할 때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요한복음 10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나는 선한 목자다. 나는 내 양을 알고 내 양은 나를 안다. 그것은 마치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 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과 같다. 나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 내가 목숨을 버리기 때문 에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다. 내가 목숨을 버리는 것은 그 목숨을 다시 얻으려는 것이다. 아 무도 내게서 내 목숨을 빼앗아 가지 못한다. 내가 스스로 원해서 내 목숨을 버리는 것이다. 나는 목숨을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다. 이것은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받은 명령이다. 히브리서 10장 5절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당신은 희생 제물과 예물을 원하시지 않고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해 주셨습니다. 당신은 불 사르는 제물과 속죄의 제물을 기뻐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내가 말했습니다. 보십시오! 하나 님! 내게 대하여 두루마리책에 기록되어 있는 대로 나는 당신의 뜻을 행하러 왔습니다. 사실 주님의 십자가를 이해하지 못하고는 기독교를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 을 잡아서 로마의 집권자에게 넘겨서 죽게 하였다고 해서 그들만을 책할 수는 없는 것이 우리의 처지입니다. 따지고 보면 유대 관원이 예수님을 잡아서 이방인에게 넘겨 결국 십자가에 달리게 한 일이 대단한 일은 아닙니다. 또한 예수님의 손과 발에 직접 못을 박은 로마 군인들의 죄도 그 렇게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내 목숨을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주님께서 죽으시기로 결심하지 않으셨다면 아무도 그를 죽일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당하신 고난에 대해서 중요한 사실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죽게 하셨다 는 것입니다. 다른 것은 그렇게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다른 것은 우연히 된 일입니다. 물론 우 연한 일도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그래서 이사야 53장 10절에 보면 이사야 선지를 통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그로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케 하셨다. 고 했습니다. 사도행전 2장에 보면 오순절 때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해서 이런 말씀을 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여, 이 말을 들으시오. 여러분이 아시는 바와 같이 나사렛 예수는 하나님께 서 권능과 기이한 일과 표징을 가지고 여러분에게 나타내 보이신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통하여 여러분 가운데 이 모든 일들을 행하셨습니다. 이 예수가 배반당하신 것은 하나님이 미리 정하신 뜻과 계획에 따라 된 일이지만 여러분은 그를 불법한 자들의 손을 빌어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어준 바 되었 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사도행전 2장을 읽어보면 그처럼 예수를 송사하던 사람들이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영접해서 그들의 메시야로 믿고 하나님의 구원의 자리에 들어간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 주님께서 고난을 당하신 것은 모두가 우리의 죄를 사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로마서 8장 32절에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오늘 본문은 위에서 말한 사실을 신학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아브라함의 믿음 을 말하면서 그는 하나님을 사망 중에서도 생명을 일으키시는 분으로 믿었으며 바랄 수 없는 것 을 바라고 믿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이 믿음을 보시고 그를 의롭게 여기셨습니다. 그러면서 이 의는 아브라함을 위해서만 허락하신 것은 아니고 우리 모든 사람에게도 허락하신 것 이라고 하면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사람은 이 허락을 받을 수 있다고 오늘 본문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시간 우리 위해 고난 받으시고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바라보십시다. 오늘 주신 말씀 로마서 4장 25절을 다시 한번 보세요.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당신의 몸을 주셨다 고 기록되어 있지 않고 우리의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었다 고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다시 살아나셨다 고 하지 않고 다시 살리심을 받았 다 고 했습니다. 성경 다른 곳에서는 예수님을 자동적인 행동자로 기록했는데 오늘 주신 말씀에서는 그리스도를 피동적인 피해자로 표현했습니다. 여기에는 이중적인 원인과 결과가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죄 때문에 내어준 바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내어 준 바가 되었다 는 말 이 중요합니다. 어떤 성경 해설가는 주님이 우리의 죄 때문에 양도되었다 고 번역했습니다. 법적 인 절차를 생각할 때는 살인죄를 범한 죄인은 사형 집행자에게 넘기어 집행하게 되는 것인데 여 기서도 이런 뜻에서 내어 준 바가 되었다고 한 것입니다. 사실 이것은 로마서의 중심 사상인 것 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의 표본으로서 죽으신 것이 아니고 대속자로서 죽으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속자로 죽으셨다는 것은 사복음서에 다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보세요! 예수님께서 재판 받으실 때 아주 흉칙한 죄를 범한 바라바라는 인물이 나옵니 다. 요한복음에는 바라바가 강도라 했고, 누가복음에는 성중에서 일어난 민란과 살인을 범했기 때문에 옥에 갇혔다고 했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대로 유대인의 귀한 절기에는 죄인 하나를 놓아주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 런데 빌라도 총독은 예수를 심문해 본 결과 아무런 죄를 찾아낼 수 없으므로 그를 놓아주어 그 자신의 곤란한 입장에서 벗어나고 싶어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단순한 이야기를 사복음 전체를 통해서 서른 여덟 절이나 기록했습니다. 더구나 바라바에 대한 기사도 여섯 절이나 기록했는데 오히려 주님을 배반하여 판 가룟 유다에 대해서는 몇 절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바라바는 어떤 사람입니까? 이 사람의 이름은 순전히 히브리식인데 그 뜻은 아 버지의 아들 이란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영적 의미로 말하면 바라바는 모든 아버지의 모든 아들 을 대표한다고도 볼 수 있겠습니다. 그렇습니다. 말하자면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한 아담의 자손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영광을 약탈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모두 우리의 영혼과 다른 사람의 영혼을 죽인 살 인자입니다. 더구나 어두운 죄의 감옥에 갇혀 있는 죄인들입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내려진 사형 언도를 받고 무서워 떨면서 그 심판의 날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바라바 같은 사람들입니다. 어느 책에서 사형 집행을 당하기 전의 사형수의 심경을 기록한 것을 보았습니다. 어떤 사람은 교수형을 당하게 되었는데 그 목을 조르는 줄을 붙잡고 놓지 않더라고 합니다. 그래서 손을 묶고 교수형에 처한다고 합니다. 어떤 이는 가스실에 넣어 사형을 집행하는 감옥에서 사형수가 조금이 라도 더 살아 보려고 가스실에 들어가기 전에 숨을 깊이 들이쉬는데 얼마나 들이쉬는고 하니 눈 이 툭 솟아 나올 정도로 심호흡을 하더라고 합니다. 사형수들은 자기의 숨이 넘어가는 것을 알고 있고 자기가 억지로라도 들이쉬는 숨이 마지막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 얼마나 처참한 일 입니까! 여기 바라바라는 사람을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사형 언도를 받은 그는 집행 시간만을 기다리며 뭐라고 표현하기 어려운 착잡한 심정으로 자기의 손바닥을 들여다보며 못이 살을 뚫고 들어가면 어떻게 될까? 고 생각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는 전에 다른 죄수가 십자가형을 받는 것을 본 적 이 있었습니다. 그 때 그 광경을 생각하면서 십자가에 매달린 사형수들이 하루 어떤 때는 이틀씩 십자가에 매달려 몹시도 고통을 당하다가 숨이 끊어진 뒤에야 신음 소리가 그치던 광경도 생각하 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때 밖에서 갑자기 군중들이 떠드는 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그리고 바라바가 들어 있 는 감방문이 열렸습니다. 간수들이 들어 왔습니다. 간수들이 바라바에게 다가와서 그를 묶었던 쇠고랑을 풀어놓습니다. 그래서 바라바는 혼자 생각에 아, 이제 내 사형 집행 시간이 되었나 보 다 그리고 모든 것을 체념한 상태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간수들이 바라바를 밖으로 데리고 나오 더니 이제 너는 방면이 되었으니, 자유의 몸이 되었으니 네 마음대로 가라 하면서 놓아 주는게 아닙니까? 바라바는 얼빠진 사람처럼 되었습니다. 그는 귀를 의심했습니다. 그의 눈이 믿어지지 않았습니 다. 모두가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는 그가 범한 죄를 인정했고 마땅히 그 런 죄를 범한 사람은 그 당시의 최고의 형인 십자가형을 지는 것이 당연하게 생각하고 아무런 반 항도 하지 못하고 있던 차였습니다. 그런데 방면이 되었다니 도무지 믿어지지가 않았습니다. 바 라바는 어리둥절했습니다. 무조건 풀려났으니 어디로 갈까 생각하다가 군중들이 많이 모여 있는 곳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많은 사람들 가운데 바라바에게 시선을 돌리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에게는 도무지 관심조차도 없었습니다. 가만히 보니 군중들은 다른 데 관심을 두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떠들썩하게 소리 지르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없이 하소서, 없이 하소서.
저를 십자가 에 못 박게 하소서 하는 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바라바는 무슨 영문인지 알 수가 없어서 가까이 가보니 자기가 죽을 자리에 예수님이 대신 서 계신 것이 아닙니까? 그때 바라바는 깨달았습니다. 우리 명절에 큰 죄인 하나를 놓아주는 전례가 있는데 나를 놓아주고 저 예수님이 나를 대신해서 죽게 되셨구나! 그는 마음속 깊은 곳에 무어라 형언하기 어려운 감정에 사로잡히게 되었습니다. 그가 나를 대신해서 죽으신다. 그가 나를 대신 해서 죽으신다. 나 대신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다. 이렇게 어쩔 줄 몰라 하고 있는데 예수님은 드디어 그 무거운 십자가를 등에 지고 약하신 그 몸이 간신히 발을 옮겨 놓기 시작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따라가며 봅니다. 바라바도 그 군중 속에 끼어서 따라가며 봅니다. 예수님이 쓰러 지는 모습도 보았습니다. 넘어진다고 무지한 로마 군사들이 예수님에게 채찍질하는 모습도 보았 습니다. 예수님은 힘에 지쳐 쓰러지고 또 쓰러집니다. 도저히 골고다까지 갈 수 없겠다는 판단이 났음인지 시골에서 올라오던 구레네 시몬이란 힘있어 보이는 사람에게 억지로 십자가를 지우고 가는 것도 보았습니다. 드디어 예수님은 갈보리 언덕에 이르렀습니다. 여러분, 이때 바라바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바라바는 예수님의 손과 발에 못 박는 망치 소리를 들으면서 자기 손바닥을 들여다보았습니다. 저 못은 내 손바닥을 뚫었어야 했을 터인데.
1. 그 때 그 무리들이 예수님 못 박았네 녹슨 세 개의 그 못으로망치 소리 내 맘을 울리면서 들 렸네그 피로 내 죄 씻었네. 2. 주여 저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소서주님 눈물로 기도했네귀중한 그 보배 피 나를 위해 흘렸 네그 피로 내 죄 씻었네. 3. 비웃는 저 무리들 주의 옷 벗긴 후에주님 몸 깊이 찔렀네귀중한 그 보배 피 나를 위해 흘렸 네그 피로 내 죄 씻었네 4. 주여 나의 영혼을 받아 주시옵소서그 때 구원을 이루셨네 마지막 피 한 방울 나를 위해 흘렸네 그 피로 내 죄 씻었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시간 우리 마음의 눈을 들어 나 대신 십자가 지시고 죽으시는 주님을 바 라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얼굴을 보세요. 그 머리에 쓰신 가시관을 보세요. 가시에 찔리니까 이마에서는 피가 점 점이 흐릅니다. 그 두 손을 바라보세요. 그 큰 못이 사정없이 예수님의 부드러운 살을 찢으며 뼈 짬으로 뚫려서 나무에 박혔습니다. 못 박힌 자리에서는 피가 천천히 흐릅니다. 그 창끝이 나오자 마자 뜨거운 선혈과 물이 쏟아집니다. 주님의 얼굴은 점점 창백해집니다. 이런 고통이 한 시간만 이 아니고 두 시간만이 아니고 여섯 시간을 십자가 위에서 끝내 이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다 이루었다. 주님은 한마디 말씀하시고 운명하십니다. 바라바는 성으로 돌아왔습니다. 모두가 전에 보던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그 마음 속에 부르짖는 말은 그가 나 대신 죽으셨구나 하고 말 했습니다. 여러분, 육신적으로 말하면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바라바를 대신하여 죽은 것 외에 아 무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생각하면 사실 주님은 바라바와 같은 나를 위해 죽으셨습니 다. 나는 형벌 받아 마땅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나의 죄를 담당하시고 나 대신 심판을 받으셨습니다. 그리스도는 나의 대속주가 되셔서 그가 친히 내 죄값을 지불하심으로써 하나님의 공의와 거룩하심은 조금도 상하지 않으셨습니다. 기독교가 무엇입니까? 세 마디 말로 표현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나는 지옥에 가야 마땅할 사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내가 갈 지옥을 취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갈 곳은 오직 천국뿐입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의 고난을 받으시으로써 나를 위해 천국을 사셨고, 하나님께서는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심으로 이 사업이 완성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일은 주님이 다시 사시므로 우리가 의롭게 된 것이 아니라 우 리가 의롭다 함을 입게 된 후에 주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께서 우리 죄 때문에 죽으셨고 우리가 의롭다 함을 얻게 되었기 때문에 주님께서 부활하신 것입니다. 영수증이 있으면 고지서가 다시 나와도 지불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갈보리산 십자가 위 에서 하나님의 계산서대로 우리의 죄 값을 대신 치루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우 리의 모든 빚이 하나도 남김없이 깨끗이 갚아졌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다시 사림은 이 모든 죄의 빚을 갚았다고 하는 영수증이 되었습니다. 오늘 아침 성시로 읽은 이사야 53장은 우리에게 퍽 깊은 감명을 줍니다. 여기 우리 라고 한 것 을 나 라는 말로 바꿔 읽겠습니다. 그는 실로 나의 질고를 지고 나의 슬픔을 당하셨거늘 나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 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나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나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내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내가 나음을 입었도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나와 상관이 있을 때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다른 사람 아닌 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나 때문에 고난 당하신 주님을 위하여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 면 그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이 뜻깊은 종려주일 아침 나 같은 죄인 위하여 고난 당하신 주님의 그 크신 사랑에 감격하여 그 십자가 바라보며 우리의 몸과 마음을 드리는 새로운 결단의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광장한 믿음
로마서 4:13-25 / 김삼환 목사
우리는 굉장하다는 말을 잘 사용합니다. 그러나 굉장하다는 이 말은 사실은 한문입니다. 클 굉(宏)자, 또 씩씩할 장(壯)자입니다. 굉장히 크다, 굉장한 일이다, 굉장히 놀라운 일이다라고 씁니다. 오늘 특별히 믿음의 사람 아브라함을 여러분에게 말씀 드리면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우리는 어떻게 표현해야 하느냐, 정말 아브라함의 믿음은 굉장한 믿음의 사람이지 않느냐, 굉장한 믿음이지 않느냐, 이렇게 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 인간은 이 세상에 창조함을 받을 때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살게 되어져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떠나서 고독한 외로운 존재가 아닌 하나님이 함께 하는, 하나님이 아브라함 같이 우리의 친구, 아버지, 목자도 되시고 우리의 길을 인도하시며, 우리의 삶을 다스려주시는 통지치자도 되십니다. 우리 하나님과 함께 하는 이런 삶을 우리는 믿음으로 살게 되어져 있습니다.
오늘 이 시대를 심히 어려운 시대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예일대 사학자 웨스터는 혼돈의 시대라고 했고, 오웬은 불안의 시대라고 했습니다. 정말 불안하고 혼돈하며, 공허한 이러한 시대를 우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런 어려운 시대를 우리가 살 때에 우리는 어떻게 힘 있게, 능력 있게 통과할 수 있습니까? 무사히 터널을 빠져나갈 수 있는 길은 어디에 있습니까? 오늘 불안과 공포와 염려와 긴장은 전 세계적이고, 선진국 미개국할 것 없이 다 같이 어렵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미국 사람들도 밤에 잠을 못자는 사람이 4200만 명이나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11개월 동안 TV에 수면제를 선전한 광고비가 2억9800만 달러라는 겁니다. “이 약 먹으면 잠이 금방 옵니다. 잠이 안 오는 분 있습니까? 이 약 드세요. 밥 먹다가도 잡니다.” 계속 선전을 그렇게 많이 합니다. 새로운 약이 끊임없이 나옵니다. 잠이 안와 죽을 지경입니다. 불안과 긴장에 떨고 있는 밤, 이 고독한 밤을 어찌할 바를 몰라 하는 사람이 이렇게도 많다는 겁니다. 프랑스도 그렇습니다. 항우울제, 진정제, 수면제가 2003년도에만 수면제 스틸녹스가 1500만 톤, 항우울제가 1150만 톤, 진정제가 850만 톤 사용되어졌습니다. 선진국일수록 더하다는 것 아닙니까? 사회보장제도가 어느 나라보다 더 잘 되어 있고 사회가 안정되어 있으며, 질서가 잘 있고 직장이 안정되어 있으며, 불안할 수 있는 요소가 하나도 없는데 전쟁도 없습니다. 모든 주변이 서로 손에 손을 잡고 평화롭게 살아가는 사회에 왜 이렇게도 잠을 못자고 불안에 떨고 있냐는 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인간은 영적인 피조물, 하나님께로부터 지음 받은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이여야 합니다. 그 품 안에 안기 울 때 이유 없이 우리 몸에는 평안이 있고 잠이 옵니다. 그를 믿고 그의 품 안에 안겨야 됩니다. 저는 부모님이 시골에 계셔서 명절마다 방학마다 늘 자주 내려갔습니다. 서울에서 제가 목회를 했으니까 그래도 괜찮게 잘 지냈습니다. 저의 환경은 이미 30년 전에도 좋았습니다. 그러나 부모님이 계신 데에 가면 방 한 칸에 온 식구들이 모여서 밥그릇 다 그대로 있고, 옷가지들 한 달 동안 씻지 못하고 다 집안에 있으며, 항상 일해야 되니까 진흙 옷으로 그냥 그대로 자는 그런 방입니다. 저는 시골 내려가서 우리 어머니 만나고, 어머니와 함께 잠을 자면 그렇게 행복한 것이 없습니다. 어머님의 품은 제가 결혼했지만 냄새가 나고, 집안이 엉망이어도 어머니의 냄새는 제게 어떤 향기보다도 더 아름다웠습니다. 지내놓고 봐도 어머니와 그때 같이 누워 자던 밤이 너무 좋았습니다. 나를 낳으신 어머니, 그렇게도 평안할 수가 없습니다. 부모님한테 갔을 때에 아내하고 자는 사람은 몰라서 그렇습니다. 어머니 하고 같이 주무십시오. 나를 낳으신 분이시기에 참 좋습니다.
교회가 꼭 좋아서 오는 겁니까? 먹을 것이 있어서 옵니까? 교회는 내가 냄새나고 부족해도 참 좋은 것은 하나님, 창조주,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품 안에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믿음이 없는 분은 여기 나오면 싫은 겁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없는 분은 아버지의 품이 좋을 리가 없습니다. 죄악의 품, 쾌락의 품, 술 먹는 술집의 품이 좋은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이시다, 창조주이시다, 나의 가는 길을 하나님이 지켜주신다고 믿으면 그렇게 마음이 좋습니다. ♬주 예수 넓은 품에 나 편히 안겨서 그 크신 사랑 안에 나 편히 쉬겠네(찬송가 476장)♬ ♬주 날개 밑 즐거워라 그 사랑 끊을 자 뉘뇨 주 날개 밑 내쉬는 영혼 영원히 거기서 살리(찬송가 478장)♬ 영원히 영원히 우리는 그 품안에 안겨서 살아야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나의 아버지시라는 겁니다. 다른 말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미국의 대통령 가운데 아이젠하워라는 대통령이 있습니다. 그분은 어려서 너무 가난했습니다. 저는 위인전기를 많이 읽었지만 아이젠하워 대통령과 그 어머니에 대해서 읽은 것처럼 감동을 주는 것이 없었습니다. 아이젠하워 어머니는 너무너무 가난하고 부모님이 돌아가셔서 외할아버지 댁에서 살았습니다. 외할아버지 외할머니가 얼마나 믿음이 좋은지, 자기 외손녀를 데려다가 학교는 보내지 않고 교회를 사랑하고 교회에 보냈습니다. 주일학교를 다니게 해서 성경을 늘 가르쳐주고 외우게 했습니다. 여러분! 지내놓고 보면 교회에서 배운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내 것이고, 학교에서 배운 것은 잠깐은 유익이 있습니다. 그러나 내 생명과 내 진리와 내 능력은 될 수 없습니다. 학교 공부도 열심히 해야 되지만 우리는 교회에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 어려서부터 그것을 축복으로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그 어머니는 처녀 때에 외할아버지 댁에서 성경을 많이 외웠습니다. 외운 성경만 600절 이상입니다. 주기도문도 못 외워서 더듬더듬하고 신앙고백도 다 못하는 분이 있는데 성경 600절은 간단하지 않습니다. 단어도 600절을 외우려면 쉽지 않은데 그렇게 성경을 많이 외워서 하나님 말씀으로 훈련을 받고, 결혼해서 아이젠하워를 낳았는데 이 아들에게 또 신앙교육을 잘 시켰습니다. 가정예배를 드리면서 하나님 말씀을 잘 지켰습니다. 아이젠하워는 어려서 가난하니까 사관학교를 들어가서 등록금을 내지 않고 공부를 했습니다. 1차 대전이 일어났을 때 소위가 됐습니다. 군에 가서 소위가 되어도 얼마나 믿음이 좋은지 전차 안에, 탱크 안에 아이들을 주일이면 꼭 데려다가 성경을 가르치고 하나님을 말씀을 지킨 겁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항상 하나님이 동행해 주십니다. 이분은 2차 대전 때에는 이미 세계의 모든 연합군의 책임자가 되어서 전 세계 연합군 사령관이 되었습니다. 늘 기도합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믿습니다. 여러분! 믿을 것이 없는 사람은 믿음이 빨리 자라납니다. 이 사람은 믿을 거리가 없으니까, 하나님만 믿으니까 그의 믿음은 하루가 다르게 자라납니다. 여러분이 잘 아는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성공한 분도 아이젠하워입니다. 2차 대전을 이끌어 승리한 사람이 누구냐고 물으신다면 이것은 누구나 할 것이 없이 아이젠하워이고 그때 대통령은 루즈벨트입니다. 이분은 한국전쟁도 휴전을 이끈, 이 전쟁이 오래 갈 터인데 이것을 끝낸 분도 아이젠하워입니다. 신앙의 사람, 믿음의 사람입니다. 아이젠하워는 성경 한 구절을 늘 품고 있었습니다. 날마다 외우는 성경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스가랴 4장 6절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 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힘으로도, 능으로도, 권력으로도 못살고, 이 세상의 어떤 군사적인 힘으로도 승리할 수 없지만 하나님을 믿는 믿음만 있으면 이 세상을 승리할 수 있습니다. 스가랴 4장 6절이 여러분의 요절이 되기를 바랍니다.
1959년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소련의 흐르시초프를 초청했습니다. 9월 27일, 그날은 주일이었습니다. 흐르시초프에게 교회에 가자고 간절히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러나 공산주의는 교회가, 하나님이 원수이고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것 이것이 첫째인데, 하나님을 믿는 것 이것을 물리쳐야 되니, 교회에 가자 그러니까 갈 리가 있겠습니다. 안 갔습니다. “오늘은 주일이니까 나와 함께 교회에 갑시다.” 한마디로 거절했습니다. 그래서 아이젠하워는 말했습니다. “제가 교회에 다녀올 때 까지, 예배드릴 때까지 한 시간 반만 기다려주십시오.”라고 했습니다. 예배를 마치고 흐르시초프를 만났습니다. “한 시간 반 동안 무엇을 했습니까?” 이렇게 물었습니다. 그때 흐르시초프가 대답했습니다. “내가 한 시간 반 동안 생각을 한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나를 이렇게 먼 길에 초청을 해 놓고 나를 떠나서 아이젠하워가 교회에 갔다 와서 내게 무슨 핑계를 댈까?” 이것을 생각했다는 겁니다. “나를 데려다 놓고 교회에 간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그때에 아이젠하워가 말했습니다. “예배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습니다. 아무리 흐르시초프를 제가 초청해서 귀하지만 예배보다 귀할 수는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을 믿는 사람, 하나님이 함께 하는 사람,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예배가 정말 제일 귀한 줄로 믿습니다.
오늘 많은 사람들은 믿음을 져버리고 무시하며, 하나님 떠나서 홀로 성공하리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오늘 이 시대를 진단 내린다면 믿음이 없어서 고독하고 믿음이 없어서 잠이 안 오는 것이며, 하나님이 없어서 외롭고 슬픈 것이지,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잠 못 오는 병은 금방 고쳐 낼 수 있습니다. 평생 수면제 먹지 말고, 교회에 나와서 한순간에 잠의 복을 받기를 바랍니다. 교인은 잠이 너무 많이 와서 탈입니다. 저도 한번만 노래를 안 하면 금방 잡니다. 우리는 정말 행복한 성도들인 줄로 믿습니다.
인류의 역사는 하나님을 무시하고 하나님을 떠나는 민족, 개인, 사상, 국가, 기업은 안 된다는 겁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떠나면 제일 안 되는 것입니다. 저주가 무엇입니까? 믿음을 떠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져버리는 것이 저주입니다. 되는 것 같지만 안 됩니다. 그 증거가 러시아이며 공산주의입니다. 러시아는 천년동안 그렇게 하나님을 잘 믿어 세계 1등 국가, 1등 문화민족이 되었지만, 하나님을 떠나면서 그들은 먹을 것 입을 것도 없는 온 나라가 다 같이 굶어 죽는 거지국가가 되어버렸습니다. 되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하늘도 땅도 외면하고 돌아보지 않습니다. 러시아를 따라간 민족은 다 안 되었습니다. 여러분! 잘 믿는 사람 따라가고, 잘 믿는 사람 사랑하고, 잘 믿는 사람 친구 되고, 잘 믿는 사람을 귀히 여기시기를 바랍니다. 사람이 안 되려면 안 되는 사람 따라갑니다. 제가 캄보디아에 가서 수상도 몇 번 만났는데 어느 날 저녁에 장관이 호텔에 와서 저한테 안수기도를 받았습니다. 그분은 실력자입니다. 굉장히 힘이 있습니다. 우리교회도 다녀갔습니다. 이분이 말했습니다. “목사님! 우리가 몇 십 년 동안 안 된 것은 안 되는 나라를 따라 갔기 때문입니다.”라는 겁니다. 우방으로 중국과 베트남을 따라 가며, 경비를 북한이 와서 해 주었습니다. 그렇게 친했습니다. 그런데 안 되는 나라만 골라가지고 따라갔다는 겁니다. 그러나 지금 캄보디아는 엄청나게 움직이고 경제가 발전하며, 정치가 안정되고 혼란이 질서가 잡히는 기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되는 나라를 잡는 겁니다. 지금 캄보디아는 우리나라를 제일 좋아합니다. 남한을 제일 좋아하고, 미국, 일본 좋아하니 이 나라가 잘 될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좋아하시기를 바랍니다. 나라를 사랑해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나라를 여러분도 사랑하고, 하나님을 귀히 여기는 민족을 여러분이 귀히 여겨야 귀한 민족이 될 줄로 믿습니다. 러시아는 안됐습니다. 망했습니다. 그러나 러시아가 지금 하나님께로 돌아오면서 20년 만에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열배나 더 잘사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이번에 평창하고 동계올림픽 경쟁한 나라가 러시아입니다. 이 나라가 지금 안집니다. 뭐든지 안집니다. 이제 올림픽을 해도 러시아, 그 전 같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그 전 같지 않습니다. 착각하면 안 됩니다. 이제는 거지가 아닙니다. 러시아는 지금 힘 있는 나라가 됐습니다. 왜냐하면 70%가 예수님을 믿습니다. 70%가 주님께로 돌아왔습니다. 하나님께로 돌아가면 기적이 일어납니다. 오래 안 걸립니다. 금방 그 자리에서 일어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부유하신, 능력 많으신 하나님이 축복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인류역사의 증거이며 경험입니다. 우리도 그렇지 않습니까? 4천년 동안 안 되다가 예수 믿으니까 금방 되지 않습니까? 오늘 우리의 혼란이 어디에 있습니까? 다 하나님이 없는 문화와 사상과 하나님이 없는 우리의 삶속에 우리의 가정이 무너지고 우리사회가 분열이 오며, 이렇게 여러 가지 고통을 당하는 개인이나 우리 사회의 아픔은 하나님이 없는 데에서 오는 겁니다. 잘 믿는 곳에는 이런 무질서와 혼돈은 없습니다. 혼돈의 시대, 무질서의 시대에 질서가 있고, 불안의 시대에 평화가 주어집니다.
이스라엘을 보십시오. 이스라엘은 땅도 적고 인구는 6백만 밖에 되지 않으며, 남한의 1/4정도 밖에 안 되는 작은 나라, 서울 시민 반 밖에 안 되는 이 나라가 오늘 세계를 지배하지 않습니까? 세계 식량회사 다섯 개 가운데 세 개를 유대인이 가지고 있습니다. 전 세계의 양식이 유대인 손에 다 달렸습니다. 세계에 큰 석유회사가 7개가 있는데 엑슨 모빌, 스탠더드, 걸프, 로열 터치 셀, 텍사코, 비피, 토탈 등 7개의 큰 석유회사가 있는데 유대인이 6개를 잡고 있습니다. 먹는 것을 유대인이 다 가지고 있고, 세계 기계, 석유시장 올리고 내리는 것 유대인이 다 좌우합니다. 여러분! 돈이 어디로 갑니까? 그쪽으로 갑니다. 세계에 유명한 통신사 AP, UPI, AFP, 로이터, 유대인 겁니다. 신문사 뉴욕타임즈를 비롯해서 월스트리트저널 유대인 겁니다. 수많은 방송 NBC, ABC, CBS, BBC, 다 유대인 겁니다. JP모건, GM, IBM, 다 유대인 겁니다. 세계의 보석 유대인 겁니다. 지하자원 유대인 겁니다. 유대인이 다 움직입니다. 유대인 대통령 비서실장이 여기 와서 몇 번 예배를 드렸습니다. 뭐라고 그러는지 아십니까? “목사님! 우리는 미국만 움직이는 것이 아닙니다. 영국, 독일, 프랑스, 브라질, 아르헨티나도 움직입니다.” 세계 외교를 하던 정치를 하던, 유대인을 비켜서는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미국을 움직이는 것도 유대인입니다. 유대인이 무엇 때문에 이런 복을 받습니까? 노벨상 받은 사람이 151명이나 이글이글 거리고, 아인슈타인이나 에디슨이 왜 다 유대인입니까? 유대인이 모든 일에 왜 이렇게 천재가 되고 물질을 잡으며, 하나님이 주신 복을 양손에 다 잡고 누리는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유대인은 4천년 동안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서 한 번도 떠난 적이 없습니다. 어려서부터 철저하게 어떻게 교육시키느냐, 하나님 잘 믿는 믿음의 사람으로 초점을 맞추는 겁니다. 못날 수도 있고 못 배울 수도 있으며, 누구보다 능력이 없을 수 있지만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나아가면 길은 많다는 겁니다. “너는 문화계 쪽으로 가면 되는 것이고, 경제를 모르면 정치 쪽으로 가면 되는 것이고, 정치를 모르면 경제계로 가면 되는 것이고, 너는 이것을 모르면 음악계로 가면 되는 것이고, 과학자로 가면 되는 것이고...” 하나님이 주신 지혜가 천만가지인데, 다 쓰임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길이, 능력이 많습니다. 내 부족함만 생각하지 말고, 그에게 내 앞날을 맡기십시오. 주께서 여러분을 인도하실 줄 믿습니다. 능력은 어디에서 옵니까? 하나님께로 옵니다. 위대한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까? 믿음이 위대하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에 있는 말씀대로 아브라함이 무엇 때문에 이렇게 큰일을 했습니까? 정말 아브라함이 누구보다 특별한 사람입니까? 아닙니다. 제일 약점 많고 쓸모없으며 가치 없는 백세노인입니다. 그런데도 아브라함은 믿음이 있었습니다. 믿음이 보통 믿음입니까? 아닙니다. 굉장한 믿음이었습니다. 다른 사람 믿음 위에 있었습니다. 큰 믿음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통해 천하 만민이 복을 받게 아브라함을 높이 세워 주신 겁니다. 나이가 많아도 믿음만 있으면 젊은이보다 백배천배 일을 할 줄로 믿습니다. 내가 몸이 약할 지라도, 불구자일지라도 하나님을 믿는 믿음만 있으면 건강한 사람 천 명 만 명 일을 한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어려운 일을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서 나옵니다. 아브라함은 히브리서 11장 8절에 보면 고향을 떠났습니다. 믿음으로 하나님께 앞날을 맡기고 따라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백세인데도 하나님께서 아들을 주실 줄로 믿었습니다. 가능한 일입니까? 여러분의 조그마한 지식이 하나님의 능력을, 하나님의 은혜를 거절할 때가 많습니다. 여러분이 조금 안다는 것 때문에 내 아는 지식으로 살고 하나님의 능력을 져버릴 때가 많습니다. 내 지식을 넘어서고, 내 생각을 넘어서서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는 능력 있는 성도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도움이시오, 힘이시오, 능력이십니다.
성경에 나오는 위대한 인물은 어떤 것도 위대하지 않습니다. 믿음 하나가 위대합니다. 다윗은 모든 것이 부족했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있었습니다. 교회는 하나님과 관계를 소중히 여기고 믿음을 귀히 여기는 곳입니다. 모세는 제일 큰 지도자인데 무엇이 있었습니까? 믿음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누구보다도 앞섰습니다. ‘더 바이블’이라고 기독교방송에서 여러 번 나오는 것 보셨습니까? 저도 여러 번 봤습니다. 참 감동적입니다. 어떤 기업가가 천문학적인 돈을 들여 성경에 나오는 모든 유명한 일들을 전부 영화로 만들었습니다. 이게 한 세트입니다. 50 몇 개인가 그렇습니다. 그냥 이렇게 적당하게 만든 것이 아니라 고고학적으로 현장감동과 돈을 어마어마하게 들였습니다. 세계적인 배우가 촬영을 잘 했습니다. 저도 여러 편을 보고 눈물을 많이 흘리고 은혜를 받았습니다. ‘더 바이블’ 대단합니다. 여기에 야곱, 요셉, 제가 다 봤는데 모세에 관한 것도 나오는데 잠깐만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모세는 공주가 목욕을 하다가 물에서 건져냈는데 바로왕이 아들이 없어, 공주가 후계자입니다. 공주의 아들이 되니 전 애굽의 후계자가 되는 겁니다. 전 세계는 애굽 겁니다. 세계를 통치하는데 모세는 그 밑에서 훈련을 받습니다. 학술, 전쟁, 군사, 애굽의 천문학, 다 배웠습니다. 왕이 될 수 있는 준비를 다 갖춘 겁니다. 그런데 모세가 하루는 밖에 나가서 시찰하는데 애굽 감독이 유대인을 얼마나 잔인하게 때리는지, 모세가 보고는 내려가서 “너 왜 죄 없는 사람을 때리냐?” 그리고 그 사람을 때려서 죽였습니다. 죽여서 묻어버렸습니다. 이것을 애굽 사람이 보았습니다. 얼마나 무섭습니까?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이것이 보고가 되었습니다. 모세를 끝까지 싫어하는 총리 같은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이 있는데 이 정보를 받아 바로왕에게 알렸습니다. 바로는 안 믿습니다. “너는 왜 자꾸 모세를 물고 늘어지느냐? 근거도 없이 모세를 왜 자꾸 그렇게 핍박하느냐?”, “이것은 진짜입니다. 증거가 있습니다.”, “그럼 모세를 직접 불러와라.” 모세를 불렀습니다. “모세야! 이 사람이 또 너를 이렇게 헐뜯는데 진짜냐?”, “예. 아바마마. 진짜입니다.” 바로가 기절합니다. 기가 막힙니다. “너, 정말 애굽 사람을 죽이고 히브리 사람 편들었느냐?”, “편들었습니다.” 맞다는 겁니다. “그러면 너는 유대인이냐?”, “저는 애굽 사람이 아니고 유대인이 맞습니다. 히브리 사람입니다. “내가 너를 얼마나 사랑하고 너를 귀히 여겼는데, 내가 이 애굽 전체를 너에게 다 주는데 이 애굽의 금은보화가 얼마이고, 이 권력이 얼마이고, 너가 바로가 되면 천하에 너를 당할 자가 없는데, 이 많은 아름다움과 궁궐을, 네가 그럴 수 있느냐? 지금이라도 잘못했다 그래라.” “아닙니다.”, “이제부터 너는 죽어. 짐승이 물어뜯어 죽일 수도 있고 잔인하게 불에 태워 죽일 수도 있으며, 너는 이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비극에 처할 수도 있어. 너를 광야에 보내어서 말라 죽일 수도 있고, 가장 극악한 처형을 받는데도 좋으냐?” 그러니까 “좋습니다.”는 겁니다. “내가 믿는 야훼 하나님이 계시기에 이 모든 것을 줘도 그를 떠날 수 없고, 내가 믿는 나의 야훼 하나님이 내 길을 인도하실 것입니다. 바로께서는 나를 그렇게 죽이시려고 하지만 바로의 뜻대로 되지 않습니다. 야훼 하나님이 나를 인도하여 주십니다.” 할렐루야!
믿음이 무엇입니까? 무엇을 믿음이라고 합니까? 하나님과 관계를 소중히 여겨서 하나님을 떠나서는 절대로 살 수 없다는 이러한 삶이 바로 믿음입니다. 믿음은 삽니다. 믿음은 죽지 않습니다. 믿음은 망하지 않습니다. 믿음은 실패하지 않습니다. 믿음의 길은 하나님이 지켜주시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1장 17절에는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믿음이 있어야 삽니다. 믿음이 있어야 참으로 삽니다. 믿음이 있어야 참 생명, 영원히 사는 생명입니다. 믿음으로 살아야 하나님과 함께 삽니다. 믿음이 없이 사는 것은 하나님을 비켜서 떠나서 사는 삶이기 때문에 그것은 사망의 길, 멸망의 길입니다. 믿음이 있는 길만이 삽니다.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시작도 믿음, 출발도 믿음입니다. 우리는 항상 출발만 아니라 끊임없이 어제도 믿음, 오늘도 믿음, 이 발걸음도 믿음, 저 발걸음도 믿음, 우리의 모든 삶은 믿음으로 나아가야 할 줄 믿습니다.
두 번째 믿음은 큰방패가 된다고 말했습니다. 에베소서 6장 16절에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서 능히 악한 자의 모든 화전을 소멸하고”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믿음은 여러분을 지켜줍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있으면 대단한 방패나 빽, 능력, 여러분을 지켜주는 막강한 힘이 없어도 여러분은 이상하게 살아납니다. 보호를 받습니다. 우리 집을 대단한 진돗개가 안 지켜도 이상하게 평안합니다. 막강한 경비원이 없어도 주님이 지켜주십니다. 믿음이 방패입니다. 항상 나의 갈 길 다가도록 손 방패가 되셔서, 방탄조끼가 바로 믿음입니다. 믿음은 머리에서 발끝까지 완전 방탄조끼, 가정의 방탄조끼입니다. 여러분의 자녀가 방탄조끼를 입으려면 자녀보고 “믿음으로 살아라.”하면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자녀의 방탄조끼가 되십니다. 옛날에 방탄조끼가 없어서 바울의 믿음은 방패라고 그랬습니다.
세 번째 믿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합니다. 히브리서 11장 6절에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믿음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합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합니다. 하나님과 만나면 하나가 됩니다. 믿음 하나가 안게 만듭니다. 하나로 만듭니다. 사랑이 우리 모두를 하나로 만들듯이 믿음은 야훼 하나님과 우리를 하나로 만듭니다. 우리는 높고 낮은 창조된 피조물이지만 하나님과 우리를 하나로 만들어 주는 역할은 믿음입니다. “아버지!” 이렇게 말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이 나를 도와주실 줄로 믿습니다. 내 앞길을 인도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이 믿음을 가지면 하나님은 여러분을 따라오시고 도와주시며, 축복하여 주십니다.
네 번째,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에베소서 2장 8절에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외국에서는 선물을 받을 때 보는 분 앞에서 풀어야 됩니다. 그 자리에서 반드시 오픈해서 선물의 소중함을 알고 감사하다는 인사를 하는 것이 예의입니다. 그리고 그분이 올 때 내가 받은 선물을 늘 말하고 보여 줘야 됩니다. 부부간에도 가장 사랑하는 사람은 아내가 준 선물, 남편이 준 선물을 꼭 가지고 다녀야 됩니다. 간직해야 됩니다. 그래야 그를 사랑하는 겁니다. 저에게 넥타이를 선물하면 제가 주일에 그 넥타이를 하고 옵니다. 오늘 그분이 선물한 것을 제가 하고 오는 겁니다. 그분에게 감사하는 겁니다. 그분은 설교 안 들어도 은혜 됩니다. “우리 목사님이 내가 준 넥타이 메고 나왔다.”며 좋아합니다. 여러분이 이 세상 살 때 하나님이 주신 선물인 믿음을 가지고 살면 하나님이 좋아 하십니다. ‘내가 준 믿음을 쟤가 가지고 있구나. 쟤가 의심하지 않구나.’ 하나님의 기뻐하십니다.
믿음은 하나님에 대한 신뢰입니다. 그래서 큰 평안과 자유가 옵니다. 이사야 12장 2절 “보라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 내가 의뢰하고 두려움이 없으리니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심이라.” 시편 3편 6절 “천만인이 나를 둘러치려 하여도 나는 두려워 아니하리이다.” 우리 교인들은 왜 늘 신나게 살고 춤추며 살며, 기쁨이 충만하여 살아가는 것입니까?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나를 도와주시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모든 기적을 가져다줍니다. 마가복음 9장 23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정말 여러분의 질병을 믿음이 고치는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이 할 수 없는 아무리 큰일도 두려워하지 말고 믿음으로 나가기를 바랍니다. 홍해는 갈라지게 되어 있고, 반석에서는 물이 나오게 되어져 있습니다. 믿음이 있기 때문에, 믿음은 놀라운 일을 모두 다 하는 능력입니다. 여러분은 어렵고 절망스러운 큰 일에 “아유~ 나는 이번에 죽었어.” 이러지 말고 믿음을 가짐으로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경험하는 놀라운 축복이 있을 줄로 믿습니다.
믿음은 우리를 의롭게 합니다. 오늘 본문에도 계속 강조합니다. 아브라함은 율법이 있기 전에 이미 의롭다함을 받았다는 겁니다. 율법으로 의로워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의로워 지는 것은 두 가지 밖에 없습니다. 다 잘해서, 완전해서, 법을 다 지켜서 의로워 지는 길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의로움은 한사람도 성공한 일이 지상에 없습니다. 법이라는 것도 그렇지 않습니까? 80년 지켰다가도 한 가지 법만 잘 못하면 80년 잘 행한 모든 공로, 80년 지킨 공로는 소용없이 그 하나 때문에 구속당합니다. 이처럼 여러분은 80년에 800가지를 설령 잘했다고 할지라도 한 가지 불의만 있으면 그 불의가 800년 동안 800가지 잘 한 것 다 삼키고 지옥가고도 남게 만듭니다. 사람은 행함으로는 의로워 질 수가 절대로 없습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의로워 질 수 있습니다. 이 믿음은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보내주셔서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여 주십니다. 적어도 하나님 앞에 나올 때는 내 의로 나오지 말고, 하나님의 의를 힘 입어서 나와서 아버지 하나님이 주신 의의 옷을 입고 예배드리는 성도되기를 바랍니다.
마태복음 14장 13절에 보면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하시며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꾸짖습니다. 베드로가 믿음으로 갈 때는 물을 건넜지만 믿음을 떠나서는 물에 빠졌습니다. 사랑하는 아내지만 믿음이 없으면 아내에게 빠집니다. 아내하고 둘이 같이 물에 빠져버립니다. 사랑하지만 믿음 없는 사랑은 우리를 빠지게 만듭니다. 그래서 오늘 많은 사람이 이렇게 사랑하는데 왜 안 되는지 모르겠다고 하지만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없는 사랑은 빠지게 되어져있습니다. 믿음이 없는 기업, 정치는 빠지는 겁니다. 아무리 친한 우정도 믿음을 떠난 우정은 믿을 수가 없습니다. 빠지는 것입니다. 이 좋은 세상에 왜 우울증에 걸리느냐하면 믿음이 없기 때문에 아무리 좋아도 빠지게 되어져 있습니다. 이 넘실거리는 죄악세상에서 여러분의 가정이, 자녀가 빠지지 않고 승리하는 길은 오직 믿음인 줄로 믿습니다. 물 위를 건너는 믿음의 사람 되기를 바랍니다. 믿음만 굉장하면 물 건너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살아간 사람
로마서 4:13-25 / 성흥모 목사
오늘은 사순절 두 번째 주일입니다. 오늘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 이신칭의 교리에 대하여 함께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지난주간에 몇 권의 좋은 책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그 중에 강영우 박사가 쓴 "우리가 오르지 못할 산은 없다"라는 책이었습니다. 이 책의 부제는 [성공하는 삶을 위한 10가지 교육 원리]라는 것이었습니다. 저자인 강영우라는 분은 중학교 재학 중에 망막이 상하여 실명하였고, 서울 맹학교 고등부를 거쳐 연세대 교육과에 입학하였고 문과대 차석으로 졸업하였으며, 미국 피츠버그 대학교에서 교육학 석사, 심리학 석사, 교육 전공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는데 우리나라 최초의 맹인으로 박사학위를 얻은 사람입니다. 강박사는 2001년도에 세계 저명 인사 인명 사전에 수록되었습니다. 현재는 일리노이 대학의 교수로 재직 중에 있습니다. 그의 업적을 다 설명드릴 수 없습니다.
책의 부제로 "성공하는 삶을 위한 10가지 교육원리"를 말하고 있는데, 제6의 원리로 "역할 모델을 가지라"는 것이 있습니다. 1944년생인 강영우가 중학생 때에 망막박리라는 병으로 시력을 잃었을 때 시각장애인으로 대학에 진학하고 해외로 유학을 떠난 사람이 없었답니다. 국립의료원 안과 의사가 현대의학으로는 강영우의 눈을 고칠 수 없다고 말하면서 이와하시 다께오 선생의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이와하시 다께오는 와세다대학 재학 중에 실명하였지만 훗날에 영국 에든버러 대학에서 학위를 받고 일본에 돌아와 교수가 되었고 일본 맹인 복지의 선구자가 되었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강영우는 그가 맹인으로 인생을 새롭게 시작할 때 그 사람을 본받는 역할 모델로 삼았다고 합니다. 나도 이와하시 다께오처럼 중도에 실명하였으니 대학에도 가고, 유학도 다녀오고 대학교수가 되겠다고 다짐하였던 것입니다.
우리도 인생을 살면서 어떤 사람처럼 되겠다고 하는 역할 모델을 정하라고 합니다. 미국의 4선 대통령 루스벨트가 설립한 조지아주의 루스벨트 웜스프링스 재활센터에는 루스벨트 대통령의 사진과 함께 헬렌켈러 여사의 사진이 걸려 있다고 합니다.
루스벨트가 7년간 소아마비를 고치기 위하여 재활치료하면서 헬렌켈러 여사를 역할 모델로 삼고 희망과 용기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헬렌켈러는 시각, 청각, 언어의 장애인으로 3중고의 사람이었습니다. 맹인이요, 귀머거리요, 벙어리인데도 자신을 극복하고 일어섰다고 하면 나는 양다리가 마비된 것뿐이라고 하면서 그의 장애를 극복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교육현장에서 말하는 것 중에 "인물이 되려면 인물을 만나야 한다"라고 합니다. 강영우 박사는 성경을 읽으면서 바울을 자기의 역할모델로 정하고 고난 속에서도 세계 비전을 가진 것과 고난에 대한 긍정적인 태도를 가지는 것과, 약한 것들을 자랑하여 하나님의 권능을 드러내는 신앙과 용기를 배우려고 했습니다.
오늘 저는 우리의 믿음과 생활의 아주 중요한 모델이 되고 있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이 본문은 하나님과 아브라함에게 초점이 맞춰진 말씀입니다. 또한 우리가 예수 믿어 구원받고, 의롭다 칭함을 입는 것을 아브라함을 들어 확정하고, 우리의 구원이란 아브라함이 구원받은 것과 같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오늘 은혜의 계약을 맺고 있는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과 언약을 맺으셨는데, 일방적인 계약 곧 은혜의 계약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은혜의 계약을 더욱 공고히 하려고 보조 수단으로 율법을 내려주셨습니다. 율법도 사실은 은혜입니다. 율법이 없었으면 어떻게 은혜를 은혜로 깨달을 수 있을 것입니까? 하나님이 주신 모든 것은 다 은혜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을 때에 그 믿음을 귀하게 보시고 공의로 여기시고 인정하셨습니다. 더 나아가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허락하여 주시고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의롭다고 인쳐 주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오늘 이렇게 구원하여 주시는 하나님을 만나고 가면 좋겠습니다. 우리를 구원해주신 하나님, 우리의 죄를 다 아들에게 물으시고 아들 안에서 우리를 자녀로 맞이하는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여러분의 영혼이 살 수 있습니다.
여러분, 세상의 모든 것들은 어떤 원리 위에 놓여져 있습니다. 자연계에는 합리적인 법칙, 과학적인 법칙을 따르고 있습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눈에 보이고, 손으로 만져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합리적인 훈련을 받아왔고, 눈으로 확인할 수 있어야 존재한다고 알고 있습니다. 이러한 법칙은 이성에 기초를 두고 있으며, 상식에 맞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는 영적인 세계가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비합리적인 것이요, 이성과 사리에 맞지 않는 것들이 얼마든지 존재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죄에서 구원받는 것이나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함을 받는 것은 세상의 질서나 세상 원리에 기초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사람이 행한 대로, 율법에 의하여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그리고 하나님의 선물인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들은 어떤 노력에 의하여 얻어지는 것인데, 신앙의 세계는 은혜로 주어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노력하여 얻은 것이 아니라, 위로부터 오는 은혜로 사는 것입니다.
오늘 저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소개하면서 그의 그런 좋은 믿음, 하나님 앞에서 의로 여김을 받은 그 믿음을 소유하기를 소원합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라고 하였으며, 모든 민족의 조상으로 세움을 입은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신앙생활의 아주 좋은 모델이 되고 있으며, 오고 오는 세대의 사표가 되는 인물입니다. 우리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믿음, 믿음 그러는데 어떤 믿음이어야 합니까?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받을 믿음이어야 합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을 본받아 성장하였으면 좋겠습니다.
1.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습니다. (13-16)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줄 땅으로 가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여러분, 이런 말씀이 그에게 들려졌다는 것이 은혜입니다. 세상에 많고 많은 사람들 중에서 왜 하필이면 아브라함을 선택하신 것입니까? 하나님이 왜 아브라함을 선택하셨는지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사랑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아브라함을 사랑하셨고, 인정하셨고, 그를 통하여 이 땅에 메시아를 보내시려고 작정하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정말 은혜를 받은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시고 택하여 주셨다는 것으로 감격이요, 은혜로 알아야 합니다. 제가 어떻게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까? 제가 믿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믿음을 주셨습니다. 믿게 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택한 것이 아니라, 우리 주님이 우리를 먼저 사랑하시고 택하여 주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요15:16)고 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가 사랑하셨고, 인도하셨고, 믿어 구원받게 하셨으니 오직 은혜로 구원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그것을 은혜로 알았고, 감사하면서 믿고 순종하여 나아간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도덕적으로 우리보다 더 나은 사람이어서 인정을 받은 것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우리의 도덕과 윤리가 아브라함보다 났다고 자랑할 것도 사실은 없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듣고 믿었으면서도 애굽에 내려가서는 부인 사래를 누이라고 속여 말하였습니다. 세상적으로 보면 이제 부인을 내어준 것입니다. 자기 부인을 누이라고 말하면서 돈 받고 파는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지켜주셨으니 살아날 수 있었습니다. 어디 거짓말을 하고 애굽의 황제 바로를 속이고도 살아남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였습니까? 하나님이 지켜주시니 금은 보화를 얻어 살아 나올 수 있었습니다. 그랄이란 지방에 가서도 아비멜렉이라고 부르는 왕에게 부인 사라를 빼앗겼는데, 하나님이 첫날밤에 꿈으로 야단치셔서 아브라함의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우리의 믿음을 윤리, 도덕의 관점에서 다루지 말아야 합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인정을 받은 것은 선행으로 된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되었습니다.
하루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에 나타나셔서 "나는 네 방패요, 네 큰 상급이니라"고 했습니다. 아브람은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 하나이까? 나는 자식이 없사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이니이다. 주께서 내게 씨를 주지 아니하셨으니 내 집에서 길린 자가 내 상속자가 될 것이니이다" 그 때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 그 사람이 네 상속자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상속자가 되리라.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고 하셨습니다. 그 때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공의로 여기시고"(창15:6)라고 하셨습니다. 이런 일은 아브라함에게 할례를 명령하고 따른 것보다 먼저 일어난 사건입니다. 은혜의 계약이 먼저였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 나는 다른 사람들보다 더 경건하고 구제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서 구원받는다고 말하지 말아야 합니다. 율법을 강조하고, 율법만 말하면 하나님의 진노만 부르게 되고, 죄가 죄 되게 할 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율법을 놓고 판단 받고, 점수를 얻으려고 할 것입니까? 아니면 사랑의 하나님, 우리를 구원해주신다고 약속하신 하나님만 믿고 신뢰하고 맡길 것입니까? 나의 행위를 내세우고, 행위가 선하다고 알아달라고 하는 것보다는 하나님의 신실하신 약속에다 우리의 운명을 걸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긍휼히 여기시는 은혜에 모든 것을 걸고 나가야 합니다. 우리 주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이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서 내 세울만한 것을 찾고 있을 때 아브라함은 그냥 무조건적으로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인 사람입니다. 아브라함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공의로 받아주신 것입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하나님을 믿으세요. 하나님의 약속하심을 믿고 나가야 합니다. 하나님만 믿습니다. 믿고 맡겨야 합니다.
2.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믿었습니다. (17-21)
17절 말씀에 "기록된 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가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시니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온 우주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이시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크고 놀라우십니다. 하나님으로 하나님이 되게 해야합니다.
창세기17장에 보면 아브람이라는 이름을 아브라함이라고 개명하고, 사래라는 이름을 사라라고 고치고 있습니다. 이 때 아브라함의 나이 99세요, 사라의 나이가 89세였으며 바로 할례의식을 거행한 후였습니다. 이 부부는 나이를 모르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도 나이 100세가 되었다고 하면 죽을 날만 기다리는 사람들입니다. 옛날 혹 오래 살던 시절이라고 하여도 아브라함과 사라는 정말 하나님을 믿은 사람들입니다. 이름을 고치라고 하여, '고귀한 아버지'라는 아브람을 '열국의 아버지'라는 뜻의 아브라함이라고 고치고 있습니다. 무엇을 믿고 그러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들 부부가 나이가 많은 것도 모르는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도 자식이 없었는데, 나이 90세의 할머니가 무슨 자식을 보겠다고 그러는 것입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것은 그분의 하나님 되심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이라는 이름을 말할 때에, 전능하신 하나님,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능치 못할 일이 없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도 점진적인 믿음이라는 생각을 가집니다. 아브라함이 조카 롯과 헤어지고 갈라서는 장면을 보면 성숙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바벨론 지역의 연합군을 물리치고 돌아올 때에 제사장이요 살렘 왕인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을 축복하러 왔는데, 그에게 십의 일을 드리는 것도 성숙한 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키지 말 것을 기도하는 장면은 그의 조카를 살려보려는 간절한 마음이 들어 있습니다. 그가 사라를 통하여 아들을 본 후에 첩 하갈과 이스마엘을 보내는데, 참으로 몰인정하게 보내는 것 같습니다.
사라가 아브라함에게 협박하다시피 요청합니다. "이 여종과 그 아들을 내 쫓으라 이 종의 아들은 내 아들 이삭과 함께 기업을 얻지 못하리라"고 합니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니 참으로 기막히고 결단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언제는 하갈을 통하여 자식을 보라고 해놓고, 이제 자기 자식이 생기니 무조건 내쫓으라고 합니다. 이 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네 아이나 네 여종으로 말미암아 근심하지 말고 사라가 네게 이른 말을 다 들으라. 이삭에게서 나는 자라야 네 씨라 부를 것임이니라" 여러분, 이 때에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실천에 옮깁니다. 떡 조금 싸주고 물 한 가죽부대를 어깨에 메어주고 그냥 아무런 대책을 세우지 않고 내보내고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이 하라고 하시니 하는 것이요, 하나님이 책임지실 것이기에 믿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박절한 것입니까? 그래도 하나님이 시키시는 것은 다 유익하게 하셨고, 다 생각하시는 것이 있고, 깊은 뜻이 있어서 시킨 것입니다.
다시 하나님은 이삭을 제물로 드리라고 하실 때에도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하나님 앞에 드리고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내가 믿는 하나님, 나에게 유익을 주시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으며, 나의 생사를 책임지는 하나님이 되신다고 믿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으로 주시고 싶어하시는 아버지가 되십니다.
18절 말씀에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셨습니다.
사실 100세의 아브라함이나 90세의 사라는 자기들의 몸이란 죽은 것 같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하신다고 하면 하시는 것이요, 거기에 아니라고 토를 달고 안될 이유를 말할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무슨 똑똑하다고 합리적인 이론을 가져올 것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세계는 우리의 이해를 초월하여 그 능력이 무궁무진하기 때문에 인간의 사리분별력의 도움을 받지 않습니다.
내가 믿는 하나님은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이요, 온 우주 만물을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이라고 할 때에 무엇을 두려워할 것입니까? 조금도 염려할 것이 없습니다. 우리의 믿음을 약하게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아브라함은 그의 믿음을 견고히 하였다고 했습니다.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믿고 매달리는 사람을 귀하게 여기고 하나님은 그런 이들을 의롭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라고 하신 것은 우리들에게 다 유익이 되므로 하라고 하신 것이요, 또 하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으실 때에 좋으신 하나님으로 믿어야 합니다.
3. 아브라함의 믿음은 곧 우리의 믿음입니다. (22-25)
사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어려운 말씀입니다. 그러나 지금 아브라함의 믿음을 말하는 것은 우리를 위하여 하시는 말씀이요, 하나님의 약속을 액면 그대로 믿는 것을 보시고 그것을 의롭게 여기신 것은 아브라함만을 위한 은혜가 아니라, 오늘 우리를 위한 약속이요, 은혜인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을 때에 은혜로,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나 같은 죄인도 버리지 않으시고 구원하여 주시고 선택하여 주신 것을 생각하면서 감사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기쁨과 감사의 감격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랫동안 믿음을 가지다 보니 슬그머니 율법으로 돌아가려고 합니다. 우리 인간의 상식을 가지고 살고, 예전을 경험 삼아 사는데, 행위를 강조하려고 합니다. 하나님은 그런 행위나 율법으로는 구원받을 사람이 없기 때문에 하나뿐이신 독생 성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어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아니시고 하나님이 되시기에 한번 약속하신 것을 영원히 지키시고 그 약속은 지금도 유효합니다. 하나님이 먼저 택하시고 사랑하시고 키워주시고 영광 받으시고 있습니다. 내가 행동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령에 이끌림을 받았고, 내가 쓰여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정리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을 믿으면 구약에서 신약으로 이어지는 전체를 믿는 것이 됩니다. 예수님은 구약을 성취하시고 완성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구속사의 정점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언약이라고 하니 우리와 동등하게 맺은 언약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일방적인 통보요, 우리는 믿음으로 응답하였는데, 알고 보니 그 믿음도 하나님의 선물이었고, 은혜였습니다. 옛날 아브라함의 믿음만이 위대하고 우리의 지금 믿음은 보잘것없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우리의 범죄함 때문에 십자가에 내어주셨고,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났습니다. 우리가 믿었기 때문에 의롭게 된 것이 아니라, 믿은 것을 의롭다고 여기신 것입니다. 믿었기 때문에 의롭게 된 것이라고 하면 그 믿음 자체가 공로가 됩니다. 의롭게 되는 것이 내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의롭게 여기신 것입니다.
내가 열심히 믿은 것 같은데 하나님이 믿음을 주셨고, 믿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모든 것은 은혜로 구원받은 것입니다. 오직 믿음과 신뢰로 하나님 앞에 나가야겠습니다.
오늘 아브라함의 믿음을 우리의 것으로 만들고 아브라함이 오직 하나님만 a믿고 순종한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자녀로 구원받은 감격과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여겨주시는 은총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약하여지지 않는 믿음
로마서 4:16-24 / 김광일 목사
세군을 창설한 윌리암 부스(William Booth) 대장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젊은 시절 하나님께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목사가 되기로 지원을 했습니다. 그런데 의사가 몸을 진단해 보더니 뜻밖에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은 너무나 병약하기 때문에 이 몸으로는 목사가 될 수 없습니다. 목사가 되었다가는 일 년 안에 목회를 못하고 쓰러져 죽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목사가 될 생각은 아예 꿈에도 꾸지 마십시오.” 그러나 그는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도리어 순교할 각오로 목사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날까지 복음을 전하다 죽겠다는 각오를 가지고 목사가 되었습니다. 신실하신 하나님이 그를 붙들어 주셨습니다. 오른손으로 그를 붙드시고 사용하셨습니다. 그는 84세까지 살면서 건강한 사람보다도 더 많은 일을 했습니다. 많은 구제 사업을 펼쳤습니다. 노년에 당시의 왕인 에드워드 7세가 그를 버킹검 궁으로 초대했습니다. 그의 노고를 치하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왕은 방명록에 서명을 하고, 남기고 싶은 말을 한 마디 쓰라고 했습니다. 그때 윌리암 부스가 방명록에 이런 말을 썼습니다. “어떤 사람의 야망은 예술입니다. 어떤 사람의 야망은 명성입니다. 어떤 사람의 야망은 황금입니다. 그러나 나의 야망은 오직 한 가지, 사람들의 영혼구원입니다.” 그는 영혼구원의 열정을 가지고 평생토록 복음을 전하면서 불쌍한 이웃 사람들을 구제하는 일에 헌신했습니다. 신실하신 하나님은 그와 함께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가 병약한 몸이었지만 건강한 사람들보다도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말년에 그는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젊었던 시절에 저는 목사가 되기를 원했었습니다. 그때 제 몸을 진단했던 의사가 날 버렸습니다. 그래서 나도 그때 의사를 버리기로 했습니다. 나는 믿음이 약하여지지 않았습니다. 그때부터 나는 신실하신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만을 바라보면서 하나님만을 믿고 의지하기로 결심을 굳혔습니다. 약하여지지 않는 그 믿음이 지금까지 나를 지켜주었습니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실망시키시는 법이 없습니다. 자신을 믿으면 실망할 때가 옵니다. 사람을 믿으면 우리 곁을 떠날 때가 옵니다. 돈과 명예를 믿으면 그것이 사라질 때가 오고야 말 것입니다. 그러나 신실하신 하나님을 믿으면 결코 후회하는 법이 없습니다.
환경을 바라보다가 의심하는 상황이 펼쳐질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약속한 것을 이루어 주실까? 기도가 정말 응답될까? 비전은 이루어질 수 있을까?” 그러나 이때에 우리는 믿음이 약해지지 말아야 합니다. 믿음을 가지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믿음을 유지시키는 일입니다. 믿음의 사람은 언제든지 약해지려는 유혹을 이겨야만 합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이 약해질 때마다 하나님과의 만남을 지속적으로 가졌습니다. 그 결과 믿음이 더욱 견고해졌습니다. 그러므로 힘들다고 하나님의 손을 놓아버리면 안 됩니다. 우리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핍박이 두려워서 놓아버리고, 지쳤다고 놓아버리고, 세상 유혹에 흔들려 놓아버리고, 눈앞의 현실이 불리하다고 놓아버리는 연약한 믿음의 모습이 아닙니까? 성도는 흔들릴수록 더 확신에 서야 합니다. 시험이 올수록 하나님을 굳게 붙잡아야 합니다. 어떤 상황에 놓여 있는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는 일이 더욱 더 중요합니다.
복음성가 ‘전능하신 나의 주 하나님’ 찬양합니다. “전능하신 나의 주 하나님은 능치 못하실 일 전혀없네 우리의 모든 간구도 우리의 모든 생각도 우리의 모든 꿈과 모든 소망도 신실하신 나의 주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괴로움 바꿀 수 있네 불가능한일 행하시고 죽은 자를 일으키시니 그를 이길 자 아무도 없네 주의 말씀 의지하여 깊은 곳에 그물 던져 오늘 그가 놀라운 일을 이루시는 것 보라 주의 말씀 의지하여 믿음으로 그물 던져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함 없네”
본문 19절입니다. “그가 백세나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영역을 보면 ‘His body was as good as dead’ 라고 과거 완료시제로 기록하였습니다. ‘죽은 것 같고’는 이미 죽었음을 뜻합니다. 다시 말하면 아브라함의 생산능력이 완전히 상실되어 인간의 방법으로는 도저히 자녀를 낳을 수 없는 몸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현재적 상황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아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아는 것을 넘어서는 믿음입니다. 환경과 상황 때문에 믿음이 약해지는 것은 아닙니까? 어떠한 상황에도 능치 못함이 없으신 하나님을 믿으십니까? 도대체 아브라함은 어떠한 믿음을 가졌기에 약하여지지 아니하였습니까? ‘약하여지지 않는 믿음’은 어떠한 믿음입니까? 어떠한 하나님을 바라야 믿음이 약해지지 아니합니까?
첫째로 창조의 하나님을 바라라
프랑스의 조각가 중에서 로댕 다음으로 각광을 받는 조각가가 있다면 세자르 발다치니(Cesar Baldaccini)입니다. 세자르는 마르세유 미술학교와 파리미술학교에서 조각을 전공했습니다. 1950년대 이후 프랑스 예술계를 풍미한 누보 레알리즘의 거장으로 주로 금속재료를 이용한 작품을 시작으로 철사, 철근, 볼트, 스프링 등 산업화의 부산물인 금속폐품을 압축 또는 팽창시킨 작품들을 제작하였습니다. 고철용접작품으로 주목을 받기 시작했고, 자동차 3대를 압축하여 쌓은 작품을 발표하여 사람들을 놀라게도 했습니다. 자동차, 냉장고, 컴퓨터 등 다양한 고철들을 용접하거나 압축하는 방법으로 현대사회의 단면을 표현하였습니다. 잠실 올림픽공원에 있는 조각품 ‘엄지손가락’이 그의 작품입니다. 세자르는 어린 시절 가난해서 배우지도 못하고 조각할 수 있는 재료를 살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버려진 물건들을 주어다가 그 물건의 특징을 살려서 조각품을 만들곤 하던 것이 오늘의 세자르가 되게 하였던 것입니다. 그의 작업장을 보면 마치 철공소 같기도 하고, 폐품 수집장 같은 인상을 풍기기도 했습니다. 부서지고 녹슬고, 버려진 것들이라도 조각가의 손에 들어가기만 하면 신기한 작품으로 바뀝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폐품을 가지고 작품을 만드는 조각가의 작업과 비슷합니다. 하나님은 죄인을 만지셔서 의인으로 변화시켜 주시고, 병든 자를 만지셔서 건강한 사람으로 만드시고, 가난한 사람을 부하게 하시고, 약한 자를 강하게 하시고, 미련한 자를 지혜롭게 하십니다. 어떤 절망적인 상황 속에 있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만지심이 있으면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아기를 낳을 수 없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기도하여 창조하시는 하나님의 만지심을 경험하였습니다.
본문 17절입니다. “기록된 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가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시니라.” 여기의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에서 ‘부르시는’ 이라는 단어는 ‘존재하게 하다’, ‘창조하다’라는 의미를 지닙니다. 아브라함이 믿은 하나님은 부활과 창조의 하나님입니다. 부활과 창조의 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존재만이 율법과 상관없이, 신분에 상관없이, 업적에 상관없이 믿음만 보시고 의롭다고 인정하여 주십니다.
바울은 하나님만이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존재라고 강조합니다. 무로부터 창조를 가리킵니다. 없다는 것과 있다는 것의 차이를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컴퓨터는 있는 것의 기술적인 변형에 불과하지 창조는 아닙니다. 무로부터 유를 가능하게 하는 능력은 오직 하나님께만 속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믿은 하나님은 창조의 하나님입니다. 창조의 하나님만이 새롭게 만드십니다. 그때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단 한 가지, 믿음입니다.
둘째로 능력의 하나님을 바라라
프린스톤 대학 교수 로버트 윌슨(Robert Wilson) 박사는 기쁨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기쁨은 제자들이 목회자가 되어 신학교에 와서 설교하며 목회보고를 듣는 일이었습니다. 제자들의 성장한 모습을 보는 것이 유일한 낙이었습니다. 한번은 제자가 와서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작은 도시에서 목회하고 있습니다. 큰 욕심을 부리지 않으려고 합니다. 교인은 많지 않지만 저는 현실에 만족하면서 죄 짓지 않고 성실하게 살려고 노력합니다.” 그런데 설교가 끝나자마자 윌슨 교수는 제자의 어깨를 툭 치며 “자네의 설교를 두 번 다시 들을 수 없을 것 같네” “왜요?” “Your God is too small (자네의 하나님은 너무 작다) 다음에 자네를 통해 하나님이 큰일을 했다는 소식을 도무지 들을 수 없을 것 같아서 말이야.”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작은 하나님이 아니라 능력의 크신 하나님이십니다. 여러분이 믿는 하나님은 작지 않습니까? 우주보다 크신 하나님을 작은 하나님으로 축소시켜 아무것도 하실 수 없도록 무능한 하나님으로 만든 것은 아닙니까? 과연 우리의 믿음은 어떠합니까?
본문 18절입니다.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아브라함의 신앙은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는 신앙이었습니다. ‘바랄 수 없는 것은’ 인간적인 면에서 절망적이며 불가능한 상태이고 또 ‘바랐다’는 것은 하나님 편에서의 가능성을 희망하고 믿었다는 의미입니다. 불가능하게 여겨졌지만 하나님이 말씀하시니 믿었습니다.
바랄만한 것을 바라며 믿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바랄 수 없는 것을 믿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자식이 없는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수많은 민족의 조상이 될 것이며, 후손을 통해서 세상의 많은 족속이 복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지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바라며 기다렸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믿음이 약해질 수밖에 없는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아브라함은 바랄 수 없는 것을 되게 하시는 능력의 하나님을 바라며 믿었습니다.
셋째로 약속의 하나님을 바라라
미안마에서 선교사로 활동하던 아도니람 저드슨(Adoniram Judson)이 감옥에 갇혔을 때 그의 선교사업은 수포로 돌아갈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를 잡아 감옥에 가둔 사람들은 조롱하며 그에게 물었습니다. ‘이봐 저드슨, 선교의 전망이 어떻소?’ 그때 저드슨 선교사는 주저하지 않고 강하게 대답했습니다. “선교의 전망은 아주 밝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 하셨으니까요.”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사람들은 소망이 가득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때가 되면 반드시 이루어지리라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아프리카 선교에 평생을 바쳤던 선교사 리빙스턴은 이런 고백을 하였습니다. “내가 말이 통하지 않는 이곳에서 적대적인 태도를 보이는 사람들 속에서도 나날을 살아가면서도 용기를 잃지 않고 선교할 수 있었던 까닭은 약속을 믿고 의지하였기 때문입니다. 바로 마태복음 28장 20절에 있는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는 예수그리스도의 약속입니다.”
본문 21절입니다.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이것이 위대한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여주는 이유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을 이루어주실 줄로 믿었습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 믿음의 역사가 나타나지 않는 중요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는데 있습니다.
불확실한 것은 따라가지 않습니다. 확률에 의해서 움직이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은 확실함에도 불구하고 믿지 않습니다. 만약 하나님의 약속이 지켜지지 않았다면 기독교는 거짓종교입니다. 창세기 1장부터 요한계시록 22장까지 하나님의 약속은 모두 성취되었습니다. 모름지기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순종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고린도후서 1장 20절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 하나님의 약속은 언제나 ‘예’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나아갈 때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습니다.
인천상륙작전을 성공한 맥아더(Douglas MacArthur) 장군이 미국 국회에서 연설하였습니다. "노병은 결코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라고 말하여 많은 사람들의 박수를 받았습니다.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의 거실 벽에 다음과 같은 문구가 적혀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젊음을 지속할 수 있는가? 그것은 오직 한 길, 하나님을 믿으시오." 하나님은 아브라함처럼 믿는 믿음의 사람이 되기 원하십니다. 말씀대로 이루어질 것을 확신하기를 기대하십니다. 불가능하게 여겨지는 상황에서도 믿음이 약해지지 않고 더 견고해지기를 원하십니다.
믿음이 약해지지 마시기 바랍니다. 부디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창조주 하나님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바랄 수 없는 가운데도 바라게 하시는 능력의 하나님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약속하신 것을 능히 이루시는 하나님을 바람으로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 믿음 그 귀한 믿음
로마서 4:15-25 / 김삼환 목사
이 세상에 믿음같이 귀한 것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오늘 이 시간 나온 모든 성도들, 정말 귀한 믿음, 영원히 변치 않고 그 믿음 생활 잘 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2천년을 지금 한 달 남겨놓고 있습니다. 오늘은 11월 마지막 주일입니다. 대단한 일이 있을 것 같았지만 역시 2천년은 대단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앞으로 우리가 천년을 더 산다 할지라도 특별한 일은 없습니다. 우리는 적어도 양 세기를 걸쳐서 살고 있고 양 천년의 길목에 서 있는, 양 천년을 함께 걸어가는, 역사적으로 하나님 앞에 특별하게 은혜 받은 성도들입니다. 우리가 천년도 살지만 2천년부터 또 한 천년을 살게 되었으니 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이건 감격스러운 일입니다.
또 감사한 일들도 많습니다. 우리는 북한에 태어나지 않고 남한에 태어난 것도 너무 감사하고 목회를 하든 교회에 다니든 50년 전, 100년 전에 믿었더라면 얼마나 어려웠을 텐데 우리는 우리 조상들이 땀 흘려, 눈물 흘려 고생하고 순교의 피 흘려 세워준 이 터 위에 이 영광, 이 평안을 누리고 있으니 이것 또한 큰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잘 태어났고 잘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앞으로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앞으로 기대하고 바라고 의지할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영원히 주님 한 분만을 잘 믿는 자로 이 세상을 살 때만이 남은 한 천년을 다 살지 못하지만 우리는 얼마까지 이 세상에 머물지 모르는 남은 생애를 주와 함께 승리하리라고 믿는 것입니다. 주님만 우리에게 실망시키지 않습니다. 주님만이 우리의 삶을 알차게 하고 석류 알처럼 가득 가득 내 잔이 넘치게 채워 주셔서 주님만이 나의 소망이시오 꿈이시오 힘이신 것입니다. 주님 없는 2001년, 주님이 없는 2010년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또 있어도 헛된 것입니다.
30년 전 옥스퍼드 대학에는 신입생들의 자살 사건이 연달아 일어났습니다. 이것은 대학의 문제가 아니고 세계적인 명문 대학에 자살 사건이 일어나니까 세계의 많은 이목이 집중되고 사회문제가 되었습니다. 왜 자살할까? 옥스퍼드 같은 대학에 들어와서 학생들이 자살할 이유가 뭔가? 조사를 해 보았습니다. 알고 보니 문제는 간단했습니다. 영국의 귀족 집 아들들이, 부잣집 자녀들이 그리고 미국과 유럽에 가 있는 제일 잘 살고 모든 영광을 누리고 있는 권력층에 있는 모든 분들이 자녀들을 옥스퍼드 대학에 보내기 위해서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날마다 압력을 주는 것입니다.
'너는 옥스퍼드 대학에 들어가라, 옥스퍼드에 가야된다, 그렇게 해서 옥스퍼드에 갈 수 있겠냐, 이렇게 해야 옥스퍼드에 들어갈 수 있다' 자나깨나 옥스퍼드 옥스퍼드 밥 먹든지 만나든지 옥스퍼드 옥스퍼드하고 그 좁은 문을 통과해서 옥스퍼드에 들어왔습니다. 옥스퍼드에 오면 다 있는 줄 알았습니다. 옥스퍼드에 들어가면 다 되는 줄 알았습니다. 하늘에 올라가는 줄 알았습니다. 천국에 온 줄 알았습니다. 가보니 옥스퍼드는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옥스퍼드는 우리가 찾는 걸 하나도 주지 않았습니다. 옥스퍼드는 역시 허무한 것밖에 없습니다. 더 큰 좌절과 허무함과 절망을 가지고 술을 멀고 타락한 길로 걸어가는 수많은 세대, 그리고 많은 학생들이 자살해 죽기 시작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는 많은 사람들이 어디에 무엇이 있고, 21세기에 어디에, 세계에 어디에, 무엇을 하면 우리가 무엇이 거기에 있는 줄 알지만 이 세상 높은 산 위에 올라가도 산 위에도 없고 저 바다 속에 가도 바다 속에도 없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찾아야 하고 "내게로 나오라"고 주님은 말씀합니다. "목마른 자들아 내게로 오라" 학문에 목마르고 지식에 목마르고 이 세상 사랑과 행복과 꿈에 목마른 자들아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목마른 자들아 내가 너희에게 주는 생수는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 라고 주님이 말씀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정말 돈만 있으면 돈은 방망이인 줄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무슨 신비한 요술 방망이가 되어서 안나오는 것이 없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좋은 집을 가지면 집안에 없는 것이 없이 다 가지고, 다 부족함이 없는 줄로 생각합니다. 오늘 성가대에서 찬양한대로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예수님이 선한 목자예요. 주님을 떠나서는 아무 것도 얻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앞으로 우리에게 오는 미래, 어떤 것에도 주님이 주시는 것과 비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찾는 것은 주님께 가야만이, 주님의 품에 안기울 때만이, 그 분을 믿고 나의 구주로 영접할 때만이 있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모든 이 세상에 있는 것을 버리고 주님에게로 나아가서 주님을 믿는 그 믿음을 더 확실하게 해야 되고 믿음을 든든하게 해야 할 것입니다.
등산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높은 곳에 올라가고자 하는 마음이 다 있다고 합니다. 좋은 마음 같지만 성서적으로 보면 욕심입니다. 또 등산하는 사람은 저 사람보다 더 높은 산에 올라가려고, 그리고 산에 올라가면 그 다음에는 몇 번 올라갔느냐 그 기록 세우기 위해서 평생 산에 올라가다가 제일 일찍이 죽고 제 명에 못살고 제일 사고가 많은 것이 등산 하다가 조난을 당하고 생명을 잃는 사람이 제일 많습니다. 올라 다도 또 별것 아닙니다. 그냥 '만세' 하고 사진 찍고 내려옵니다. 몇 년을 노력하고 돈을 어마하게 들이고 온갖 고생을 하고 지난주에도 등산했다가 발이 동상 걸려서 그냥 다 없어졌습니다. 달아났습니다. 다 잘라 버렸어요. 아무 것도 얻은 것 없습니다. 산에 왜 올라가느냐? 산이 있기 때문에 산에 간다는 정신없는 말이 어디 있는지 모르겠어요. 산에 산밖에 없습니까?
예수님에게 나아갈 때 예수님밖에 없어요? 우리가 찾는 모든 것이 내게 있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주님에게 가면 모든 것을 얻어서 내 잔이 넘치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등산의 욕심으로 살아서는 안됩니다. 더 높은 산, 너보다 조금 더 올라가고 그래서 제일 처음 등산할 때는 우리나라 산을 다 누벼요. 서울을 다 누비고 그 다음 지방 가서 소백산 올라가고 설악산 올라가고 한라산 올라가고 다 올라가고 그 다음 어디로 가는지 아세요? 일본 후지산으로 갑니다. 그 다음은 대만으로 갑니다. 그 다음은 중국으로 갑니다. 그 다음은 록키 산으로 갑니다. 그 다음은 네팔로 갑니다. 히말라야로 갑니다. 또 한번 올라가고 끝나는 게 아닙니다. 올라 간 것은 다 잊어버리고, 가진 것은 아무 의미가 없고 그 다음에는 더 높이 8천 미터, 또 8천 미터를 몇 번 올라갔느냐 그 기록을 세우려고 다른 것 일절 하지 않고 산에 맞추어서 더 높이, 더 높이... 오늘 현대인들은 등산인의 질병에 걸렸습니다.
차가 좋은데도 더 좋은 차, 집이 좋은데도 더 좋은 집 그래서 얼마나 이사를 많이 다니는지요. 우리 나라 사람같이 차를 자주 바꾸는 사람이 세계에 없다고 합니다. 계속 바꾸는 거예요. 더 좋은 차, 더 좋은 차 합니다. 더 좋은 차 없습니다. 더 빨리, 더 빨리. 생명을 잃을 수밖에 없습니다.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의지하는 내 주를 더 의지하고, 사랑하는 주님을 더 사랑하고, 믿는 주님을 더 믿어서 영적으로 내가 더 8천 미터로, 9천 미터로 내 영혼이 위를 향해 올라 갈 때만이 우리는 그 곳에서 말할 수 없는 주님의 위로와 은혜가 임할 줄로 믿습니다.
어떤 분은 또 결혼도 신비한 결혼을 하려고 해요. 스카이 다이버와 같이 신랑 신부 둘이 뛰어 내려 가지고 결혼식을 합니다. 거기서 뛰어 내려 가지고 결혼식을 하면 뭐 특별합니까, 특별한 결혼식, 특별한 장소에서 특별한 드레스 입고 특별한 신혼 여행 특별한 사람을 만나고 특별한 사람이 어디 있어요. 어떤 분은 신부를 찾는데 아무래도 마음에 드는 사람이 없어서 하나님 앞에 나와 기도합니다. '주여! 제일 예쁘고 키도 크고 인물도 좋고 마음도 좋고 그리고 족보도 좋아서 조상 대대로 특별한 자손을 만나게 해 주시고 좋은 학력을 가진 좋은 사람 만나게 해 주소서'. 몇 달을 주님 앞에 기도하는데 응답이 왔어요. '얘야, 그런 사람은 나도 못 만났다'. 어디에 그런 사람이 있습니까. 주님을 찾고 주님을 만나서 주님의 품안에서 행복을, 안식을, 자유를, 축복을 누리는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 하나를 끝까지 지키고 믿음으로 살았던 믿음의 사람입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을 산으로 알고 믿음의 산을 끊임없이 올라간 사람, 믿음의 길을 달려간 사람, 계속하여 평생을 잘 믿어 믿음으로 승리한 삶입니다. 아브라함은 경쟁을 안 했습니다. 사람과 어디 좋은 땅이 있어서 땅을 찾아간 것도 아니고 세상의 어디 무엇을 찾아간 삶이 아닙니다. 믿음을 찾아간 삶이에요. 그래서 좋은 땅이 있는데도 조카 롯을 향해서 '네가 이곳을 하면 내가 저곳을 하겠다' 양보 다 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좀 양보하며 살아가십시오. 부장? 좀 양보 좀 해 보세요. 잘 사는 것? 양보 좀 하며 살아보세요. 우리의 축복이 거기에 있지 않다 라는 걸 여러분이 증거 할 수 있는 그런 경험을 가지시길 바랍니다. 대학교 총장, 좀 양보하세요. 국회의원, 좀 양보하며 살 수 없어요? 금메달 좀 양보할 수 없어요? 그게 뭔데 그거 얻으려고 그러십니까?
이 세상에 생명 걸고 싸울 일은 예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정말 생명 걸고 믿음을 지켜야 되지만 이 땅에 있는 것은 아브라함처럼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고, 네가 좌하면 나는 우 하겠다' 이렇게 선택을 롯에게 주었습니다. 그래서 롯이 히히히 정말이세요? 삼촌은 항상 저렇게 착하다니까요 후회 안 하시겠지요? 후회 안 한다 네가 어디든지 선택해라 괜찮다, 나는 좋은 것이 이것저것 물질적으로 계산 할 줄 몰라, 주님이 귀하기 때문에 어디 가서도 나는 주님을 섬김으로 사는 믿음 있으면 이 하나로 승리할 줄로 믿는 것, 이것이 바로 신앙인의 선택인 줄로 믿습니다.
사람 보십시오. 청교도들이 102명이 다 없어도 하나님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하고 배를 타고 정처 없이 가는 거예요.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그냥 가는 거예요. 어디 가느냐? 믿음으로 가는 거예요. 믿음으로 사는 거예요. 내 가는 길이 확실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어려운 일이 있어도 괜찮아요. 믿음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기 때문에 모든 고국의 부귀영광, 논밭전지, 온갖 영화스러운 것 다 두고 배를 타고 떠난 사람이 청교도예요. 사랑하는 여러분, 더 좋은 땅으로 가지말고 더 잘 믿기 위해 이사갈 수 없습니까? 교회와 좀더 가까운 곳에서 신앙 생활 할 수 없습니까? 내 신앙 생활에 방해되는 것 좀 버리고 살아갈 수 없습니까? 신앙이 귀한 줄 알면 믿음대로 살아야 될 것 아닙니까?. 우리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습니다. 주님만이 우리의 생명이시오 기쁨이시오 우리가 찾는 모든 것을 갖고 계시는 분이 바로 주님이신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믿습니까? 우리 성도들이 믿는 것을 정리를 하면, 사도신경이 중심입니다. 사도신경은 신, 구약 성경 66권의 엑기스입니다. 성경을 다 믿어야 되지만 사도신경을 믿으면 전체를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걸 믿고 예배 드리는 거예요. 사도신경 외우고 찬송하라는 거예요. 사도신경 외우고 기도하고, 사도신경 외우고 헌금하는 거예요. 사도신경 외우고 그 다음에 고백하고 그 다음에 말씀 듣는 거예요. 사도신경이 뭐예요? 중요한 것은 다섯 가지예요.
첫째,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는 거예요.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만물을 창조하신 분이에요. 이 모든 것 창조하신 아버지 앞에 그래서 예배를 드리는 거예요. 두 번째는, 그의 아들을 믿는 거예요. 나를 구원하시려 이 땅위에 동정녀 마리아에게 탄생하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예수님을 믿는 거예요. 세 번째는, 성령을 믿는 거예요. 나와 함께 하시는 보혜사 성령을 믿는 거예요. 네 번째는, 예수님은 다시 오신다는 거예요. 구름 타고 오십니다. ♪구름 타시고 다시 오시네 나팔 불 때에 다시 오시네♪ 나팔 불 때에 주님은 재림의 주님으로 온 인류를 이 땅위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을 천국으로 영접하기 위해 오시는 거예요.
다섯 번째는 다시 오실 주님이 재림의 주님으로 오실 때에 나도 부활하여 영원히 살 것을 믿는 거예요. 이 다섯 가지를 믿으려고 우리가 교회에 나오는 거예요. 이 다섯 가지가 우리의 생명이에요. 그런데 이 다섯 가지를 따로 다 믿는 것은 아니에요. 전공과목처럼 다섯 가지가 다 하나 하나로 나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영접하면 그물처럼 다섯 가지가 따라 오게 되어 있어요.
예수 믿으면 하나님은 나의 아버지가 되시고 창조자는 나의 아버지가 되시고, 예수 믿으면 성령은 나와 함께 하시고, 예수 믿으면 내가 주님의 은혜로 죄사함 받고 구원함을 받을 줄로 믿는 거예요. 그러니까 예수 믿는 것이 전부예요. 예수를 믿는 것이 가장 귀해요. 그래서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이 없는 거예요. 기독교는 인간의 문제를 믿음으로 해결합니다. 인간이 인간의 힘으로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믿는 예수께서 내 문제를, 국가의 문제를, 인류의 문제를 해결하시고 우리의 가는 21세기, 나의 길을 영광스럽게 인도하실 이는 내가 아니요 내가 믿는 주 예수께서 우리를 인도하여 주시는 거예요.
서울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에 어떤 학생이 논문을 썼는데 이런 주제로 논문을 썼어요. '한국 개신교 성장의 문화적 요인이 무엇인가?' 우리 한국 개신교가 짧은 기간에 어떻게 이렇게 성장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기도 많이 하고 성경 공부도 많이 하고 전도 많이 해서 이렇게 부흥했다고 하지만 그러나 과학적인, 문화적인 측면으로 그 원인을 찾아내는 거예요. 그건 우리 생각처럼 생각하지 않고 하나 하나 그 배경을 찾아서 쓴 논문이에요. 저는 상당히 일리가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여기에 나오는 내용의 답이 뭔지 아세요? 답은, '해답 체계를 갖고 있는 의미의 체계'라고 이렇게 대답이 나왔어요. 분석한 결과가 기독교는 우리가 모두 찾고 궁금하게 생각하는 문제를 대답해 주었다 라는 거예요.
다시 쉽게 말씀을 드리면 기독교가 우리나라에 전파되었던 1885년 이후 2000년 초반까지 나라는 극도로 어렵고, 한일 합방이 되고, 을미사화, 갑신정변이라든지 갖가지 어려움을 당해 가지고 나라가 풍랑이 일어나고, 저주를 받아 남자들, 여자들이 다 붙들려서 일본에 종노릇하고, 우리도 알지 못하는 남의 나라에 가서 그냥 잿더미가 되고, 나라는 빼앗기고, 이 나라는 일본이 와서 다 지배하고, 거지같이 살고, 농사지은 것 다 빼앗아가고, 주권도 빼앗아 가고, 이름도 빼앗아 가고, 우리말까지 다 빼앗아 가고, 세상에 이런 저주가 있느냐 하는 거예요. 불교를 불교 국가로서 천 년을 내려와 이렇게 믿었는데 결과가 무어냐? 하는 거예요. 우리같이 많이 빌고 우리같이 나라에 지금도 아니 그 때에 나라에 꽉 차 있었는데, 뭐냐? 하는 거예요.
유교에서는 우리가 젓가락 하나 드는 것도 삼강오륜 가지고, 걸음 하나 걷는 것도 전부 유교에 의해서 모든 질서를 가지고 남녀칠세부동석 에서부터 모든 것 유교가 제사제도가 우리같이 세계에 조상 잘 섬기는 나라가 전에도 지금도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같이 많이 빈 데가 어디 있어요? 산이란 산은 다 빌고 나무라는 나무는 다 빌고 바가지라는 바가지는 다 가져다 놓고 빌었는데 뭐냐 하는 거예요. 답이 없다 라는 거예요. 길이 없다, 이게 뭐냐 하는 거예요. 천 오 백 년을 믿어 이것이 뭐냐 하는 거예요. 그리고 앞날에 무슨 꿈이나 소망이나 주느냐? 그것도 없는 거예요. 어떻게 해야 되느냐 하는 거예요.
길을 잃어버리고 도탄에 빠졌을 때 기독교는 우리에게 해답을 주더라는 거예요. 해답을... 나를 믿으라 는 거예요. 믿으면 구원함을 얻고 자유함을 얻고 평안을 얻고 병 고침을 받고 죄는 용서함 받고, 기독교는 대답을 미루는 종교가 아닙니다. 의문을 주는 종교가 아닙니다. 도덕적으로 우리에게 희생을 강요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그 자리에서부터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고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나라는 그렇게 어두운 시대였지만, 이스라엘 백성이 어두운 때 애굽에서 해방이 된 하나님의 말씀 속에는, 전부 자유가 있고 축복이 있고 비젼이 있고 해방이 있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있고 미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으로 우리나라의 모든 사람이 길을 찾아 교회가 이렇게 짧은 시간에 부흥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교회의 생명은 답입니다. 어두움에서 빛입니다. 절망에서 소망입니다. 죽음에서 생명인 것입니다. 사는 것입니다.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때 일제 시대 때 우리가 많이 불렀던 찬송이 '시온의 영광이 빛나는 아침' ♪시온의 영광이 빛나는 아침 어둡던 이 땅이 밝아오네 슬픔과 애통이 기쁨이 되니 시온의 영광이 비춰오네♪ 그래서 일본 사람이 이걸 못 부르게 했어요. 슬픔과 애통이 기쁨이 되고 어둠이 물러가고 자꾸 이런 찬송을 부르니까 못 부르게 했어요. 그래서 해방되고 우리 한국 교회에서 제일 많이 불렀던 찬송이 시온의 영광이 빛나는 아침이에요. 그렇습니다. 예수 믿으면 시온의 영광이 비춰옵니다. ♪슬픔과 애통이 기쁨이 되니 시온의 영광이 비춰오네♪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이 믿음 잘 지키면, 언제나 생명이요 소망이요 길이요 진리이십니다.
어두운 밤에도 빛입니다. 절망이라는 것은 주안에서는 있을 수가 없습니다. 안 되는 것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어떤 약한 자도 믿으면 그는 강한 자요 다 죽은 것 같은 아브라함도, 백 세나 되어 끝난 것 같은 아브라함도 거기서 새 생명이 태어나 이삭이라는 아들을 얻습니다. 무엇으로? 믿음으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무엇을 주셨어요?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았을 때 백세예요. 사라는 구십 세예요. 구십인데 무슨 소망이 있겠어요? 그런데도 아브라함은 아내를 보지 않아요. 자기를 보지 않아요. 누구를 보느냐? 위에 계신 하나님을 보는 거예요. 어려운 일이 있을 때 아래를 보고 어려움을 보는 분은 벌써 믿음이 아니에요. 그것과 관계없어요. 위에 계신 하나님이,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능치 못하심이 없는 하나님이 내 아버지이십니다. 할렐루야!
주님이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주님이 우리를 도우십니다. 알래스카가 1867년 소련에서 720만 불에 미국 사람에게 팔려 갔습니다. 못 쓰는 땅을 팔았습니다. 아무 것도 아닌 저주의 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저들의 손에 갈 때 석유가 펑펑 솟아났어요. 미국 52주 가운데 지금도 제일 잘 사는 주로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세상에서 버림받은 아무 쓸모 없는 돌이라도 주님의 손에 가면 모퉁이 돌이 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요긴한 돌로 우리를 사용하여 주셔서, 쓸모 없는 돌도 주님의 손에 들어가면 요긴한 돌이 되어서 하나님의 나라에 귀하게 쓰임 받고 영원히 쓰임 받는 삶이 될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이 나의 구주이십니다. 예수님이 나를 살리셨습니다. 확실히 알고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만이 나의 구주이십니다. 앞으로 여러분이 믿는 것은 다 떠나갈 것입니다. 젊음도 떠나가고 믿었던 부모형제도 떠나가고 권력도, 여러분 뒤에서 누가 밀어 주는지 모르지만 다 떠나갈 것입니다. 그러나 영원히 떠나가지 않고 여러분을 지켜주실 이는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습니다. 영원한 권력이십니다. 영원한 기쁨이시오 영원한 생명이십니다.
우리 나라에 6.25 사변 때 어떤 선교사님이 서울에서 길을 가다가 자동차가 고장이 나서 내렸는데 다리 밑에서 무슨 울음소리가 들렸어요. 그래서 가보니까 어떤 어머니가 아기를 낳아 겨울에 그 아이를 쌓아서 옷을 벗어 아기를 감싸놓고 아이는 살았는데 어머니가 얼어죽었어요. 몇 시간 안되었어요. 지금도 우리 노숙자들 얼어죽고 자살하는 사람이 많은데 그래서 어떤 학자는 6.25 사변 십 년 기간은 우리가 사느냐, 생존의 기간이었대요. 잘 사느냐 못 사느냐, 잘 먹느냐 못 먹느냐, 잘 입느냐 못 입느냐가 아니고 그냥 살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고 버텼던 때가 십 년이었어요. 그러니 뭐 얼마나 얼어죽은 사람이 많았는지 몰라요.
그래서 이 선교사가 이 아이를 데리고 가서 집에서 길렀어요. 열 두 살이 되었어요. 내가 누군지를 선교사를 통해서 알게 되었어요. 열 두 살 난 아이가 하루는 '선교사님 우리 어머니 산소에 나 좀 데려가 주세요' 그래서 선교사가 묻은 어머니의 산소에 데리고 갔어요. 겨울이었어요. 이 아이는 어머니의 무덤 앞에서 자기의 옷을 다 벗어서 어머니 무덤에 덮어 드리면서 너무 너무 추우니까 '어머니 그 때 얼마나 추우셨어요? 이보다 더 추우셨지요? 어머니, 나 살리려고 어머니가 얼어서 얼마나 추우셨습니까?' 옷을 하나 하나 벗어서 무덤에 다 덮어 드렸습니다.
오늘 우리 믿음으로 살아가는 우리 성도들, 주님이 얼마나 나 때문에 아프셨을까? 피 흘리시면서 얼마나 고생하셨을까? 나 살리려고, 내 죄를 용서하시려고 얼마나 십자가 위에서 아프셨을까? 십자가가 무슨 전시용품인 줄 아세요? 문화의 기구인 줄 아십니까? 나를 위해 돌아가신 주님의 무덤이에요. 나를 위해 생명을 버리신, 내 앞에 계신 주님이 나를 살리려고 귀한 생명을 버려주신, 나를 가리켜 준 내 앞에 무덤이에요. 그래서 우리가 이 사랑에 감동해서 늘 감사의 삶을 살고 불평하지 않는 것도 주님의 십자가 때문이요. 늘 기뻐하는 것도 소망을 갖는 것도 주님 때문인 것입니다. 사람이 어렸을 때 어머니가 돌아 가셨다든지 또 앞으로 아버지가 돌아 가신다든지 하면 사람이 성숙하듯이 교인이 왜 시시한 생각 안하고 아옹다옹 싸우고 경쟁하고 남을 억울하게 하고 우리가 왜 그런 삶을 안 사느냐 하면 주님이 나를 위해 돌아가신 것 때문이에요. 이래서 우리 교인이 크는 거예요. 생각이 달라지고 성숙한 삶을 살아가는 이유가, 똑같은 일에도 화내지 않고 남들 같이 살아가지 아니하는 이유가 예수님이 나를 위해 돌아가셨기 때문이에요.
제가 이번에 광주 집회를 갔는데 최집사님이라고 아주 잘 사는 가정에서 저를 식사 대접을 했어요. 그런데 아주 귀한 이야기를 들려 주셨어요. 그 집사님 아들이 승마를 해요. 승마 도 대학이 몇 개 대학이 있나봐요. 좁은 문인데 승마하는 사람은 대학에 들어가려면 따로 시험을 치는 것보다도 지금까지의 좋은 경력이 있어야 한대요. 국내 대회, 세계 대회의 반드시 일등한 경력이 있어야 들어 갈 수 있대요. 그래서 얘도 벌써 십 몇 년 전부터 승마를 해 왔는데 금년에 대학에 들어 갈 때이니까 1, 2위를 해도 이게 아주 중요한 일이니까 외국에서 아주 비싸게 수 천 만원을 주고 말을 사 왔대요. 그런데 경기를 바로 며칠 앞두고 하필 말이 다리가 탈이 나서 경기에 못 나가는 거예요.
오랫동안 기도하던 일인데 너무 낙심이 되어서 세상에 이럴 수가 있나 그러고, 네가 어떻게 했기에 말이 그러냐 하면서 아들한테도 막 신경질을 냈대요. 그래서 이 아들이 서울서 전화를 했는데 어머니 왜 그러시냐고, 나는 생각해보니 내가 이번 대회에 일등을 해서 내가 목표한 그 대학에 들어가면 내가 스무 살도 안 되가지고 교만해서 뭐하겠느냐고, 우리 집도 잘 살지 나도 그렇게 자꾸 금메달이나 따 가지고 좋은 대학에 들어가면 내가 뭐가 되겠냐고, 하나님이 나를 겸손하게 하시려고 일 년 재수하게 해 주신 것 나는 너무 감사하다고. 그래서 내가 들어보니 어머니가 뭐 믿습니다 그래도 실질적인 믿음은 이 아들이 훨씬 나은 거예요. 이 아들이 진짜 믿음이 있는 아들이다. 그래서 대학을 포기를 했대요. 그런데 이상하게 이 년 전에 소련에 가서 세계 주니어 대회를 하는데 거기서 메달을 딴 게 있었대요. 그래서 물었대요. 이것도 되느냐 그러니까 된다 그러더래요. 그래서 고려대학교에 들어갔다고 하면서 감사해 하면서 오히려 더 잘 되었다고 합니다. 보세요. 우리가 시험 떨어졌다 다리 부러졌다 안 됐다 그래가지고 그런 부정적인 생각, 그 게 신앙이에요?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마음에만 갖고 있는 것이 아니에요. 믿음은 언제나 해석을 해야 되고 때에 따라서는 믿음이 용기도 주고, 때에 따라서는 믿음이 양보도 하게 하고, 때에 따라서는 믿음이 순종도 하게 하고 아브라함 보세요 고향을 떠나라 해도 순종하고 아들을 바치라 해도 순종하지 않습니까? 믿음은 때에 따라서 참기도 하고 거절하기도 하고, 조금 더 읽어보면 모세의 믿음은 어떤 믿음이에요? 애굽의 왕의 자리를 거절하는 거예요. 사랑하는 여러분, 믿음은 때에 따라 거절할 때도 있습니다. 죄의 길, 악한 길, 불의한 길이 있을 때는, 부정부패 잘못된 길에는 믿는 것 때문에 거절해야 해요. 믿음은 언제나 믿음 지키기 위해서 믿음에 맞지 않는 것은 버리기도 하고 참기도 하고 거절하기도 하고 순종하기도 하고 따라가기도 하고 믿음은 주님과 나와 계약 관계이기 때문에 주일은 반드시 지키는 순종의 삶이 있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믿음은 교회를 사랑합니다. 복음을 증거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않는 것은 담대하게 저항하기도 합니다.
제가 이번에 책에 보니까 KBS에서 이상한 교수 하나가 기독교에 대해서 굉장히 비난하는 강의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예수님이 사생자라고 하고요. 미쳐도 보통 미친 것이 아니지요. 이런 강의를 하면 교인들은 본능적으로 달려들어야 합니다. 보잘것없는 사람이 이 천 년 동안 온 인류가 믿어 내려오는 전 세계의 왕의 왕들이 다 엎드리는 주님 앞에 당신이 사생자라고? 빗발치듯 전화해야 할 것 아니냐 말예요. 가만히 있으면 돼요? 우리나라 학교마다 단군이 교회에서 단군상 철거하는 운동이 있는데도 교인들이 뭐 그런 걸 철거 하냐고, 단군이 있는 분이에요? 단군은 그냥 얼마 전에, 몇 백 년 안되잖아요 그냥 이야기에 있는 것을 가지고 단군이 어디 있어요? 우리 조상은 곰이 우리 조상이 아닙니다. 우리 조상은 중국에서 왔어요 인정하고 살아요 중국에 있는 사람들이 이 쪽으로 와 가지고 우리가 이렇게 된 거예요.
일본은 우리나라 백제시대 때 여기서 건너 간 거예요. 일본이 이것도 인정하지 않아서 요사이 야단입니다. 일본의 고고학자 가운데 후지무라 부이사장이 있는데 일본이 잘 살고 어마어마하지만 자꾸만 우리 나라에서 갔다고 하는 걸 없이 하기 위해서 우리 조상이 삼 만 년 전에 살았다고 발굴을 했다는 둥 하는데 이번에 조작을 해서 세상에 6차 발굴을 했는데 6십 만 년 전 원인의 유적이 있었다 31점을 발견했다. 그렇게 발표를 했어요. 일본 조상이 이미 삼 만 년 전에 있었다 석기 시대에 삼 만 년 전에 있었다. 일본은 계속 올라가는 거예요. 삼 만년, 그 다음에는 팔 만 년, 그 다음에는 십 삼 만년, 그 다음에는 삼십 만년, 그렇게 교과서 다 쓰고요. 사람이 이렇게 어리석습니다.
그런데 이 고고학자가 어떻게 했는지 아시지요? 일본 방송국에서 카메라를 비추었는데 집에 있는 토기를 가져다가 땅을 파서 거기다 감추어 가지고 자기가 아무도 모르는 밤에 가서 거기다 묻는 것이 들켰어요. 그래가지고 칠십 만 년 전이다 그러니까 세계 학자들은 또 믿어요. 그래서 사람이 하나님을 떠나 살아가는 것은 이렇게 어리석은 거예요. 사람의 말 하나에 그냥 다 놀아나는 거예요. 그래 고고학자이다 보니 다 그런 줄 알고 '어, 일본은 칠십 만 년 전부터 살았대'. 칠십 만 년은 무슨 칠십 만년이에요. 그래가지고 교과서 다 뜯어고치고 일본은 신용만 잃고 세계 앞에 부끄러운 민족이 된 거예요. 일본은 여기서 건너 간 것이고 우리는 단군, 곰이 아니고요 중국에서 내려 온 거예요.
예수는 잘 믿어야 되고 이런 것은 좀 거절 할 줄 알아야 합니다. 아이들이 단군 앞에 가서 이렇게 우리가 어려서부터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경외해야 세계적인 민족이 됩니다.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얼마나 확실히 믿느냐가 민족의 앞날에 소망이 여기에 달려 있는 거예요. 우리 모두 큰 믿음으로 내 믿음 지키고 이 나라 이 민족의 앞날을 건지기 위해서 큰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나의 삶을 다스리는 법칙
조용기목사 / 롬 4:17
<서론>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나의 삶을 다스리는 법칙」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말을 타고 달리는 사람은 말고삐를 단단히 잡고 말을 운전을 해야 됩니다. 말이 사람을 먼저 알아봐요. 이 사람이 잘타는 사람인지 아닌지 고삐 잡는 것을 알아 보는데 제가 몽골에서 말을 탔는데 고삐를 잡을 줄 모르니까 말이 나를 얏잡아 보고 그냥 뛸려고 하더라. 말도 사람을 알아보는데 하물며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는데 인생의 고삐를 잘 조여서 운전을 하지 아니하면 삶이 진흙 창에 빠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자동차를 운전하는 사람도 핸들을 단단히 잡고 조종해야지 핸들을 잡지 않고서 농담을 하다가는 사고를 내고 마는 것입니다. 인생도 될 대로 되라고 내버려둬서는 안 됩니다. 삶도 우리가 반드시 다스려야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본론>
1. 삶을 잘못 다스리는 사람
삶을 잘못 다스리는 사람들이 많아요. 삶은 우리 현실에 나타나는 것이 원인이 아닙니다. 보이는 환경은 보이지 않은 것에 원인을 두고 있습니다. 부정적인 삶도 환경도 안 보이는데서 출발하는 것입니다. 우리 공기가 안보이잖아요. 그래도 숨쉬고 살고 숨을 그치면 죽잖아요. 우리 모든 의식주 생활이 우리 눈에 보이는 현상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배후에 눈에 안 보이는 것들로 말미암아 원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히브리서 11장 3절에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보이는 것은 현상적인 나타나는 것에 의해서 되는 것이 아니고 안 보이는 배후에 능력으로 말미암아 현재 보이는 세계가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눈에 안 보이는 우리가 세계가 무엇입니까? 우리는 이목구비를 가지고 사지를 가지고 눈에 보이잖아요. 눈에 안 보이는 우리의 존재가 뭡니까? 여러분 생각을 본적이 있습니까? 생각을 못해봤지요? 그러나 우리의 생각이 우리의 운명을 다스린다는 것은 누구든지 부인하지 못하지 않습니까?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 인생이 잘못되고 마는 것입니다. 사람이 늘 생각하기를 '사는게 의미가 없어. 이렇게 살아서 뭘하겠느냐. 아이고 인생 될 대로 되라.' 그런 사람이 무슨 정사를 하겠으며 사업을 하겠으며 교육을 하겠으며 성공적인 인생을 살겠습니까?
'지겨워 꼼짝 못하겠어. 아이고 인생 지겨워. 아이고 몸서리나.' 그 몸서리난 사람이 무슨 좋은 삶을 살 수 있겠습니까? '모든 게 엉망이야. 가정도 엉망이고, 생활도 엉망이고, 사업도 엉망이고, 내 생애가 엉망이야. 어디서 출발해서 어떻게 끝맺을지 몰라.' 생각이 정리되지 않고 혼돈된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반드시 눈에 안 보이는 그 생각으로 말미암아 인생이 망하고 마는 것입니다. '아 나는 이제 지쳤어. 다 귀찮아. 마누라도 귀찮고 자식도 귀찮고, 인생도 다 귀찮아.' 그리고 마약을 하고 술을 퍼먹고 하는 사람 여러분 성공하는 사람 보았습니까? 그 모든 실패가 그의 잘못된 생각에서 나온 것입니다. '살고 싶지 않다. 신물이 난다.'고 말하는 사람 많습니다. 살고 싶지 않고 신물이 나는 사람이 무슨 사는 일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생각이 우리의 운명을 좌우하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모든 사물은 그 사람의 눈에 안 보이는 생각 속에서 나타나는 것을 알고 생각을 조정하지 못하는 사람이 인생을 조정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 6절에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라"
죽고 사는 것이 생각에서 나온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생각을 운전하지 않고는 우리 인생을 바로 갈수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아이고 내 팔자야. 나는 왜 이 모양이냐. 나는 모든 일이 잘 안되고 저주가 오고 고통이 오고 괴로움이 온다." 이 원인이 어디에 있냐. 현실에 있지 않습니다. 남편 때문에, 아내 때문에, 자식 때문에 그렇지 않습니다. 내 때문에 내 생각 때문에 오는 것입니다. 내 생각을 다스리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일이 생기는 것입니다. 생각이 눈에 안 보이는 것과 같이 또 우리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부정적이고 잘못된 꿈도 눈에 안 보이는 것입니다. 사람은 다 꿈을 꾸고 살아요. 잠잘 때 꿈꾸는 것은 적은 부분에 불과한 것입니다. 잠자기 전에 깨어 있는 우리들에게 마음속에 꿈이 있어요. 저는 어릴 때부터 꿈이 있었습니다. 여러분도 어릴 때부터 꿈이 있었을 거에요. 그 꿈이 있다가 사라지기도 하고 그 꿈이 점점 커지기도 하는 것입니다. 오늘도 여러분 마음속에 다 희미한 꿈이라도 꿈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꿈이 없는 백성은 망한다고 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꿈을 통해서 내일이 생산되는 것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어머니가 없이 자식이 생산될 수 없는 것처럼 가슴속에 꿈이 없이 내일이 생산되지 못하기 때문에 꿈이 없는 사람은 내일이 없습니다. 젊은이들이 꿈을 놓쳐 버리면 내일이 없는 젊은이가 되고 가정주부나 가장이 꿈을 잃어버리면 그 가정의 내일은 없습니다. 어떤 국민이든지 내일에 대한 꿈이 마음속에 사라지면 내일은 없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이명박 정부가 들어오고 난 다음 우리 국민들 가슴속에 '내일 잘살게 될 것이다.' 무언가 생활이 나아질 것이라는 꿈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꿈이 있기 때문에 그런 내일이 다가오는 것입니다. '내일은 희망이 없어. 모든 것이 절망이야. 끝장이야.'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고 그런 꿈을 꾸고 있으면 내일은 다가오지 않습니다. 내일은 엉망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러므로 부정적이고 잘못된 꿈을 그리면 내일이 망하고 현실이 망하는 것입니다. 실패한 삶을 꿈꾸지 마십시오. '나는 못되고 안 되고 할 수 없다. 손대는 것마다 실패한다.' 그런 꿈을 마음속에 꾸고 있으면 그 꿈이 여러분 생활 속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나는 늘 젊은이들에게 말합니다. "당신의 꿈을 보여 주십시오. 당신의 미래를 내가 예언해 주겠습니다.
당신 점쟁이 집에 갈 필요 없어요. 사주팔자 볼 필요 없어요. 당신의 마음속에 꿈을 보여 주시면 내가 내일을 말해주겠습니다." 왜, 꿈이 잉태된 사람이 밖으로 그것을 낳게 되기 때문인 것입니다. '나는 소외되고 외로운 인생이다. 아무도 나의 친구가 돼주는 사람이 없다. 나는 버림받은 사람이다. 나는 너무나 외롭다.' 그런 꿈을 왜 꿉니까? 나는 주님이 같이 계시고 나는 교회가면 친구들이 있고 성도들이 있고 환영받고 사랑받는다는 꿈을 꾸는 것이 좋지 외롭고 소외되었다고 꿈을 꾸면 점점 더 외롭고 소외되고 마는 것입니다. 절망적인 자기 모습을 그리면 안 됩니다. 환자가 죽을병에 걸렸어도 죽을 형상을 바라보고 좌절하고 절망하면 곧장 죽습니다. 그러나 살아날 용기를 가지고 살아갈 새로운 꿈을 꾸면 그 꿈대로 이뤄지게 되는 것입니다. 꿈은 위대한 힘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늘 말하기를 "당신의 꿈을 보여 주십시오. 당신의 미래를 당신에게 보여 주겠습니다." 그런 말을 하는 것은 사람이 꿈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꿈이 사람을 만듭니다.
사람이 꿈을 이끌어 가는 것이 아니라 꿈이 사람을 이끌어 가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만큼 꿈이 중요합니다. 교육을 시킬 때 젊은이들 가슴속에 꿈을 심어 주면 그 꿈이 젊은이들을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환경을 가지고와 훌륭한 교육시설을 가지고 있더라도 젊은이들에게 꿈을 심어 주지 못하면 그 교육시설은 아무 소용없는 녹슬은 기계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마음속에 절망적인 모습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희망차고 소망이 넘치고 행복한 모습을 그려야 되는 것입니다.
불행한 자기 모습을 그리고 있는 사람은 항상 불행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나는 왜 이렇게 불행하나. 자식도 문제고, 아내도 문제고, 남편도 문제고, 넘어져도 코 깨지고, 넘어지면 뒤통수가 또 찢어지고.. 왜 일마다 안 되느냐. 짐승을 기르면 짐승이 병들어 죽고, 사업을 하면 사업이 안 되고, 그 원인이 어디 있느냐.' 근본적으로 보면 자기 마음속에 불행한 모습을 가지고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꿈을 잘못 꾸고 있는 것입니다. 그 꿈이 그 길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꿈은 자생력이 있습니다. 꿈을 품고 있으면 꿈이 스스로를 이루는 힘이 있는 것입니다. 좋은 꿈은 좋은 일을 이루지만 나쁜 꿈은 나쁜 꿈을 이루는 자생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아시기 바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정적이고 잘못된 꿈을 그리게 되면 망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0장 10절에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라고 했는데 마귀가 오는 것은 우리 마음속에 잘못된 좌절하는 절망적인 꿈을 꾸게 하는 것입니다. 와서 우리를 그냥 발가벗기고 매를 때릴 필요가 없어요. 마음속에 마귀는 부정적인 생각과 부정적인 꿈을 꾸게 만들어 주면은 자기 스스로가 부정적이고 파괴적인 인생으로 걸어가고 말기 때문에 특별히 외부적으로 상처를 입힐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정적인 꿈은 우리가 단호하게 물리쳐야 되는 것입니다. 또 눈에 안 보이는 것이 뭡니까? 부정적인 믿음인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은 좋은 믿음만 가진 것이 아니라 잘못된 믿음도 있는 것입니다. 잘못된 믿음을 가지면 정말 고약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고 말한 것입니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하심이 없다.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으면 이 산더러 명하여 저 바다에 던져도 된다고 했는데 그 믿음의 역사가 긍정적으로만 역사하는 것이 아니라 부정적으로도 역사하는 것입니다. 나는 실패했다고 믿고 있는 사람은 아무리 좋은 환경에 갖다 놓아도 실패합니다. 자기가 실패했다고 믿고 있는데요. 어떠한 좋은 환경에 갖다 놓고 도움을 베풀어도 그는 실패하고 마는 것입니다. 나는 성공할 가능성이 없다고 믿는 사람에게 돈대주면 큰일 납니다. 다 까먹어 버리는 것입니다. 좋은 지위를 줘도 실패하고 마는 것입니다. 나는 능력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자기는 세상에서 버림받았다고 믿는 사람치고 사람들과 좋은 교제가 이루어지는 것 보았습니까? 나는 버림받은 사람이다. 그러므로 나는 아내에게도 버림받고, 자식에게도 버림받고, 부모에게도 버림받고, 친구들에게도 버림 받았다. 나하고 친하다고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이렇게 부정적으로 믿는 사람에게 누가 와서 친구가 되고 누가 함께 손을 잡고 인생을 살기를 원하겠습니까? 사람들이 자기를 미워한다고 믿는 사람 참 고약합니다. 그런 사람 만나면 전부 적으로 삼고 원수로 삼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운이 나쁘다고 믿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운이 어디서 만들어 집니까? 바로 운이 여러분 속에서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생각을 통해서 꿈을 통해서 믿음을 통해서 운이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운을 환경에다가 맡기지 마십시오. 운은 여러분 속에서 만들어 지는 것이지 바깥에서 만들어서 여러분에게 덮어씌우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에게 운명과 환경을 다스리라고 말했지 운명과 환경의 종이 되라고 말하지 않았었습니다. 성경에는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고 말한 것입니다. 내가 잘못 믿어놓고 잘될 것을 기대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운이 나쁘다고 믿고 있는 사람은 모든 일에 운이 나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믿어서는 결코 안 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 1절에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라고 말한 것입니다.
믿음은 우리 마음에 바라는 것이 이뤄지게 되는 것이고 눈에 안 보이는 것이 이루어질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믿음이 실상이요, 증거인 것입니다. "당신 잘된 증거를 내보내 주십시오." 그러면 믿음을 보여줘야 되는 것입니다. "당신이 성공할 실상을 보여 주십시오." 믿음을 보여줘야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믿느냐가 여러분의 운명을 좌우하게 되는 것입니다.
미국의 어느 초등학교에서 흥미로운 실험을 했습니다. 교사들은 실험에 참석한 아이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최근에 연구한 결과에 보면 눈이 파란 애들이 눈이 갈색인 애들보다 훨씬 실력이 있고 능력이 있어서 학업성적이 좋아진 것을 발견했다. 눈이 파란 아이 손들어 보세요." 손 다 들었습니다. "눈이 갈색인 애들 손들어 보세요." 하니까...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서 성적 결과를 보니까 눈이 파란 아이들이 월등하게 성적이 좋아졌어요. 그리고 눈이 갈색인 애들은 성적이 떨어졌어요. 그런데 교사가 다시 와서 말했습니다. "전번에 우리 실험한 것이 실수였습니다. 사실 알고 보니까 눈이 파란 아이들이 능력이 없는 애들이고 눈이 갈색인 아이들이 실력이 있는 애들입니다. 갈색을 가진 사람 손드세요." 하니까 쫙 손을 들었습니다. 그 다음 얼마 있지 않다가 보니까 성적실적을 보니까 눈이 파란 애들은 성적이 떨어지고 갈색의 애들이 성적이 확 올라갔습니다. 무엇을 믿느냐에 따라서 그 실력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파란 아이들이 실력이 있다가 생각했는데 그리고 꿈꾸고 믿었을 때 실력이 나타난 것입니다. 그러나 눈이 갈색인 애들이 실력이 있다고 새로 발표를 하자 갈색의 애들의 실력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여러분, 그러므로 생각의 방향이 얼마나 우리의 운명을 좌우한다는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자신에 대해 어떠한 믿음을 갖고 있느냐 하는 것은 이처럼 매우 중요합니다. 자기는 실패했다고 믿거나 성공할 가능성이 없다고 부정적인 믿음을 가질 때는 그 결과는 역시 부정적인 결과로써 나타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또 눈에 안 보이는 것이 뭔지 압니까? 눈에 안 보이는 것은 잘못된 입술의 고백인 것입니다. 말 들어 보면 그 사람 어떤 사람인지 알잖아요. 동양 사람들은 될 수 있으면 말을 적게 하라고 말합니다. 서양 사람들은 될 수 있으면 말을 많이 하라고 합니다. 서양 사람하고 동양 사람하고 다른 것이 그게 다릅니다. 서양 사람들은 무슨 일을 할 때 자꾸 말을 하면서 일을 합니다. 그림을 그릴 때도 "머리를 그려야지. 코를 그려야지. 팔을 그려야지. 옷을 그려야지." 말을 하면서 그립니다. 우리 한국 사람들은 입을 딱 다물고 눈을 그리고 머리를 그리고 말하면 잘 안 되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서양 사람들은 자기를 표현하는 말을 많이 하라고 하고 동양 사람들은 머리에 들어 있을수록 말을 많이 아니하고 머리에 깡통이 되면 말을 많이 하고 그런 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하간 말을 잘못하면 인생에 실패하게 되는 것은 말이 우리의 삶의 방향을 결정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제가 늘 말씀 드리는 것처럼 큰 화물선이 파도를 헤치고 항구로 들어가는 것은 눈에 안 보이는 밑에 키가 배를 움직이는 것처럼 성경에는 우리 혀는 적은 것이로되 배의 키와 같다고 말한 것입니다. 혀는 적은 것이로되 말을 움직이는 입에 있는 재갈과 같다고 말한 것입니다. 혀는 적은 것이로되 큰 도시와 산천을 태우는 불쏘시개와 같다고 말한 것입니다. 혀가 그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원망하는 말을 하면 인생을 잘못되게 되는 것입니다. 원망은 완전히 부정적인 세계로 인생을 끌고 가고 반역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원망하면 반역을 하게 돼요. 짜증나는 말을 하면은 자기의 모든 실력을 다 잃어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아이고 몸서리친다. 골치 아파서 못산다. 모든 것이 아주 실증이 난다." 이런 사람이 무슨 일을 하는 것입니까? 분노에 찬 말을 하면은 여러분 파괴적이 되고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요건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분노하지 말아야 되는 것입니다.
최근 유명한 영화배우 한 사람이 교통체증에 걸렸다고 욕을 하다가 73살 먹은 노인이 무슨 젊은 사람이 욕을 하냐고 해서 나가서 때렸다가 개망신을 하지 않았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말 안했으면 그렇게 안될 것인데 분노의 말을 했다가 결국에는 분노로 미움이 들어와서 73살 먹은 노인을 때렸으니 기가 막힌 일이지요.
낙심과 탄식하는 말을 하지 말아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스스로 후퇴하고 물러가는 것입니다. 뒤로 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고 말했는데 낙심하고 탄식하고 못한다고 하고 좌절하고 절망적인 말을 하는 사람은 뒤로 물러가고 성공 못하는 것입니다.
잠언서 6장 2절에 네 입의 말로 네가 얽혔으며 네 입의 말로 인하여 잡히게 되었다고 말한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이 모여서 인생을 실패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여러분, 현실에 나타나는 여러분의 모든 상황은 눈에 안 보이는 생각, 눈에 안 보이는 꿈, 눈에 안 보이는 믿음, 눈에 안 보이는 말 이런 것들이 합쳐서 여러분 인생을 반죽을 해서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미국의 심리학자인 셰드 헴스테더 박사는 인간은 하루에 5만에서 6만 가지의 생각을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한국말에도 오만 생각을 다 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오만 가지 내지 육만 가지 생각을 하는데 이 생각의 75%는 부정적인 생각이고, 25%는 긍정적인 생각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생각을 관리하지 않고 그냥 놓아두면 사람은 누구나 부정적인 방향으로 생각이 기울어지고 부정적인 말을 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또한 이러한 성향 때문에 사람들은 남을 비판하고, 정죄하고, 욕하고, 흉보고, 거짓말하고, 손가락질 하는게 그렇게 재미가 있답니다. 사람의 성향의 75%가 부정적인 말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남에게 상처를 주고, 오해를 가져오는 말을 하기를 좋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남을 칭찬하고 격려하는 말, 용서하는 말, 감사의 말, 위로하는 말 등은 부단히 노력을 해야 이루어지지 가만히 내버려 놓으면 절대로 긍정적인 말을 안하게 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4장 29절에는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노력을 해야 돼요. 원망하고 짜증나는 말, 분노와 낙심에 차서 탄식하는 말 등이 모여 우리 생활을 실패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인생은 현재 눈에 보이는 상황이 우리를 만들어 가는 것이 아니라 눈에 안보이는 우리의 생각이나 꿈이나 믿음이나 말이 현재의 나를 만들었고 장차의 나도 이러한 일들이 나를 만들어 간다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2. 삶을 옳게 다스리는 사람
그러므로 삶을 올바르게 다스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될까요?
여러분의 삶을 올바르게 운전해 나가기 위해서는 생각이 긍정적이고 복된 생각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오늘부터 긍정적이고 복된 생활 하는데 무슨 긍정적이고 복된 생각을 할 꺼리가 있어야 하지요. 내 환경이 부정적이고 불행한데요." 그렇게 말할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은 갈보리 십자가를 바라보면 생각을 바꿀 수가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를 걸머지고 십자가에 청산했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어떻게 새것이 되었어요. 용서받은 의인이 되고, 거룩하고 성령 충만한 사람이 되고, 치료받고 건강한 사람이 되고, 축복받고 형통한 사람이 되고, 부활 영생 천국인이 되는 은총을 갈보리 십자가에서 주님이 주셨기 때문인 것입니다. 몸 찢고 피 흘려서 우리에게 새로운 인생을 주셨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쳐다보고 여러분의 생각이 달라져야만 되는 것입니다. 달라질 수 있습니다. 내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풍성하게 얻는 내가 된 것을 생각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생각이 나를 만들어 가기 때문에 생각을 바꿔야 되는 것입니다. 지킬만한 것보다 내 마음을 지켜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나온다고 말했기 때문에 마음에 생각을 지켜야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바라보고 생각을 바꿔야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4장 10절에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예수님 십자가에 죽은 것을 몸이 짊어지라는 것입니다. 아예 아침부터 저녁까지 짊어지고 예수를 통해서 내 옛사람이 청산되고 새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늘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복 많은 사람이다. 예수님 믿었기 때문에 인생에 좋은 일이 생겨난다. 나는 성공한다. 나는 하나님이 함께 계셔서 도움을 받는다." 생각이 그렇게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 28절에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모든 것이 합력한다. 좋은 것은 좋아서 좋고, 좋지 않은 것은 좋게 만들어 주실 것이 좋고, 모든 것이 좋아진다는 생각을 하는 것이 긍정적인 생각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삶을 올바르게 다스리는 사람은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는 사람인 것입니다.
2001년에 노벨상 수상자에 관한 연구 기록이 출판되었습니다. 연구 결과에 의하면 노벨상을 수상한 사람들이 성공하는데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은 '긍정적인 생각'이었다고 말한 것입니다. 자기는 노벨상을 탈 수 있다는 긍정적인 생각이었다는 것입니다.
정신과 의사 데이빗 호킨스는 긍정적인 생각을 가진 상태에서 힘을 테스트하는 실험을 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긍정적인 생각을 가질 때 근육이 더 강해지고 부정적인 생각을 할 때 근육은 약해진다."는 것입니다. 신체운동을 연구하는 존 다이아몬드의 조사에 의하면 역도 선수들은 무거운 것을 들기 전에 성공적인 결과를 상상하고 있는, '이미지 트레이닝'을 하는 것이 기본적인 훈련이라고 말합니다. 실제로 하기 전에 마음속에 이미지 트레이닝을 합니다. '내가 60kg, 100kg 120kg를 들 수 있다.' 이미지 트레이닝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게 굉장히 중요해요. 옛날에 저는 초등학교, 중등학교, 고등학교 다닐 때 800m 선수였었습니다. 쫙 스타트 라인에 서서 800m를 뛰기 전에 언제나 마음속에 생각합니다. '내가 저 골인 선에 1등으로 들어간다.'는 마음에 생각을 하고 늘 이미지네이션을 하는 것입니다. 내가 1등 골인하는 내 모습을 바라보고서 뛰면 능력 있게 뛸 수 있는데 그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면 능력이 나타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결과를 생각하고 뛰어야만 되는 것입니다. 좋은 일이 일어난 결과를 생각하고 뛰어야 나쁜 일도 다스릴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삶을 옳게 다스리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 생각을 잘 다스려야 합니다. 나는 복이 많은 사람이다. 좋은 일이 생긴다. 나는 성공한다. 할 수 있다, 하면 된다, 해 보자. 하나님이 도와 주신다 같은 긍정적이고 복된 생각을 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리고 복된 꿈을 꿔야 돼요. 얻어맞는 꿈꾸지 마십시오. 넘어져서 진흙창에 빠져서 온몸에 칠갑을 하는 꿈을 꾸지 마십시오. 진짜 꿈도 여러분 한상 잘 차려먹고 깨어나면 기분이 좋지 않습니까? 맑은 물에 목욕하고 깨어나면 기분이 좋지요. 사람들에게 칭찬받고 사랑받고 꿈을 깨어나면 참 좋지요. 꿈, 실제적인 꿈도 우리 생활 속에 굉장한 영향력을 미치는데 우리의 마음에 그리는 그림이 꿈인 것입니다. 여려분, 사람들은 모두 다 마음에 그림을 그립니다. 자기 마음에 그림을 그려요. 비참한 그림을 그리기도 하고 아름답고 찬란한 그림을 그리기도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요사이 카메라를 가지고서 사진을 찰칵찰칵 찍으니까 마음에 사진기에 자기 모습을 사진 찍는 셀프 이미지 사진을 찍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복된 꿈을 꿔야 된다. 복된 사진을 찍어야 돼요. 내 마음속에 내 자화상을 복된 모습으로 걸어 놓아야지 일그러진 모습으로 걸어 놓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모든 일이 잘되는 꿈을 꾸십시오. 젖과 꿀이 흐르는 삶을 산다고 상상 하십시오. 인정받고 사랑받는 자화상을 가지십시오. 기적이 일어나는 것을 꿈꾸십시오. 무엇이든지 긍정적이고 적극적이고 창조적인 꿈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꿈에 취해서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술 취하면 방탕하지만 꿈에 취하면 내일이 아름다운 역사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항상 두 가지 꿈을 꾸고 살았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유수한 교회를 세우는 꿈하고, 온 천하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증거 하는 꿈을 꾸었었습니다. 한시도 그 꿈을 버린 적이 없습니다. 좋을 때도 어려울 때도 잘될 때도 못될 때도 유수한 교회를 세우고 온 천하만국에 나가서 복음을 증거 하겠다는 두 가지 꿈을 꾸었는데 오늘 50년의 세월이 지나고 난 다음 그 꿈이 다 이루어진 것입니다. 마음속에 꿈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에베소서 3장 20절에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생각하고 꿈꾸는 것이 넘치도록 능히 하시는 것입니다. 얻어먹으러 가도 그릇이 있어야 얻어먹지 담을 그릇이 없으면 못 얻어먹습니다. 하나님께 은혜를 받는 그릇이 바로 생각이요, 꿈이 그릇이라는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왕 마음속에 꿈을 그럴 바에는 긍정적인 꿈을 그리라는 것입니다. 나는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풍성히 얻는다는 긍정적인 꿈을 십자가를 통해서 꿀 수가 있는 것입니다. 답답하고 괴롭고 슬플 때마다 여러분 예수 십자가 앞에 나가서 무릎을 꿇어 기도하고 십자가를 바라보십시오. 저 곳에 내 새사람이 있습니다. 새로운 인생이 있는 것입니다. 내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새사람이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운명을 사람이 바꾸지 못하지 않습니까? 그 운명이 십자가에 바꾸어져 있는 것입니다. 이미 주님께서 대책을 세워 놓은 것입니다. 십자가를 바라보고 생각을 바꾸고 꿈을 바꾸면 인생이 바꾸어집니다. 십자가의 보혈로 그림을 새롭게 그리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이제는 긍정적으로 믿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계심을 믿으면 얼마나 좋습니까? 사람이 함께 계신 것도 좋지만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신다. 이 얼마나 마음이 듬직하고 좋은 것입니까?
저는 해외에 나가서 수만, 수십만, 수백만 군중들 앞에서 설교할 때가 많습니다. 굉장히 마음에 공포심이 오고 두려움이 옵니다. 왜냐하면 내가 잘못하면 한국 망신, 내 망신, 하나님 망신, 망신을 여러번 하기 때문에 굉장히 신경이 쓰이고 조심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호텔에서 대게 3시간에서 5시간 엎드려서 기도를 하는데 "왜 그렇게 오래 기도하느냐." 하나님이 같이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저 수많은 군중들 앞에 설 때 하나님이 같이해 주시옵소서.' 그래서 기도를 많이 하고 강단에 올라가면 마음속에 하나님의 임재하심이 뜨끈뜨끈한 아랫목 같이 느껴지면 두려움이 전혀 없습니다. 불안도 없고요. 담대하게 설교할 수 있는데 아 여행에 바빠 가지고서 미쳐 기도할 여가 없이 얼굴 세수하고 옷 갈아입고 그냥 강단에 뛰어 들어가면 마음에 찬바람이 술술 불어 오는게 하나님 어디 계십니까? 천지 찾아봐도 하나님도 안계시고 마음에 불안과 초조해서 말을 하면 입이 자꾸 딱딱 입술이 말라붙고 천정에 혀가 붙고 말을 아주 더구나 우리말도 안하고 외국어로 하니까 쥐 뜯어 먹은 말이 나오고 죽을 고생을 하거든요. 그러므로 제가 잘 알기 때문에 3시간 내지 5시간 기도하지 않고는 결코 대중 앞에 서지 않으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같이 계신 것을 알 수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같이 계신다는 느낌만 가지면 어떠한 대책을 세울 수도 있고 어떠한 일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긍정적으로 믿어야 되는 것입니다. 좋은 일이 일어날 것을 믿으십시오. 나쁜 일이 일어날 것을 믿으면 안 됩니다. 좋은 일이 일어날 것을 믿으십시오. 내가 넘어지고 자빠져도 결국에는 좋은 일이 일어난다고 믿으십시오. 그러면 그것이 좋은 일이 일어나는 계기가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건강해지고 행복해질 것을 믿으십시오. '나는 병들 것이다. 약할 것이다. 나는 불행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믿으면 안 됩니다. '건강해질 것이다. 나는 행복해질 것이다. 나는 더 좋게 될 것이다.' 왜, 십자가가 있기 때문에 보증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갈보리 십자가에서 우리의 저주를 대신 짊어졌기 때문에 우리는 축복을 믿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 대신 죽었기 때문에 우리는 살 것을 믿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은총이 얼마나 큰지 여러분 상상을 초월합니다. 사람들은 십자가를 버리고서 헛된 일을 하고 있습니다. 십자가에 들어가서 내 생각과 꿈과 믿음이 달라지면 내 운명이 달라지고 내 말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바라보고 긍정적으로 안 믿을 수가 있어요? 성공하고 잘될 것을 믿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로마서 4장 17절에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하나님이라.
죽은 자도 살리시고 없는 것을 있게 하시는 하나님이 우리와 같이 계시면 우리가 두려워하고 놀랄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자동적으로 우리가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긍정적으로 꿈꾸고 긍정적으로 믿으면 긍정적인 입술의 고백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말이 나올까요? "인생은 멋진 거야, 살 맛 난다. 살맛나. 두 사람 먹다가 한 사람 죽어도 모르겠다." 사람 문화라는 것은 달라요. 우리 한국사람 맛있는 것 먹을 때 둘 먹다가 한 사람 죽어도 모르겠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것 일본에서 제가 목사님들 모여 가지고서 식사하면서 너무나 맛이 있어서 "야, 둘 먹다가 한사람 죽어도 모르겠네." 하니까 자꾸 나를 따지고 달라듭니다. "왜, 한사람이 죽느냐." 그러는 거에요. 둘이가 먹는데 왜 한사람이 죽느냐고 그래서 "아이고 너무 맛있어서 한사람 죽는 것도 모르겠다." 하니까 "왜 맛이 있는데 한 사람 죽는 것 모르느냐."고 그럽니다. 사람이 문화가 다르니까 이해가 안돼요. 그래서 제가 이제는 일본 가서 둘 먹다가 한사람 죽어도 모른다는 말 절대로 안합니다. 설명을 할 수가 없어요. 자꾸 캐묻기 때문에.. 그러나 인생은 멋진거야. 살맛나. 야, 둘이 먹다가 한사람 죽어도 모르겠네. 그 얼마나 맛있다는 것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모든 일이 좋고, 또 좋아진다. 좋은 일이야. 모든 일이 좋아진다. 걱정할 것 없다. 낙심하는 아들 등허리 턱턱 두드리면서 "야, 걱정하지마라. 다 좋아진다. 잘된다. 하나님이 계신데 무엇이 못될 것이냐. 희망이 있다. 잘된다." 그렇게 말하는 것이 좋지 않습니까? 또 그대로 되는 것으로 말을 그렇게 하면 "나는 행운아야. 나는 행복해. 나는 기분이 최고로 좋다." 그러면 기분이 최고로 좋아져요. 자꾸 앉아 가지고 "나 기분 나쁘다. 기분 나쁘다. 에이 기분 나쁘다." 하면은 좋은 기분도 싹 나빠지고 마는 것입니다. 하늘에 구름 끼듯이 싹 마음에 부정적인 구름이 끼어요. 그러나 "나는 기분이 좋다. 나는 행복하다. 나는 행운아다."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송하고 기도하면 구름이 싹 그치고 태양이 쫙 마음속에 비취게 되는 것입니다. 쨍하고 해뜰 날이 다가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8장 18절에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보십시오. 풀고 매는 것이 우리에게 달린 것입니다. "하나님이 왜 나를 이렇게 만들어 놓습니까? 하나님이 왜 날 버렸습니까?" 그렇게 말하지 말고 성경에는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이고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린다. 땅에서 부정적으로 매면 하늘에서 부정적으로 이루게 하시고 땅에서 긍정적으로 매면 하늘에서 긍정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먼저 시작해야 하나님이 역사해 주신다는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1947년 전보 배달원으로 일하고 있는 12살 난 한 소년이 있었습니다. 그는 열심히 땀을 흘리며 전보를 들고서 집집마다 배달을 해주었습니다. 그런데 보통 배달을 하면은 다른 사람은 그냥 전보를 받고 고맙다는 말을 하고서 그냥 문 닫고 들어가는 것입니다. 한집에 전보배달을 하는데 사람이 나와서 전보를 받고 난 다음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야, 너 굉장히 똑똑하고 총명하게 보이는구나. 지금은 전보배달을 하지만 세월이 지나면 너는 온 세계에 희망을 주는 사람이 되겠다." 그 말 한마디가 마음에 충격을 주었습니다. 스코틀랜드에서 이민 와서 맨발벗고 사는 가난한 처지에 전보배달원의 소년의 마음속에 끓어올랐습니다. '야, 이분이 나를 알아주는 구나. 지금은 전보배달을 하고 있지만 장차는 온 세계가 알아주는 희망을 주는 사람이 되겠다.' 휘파람을 불고 그는 새로운 생각과 새로운 꿈과 자기 자신에 대한믿음을 가졌습니다. 그 사람이 장차 누가 되었느냐. 미국의 카네기 강철 왕이 되고 세계적인 부호가 된 것입니다. 그는 나중에 부호가 되고 난 다음에도 자기에게 희망을 준 그 말 한마디가 자기에게 새로운 생각과 꿈과 믿음을 가질 수 있게 만들어 주었다고 말한 것입니다.
여러분 말 한마디를 해도 올바르게 해줘야 되는 것입니다. 사람을 만나더라도 격려하고 위로해 주는 말이 얼마나 필요한지 모릅니다. 저같이 50년을 목회를 하고 온 천하만국에 다니는 사람도 낙심이 될 때 평범한 우리 교회 구역장, 지역장이 와서 용기와 힘을 주는 말 한마디 하면 그 말이 굉장히 힘이 되고 용기가 되는 것입니다. 본인은 별 수 없는 말을 했다고 하지만 듣는 나에게는 굉장한 힘과 용기가 되는 것입니다. 어떨 때는 몸이 피곤하고 연약해서 기운이 쭉 빠지는데 아 나른하네.. "야, 목사님 요새 얼굴이 참 좋은데요? 무슨 좋은 약을 먹는가 봐요. 아주 건강해 보이는데요?" "아 그래요?" 당장 화장실 들어가서 거울한번 들여다보고 '아, 정말 건강해지는구나. 얼굴에 광체가 나고 아, 감사하다.' 그 지역장, 구역장 지나가면서 하는 말, 나에게 아부하려고 하는 말인지도 모르겠지만 그러나 진짜도 좋고, 가짜도 좋고, 격려해 주는 말이 굉장히 힘이 돼요. 그날 하루 종일 힘 있게 이럽니다. 그러나 나에게 잘 해 준다고 하는 말을 하는 사람들도 있어요. 진짜로 말해 줍니다. '아이고 요사이 많이 늙었네요. 주름살도 많이 지고 기운이 참 없어 보이는데 그만 집에 가서 드러누워 쉬시지요.' 그 말하고 나가면 '아이고 내가 힘이 없는가보다.' 화장실에 가서 거울에 내 얼굴을 보며 '아이고 많이 늙었구나. 아이고 집에 들어가자. 가서 그냥 드러눕자. 오늘 아무것도 안하겠다.' 완전히 기가 빠지는 것입니다. 기가 들어오고 기가 빠지는 것이 여러분의 입술의 말로써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아야 됩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왕 말할 바에야 가족들에게나 이웃들에게 용기와 힘을 주는 말을 하고 희망을 주는 말을 하지 사람의 기를 뽑는 말을 안 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하나님
우리가 눈에 보이는 우리 인생은 눈에 안 보이는 일들이 우리를 만든다는 것을 알면은 우리 인생을 잘 운전해 갈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바로 생각과 꿈과 믿음과 말을 통하여 그 촌 영감을 변화시켜 놓은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여러분 정말 초등학교도 못나온 낫 놓고 기억자도 모르는 촌 영감입니다. 갈디아우르에서 목장의 목동으로써 자란 사람인 것입니다. 이 아브라함이 기독교의 조상도 되고, 유대교의 조상도 되고, 이슬람교의 조상도 되고 요사이 정신문화를 뒤흔드는 위대한 분이 된 것입니다. 학교도 못나왔는데 하버드도 못나오고, 예일도 못나오고, 고려대학도 못나오고, 요사이는 고려대학 나와야 어깨에 힘을 주는데 고려대학도 못나오고... 서울대학도 못나오고 한세대학도 못나온 사람인데.. 그런데 이런 촌 영감이 어떻게 위대하게 되었느냐. 단순하게 인생을 변화시키는 법칙을 사용했기 때문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불러 내셔서 하룻밤에 하늘을 쳐다보고 별들을 헤아렸었습니다. 별들을 헤아리고 난 다음에 하나님이 말씀하기를 "네 후손이 하늘의 저 별들같이 많으리라." 그를 통해서 그가 인생을 살아가는 법칙을 하나님이 깨닫게 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은 없는 아들을 있는 것같이 많은 자식의 아비같이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자식도 없이 나이가 100살이 가까우고 아내는 아흔 살이 가까워 오는데 빈손 들고 인생을 떠나게 되는데 어떻게 할까요 하는 그에게 자식을 준 것이 아니라 생각을 바꿔 놓은 것입니다. 하늘을 쳐다보고 별들을 헤아려보고 네 자손들이 별들처럼 많을 것으로 생각하라. 우리보고 십자가를 쳐다보라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누구든지 저를 바라보고 믿는 자마다 구원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쳐다보고 바라보는 것 얼마나 중요합니까? 바라보고 생각이 바꿔지는 것이니까 아브라함이 하늘에 별들을 헤아리기 시작하자 그 마음속에 자기 자손들이 별들처럼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되고 생각이 달라지고 슬픔이 사라지고 마음이 기뻐지고 긍정적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별들같이 많은 자식을 상상하게 된 것입니다. 자기가 눈만 감으면 별들이 하늘에 꽉 찬 것처럼 자식들이 온 세계 퍼져가서 아버지 아브라함이여라고 고함치는 소리가 귀에 들리는 것 같습니다. 여러분 우리도 간접적으로 영적인 아브라함의 자손 아닙니까? 유대인의 육의 자손들이고,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은 영적인 아브라함의 자손들인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예수님이 오셨고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가 구원 받았으니 아브라함은 우리에게도 할아버지가 되는 것입니다. 이 촌 영감이 출세했어요. 보통 출세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나타나서 믿음의 법칙을 가르쳐 주셨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는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생각하고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바라보는 그러한 하나님의 법칙을 깨달아 알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창세기 15장 5절에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이르시되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아브람은 하나님의 기적을 믿은 것입니다. 그는 생각이 달라지고 꿈이 달라지고 믿음이 달라진 것입니다. 기적을 믿었습니다.
로마서 4장 18절로 22절 다 같이 소리 내어 한번 읽어 보십시다.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그러므로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하나님이 약속한 것을 믿었습니다. 눈에는 아무 증거 안보이고 귀에는 아무 소리 안 들리고 손에는 잡히는 것 없어도 믿으라는 것입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여러분이 이성적으로 이해하기 때문에 믿는 것이 아닙니다. 감각적으로 느끼기 때문에 믿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말씀했기 때문에 무조건하고 믿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은 계시적인 믿음을 믿습니다. 주님이 주신 말씀이 계셨기 때문에 말씀을 믿는 것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다고 말씀한 것입니다. 말씀을 우리가 아브라함처럼 믿어야 되는 것입니다.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은 것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은 것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 지지 아니하고 하나님이 하늘의 별과 같이 땅에 모래 같은 자손 줄 것을 믿고 하나님께 감사드린 것입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기적을 베풀어 주신 것입니다. 그뿐 아닙니다. 마지막으로 말을 바꾸게 했지 않습니까? 아브람, 아브라함으로, 사래를 사라로 아브라함은 많은 민족의 조상이요, 사라는 많은 자식의 여주라고 창세기 17장 5절에 내가 너를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게 하였다 했고
창세기 17장 16절에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를 여러 민족의 어머니가 되게 하리라
말로써 그들의 삶에 운명을 방향을 바꾼 것입니다. 절망에서 소망으로 패배에서 승리로 무자에서 자식이 있는 부모로 달라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무리 우리가 생각을 바꾸고 꿈을 바꾸고 믿음을 바꾸어도 말로써 부인해 버리면 깽판 되고 마는 것입니다. 말 잘못하면 여태까지 생각 바꿔 놓은 것 긍정적으로 꿈꾼 것 긍정적으로 믿는 것 다 지워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말이 눈에 안 보이는 영향력 중에서 가장 중요합니다. 말을 통해서 우리가 생각하고 말을 통해서 꿈꾸고 말을 통해서 믿습니다. 말을 통해서 우리가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은 모든 것의 중심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아브람에서 아브라함, 많은 민족의 조상이라는 이름으로 사래를 사라로 이름을 바꾸신 것입니다. 하루 종일 이름을 부르기 때문에 이름이 바꾸어지므로 말미암아 긍정적으로 시인하게 만들어 준 것입니다. 우리 한국 사람은 집에 들어가서 부부간에 여보 그러지 이름 안 부르잖아요. 우리 집에서도 이름 안 불러요. 우리 집사람 날보고 "용기야" 안 그래요. 저도 "성혜야" 안 그래요. 우리 동양의 습관은 부부간에 여보라고 말하지 이름은 안 부르지만 이 중동이나 서양에 가면은 부부간에 이름을 불러요. 아브라함, 사라. 많은 민족의 조상이여, 많은 자식의 어머니여,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늘 불렀습니다. 그게 중요해요.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자. 따라 말씀하세요.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자. 없는 믿음을 있다고 있는 것처럼 말하고 없는 거룩함을 있는 것처럼 말하고 없는 건강을 있는 것같이 말하고 없는 복을 있는 것같이 말하고 믿음으로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말할 수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잠언서 18장 21절에 "죽고 사는 것이 혀의 힘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혀의 열매를 먹으리라"
보세요. 죽고 사는 권세가 혀에 있는 것입니다. 혀가 얼마나 우리의 운명을 좌우하는데 큰 힘이 있는지 모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혀에서 방정을 떨면은 아무것도 안 되는 것입니다.
<결론>
인생은 현실은 끊임없이 눈에 안 보이는 내 생각과 꿈과 믿음과 언어가 옷 입고 나오는 것입니다. 놀랬지 하고 나오는 것이 누구냐. 내 생각이 꿈이 믿음이 언어가 현실이라는 옷을 입고 나오는 것입니다. 지금이 싫으면 생각을 바꾸십시오. 꿈을 바꾸십시오. 믿음을 바꾸십시오. 말을 바꾸십시오. 그러면 지금은 사라지고 새로운 세계가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바라보고 일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아무 이유 없이 여러분 생각을 바꾸고 이유 없이 꿈을 바꾸고 이유 없이 믿음을 바꾸고 이유 없이 말을 바꿀 수가 없는 것입니다. 소도 언덕이 있어야 문지른다고 우리가 무슨 바꿀 조건이 있어야 되지 십자가가 우리에게 그 조건을 제시해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날 위하여 몸 찢고 피 흘려서 옛사람을 청산하고 새롭게 만들어 주셨기 때문에 십자가 때문에 나는 생각을 바꿀 수가 있고 십자가 때문에 새로운 꿈을 꿀 수가 있고 십자가 때문에 내가 새로운 믿음을 가질 수가 있고 십자가 때문에 나는 긍정적이고 적극적이고 창조적인 말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십자가가 우리 중심에 꽉 들어서야 되고 예수 주인 것을 몸에 걸머지고 우리는 매일같이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십자가를 통하여 변화된 우리 인생이 태어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를 처음 만든 것처럼 두 번째 새로운 인생은 십자가를 통하여 만들고 계신 것입니다. 지금도 십자가를 통하여 하나님은 여러분과 나를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가장 이상적인 인생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풍성하게 얻는 인생들을 하나님은 여러분의 생각과 꿈과 믿음과 언어를 통해서 만들어 가고 계신 것입니다. 성령이 여러분을 통해서 창조적인 역사를 베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책임을 하나님께 돌리지 마십시오. 책임을 여러분께 돌리고 여러분이 변화를 받으면 하나님이 변화의 역사를 이루어지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 기도드리겠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 우리의 믿음
롬 4:13~25 / 정용섭목사
오늘 설교 성경 본문인 롬 4:13~25절에는 파격적으로 들리는 문장이 여럿 나옵니다. 우선 롬 4:15절을 보십시오.
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하나니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법도 없느니라.
율법은 헬라어 ‘노모스’의 번역입니다. 헬라어-영어 사전에는 노모스가 법이라는 뜻의 ‘law’로 나옵니다. 법조인이 되는 학교를 가리켜서 ‘로스쿨’이라고 하는데, 거기에 나오는 단어가 바로 법이라는 뜻의 노모스입니다. 우리는 법을 공동체의 토대로 여깁니다. 법이 없으면 세상이 무법천지로 변할 수 있습니다. 위에서 인용한 바울의 문장만 보면 법이 인간의 삶을 오히려 파괴합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관점과는 반대되는 진술입니다. 바울은 왜 이렇게 극단적으로 말하는 것일까요?
바울은 그리스의 고린도에서 선교 활동을 하던 기원후 56년 초에 로마서를 집필했습니다. 당시의 기독교는 오늘의 교회와 크게 달랐습니다. 교회가 아직 기본적인 골격이나 내용을 갖추지 못했습니다.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겨우 첫발을 옮기기 시작한 어린아이와 같습니다. 그 미래가 어떻게 될지 불확실합니다. 바울은 세계의 중심 도시인 로마의 기독교인들과 협력하여 복음을 유럽 전역에 전하고 싶었습니다. 로마를 거쳐서 스페인까지 가고 싶다는 생각을 로마서에 피력할 정도입니다. 이런 선교 프로젝트를 실현하려면 우선 로마 교회와 돈독한 신뢰 관계를 쌓아야 합니다.
신뢰 관계는 그 무엇보다도 신앙의 정체성에서 확보됩니다. 그 신앙의 정체성에서 핵심은 율법입니다. 오늘 우리 눈에는 이상하게 보이지만, 당시에는 율법에 대한 견해 차이가 컸습니다. 기독교의 주류라 할 수 있는 예루살렘 교회는 가능한 한 유대교와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고 싶었기에 유대교가 요구하는 율법 준수를 대체로 받아들였습니다. 예루살렘 교회 구성원들이 태생적으로 유대교인들이었다는 점에서 보면 이는 자연스럽습니다. 당시 교회가 처한 현실에서 보더라도 그들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의 세력이 워낙 약하니까 로마 제국으로부터 공인받고 있던 유대교의 도움이 절실했습니다. 유대교가 기독교의 보호막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와 달리 바울은 이방인 기독교인들도 할례와 토라를 준수해야 한다는 예루살렘 교회의 입장을 탐탁지 않게 생각했습니다. 비주류였던 바울은 자기를 지지해줄 세력이 없어서 이 싸움에서 밀려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그런 상황에서도 율법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알고 있었기에 과감하게 율법이 ‘진노’를 불러온다고 발언한 겁니다.
아브라함의 믿음
바울은 논리적으로 뛰어난 사람입니다. 무조건 율법을 부정하거나 나쁘다고 매도하는 게 아닙니다. 유대인의 조상인 아브라함이 하나님에게서 의롭다고 인정받은 근거를 먼저 거론했습니다. 13절을 보십시오.
아브라함이나 그 후손에게 세상의 상속자가 되리라고 하신 언약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오직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
구약성경에서 아브라함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합니다. 창 15장에 따르면 아브라함은 자식이 없었기에 하인 중에서 믿을만한 사람인 엘리에셀을 상속자로 삼았습니다. 하나님은 엘리에셀이 아니라 아브라함과 사라 사이에서 태어날 아이가 상속자가 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밤하늘의 별처럼 많은 후손을 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어서 가나안 땅도 약속하셨습니다. 지금도 유대인들이 가나안 땅을 자기들 소유라고 주장하는 근거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 약속의 근거가 율법에 있는 게 아니라 믿음에 있다는 사실이 여기서 핵심입니다. “언약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오직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 이 진술은 창 15:6절을 인용한 것입니다. 아브라함 시대에는 율법 자체가 없었습니다. 율법은 수백 년 역사가 흐른 뒤에 모세 시대에 나왔습니다. 율법은 물론 중요합니다. 그러나 바울이 보기에 하나님의 약속은 모세의 율법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근거합니다.
바울은 오늘 성경 본문 18~21절에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자세하게 설명합니다. 아브라함은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다.”라고 합니다. 아브라함과 아내인 사라는 아이를 낳기에는 나이가 너무 많이 들었습니다. 그런데도 밤하늘의 별처럼 많은 후손을 주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다는 겁니다. 이를 19절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아브라함이 백 세나 되었는데도 그 믿음이 약해지지 않았다고 말입니다. 20절과 21절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다시 강조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믿음은 더 견고해졌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했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을 오해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자식이 없는 사람이 기도하면 자식을 준다거나, 직장이 없는 사람이 기도하면 좋은 직장을 주시는 분이라고 말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기복주의가 아니고 광신이 아닙니다. 자신에게 자식과 땅이 생긴다는 사실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었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아브라함이 믿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바울은 17(후)절에서 독특한 문장으로 설명했습니다.
그가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시니라.
하나님에 관한 개념 규정이 여기서 두 가지로 나옵니다. 하나는 “죽은 자를 살리심”이고, 다른 하나는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심”입니다. 앞의 말은 부활을 가리키고, 뒤의 말은 창조를 가리킵니다. 서로 통하는 진술입니다. 두 번째 규정이 재미있는 표현입니다. 철학적으로 들립니다. ‘없는 것’은 무(無)이고 ‘있는 것’은 존재입니다. “왜 무는 없고 존재하는 것들은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은 철학적으로 아주 오래되었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질문할 뿐이지 대답은 모릅니다. 현대 철학과 현대과학도 세상의 존재 근거와 이유를 다 설명하지 못합니다. 2백만 년 전 호모 에렉투스가 등장하여 오늘 우리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그 과정을 고고학적으로 확인할 수는 있으나 왜 그렇게 진화해야만 했는지는 알지 못합니다. 지구를 인간이 아니라 다른 생명체가 지배할 수도 있었습니다. 진화 과정을 통해서 인간이 반드시 출현해야만 할 궁극적인 이유를 찾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를 아무도 계산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존재의 신비를 가리킵니다. 성경은 이런 존재의 신비에서 하나님을 경험했습니다. 죽은 자를 살리고 비존재를 존재하게 하는 분이라는 표현이 바로 이 경험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았기에 아브라함은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바랄 수 없는 중에서도 하나님의 약속을 믿을 수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문제는 하나님이 누군지 실감하지 못한다는 데에 있습니다. 하나님에 관해서 가끔 생각하거나 말하기는 하지만 막연합니다. 죽음과 삶의 문제, 무와 존재의 관계에 관해서 관심이 깊지 않으니 어떻게 하나님을 바르게, 실감 나게, 갈망하면서 믿을 수 있겠습니까?
믿음의 의
바울은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로움을 얻었다고 22절에서 말합니다. 이 문장을 기억해두십시오.
그러므로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
의로 여겨졌다는 말은 생명을 얻었다는 뜻입니다. 믿음으로 생명을 얻었다는 사실이 분명하다면 율법으로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율법주의자들의 주장은 오류입니다. 오류에 매달려서 살면 생명을 잃습니다. 의로움을 얻지 못합니다. 자신이 인생을 걸었던 대상에서 의로움을 얻지 못한다면 “장고 끝에 악수 둔다.”라는 바둑 격언처럼 진노를 이룬 겁니다. 지금 여러분의 인생은 어떻습니까? 혹시 진노를 불러오는 인생길을 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아니길 바랍니다.
진노라는 단어는 은유입니다. 율법대로 사는 삶이 전혀 가치가 없다는 게 아닙니다. 설교 도입부에서 말씀드렸듯이 오늘 우리가 사는 세상의 작동 원리는 (율)법입니다. 국회와 법원과 검찰과 기업체 등등, 이 세상의 모든 조직은 법으로 돌아갑니다. 법을 지키지 않으면 사회가 카오스에 떨어집니다. 시민들이 법을 잘 지키는 삶은 필요합니다. 율법이 진노를 불러온다는 말은 율법으로는 의로워지지 않는다는 사실에 대한 은유입니다. 이게 실제 우리 삶에서 무슨 뜻인지는 우리가 이미 경험적으로 잘 알고 있습니다.
교회 생활을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어떤 교회가 50억 원을 모아서 꿈에 그리던 교회당을 건축했다고 합시다. 그런 일을 성취하는 과정에서 감동적인 일도 많을 겁니다. 모두가 흡족하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교회당 건축으로 영혼의 만족은 불가능합니다. 건축이 계획대로 잘 끝나는 그 순간만 잠시 흥겨울 뿐이지 계속되지 않습니다. 비싼 아파트에 입주했다고 해서 행복이 보장되지 않는 거와 같습니다. 교회당 건축을 무리하게 추진하면 오히려 교회 생활에서 어려움이 늘어납니다. 그것으로 영혼의 만족이 안 되니까 인간적인 만족감이라도 채우려고 서로 경쟁하게 됩니다. 교회당 건축으로 신자들 사이에서 나쁜 감정의 골이 깊어지는 일은 흔합니다.
이런 설명이 여전히 멀게 느껴지는 분들이 있을 겁니다. 영혼의 만족이나 의로 여겨졌다는 말이 뭐지, 하고 말입니다. 그 말은 하나님과 결속되었다는 뜻입니다. 비유적으로 농사를 생각해보십시오. 그 농사꾼은 평생 흙에서 흙과 함께 살았습니다. 다른 사람은 느끼지 못하는 흙의 힘을 그는 느낍니다. 손으로 흙을 만지면 영양과 수분 상태를 압니다. 그에게 흙은 살아있는 생명체입니다. 그는 흙에 대해서 의로워진 겁니다. 흙을 통해서 생명을 얻은 겁니다. 농사꾼이 흙에 전적으로 의존해서 살 듯이 아브라함은 죽은 자를 살리고 없는 것을 존재하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에 전적으로 의존해서 살았습니다. 의로움을 얻은 것입니다.
사람은 똑같이 한 인생을 지구에서 삽니다. 대개 비슷한 수준에서 삽니다. 평균 80~90년 정도 삽니다. 돈이 많으나 적으나 하루에 두 끼나 세 끼 먹습니다. 하루에 숨 쉬는 양도 비슷합니다. 사장으로 사나 현장 노동자로 사나 큰 차이는 없습니다. 여러분의 삶을 끌어가는 가장 궁극적인 목표는 무엇입니까? 삶의 기준이 무엇인가요? 인생의 목표를 이루셨는지요. 각자의 인생살이를 제가 평가하려는 게 아닙니다. 정말 소중한 삶의 차원을 혹시 놓치고 있는 건 아닌지가 염려스러울 뿐입니다.
오늘 바울의 표현을 빌리면 그 소중한 차원은 하나님의 의입니다. 하나님에게서 인정받는 일입니다. 하나님과 결속되는 일입니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에게 왜 그런 말을 하느냐, 이미 하나님을 잘 믿고 있는데, 하고 속으로 불편하게 생각하는 분들이 계실지 모르겠군요. 교회 다녀도, 아니 교회에 다니기에 오히려 우리는 하나님의 의에서 멀어질 수 있습니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은 율법에 묶이기 쉽기 때문입니다. 바울도 원래 율법주의자였습니다. 여러분 각자 자신에게 질문해보십시오. 하나님이 우리의 믿음을 의로 여기신 경험이 있는지 아닌지를 말입니다. 죽은 자를 살리고 무(없는 것)를 존재하게 하는 하나님의 창조 능력에 사로잡힌 경험 말입니다. 그런 경험이 없거나 희미하다면 여러분은 인생살이에서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으나 결과적으로 가장 중요한 것을 눈치채지 못하거나 외면한 사람입니다. 그런 상황에서도 크게 불편을 느끼지 않고 살아갈 수는 있습니다. 그게 바로 진노를 이루게 한다는 의미가 아닐까요?
우리의 믿음
바울은 하나님에게서 의로 여김을 받은 아브라함의 믿음이 기독교인들에게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23절과 24절에서 설명했습니다.
그에게 의로 여겨졌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아브라함이 믿은 하나님과 우리 기독교인이 믿는 하나님은 같은 분이십니다. 그 하나님은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분이라고 바울은 말합니다. 그 믿음으로 우리는 아브라함처럼 똑같이 의로워질 수 있습니다. 영혼의 참된 안식을 얻을 수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아브라함의 믿음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믿음도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는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기는 힘듭니다. 그의 부활도 믿기 힘듭니다. 십자가 죽음을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부활을 이해하고 믿는 사람도 많지 않습니다. 교회에 다니지 않는 현대 지성인들 대다수는 십자가와 부활을 냉소적으로 대합니다. 경험론에 붙들려서 자기가 경험한 실증 외에는 인정하지 않는 태도입니다. 이게 옳은가요? 바울은 25절에서 십자가와 부활을 다음과 같이 두 가지로 설명합니다.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첫째, 바울은 우리의 죄로 인해서 예수가 십자가에 달렸다고 말했습니다. 예수의 십자가는 우리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때만 믿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예수 십자가에서 아무런 감동도, 삶의 능력도 경험할 수 없습니다. 둘째, 바울은 우리를 의롭다 하기 위해서 예수가 살아났다고 말했습니다. 부활은 우리의 실존이 의롭지 않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때만 믿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자신이 의롭다고 여기는 사람은, 즉 자기 자신의 힘으로 자기 삶을 완성할 수 있다고 여기는 사람에게는 예수 부활이 남의 이야기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믿음은 저절로 생기는 게 아닙니다. 믿음은 아주 특별하고 위대한 사건입니다. 오죽했으면 아브라함도 바랄 수 없는 중에 믿었다고 했겠습니까. 우리가 지금 살아있으나 실제로는 죽은 자이며 동시에 없는 것(無)이라는 사실을 인정할 때만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은 생명의 빛으로 우리 영혼을 환하게 비춥니다. 그 빛이 있어야만 믿음이 가능하고 그 믿음이 여러분을 의롭게 합니다. 그렇습니다. 그 믿음이 여러분을 하나님의 생명 안으로 끌어들일 것입니다.
오직 믿음
>성경본문|
롬04장 13절 ~ 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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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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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 처|
강성찬목사
>비 고|
>첨부파일|
XX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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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롬 4:13) 아브라함이나 그 후손에게 세상의 상속자가 되리라고 하신 언약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오직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
블론딘이라고 하는 사람은 곡예사였는데, 그는 막대기 하나를 손에 들고 미국쪽과 캐나다 사이에 걸어놓은 줄을 타고 거센 몰살과 폭포가 휘몰아치는 나이아가라 폭포를 건너가곤 하였습니다. 어느 날 그가 줄을 타고 미국 쪽에서 캐나다 쪽에 도착하자마자, 수많은 관광객들이 환호하였습니다. 블론디는 자신에게 환호를 보내고 있던 관광객을 향해서 질문을 하였습니다. "여러분! 제가 다시 한번 이 막대기를 들고 미국쪽으로 건너갈 수 있다고 믿습니까?" 사람들이 여지 저기에서 "예, 믿습니다. 당신이 다시 줄을 타고 건너갈 수 있다고 믿습니다"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러자 블론디는 앞자리에 앉아있던 어린 꼬마들에게 "그러면 여러분들도 내가 다시 미국 쪽으로 건너갈 수 있다고 믿으십니까?" "예, 아저씨는 할수 있어요" 그때 그는 다시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가 이 앞에 있는 소년들 중, 한 소년을 업고 건너갈 수 있다고 믿습니까?" 대답소리가 아까보다는 덜 요란했습니다. 그러나 상당수의 사람들이 "당신은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믿습니다." 어린 꼬마들도 막 소리쳤습니다. 그러자 소리치는 꼬마에게 "얘야! 네가 업혀라" 그러나 그 소년은 업히지 않았습니다. 또 다른 꼬마에게 "그러면 네가 업힐래?" 그러나 그 꼬마도 주저하였습니다. 그때, 어떤 꼬마 하나가 "아저씨, 저는 아저씨를 믿어요. 제가 업힐께요"하는 것이었습니다. 드디어 천진난만한 어린 꼬마가 그를 믿고 등에 업혔고, 그는 안전벨트를 하여 잘 묶은 다음, 다시 막대기를 들고 미국 쪽으로 건너가는데 성공했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께 인정 받습니다
(롬4:3)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느니라
(히 11:6)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미국의 대통령 가운데 아이젠하워라는 대통령은 어려서 너무 가난했습니다. 아이젠하워 어머니는 너무너무 가난하고 부모님이 돌아가셔서 외할아버지 댁에서 살았습니다. 외할아버지 외할머니가 얼마나 믿음이 좋은지, 자기 외손녀를 데려다가 학교는 보내지 않고 교회를 사랑하고 교회에 보냈습니다. 주일학교를 다니게 해서 성경을 늘 가르쳐주고 외우게 했습니다. 학교 공부도 열심히 해야 되지만 교회에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 어려서부터 그것을 축복으로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그 어머니는 처녀 때에 외할아버지 댁에서 성경을 많이 외웠습니다. 외운 성경만 600절 이상입니다. 단어도 600절을 외우려면 쉽지 않은데 그렇게 성경을 많이 외워서 하나님 말씀으로 훈련을 받고, 결혼해서 아이젠하워를 낳았는데 이 아들에게 또 신앙교육을 잘 시켰습니다. 가정예배를 드리면서 하나님 말씀을 잘 지켰습니다. 아이젠하워는 어려서 가난하니까 사관학교를 들어가서 등록금을 내지 않고 공부를 했습니다. 1차 대전이 일어났을 때 소위가 됐습니다. 군에 가서 소위가 되어도 얼마나 믿음이 좋은지 전차 안에, 탱크 안에 아이들을 주일이면 꼭 데려다가 성경을 가르치며 하나님을 말씀을 지켰다합니다. 2차 대전 때에는 이미 세계의 모든 연합군의 책임자가 되어서 전 세계 연합군 사령관이 되었습니다. 늘 기도합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믿습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성공한 분도 아이젠하워입니다. 한국전쟁도 휴전을 이끈, 이 전쟁이 오래 갈 터인데 이것을 끝낸 분도 아이젠하워입니다.
신앙의 사람, 믿음의 사람입니다. 아이젠하워는 성경 한 구절을 늘 품고 있었습니다. 날마다 외우는 성경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슥 4:6) 그가 내게 대답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스룹바벨에게 하신 말씀이 이러하니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 하신 말씀입니다.
힘으로도, 능으로도, 권력으로도 못살고, 이 세상의 어떤 군사적인 힘으로도 승리할 수 없지만 하나님을 믿는 믿음만 있으면 이 세상을 승리할 수 있습니다.
1959년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소련의 흐르시초프를 초청했습니다. 9월 27일, 그날은 주일이었습니다. 흐르시초프에게 교회에 가자고 간절히 이야기를 했으나 공산주의는 교회가, 하나님이 원수이고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것 이것이 첫째인데, 하나님을 믿는 것 이것을 물리쳐야 되니, 교회에 가자 그러니까 갈 리가 있겠습니다. 안 갔습니다. “오늘은 주일이니까 나와 함께 교회에 갑시다.” 한마디로 거절했습니다. 그래서 아이젠하워는 말했습니다. “제가 교회에 다녀올 때 까지, 예배드릴 때까지 한 시간 반만 기다려주십시오.”라고 했습니다. 예배를 마치고 흐르시초프를 만났습니다. “한 시간 반 동안 무엇을 했습니까?” 이렇게 물었습니다. 그때 흐르시초프가 대답했습니다. “내가 한 시간 반 동안 생각을 한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나를 이렇게 먼 길에 초청을 해 놓고 나를 떠나서 아이젠하워가 교회에 갔다 와서 내게 무슨 핑계를 댈까?” 이것을 생각했다는 겁니다. “나를 데려다 놓고 교회에 간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그때에 아이젠하워가 말했습니다. “예배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습니다. 아무리 흐르시초프를 제가 초청해서 귀하지만 예배보다 귀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 하나님이 함께 하는 사람,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하나님께 인정 받는 것이 정말 제일 귀한 줄로 믿고 살므로 복된 은총을 누리게 됩니다.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습니다
(롬 4:5)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롬 3:28)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뉴웰(W.R.Newell)목사님이 세인트루이스에서 집회를 하였습니다. 하루는 로마서 4장 5절을 가지고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하시는 하나님"을 소개했습니다. 집회가 끝나고 한 사람이 찾아왔습니다. 집회가 끝나고 한 사람이 찾아 왔습니다. 그 사람은 자신이 죄를 많이 지은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무엇을 해야 구원을 받을지 모르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여러 사람에게 물어보았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성경 읽으라면 성경 읽고 기도하라면 기도하고 구제하라면 구제했다고 합니다. 그래도 여전히 불안하여 견딜 수 없다고 하면서 무엇을 해야할지 가르쳐 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뉴월 목사가 말했습니다. "오늘 제가 한 설교를 못 들었습니까? 로마서 4장 5절을 다시 보십시다.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 시나니... 이만 하면 됐지요?" "아니 뭐가 됐다는 겁니까? 제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되죠?" "「일을 아니할지라도」를 읽으세요. 무슨 행위로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행위가 없어도, 경건치 않아도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으로 구원받습니다. 그 사람은 고개를 끄덕이고 돌아갔습니다. 그 다음 날이었습니다. 어제 그 사람이 간증을 하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앞에 나와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분! 제가 명언 하나를 소개하겠습니다. 저는 수많은 명언을 만났지만 이번에 발견한 것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롬 4:5) 하신 말씀이 최고의 명언입니다. 과거에는 제가 무엇을 해야 구원 얻는 줄 알고 잠을 못 이루었지만 이제는 믿는 자를 의롭다 하신다는 사실을 깨닫고 너무 감격하여 잠을 못 잤습니다. 저의 인생은 이제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멀린 케로더스라는 목사님이 있습니다. 그분은 [감옥생활에서 찬송생활로]라는 유명한 책을 쓰신 분입니다. 그 책을 보면 이 목사님은 인생의 굴곡이 많은 생을 살은 분이었습니다. 그는 부끄러울 정도의 과거를 가진 분입니다. 그는 감옥을 마치 자기 집을 드나들 듯이 하던 분이었습니다. 그가 감옥생활을 하던 중, 한번은 모범수로 가출옥 혜택을 받아, 잠시 동안 자유를 누릴 수가 있었습니다. 감옥으로 다시 돌아갈 때가 점차 다가오자 그의 마음은 무거웠습니다. 그래서 가출옥 기간을 연기해보려고 담당검사를 찾아갔습니다. 검사에게 찾아온 용건을 말하자, 그는 깜짝 놀라면서 “아니, 당신은 아직 그 사실을 모르고 있습니까?” 그러면서 검사는 말하기를 “멀린 케로더스씨, 축하합니다. 투르먼 대통령께서 당신을 특별 사면했소. 당신의 모든 전과 기록이 말소되었으니, 이제 나가서 새사람으로 행복하게 사십시오” 그는 처음에 그 말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었습니다. 그는 아무 것도 일한 것이 없었지만, 무조건적으로 사면을 받은 것이었습니다. 그의 모든 죄과는 말소되었습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이것이 선물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어약의 상속자가되고 영육간에 부요해 집니다.
(롬 4:13) 아브라함이나 그 후손에게 세상의 상속자가 되리라고 하신 언약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오직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
(약 2:5)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지어다 하나님이 세상에서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상속으로 받게 하지 아니하셨느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으신 언약은 율법보다 430년 앞서 주어졌습니다.
[창 17:4-8] 보라 내 언약이 너와 함께 있으니 너는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될지라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를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게 함이니라 내가 너로 심히 번성하게 하리니 내가 네게서 민족들이 나게 하며 왕들이 네게로부터 나오리라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및 네 대대 후손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 내가 너와 네 후손에게 네가 거류하는 이 땅 곧 가나안 온 땅을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후에 생긴 율법이 이미 주어진 언약을 취소할 수 없었습니다
(갈 3:17)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하나님께서 미리 정하신 언약을 사백삼십 년 후에 생긴 율법이 폐기하지 못하고 그 약속을 헛되게 하지 못하리라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은 율법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에 따라 된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약속은 율법에 선행하며, 약속의 원리를 따르는 자는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약속의 원리는 '믿음'뿐입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던 것이지 율법에 근거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롬 4:16) 그러므로 상속자가 되는 그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 이는 그 약속을 그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 하심이라 율법에 속한 자에게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에게도 그러하니 아브라함은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
(히 11:7)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이지 않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준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따르는 의의 상속자가 되었느니라
'상속자'란 일차적으로 (창 17:8) 내가 너와 네 후손에게 네가 거류하는 이 땅 곧 가나안 온 땅을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하신 말씀대로 가나안 땅을 그의 후손이 유업으로 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보다 포괄적인 의미로는 (창 17:4) 보라 내 언약이 너와 함께 있으니 너는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될지라 하신 말씀대로 아브라함은 '열국의 아비'이므로, 그의 신앙의 자취를 따르는 모든 민족이 후사가 되며 유업을 이을 자가 됩니다
(갈3:29)너희가 그리스도의 것이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합니다.
따라서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인하여 모든 땅의 족속들이 복을 받으리라는 보증'(Hendriksen)과 관련됩니다.
상솢가가 되었으니 정죄 받지 않습니다
세계 역사를 살펴보면, '디오네시우스' 라는 아주 악한 황제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자기 궁전 근처에 땅굴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굴을 개발해서 자기의 모든 노예들을 그 속에 집어넣고, 그리고 기독교를 믿는 많은 사람들을 그 속에 집어넣었습니다. 그리고는 혹독한 핍박을 가하고 심한 노동을 시킵니다. 거기에는 감시하는 사람이 없으니까... 거기에 있던 노예들은 그 속에 갇혀 있으면서 황제한테 온갖 욕설을 퍼붓습니다. 요즘말로 하면 욕설로 스트레스를 푸는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황제가 그 땅굴 입구 근처를 가는데 이상한 소리가 막 들립니다. 그래서 귀를 기울여서 조용히 들어보니까, 그 밑에 있던 노예들이 전부 자기를 향해서 온갖 저주와 욕을 하고 있는 것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황제는 화가 치밀어서 참다못하여 하인을 불러서 거기에 있는 사람을 한 사람씩 불러서 밑에서 한 욕을 그대로 반복하게 했습니다. 안 하면 매질을 하니까... 안할래야 안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노예들은 그곳에서 한 대로 그대로 재현을 합니다. 그러면 그 욕한 정도에 따라서 처참하게 죽음을 당하게 되는.... 이런 사건들이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선하신 왕이시기 때문에 우리 인간이 아무리 악한 행동을 해도, 하나님을 섭섭하게 해도, 하나님의 마음에 상처를 주어도, 하나님은 이 악한 디오네시우스와 같이 우리를 그렇게 징벌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확신케 합니다
어느 교회에 유명한 대학의 생화학자이며 의학박사인 교수가 나왔습니다. 그는 예수 믿으러 나온 것이 아니라 부인을 감시하기 위해 나왔습니다. 의처증이 심해서 부인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하는데 교회까지 따라나왔습니다. 그리고 조용히 앉아 설교를 듣는데 믿으려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어느 날 목사님이 그 교수를 만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얻으라고 전도를 했습니다. 그랬더니 교수님이 이렇게 말하더랍니다. 제가 목사님의 설교를 들으며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아십니까? 목사님 참 불쌍하다. 생긴 것은 멀쩡한데 설교는 늘 바보 같은 말만 하는구나. 생화학적으로 의학적으로 볼 어찌 처녀가 잉태하여 아이를 낳을 수 있는가? 어떻게 죽은 예수가 사흘 만에 부활할 수 있단 말인가? 사람이 죽어서 사흘이면 세포가 와해되고 피도 썩는데 어떻게 다시 산단 말인가? 이런 이야기를 듣고 좋다고 하는 사람들도 한심하다 제가 이런 생각하고 앉아 있습니다." 과학자다운 말이었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 크리스마스가 되었습니다. 그 교수님은 아내를 감시하기 위해 여전히 따라다니고 있었습니다. 그날 목사님은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을 설교하였습니다. 그 교수님은 아예 믿지 않을 것이므로 관심도 두지 않고 설교했습니다. 그런데 예배 후에 사무실에 가보니 그 교수가 눈물을 닦고 있었습니다. 부부싸움을 했느냐고 물으니 그렇지 않다고 하면서 하는 말이 "목사님, 오늘 설교를 듣고 있으려니 갑자기 가슴이 뜨거워지면서 말씀이 믿어졌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말씀을 듣는 가운데 믿음과 확신이 생겼던 것입니다. 그후 교수는 신실한 기독교인이 되었습니다. 의심하던 동정녀 탄생을 증명하는 교수가 되었습니다. 그분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처녀가 아기를 낳을 수 있습니다. 생화학적으로 제가 증명할 수 있습니다. 양서류 동물은 개구리나 뱀은 수컷이 없어도 바늘로 알을 찔러주든지 전기로 쇼크를 주면 새끼가 되어 나옵니다. 하물며 성령이 임하셔서 쇼크를 주면 처녀도 아이를 낳을 수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믿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영육간에 부요케 하십니다
로스앤젤레스에 가면 유명한 유대인 노인이 있다고 합니다. 이 노인은 길을 걸어 다니며 항상 중얼거린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하여 물어 보았습니다. "영감님, 무엇 때문에 길을 걸어 다니며 중얼거리십니까?" 그랬더니 그 노인이 유명한 말을 하였습니다. "나는 이제 나이가 많이 들어 하나님의 일을 할 수도 없고 후손들을 위해서도 특별히 할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내가 모세에게 말한 바와 같이 너희 발바닥으로 밟는 곳은 모두 내가 너희에게주었노니(수 1:3) 라는 말씀이 있어서 그대로 순종하는 것입니다."하더랍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이 그 노인이 밟고 다니는 곳에 유대인들의 상가가 들어서고 유대인들이 부동산을 취득하더라는 것입니다.
종교개혁주일을 맞았습니다. 종교개혁의 표어가 오직 그리스도 오직 성경 오직 은혜 오직 믿음입니다.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성도로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께 인정 받으며 의롭다 함을 받고 언약의 상속자로 부요함을 누리며 사명 감당하는 모두가 됩시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으십시오
롬 4장 13~25절 / 김준범목사
복음에는 여러 주제들이 있는데, 그 중에서도 제일 먼저 인간의 죄와 비참의 문제를 꼽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서에서 인간의 죄와 비참과 사망의 문제를 제일 먼저 다루었습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습니다(롬 3:10).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완전한 의인으로 내세울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롬 3:23). 하지만 복음은 인간의 죄와 비참과 사망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길이 있음을 선언합니다. 우리는 그 길을 알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 길은 우리의 생각을 뛰어넘는 것이고, 우리의 방법을 넘어서는 것이고,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 길을 우리에게 친히 알려주시기를 기뻐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언약, 곧 복음 약속이었습니다. 언약이란 하나님께서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친히 구원해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의 선언입니다. 하나님은 그 언약(은혜 언약)에서 우리에게 구원을 약속해 주셨으며, 심지어 그 구원을 우리에게 값없이 선물로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이 선물은 우리가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요 영광스러운 선물입니다. 구원이라는 선물 안에는 죄 사함도 있고, 의롭다 하심도 있고, 영원한 생명도 있고, 하나님의 자녀와 백성 되는 놀라운 권세도 있고, 천국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예비하신 구원은 이 세상의 그 어떤 고귀한 것들보다 더 고귀하고 값비싼 것입니다. 이 선물은 우리의 힘으로는 도저히 마련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이 놀라운 선물을 우리 자신의 것으로 받아 누릴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그것이 나를 위하여 예비된 선물이라는 것을 믿고, 감사함으로 그 선물을 받아서 우리 자신의 것으로 삼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행함으로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시겠다고 약속하실 때 우리는 그 선물이 우리를 위하여 예비된 것인 줄 알고 감사함으로 받으면 됩니다. 하나님이 주시면 우리는 믿음으로 받습니다.
행함이 아니라 믿음으로, 율법이 아니라 약속으로 된다(13-16절)
바울은 이신칭의 교리를 입증하기 위해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세상(만유)의 후사가 되리라고 하신 언약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오직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이었음을 언급합니다(13절).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신 것은 아브라함이 율법을 잘 행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율법이 주어진 것은 아브라함의 때로부터 430년이 지난 후인 모세의 때였습니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아브라함에게 그 언약을 “믿도록”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도 만일 율법(즉, 율법의 행위)에 속한 자들이 세상의 상속자들이 될 수 있다고 한다면 믿음은 헛것이 되고 우리를 구원해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도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14절). 누군가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겠다고 약속한다면, 우리는 그 약속을 믿고 받아들기만하면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어떤 행동을 조건으로 구원을 약속하신 것이 아니라 은혜로 구원을 베풀어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이니 우리는 믿음으로 그 약속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됩니다.
율법을 행함으로 구원을 얻을 수는 없었습니다. “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하나니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함도 없느니라”(15절)고 하셨습니다. 율법은 우리에게 구원의 복과 유업을 가져다줄 수 없습니다. 율법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정죄와 진노만을 불러일으킬 뿐입니다. 하나님의 율법이 우리에게 들려지고 주어질 때마다, 우리의 죄와 불순종만 더욱 드러나게 됩니다. 율법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의 법을 위반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죄란 결국 하나님의 법을 위반하는 것이 아닙니까? 죄는 하나님의 진노를 불러일으킵니다. 이런 의미에서 율법이 없다면 죄 짓는 일도 없으며, 율법은 하나님의 진노를 이룰 뿐입니다. 율법은 죄를 드러내고, 죄를 정죄하며,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가지고 옵니다. 따라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은혜에 속하여 상속자가 되는 것은 믿음으로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이 약속을 주셔서 이것(상속)을 그의 모든 후손에게, 곧 율법에 속한 자에게 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이 가졌던 믿음을 가진 사람들에게도 주실 것을 확실하게 하시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우리 모두의 조상입니다”(16절, 개인 번역). 언약은 처음부터 믿음의 문제였기 때문에, 율법을 받은 자들에게나 율법을 받지 못한 자들에게나, 할례자에게나 무할례자에게나, 믿음만을 요구합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는 믿음이었다(17-22절)
이제 바울은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던 것을 언급합니다(17-22절). 아브라함이 가졌던 믿음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는 믿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창 15:5)고 약속하셨고, 아브라함이 그 약속을 믿었을 때에 하나님은 그것을 의로 여기셨습니다(창 15:6). 하나님께서는 또 다시 아브라함에게 할례를 명하시면서 “내가 너로 열국의 아비가 되게” 할 것이라고 말씀하셨고(창 17:5), 그때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약속을 믿는 믿음의 표로 할례를 행했습니다(창 17:22-27).
이처럼 아브라함은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습니다(18절). 아브라함이 약속을 받았을 때 그의 나이는 99세였고, 사라의 나이는 89세였습니다(창 18:11-14). 인간적으로 생각할 때에 그 약속은 믿을 수 없는 약속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습니다. 그것을 약속하신 이가 바로 하나님이셨기 때문에 아브라함은 그 약속을 믿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17절) 분으로 알고 믿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신실하심을 믿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 약속을 친히, 능히, 그리고 기꺼이 이루실 것을 믿었습니다. 바로 그것을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의로 여기셨습니다(19-22절). 아브라함의 믿음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었고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는 믿음이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아브라함은 훗날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는 명령도 지체하지 않고 순종할 수 있었습니다(히 11:17-19).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선하심과 신실하심을 믿었기 때문에, 그의 금생과 영원을 하나님께 맡길 수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을 의로 여기신 것은 아브라함만 아니라 우리도 위함이다(23-25절)
이렇게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23-24절)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아브라함이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기록된 것은 예수 우리 주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게 될 모든 성도들을 위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구원의 선물을 받는 것은 행함으로가 아니라 믿음으로 받는 것임을 알게 하시려고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자 표본으로 기록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의 대속 공로에만 의존합니다.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25절). 예수님께서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기 때문에 이 모든 것이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위하여 자기를 죽음에 내어주셔서 우리의 죗값을 대신 치르고 또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능의 능력으로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살아나셨음을 믿는 모든 자들은 구원의 놀라운 선물을 얻을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약속을 믿으십시오. 이 구원의 선물을 마다하지 말고 받아 여러분 자신의 것으로 누리십시오. 누구든지 그리스도에게로 오면 삶을 얻을 것이며 그리스도와 함께 만유의 후사가 될 것입니다. 이것은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됩니다.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롬 4장 13~25절 / 김창환목사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 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롬 4:18).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형제들이 와서 네게 있는 진리를 증언하되 네가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하니 내가 심히 기뻐하노라 내가 내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함을 듣는 것보다 더 기쁜 일이 없도다"(요삼 1:2-4).
한 가정이 일시적으로 많은 재물을 소유하거나 일시적으로 건강하거나 또는 육신적인 것만 형통하는 것은 결코 하나님의 축복이 아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계속해서 자손 대대로 이어져야 한다. 하나님의 축복은 영육 간에 계속하여 형통의 길로 인도되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후손이 바로 '아브라함의 후손'이다. 아브라함의 후손은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요삼 1:2)라는 복을 구체적으로 받은 후손이다. 우리들도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후손'이 되었으므로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처럼 바랄 수 없는 중에도 바라는 믿음을 소유함으로써 자손 대대로 복을 받는 가정을 만들어 가자.
1. 우리가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을 때 영적으로 받는 복이 있다. - '네 영혼이 잘됨 같이'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 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롬 4:18).
1)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되어 주셨다.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마 22:32).
2) 아브라함의 믿음을 의로 여겨주셨다(롬 4:9).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그러므로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롬 4:21-22).
3) 아브라함에게는 하나님의 계획을 알려 주셨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 아브라함은 강대한 나라가 되고 천하 만민은 그로 말미암아 복을 받게 될 것이 아니냐”(창 18:17-18).
2. 우리가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을 때 육신적으로 받은 복이 있다. - 네가 범사에 잘되고
"아브라함이나 그 후손에게 세상의 상속자가 되리라고 하신 언약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오직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롬 4:13).
1) 강한 나라가 되게 하셨다.
“아브라함은 강대한 나라가 되고 천하 만민은 그로 말미암아 복을 받게 될 것이 아니냐”(창 18:18).
2) 아브라함의 생활에 범사의 복을 주셨다.
“여호와께서 나의 주인에게 크게 복을 주시어 창성하게 하시되 소와 양과 은금과 종들과 낙타와 나귀를 그에게 주셨고”(창 24:35).
3) 장수의 복을 받았다.
“아브라함의 향년이 백칠십오 세라”(창 25:7).
4) 그 후손까지 복을 받았다.
(1) 이삭 (2) 야곱 (3) 요셉 (4) 다윗 (5) 아브라함의 혈통을 통하여 예수님께서 탄생하셨다(마 1:1) (6) 나(우리)
3. 우리가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을 때 명예적인 복과 내세적인 복이 있다. - 강건하기를
“그러므로 상속자가 되는 그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 이는 그 약속을 그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 하심이라 율법에 속한 자에게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에게도 그러하니 아브라함은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롬 4:16).
1) 하나님 앞에서 모든 사람의 조상이 되었다.
“너희가 그리스도의 것이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갈 3:29).
2) 천국에서도 구원받은 자의 대표자가 되었다.
“그가 음부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눅 16:23). 아브라함의 품은 나사로만 아니라 구원받은 모든 자들이 들어가서 쉴 곳이다.
결론: 아브라함처럼 바랄 수 없는 중에도 바라고 믿는 가정을 만들어 가자.
아브라함만큼 끊기 어려운 것을 끊도록 요구받은 사람도 없을 것이고, 아브라함만큼 순종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아브라함이 받은 복을 생각하기 전에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의 신앙생활'을 본받아서 실천하기 위하여 힘쓰는 가정을 만들어 가자.
믿음의 길을 가라
로마서 4:13-25 / 김상원목사
여러분은 믿음이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믿음의 구성요소는 신념/신뢰/헌신입니다.
신념은 동의하는 것입니다. 신뢰는 동의한 것을 행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헌신은 내가 믿는 진리를 위하여 나를 기꺼이 드리는 것을 말합니다. 믿음은 동의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헌신까지 하는 것입니다.
가짜 믿음은 예수님을 지식으로만 믿고, 주님의 뜻대로 행하지 않습니다. 진짜 믿음은 예수님을 알고 인격적으로 신뢰하고 헌신합니다.
오늘 읽은 성경 본문은 우리에게 아브라함의 믿음이 우리 믿음이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합니다.
아브라함은 참된 믿음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참된 믿음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참된 믿음은 하나님과 교제하며 성령으로 인도함을 받습니다. 아브라함의 삶이 실수나 잘못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는 언제나 하나님을 따르고자 했습니다. 본문에서 하나님은 우리가 가져야 할 믿음이 어떠해야 하는지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믿음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것입니다.
본문 13절에 “아브라함이나 그 후손에게 세상의 상속자가 되리라고 하신 언약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오직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언약은 구두로 이루어진 약속입니다.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이 세상의 상속자가 된다고 하신 하나님의 언약은 율법이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성취된 것입니다. 만일 율법과 선한 행위로 언약이 이루어졌다면 아브라함과 하나님의 언약은 진작에 파기되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고 하갈을 통해 자손을 얻으려고 한 것은 언약이 파기될 수 있는 사건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사라의 실수에도 다시 찾아와서 예전의 언약을 다시 확인시켜 주십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믿음의 길로 계속해서 나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율법에 속한 자들이 언약의 상속자라면 믿음으로 하나님을 붙잡았던 사람들은 헛것을 잡은 것이 될 것입니다. 인간은 율법을 온전히 지킬 수 없기 때문에 상속은 커녕 하나님의 진노만 커질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을 주신 것은 시내 산에서 모세에게 율법을 주시기 전이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과 아브라함의 언약은 율법이 아닌 믿음을 토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이것을 통하여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약속을 이뤄주실 것을 믿는 믿음입니다. 우리가 믿음을 가질 때 하나님과 관계와 신뢰가 온전히 세워집니다.
인간은 종교적인 행위나 선한 행위로 온전히 하나님을 믿고 나아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은 것같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기도할 때 응답을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치유 받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만 받는 것이 아닙니다. 병 고침도 받습니다. 물질적으로 부하게 되는 믿음도 있고, 문제를 해결하는 믿음도 있습니다.
그 믿음을 여러 방면에서 사용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믿음을 주셨으므로 자기가 믿음이 있는 자라는 것을 항상 확인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음에서 오기 때문에 믿음이 자라도록 하나님 말씀을 가까이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여러분이 만들어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것입니다. 평소에 말씀을 읽고 기도하여 성령 충만하면 믿음이 자랍니다. 시험과 환난을 믿음으로 이기므로 믿음이 자라는 것입니다.
신자에게 가장 귀하고 보배로운 믿음을 활용할 때, 먼저 여러분이 소원하는 꿈을 꾸세요. 그 꿈이 이루어지는 것을 마음속에 바라보세요. 꿈을 이루는 것이 믿음으로 됩니다.
아브라함은 하늘에 별들같이 많은 자손이 일어날 것에 대해 꿈을 꾸고 믿었습니다.
여러분들도 바라는 것이 이루어진 것을 마음에 꿈꾸고 그걸 바라보고 하나님이 이루어 주실 줄 믿습니다.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말하는 것입니다.
“큰 산아 평지가 될지어다! 문제는 해결될지어다!
병은 물러가라! 사업은 이루어질지어다!” 이렇게 믿음의 말로 창조적인 명령을 내릴 수 있어야 합니다.
조용기 목사님은 믿음을 성취하기 위해 세 단계를 소개합니다.
“첫째, 꿈을 가지자. 둘째, 믿자. 셋째, 입술로 고백하자!” 이 세 가지를 통해 믿음은 자라고, 활동하고, 기적을 이루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기적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게 되므로 믿음이 자랍니다.
삶에서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이 꿈꾸고 믿고 입술로 명령하는 것을 이루시려고 기다리십니다.
둘째로, 믿음은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는 것입니다.
언약의 성취로 상속자가 되는 것은 오직 믿음입니다. 믿음의 후손들은 약속의 성취를 받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본받아야 합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죽은 자를 살리는 부활의 믿음이었습니다.
17절에서 “기록된 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가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시니라”고 하였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이런 부활의 믿음이 있었기에 이삭을 하나님께 제물로 바칠 수 있었습니다.
18절에서 아브라함의 믿음은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는 믿음”이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이 같은 믿음이 있었기에 100세까지 자식을 기다릴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인간 이성으로는 미련한 것입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는 믿음이 있었기에 기다릴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19-20절에서 “그가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이렇게 말씀합니다. 믿음은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배울 믿음이 바로 이러한 믿음입니다. 아브라함이 가졌던 부활의 신앙으로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것입니다.
죽은 인간이 다시 살아난다는 것은 인간의 이성으로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는 아브라함의 믿음으로 우리는 큰 고난이 와도 낙심하거나 포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는 아브라함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험악한 세상을 이길 힘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을 죽여 번제로 드리려고 하면서도 하나님이 아들을 살려주셔서 그를 데리고 돌아올 것을 믿었습니다. 믿음은 논리로만 설명할 수 없습니다. 때로는 인간의 논리를 뛰어넘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셋째로, 아브라함의 믿음은 우리로 예수님을 믿게 합니다(23-25절).
본문 23-24절에 “그에게 의로 여겨졌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이렇게 말씀합니다.
바울은 아브라함의 칭의를 우리와 연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값없이 믿음으로 의롭다고 여김을 받은 자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베풀어 주신 은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은 모든 사람에게도 동일하게 임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택하여 부르신 것처럼 우리를 부르신 것, 예수님을 믿게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에베소서 2:8-9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바울은 우리의 구원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갚을 수 없는 은혜를 주셨습니다. 때로는 우리의 연약함이 은혜를 받은 자의 모습으로 살지 못하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며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내 삶의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내게 어려움이 있을 때 가능성과 희망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믿음을 지켜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 힘으로 안 될 때, 희망이 보이지 않을 때 믿음을 지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믿음이란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는 것이라면 불가능한 상황일 때가 더욱 믿음을 사용해야 할 때요 기회입니다. 내 힘으로 안 될 때, 빈손으로 걸을 때 그때가 하나님이 일하시는 때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것입니다. 믿음은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브라함의 믿음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로 받아 누리는 것입니다.
